|
광풍무(169)
[소용돌이]
삼월 보름, 사령계 개파대전과 함께 전해진 소식으로 무림은 발칵 뒤집혔다.
전쟁소식이었다. 강호를 주시하고 있던 많은 무인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던 탓이다. 사령계 개파대전이 막 끝난 상황이고, 전쟁을 치르기에는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전쟁이라니.
더욱 놀라운 사실은 선제공격을 감행한 곳이 무림 세력 중 가장 약하다고 평가된 광풍성이라는데 있었다.
천하제일인이라 불라는 천붕십일천마가 가세해 있다지만 광풍성 무인들은 기껏 사천여 명. 수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열세인 곳이다.
전쟁에 대비하여 세를 확장해야 할 그곳이 먼저 시작할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허를 찌르는 전술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전쟁은 시작일 뿐 선제공격의 이점을 얻었다 하더라도 광풍성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기습을 당한 통천연맹의 후처리에 무림인들은 관심을 집중했다.
콰앙!
맹을 옮기면서 새로 구입한 대리석 탁자가 산산이 부서졌다.
붉어진 얼굴로 콧김을 씩씩거리며 뿜어내는 인물, 그는 며칠 전 연맹으로 귀환한 위지천악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노려보듯 제갈승후를 쳐다보며 위지천악은 소리쳤다.
지금 위지천악은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올라온 피해 상황은 엄청났다. 네 곳 지부에서 목숨을 잃은 부하들만 해도 천오백에 달했다. 비단 부하들만 희생당했다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적의 공격을 알았으니 대비를 하면 될 뿐이다. 문제는 각 지부에 있던 수뇌들이다. 산서지부 지부장인 화풍권 굴소를 시작으로 산천지부 지부장 환사 유청, 호남지부 지부장 유성마검 기대음, 감숙지부 지부장 뇌륜창 악우뢰까지 각 지부 수뇌들이 전부 살해당한 것이다.
“지금 각 지부에는 지휘자가 없습니다.”
당혹스럽기는 제갈승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령계나 무극계가 아닌, 광풍서에서 기습을 해 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놈은 사령계 개파대전에 참석하여 세인들의 시선을 끈 다음 통천연맹을 공격한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공격을 마친 그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마치 신기루처럼.
“도대체 일을 한 거냐, 만 거냐. 한두 명도 아니고 사천 명이나 되는 병력이 이동했는데 몰랐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위지천악은 재차 고함을 내질렀다. 기습을 당했다는 사실보다 광풍성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다는 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령계와 무극계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제갈승후느 고개를 숙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이 자신의 실수다. 파견했던 밀정이 살해당하고, 진(陣) 때문에 안쪽을 감시할 수 없게 되자 광풍성을 등한시했다. 아니 그들을 무시했다고 봐야 옳다.
북황련과 남천벌이 통합되지만 않았어도 광풍성 감시에 심혈을 기울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보다는 사령계와 무극계를 더 중시했고, 그곳에 더 관심을 두었다. 광풍성은 그 허점을 파고들어 통천연맹을 기습한 것이다. 봉선군주 주하연, 그녀의 머리에서 나온 것임에 분명했다.
“미친놈! 천붕십일천마가 뉘 집 개 이름인 줄 알았더냐?”
치미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사령계에서 당했던 모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기습을 준비하고 있으면서도 놈은 개파대전을 할 것처럼 사방에 떠벌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죄송합니다, 맹주님!”
그런 제갈승후를 노려보며 위지천악은 차갑게 말했다.
“제갈이란 성을 버리던지, 아니면 놈을 잡아와라.”
“맹주님!”
제갈승후는 깜짝 놀라 위지천악을 쳐다보았다. 통천연맹 군사 자리를 내놓고 지부로 내려가라는 말이었다.
“귀광두는 사천에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놈의 목을 가져와라. 이번 일에 네 목을 걸어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제갈승후는 이를 악물었다. 문득 회의감이 밀려왔다. 왜 북황련에 그렇게 목을 맸는지. 입술을 지그시 깨문 제갈승후는 밖으로 나갔다.
“너무 몰아치는 것 아닙니까?”
제갈승후의 뒷모습을 주시하던 남효운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지난 오 년간 북황련의 머리가 되었던 사람이 바로 제갈승후고, 특별히 두각을 나타낸 적은 없지만, 통합된 두 세력이 삐거덕거리지 않고 잘 굴러갔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제갈승후 정도 되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성급하지 않았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외다. 실패는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수하들에게 주지시켜야 합니다. 신분에 상관없이 그렇게 된다는 걸 보여 줘야 합니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기강을 확립해야겠습니다.”
“그건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광풍성을 저대로 둬서는 안 될 것 아닙니까.”
“물론입니다. 호남과 산서성에 병력을 파견해야지요. 성이 공격당하는데 숨어 있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위지천악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놈들을 다시 광풍성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은, 그들의 본거지를 공격하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그 일은 남 맹주께서 맡아 주십시오.”
“알겠소이다. 그런데 우리가 움직이면 사령계나 무극계에 어부지리를 안겨 주게 되는 것 아닙니까?”
남효운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아닙니다. 무극계의 순우창천과 사령계의 검운비가 귀광두에게 당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정말입니까?”
남효운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통천연맹만 해도 벅찬 상대이거늘 다른 곳까지 공격을 하다니. 도무지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답니다, 무극계의 순우창천과 사령계의 검운비를 폐인을 만들어 살려 보냈다고 합니다.”
“끄응! 잘됐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대단한 놈이라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군요.”
남효운은 인상을 찌푸렸다. 통천연맹뿐만 아니라 사령계와 무극계조차 광풍성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는 말이 아닌가. 대담한 놈들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신중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다른 세력과 보조를 맞춰서 광풍성을 궤멸시켜야 합니다.”
“알았소이다.”
남효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통천연맹만 일방적으로 나서는 게 아니라면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다른 세력 또한 광풍성을 없애고 싶어 할 터이고, 그들과 보조만 맞추면 될 것이다.
남효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서지부와 호남지부 그리고 이곳에서 이천을 데리고 가겠소. 그리고 놈들을 쫓는 건 맹주가 알아서 하시오.”
“걱정 마시오, 귀환 길에서 놈은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이오.”
위지천악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 세사에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 자식을 먼저 보내는 일일 것이다. 만지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 키운 자식임에야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런 자식이 폐인이 되어 돌아왔다. 두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렸다. 아혈이 파괴되고, 장님이 되었다. 단전을 가득 채웠던 내공이 남아 있지 않았다.
침상에 누워 있는 순우창천을 쳐다보는 중년인의 눈에선 붉은 눈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꽉 틀어쥔 주먹에서 붉디붉은 피가 철철 흘렀다.
“귀광두!”
콰과쾅!
주체할 수 없는 분노는 공력으로 표출되었다. 중년인의 고함 소리에 건물 벽이 종잇장처럼 터져 나갔고, 태풍에 휩쓸린 듯 부서진 가재도구들이 무너진 벽을 뚫고 날아갔다.
신황(神皇) 순우혁로(淳于赫路). 무극계의 지존이자 순우창천의 아버지인 그의 몸에서 몸서리치는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용황사신무를 완성하여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다고 하지만, 자식 앞에서 그도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순우창천을 쳐다보는 순우혁로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광풍하게 쏟아지는 기운은 순우혁로의 의지가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전 내공을 발산시키고 있는 것이다.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가 점차 붉어지더니 급기야 피를 머금은 듯 붉게 변했다.
“이런!”
뒤편에 있던 노인들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주화입마 증상이었던 탓이었다.
무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당연 내고의 폭주 상태인 주화입마다. 걷잡을 수 없는 심리 변화에 의해 발생하는 주화입마는 당사자에게 비정상적인 힘을 준다.
문제는 주화입마를 겪은 다음이라 할 수 있다. 주화입마를 겪은 무인은 제 몸에서 폭발하는 내력을 견디지 못하고 몸이 터져 죽거나, 아니면 폐인이 되고 만다.
“막게!”
부부인 듯한 두 사람이 일행에게 소리를 지르며 전면으로 나섰다.
검천황(劍天皇) 순우장준(淳于長俊)과 도천황(刀天皇) 공손여령(公孫麗玲)으로 무극계의 최고 원로들은 팔황신(八皇神)의 수뇌들이자 순우창천의 조부모였다.
두 사람이 앞으로 나서는 순간 나머지 여섯 명은 양손을 앞으로 죽 내밀었다. 여섯 명의 도움으로 간신히 순우혁로의 등 뒤로 다가간 두 사람은 재빨리 그의 혈도를 점혈했다.
폭풍처럼 몰이차던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우엑!”
순우혁로의 입에서 검은 피가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몇 번에 걸쳐 피를 토해 내자 순우혁로의 몸이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마음을 잡아라. 넌 무극계의 지존이다.”
그 말밖에는 해 줄 말이 없었다.
“아버지....... 무극령(無極令)을 발동해 주십시오.”
여전히 순우창천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순우혁로는 말했다.
“어디를 먼저 칠 거냐?”
수우장준은 조용히 물었다. 이미 하후장설이 당했을 때 출병 준비는 갖춘 상태였다. 사령계의 등장과 통천연맹의 결성으로 인하여 잠시 미뤄졌을 뿐이었다.
“계획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장강에서 놈을 없앨 겁니다. 중원의 젖줄인 장강에서 말입니다.”
순우혁로의 몸에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복수, 폐인이 돼 버린 자식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이다. 놈을 갈가리 찢어 자식 앞에 보여 줄 것이다.
아버지가 복수를 했노라고, 말을 할 것이다. 자식 앞에서.
태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사천지부는 황량했다. 수백 채에 달했던 건물들 중 절반이 검게 그을린 채였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타죽었는지 사천지부 안은 아직 시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살아남은 이들 또한 사천지부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넋을 잃은 얼굴로 사천지부 무인들은 안으로 들어선 제갈승후 일행을 쳐다보고 있었다.
“수하들을 데리고, 지부 안을 정리해라.”
그 광경을 찌푸린 얼굴로 쳐다보던 제갈승후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고개를 숙이는 수하들을 뒤로 하고 제갈승후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군이 말했던 보름은 이미 지났다.
수십 개의 전각을 지나 그가 도착한 곳은 야트막한 동산이었다. 그 동산 북쪽, 불역(不域)이란 곳이 제갈승후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였다. 언덕을 돌아 북쪽에 이르자 입구가 일 장 높이에 달하는 커다란 동굴이 나타났다.
“으음!”
운무가 넘실대는 동굴을 쳐다보며 제갈승후는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진이 설치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아직도 금역으로 지정되어 있었던가?’
제갈승후는 내심 중얼거렸다. 불역(不域)은 남천벌 시절부터 금역으로 지정되어, 일반 무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남효운이 사천에 있었을 때 일이다.
지금은 이곳을 담당하는 사람은 남세옥이고, 바로 만날 수 있을 거란 말을 들었다. 그런데 불역 앞에 도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세옥은 보이지 않는다. 문득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들어가서 남세옥에게 전해라.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승후가 찾아왔다고.”
낮게 소리친 제갈승후는 전 내공을 끌어올려 귀로 집중했다.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 장여 정도까지 잡히든 성대의 흔적은 더 이상 감지되지 않았다. 무엇인가 가로막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안으로 드십시오.”
잠시 후, 운무가 걷히고 검은 옷을 입은 장한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대단하군, 그대 같은 강자가 전쟁에 참여했더라면 어찌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놀란 얼굴로 장한을 쳐다보았다.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미 내기를 몸 안으로 갈무리하는 경지에 달한 무인이란 말이다. 비단 그 혼자뿐이라면 제갈승후가 이처럼 놀라진 않았을 터였다. 동굴 안쪽에는 무수히 많은 이들이 숨어 있었다.
그들 또한 눈앞의 사내와 비슷한 경지의 무인들이었다.
호굴(虎窟), 동굴 안에 들어선 첫 느낌이었다.
“요왕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왕?”
제갈승후는 동굴 입구 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다시금 진이 발동했는지 어둠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남세옥이 아닌 요왕이란 말 때문이었다. 불역은 요왕의 지배하는 곳이었다.
안쪽으로 이어지던 동굴 길이 끝나자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동굴 가로 띄엄띄엄 박혀 있는 야명주 불빛으로 가늠하건대 적어도 이십 장 깊이는 되는 듯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내려가 바닥에 도착하자 삼 장 높이의 커다란 석문이 나타났다.
“지저사령계에 들어온 기분이 드는군.”
문득 과거의 일이 생각나 제갈승후는 빙그레 웃었다.
그르르!
그의 말이 떨어지지가 무섭게 전면 석문이 천천히 열렸다.
“들어가십시오.”
“자넨?”
고개를 숙이는 사내를 보며 제갈승후는 물었다. 안쪽은 야명주조차 박혀 있지 않아, 검은 어둠뿐이었다. 함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 참에 기이한 울림이 안쪽으로부터 들려왔다.
“걱정 말고 들어오게.”
“으음!”
순간 제갈승후는 낮게 신음을 토했다. 인간의 목소리임에는 분명할 터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생기가 없었다. 만일 유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면 저런 소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섬뜩했다. 가슴속을 파고드는 차가운 기운을 털어 내려는 듯 제갈승후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일순 몸이 따뜻해지며 팽팽하게 긴장했던 근육들이 풀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르릉!
뒤편에서 석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하군!”
다시 초조해지는 마음을 풀기 위해 자위하듯 중얼거렸다. 아직 어둠에 적응이 되지 않아 안쪽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힘들었지만, 대기의 흐름으로 보건대 상당히 넓은 곳이었다.
“그런데, 여긴 항상 이렇게 어둡나?”
“아닐세, 내가 어둠을 좋아해서 그렇다네. 제군, 불을 켜라!”
“알겠습니다, 요왕!”
팍!
“헉!”
불이 켜짐과 동시에 제갈승후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전면에 있는 검은 동체의 주인이 주는 중압감이나, 제군이 그를 향해 공대했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이미 석문을 들어설 때 그의 무공이 자신에 비해 떨어지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세갈승후가 비명을 내지른 이유는 양천리 뒤쪽 벽에 걸려 있는 한 인물 때문이었다. 핏기가 전부 빠져나가 새하얀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일진룡 남세옥이었다.
“놀랐나?”
태연한 얼굴로 양천리는 제갈승후를 보며 말했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제갈승후는 다시 한 번 내공을 일주천시켰다. 도저히 눈앞의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새롭게 탄생한 요왕이 통천연맹 최고 고수라는 말을 제군이 했을 때, 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배신이라니.
“자신 있는 건가?”
표정을 추스른 제갈승후는 무심하게 물었다. 세력도 거의 없는 양천리가 뭘 믿고 모험을 감행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의 가문인 천음양씨세가 힘으로 통천연맹을 장악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트리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러한 사실은 양천리라고 하여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난 말이네, 성공 확률이 채 일 할도 되지 않는 역천귀혼대법에 들기 전에 그런 생각을 했다네. 성공한다면, 아니 성공하고도 인성(人性)을 잃지 않는다면 강호의 주인이 되겠다고.”
언젯적을 떠올리듯 양천리는 아련한 눈으로 말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결을 결심했을 때, 다가온 제군의 말은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마혼혈시로 다시 태어나면 과거보다 몇 십 배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일 할도 되지 않지만, 성공만 한다면 놈만큼 강해진다고 하였다. 살아나고 말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무엇으로 강호를 정복할 텐가?
“오백 구의 불사삼요와 일천의 천음양씨세가 무인들, 그리고 자네. 이 정도면 넘친다고 보는데.......”
“거절하면 죽이겠다는 말이군.”
양천리를 직시하며 제갈승후는 말했다. 남세옥의 시신을 보여준 이유가 그 때문이다.
“아닐세, 자넨 거절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하는 말일세.”
“왜 거절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가?”
“왜냐면, 우리 둘은 목표가 같기 때문일세. 삶을 지탱하는 목표 말이네.”
“귀광두?”
“물론.”
주저 없이 양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제갈승후는 빙그레 미소를 물었다. 귀광두, 아니 천붕십일천마. 처음엔 가문을 단합하기 위해 천붕십일천마를 이용했었다. 그러나 그들을 없애는 게 삶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
“계획을 말해 보게. 지금 통천연맹에게는 위지천악이 있고, 불사삼살과 북천지옥대 일부가 남아 있네. 위지천악은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북천지옥대나 불사삼살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력이네. 그들을 다스리지 못하면 이번 전쟁의 승자가 될 수 없단 말이네.”
전쟁 국면으로 돌입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력의 보존이다. 요컨대 북천지옥대나 불사삼살은 반드시 있어야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제군이 말을 해 주지 않았나보군. 제혼영매대법이라 부른다네.”
양천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환영매대법은 본사삼괴를 제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라 하였고 제군의 가문에 원본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북황련의 위지천악이 가진 무공은 제혼영매대법의 아류에 불과할 뿐이다. 요왕은 강시의 지존이라 하였다.
“그리고 북황련 무인들에 대해서는 자네가 복안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양천리는 제갈승후를 쳐다보며 넌지시 말했다.
“쿡! 남천벌의 머리가 되었던 이유가 있었구먼.”
제갈승후는 낮게 웃었다. 진파룡 양천리, 남천벌의 대부분 작전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위지천악에 대해 조사한 것은 오 년 전이고,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그런데 양천리는 그 사실을 추론해 내고 있다.
“별다른 약점은 아닐세,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을 알아두었다고나 할까.”
“방금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제갈승후를 빤히 쳐다보며 양천리는 말했다. 그가 생각한 방법은 몰살이었다. 위지천악의 가족을 몰살시키고, 그 범인을 천붕십일천마로 만드는 것.
“난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네. 다만 기회를 잡지 못했을 뿐이지.”
“그런가? 그 일은 내가 맡도록 하지. 자넨 은밀하게 통천연맹 근처로 돌아가 있도록 하게.”
“그렇게 하지. 그런데........ 얼마나 강한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갈승후는 물었다. 사실 궁금했다. 귀광두도 만나보았고, 멀리서나마 뇌우도 보았지만 그들에게서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양천리는 달랐다.
지금껏 태연한 얼굴로 대화를 나눴지만, 문득문득 살기를 발산하고 싶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하지만 출수를 할 수가 없었다. 양천리와 같은 배를 타기로 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두려움, 출수하면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먼저였다.
양천리는 그만큼 강자였던 것이다.
“글쎄, 화룡파천비공을 익힌 자네보다는 한 수 위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네. 파멸안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니까.”
“빌어먹을, 하늘만 높은 줄 알았더니 땅속도 무지하게 깊군.”
제갈승후는 낮게 투덜거렸다. 그가 화룡파천비공에 대한 단서를 얻은 곳은 산동성의 제갈세가 옛터였다.
파멸을 예견했는지 오십 년 전 가주이자 제천맹주였던 제갈수연 사조는 제갈세가의 옛터에 금신가 무공과 함께 반신육천역 중 화령극지(火靈極地)로 가는 지도를 남겨 두었었다.
하지만 화룡파천비공을 익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숨을 건 상태에서 가까스로 익혀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죽음을 무릅쓰고 익혔던 화룡파천비공이 귀광두나 양천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무 심란해 하지 말게. 그래도 자넨 강호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 아닌가.”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구먼. 참! 저들은 항상 관속에 있어야 하는가?”
피식 미소를 흘린 제갈승후는 광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시선이 가 있는 곳에는 수백 개의 관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천붕회에서 보았던 불사삼요가 분명할 터였다.
“아닐세, 시체 같은 것들이 얼쩡거리는 게 싫어서 전부 재웠다네. 위지천악 가족이 있는 곳을 말해 주고 떠나게. 난 한 달 뒤에 통천연맹으로 들어가겠네.”
“그렇게 하지. 그럼 술은 그때 해야겠군.”
제갈승후는 몸을 돌렸다. 해야 할 일이 많다. 적보다는 아군인 위지천악의 눈을 속여야 하기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수고하게.”
제갈승후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양천리는 흘리듯 말했다.
그르릉!
“제군! 믿을 수 있을까?”
제갈승후가 석문 밖으로 모습을 감추자 양천리는 제군에게 물었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습니다. 배신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다행이고. 놈은 지금 어디 있나?”
일순 양천리의 몸이 흑표범처럼 검게 변했다. 훈훈했던 동굴 내부가 급격히 차가워지며 찬바람이 몰아쳤다. 제갈승후와 대화를 하면서도 단 한 번도 흥분된 표정을 짓지 않았던 그가 귀광두를 떠올리며 흥분하고 있었다.
“지금 북상 중일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의 최종 목표는 이곳이 아닐까 합니다.”
“빨리 만났으면 좋겠군. 하지만 기다려야겠지. 통천연맹의 주인이 될 때까지는.......”
참을 수 없는 살의를 쏟아 내듯 양천리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사천은 다른 지역에 비해 유달리 산이 많은 곳이다. 우뚝우뚝 솟은 산 정상을 보면 대부분 만년설에 덮여 있다.
백산 일행이 들어가 있는 대설산맥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궁가산 역시 다른 산과 마찬가지였다. 궁가산에는 대설산맥에서 활동 중인 녹림수로채 사천지부라 할 수 있는 구룡채가 있었다.
백산이 북상을 멈추고 구룡채로 들어온 이유는 장성 너머에서 들려온 무극계의 출병소식 때문이기도 했고, 두 번째 공격에 대한 지시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이것들은 도둑질해서 전부 어디에 쓰는 거야?”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m
구룡채 아홉 산채 중 가장 좋다는 건물로 안내를 받은 백산은 주변을 보며 투덜댔다. 굵은 통나무로 벽을 만들고, 바람을 막기 위해 짐승 가죽을 댄 산채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모처럼 만의 휴식인데 설련이나 주하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하는 말이었다.
“산등성이 굴에서 자는 것보다 훨씬 낫구만. 공연히 심술이에요.”
허리를 두드리며 주하연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왜소한 몸 때문인지 그녀의 아랫배는 유달리 불러 보였다.
“성주님 비선들이 도착했습니다.”
그 참에 밖에서 철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광풍성 각 각(閣)은 물론이고 강호 정세를 전해주는 개방 무인들이었다.
“들어오세요.”
주하연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철웅이 십여 명의 개방 무인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처음 뵙습니다, 성주님. 복건성 분타 분타주인 비천리(飛千里) 나가옥(羅加玉)입니다.”
일생 선두에 있는 자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뒤이어 개방 열 명 무인들의 소개가 이어지고 일행은 자리에 앉았다.
“밥은 먹었느냐?”
“네, 성주님!”
“그래, 일도 좋지만 굶지는 말아라. 일도 배가 불러야 하는 거니까. 양각이라 했더냐, 우선 불도각부터 보고해라.”
일행 중 본인을 양각이라 했던 개방 무인을 보며 백산은 물었다. 다른 동생들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소살우의 행적이 가장 궁금했다.
“오십 명이 합류하지 못했다고.......”
양각은 말끝을 흐렸다. 전령으로 가장 힘든 일이 있다면 지금처럼 사망자를 보고하는 일이다. 한 번의 접전으로 오십 명이 통천연맹 산서지부를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랬구나.”
백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희생이란 것은 알지만 마음이 아팠다. 소림사 승려들이야 싸울 명분이라도 있지만 무당파 무인들에게는 무의미한 싸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싸움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다.
“산서성을 떠난 불도각주는 얼마 전 기련산에 도착하여 무욕각주와 합류했습니다.
주하연이 가만 고개를 끄덕이자 양각은 재차 말을 이었다.
“대와선전을 포기하는 건가?”
고개를 돌려 주하연을 보며 물었다. 그녀가 구상했던 대와선전에는 지금처럼 두 각을 하나로 합치는 작전은 들어 있지 않았다.
“작전을 변경해야 해요.”
주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극계와 통천연맹에의 반응 때문이었다. 중원으로 들어오는 무극계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조금씩 점진적으로 들어올 줄 알았던 그들이 전 병력을 동원하여 들어올 줄은 그녀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더하여 광풍성을 치러 가는 통천연맹의 병력수도 예상 밖으로 많았다.
대와선전의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한 시점에 이르른 것이다.
“각 각주들에게 전하세요. 감숙성에 있는 두 분의 각주는 사천으로 길을 잡아 장강으로 들어오고, 나머지 각주들 또한 장강 유역으로 포진하라고 하세요. 전에도 그랬지만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번 작전의 성패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는 걸 명심하세요.”
“알겠습니다.”
나가옥 일행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사령계에 대한 소식은 없습니까?”
“사령계는 수라마종이 일천 병력을 데리고 사천으로 출병했다고 합니다.”
왼쪽에 있던 장한이 고개를 들고 보고했다.
“알았어요. 당장 출발하세요.”
“알겠습니다!”
일제히 고개를 숙인 개방 무인들은 등을 돌렸다.
“어떻게 하려고?”
일행이 나가자 백산은 주하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장강, 지금껏 계획에 넣지 않았던 곳이다. 그런데 그녀는 장강 어귀로 모든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
“장강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 줄 아세요?”
대답 대산 주하연은 장강에 대해 물었다.
“글쎄, 죽기 전에 삼협에 가본 것 말고는........”
아마 병서보검협이었던 것 같다. 한수 형님, 전 무림인들을 피해 도망칠 때 뇌룡현 부근까지 와서 마차를 내렸다고 했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소살우 일행은 광천뢰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였다. 제천맹을 없애고 강호를 유람할 때 한수 형님의 무덤을 병서보검협에 만들어 주었다.
한수 형님이 사랑했던 여인이 묻힌 곳이 그곳이라 하였다.
“물길을 따라 만 리 정도 된다고 보면 돼요. 오빠가 가본 장강 삼협이 있고, 많은 관문들이 있지요. 수백 개의 강이 흘러들고 나오는 곳이고요.”
“장강에서 적을 없애자는 말인 줄은 알겠는데, 그들이 우리 생각대로 따라 줄까?”
백산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미끼가 되어 적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그녀의 생각은 이해가 되었다. 문제는 이편이 아니고 미끼를 물어야 할 적이다. 그들이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녀의작전은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올 거예요. 무극계가 오면 사령계가 올 테고, 그들은 올 수밖에 없어요.”
주하연은 빙그레 웃었다. 무극계 전 병력이 출병했다는 소식 때문이다. 전술을 아는 자라면 보급도 생각하지 않고 전 병력을 출병시키지 않는다. 먼저 선발대를 보내 군량이나 거점을 확보한 다음, 조금씩 병력을 투입하게 된다.
그런데 무극계는 그런 절차를 무시하고 전 병력을 출병시켰다. 백산이 폐인으로 만든 순우장천 때문이란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무극계가 들어오면 그들을 가장 경계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사령계. 뇌우 또한 장강으로 병력을 파견할 수밖에 없을 거였다.
“참! 사천으로 왔던 제갈승후가 되돌아갔다고 하네요.”
그녀가 장강에서 승부를 결하려는 또 한 가지 이유가 바로 제갈승후의 이탈 때문이었다.
“사천지부장으로 좌천된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
“확실히 그랬지요. 그렇지 않다면 세가무인들을 대동하고 사천으로 오지 않았을 테니까.”
“제갈세가 무인들을 데리고 돌아간 거야?”
“그것도 은밀히요.”
주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밀하게 돌아갔다는 사실은 위지천악을 속이기 위한 행동으로 판단해야 하고, 심경의 변화를 유도한 무엇인가가 사천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더구나 남효운은 이천의 병력을 데리고 출병한 상태. 일을 도모하기에는 최적기인 셈이다.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요.”
그녀는 이렇게 판단했다.
“쩝! 아깝네. 사처에서 정리해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백산은 입맛을 다셨다. 전쟁을 치를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적의 머리를 자르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통천연맹의 머리라 할 수 있는 제갈승후가 사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봐 줄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을 거예요.”
“그렇겠지. 그보다는 장강을 통해 돌아가려면 준비를 많이 해야겠네?”
“물론이죠. 우선은 배부터 손을 봐야 해요. 부 각주!”
“부르셨습니까?”
한편에 대기하고 있던 철웅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타고 왔던 배에 철갑을 씌울 수 있나요?”
“철갑이라면.......”
철웅은 말끝을 흐렸다. 혈뇌문 문도들은 대부분 대장간을 운영했고, 철을 다루는 데는 자신이 있다. 그런데 배에 철갑을 댄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던 탓이었다.
“화살 공격이나 화공을 막아 낼 정도로 철을 씌우는 거예요. 얇게 펴서 선저는 다른 곳보다 조금 두껍게 대고요.”
“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철웅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화살을 막아 낼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할 듯싶었다.
“좋아요, 이따 회식이 끝난 다음 혈뇌문 문도들을 데리고 출발하세요. 장소성까지 가야 하니까 튼튼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배는 중경에 정박시켜 두세요.”
“알겠습니다, 주모!”
“그래요. 그럼 나가도록 하지요.”
건물을 나선 일행은 잠시 후 구룡채 앞마당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문주님!”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고 있는 혈뇌문 문도들이 일제히 일어나 백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난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마셔. 여기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문주님은 오늘 저희 모두의 술을 받으셔야 합니다! 칠백 년 만의 만남 아닙니까?”
술좌석에 있던 누군가가 백산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옳소!”
“옳소!”
덩달아 다른 문도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알았다. 원래 난 한 잔만 마셔도 뻗는 체질인데 오늘은 한번 마셔 보마.”
“내공 끌어올리면 안 됩니다.”
“알았어, 새꺄!”
재차 들려오는 소리에 백산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혈뇌문 문도 한 명씩 돌아가며 술잔을 받고 다시 술잔을 채워주었다.
“큰일 났네.”
이십여 잔을 받아 마시기도 전에 불덩어리처럼 붉어진 백산을 설련은 걱정스런 얼굴로 쳐다보았다. 백산의 주량을 알고 있는 터라 그가 쓰러질까 조마조마했다. 그렇다고 하여 말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칠백 년 만의 만남이 아닌가.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백산은 끈질기게 술을 받아 마셨다. 속도 또한 상당했다. 어느새 백산은 세 명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야! 새꺄! 빨랑빨랑 따라, 임마. 늦으면 넌 큰일 난다는 것 알아?”
횡설수설 제법 술주정까지 하며 백산은 술잔을 내밀었다.
“넵! 문주님!”
부동자세를 취한 장한은 재빨리 술을 따랐다. 하지만 흔들리는 잔에 술을 따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이고, 저 아까운 술을.......”
설련과 함께 백산의 뒤를 따르던 주하연은 술이 넘칠 때마다 안타까운 듯 탄성을 발했다. 백산과 같이 도망을 다니면서 거의 술을 마시지 못했던 때문인지 술 냄새를 맡자 입 안에 침이 고였다.결국 견디다 못한 주하연은 백산에게 술을 따르는 장한을 불렀다.
“저기!”
“말씀하십시오, 주모님!”
“그 술...... 내가 마시면 안 될까? 오빠는 더 이상 마실 수 없을 것 같은데.”
“아! 네, 알겠습니다, 주모님. 여기!”
[하연이, 너 미쳤어?]
술잔으로 손을 내미는 주하연의 모습에 설련은 질겁하며 전음을 보냈다.
[언니, 오빠는 취했잖아요. 더 이상 못 받아먹는다고. 그리고 한두 잔 정도는 괜찮단 말이에요.]
[그래도 안 돼! 백랑 때문이라면 차라리 내가 마실 거야.]
쿠웅!
“에그머니!”
두 여인은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결국 견디다 못한 백산이 지면으로 머리를 처박고 쓰러져 버린 것이었다.
“문주님!”
“괜찮아요, 그냥 드세요. 본래 술이 나보다 약해요. 오늘은 좀 마시는 것 같더니 결국 쓰러졌네요. 문주님은 안으로 모실 테니까 편히 쉬세요.”
“알겠습니다, 주모!”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온 유몽이 백산을 안아 조금 전 나왔던 집 안으로 들어가자 혈뇌문도들은 유몽이 들어간 건물을 흘끔거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과물 같았던 문주에게서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한 게 그들로서는 신기하다는 듯이.
잠시 후 건물 안쪽에서 구역질 해 대는 소리와 함께 주정 부리는 백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혈뇌문도들은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잘읽었습니다
즐독입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합니다.
즐독 ㄳ
즐독 입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즐독.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0^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