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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들이 바라본 나눔과 섬김
서창원 목사(삼양교회)
이끄는 말
<나누는 삶, 섬기는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17세기 청교도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대다수가 가난하였고 하루 노동자 임금이 8펜스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가난과 질병 및 핍박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나눔과 섬김의 문제를 청교도들이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청교도들이 이 땅에서 그 누구보다도 성경 적인 삶을 구현하고자 노력하였기 때문입니다. 역사가들은 그들을 ‘신. 구약 성경 밖에서 만나질 수 있는 유일한 성경 적인 사람들’1)이라고 평가하기 때문에 그들의 나눔의 삶을 함께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큰 도전을 준다고 믿습니다.
또 한가지 이유가 더 있다면 우리 교단이 지향하고 있는 신학적인 기반이 칼빈주의를 꽃피운 청교도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우리 교단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소요리 문답은 청교도들의 작품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을 잘 알든 모르든 직. 간접적으로 그들의 영향을 입고 있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영적 거장들인 청교도들의 가르침을 눈여겨보는 것은 성경 적인 바른 지침을 획득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필자는 본 논고에서 무엇보다도 청교도들이 제시하였던 성경적 지침들을 소개하고 오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나눔과 섬김의 원리를 성경을 토대로 하여 적용하며 마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본 논고와 관련하여 그들의 사상과 가르침들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읽을 수 있는 책들을 몇 권 소개할 것입니다.
1. 나눔과 섬김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
나눔과 섬김의 문제를 생각할 때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이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항상 그들의 삶의 원리를 기록된 계시인 성경 외엔 그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 주제에 대해서도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먼저 상고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의 주장 그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2)입니다. 그들이 이해한 섬김은 은혜의 결과이지 은혜의 조건이 아닙니다. 특히 구원문제와 관련하여 로마교가 가르치고 있듯이 선행을 쌓으므로 구원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큰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는 그 은혜에 감격하여 빛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이제는 빛의 자녀이기 때문에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성도의 삶 속에 선한 열매가 없다면 중생하지 못한 자이거나 올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행함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약 2;26). 적어도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착해야 합니다. 선한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도록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심령 속에 성령이 내주하고 있는 성도들은 선한 일에 힘을 다해야 합니다. 실지로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여기서도 우리의 구속받은 분명한 이유가 선언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선을 베푸시는 일에 매우 열심 있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본받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그의 선한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것은 죄”(약 4:17)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선을 행하는 자라야 합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도 친히 명하시기를 “이와 같이 너희 빛을 모든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선행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한 일입니다. 이러한 연유 때문에 청교도들은 선을 행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니 우리도 선해야 합니다. 그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연약한 우리로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삶을 우리의 행위 속에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빛을 반사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그의 생명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 계명에 대한 순종을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빈약한 사랑 실천을 꼬집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실지로 참 그리스도인들은 선을 행함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와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있습니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그리고 우리 주님은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를 구별하시면서 선을 행한 자들에게 창세로부터 예비된 하늘나라를 상속받게 하셨고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마귀들과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명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마 25:34-41 참고). 이처럼 선을 행함과 그렇지 않음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 적인 원리에 입각하여 청교도들은 선행을 이와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행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말씀 가운데 명령하신 것들만이며, 말씀에 근거함이 없이 사람에 의하여 고안된 것이기나 맹목적인 열심 때문에 혹은 어떤 좋은 의도를 구실로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서 행해지는 이 선행들은 참되고 살아 있는 신앙의 열매들과 증거들이다. 이 선행에 의해 신자들은 그들의 감사함을 나타내며, 그들의 확신을 더욱 굳게 하고 형제들의 덕을 세우며 복음의 고백을 아름답게 장식하며 대적들의 입을 막으며 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3)
여기에서 청교도들이 이해하고 있는 선행은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선행과 확연하게 구분되고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동일한 착한 일일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선행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하며, 하지 않아야 할지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근거한 주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나 편의주의에 입각하여 하는 착한 행위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연인들, 악인들이 때로 성도들보다 더 착한 일을 많이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선함에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 및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이 있는 선행임에 비해 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선행으로 자신의 이익과 명예와 사람들의 칭찬에 근거하는 것일 뿐입니다.
또한 청교도들은 선행들은 신앙의 열매들이라는 것과 믿음의 증거들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 열매로 인하여 우리가 좋은 나무라는 것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성도들은 하늘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엡 6:8). 이 부분에 대하여 필자는 좀더 자세하게 살피고자 합니다.
2. 말씀에 근거한 선한 행위들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선한 행위들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선행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행 6장),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 병자들을 돌보는 것(마 25:35-36),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는 것(행 9:36, 약 1:27), 연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롬 14장), 도움이 필요로 하는 자들을 돕는 것(행 10:2)등이 이른바 착한 행실입니다. 이외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선 중에 가장 큰 선은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을 살리는 복음 전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의 선행은 궁극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영생을 얻도록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성도가 해야 할 선입니다.
이처럼 말씀에 근거한 선행은 그 모든 착한 행실이 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선행입니다. 실지로 청교도들은 섬김의 대상은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며 모든 인생에게 생명과 만물에게 호흡을 주시는 우리 하나님임을 굳게 천명하였습니다. 1649년에 리차드 십스(Sibbes)목사는 사도행전 13:36절을 설교하면서 ‘모든 우리 섬김의 주요 대상은 하나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그는 그의 설교에서 우리가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것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가지고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행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야 하는 것입니다.4)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7)고 한 의미입니다. 십스 목사는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라면 그것인 반드시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라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 때문이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이다’5)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에게 속한 자이기 때문에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롬 14:8). 그렇게 함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선행은 단지 공적을 쌓아 자신의 의를 나타내려는 것뿐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은 들을 수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행위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며 또한 그들 속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에 강권되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을 맛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청교도들은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자신의 의지와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이렇게 천명하였습니다:
신자들이 선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은 도무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또 그들이 능히 선한 일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미 받은 은혜 외에 그의 기뻐하시는 것을 원하고 또 행할 수 있도록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동일한 성령의 실제적인 감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특별한 활동에 의지함이 없 이는 아무 의무도 행할 책임이 없는 듯이 그들이 여기에서 나태해서는 아니 된다. 오직 신자들은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불일 듯 하게 함에 근면함이 당연하다.6)
이것은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의 고백입니다(빌 1:6).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믿으며 선한 일에 힘을 다하는 책임과 의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신앙의 열매와 증거로서의 선행을 살펴보게 하는 것입니다.
3. 신앙의 열매와 증거로서의 나눔과 섬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대로 성도들의 선행은 크게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의 열매이며 또 하나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먼저 성도들의 선행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의 열매인 것입니다. 행함은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증거이기도 합니다. 행함이 없이 살아 있는 믿음을 지닌 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성도인 우리는 그 나무에 붙은 가지입니다. 좋은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에는 자연스럽게 좋은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열매로 나무를 알게 됩니다.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로 인하여 우리가 빛의 자녀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떠나서 성도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이며 그 안에 있음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도들의 선행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수행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는 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실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능력을 보면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일 뿐 아니라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하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성도에게 불완전함이 있고 연약함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안에서 받아드려진 주의 백성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선행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의로움 때문에 아들 안에 있는 성도들을 받아주시고 그들의 선행을 보며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이 하는 선행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까? 이미 앞에서도 간략하게 지적하기는 했지만 이 문제에 대한 청교도들의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자들이 한 일들은 비록 선행 그 자체로만 보면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들일 수 있고, 그 자신들과 타인들에게 아울러 유익한 일들일 수 있으나, 신앙에 의하여 정결하게 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말씀에 따라 올바른 방식으로 행하여진 것도 아니며 올바른 목적, 곧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은 죄악스러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을 공로 있게 만들 수도 없다.7)
정결한 선행, 주님을 위한 선행,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선행,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하는 선행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선행은 아닙니다. 모든 것의 목적은 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령으로 새롭게 된 자만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행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열매요 믿음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다는 분명한 증거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는 나눔과 섬김입니다. 실지로 우리에게 있는 모든 재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지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전 13:3).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제자도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하나 주는 것이 곧 주님에게 하는 섬김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착한 행실을 통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길입니다.
이러한 선행이 성도들에게 주는 유익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시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자임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연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함으로 인하여 서로를 세워주는 귀한 일에 동참하게 되며 덕을 함양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에 대한 우리의 고백이 참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 되며, 우리를 비방하는 원수들의 입을 막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냉정하고 선을 베풀 줄 몰라서 우리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 받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실천하는 성도들의 선행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최고의 덕목입니다. 영혼을 건지는 도구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입니다.
4. 어떻게 사랑하며 섬길 것인가?
하루는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려고 찾아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라는 의도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눅 10:37). 우리 주변에 강도 만난 자와 같이 죄의 종노릇하고 사단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죽어가고 있는 자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 밀어야합니다. 죄인을 온전하게 치유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할 때뿐입니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눔은 두가지 측면에서 실천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가진 소유를 나누는 것이며 또 하나는 몸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두 가지 다 혹은 이 둘 중에 하나에 평생토록 종사해야 합니다. 가진 부를 나누고 지식을 나누며 생명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선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특히 빈부의 차가 심화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청교도들이 바라본 나눔의 원리는 매우 중요한 지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적으로 몸으로 봉사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수고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내서 직접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소외 된 자들의 말벗이 되어 주며,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되 물질적인 지원뿐 아니라 가서 청소나 세탁 일등 필요한 것들을 거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단지 사회 사업 자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 차원에서 주를 믿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섬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분에서 특히 가진 재물을 나누는 측면을 더 깊이 생각해고자 합니다.
청교도들의 생각에 돈이란 사회적인 재화이지 개인 소유가 아니라는 개념이 뚜렷합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돈의 목적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행복이지 어쩌다 돈을 손에 넣고 주무르게 된 사람의 개인적인 쾌락이 아니었습니다’8). 이처럼 이들의 생각은 돈 그 자체는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쓰여지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것을 맡은 청지기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스터의 지적대로 ‘청지기란 자신의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인 것입니다.9) 따라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 급급해 하면 재물을 가진 것은 무의미하고, 도리어 자신의 심령을 타락시키는 요인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리차드 박스터 목사는 그의 책 그리스도인 지침서(Christian Directory)에서 부자들에게 17가지 지침들을 언급하였습니다. 그 중에 나눔의 문제와 관련된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신 주의 말씀을 기억하라. 세상의 번영과 부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신뢰해야 하는 지를 이해하라...너의 육신적인 의지들과 욕망으로 부요케 말라. 가난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부자들은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다. 당신의 열매를 하나님께, 그리고 공공의 이익이 당신의 재물에 어울리게 하라. 당신이 가난한 자들보다 더 가지고 있으니 가난한 자들이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선을 행하라. 선한 일에 대한 열망은 선한 것들을 계획하고, 찾고 기회가 닿았을 때 베풀므로 감사와 기쁨이 넘쳐날 것이다. 그리고 더 큰 일을 하도록 이끌 것이다. 주춤거리거나 마지못해서 하지 않고 속히 진행하게 할 것이다. 당신의 마지막 생애까지 끊임없이 행해야 할 의무이다...그러면 하나님의 기쁨이 당신에게 임할 것이며, 선을 행하기에 기뻐하는 것처럼 그것을 받는 자도 기뻐하게 될 것이다...사람들의 영혼과 육체를 다 좋게 행하라. 죽음 앞에서 당신의 재물이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지 점검하라. 긴 인생이 아님을 생각하라. 살든지 죽든지 당신의 주된 관심과 목적은 선을 행하는 것임을 기억하라’.10)
이처럼 부자들은 가진 것으로 없는 사람들을 섬길 수 있을 때 마땅히 도와야 하며 나누어 주는 것이 은혜를 더욱 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볼 사람들을 주시고 하나님과 돌아볼 수 있는 것들을 주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여한 것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은 가진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장차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호를 받기 위해서도 우리는 남의 유익을 구하는 즐거운 삶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청교도의 선행이나 윤리는 은혜의 행위이지 인간 공로의 윤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성경 적인 원리를 제시하고 그 원리에 따라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가진 것을 적절하게 분배하였습니다.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들은 더 많은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기뻐하였습니다. 맹목적으로 자신을 위하여 부를 축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되지 않는 한 우리의 선행은 한갓 자기과시와 자기 만족에 빠지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야 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나눔과 섬김을 통해서 청교도들은 자신들은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것을 잘 관리해야 하는 자들로 인식하였고, 부의 분배를 통해서 하나된 지체 의식의 실현이요 믿음의 열매이며 산 신앙의 증표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죄인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와 영생복락을 소유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선행을 통해서 복음의 고백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악인들의 공격을 차단하는 유익도 얻고 백성들의 칭송도 얻은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자기 배만 챙긴다는 비판도 많이 있지만 실지로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의 실현 때문에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정확한 통계를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나눔과 섬김은 기독교인들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그 날에 우리 대 심판장께서 엄중하게 판단하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청교도들이 제시한 원리를 가지고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교회나 성도는 하나님의 착하심과 같이 착해야합니다. 그것이 칼빈주의 삶의 목적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추천도서
1. 리차드 박스터의 그리스도인 지침서, 2. 라이큰 교수의 청교도- 이세상의 성자들
3. 서창원, 깨어 있는 예수의 공동체(진리의 깃발사, 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