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청룡영화상 시상식 때 필자는 한국 배우를 무척 사랑하는 일본 여성 세 분을 초청했다. 그 중 한 분은 고베의 명문 고등학교를 나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아들과 딸도 현재 미국 명문 대학에서 유학 중이었다. 그 분과의 인연은 언젠가 일본 오사카에 갔을 때부터 이어졌다. 오사카의 한 지인이 고베에서 레스토랑을 경영 중인 부인이 나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해왔다. 푸른 바다가 한 눈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레스토랑이었다.
부인은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힌 우울증에 대해 털어놨다. 그녀의 우울증은 고베 지진 직후로 거슬러 올라갔다. 11년이나 흘렀지만 충격은 여전했다. 나를 만난 뒤 부인은 한결 증상이 좋아졌고 계속해서 소중한 인연을 이어오던 차에 이번에 다시 부인의 초대를 받고 고베를 방문하게 됐다.
일본 제3의 무역항이며 세계적인 친환경도시인 고베. 아와지 섬을 잇는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인 아카시해협대교 등 수많은 고베의 명물들로 여행은 즐거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즐거운 추억은 부인의 레스토랑에서 고베 최고의 영능력자와 만난 일이었다.
부인은 나와의 식사에 세 분을 데려왔다. 그 중 한 여성을 보자마자 나는 “점이나 쳐주십시오”라며 웃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여성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하야시’라는 닉네임을 가진 고베 최고의 운명학자였다. 손에는 평범하게 생긴 주사위가 들려있었다. “주사위를 던져서 신(神)에게 점을 쳐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물어봅니다”라고 말하고는 주사위를 높이 던졌다. 잠시 공중에 붕 뜬 주사위가 테이블에 떨어지자 하야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신께서 점을 쳐서는 안 되는 분이라는 점괘가 나왔습니다.”
나는 괜찮다면서 얼른 점을 봐달라고 졸랐다. 그러자 하야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법사님에게는 아드님과 따님이 있죠. 두 분 다 훌륭하게 성장하실 겁니다. 제가 법사님의 운명을 보다니,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겠습니다.” 나는 복채를 대신해 하야시의 주사위에 기를 넣어줬다.
하야시가 점을 보는 동안, 테이블 한 쪽에서는 젊은 일본 여성이 줄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부인이 아는 지인의 딸이었다. 아무리 여성이 자유롭게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일본이라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이유 없이 몸이 아파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빙의였다.
그 부인은 딸이 고베 지진 후부터 몸이 아팠다고 한다. 내가 빙의된 영가에게 말을 건네자 놀랍게도 서툰 한국말이 나왔다. 영가는 담배를 좋아하는 재일교포로 고베 지진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여기까지 와서도 구명시식을 해야 하나. 나는 빙의된 영가를 조용히 타일렀다. “이것도 운명이니 나가주세요. 젊은 아가씨의 앞날을 막으면 어떡합니까.” 영가는 고베 지진으로 죽은 수많은 영가들을 위로해달라고 부탁한 뒤 여성의 몸에서 빠져나갔다. 신기하게도 영가가 나간 뒤 여성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누구 말도 듣지 않은 딸이 나를 만나러 가자고 하자 순순히 따라 나와 신기했다면서 필자가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또 누굴까. 왠지 강한 인연을 느끼며 약속한 날을 기다렸다.
고베에서 만난 두 번째 영능력자는 꽃집을 경영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꽃집의 주력 상품은 근조 화환이었다. 보기에는 평범한 여성 같아도 그녀야 말로 최고의 영능력자로 직업이 따로 있다는 점에서 나와 여러모로 잘 통했다.
그녀가 영능력자로 알려진 것은 장례식장의 꽃을 장식하다 생긴 에피소드들 때문이었다. 장례식장에서 혼자 중얼거리던 중 갑자기 국화꽃을 전부 빼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왜 멀쩡한 국화꽃을 빼느냐고 물어보자 “영가가 백합을 더 좋아합니다”라고 말해 유가족을 놀라게 했다. 사실이었던 것이다.
한번은 교통사고로 죽은 젊은 여자의 장례식장에서 불상사가 생겼다. 망자는 남자친구의 차를 탔다가 사망했으며 남자친구는 중상으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양쪽 집안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아름답고 젊은 딸이 남자친구의 운전실수로 죽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하지만 남자친구도 중상인 만큼 그쪽 가족들도 목청을 높였다.
그녀는 꽃을 꽂다가 여자 영가의 목소리를 듣게 됐다. “남자친구는 잘못이 없어요. 드라이브 중 언성이 높아져 서로 싸우다가 제가 홧김에 남자친구가 잡고 있던 핸들을 틀어버렸습니다. 오해가 없도록 화해시켜 주세요.”
영가의 부탁으로 양쪽 가족에게 정황을 설명했지만 잘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일단 죽은 여자 쪽에 잘못이 있다는 말에 장례식장은 다시 엄숙한 분위기로 돌아갈 수 있었다. 화해는 했지만 의심이 남아있던 가족들은 남자친구가 깨어나 사고의 진실을 말하자 모두 그녀의 영능력에 놀라워했다. 일본어로 번역된 내 책을 많이 읽었다는 그녀는 팬으로서 꼭 한번 나와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직업이 있으면서 종교를 하고 있다는 점도 끌렸다고. 그러나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저는 모든 영가가 아니라, 오직 장례식장의 한 맺힌 영가의 목소리만 들립니다. 영가의 소리가 들리려면 다 들리지 왜 한 맺힌 영가의 소리만 들리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웃으며 “나도 항상 영가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나 영가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힘들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염사를 통해 그녀가 왜 영능력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영능력을 갖기 전, 그녀는 버릇이 있었다. 장례식장의 꽃을 장식하면서 “억울한 사연이 있으면 저에게 말씀하세요”라고 중얼거리곤 했는데 어느 날 정말 억울한 영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꽃 공양을 하면서 영가에게 정성을 쏟은 결과 영능력을 얻게 된 특이한 케이스였다. 그러나 선물처럼 받은 영능력이었기에 장례식장의 한 맺힌 영가들에만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항상 따님과 같이 다니고 있군요.” “네, 맞습니다. 장례식장을 다닐 때 항상 딸과 다니고 있어요.” 나는 그녀에게 당신의 영능력이 언젠가 딸에게 옮겨질 것이라고 말하며 국적을 초월해 한국 법당에서 하는 구명시식에 참석해달라고 하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지금도 영가를 위해 영단을 장식하고 있을 플로리스트 영능력자. 한 맺힌 영가를 달래주면서도 그 대가로 오직 꽃값밖에 받지 않는 소박한 영능력자인 그녀를 하루 빨리 한국에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