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신대왕 8년, 현도태수 경림이 대군을 이끌고 공격하니 왕이 모두를 불러와 물었다.
명립답부가 간언하니,
[한나라 군사는 수를 믿고 정렬이 굳세지 못하고 오합지졸이니,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어 적을 굶기면, 한달안에 배를 주리며 물러갈 것입니다.]
왕을 이를 옳게 여겼고, 정말로 한나라 군사들은 한달안에 배고픔에 지쳐 돌아갔다.
명립답부는 이를 놓치지 않고 한나라 군사를 기병 수천기로 추격하여 좌원에서 섬멸하니,
돌아간 한나라 군사는 수천명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왕은 이를 기뻐하며 좌원을 명립답부의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이 좌원전투는, 중국,일본의 사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싸움의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로 중국 한나라의 환관들, 그 붕알없는 십상시들이 불만을 돌리려고 좌원의 출진을 명령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임진왜란이 그 큰 예이지요.
----전투----
우리가 간과하는 점은, 바로 중국 왕조는 대대로 출전장수에게
그 땅의 태수직을 지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삼국지의 주유도 적벽대전 후 강릉태수직을 받으며 강릉을 공격합니다.
경림도 똑같이, 현도군의 태수로 임면돼며 군사를 일으킨 것이라 볼수 있습니다.
그럼 싸움은 어떻게 전개돼었나?
고구려군은 청야전술로 한나라군대를 막았습니다.
하지만, *한나라 군대는 1만 남짓으로 추정돼는, 매우 적은 숫자입니다.
이 청야전술은, 대군에게 효과가 있는 것으로, 농지를 불태우고
백성들을 성안으로 불러들여 공성을 하는 전술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소수의 군대에 적용돼지 않는 것입니다-_-;;
*[게다가 그당시 중국의 군대는 무장을 재대로 하지도 못한, 말 그대로 오합지졸 입니다-_-;;
그래서 몇십만 정병을 동원할수 있는것이죠.
그당시 장수들은 철갑에 둘러싸인, 그러니까 전장에서 무적이라 불릴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병사들은 마상에서 찰갑을 두른채 창을 휘두르는 장수들을 막을 길이 없었고,
많은 전투도 장수끼리의 접전의 승부로 끝난적이 많습니다.
물론 한나라 말기, 한나라 분열시기에 해당돼는 것이죠.
분열이 진정돼고 국가가 설립됄 당시는, 정예군단 편성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그때부터 중국의 병사들은 제대로 무장을 하고, 소수정예를 돋보이게 됍니다.]
-이문열 선생님 평역 삼국지 왈-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지금은, 말 그대로 개판병사가 끌려가는 그당시 입니다-_-;;
즉, 이곳저곳에서 끌어모아도 적어도 6만~10만은 됀다는 것이죠.
이것에 비해서 고구려는 지방 호족제,
즉 지방귀족이 땅을 다스리며 통제하는 사병들을 합치어, 군단을 만드는 식입니다.
유럽의 Feudalism과 비슷한 것이죠.
이런식의 군대편성은, 대규모 군대의 창설을 거의 불가능하게 하였지만,
소수정예를 기를수 있게 됍니다.
이에 따라, 고구려 고연수의 15만 정병은 고구려가 그만큼 국력을 길렀다는 것을 보여주며,
동아시아를 제패한 제국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 본론으로 돌아가서-_-;;;
성을 굳게 잠구고 지키라는 명령을 내린후, 경림의 대군은 여기저기 쑤시다가 얻어 터지며 지냅니다.
산성이 지세가 험하고, 공격하기 어려워, 흙성만을 공략했던 한족장수는 곤란했겠죠.
게다가 고구려 땅은 길이 험해서 보급도 용이하지가 못합니다.
그리고 적국 깊이, 성 한채도 공략하지 못한채 들어왔으니 보급로도 끊겼을게 분명하지요.
한마디로, 경림이는 완전 좆됐습니다-_-.
그래서 결국 경림은 말머리를 돌리고 맙니다.
공성중 병사도 많이 잃었고, 다 배고프다고 지랄이니, 어쩔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고구려군은 그들은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기습에, 엄청난 파상공격으로, 경림은 재빠르게 도망칩니다.
그리고 치명타를 입은 전투가 바로 좌원이라 생각됍니다.
성이 고구려땅에 하나만 있는게 아니거든요-_-;;;;
명립답부는 기병 수천기를 이끌고 도착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일리가 없습니다.
수천명은 어쩔수 없이-_-;; 작은 군사이고, 고급 병종이니 정부군에 속한다고 보고.
나머지 궁과계, 보계 병력이 다른 성에서 충당됀 것이죠.
하여튼 이 좌원에서 경림은 고구려의 전투진형에 대패합니다.
이때 한나라의 병력이 대략 1만 같습니다.
명립답부는 기병으로 포위, 파상공격을 실행하며, 한병의 진형을 대파해버리며, 전멸시킵니다.
저는 이 좌원전투가, 고구려인들의 수난을 맨 먼저 겪고, 이겨낸 영광의 승리라 생각합니다.
-족발...아니 이게 아닌데..뭐드라..아! 사족!-_-;;;;-
*한나라 군병에 대해.
한나라 병사를 1만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1만은 생각보다 작은 숫자입니다.
이보다 훨씬 오래전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공격할때 군단병 5만(순수 로마시민으로만 이뤄진)
을 동원한것을 보면, 1만은 꽤나 작은 숫자라고 보는게 좋습니다.
게다가 그당시 중국의 인구숫자를 300만 정도로 보느 견해가 있지만-_-;;;
그 넓은땅에 300만밖에 산다는 것은..-_-;;; 음....뭐라고 할까....
게르만 부족들은 30리 정도에 걸쳐서 7~20명이 부락을 이루어 살았다 하는데...
그것을 말하십니까...-_-;;;
중국땅은 매우 인구밀도가 높습니다.
그것을 입증하는게, 중국에 있었던 수백개의 성시이죠.
성시는 그당시 지방의 도읍(-_-) 이라 볼수있고, 성시 하나에 인구 5~6만은 족히 됀다 합니다.
그리고 초한지(매우 좋아하는 책중 하나-_-)는 그당시 중국인구수를 5천만명 정도로 추측한다 합니다.
*중국 병사들은 그렇게 개판이었나?
네 그렇습니다-_-;;
후한말기, 185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숫자가 많다 해도, 그쪽은 훈련이 아예 없는 농민들이 대부분이며,
지금 견해로는 중앙군은 훈련이 잘돼고 무장도가 높은 병사들이라 생각하는데....
이 정부군들은, 농민들에게 무참히 깨집니다-_-;;;
숫자의 힘이라 할수 있지만, 위에 언급한 것처럼, 그당시 장수들은 철갑을 몸에 두른 로보트-_-;
라 볼수 있었고, 마상위에서 전투를 하기에, 가히 무적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인간들은, 로마병에게 지급돼는 판갑(로리카 세그멘타)에 버금가는 갑옷을 입었는데,
이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함은, 그당시 군병들이 무장이 재대로 돼지 않았다는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무단징집이 성행했던 한나라 말기, 제후들의 분열후의 이야기죠-_-;
엄청난 태클 환영합니다~~~~
(Temuchin 님이 여행가방을 짊어지고 쿠바로 도망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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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쿠바시가 한번 맛 보시고 어떤지 가르쳐 주십시요.그리고 황건적의 난 예를 드셨는데, 좌원전투에서 동한의 정예군이 전멸함으로 인해 정부군의 전력에 공백이 생겼다는 글이 밑에 보시면 있습니다.개인적으론 어느정도 수긍하는바 입니다.그리고 제가 사료는 안 찾아봐서 모르지만 동원군사가 1만이라는 것은
확실한 사료인지 아니면 추측인지 궁금하군요.그럼 이만.
얼마 전에 구입한 '자치통감-삼국지' 상권에서 이런 구절이 나오더군요. '고구려왕 백고가 요동을 소란스럽게 하자 현도태수 경림이 그들을 토벌하여 항복을 받았다.' 이 백고가 신대왕이라네요...=ㅅ= 거참 난감합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놈들이 뭔짓을 못하겠습니까..
한움쿰재님, 저도 개인적으로 1만이란 추츤은 모르지만-_-;; 저기 뒤 게시판에 1만이었다는 의견이 나와있어 따른거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중국땅이 티벳 자치구를 제외해도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죠-_-;;
신대왕의 이름이 고백고 맞아요. 삼국사기에서 신대왕이 경림의 현도군에 복속되기를 빌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안 나오죠..중국은 50년이 채 안 된 왕조도 역사서를 남겼는데..5백년 이상 존속한 고구려와 백제의 사료들이 사라져버렸다는 게 원통할 뿐입니다.
고구려의 정사 유기(留記)와 백제의 정사 서기(書記)가 지금까지 전해져 왔다면 우리 역사가 강단과 재야의 다툼으로 뒤죽박죽이 되는 일도 없을 텐데..전란이 심했던 중국보다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한국의 역사가 더 복잡하게 꼬여버렸다는 게 아이러니하죠.
글쎄요... 전해지더라도 거기서도 해석에 따라 지방이름의 따라 강단과 재야는 분명히 또 싸울겁니다. 그리고 중국이십오사가 있는한 내용이 틀려 더 싸울겁니다.당군이 평양성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불지른곳이 서고라나... 진짜 우리 나라 역사서가 왜 이리 없는걸까? 음 미스테리- -...
조선왕조실록이 있는데도 대륙조선설이란게 나오지 않습니까. 불을 어떤 사람은 음식을 요리하는데 쓰는 반면, 어떤 사람은 집태우는데 쓰죠. 같은 사료라도 해석하는 사람 마음에 따라 달라질수 있습니다.
식민지 시절, 일본에서 약탈해 갔겠죠. 화랑세기 필사본을 쓴 박창화 씨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 궁내성 지하 서고에 많은 량의 한국 고서들이 즐비해 있다고 하더군요...
(박창화라.. 일본 소화 연호를 자기가 지었다고 하던데..)
이 좌원전투에 대해 중국 일본 사가들은 어떤 입장입니까? 이 좌원전투가 삼국사기에만 있고 다른사서에는 없는거로 해서 아예 무시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