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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현해탄에 부는 새바람
서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우리나라의 고대왕국은 가야다. 불행하게도 이는 일본이 주장한 임나일본부설, 즉 고대 왜(倭) 정권이 가야에 건설했다는 식민지에 대한 서양인들의 호기심 탓이다.
[경남 창녕의 교동고분. 일제시대때 최초 발굴이 이뤄져 중요한 가야 유물들이 대거 일본으로 넘어갔다.]
한국 역사학계의 끈질긴 연구와 노력으로 임나일본부설은 설자리를 잃었지만 그 잔영이 아주 지워진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로인해 가야사는 치명적 상처를 입었고, 이른바 ‘님의 나라(임나)’를 잃어버렸다.
21세기 초입, 한일 역사학계의 분위기는 이전과 썩 다르다. 일본내에서조차 공개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을 논하는 학자는 별로 없다. 일본의 진보적 역사학자들은 내놓고 이를 비판한다.
한일고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일본국제문화재연구소 나가시마(61·永島 暉臣愼) 소장은 “임나일본부는 낡은 사고의 소산이다. 한일 고대관계사는 이제 상호주의적 차원에서 냉철하고 과학적으로 접근해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고대문명이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 통설이 되고 있다.
지난달 23일 오후 일본 나라현 가시하라( 原)시 인근의 니이자와 덴쓰카(新澤千塚) 고분. 2차선 도로를 끼고 좌우로 늘어선 500여기의 고분은 한국의 원분과 흡사했다. 풀섶을 헤치고 고분 주변을 걷자니 문득 한국의 어느 고분에 왔다는 착각이 들었다. 서기 5세기 후반에 조영된 이 고분군은 한반도 남부계 유물이 다량 출토돼 한반도인의 조직적 이주설을 뒷받침한다.
인근의 난잔(南山)고분에도 한반도 도래인들의 자취가 있다. 현지 자료관에는 이곳 4호분에서 출토된 동물형 각배에 대해 ‘조선반도 남부 가야라고 불리는 곳에서 5점이 발견된 귀중한 토기’라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가야인을 위시한 한반도 남부인들은 2천~1천5백여년전 일본 열도에 발을 디딘 최초의 외국인이다. 이들은 한국 남해안~대마도~이키섬~규슈~일본열도에 이르는 한일문화교류 루트 곳곳에 이동과 거주 흔적을 남기고 있다.
지난달 27일 일본 사가현의 요시노가리 역사유적지. 현지에서 17년간 유적발굴을 해온 문화재 전문가 시치다(50·七田忠昭)씨는 흥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가을이 되면 나는 때때로 향수를 느낀다. 1천 수백년전 한반도인들이 건너와 여기에 뼈를 묻었고, 내 골격이나 생김새가 그들을 더 닮은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시치다씨는 자신의 말이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사가지역 유적지의 옹관에서 나온 도래인들의 유골을 분석해 얻은 잠정 결론이라고 말했다.
가야는 일본 고대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일본측이 가야를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에는 한일 고대관계사 연구자만 50여명에 이르고 대부분은 ‘한국통’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두 종류의 눈으로 가야를 본다. 하나는 한반도 남부의 도래인들이 선진문물을 전파했다는 선망의 눈이고, 또 하나는 그들의 옛 조상들이 지배했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자부심의 눈이다.
부산대 고고학과 김두철(44) 교수는 “일본이 한국에 대해 연구하는 수준에는 못미치지만 최근 한국의 일본연구도 진전되고 있다”며 “이제는 서로가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사료와 유물을 통해 접근한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금 현해탄에는 동북아 고대인들의 문화교류와 자취를 합리적으로 조명하려는 새바람이 불고 있다. 여기에 가야의 발언권은 매우 중요하다.
▲뿌리를 찾아서
역사책에도 수많은 이름의 가야가 등장한다. 금관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일반인들의 가야 지식은 대개 이런 이름을 열거하고 우수한 문화 운운하는 수준이다.
가야사는 일반인들에게 아직도 낯설다. 가야고분에서 중요한 유물이 나와도 관련 학자들만 흥분할 뿐 일반인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지난 80년대 이전과는 상황이 판이하지만, 가야사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여전히 미약하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가야는 결코 소홀히 다뤄질 역사가 아니다.
학계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가야는 신라 백제보다 문화·교역 시스템에서 한발 앞서가고 있다.
전기가야 연맹의 맹주인 김해의 가락국(금관가야)은 오늘날의 싱가포르와도 같은 국제교역의 거점이었다.
가락국은 기원전후부터 해상 교역로를 열어 한반도 북부 낙랑, 대방과 교류하고 왜(일본)에 상품을 중개하며 동북아의 교역 메커니즘을 주도했다. 가야의 문화시스템이 신라를 깨우고 왜(일본) 문화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학계의 정설이다.
가야사 연구자들에 따르면 가야인들은 대체로 국제적 감각을 지닌 ‘순박한 자유인’으로 그려진다. 가야인들이 국제적 면모를 갖춘 소박하고 곰살궂은 미의식의 소유자였다는 것은 유물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임효택 동의대 박물관장은 “한국사를 통틀어 영남지방이 역사의 중심이 된 때가 있었던가. 있었다면 그게 바로 가야 시기”라고 말한다. 지역의 역사는 지역의 정체성이다.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도시의 이미지 구축에 역사를 동원하지 않는 곳은 없다. 역사를 관광상품화하면서 그 지역의 자긍심 고취를 위한 문화 콘텐츠로 활용하는 것은 시대적 조류다.
지금 절실한 것은, 무너진 가야사를 되살려 옛 가야인과 그 후예들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부산과 경남, 영남지방의 지자체와 주민들이 가야를 다시 보고 복원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야사 연구 못지않게 ‘역사경관’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이성주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장은 “자연보호는 이해하면서도 역사경관은 대체로 모른 체 하고 넘어가는게 우리의 현실”이라며 “옛 가야의 지형, 산과 강 바다의 교통로, 가야인들의 삶의 자취가 녹아있는 유적지, 그 주변의 풍경 등은 하나하나가 역사로서 소중하다”고 지적했다.
21세기의 스피드와 첨단, 효율을 이야기하는 마당에 가야사를 다시 보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호고(好古)취미가 아니라 가야의 삶과 꿈이 실로 궁금하기 때문이다.
가야가 살아온다 <1> 옛 가야人의 모습
가야인은 어떻게 생겼을까.
[조용진 서울교대 교수가 복원한 가야 여자 모습 . 왼쪽은 정상인, 오른쪽은 편두이다.]
정확한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가야인의 얼굴을 추정할 수 있는 방법은 고분에서 나온 옛 가야인의 뼈 등 생물학적인 유물을 통해 유추하는 것이다. 지난 76년 김해 예안리 가야고분에서 다량 출토된 인골은 가야인 복원작업을 가능하게 했다.
서울교대 조용진(미술과) 교수는 당시 출토된 여자 유골을 토대로 가야인의 얼굴을 복원했다.
조 교수는 “사람의 외모는 유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뼈의 모양을 보면 얼굴 복원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며 “골격을 구성하는 특질에서 근육, 혈관을 되살리고 골격 모양과 상관성이 큰 피부나 이목구비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얼굴복원 작업은 고대인의 식생활, 언어, 생활방식 등 문화와도 결부된다.
음식물의 종류, 영양성분과 상태, 어로나 농경생활 등이 얼굴의 살집, 표정 등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가야인은 신체를 변형하거나 인위적인 장식을 하는 풍속도 가지고 있었다. 변진시대의 사회상을 기록한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에는 변진 사람들은 아기를 낳으면 그 머리를 납작하게 만든다는 ‘편두 풍습’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편두는 신생아 때부터 나무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만들고 뒤통수는 약간 튀어나오게 만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가야의 여자들은 ‘짱구미인’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안리 유적의 경우 여성 인골의 30%가 편두이며 나머지 대부분은 정상인이었다.
가야인들은 대체로 키가 크고, 뼈가 가늘며, 쭈그리고 앉아서 일한 흔적이 없는 ‘큰키형’ 민족으로 분석되고 있다. 예안리에서 출토된 성인 유골들의 평균 신장은 남성 167.4㎝, 여성 150.8㎝로 조사됐다.
가야 유골을 직접 조사하고 연구한 조 교수는 “4~5세기 가야인들은 상하의 치아가 앞니에서 마주 닿아 같이 마모돼 치관 전체가 평면으로 되고 턱이 큰 편”이라고 말했다. 이는 가야인들이 음식을 씹을 때 윗니 아랫니가 마주 닿아 닳아버릴 정도의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턱의 근육이 상당히 두꺼워진 것으로, 오늘날의 김해인보다 훨씬 남성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삼국지’ 변진조의 12국 왕들의 모습에서 가야인의 헤어스타일도 추정해 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12국의 왕들은 머리를 묶어서 틀어 올리지 않고 그대로 늘어뜨린 모습을 하고 있는데 학계 일각에서는 이를 3세기 가야 소국의 왕이나 귀족들의 헤어스타일로 추정하기도 한다.
가야의 사회상을 연구한 계명대 권주현(사학과 ) 강사는 “유물과 고분벽화를 토대로 보면 가야인의 머리모양은 신라나 백제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가야 여성도 다른 고대사회의 여성처럼 출가전에는 머리를 뒤로 한갈래나 양갈래로 묶어 내린 모양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가야시대에는 평민들이 변진시대부터 팔이나 어깨에 문신을 하고 금제 악세사리로 몸을 치장할 정도로, 멋을 부릴 줄도 알았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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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살아온다 <1> 왜 가야인가
3면 메인 박스용//왜 가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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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라 신라 가야 빛나는 역사…’. ‘옛 가야 선 나라 유서깊은 내고장…’
‘낙동강의 노래’와 ‘경남도민의 노래’ 일부다. 가야의 옛땅에 사는 주민들은 곧잘 유서 깊은 가야를 들먹이며 목청을 높인다. 하지만 정작 가야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가야의 역사도 모른 채 가야를 노래하는 것은 넌센스가 아닌가.
가야는 아직 온전한 자기 지도(地圖)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여러 대·소국이 존재했지만 성립시기, 영역, 정치체제, 멸망과정 등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성과를 보면, 가야는 대체로 김해 부산을 중심으로 한 금관가야권, 함안지역 중심의 아라가야권, 고령 및 서부경남의 산악지역을 아우른 대가야권, 창녕 중심의 비화가야권, 경북 성주지역의 성산가야권 등으로 크게 분류된다. 이들 대지역권은 다시 소지역권으로 나뉘어 복잡한 분립상황을 보인다.
본지는 ‘가야사 복원 프로젝트’를 통해 가야의 온전한 지도를 그려나갈 계획이다. 실체 규명작업과 함께 가야인의 삶을 되찾는 것도 관심사다.
가야사가 박대당하는 현실도 파헤칠 계획이다. 고교 교과서에서 가야는 지난 70~80년대에 0.5쪽 정도로 서술되다가 90년대 들어 2~3쪽으로 늘어났다. 이는 최근 왕성한 발굴성과 때문이지만, 절대적 서술면수는 여전히 부족하다.
‘왜 700년인가’ 하는 것도 파고들 문제다. 가야의 성립시기와 관련, 학계는 △기원전 2세기(이병도)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정중환, 김태식, 이영식) △기원후 1세기(김정학, 이현혜) △3세기 후반(신경철) 등 다양한 견해를 내놓고 있다.
초기 신라와 마찬가지로, 가야의 전신인 변진이 기원전 2세기말~1세기초에 서북한 지역으로부터 철기와 회색토기를 받아들여 문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본지는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 가야사를 700년으로 설정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가야인들은 무덤에 자신들의 삶의 자취를 풍성하게 남겨 현대인으로 하여금 말을 걸게 하고 있다. 역사는 말을 시키는 자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법. 옛 가야의 문화인들은 오늘 갖은 편견과 오해속에서 ‘명예회복’을 꿈꾸고 있다.
가야, 가라, 가락, 임나….
가야는 여러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한자표기도 加耶(신라시대), 伽耶(고려), 伽倻(조선) 등으로 시대가 내려오면서 사람 인(人)변이 하나씩 더해졌다.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해 시대별로, 사서별로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가야라는 말은 국가명이라기 보다 당시 존재했던 대·소국들을 포괄해 이르는 후대인들의 인식개념이다.
사료에 나오는 가장 많은 가야의 명칭은 ‘가라(加羅)’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임나가라(任那加羅)가 처음 등장한 후, 일본 사서인 ‘일본서기’와 중국의 ‘송서’ 등에 수십번씩 언급되고 있다. ‘일본서기’의 ‘가라’는 대개 고령의 대가야를 지칭한다.
우리나라의 정사기록인 ‘삼국사기’에는 ‘加耶’라는 말이 33번 등장할 정도로 일반화되어 사용되고 있다.
흔히 말해지는 6가야, 즉 무슨 무슨 가야 하고 부르는 것은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스님의 역사인식으로, 당시 고려의 행정구역명에 가야를 붙인 것이란 견해가 지배적이다.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에는 서기 200년께 경남북 일원의 12개 가야국을 구야국(김해), 안야국(함안), 반로국(고령)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가야의 실제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가야라는 말의 기원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양하다.
정인보 선생은 가야란 반도의 가운데를 흐르는 낙동강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전제, 동서 가운데를 흐르는 ‘갑우내’ 곧, ‘정중(正中)’, ‘가운’의 원래말인 갑우를 한자로 적은 것이 가야라고 분석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은 가야의 기원을 가나(駕那)에서 찾고, 중국인들이 변한(弁韓)이라 부른 것은 가야사람들이 뾰족한 고깔을 쓴 모습을 본떴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남선은 한국어의 ‘겨레(族)’, ‘갈래(支派)’에서 가야가 나왔다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낙동강가에 있었다는 가람(江)설, 수장의 나라를 뜻하는 간나라설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가야사 복원은 정확한 이름찾기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제1부 낙동강의 여명 <1> 철의 해양왕국
◆1천7백년전 시간여행
경남 김해시 중심부의 나지막한 구릉지인 봉황대(鳳凰臺). 금관가야(가락국)의 국읍(國邑)이 있었다는 곳.
봉황대 바로 아래에 바닷물이 출렁거린다. 김해평야는 형상도 흔적도 없다. 남쪽은 남해, 서쪽은 해반천이 바다와 만나는 강어귀, 동쪽은 낙동강 지류인 예안천이 실개천처럼 흐른다.
밀물이 되면 봉황대 앞 항구에 한·중·일의 큰 배들이 진을 치고 사신들과 장사꾼들이 모여 한바탕 거래를 펼친다. 철기를 납작하게 가공한 판상철부(板狀鐵斧) 꾸러미도 보인다.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사적 제261호)는 주로 서민들이 오순도순 모여사는 갯마을이다. 이곳 마을어귀에도 바닷물이 찰방거린다. 사람들은 물때를 맞춰 갯가에서 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채취하며 살아간다. 서기 4~6C 예안리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터에 대규모 매장지를 마련해 뼈를 묻었다.
1천7백여년전 고(古) 김해만의 낯선 풍경이다. 학계의 발굴조사와 연구로 김해지역의 옛 풍경들이 하나씩 되살아나고 있다.
부산대 윤선(지질학) 교수는 “김해시 장유면 수가리 패총의 단면과 예안리 고분의 지질, 주변의 해식동을 조사한 결과, 당시 해수면은 지금보다 5~6m 높았다”며 “1~3C 금관가야는 천혜의 항구를 확보해 번창할 수 있었으나, 4C를 전후해 육지가 서서히 융기해 항구를 상실,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가야시대때 김해 일원이 내만이었다는 것은 수가리, 농소리, 회현리, 예안리 패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당시 지형연구 및 정확한 해안선 복원은 과제다.
◆되살아나는 금관가야
지난 여름, 김해 봉황동 유적지 남측에서 문화재 발굴작업을 벌이던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팀은 가볍게 전율했다. 이곳 습지 퇴적토에서 삼국시대 토기편과 4~5C대의 목주(木柱), 목열(木列)시설이 나왔기 때문.
경남발전연구원 이성주 역사문화센터장은 “좀더 파내려가야 정확한 것이 드러나겠지만, 목주 목열 등의 유구로 볼때 금관가야의 접안시설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선착장 유적이 확인될 경우 해양왕국 금관가야의 실체는 한층 뚜렷해진다.
김해 봉황대는 조선시대때부터 금관가야의 왕궁터로 알려졌던 곳. 지난 92~93년 발굴 조사결과 왕궁의 부속시설로 추정되는 방어시설과 가야인의 집자리, 환호(環濠), 조개더미 등이 확인됐다. 이밖에 골각기, 숫돌, 철기, 슬래그(철 찌꺼기), 송풍관이 함께 출토돼 가야사회의 철기문화시스템을 엿보게 했다.
봉황대 인근 구릉지에는 초기 철기시대 유적인 ‘회현리 패총’이 있다. 1907년 발견돼 일본인들에 의해 조사된 이 패총에서는 많은 조개더미와 가야토기, 세형동검, 탄화미, 화천(貨泉) 등이 나와 학계를 놀라게 했다.
이 가운데 화천은 가야사 조명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화천은 서기 9년 신(新)나라를 세운 중국의 왕망이 주조한 화폐로, 평양 등 서북한지역, 바다 건너 일본의 규슈북부와 오사카만 등지에서 두루 발견됐다.
인제대 이영식(사학) 교수는 “당시 황해도~일본열도를 왕래하려면 2년 가량이 걸렸다. 반면 화천은 10년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이 기간에 화천이 동북아 곳곳을 돌아다녔다는 것은 당시의 교역이 얼마나 활발했는지를 말해준다”며 “김해는 당시 동북아시아 유일의 중개 무역항이었다”고 지적했다.
봉황대는 2001년 2월 인접한 회현리 패총과 더불어 ‘김해 봉황대 유적’으로 확대 지정됐으며, 현재 ‘가야유적 체험촌’이 조성되고 있다. 이곳의 산책길에는 아직도 2천여년전의 조개껍데기와 토기편이 흩어져 있어 묘한 감흥을 준다.
◆가야의 힘
가야 제국(諸國)의 힘의 원천은 철과 바다였다. 가야의 대·소국들은 분립 속에서 때때로 협력하며 고도의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교역로를 개척했다.
철은 가야의 힘이자 경제였다. 철기제작 및 가공은 당시로선 첨단기술이었다. 생활도구, 농기구, 무구류 등에 두루 사용된 철 기술은 시대를 초월할 만큼 뛰어났다.
가야의 철제품은 김해, 동래, 함안, 고령, 합천 등 가야고분 곳곳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신라와 일본의 고분에서 수입품의 일부가 나오고 있다. 전기가야의 판상철부, 후기가야의 철정(덩이쇠)이 바로 그런 유물이다. 철정은 일정한 규격으로 만들어져 철기의 소재나 화폐로 사용됐다.
가야 제국의 교역로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대가야의 교역루트와 관련, 경북대 박천수(고고학) 교수는 고령~거창~함양~운봉고원~섬진강 수계 코스를 설정, “산간분지의 대가야가 정치적 통합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철을 이용한 지역내의 교역과 5C 후기 남해안으로 통하는 대외 교역로를 확보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함안의 아라가야 역시 진동만과 마산만으로 통하는 두개의 해상 교역로를 열어 세력을 유지했다는 연구(남재우·창원대 강사)가 있다.
임효택 동의대 박물관장은 “김해의 금관가야는 지정학적으로 오늘날 싱가포르를 연상케한다”며 “2C 후반~4C는 낙동강 하류지역 가야철기의 전성시대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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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3> 제1부 낙동강의 여명 ②‘일본 속 가야’ 르포
지난달 26일 오전 부산~후쿠오카행 쾌속여객선. 일본 속 가야의 자취를 찾기 위해 취재진은 배편을 선택했다. 1천7백여년전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진출한 가야인의 뱃길과 그들의 복잡한 심사를 헤아려보기 위해서다.
부산서 출발한 지 1시간30분쯤 지나자 현해탄 오른쪽으로 쓰시마(對馬島)가 손에 잡힐듯 모습을 드러냈다. 넘실거리는 파도속에서 가야인들이 고대 목선을 타고 쓰시마로 들어가는 장면이 오버랩됐다.
쓰시마와 일본열도 중간에 위치한 이키(壹岐)섬은 안개에 파묻혀 있었다. 이곳 역시 가야인을 포함한 한반도 남부인들이 일찌감치 문명 교류의 물꼬를 튼 지역. 그동안 수차례의 발굴을 통해 쓰시마와 이키는 한반도 문물이 뿌리를 내린 전초기지이자 한일교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나 있다.
3세기말 편찬된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는 구야한국(김해)~쓰시마~이키~규슈 북부를 경유하는 고대 항로가 나온다. 취재진은 이를 염두에 두고 행선지를 잡았다.
남은 것은 가야인이 남긴 흔적과 숨결을 만나는 일.
#스에키에 감춰진 비밀
취재진은 가야의 자취를 좇아 오사카 인근 사카이(堺)시의 매장문화재협회를 먼저 들렀다. 협회 관계자는 지난 91년 발굴된 오바데라(大庭寺), 스에무라(陶邑) 유적지에서 나온 초기 스에키(須惠器)를 내보였다. 스에키는 서기 4세기말~5세기에 생산된 회청색의 토기로, 두드리면 쇳소리(스에=쇠)가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 이전의 적갈색 토기인 하지키(土師器)와는 제작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협회측이 다른 유물을 제쳐 두고 스에키를 선뜻 내보인 이유는 뭘까.
동행한 부산대 김두철(고고학과) 교수가 궁금증을 풀어준다. “스에키는 가야 각지의 영향을 두루 받은 후 일본식 토기로 변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일본 고분시대의 편년이 여기서 만들어졌을 정도로 고고학적 의미도 크다. 스에키는 또 고대 한일간 교역관계를 푸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이 스에키를 근거로 고고학자들은 5세기 중엽 전후 가야의 도공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제작기술을 전파하고 현지에서 생산까지 시작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어 찾아간 곳은 오사카(大阪)부립 센노쿠(泉北) 고고자료관. 여기서도 가야인들의 곰살궂은 손길을 연상케하는 스에키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 전시된 7세기 중엽의 도관(토기로 만든 관) 파편을 본 취재진은 눈이 번쩍 뜨였다. 파편 표면에 ‘安留白 伊飛寅 作’이란 한국식 이름과 작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 누구일까.
오사카부 문화재센터 보급부장 후쿠오카 수미오(53·福岡澄男)씨는 이에대해 “일본에서 출토되는 토기나 도관에는 7세기 무렵부터 문자를 새긴 자료가 많다. 이름으로 봐서 한반도에서 온 장인이 만든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가야인들의 당당한 이주
일본에 정착한 한반도인이 현지에서 제작한 기물에 이름을 새겼다는 것은 그들의 위세가 당당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취재진은 사가현 요시노가리 유적지에서 일찍이 삼한시대부터 일본열도로 이주한 한반도 남부인의 정체성에 대해 한발짝 더 다가설 수 있었다.
요시노가리 유적지는 일본 최대의 환호 취락터를 국가사적 역사공원으로 개발한 곳. 야요이 시대의 마을이 구니(國) 중심의 취락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밝혀주는 유적지다.
이곳의 다양한 유물들은 한반도인들이 현지인과 더불어 ‘고대 도시’를 당당하게 누빈 사람들이란 것을 확인시킨다. 지난 86년 발굴조사 때 옹관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한반도인 인골 300여구는 현지인이 묻힌 중심부와 외곽지 묘역에 분산돼 있었던 것.
동행한 국립김해박물관 손명조 학예실장의 말. “한반도 남부인들은 변한시대부터 일본과 교류하며 이주를 했다. 일본으로 건너갈 때부터 상하 관계가 확실히 구분되는 집단 형태를 유지했고 그 틀은 일본에서도 존중된 것으로 보인다.”
가야인들의 일본열도 진출은 일본의 사서인 ‘고사기’ ‘속일본기’ 등에 비교적 세세하게 언급돼 있다. 서기 815년에 작성된 일본 최고의 씨족지 ‘신찬성씨록’에는 ‘임나(任那)’라 표기된 가야 계통의 씨족이 10개 부류로 소개돼 있다.
이들은 스스로 가야후손임을 자처한 셈이다.
#첨단기술까지 수출
요시노가리 유적지를 관리하는 시치다 다카시(七田忠昭·사가현 교육청 문화과 전문원·50)씨는 지난 17년간 발굴에 종사하면서 한반도인의 숨결을 자주 느꼈다고 토로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반도형 우각형 파수 토기(소뿔 같은 손잡이가 달린 토기), 한반도 특산인 철로 만든 낫, 철정(덩이쇠) 등 다양한 유물을 보여줬다.
학계에서는 제조공정이 까다로운 철정은 대부분 가야에서 제작돼 수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고대 한·일간에는 실물 뿐만아니라 원자재까지 교역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취재진의 다음 행선지는 이키섬. 동서 15㎞, 남북 17㎞인 이키섬의 하루노쓰지 유적은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언급된 이키코쿠(一支國)의 수도로 밝혀졌다.
여기서 발굴된 주조 쇠도끼, 삼한계 회백색 연질토기 등은 모두 한반도와의 활발한 교역을 증명하는 유물들. 출토 유물 가운데 토기가 유독 많은데 이는 한반도인의 ‘도래 규모’가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진정한 가야찾기 지금부터
일본 속 가야의 흔적은 도처에 늘려 있었다. 이를 해석하는 한일학계의 시각차도 엄존했다. 일본학계는 가야인들의 일본행을‘귀화’ ‘도래’로 표현하지만 한국학계는 ‘진출’로 이해한다. 자국 중심의 역사관은 쉽게 용해될 것 같지 않았다.
김두철 교수는 “한반도의 선진문물이 무조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식의 논의는 이제 지양돼야 하며 교류사적 관점을 따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취재 중 만난 후쿠오카대 다케스에 주니치(武末純一·고고학) 교수는 “고대 한일교역은 쌍방향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반도의 선진 토기와 철기가 일본에 유입된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 쪽에서 거꾸로 영향을 준 것도 있다”고 말했다.
동의대 정효운(일어일문학) 교수는 “이제는 가야사의 입장에서 가야인을 주체로 내세워 고대 일본 진출문제를 적극 연구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가야인을 포함한 고대 한반도인의 일본 이주 배경, 이주 규모, 현지에서의 역할이나 삶과 죽음 , 삶과 죽음 등은 앞으로 자료발굴 등을 통해 밝혀야 할 과제다.
취재진은 일본 속 가야는 비교적 풍부한 자료와 자취에도 불구, 그 실체는 여전히 안개속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가야사4. /3. 찢겨진 역사 힘겨운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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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 화제가 된 가야
지난 23일 국회 문화관광위 국정감사장. 심재권(민주) 의원이 준비한 자료를 들추며 질의에 들어갔다.
“영국의 세계사 교과서에는 고대 한국의 가야지역이 일본의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 황국사관에 따른 ‘임나일본부설’이 그대로 실려 서방에 전파되고 있다는 것이다.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의 교과서들도 다르지 않다.”
순간 국감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심 의원은 국정홍보처장에게 “현재 파악하고 있는 외국 교과서의 잘못된 기술 내용은 무엇이냐”고 추궁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다음날 속개된 국회 문광위 국감. 이번에는 김성호(민주) 의원이 목청을 돋웠다.
“지난 60년대초 경북 고령에서 도굴된 국보 제138호 삼국시대 금관은 삼성문화재단이 소유, 호암미술관에 보관중인데 이는 불법소장이 아닌가.”
김 의원의 질의는 계속 이어졌다. “1971년 9월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 15차 회의록을 보면, 참석자인 문화재 위원과 공무원 14명 중 누구도 소유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도굴품은 국가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대책을 말해보라.”
국회에서 가야가 모처럼 화제로 떠올랐다. 거론된 부분은 둘다 가야사의 아픈 상처다. 그러나 상처만 건드렸을 뿐 뚜렷한 대책은 보이지 않았다.
#가야는 일본땅?
외국의 일부 교과서에 가야가 일본땅으로 나와 있다는 것은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이 내세운 임나일본부설(고대 야마토 정권이 4~6세기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은 세계 각국의 교과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82년부터 외국의 교과서에 서술된 한국 관련 내용을 분석해온 한국교육개발원은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의 한국사 기술 왜곡 및 오류가 심각하다고 밝혔다.
한국교육개발원 이찬희(54) 국제교육정보연구본부장은 “우리와는 별로 악감정이 없을듯한 영국 조차 한국사를 엉터리로 게재하고 있다”며 “이는 왜곡된 역사를 확산 또는 오염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이 본부장은 “전후 일본과 독일은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해외에 홍보하는 사업에 일찌감치 투자, 그 결실을 거두고 있다”며 “우리도 대안을 중심으로 20~30년을 내다보면서 지속적으로 한국이미지 바로 세우기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고교생들이 배우는 ‘일본사’속 가야는 어떻게 서술돼 있을까.
최근 90년 이후 나온 검인정 10종 등 20여종의 일본 역사교과서를 집중 분석한 부경대 이근우(사학과) 교수는 “노골적으로 임나일본부를 퍼뜨리는 곳은 없지만, 핵심 논리는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일부 교과서는 ‘4세기 조선’을 소개한 지도에 가야(加耶)와 임나(任那)를 병기하거나 전라도 지방을 몽땅 포함시켜놓은 사례도 있다.
이 교수는 “국내 학계에서 ‘임나’에 대해 명확한 의미규명을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를 복잡하게 하는 요인”이라며 “무엇보다 우리 교과서에서 먼저 가야사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기술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야금관의 유물 유전(流轉)
김성호 의원이 제기한 문제의 삼국시대 금관은 고령금관이라는 것이 학계의 일치된 견해다. 이 금관은 웃지못할 유물 유전(流轉)을 갖고 있다.
때는 1963년. 대구시 달성군 현풍에서 문화재 도굴을 일삼아오던 일당이 검찰에 붙잡혔다. 당시 중요한 문화재들은 대부분 국립박물관에 접수됐으나 이 가야금관과 일부 유물은 경로가 가려진 채 개인수중으로 넘어갔다. 최종 구매자는 삼성의 사주였던 고 이병철씨였다.
그후 1971년 국립박물관에서 호암 컬렉션이 특별전시될 때 이 금관이 선보였고 같은 해 국보로 지정됐다. 이를 두고 도굴품이 ‘세탁됐다’는 지적도 무성했다.
이 금관은 가야지역에서 나온 유일한 순금 보관으로, 대가야의 강성한 세력을 읽게 한다. 경산대 김세기(역사지리학부) 교수는 “현풍에서 출토됐다는 말도 있으나 고령 지산동 32호분과 44호분에서 나온 금동관과 금동제 등의 모티프로 봐서 고령 출토가 확실하다”고 지적했다.
이 금관의 고향이랄 수 있는 경북 고령군 지산동의 왕릉전시관에는 진짜같은 가짜 가야금관이 전시돼 있다. 제자리에 있어야 할 유물이 딴데 가 있는 것이다.
#역사 왜곡의 희생양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면 야마토 왕조의 식민지가 피해를 보니, 백제를 도와 신라의 침입을 막아라.” “당나라가 한반도를 침입하려고 하니 당나라의 공격에서 식민지를 안전하게 하라.”
이는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사가 2년전 게임 ‘제국의 시대’에 다룬 내용이다. 허구의 임나일본부설을 그대로 수용한 이 게임은 잘못된 고대 동북아의 역사를 전세계에 소개하는 꼴이 됐다. 이 사건은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문제가 된 부분을 수정키로 해 일단락됐으나 정보사회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인터넷상에는 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관련 왜곡정보가 수두룩해 이와 유사한 사고는 앞으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부산시립박물관 송계현 복천분관장은 “정보사회는 정보의 유통·확산이 자유로운 반면 일방통행식으로 확산되면 대응이 어렵다”면서 “가야사 정립 작업과 더불어 모두가 감시자가 되어 오도된 역사를 바로잡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야사와 관련해 최근 주목되는 변화도 있다.
구미의 적잖은 교과서가 가야사를 잘못 기술하고 있는 것과 달리, 최근 영어로 출판되는 전문서적과 백과사전류들은 대체로 임나일본부를 중립적·유보적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별도로 가야 항목을 설정하고 임나일본부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보여 주목된다.
전문가들은 “영어권에 비해 가야사가 매우 열악하게 알려져 있는 프랑스나 독일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가야사 정보를 현지 학계나 출판계에 직접 전달하는 식의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목록으로
고대의 관(冠)은 지배자의 상징이다. 역사학자들은 관을 통해 절대왕권의 형성문제와 집권(集權)국가 이행 여부를 파악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출토된 가야지역의 관(冠)은 8점 정도다. 국내에는 호암미술관 소장 금관을 비롯, 부산 복천동, 경북 성주 가암동, 합천 옥전고분의 금동관, 함안에서 나온 은관 등 5점이 있고, 일본 동경박물관 오쿠라 컬렉션에 3점이 있다.
국보 제 138호인 호암미술관 소장 가야금관은 얇은 금판으로 머리띠와 풀 모양의 세움장식을 만들고 금이파리를 달았다. 크기는 높이 11.5㎝, 지름 17.4㎝.
도굴품이어서 원래 모습 그대로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제작기법이나 형식미로 보아 출토지는 대가야의 도읍지인 고령이 거의 확실하다.
지난 78년 고령 지산동 32호분에서 처음 발굴된 대가야 금동관은 가야지역 금동관 연구의 지평을 넓힌 유물이다. 이 금동관은 서기 5세기 중엽 가야연맹의 주도세력인 대가야의 실체에 다가서게 하면서 무덤 주인공과 순장자의 관계 등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계기를 제공했다. 정교한 물결무늬와 꽃봉우리형 금동막대가 장식돼 있다. 크기는 길이 14.8㎝, 높이 6.5㎝.
일본 동경박물관 오쿠라 컬렉션에 소장된 금(동)관 3점은 출토지가 확실하지 않지만 학계 일각에서는 가야시대 것으로 보고 있다.
오쿠라(小倉·1870~1964)는 일제시대때 대구 남선전기 사장으로 있으면서 재력을 바탕으로 불법 도굴품들을 집중 수집, 일본으로 교묘히 밀반출한 인물. 그가 가지고 간 유물 1천1백여점은 지난 1981년 동경박물관에 기증돼 오쿠라 컬렉션에 전시돼 있다.
가야지역 관의 특징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 함순섭 학예연구사는 “모양에 있어 초화형, 즉 풀이나 꽃을 모티브로 삼아 소박한 인상을 준다“면서 “신라에는 5세기 전반에 금관이 등장하지만 가야는 5세기 후반~6세기초에야 금관이 나와 집권(集權)국가 이행이 늦은 사실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5> 제1부 낙동강의 여명 4/삼국통일의 자양분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동 만옥정공원. 비화가야의 옛땅인 이곳 기슭에는 ‘진흥왕 척경비’(眞興王 拓境碑·국보 제33호)가 우뚝 서 있다. 이 비석은 우연히 발견됐다.
[경남 창녕의 진흥왕 척경비. 이 늠름한 비석은 신라 전승의 기록인 동시에 가야 망국의 표식이기도 하다.]
“1914년 초봄이었다고 해요. 창녕보통학교 학생 하나가 창녕읍 말흘리 화왕산 기슭(송현고분 근처)에 소풍을 갔다가 논두렁에서 큰 비석을 발견했다지. 이를 전해들은 일본인 교장이 본국에 신고해 조사가 됐는데, 이게 진흥왕 척경비 였어요. 발견전까지는 주민들이 돌다리로 사용했다는 소리도 있지요.”
가야사 연구자 김세호(85)옹의 술회다. 김옹은 가야사 저술활동을 통해 고대 창녕이 분명한 가야 영역임을 주장해온 향토사학자다.
비석이 세워진 때는 서기 561년(진흥왕 22년), 대가야 멸망 1년전이다. 554년 관산성(충북 옥천) 대첩으로 한강유역을 장악한 진흥왕은 이듬해 창녕의 비화가야를 병합하고 척경비를 세워 가야 서쪽지역 진출의지를 과시했다.
비석에는 진흥왕을 따라온 군신 42명이 관등에 따라 적혔는데, 그 중에는 금관가야의 왕자 김무력(金武力)도 보인다. 이에앞서 금관가야의 구해왕은 532년 신라의 압박과 회유에 못이겨 나라를 신라에 들어바쳤다. 김무력은 구해왕의 아들이자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이 비석은 신라의 전승기록이자 비화가야의 멸망 표식이다. 이를 계기로 창녕 땅에는 가야식 미학이 퇴조하고 신라식 미학이 자리잡는다. 통일신라기에 세워진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국보 제34호)이 불국사 석가탑을 빼닮은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삼국사기’의 승자적 기록
금관가야의 멸망원인에 대해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이렇게 쓰고 있다.
‘법흥왕 19년(532년)에 금관국주 김구해(金九亥)가 비(妃)와 삼자(奴宗, 武德, 武力)와 함께 보물을 가지고 내항하매, 법흥왕은 예로 대접하고 금관국을 식읍으로 주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이와 다르다. ‘신라 진흥왕이 군대를 일으켜 금관국을 쳤는데, 구형왕이 병력이 부족하여 대적할 수 없어 왕자들과 함께 항복했다…’.
반면 ‘일본서기’에는 ‘남가라(금관가야)는 (신라의 침공에)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의탁할 곳을 몰랐기 때문에 멸망했다’고 기록했다.
학계는 이같은 사료를 근거로 금관가야는 멸망기에도 무시못할 세력이었으나 자진귀속의 형식을 취하자 신라가 파격적인 대우를 한 것으로 풀이한다.
562년 신라의 대가야 병합으로 한반도는 비로소 삼국시대가 되는데 이 시기는 불과 98년 밖에 안된다. 따라서 가야를 빼고는 삼국시대를 제대로 이야기하기 어렵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가야 기마인물형 토기.]
#해양교역 주도권 이양
부산 복천박물관은 부산아시안게임에 맞춰 ‘만남-고대 아시아 문물교류전’(9월 17일~11월17일)을 열고 있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외지산(外地産) 유물 220여점은 고대의 문물의 흐름을 읽게 하고 당시 신라의 서라벌이 국제도시였음을 웅변한다.
이와관련 학계 일각에서는 황남대총에서 나온 페르시아풍의 금제팔찌와 로마풍 유리잔 등은 남방해로를 통해 신라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남방해로는 가야 제국이 일찌기 닦아놓은 남해안 해상교역로를 포괄하는 바닷길이다.
여기서 간과되어선 안될 것이 가야의 숨은 역할이다. 법흥왕 19년(532) 신라의 금관가야 병합은 해양 주도권의 방향을 신라쪽으로 전환시킨 분수령이었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동북아 해양 문화교류의 네트워크에 본격 동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원동력을 흔히 한강유역 확보에서 찾는 경우가 많은데, 가야 제국이 만든 국제화의 토양 역시 단순히 보아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신라·백제에 뒤지지 않아
가야문화가 선진적이었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는 그릇류다. 같은 시기 신라 백제에서 나타나는 것보다 제작기술이 뛰어나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기원전후 한반도에 토기혁명을 가져온 김해식 토기(삼한시대)가 처음 출현하고, 1천℃ 이상의 고온에서 구운 회청색 경질토기가 꽃을 피운 곳도 가야지역이다.
부산 복천동에서 출토된 동물장식 그릇받침이나 함안에서 나온 수레바퀴모양 토기와 화염형 투창고배 등은 장식미와 세련미의 절정을 보여준다.
5세기대로 접어들면서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은 신라토기권, 서쪽은 가야토기권으로 구분되지만, 가야 각국은 멸망때까지 이른바 김해식, 함안식, 고령식, 창녕식 등 지역색이 강한 독특한 토기문화를 형성했다.
그러나 6세기 중반 이후 가야 제국이 정치적으로 신라에 복속되면서 가야토기는 신라화되기 시작해 7세기대에는 통일신라 양식으로 바뀌어 버린다.
가야의 철기문화가 신라에 끼친 영향도 과소평가될 수 없는 부분. 홍익대 김태식(역사교육과) 교수는 “5세기초의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주조 쇠도끼, 쇠삽날, 쇠스랑 등은 고구려의 남정(南征) 이후 신라가 가야 계통의 제철 및 철기제작 집단을 획득한 후 그들을 다시 편제, 급증한 철기생산 능력을 철제 농기구 분야에 집중시킨 결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가야사 연구자들은 “가야가 없었다면 과연 신라문화가 화려하게 피어났을까”라면서 가야의 문화적 힘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임나흥망사’를 정리했던 일본학자 스에마쓰(末松保和)는 ‘가라(加羅)’의 문화를 신라 백제와 비교해서 저급한 수준이라고 규정했으나, 이는 단견이거나 의도적 폄하다.
최근 학계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전성기의 가야는 군사·사회·문화적으로 신라 백제에 결코 뒤지지 않으며 그 저력은 삼국통일의 자양분이 됐다는 것이다.
미니/가야문화의 진수, 기마인물형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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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탄 인물의 표정이 꽤 심각하다. 갑옷에다 투구(갑주), 방패, 목가리개(경갑)까지 두른 완전무장이다. 창끝이나 화살촉 하나 비집고 들어올 틈새가 안보인다.
한바탕 기마전을 치르러 전장으로 나가는 인물은 아마 가야의 우두머리일 것이다. 방패 뒤로 얼굴을 살짝 감추었지만 눈은 전장을 바라보고 있다. 이마 쪽으로 치켜 올라간 눈썹에서는 용맹이 우러나온다.
호마인듯 키가 휜칠한 말도 무장을 했다. 꽤 무거워 보이는 말갑옷(마갑)은 함안 도항리에서 출토된 것과 흡사하다. 머리가리개(마면주)는 씌우지 않았다. 숨을 쉬고 있는듯 정교하게 다듬은 말머리의 조각솜씨를 자랑하기 위해서일까.
다소 회회적인 바리모양의 투구, 전형적인 가야 양식의 나팔형 고배, 말 엉덩이에 갖다붙인 뿔잔 두개가 인상적이다. 전투의 나날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으려는 가야인의 생활태도를 엿보는 듯하다.
‘전(傳)김해 출토’로 알려진 이 기마인물형 토기는 대구에서 의사로 활동했던 이양선씨(작고)가 지난 90년초 경주박물관에 기증했고, 93년 1월 국보 제275호로 지정됐다. 높이 23.2㎝, 너비 14.7㎝.
김해시는 시청 경내에 이를 대형 조형물로 복원해 시 상징물로 삼고 있다.
경주박물관 김홍주 학예연구실장은 “소장자의 전언과 토기양식으로 볼 때 김해 출토물이 틀림없다”면서 “가야시대 무구류, 마구류, 기마병 연구에 둘도없는 소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부산대 박물관 정징원 관장은 “도굴품인 관계로 출토배경 등 중요한 고고학적 정보가 소실된 점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미니/구형왕릉의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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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보전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속에 묻히랴. 차라리 돌속에 들어가서라도 가야 백성을 지키겠노라….”
금관가야의 구형왕이 죽음을 앞두고 별궁이 있었다고 전하는 지리산 자락 수정궁(水晶宮)에서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이다. 물론 전설이다. 사뭇 비장감을 주는 이 전설은 그러나 ‘삼국사기’ 기록과는 배치된다.
전설은 또 있다. “나라가 망하려 하자 구형왕은 지리산으로 피해 들어와 천연요새인 국(國)골에서 도성을 세우려 했다는 것이지요. 왕등재 일원에서도 토성을 쌓고 신라에 항전했을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요.” 산청의 향토사 연구가 조종명(62·산청군 삼장면 대포리)씨의 이야기다.
지리산 동부권역에는 구형왕에 얽힌 지명과 전설이 유난히 많다. 국골과 추성산성터 주변의 두지터(식량저장고), 구형왕이 올랐다는 왕등재와 그 일대의 토성, 전(傳)구형왕릉이 위치한 왕산(王山), 구형왕을 향사하는 덕양전(德讓殿·문화재 자료 제50호),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 장군의 훈련터 등이 그것이다.
조종명씨는 “산청지역에 전해지는 구형왕 전설은 부분적으로 과장·미화된 측면도 있겠지만 가야의 흔적을 말해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전(傳)구형왕릉과 관련된 후대의 사료도 있다. 1800년에 편찬된 ‘가락삼왕사적고’에 인용된 ‘왕산사기(王山寺記)’에 따르면, 신라에 항복하여 금관군도독이 된 구형왕은 말년에 산청의 왕산에 가서 살다가 죽어 장사 지내되 돌을 쌓아 언덕을 만들었다고 돼 있다.
가야사 연구자들은 “구형왕릉이 진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산청에 있었던 가야 소국의 역사가 비운의 구형왕 전설과 중첩돼 전승되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알듯 모를듯 안개를 피우는 지리산 자락의 가야 자취는 체계적인 학술적 규명작업을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다./
#비운의 양왕(讓王)
경남 산청읍에서 서북쪽으로 40여리 떨어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인 1001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왕산(王山) 기슭에 돌탑 형태의 신비한 돌무더기를 만난다. 가파른 경사면에 수만개의 돌덩이를 차곡차곡 7개단으로 쌓아올린 모습은 이집트 피라미드를 연상케한다.
[경남 산청의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전 구형왕릉. 비운의 가야왕 전설이 전해지는 가야사 미스터리의 현장이다]
전면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양왕’은 나라를 넘겼다 해서 붙은 별칭으로, 금관가야의 마지막왕인 구형왕을 일컫는다.
산청(山淸)의 깊은 산골짜기에 만들어진 이 ‘석총(石塚)’이 가야 마지막 왕의 무덤이라면, 역사의 뒤켠에서 헤매온 가야사 만큼이나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왕릉인지 석탑인지 제단인지, 또 왕릉이라면 구형왕릉이 맞는지는 누구도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신비한 유적(사적 제 214호)이 가야와 깊이 관련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석총은 가야사가 풀어야할 미스터리 중 하나다.
#‘삼국사기’의 승자적 기록
금관가야의 멸망에 대해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이렇게 쓰고 있다.
‘법흥왕 19년(532년)에 금관국주 김구해(金九亥=구형왕)가 비(妃)와 세아들, 즉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과 함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매, 법흥왕은 예로 대접하고 상등의 벼슬과 함께 금관국을 식읍으로 주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다르게 쓰고 있다. ‘신라 진흥왕이 군대를 일으켜 금관국을 쳤는데, 병력이 부족한 구형왕이 대적할 수 없어 왕자들과 함께 항복했다…’.
반면 ‘일본서기’에는 ‘남가라(금관가야)는 (신라의 침공에)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의탁할 곳을 몰랐기 때문에 멸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를 종합해 신라가 무력으로 금관가야를 정벌한 것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며, 어느 정도 대항을 하다 자진귀속 형식을 취하자 신라가 파격적인 대우를 한 것으로 본다.
#베일에 싸인 왕들
가야 각국 왕들의 실체는 온통 미스터리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부분적인 기사가 비치지만 편린일 뿐이어서 왕실세계(王室世系) 복원은 어림도 없다.
가야의 기록은 남의 나라 사서에 보다 구체적으로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안라(安羅)와 가라(加羅)에 왕이 있고, 다른 소국에 한기(旱岐)라는 지배자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는 ‘한(韓)에는 대국과 소국이 있고 최고 지배층으로서 주수(主帥)가 있다’고 알려준다.
사료에 기대어 파악할 수 있는 가야왕은 전·후기 가야연맹을 통틀어 열서너명 정도. ‘삼국유사’에 따르면 금관가야는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나라를 세워 532년에 10대 구형왕이 나라를 넘길 때까지 490년간 존속한 것으로 돼 있다. 2대부터 9대까지 거등-마품-거질미-이시품-좌지-취희-질지-겸지라는 이름의 왕이 나오지만 설화형식의 전승이 많아 기록을 온전히 믿기도 어렵다.
대가야 왕조는 이보다 더 어둡다. ‘삼국사기’는 대가야의 멸망을 언급하면서 ‘16명의 왕이 520년간 통치했다’는 식으로 짤막하게 다루고 있다. 그나마 이름이 드러나는 왕은 시조인 이진아시왕(혹은 뇌질주일)과 9대 이뇌왕, 16대 도설지왕 정도다. 대가야의 전성기인 5세기말, 중국 남제로부터 ‘보국장군본국왕’에 제수됐다는 가라왕(加羅王) 하지(荷知)는 누구를 말하는지 여전히 논란거리다.
[경북 고령의 왕릉전시관에 모형으로 복원된 지산동 44호분 내부모습 . 고분에서 가야왕의 이름이 밝혀진 사례는 아직 없다. ]
가야지역의 수많은 고총고분들도 왕들의 실체에 대해서는 대답을 해주지 않고 있다. 부산대 신경철(고고학과) 교수는 “김해와 고령 등지에서 많은 고분발굴이 있었지만 왕묘로 추정되는 곳에서조차 주인공이 밝혀진 예는 없다”고 말한다.
#신라에서 빛난 가야인들
가야멸망 뒤 나라잃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길이 막막하다. 학자들은 신라의 복속정책 사례를 들어 많은 가야인들도 사민(徙民=강제이주) 되었거나 차별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신라에 들어가 명성을 떨친 가야인도 있다. 금관가야 출신의 김무력(金武力)과 김유신(金庾信), 대가야 출신의 우륵(于勒)과 강수(强首)가 그 대표적 인물들. 이들은 문 무 예에서 신라의 ‘젊은 피’가 되어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은 신라왕실에서 가야계 ‘신김씨(新金氏)’를 형성할만큼 위상이 두드러진다.
우륵은 가야금을 창시하고 가야 지방의 12곡을 정리한 인물로, 진흥왕의 후원 아래 신라 대악(大樂)을 만들었다.
강수는 신라 통일기에 활동한 유학자이자 문장가였다. ‘삼국사기’ 강수전에는 무열왕이 강수의 문장력에 감탄해 출신지를 묻자 ‘임나가량인(任那加良人)’이라 대답하는 대목이 나온다. 학자들은 임라가량을 대가야의 한 지역으로 파악한다.
부산대 백승충(역사교육) 교수는 “강수는 가야출신이면서 육두품 이하의 신분으로 유학·문장학을 가지고 신라사회에 진출한 최초의 신흥 유교관료였다”라며 “그의 입신이 갖는 사회·사상사적 의미는 크다”고 평한다.
경북대 주보돈(사학과) 교수는 “우륵과 김유신, 강수 등은 가야의 수준높은 문화를 대변하는 만큼 이를 통해 가야의 국가발전 수준도 역으로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미니//구지봉의 영욕
구지봉은 총면적 3천9백여평의 구릉성 산지로 옛날부터 길지로 통했다.
“김해의 동쪽(좌청룡)은 분산과 남산(南山)이고, 서쪽(우백호)은 임호산(林虎山)과 경운산(慶雲山), 남방(주작)은 강과 바다를 낀 평야, 북방(현무)은 구지봉입니다. 구지봉이 길지라는 것은 삼국유사에도 나옵니다.”
향토사 연구가 허명철(김해 금강병원장)씨의 말이다. 허씨는 구지봉의 순 우리말은 ‘개라봉’이며 광명의 성지라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구지봉은 일제때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1930년대 일제는 도로개설을 구실로 허왕후릉과 이어진 구지봉의 거북 목부위를 댕강 잘라버렸다. 단순한 자연파괴가 아닌 지맥의 급소를 끊은 것이다.
마산으로 통하는 국도 14호선, 김해시 구산동 허왕후릉 옆의 2차선 도로가 문제의 현장이다. 이후 가락국 성지의 지맥을 이어야 한다는 지적이 계속되자 김해시는 지난 1990~93년 잘린 거북의 목 부위에 토석을 덮는 식으로 간신히 연결했다.
구지봉 정상도 어수선하다. 1908년 ‘대가락국태조왕탄강지지’라는 비석이 세워지고 지난 76년 가락국 건국신화를 형상화한 ‘천강육란석조상’ 등이 만들어졌으나 역사적 매력은 별로 없다. 게다가 석조상 둘레에 조각된 9마리의 거북은 전래의 ‘10구(十龜)’ ‘십붕(十朋)’의 의미를 살려 10마리 거북이 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곳의 지석묘에도 보호펜스가 둘러져 모습이 볼썽사납다.
김해시는 구지봉의 기존 석조물과 비석,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원형을 살리는 방향으로 복원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구지봉 원형복원은 지난 2001년 3월 구지봉이 사적 제429호로 지정될 때 붙은 조건이다.
전문가들은 “구지봉 복원의 핵심은 거북 목부분을 완전히 잇는 것”이라며 “폭넓은 의견수렴과 치밀한 고증을 거쳐 복원작업을 벌여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인제대 이영식 교수는 “지석묘의 보호펜스부터 걷어냈으면 좋겠다”며 “이번 복원사업이 역사경관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2부/비밀의 문(7) 1. 구지봉과 개국
#가락국의 랜드마크
김해 분산(盆山·330m). 김해시가지 뒤편에 오뚝 솟은 이 산은 앉음새가 예사롭지 않다. 지리산에서 동남쪽으로 굽이쳐 달려온 낙남정맥의 끝지점인데다, 낙동강 하구와 남해를 한눈에 조망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 옛 가락국(금관가야)의 입지조건을 살피는데도 이만한 장소가 없다. 분산은 이른바 김해의 랜드마크(표지물)다.
취재팀은 지난 24일 오후 김해시 어방동 김해천문대 쪽으로 난 길을 택해 분산에 올랐다. 가을빛이 매혹적인 오후녘이었다.
김해 산성마을을 지나 5분 가량 오르자 시간의 무게에 짓눌린 석성이 나타났다. 분산성(사적 제66호) 북문이다. 고려말 김해부사 박위가 왜구에 대비해 쌓은 퇴뫼식 산성이다. 그러나 성 주변에서 삼국시대 토기편이 나와 가야시대 산성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정상에는 봉수대와 함께 ‘만장대’(萬丈臺·대원군이 썼다고 함)라는 큼지막한 바위도 있다. 분산에는 이처럼 역사적 향취가 그득하다.
분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자락이 구지봉(龜旨峰), 바로 가락국의 개국비밀을 품은 곳이다. 구지봉 바로 곁에는 허왕후릉이 자리잡고 있는데, ‘삼국유사’는 이곳의 지세를 마치 거북이 바다(현 김해평야)를 향해 머리를 내민 형국이라 했다. 김해평야를 바다로 상정하면 ‘여뀌잎처럼 협소하나 지세가 빼어나 16나한이 살만한 곳’으로 소개한 ‘삼국유사’의 전언이 실감난다.
2천여년전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가락의 아홉 촌장들
‘천지개벽후 이 땅에는 아직 나라이름도 없고 왕과 신하의 호칭도 없었다. 다만 아도간, 여도간 등 구간이 백성들을 통솔하였는데 무릇 100가호에 7만5천명이었다. 이들은 산과 들에 모여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었다…’.
‘가락국기’(駕洛國記·고려 문종 후반인 1075~1083년에 금관주지사로 있던 문인이 작성)에 실려 전하는 수로신화는 첫머리부터 아주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다.
수로신화는 익히 알려진대로, 서기 42년(후한 광무제 건무 18년) 하늘로부터 붉은 줄을 타고 내려온 6개의 알이 동자로 둔갑해 6가야 왕이 된다는 줄거리다.
이를 둘러싼 해석은 다양하지만 역사학계는 대체로 구간(九干)이 이끄는 청동기 사회에 수로로 대표되는 철기문화가 들어와 사회변화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가락국이 성립된 것으로 파악한다.
수로가 나타나기 전 김해지역에는 아홉 촌장이 이끄는 이른바 구간(九干)사회가 형성돼 있었다. 간(干)은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몽골계통의 말 ‘칸’의 소리를 따서 적었다는 견해가 있다. 아도간(我刀干), 유천간(留天干), 유수간(留水干), 신귀간(神鬼干) 등은 각각 칼을 잘 쓰고, 천기를 살피고, 물을 잘 이용하고, 제의를 담당하는 우두머리를 뜻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 철기문화를 가진 수로(首露)세력이 나타났다. 미개한 사회에서 철은 새로운 사회를 여는 활력 그 이상이었다. 수로세력을 위만조선의 유이민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 외부에서 들어왔다는 것은 통설로 굳어져 있다.
#가야의 고향
‘거북아 거북아(龜何龜何)/머리를 내밀어라(首其現也)/만약 아니 내밀면(若不現也)/불에 구워 먹으리라(燔灼而喫也)’
수로신화의 주제가인 ‘구지가(龜旨歌)’이다. 이를 둘러싼 해석도 다채롭기 이를데 없다.
잡귀를 쫓는 주문으로 보는 견해(박지홍), 제천의식의 영신제(迎神祭)에서 신에게 희생물을 바치고 춤을 추면서 부른 노래라는 견해(김열규), 원시인들의 강렬한 성욕을 표현했다는 견해(정병욱) 등이 그것.
‘구지’를 ‘굿’, 구지봉을 굿터로 본 학자(정중환)도 있고, 구지가 첫머리의 ‘구야구야(龜也龜也)’를 ‘신(神)이여, 신이여’로, ‘수기(首其)’를 ‘쉬이’로 풀이(김의박)한 사람도 있다.
사학계에서는 대체로 구지가는 애초 위협주술 형식의 풍요제의였으나 수로왕 등장을 계기로 영신군가 형태로 각색된 것으로 본다.
인제대 이영식(사학) 교수는 “수로신화는 청동기→철기, 풍요제의→영신제의, 구간(지도자)→수로왕(지배자)이라는 역사변화 과정을 보여준다”며 “구지봉 정상의 지석묘는 이를 지켜본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구지봉 지석묘는 깬돌(割石) 4~5개를 괸 전형적인 남방식으로, 가락국 개국의 현장을 2천년 이상 흔들림없이 지켜본 셈이다.
삼국의 개국신화와 마찬가지로, 수로신화 역시 신앙의 형태로 표출된 설화성을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 풀어내느냐가 문제다. 특히 신화에 나타난 가락국의 건국 기년, 6란설, 후대의 윤색배경 등은 가야사 해명의 열쇠가 되므로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가락국 개국 기년(서기 42년)과 관련, 부산대 백승충(역사교육) 교수는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가락국의 질적인 변화가 모색되는 전환기에 수로왕이 나타나 철을 중심으로 대외교역적 성격을 드러낸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신화와 역사의 절묘한 접점찾기는 가야사가 해결해야 할 또하나 숙제다.
#어디서 왔을까
신비에 싸인 가야사를 더욱 신비롭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김수로왕의 부인 허왕후의 출신지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허왕후의 입을 빌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성은 허(許)요,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입니다’라고 전하고 있다.
아유타국은 어디일까.
여러가지 가설이 난무하지만 인도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라는 곳으로 초점이 모아진다. 아요디아는 인도 태양왕조의 옛 도읍으로, 기원전 5세기께 그 나라의 왕자였던 ‘라마’를 태양왕의 화신으로 숭배해온 곳이다. 수로왕 묘역의 쌍어와 태양문양은 바로 아요디아에서 사용된 것과 거의 일치한다.
또 태국 메남강가의 고도 ‘아유티야’라는 주장(이종기)과 허왕후의 시호인 ‘보주태후(普州太后)’에 힌트를 얻어 중국 사천성 안악현이라는 견해(김병모)도 있다.
학계 일각에서는 허왕후의 인도 출신설을 부정하는 경향도 있다.
역사학자 이희근(42)씨는 최근 펴낸 ‘한국사 그 끝나지 않은 의문’(다우)에서 “허왕후는 인도인이 아니라 당시 해양세력인 왜(倭) 출신일 것”이라며 “그의 오빠인 장유화상에 의해 불교가 전해졌다는 것도 후대에 의해 꾸며진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인제대 이영식(사학과) 교수는 허왕후가 평안도나 황해도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허왕후가 가지고 왔다는 물품이 낙랑 등 한 4군이 있던 서북한 지역의 선진문물로 추정되고 있어 그곳의 지배계급 출신일 것”이라고 말한다.
부산대 백승충(역사교육) 교수 역시 허왕후 집단이 가져온 한사잡물(漢肆雜物·한나라의 호화로운 문물)등을 주목하고 북방 유이민 집단일 것으로 추정한다.
허왕후 출신지 문제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통설’을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어디로 왔을까
허왕후의 출신지 못지않게 흥미로운 대목이 허왕후 초행길(신행길)이다. ‘삼국유사’에는 허왕후가 가락국에 도착, 수로왕과 혼인하기까지의 ‘신행루트’가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드디어 유천간을 시켜 날랜 배를 몰고 준마를 끌고 가 망산도(望山島)에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에게 분부하여 승점(乘岾)으로 가게 했다…’.
수로왕이 허왕후가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맞을 채비를 하는 모습이다. 결혼담에 나오는 지명을 둘러싼 논란도 만만치 않다.
우선 망산도에 대해서는 진해시 용원의 욕망산이라는 견해(허명철), 김해시 풍류동·명법동에 걸쳐 있는 칠산(七山)이라는 견해(김태식), 김해시내의 전산(田山)이라는 견해(황규성) 등이 맞서 있다. 전설로는 진해시 용원동 해안의 돌무더기인 ‘망산도’(비석도 있음)가 그럴듯하나 가락국의 궁성(김해 봉황대)에서 너무 멀다.
허왕후가 처음 배를 댔다는 주포(主浦)도 아리송하다. 강서구 녹산동과 경계인 진해시 웅동2동 가주마을 주포(主浦)는 지금도 임이 내린 갯가라 해서 ‘임개’라 불리고 있지만 정확한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일부 학자들은 주포가 지금의 강서구 녹산동 상곡마을, 옛 장락나루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허왕후가 비단바지를 벗어 던졌다는 능현(비단고개), 그의 배가 처음 발견됐다는 기출변(旗出邊), 수로왕과 첫밤을 지낸 명월산 등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
김해시는 얼마전 ‘허왕후 초행길’을 역사체험 코스로 삼기 위해 전문가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으나 코스가 3~4개로 엇갈려 코스정립 작업을 포기했다. 코스가 경남 진해시, 김해시, 부산 강서구에 겹쳐 있는 것도 문제점이다.
전문가들은 “설화는 역사적 사실 여부를 명확히 규명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해석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며 “허왕후 설화도 역사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허왕후와의 대화
허왕후는 설화에서 태어나 역사로 편입된 여인이다. 김해시 구산동에는 허왕후릉이 거짓말처럼 실재하고 후손인 김해 허씨들도 번창하고 있다.
허왕후 설화는 신라 문무왕대나 고려 문종 연간에 종래의 전승을 토대로 불교적으로 윤색됐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 있으나, 지명과 신화, 전설, 민속학적 풍습 등 다양한 내용이 숨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허왕후 일행이 풍랑방지를 위해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과 왕후사(452년) 건립 등은 남방불교 전래라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고려시대 때 김해 일원에서는 ‘매년 음력 7월29일 승점으로 올라가 장막을 설치하고 가무를 즐기면서 편을 나눠 망산도를 기점으로 말은 육지로 달리고 배는 북으로 옛 포구를 향해 달리는 놀이가 성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허왕후 도래를 기념한 이 놀이는 매년 봄 김해 가락문화제에서 재현되기도 한다.
지난 9월말 부산아시안게임(AG) 개막 공연으로 선보인 ‘만남’과 그에앞서 부산문화회관에서 열린 AG기념 총체무극 ‘허왕후’는 인도공주 허황옥이 가락국을 찾는 과정을 그려 관심을 끌었다.
이는 허왕후 설화가 한국문화사의 상징적 테마이며, 의미있는 역사문화 콘텐츠가 돼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허왕후’는 한국고대사의 신비이자 수수께끼다. 고대사회의 국제결혼과 해상의 실크로드, 왕가의 로맨스, 문물교류 등 다양한 역사추리와 상상력을 발동시키기 때문이다.
허왕후의 본명은 허황옥(許黃玉)이다. ‘황옥’이란 이름은 중국의 어느 ‘황제’와 관련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허황후란 말은 이 때문에 붙여진듯 하다. 그러나 수로왕과 짝을 이루는 표현은 허왕후가 어울린다.
허왕후의 실체를 추적한 작업은 적지 않았다. 지난 70년대 중반 아동문학가 이종기씨(95년 작고)는 인도 아요디아 기행을 바탕으로 ‘가락국탐사’(일지사·1975)를 저술, 이 방면의 물꼬를 텄다.
이후 비슷한 내용에 중국 보주(普州)에서 허황옥의 직접적인 고향을 찾고, 일본으로 진출했던 항목을 보강했던 역사학자 김병모씨의 ‘김수로왕비 허황옥’(조선일보사·1994)과 개정판 ‘김수로왕비의 혼인길’(푸른솔·1999)도 주목됐다.
지난 97년 출간된 ‘춤추는 신녀-일본의 첫 왕은 한국인이었다’(이종기·동아일보사)는 충격적인 역사탐구였다. 저자는 당시 전설의 바다에 떠오른 역사의 씨줄과 날줄을 직조해 왜국의 첫 왕 히미코(卑彌乎)는 가락국의 묘견공주라고 주장했다.
이와달리 지난해 8월 소설가 강평원(54)씨는 ‘쌍어속의 가야사’(생각하는 백성)에서 허왕후의 고향은 인도 아요디아가 아니라 중국 내륙지방인 서장성의 아유타국 아리지방이며, 허황옥이 떠나면서 지은 것이 ‘아리랑’이라는 이색 주장을 폈다.
강씨는 또 중국 문헌인 ‘산해경(山海經)’을 근거로 가야의 실체는 중국대륙에 있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면서 가락국 상징인 쌍어는 중국 하나라 우임금의 아버지 ‘곤’(꿅)이며 수로왕은 그 후손이라고 했다.
강씨는 ‘임나가라(任那加羅)’라는 책도 준비중인데, 여기서는 가야인의 일본경영을 집중적으로 규명하겠다고 밝혀 주목된다.
김해시 구산동 구지봉 정상의 천강육란석조상. 김해시는 이를 곧 철거, 구지봉의 원형을 회복토록 할 계획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수로왕 신화에는, 김해 구지봉에 9간이 모인 상태에서 하늘에서 여섯 개의 황금 알이 내려와 각기 6가야의 주인이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현재 김해 구지봉에 올라가 보면 그 정상 부위에 릫수로왕 천강기념 육란 석 조 상 릮이 놓여져 있다.
이것은 1976년에 가락중앙종친회에서 조성한 것인데, 신화의 6란하강 정경을 그대로 묘사하지는 않았으나, 자꾸 가서 보니 가락국기의 내용이 그런대로 잘 추상화 되었다는 느낌이 들고, 야외에 공개된 채로 26년이 지났는데도 김해시민들의 애호 속에 별로 훼손되지 않고 보존된 것이 기이하다.
김해시에서 구지봉의 원형을 복원하는 작업을 추진하면서 이 석조물을 걷어낸다고 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나말여초에 붙여진 이름
그런데 그 6란설은 수로왕 신화 중에서도 매우 이상한 대목이다. 대부분의 천강 신화들은 모두 1명의 천손이 알 또는 사람의 상태로 내려 왔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김해 구지봉으로 여섯 개의 알이 한꺼번에 내려왔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요소로서 설화의 원형을 잃은 것이다.
조선 초기의 ‘고려사’ 지리지 및 ‘세종실록’ 지리지 김해 조에 기록된 수로왕 신화에는 황금 알이 1개로 되어 있는데, 오히려 이것이 신화의 원형에 가깝다.
그렇다면 여섯 개의 알이 내려왔다는 변형은 언제,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일까? 이는 ‘6가야’ 관념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려 중기인 11세기에 씌어진 가락국기 말미의 찬(贊)에 이르기를, ‘하나의 자줏빛 끈이 드리워져 6개의 둥근 알이 내려왔는데, 다섯은 각기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만 이 성에 남았구나’ 라고 하였으니, 이는 수로왕이 가락국, 즉 금관가야를 건국할 때, 나머지 다섯 가야도 함께 건국되었다는 의미이다. 6가야 개념은 이를 토대로 생긴 것이다. 여기서 금관가야를 포함하면 아라가야, 성산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소가야 등과 함께 6가야가 된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사서인 ‘본조사략’에 따르면, 태조 천복 5년 경자(940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쳐, 대가야, 소가야를 빼고 금관가야, 비화가야를 대신 넣었다. 그런데 어떻게 가야가 멸망한지 400년이 넘은 고려 초기 태조 왕건이 그 옛날 5가야의 이름을 바꿀 수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볼 때, 가락국 수로왕 건국 신화에 덧붙여진 6란(六卵) 설화 및 6가야의 개념은 신라 말 고려 초의 혼란기에 생겨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 당시에 반(反) 신라적인 관념이 한반도 전체에 휘몰아쳐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각각 그 옛 땅에서 생겨났듯이, 옛 가야 지역에도 반 신라 및 자치 독립의 이념을 표방하는 ‘후가야’가 생겨났을 것이다.
또 이 지역 호족들은 옛 가야 연맹의 전설을 되살려 가야 소국의 왕손임을 인정받아, 자신의 본관(本貫)에서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려고 고려 왕조에 요청하였을 것이다. 그런 결과 태조 23년 지방제도 개편 당시에 고려 왕조는 지방 호족들의 현실 세력관계에 맞추어 5가야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금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비화가야 등의 ‘모(某)가야’ 형태의 국명은, 그들이 소국으로 존재할 당시의 국명이 아니라, 옛날 가야연맹 가운데 하나인 금관국 또는 아라국, 고령국, 성산국, 비화국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신라 말 고려 초의 명칭이다.
그 가야 소국 가운데에서, 일부는 실제로 가야 연맹체 속에 들어 있던 소국이었는지 의심스러운 것도 있다. 특히 성산가야와 고령가야는 ‘성산’과 ‘고령’이라는 명칭이 모두 8세기 중엽 신라 경덕왕 때에 만들어진 것이고, 그 지역들에서 출토된 토기들 중에 5세기 이후의 것들은 가야 토기보다는 신라 토기의 모습을 띠고 있다. 즉, 국명도 의심스럽고 가야 소국의 하나인지도 의심스럽다. 다만 그들이 4세기 이전의 전기 가야시대에 가야연맹에 소속되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거듭나는 ‘허구의 전설’
6가야의 개념을 통해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낙동강 유역의 주민들이 고려 초기까지도 스스로를 옛날에 존재했던 가야연맹체 소속 국의 후손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6가야의 관념은 신라 말 고려 초의 사상사를 다루는 데는 필요하나,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실재했던 가야사의 전개를 다루는 데는 적절치 못한 자료이다. 현행 초등학교나 중학교 교과서 등에 6가야의 지도가 실려 있고, 그것이 당시의 가야 판도인 것처럼 교육되는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다행히 앞으로는 6가야와 관련된 교과서의 서술이 개정될 전망이다. 이제 가야사는 고려 초에 나타난 관념상의 6가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가야사, 즉 역사상 실재했던 가야사를 밝히는데 주력해야 한다.
김해 중심의 4세기 이전 전기 가야시대에는 최대 17개국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5세기 이후의 후기 가야시대에는 최대 22개국을 헤아릴 수 있고, 그 최대 범위는 낙동강 유역뿐만 아니라 호남 동부지역을 포괄하기도 하였다.
이제 가야의 범위는 김해와 고령에 있던 두 개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가야연맹에 소속되었던 다른 소국들을 모두 포함하는 폭넓은 가야사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김태식·홍익대 교수] ◇ 김태식(46)교수는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했고 울산대를 거쳐 현재 홍익대 역사교육과에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가야연맹사'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전3권) 등이 있고 올해 지훈상(국학부문)을 받았다 .
가야의 한자표기는 ‘加耶’, ‘伽倻’, ‘伽耶’ 중 어느 것이 맞을까.
아라가야의 본산인 경남 함안군이 ‘유물전시관’ 완공을 앞두고 최근 ‘아라가야’ 한자표기를 어떻게 해야할지 고심하고 있다. 함안군은 그동안 각종 사료에 의거해 ‘阿羅伽倻’로 표기해왔으나, 경남 김해(금관가야), 경북 고령(대가야)등 가야권 지자체들은 ‘加耶’라는 표기를 따르는 추세다.
가야의 한자표기는 가야권 지자체와 학계의 오랜 골칫거리였다. 시대별·사료별로 표기가 달라 지금까지도 ‘加耶’, ‘伽倻’, ‘伽耶’로 혼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창녕군의 경우 군지에는 非火伽倻(비화가야)로 되어 있으나 이곳의 몇몇 향토사 연구모임은 ‘삼국유사’식 표기인 ‘伽耶’를 고수하고 있다.
고성군은 小伽倻(소가야)라고 쓰고, 성주군은 星山伽倻(성산가야) 또는 碧珍伽耶(벽진가야)에서처럼 ‘가야’의 한자표기가 약간씩 다르다.
‘가야’라는 이름을 딴 각급 학교의 한자표기도 차이가 난다. 김해시 내동의 가야중학교와 가야고등학교, 부산 부산진구 가야동의 가야고등학교는 모두 ‘伽倻’라는 한자를 쓰는데 반해 고령의 가야대학교는 ‘加耶’를 고수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부산지하철 2호선 가야역은 ‘伽倻’이다.
고령군의 경우 대가야를 말할 때는 ‘大加耶’로 쓰기로 했지만, 개국 전설이 깃든 가야산(伽倻山)과 악성 우륵이 만든 가야금(伽倻琴)은 전래의 표기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고령의 가야대학교는 ‘加耶’라고 표기하고 있다.
학계 연구자들은 “통일신라기의 표기로 보여지는 ‘加耶’는 고려시대 이후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아 ‘사람인 변(人)’이 추가되는 형태로 변했다”며 “가장 오래된 정사 기록인 ‘삼국사기’ 표기에 맞춰 ‘加耶’로 통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10> 임나일본부설 허구성
가야사 10/속속 드러나는 허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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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수면 아래로 잠복했던 ‘임나일본부설’이 불과 3년전 한일 사학계의 관심사로 대두되었다가 또 다시 허구로 밝혀진 사례가 있다. 사적 119호인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이 바로 그 진앙지였다.
이 곳 고분은 1980년대부터 일본에서만 그 존재가 알려져 있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전방후원분이란 일본에서 4~6세기에 걸쳐 조성된 당시 일본의 천황(天皇)을 비롯한 최고 지배계급 무덤. 외형이 평면상으로 볼 때 앞부분은 네모난 방형, 뒷부분은 무덤의 주체인 원형 봉토(圓形封土)를 보여 마치 열쇠구멍을 연상케 했다.
송학동 고분을 놓고 그 동안 한일 사학계는 의견이 분분했는데 1999년말부터 2000년 초까지 동아대 박물관이 발굴조사를 벌여 전방후원분이 아닌 전형적인 가야양식 무덤으로 밝혀졌다. 만일 이 무덤이 전방후원분으로 판명됐다면 임나일본부설은 사실로 드러나는 셈이어서 발굴 결과에 한일 사학계가 주목했었다.
최근에는 금석학자 청명 임창순씨가 생전에 소장했던 광개토왕릉비 탁본이 공개돼 ‘임나’가 재조명되고 있다. 이 탁본은 100년 넘게 변조 의혹을 받고 있는 능비 앞면 제 9행의 ‘신묘년 조’ 기사 부분이 눈길을 끈다.
이를 판독한 임세권(안동대) 교수는 “이 대목에서 渡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海자는 매(每·매양이라는 뜻)라고도 읽을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단은 海로 해석하는게 자연스럽다고 덧붙였다.
海로 볼 경우 이 대목은 일반적으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백제)과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되지만, 남북한 역사학계는 주어를 왜가 아니라 고구려로 보고 있다.
아무튼 여러 탁본 중에서 사료가치가 높은 청명본 탁본이 공개됨으로써 광개토왕릉비 연구와 여기에 나오는 ‘임나가라(任那加羅)’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 전망이다.
가야사 <10> 제2부 비밀의 문 ④임나일본부에 가린 ‘임나’
고대 한·일관계사를 전공한 양국 고고학자들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학자된 입장에서 싫든 좋든 상대국 문화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다 보니 서로 동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상대국의 말을 할줄도 알고 근·현대 문화상도 꿰뚫고 있다.
한·일 고고학자들이 진보적이고 개방적일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르러져 사석에서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근하게 지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허물없는 이들도 일단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화제에 오르면 긴장하면서 극도로 말을 아낀다. 제국주의 일본 고고학자들이 우리 민족에 열등감을 심어주기 위해 만들어낸 허황된 이 학설은 표면상 이미 사장됐지만 실제로는 절친한 양국 고고학자들에게조차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는 셈이다.
#임나+일본+부의 합성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임나+일본+부의 합성어다. 이 중 ‘임나’라는 말은 광개토왕릉비 ‘일본서기’ ‘삼국사기’ ‘통전’ 등 한·중·일의 문헌에서 확인되는 용어다. ‘일본’이란 국호는 7세기 이후에나 확인되는 것으로 임나일본부가 거론되는 6세기 중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는 ‘일본서기’ 편찬시에 왜(倭)를 일본으로 고쳐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통설이다. ‘부’는 기관이나 관청을 뜻하는 것이 보통이나 학계의 연구결과 임나일본부의 경우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이라는 주장이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인제대 이영식(사학) 교수는 “임나일본부설을 파생시킨 ‘일본서기’, 광개토왕릉비문, 칠지도 명문 등이 전면적으로 검토되면서 이 학설을 굳게 믿는 한일 사학자들이 크게 줄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은 일본내에서 극우파가 만든 일본사 교과서에는 아직도 버젓히 실려 있다. 또 고대 한일 고대사를 발전적으로 연구하고 규명하는 양국 학계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부정적 요소로 남아 있는 게 현실이다.
익히 알려진대로 임나일본부설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해 일본 어용 사학자들이 지어낸 작품이다. 신화에 나오는 왜국의 신공황후가 369년 임나(가야)를 군사력으로 점령한 후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고 562년 신라에 패퇴할 때까지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는 내용. 에도시대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조선 경영설’이 씨앗이 돼 1949년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가 ‘임나흥망사(任羅興亡史)’를 발표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지난 1960년대 말까지도 이 설은 한일 고대사를 좌우하는 정설과 다름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에 펼쳐졌던 미·일 안보협약 반대투쟁을 기점으로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이 속속 밝혀지기 시작했다.
#일본에 간 유물 반환돼야
‘임나’는 한일 사학계가 결코 망각할 수 없는 ‘역사적 땅’이다. 일제가 임나의 증거를 찾기 위해 한반도에서 끼워 맞추기식으로 무수한 가야 유적을 파헤치는 통에 우리 역사가 왜곡되고 한국 사학계가 함께 피해를 입은 점을 일본 사학계는 잊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일제는 고령(대가야 영역), 김해(금관가야), 함안(아라가야), 창녕(비화가야), 고성(소가야), 진주, 성산 등지를 임나로 추정하고 그곳에서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를 찾기 위해 고분들을 집중 발굴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중 김해 회현리패총은 한반도 지배 논리를 찾던 일제가 우리나라 최초의 학술 목적인 문화재 발굴이라는 미명하에 함부로 조사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일제의 발굴동기가 불순하다 보니 그들 사학자는 정식 발굴 조사서를 낸 경우가 거의 없었고 마구잡이식으로 출토한 많은 가야 유물들은 일본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 때문에 가야사를 증언할 소중한 유물들이 연구자를 만나지도 못한 채 무참하게 훼손됐다. 그동안 국내에서 가야 유적 발굴과 문헌사적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됐지만 완성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까닭도 여기에 연유한다.
이에 대해 홍익대 김태식(역사교육) 교수는 “한반도 및 동아시아 고대사 연구와 정립에 절대적인 가야사를 재정립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건너간 가야 유물들은 우리나라로 반환되어야 하며 국내 사학계도 이를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일 사학자들은 그 동안 쏟아진 극히 다양한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연구들을 추스려 볼 때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지역을 지칭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별 이견을 달지 않는다.
이영식 교수는 “임나는 일본열도의 한 지역이 결코 아니며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 관련 사료는 가야지역에서 전개됐던 역사적 사실이 반영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엄정한 한일 고대사 정립을 가로막는 온갖 오염물질을 배출해온 임나일본부설, 그 중에서도 임나는 원래의 순수한 정체성을 되찾아야 한다. 지금까지 양국 사학계가 보인 막연한 선입관과 감정적 반발로 그려진 평행선을 지우고 접점을 찾아야 한다. 지금이 그 때이다.
지난 11일 일본에서 날아든 부음 하나는 한·일 고대사 연구의 폭풍과도 같은 한 페이지를 들추어보게 했다. '기마민족설 주창, 에가미 나미오씨, 96세 일기 마감'.
에가미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8년 기마민족설을 제기해 일본사회와 한국에 놀라움과 충격을 준 인물이다. 이 학설은 4세기 무렵 퉁구스 계통의 북방 기마민족 일파가 한반도로 남하해 현해탄을 건너 북 규슈에 한·왜 연합왕국을 만들었다는 것이 요지다. 에가미의 주장대로라면 한반도 남부 역시 기마민족의 말발굽 아래 들어간 것은 물론이다.
#천황중심 해석 뒤흔들어
일본 헌법 제1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다’로 명시돼 있다. 천황은 일본에서 현인신(現人神)으로 통하며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다.
기마민족설은 이전까지 신화에 근거한 천황 중심의 역사해석을 뒤흔든 것이었다. 만세일계(萬世一系), 즉 하나의 혈통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천황가를 이뤘다는 황국사관의 근본을 흔들었으니 반향과 논란은 클 수밖에 없었다.
기마민족설은 끝내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시야에 넣은 패러다임의 확장으로 일반인들에게는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에가미는 지난 90년초 김해 대성동 고분발굴 현장을 방문, 자신의 마지막 미싱 링크(Missing Link=계열상 빠진 부분)가 메워졌다고 주장했다. 즉, 몽고지방에서 만주·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까지 뻗어나간 기마문화의 연결고리가 김해의 발굴유물로 충족됐다는 것이다.
국내 학계는 기마민족설을 상상력을 발휘해 만든 허구적 산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홍익대 김태식(역사교육) 교수는 “기마민족설이 임나일본부설의 연장선상에 있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지만 요즘에도 살펴볼만한 대목은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신판 기마민족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부여족 남하설’이란 자못 흥미로운 가설을 낳았다. 부산대 신경철(고고학과) 교수가 제기한 이 가설은 3세기말께 북방의 부여족이 동해안 해로를 타고 남하, 김해지역을 점령하고 금관가야를 세웠다는 것이 요지.
신 교수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 중 3세기말~5세기초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릉 정상부의 목곽묘 부장품에 주목한다. 이곳에서 나온 도질토기와 철제 갑주류, 오르도스형 동복(銅 ·이동식 청동솥), 몽고발형주 등의 유물과 선행묘 파괴, 순장풍습 등이 이전과는 구분되는 북방민족의 이동 흔적이라는 것.
신 교수는 ‘통전’ 부여전에 나오는 서기 285년에 모영선비의 공격을 받아 파국에 빠진 부여족의 일파가 장백산맥을 넘어 북옥저가 있던 지금의 두만강 하류지역까지 이동해 왔는데, 그들이 해로를 이용해 김해로 왔다고 말한다.
신 교수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부여족 남하설은 에가미의 기마민족설과 닮은 데가 있다. 북방의 기마민족이 남하해 정복을 통해 왕국을 만들었다는 주장은 거의 같다. 이 때문에 학계 일각에서는 이를 신판 기마민족설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에 대해 신 교수는 “기마민족설은 증명되지 않는 미싱 링크가 여전히 많아 인정하기 어렵다”면서 “기마민족설과 결과적으로는 비슷하게 보일지 몰라도 논증과정은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부여족 남하설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락국 건국연대(서기 42년)와 맞지 않고 금관가야의 성립시기를 3세기 무렵으로 내려잡아야 하는 문제가 있다.
#가설의 힘
기마민족설은 국내 학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부여족 남하설이 그렇고 소장 역사학자 이도학씨의 백제 형성론, 최병현씨의 신라고분을 통해 본 기원설 등은 음양으로 기마민족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들 가설은 적잖은 비판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기존 통설을 과감하게 허물고 역사해석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함께 얻고 있다.
경북대 주보돈 박물관장은 “이들 학설이 기마민족설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지만 북방민족 남하라는 기마민족설의 논의 구조와 아이디어를 부분적으로 가져왔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 학설을 20세기초에 풍미했던 문화전파론의 영향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기마민족설과 부여족 남하설 등은 ‘가설(假說)의 힘’을 실감케하는 사례로 꼽힌다. 가설은 일련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어떤 학설을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명제인데, 공론과정을 통해 지지가 따르고 설득력을 얻으면 통설이 된다.
가야사는 가설의 연속이며, 많은 가설을 필요로한다. 학계의 활발한 연구 및 발굴성과에도 불구하고 가야사는 아직 개념, 존재시기, 영역, 종족, 국가발전단계, 가야 각국간의 관계 등 기본적인 문제들조차 해결되지 않고 있다. 기존 통설의 벽을 과감히 깨고 신선한 상상력의 날개를 단 가설이 활발하게 개진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11>'日최초 왕국의 첫 여왕 가야 묘견공주'說 논란
한·일 두나라의 고대 사학계를 들여다 보면 ‘이상한 현상’을 발견한다. 일본측 역사학자 십중팔구는 그들이 고대한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지지 또는 동조하는데 반해, 한국에서는 백제 또는 가야가 고대일본을 식민지배 혹은 분국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기록이나 사료로 보면 일본측이 고대한국을 지배했다는 증거보다 우리가 그들을 분국으로 삼았다는 증거가 휠씬 많다.
재미있는 것은, 국내에서 ‘역사학’이라는 범위를 벗어나면 ‘고대일본은 한반도의 분국’ 식의 주장이 거침없이 쏟아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재야 사학자 및 향토사가들의 주장이나 견해가 학계에 수용되거나 인용되는 사례는 별로 없다.
김해 수로왕릉 숭선전(崇善殿)에서 나온 ‘김씨왕세계’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선견(先見)이라는 이름의 왕자가 신녀(神女)와 더불어 구름을 타고 떠나자, 거등왕(居登王·가락국 2대왕)이 강가 돌섬의 바위에 올라가 왕자를 그리워하는 그림을 새겼다. 전하기를 이곳이 초선대(招仙臺)이다…’.
초선대는 김해시 안동 신어천과 국도 14호선이 만나는 곳의 야트막한 바위산을 말한다. 이곳 서쪽의 거대한 자연바위에는 너비 3㎝ 정도의 굵은 선으로 마애석불(경남도 유형문화재 제78호)이 음각돼 있다.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마애석불을 가야불교와 연결시키는 연구자도 있다.
여기에 언급된 ‘신녀’는 누구일까. 재야 사학계에서는 그가 곧 수로왕의 딸 묘견공주(妙見公主)이며,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로 알려진 ‘야마이국’의 첫 여왕 ‘히미코(卑彌呼)’라는 놀라운 주장을 편다.
‘잊혀진 왕국 가야’를 쓴 언론인 이점호씨와 김해의 향토사 연구자 허명철씨, 아동문학가 고 이종기씨 등은 줄곧 이같은 주장을 해 왔다. 이 가운데 이종기씨는 ‘춤추는 신녀’라는 책을 통해 치밀한 고증과 폭넓은 상상력으로 히미코가 수로왕의 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냉담하다. 가야사 연구자인 모 교수는 “허왕후의 실체조차 애매한 상태에서 그의 딸이 왜국의 왕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픽션으로 보이며 학계에선 거론조차 안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단적인 예지만 초선대 설화는 학계와 재야의 관계와 거리를 실감하게 한다.
#가야의 원류
야의 원류를 캐려면 우선 ‘예맥(濊貊)’이란 말을 이해해야 한다. 중국의 사서 ‘삼국지’ ‘사기’ 등에 나오는 예맥족은, 한국에서 청동기 문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이다. 물론 논란이 있다. 예와 맥은 같다는 견해, 예족과 맥족은 다르다는 견해, 둘은 비슷하나 엄밀하게는 구분된다는 주장도 있다. 예맥이 어떤 계통의 종족인가에 대해서도 견해가 다양하다. 퉁구스계라고도 하고 알타이계, 고아시아계, 몽고계라고도 하고, 적당한 잡종이라고도 한다.
한민족을 말하는 ‘한(韓)’의 기원에 대한 논란도 만만찮다. 고조선의 준왕이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 한(韓)을 칭했다는 견해(이병도), 한강 이남의 예맥족을 북쪽 퉁구스 계열과 구별하기 위해 한족(韓族)이라 이름했다는 견해 등이 맞서 있다.
#한민족이 찾던 엘도라도
야 이전에 변한이 있고, 그 전에 초기 철기시대, 청동기시대, 신석기시대가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수긍한다. 하지만 ‘타임터널’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선(先) 가야인의 실체를 더듬는 작업은 매우 어렵다. 역사는 길고 기록은 적기 때문이다.
학계의 연구성과들을 종합하면 대체로 이렇다. 한반도 초기국가 형성기의 이주민 집단은 크게 고조선 계통과 부여·고구려 계통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 기원전 4세기말~기원전 3세기초 고조선이 중국 연나라의 침입을 받아 서쪽지역을 상실했을 때 1차 이주가 일어났다. 이후 위만이 고조선의 왕위를 장악하자 준왕 일파의 남하가 있었고 위만조선 멸망후 한 군현이 설치되면서 또 한차례 이주가 진행됐다. 고조선의 정세 변화와 맞물려 부여·고구려 계통의 이주민도 나타났다.
이들 정치집단이 언제, 왜, 어디로 남하해 가야 땅으로 들어왔는지는 아직 누구도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임효택 동의대 박물관장은 “가야땅에는 일찍이 지석묘(고인돌)를 만들며 살았던 토착민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108년께 서북한 지역 위만조선이 망하고 정치 군사적으로 세력을 갖춘 유이민들이 남하, 현지 세력과 결합해 스피디한 문명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고고학적으로 지석묘가 토광 목관묘로 바뀌는 과정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며 “이런 변화는 당시 동북아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고 지적했다.
울산대 백승옥 연구교수는 “변한인의 모태인 한(韓)의 근원에 대해선 아직 학계에서 정리된 게 없다”면서 “분명한 것은, 가야지역 토착 청동기인들이 어떤 형태로든 북방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제대 이영식(사학) 교수는 “김해지역에 사람이 살았던 최초의 흔적은 기원전 25세기께로 고조선 건국과 비슷하다”면서 김해시 장유면 수가리 패총을 증거로 들고 있다.
학자들은 “남해안과 영남 일원은 고대에도 자연·지리적으로 천혜의 삶터였을 것”이라면서 “북방 유이민들이 이런 곳을 마다할리 없고 토착민과의 경쟁, 이합집산의 과정을 거쳐 가야문화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풍성한 고고학적 자취
야지역에 토착세력이 있었다는 불멸의 증거는 지석묘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인 지석묘는 경남 김해와 함안, 창녕, 고령 등 가야지역 곳곳에 널려 있어 삼한시대(고고학계선 원삼국 시대라 부름) 변진 소국의 사회상을 읽는 단서가 되고 있다.
가야지역의 지석묘는 남방식인데, 창녕군 장마면 유리, 일명 ‘덤바우’로 불리는 지석묘와 함안 도항리 도동 제3호 지석묘는 위치 및 형태가 독특하다.
창녕의 유리 지석묘는 5개의 고임돌을 받친 무게 36곘에 이르는 거석으로, 구릉지의 높은 곳에 만들어져 막강한 정치권력의 존재를 상정케 한다.
함안지역에는 전국 2만여기의 지석묘 중 180여개가 산재해 있다. 이 중 도동 제3호 지석묘는 여성의 성기와 다산을 상징하는 성혈과 태양신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 동심원 등이 그려져 있다. 암각화가 새겨진 지석묘는 국내에서 이것이 유일하다.
가야인의 원류는 삼한시대의 유적 유물을 통해서도 부분적인 갈피를 잡을 수 있다. 대표적 유적지로는 경남 사천의 늑도, 창원의 다호리, 울산 하대, 김해시 양동이다.
창원 다호리 유적은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울산 하대와 김해 양동 유적은 삼한사회가 고대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을 각각 보여준다.
가야 묘제의 전시장이라 불리는 김해 양동유적은 잃어버린 가야와 가야인 연구의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이곳의 연대는 기원전 2세기~서기 5세기로 추정됐는데, 청동기-초기 철기-철기시대로 이어지는 시기별 유물들은 국제성을 띤 세련된 가야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리고 있다.
미니 /2천년전의 국제무역항 늑도
경남 사천의 늑도는 삼천포와 남해군 창선도 사이 작은 섬으로, 삼한시대 중기(초기 철기시대)의 집자리, 패총, 분묘 유적이 밀집해 있는 고고학적 보고다.
섬의 규모는 46㏊ 정도로 작아 웬만한 지도에는 나타나 있지도 않지만, 1985~1986년, 1998~2001년 발굴조사 결과, 2천년전의 국제무역항이란 놀라운 사실이 확인됐다.
늑도에서는 150여기의 집자리와 많은 인골이 나왔다. 이곳의 인골은 복장(復葬)과 개를 함께 묻는 등의 특이한 장법을 보여 주목됐다.
이곳 패총에서는 또 엄청난 양의 토기조각과 함께 중국의 반량전(사진)까지 나왔다. 네모난 구멍 양쪽에 ‘반(半)’ ‘량(兩)’이란 글씨가 새겨진 반량전은 중국 한무제 5년(BC 175년)에 제작된 화폐로, 국내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늑도에서는 낙랑토기(BC 1세기∼AD 1세기) 파편과 일본 야요이계 토기(BC 2세기∼AD 1세기)까지 출토됐다. 이같은 유물은 중국 전한(前漢) 시기에 이미 중국~남해안(늑도)~일본 규슈를 잇는 해상교역루트가 형성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곳을 발굴한 부산대 박물관 이재현 조교는 “늑도는 섬 전체가 고고학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면서 “늑도인들의 문화 및 사회구조, 국제교역, 인근 소가야와의 관계 등은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늑도 유적 B지구를 조사한 부산대 박물관측은 현재 약 30곘(빵박스로 3천개)의 유물을 수습해 정리중이다.
늑도 유적의 성격에 대해 공동 발굴자인 동아대 박물관측은 ‘삼국사기’ 등에 등장하는 포상팔국 중 하나인 ‘사물국(史勿國)’의 중심지일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사천시는 지난 85년 1월 경남도 기념물 75호로 지정된 늑도 패총을 국가지정 사적지로 승격해줄 것과 현지에 유물전시관(예산 1백억원)을 건립해줄 것을 정부에 건의해 놓고 있다.
학자들은 “삼천포~늑도~창선간 교량(3차선)이 내년 4월 개통되면 늑도 유적이 훼손될 수 있어 그 전에 체계적인 보존방안이 수립돼야 한다”고 말한다.
가야인들은 구슬을 몹시 좋아했던 모양이다. 신라인들이 금은을 선호한 것과 대조된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는 변진 사람들은 구슬을 보물로 여기고 옷에 꿰어 장식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가야고분에서 실제로 다채로운 구슬 꾸러미가 쏟아졌다.
학계의 연구를 보면 가야인들은 색색의 유리구슬이나 수정, 대롱옥 등으로 목걸이나 팔찌를 만들어 착용하고 조가비를 다듬어 목걸이나 팔찌를 만들었다. 팔찌는 왜에서 수입한 것도 있었다.
김해 양동 고분군은 가야 장신구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 곳이다. 양동 270호분에서 나온 구슬 꾸러미는 현대인의 눈을 의심케 할 정도다. 수정제 곡옥(曲玉), 다면옥(多面玉) 및 남·청·홍색의 유리제 구슬로 된 꾸러미는 길이의 총연장이 무려 313㎝에 달했다.
양동 322호분에서 나온 것도 총 길이가 158㎝였는데 구성물이 다채롭기 그지없다. 수정제의 곡옥, 다면옥, 마노제의 환옥(還玉), 남색 유리제의 환옥 등은 오늘날 금은방에 갖다놓아도 손색없을 정도다.
임효택 동의대 박물관장은 “2~3세기 가야고분의 구슬은 장식성이나 출토량에 있어 당대 최고 최대를 자랑한다”며 “재질도 유리, 수정, 호박, 비취 등으로 다양하고 형태도 판옥, 대롱옥, 다면옥 등으로 화려하고 섬세하다”고 지적했다.
가야인들이 구슬을 이용하여 부를 표시하려는 관습은 4세기대의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도 나타난다. 가야에서 전형적인 귀금속 유물이 출토되는 시기는 5세기 이후로 부산 복천동 고분군을 통해서다. 이는 신라에서 금은 제품이 출토되는 시점과 거의 비슷하다.
홍익대 김태식(역사교육) 교수는 “가야시대 장신구는 일반인들이 소유하기 어려운 것으로, 늦어도 3세기 전반에는 가야사회에 사회·경제적으로 일반인과 구별되는 귀족계급이 나타났다고 볼수 있다”고 말했다.
# 어디서 살았을까
김해시 봉황동 158번지 일원의 야산 구릉지. 3~6세기 가락국(금관가야) 시대의 조개더미, 집자리, 환호 등이 발견된 이곳에는 지금 ‘미니 가야촌’이 만들어지고 있다.
김해시가 ‘가야복원 사업’의 하나로 재현중인 건축물은 곡물저장용 고상건축, 여름철 임시 주거용 고상가옥, 3세기대의 수혈(竪穴)주거, 이보다 한단계 발전한 지상가옥, 망루, 목책 등이다.
송원영 김해시 문화재 전문위원은 “이번 재현사업은 학계의 고증과 자문, 전문용역을 통해 실시되고 있다”며 “수혈생활에서 지상건축으로 바뀌는 단계에서 일부 벽체가 생기고 기둥과 서까래의 기능 분담이 이뤄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주안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김해시는 내년 1월말 이들 건축물을 완공한뒤 시민들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가야시대 주거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단편적으로 나온다. ‘땅을 파고 지은 초가 움집에 문이 위에 나 있고 온 가족이 한집에서 산다(居處作草屋土室 形如塚 其戶在上 擧家共在中)’.
문헌자료와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보면, 가야 초기 백성들의 집은 이전부터 내려오던 수혈주거가 많지만 일부는 서까래가 땅에서 떨어진 반(半)수혈주거의 모습을 보인다. 취락은 김해 봉황동, 양동 유적이 말해주듯 산 계곡의 비탈이나 언덕이 있는 얕은 구릉지대가 많다.
땅을 파고 만든 수혈가옥과 함께 땅위에 기둥을 세우고 벽체와 지붕시설을 한 지상주거도 있다. 시골 원두막을 연상시키는 고상가옥은 남방식 주거의 영향을 받았다는 지적도 있다. 고상가옥의 지붕은 맞배의 초가지붕이 대부분이며, 고상가옥 내부에는 화덕과 굴뚝이 설치돼 있어 지배층이 이용했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 뭘 먹었을까
‘삼국지’에는 변진, 즉 가야지역은 ‘토지가 비옥해 벼와 오곡을 심기에 알맞다’는 기록이 있다. 또 가락국의 역사를 알려주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밭’과 ‘새로 만든 논’, ‘곡식창고’와 ‘농한기’같은 용어가 등장한다. 이같은 문헌자료는 가야인의 식생활 기반이 오곡을 위주로 한 농업이란 것을 시사한다.
가야지역의 패총이나 주거지, 고분에는 기록을 증명이라도 하듯, 쌀 보리 콩 팥 조 밀과 같은 다양한 곡물 잔재가 검출되고 있다.
조개류와 어류도 빼놓을 수없는 식생활 재료였다. 어류는 연근해 어종은 물론, 청어 대구 등 한류성 어종, 내륙 지방의 민물어종, 고래 수달 강치 등 수중생물까지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다. 이들 조개류 및 어류는 경북 고령 등 내륙지역의 고분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당시 해안과 내륙의 활발한 물자 교류를 엿보게 한다.
가야인들은 육류도 섭취한 것으로 보인다. 가야지역 패총지에서 사슴 노루 멧돼지 소 돼지 개 닭 등의 동물 뼈가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동물 가운데 일부는 사육을 통해 확보됐다는 연구도 있다.
‘가야 문화사’로 박사학위(98년)를 받은 계명대 권주현 강사는 “가야의 식생활은 4세기를 전후해 지배층의 주·부식이 분리되는 등의 변화가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학자들은 가야고분에서 간간이 감 복숭아 머루 등 과일이나, 밤 도토리 호두 등 견과류의 잔존물이 출토되는 사실을 중시, 당시 채소류도 재배되었을 것으로 본다.
가야시대에는 이처럼 곡류, 육류, 어패류, 과채류 등 자연에서 얻어지는 재료들을 총체적으로 이용하여 식생활을 영위했다고 볼 수 있다.
가야의 생업에 대한 연구는 아직은 걸음마 단계다. 이 분야를 연구해온 밀양대 박물관 곽종철 학예연구원은 “가야시대 초기 해안에는 반농반어가 행해졌고, 내륙과 해안의 농경방식도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며 가야의 생활사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가 활발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 어떻게 입고 지냈나
권주현 강사는 “3세기대 가야지역에는 직물짜는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어 지배층들은 꽤 멋있는 옷을 입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삼국지’에는 ‘변진사람들은 뽕나무를 재배하고 누에치기를 하며 겸과 포를 만들 줄 안다’ ‘광폭의 세포를 만든다’ 등의 의생활 관련 기록이 나온다.
겸은 견(絹), 즉 실크 종류의 고급직물이며, 광폭의 세포는 마(麻)의 일종으로 섬세한 직물이다. 이들 옷감은 당시 지배신분층이 외출복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늘게 짠 백(帛)을 일컫는 능(綾)도 있었는데, 허왕후가 시집올 때 능현(綾峴)에서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께 바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역시 지배층이 입었던 옷으로 유추할 수 있다.
가야인의 의복은 대체로 바지 저고리가 기본이 되고, 겉옷(袍)과 모자(帽)가 더해져 세트를 이룬다. 여자는 치마(裙)와 저고리, 겉옷을 걸쳤고 모자 대신 머리장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신라나 백제, 고구려와 크게 다르지 않다.
권 강사는 “가야유적에서 출토되는 방추차는 당시 직조가 많이 행해졌음을 알려주며 6세기대의 가야금은 현을 고저에 맞게 굵고 가늘게 만들어야 하므로 섬유제작 기술이 상당 수준에 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설명했다.
가야가 살아온다14. / 가야인의 삶/ ③시간의식과 연중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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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연구는 1980년대 이후 눈부신 진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연구의 대부분은 가야의 전쟁과 외교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사나 국제관계에 대한 연대기적 복원에 국한되었다. 이제부터라도 가야인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생각을 가졌으며 가야사회의 상식은 무엇이었는지, 또 그들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는 등의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1년 세는 방법 달랐을듯
기가야(1∼4세기)와 후기가야(5∼6세기)의 시간의식은 서로 달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지’는 3세기의 삼한사회가 5월과 10월에 제사의례를 거행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삼한의 하나인 변한은 곧 전기가야이다. 5월제가 농작물의 씨앗을 뿌린 뒤 어린 싹이 자라는 힘을 북돋아 주면서 풍작을 기원하는 것이었다면, 10월제는 농작물의 수확에 감사하는 추수감사제와 같은 성격이었다. 전기가야에서는 1년 동안에 파종과 수확에 관련된 2회의 농경의례가 거행되고 있었다.
반면에 같은 시기의 부여, 고구려, 예 등에서는 12월의 영고(迎鼓), 10월의 동맹(東盟), 10월의 무천(舞天)과 같이 1년에 단 한 차례만 제의가 거행되고 있었다. 한민족의 남쪽지역에서는 연2회의 제의가, 북쪽지역에서는 연1회의 제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사의례를 기준으로 할 때 고대의 남과 북은 1년을 세는 방법이 달랐을 수도 있다. 남쪽의 삼한에서는 지금의 1년을 2년으로 간주했을 수도 있다. 이른바 ‘1년 2배력’ 또는 ‘춘추력’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전기의 가야사회와 많은 유사성을 보이는 고대일본의 왜인사회에 대한 연령의 기술은 매우 시사적이다. ‘삼국지’는 3세기께 왜인들의 평균 수명을 80∼100세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 규슈 가네노쿠마 유적과 야마구치현 도이가하마 유적에서 출토되는 많은 양의 인골에서 확인되는 평균 수명은 40세 전후이다.
문자기록과 고고학자료의 차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현재로서는 양쪽 자료 모두에 거의 절대적인 신빙성이 인정되고 있다.
#봄에 한살 가을에 한살
국지’가 전하는 왜인사회의 평균수명 80∼100세는 같은 시기 야요이(彌生) 인골의 평균 연령 40∼50세에 비해 정확히 2배이다. 이는 3세기 왜인사회는 중국과 다른 시간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왜인들의 평균 수명에 2배 되는 숫자가 중국인들에게 전해졌고, ‘삼국지’는 대방군과 일본열도를 오고갔던 사절들의 전문을 통해 기록하였다.
일본열도의 야요이시대는 전기가야에서 전파되었던 쌀농사와 금속기를 토대로 성립하였다. 그런 만큼 전기가야에서 거행되었던 봄과 가을의 농경의례와 동일한 제의가 치러졌을 것이고, 이러한 사실은 같은 시대의 고고학 자료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따라서 전기가야와 같은 두 차례의 제의를 기준으로 나이를 계산했다면, 당시 중국인의 1년은 왜인에게 2년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 봄에 제의를 치르고 한 살 먹고 가을에 축제를 벌여 다시 한 살을 먹는 것 같은 시간의식이 존재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아야만 ‘삼국지’라는 문헌기록과 야요이 인골이라는 고고학 자료가 모두 맞아떨어지게 된다. ‘삼국지’는 같은 시기의 왜인들이 정월과 사계를 몰라 봄의 파종과 가을의 수확을 한 해의 첫머리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다. 중국과는 달리 지금의 1년을 2년으로 계산하거나 지금의 1년에 2살씩을 먹던 왜인사회의 시간의식을 기록한 것이었다.
전기가야에서 3세기께까지 중국식 역(曆)이 채용되었던 흔적은 없다. 낙랑·대방군과의 외교교섭도 있었지만 매우 산발적이었다. 더구나 중국의 천자에게 한 해의 초하룻날을 받았던 분삭이나 중국식 역법의 사용은 5세기 중 후반이 되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479년에 대가야왕이 양자강 이남의 남제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여 장군호와 왕호를 받아 중국의 책봉체제에 가담하게 되면서 중국식 역법의 사용이나 지금과 비슷한 시간의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4세기까지의 전기가야는 중국과는 다른 시간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같은 시기에 왜인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시간의식과 비슷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기가야인은 지금의 1년을 2년으로 계산하거나 지금의 1년에 2살을 먹는 것과 같은 ‘1년 2배력’의 시간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수로왕은 157년간 살았나
국유사’ 가락국기는 수로왕의 재위연대를 157세로 전해 그 사실여부를 믿기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기가야의 시간의식을 적용하면 수로왕의 실제 나이는 157세의 반인 78세 정도였던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등에 이례적으로 길게 기록되어 있는 고대 왕들의 재위기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전개시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기가야가 되면 지금과 비슷한 시간의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왕 하지(荷知)는 479년에 중국 남제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였고 장군호와 왕호를 요청하는 상표문을 제출하였다. 이 상표문은 중국력의 연월일로 기록되었을 것이고 그 이전에 이미 중국식 역법과 같은 시간의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또 대가야의 가실왕은 5세기 후엽에 우륵에게 가야금 12곡을 작곡케 하였다. 가야금 12곡은 12개월의 율을 본떠 만들었던 것으로 전한다. 전기가야와 달리 후기가야에서는 중국과 같이 1년을 12개월로 계산하는 역법이 채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식 역법에 따랐던 연중행사도 확인되고 있다. ‘일본서기’는 6세기 중반에 안라국(安羅國·함안)을 비롯한 가야 각국에서 정월에 제사가 거행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가야다움의 재발견
월의 제사는 백제도 당연시하던 시대적 상식이었고 가야인의 정신세계의 단편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기가야와 후기가야의 시간의식의 차이는 가야의 사회적 진전과 왕권의 발전을 보여 주는 새로운 지표가 될 수 있다. ‘1년 2배력’이라는 전통적 시간의식에서 지금과 같은 중국식 역법의 채용이라는 시간의식의 변화는 가야사회의 발전과 국가형성의 획기적 기준을 설정하는 새로운 지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의식과 관련될 수밖에 없는 것이 연중행사이다. 절기에 따른 연중행사는 동일집단의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다른 집단과의 차별성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가야의 연중행사는 정치체적 구별보다 더 근본적인 백제나 신라와의 구별이 되게 하였을 것이다.
여러 나라로 나누어져 있던 가야제국을 ‘삼국유사’가 하나의 공동체와 같이 6가야로 기술했던 것은 신라나 백제와 구별되는 가야의 문화적인 동질성에 기초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문화적 동질성이란 가야사회만의 연중행사를 통해 타 집단에 대한 차별성을 강조하는 것에서 확인되었을 것이다.
가야사회의 연중행사를 복원하는 작업이야말로 가장 가야다움을 발견하는 일이 될 것이다.
예안리 고분군이 있는 곳은 장시(長詩)마을이다. 원래 시례리(詩禮里)로 불렸으나 8년전에 분동됐다. 마을이 자리한 곳은 언뜻 평지처럼 보이나 이 마을 서북쪽의 까치산(342m)과 마을 동쪽 마산(馬山·60m)이 서로 연결되어 표고 10m 가량의 낮은 구릉을 형성하고 있다.
시례리란 이름은 마을 뒤편에 시루처럼 생긴 시루봉에서 연유한다. 처음에는 시례골로 불리다가 시례리로 변했다고 한다. 마을 앞의 넓은 농경지는 앞들(안들)이라고 불리는데 예안천이 흐른다. 장시마을은 시례리 들머리에 해당하며 현재 37세대 130여명이 산다. 예부터 장승이 서 있었다 해서 장승배기라 불리기도 했다.
장시마을 이장 권성조(65)씨는 “일제때 일본사람들이 예안리 고분을 마구 파헤쳐 쓸만한 물건을 많이 빼갔다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해방 직후까지도 다수의 돌덧널이 노출되어 있었으나 그 뒤로는 밭으로 사용됐다”고 말했다.
예안리 고분 동쪽에 있는 마산(馬山)에도 가야의 늦은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이 있다. 군데군데 토기편이 흩어져 있으나 대부분은 밭으로 개간됐다. 마산의 남쪽 사면에는 먼 옛날 바닷물이 드나든 흔적으로 보이는 해식동굴이 형성돼 있다.
문화재 당국은 지난 78년 6월 예안리 고분군 4천3백41㎡만을 사적 제 261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으나 다른 곳은 방치하고 있다.
예안리 고분을 발굴한 부산대 신경철(고고학) 교수는 “이곳은 고고학적·형질인류학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유적”이라며 “예안리 일대는 아직 잔존 유물이 많을 것으로 보이므로 당국의 체계적인 보존 정비대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예안리 고분 현장을 방치할 게 아니라, 비슷한 고인골이 출토된 일본 야마구치현처럼 야외 전시관이나 인류학 박물관을 건립해 산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천6백년전 삶의 편린
경남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에는 가야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더듬어볼 수 있는 유적이 있다. 사적 261호 예안리 고분군이다.
부산→김해 14번 국도를 따라가다 김해 선암다리를 건너 우회전해 서낙동강을 끼고 6㎞ 가량을 들어가면 예안리 고분군을 만난다. 겉으로는 고분인지 잔디밭인지 모를 밋밋한 유적이지만, 입간판을 찬찬히 훑어보면 ‘역사적 전율’이 느껴진다. 1천6백여년전 바로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자취가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예안리 고분은 지난 76~80년 부산대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뤄져 모두 183기의 분묘유구와 1천4백여점의 부장유물이 출토됐다. 이곳에서 확인된 목곽묘, 수혈식 석곽묘, 횡구식 석실묘, 옹관묘 등 다양한 묘제와 토기·철기류는 4~7세기 가야사의 ‘편년’을 규정하는 기준을 제공했다.
특히 여기서 수습된 210기의 인골 가운데 절반 가량은 보존상태가 양호해 고대인의 형질인류학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예안리 고분군 유적조사보고서’(부산대 박물관 1985년 발간)에 따르면, 예안리 인골들은 대개 장대한 기골이 특징이다. 그들의 평균 키는 남성이 164.7㎝, 여성이 150.8㎝로 1930년대 중부 이남 사람들의 평균 키보다 크다.
골격상의 특징은 현대인에 비해 안면이 높고 코가 좁으며 콧부리가 편평하다. 전체 사망자 중에는 남자보다는 여자가 많고, 청·장년층의 사망률이 높다. 이곳의 옹관묘에는 대부분 어린 아이가 매장됐는데, 11세 이하의 어린이 사망자가 확인된 것만 전체 4분의 1에 달했다. 당시의 높은 유아사망률은 의료수준이 낮았던 고대사회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도표 참고>
#다양한 질병에 시달려
예안리 고분은 당시 일반 백성들의 생활고까지 보여준다. 부산대 의대 해부학교실과 일본 성 마리안나 의대팀이 공동으로 벌인 예안리 고 인골 연구결과를 보면, 가야인들은 생전에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다양한 질병을 앓았다.
인골들 중에는 관절이 정상인보다 굵고 척추가 늘어난 경우가 적지 않다. 척추 디스크를 앓은 흔적을 보인 인골도 있다. 이 경우 삐져나온 뼈가 신경을 건드렸을 터이니 당사자는 지독한 통증에 시달렸을 것이다.
뼈가 부러지고도 치료를 못해 뼈 모양이 비정상적으로 변한 것도 있다. 정상적인 인골에 비해 대퇴골 관절이 훨씬 큰 인골도 있다. 이 경우는 골반에 대퇴골이 완전히 맞물리지 못하면서 고관절 부분이 부어 아마 평생 한쪽 다리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외상에 의한 염증이 골막염을 일으킨 경우도 보이고, 증세가 더 심해 염증이 뼈까지 침투해 들어간 인골도 있다. 이런 질병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요즘도 나타난다.
예안리 인골들 중에는 날카로운 이기(利器)에 의한 손상흔, 즉 전쟁 등으로 인한 상처나 사망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4~7세기 김해 예안리는 아마도 평화로운 시대였던 것 같다.
예안리 인골들은 그들이 생전 어떤 음식을 주로 먹었는지까지 알려준다. 당시 사람들의 상당수는 충치를 앓았다. KBS 역사스페셜팀은 2년전 예안리 인골들의 치아를 엑스레이로 촬영해 이 사실을 밝혀냈다.
이들의 치아는 대개 상아질이 완전히 닳아 있을 정도로 마모가 심했다. 치간의 3분의2 정도가 없어진 경우도 있다. 치아를 많이 사용했다는 뜻이다.
생전에 이가 모두 빠져 잇몸으로 살았을 사람도 있고, 축농증에 시달린 이도 있다. 고름주머니가 생겨 입속에서 골수염이 진행된 경우도 나타난다.
학자들은 예안리 인골의 치아에 옥니가 많은 것을 들어 당시 가야인들이 아래턱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치아 대부분에 균열이 나 있는 것은 모래가 섞인 딱딱하고 거친 음식을 많이 섭취한 증거라고 말한다.
#고대 국제교류까지 설명
예안리 고분의 인골들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조개껍데기가 많은 땅에 묻혀 뼈가 썩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안리는 원래 깨끗한 백사장이 있는 모래땅으로, 당시 사람들은 이곳에 생활쓰레기장인 패총을 만들었다. 조개껍데기의 알칼리 성분은 산성 토양을 중화시켜 인골의 부식을 막는다. 조개껍데기가 많이 섞인 토양은 비가 오면 패각의 칼슘 성분이 녹아 모래땅으로 스며들고 땅 속의 인골에까지 탄산칼슘이 충분히 공급되어 최상의 보존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가야인의 원류를 더듬어볼 수 있는 인골은 예안리 외에도 경남 사천시 늑도의 30여기 유구에서도 확인됐다. 학자들은 일본 규슈 북부에서 출토된 기원전후의 ‘야요이 인골’이 예안리 가야인과 같은 형질이라는 사실을 중시, 야요이 토기를 만든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건너갔을 것으로 파악한다. 가야인과 고대 일본인은 2천여년 전부터 교류를 가진 것은 물론 형질인류학적인 공통점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예안리 고분은 가야인들의 삶과 죽음을 전해주는 한편 고대사회의 국제교류까지 설명해주는 타임머신으로 비어 있던 가야사의 중요한 장면을 채워주고 있다.
가야사 16. 제3부 가야인의 삶 ⑤가야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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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비한 ‘가락고찰’
김해시 동북쪽의 신어산(630m) 중턱에는 은하사(銀河寺)란 유서깊은 절이 있다. 김해시 어방동 인제대 앞을 지나 가야랜드에 닿기 전에 우회전, 산쪽으로 2.2㎞ 들어가면 병풍같은 바위산을 배경으로 고즈넉한 운치를 자아내는 은하사에 닿는다. 가는 길목에는 ‘영화 달마야 놀자 촬영지’라고 적힌 팻말이 군데군데 서 있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절 입구에 적힌 ‘가락고찰(駕洛古刹)’이란 문구. 과연 가야시대 절일까.
전승(傳承)에 따르면 은하사는 원래 서림사로 불렸으며 인근 동림사와 함께 인도 아유타국의 왕자인 장유화상(長遊和尙)에 의해 창건됐다. 은하사 대웅전의 동편 벽위에 내걸린 판문에는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과 혼인하러온 허황옥과 그의 오빠 장유화상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함께 도래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대웅전 대들보에는 아유타국 수호신이라는 신어(神魚)가 그려져 있어 신비감을 안겨준다. 신어산이란 이름도 여기서 연유한다.
서림사, 동림사는 임진왜란때 불탔고 그뒤 서림사(은하사)만 재건됐다. 고색창연하게 보이는 지금의 대웅전은 1837년께 중창된 것이라 한다.
이와 비슷한 전설은 장유면 대청리 불모산의 장유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장유폭포를 따라 꼬불꼬불 산길을 내쳐 오르면 불모산 연봉인 용지봉 어귀에 조용하게 자리잡은 장유암을 만난다. 장유8경이라 이를 만큼 경관이 빼어난 이곳에는 장유화상 사리탑(경남 문화재자료 제31호)이 역사의 수수께끼처럼 서 있다. 가락국 제8대 질지왕때 세운 것으로 전해지나 제작수법은 고려말께로 짐작된다.
김해지방에는 이같은 ‘가락고찰’이 즐비하다. 신어산의 은하사, 동림사, 영구암(靈龜庵), 인근 무척산 정상의 모은암, 불모산의 장유암, 부산 녹산동의 흥국사가 그러하다. 이들 사찰은 공통적으로 허왕후 도래기인 서기 1세기께 가야불교가 전래됐다는 구비전승 자료를 남기고 있다.
#가야불교 남방전래설
김해지방에는 ‘가락고찰’만이 아니라 쌍어문, 신어, 태양문, 코끼리상, 파사석탑 등 인도 등지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는 자료가 많다. 이를 근거로 일부 연구자들은 한반도에 불교가 가장 먼저 전래된 곳은 가야라고 주장한다.
향토사학자 허명철(김해 금강병원장)씨는 오랜 실지조사와 연구활동을 통해 가야불교의 ‘남방전래설’을 제기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파사석탑이나 장유화상과 연관된 기록 및 전승자료를 근거로 하면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고구려에 불교가 공식으로 전해진 것은 서기 372년(소수림왕 2년), 백제는 384년(침류왕 원년)이다. 신라는 이보다 훨씬 늦은 527년(법흥왕 14년)이다. 고구려 묵호자가 경북 선산에서 포교활동을 한 것도 눌지왕(417~458)때의 일이다. 372년 이전에 가야에 불교가 전해졌고, 그것도 중국의 북방불교가 아닌 남방불교라면 한국 불교사는 완전히 새롭게 쓰여야 한다.
이에 대한 학계의 입장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신빙성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없고, ‘삼국유사’의 기록 자체가 후대의 불교적 윤색일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부산대 백승충(역사교육) 교수는 “김해의 가야불교 관련 유적과 전설은 대부분 후대의 것으로 가락국 불교가 1세기 전반에 전래됐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면서 “그러나 서기 452년에 가락국 질지왕이 왕후사(王后寺)를 세웠다는 것은 타당한 것으로 보여 이때를 전래 기점으로 잡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인제대 이영식(사학) 교수도 452년을 주목한다. 그는 “왕후사 창건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된다”면서 “대가야나 안라국의 권역에 드는 고령 합천 함안지역 등에도 5세기 전반에 불교가 퍼진 것으로 보이며 5세기 중엽에는 지배층에서 수용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신라불교의 토양 역할
‘삼국유사’에 전하는 가락국 질지왕 2년(452)의 왕후사 창건은 내용이 구체적이고 정황이 충분해 학계에서 대체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연기설화나 창사(創寺) 전설류가 아닌 불교관계 사실이 가야 역사에 처음 나타난 것도 이때다.
질지왕 원년(451)은 신라 눌지왕 35년, 고구려 장수왕 39년, 백제 비유왕 25년에 해당한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를 받아들인 상태지만 신라는 국가 차원에서 수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록으로는 가야가 신라보다 75년 앞서 불교를 공식으로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부산대 채상식(사학) 교수는 “우리나라 불교의 큰 판도는 고구려 신라가 주류지만, 중국의 남조와 해양문화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면서 “가야의 경우 남방불교적 요소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신라말 고려초에 김해지방은 독자적 불교 세력권을 형성했을 개연성이 있으며 이 지역의 가야불교 전승 역시 후대에서 ‘가야전통’을 중시한 결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가야불교가 소홀히 여겨진 것은 가야의 특수성과 무관하지 않다. 가락국은 불교를 수용한뒤 불과 70여년뒤에 망해 발전할 시간이 너무 짧았다. 김해지방에 가야불교의 실제적 자취가 좀처럼 확인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가야멸망 뒤 신라에서 가야 왕실을 계승한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가야불교는 신라에 흡수되거나 수용되어 훗날 신라불교, 고려불교가 융성하는 바탕이 됐다는 견해도 제기한다.
허왕후의 오빠로 전해지는 장유화상(일명 허보옥)은 가야불교를 거론할 때 피해갈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과연 실존 인물일까.
실존인물로 보는 쪽은 ‘가락국기’의 기록과 가락고찰에 얽힌 각종 구비전승 자료를 들이댄다. 가야의 불교 전래를 허왕후-장유화상의 도래시기와 같이 보는 것이다.
향토사학자 허명철씨는 “옛날 인도에는 긴옷을 입고 사는 장유(長遊)족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들 중 누군가가 허왕후와 함께 가락국에 와서 불법을 전파했을 것”이라며 오늘날 장유면(長有面)이 ‘長遊’에서 비롯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가공인물로 보는 쪽은 가야에 불교가 본격 전래된 때를 질지왕 2년(452)으로 볼때, 400년 전의 개국설화에 등장한 인물의 존재는 당연히 허구라는 주장이다.
‘이야기 가야사’(청아출판사)를 쓴 역사학자 이희근씨는 “허왕후 설화는 불교적으로 윤색된 이후의 산물이며, 장유화상에 대한 자료도 기껏해야 조선 후기나 구한말의 기록”이라고 지적한다.
한편 왕후사를 세운 지 500년 뒤 그 터 주변에 장유사(長遊寺)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도 눈여겨 볼 대목. 이것이 맞다면 장유사는 고려초에 생겼으며 사찰 이름에서 따온 듯한 장유화상도 그 즈음의 인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질지왕이 세웠다는 왕후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쟁점이다. 허명철씨는 “자료 고증과 수십차례의 현장조사 결과 김해시 장유면 태정리(태정산)가 거의 확실하다”며 현지의 폐사지를 근거로 댄다. 송원영 김해시 문화재 전문위원도 여기엔 동의했다. 그러나 아동문학가였던 고 이종기씨는 장유면 대청리 폭포수 아래쪽이 바로 절터였다며 다른 주장을 폈다.
왕후사 건립을 가야불교의 공식 시점으로 잡으려면 왕후사터에 대한 학술적 고증이 선결과제다.
#부뚜막에 웬 귀신
한반도 동남부의 고대인, 특히 가야인들은 ‘부뚜막에 귀신이 있다’는 독특한 믿음을 가졌던 것 같다. 현대의 주거공간에서는 부뚜막을 찾기 어렵지만 먼 옛날부터 부뚜막은 요긴한 삶의 공간이었다. 음식물을 조리하고, 부엌에 온기를 가져다주며, 방까지 데워주는 부뚜막의 다기능은 고대인들에게 신앙으로 인식됐을 수 있다.
전통 농경사회에서는 부뚜막에 불이 꺼지는 것을 집안의 망조쯤으로 받아들인 듯한데, 이를 증명하는 유적들이 지난 80년대 이후 잇따라 발굴됐다. 경남 김해의 부원동, 합천 저포리, 진주 대야리 등 가야지역 유적에서 조사된 부뚜막이 있는 집자리는 전기가야에 이른바 부뚜막 신앙(조왕신앙)이 성행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인제대 이영식(사학) 교수는 “부뚜막 문화는 기원전 108년 한(漢)에 의해 멸망한 고조선의 유민들이 이주하는 과정에서 철기문화와 함께 남쪽으로 전파됐으며, 가야지역에는 기원전후 처음 부뚜막 유적이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삼국지’ 변진조에는 ‘가야사람들은 귀신을 섬기는데 차이가 있고, 부뚜막은 반드시 집의 서쪽에 만든다’하는 대목이 있어 문헌상으로도 부뚜막 신앙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삼국지’의 기록은 서기 3세기 후반이고 김해 부원동 주거지 등은 1~2세기로 추정돼 시기적으로도 맞아떨어지고 있다.
학계의 연구결과 전기 가야인들은 절기에 따라 부뚜막에 대한 제의를 가졌으며 폐기할 때도 특별한 의례를 행했다. 가야의 부뚜막 신앙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열도에도 전파돼 현지에서도 신앙으로 숭배됐다.
#불교 이전의 토속신앙
가야인들은 부뚜막 외에도 다양한 민간 신앙과 믿음을 갖고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 불교가 5세기 중반에 수용됐다고 보면 불교이전의 여러가지 신앙이 가야인들의 생활을 지배했다고 볼 수 있다.
연구자들은 먼저 토속신앙의 존재를 주목한다. ‘삼국유사’ 탑상(塔像) 어산불영조에는 수로왕이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나찰녀(羅刹女)’와 ‘독룡(毒龍)’을 주술로 제압했다는 대목이 있다. 후대에 불교적으로 윤색된 것이긴 하지만 이를 달리 해석하면 불교 이전의 토속신앙의 단면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주술을 중심으로 하는 가야의 토속신앙은 유물이나 유적을 통해 그 편린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샤머니즘이다.
가락국과 대가야의 건국신화에 보이는 구지봉과 가야산, 소도의 대목(大木)은 지상의 샤먼이 행하는 제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변진과 전기가야에서 큰 새의 깃털을 매장하던 풍습이나 가야고분에서 나온 압형(鴨形)토기, 마골(馬骨), 주형(舟形)토기 등은 새, 말, 배를 상징한다. 이는 샤먼이 저 세상을 여행하는 수단으로 당시에 샤머니즘이 성행했음을 암시한다.
#물, 동물, 새도 숭배
물과 우물을 신성시하는 정천(井泉)신앙도 주목된다. 물에 부정을 씻어 주는 힘이 있다고 믿고 행했던 가락국의 계욕제와 가락국 이전 구간사회에서 우물을 파서 마셨다는 기록 등은 정천신앙의 단면이라는 것.
후대의 전승이긴 하나 대가야에는 왕을 위한 특별한 우물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군 연혁조에는 왕궁 옆에 어정(御井)이 있어 왕의 생명력을 보장하고 통치력을 쇄신하는 방편으로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해 예안리 유적에서는 ‘井’ 또는 ‘井勿’자를 긁어 새긴 명문토기가 있는데, 이 역시 정천신앙의 요소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진주 남강의 귀동 고분군에서도 6세기 중엽 대가야식 토기의 뚜껑 안에 ‘井’이라 쓰인 글자가 조사됐다.
모든 동물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동물신앙’도 유행했다. 김해의 대성동, 구지로, 양동 고분군 등에서 나온 호형대구(虎形帶鉤)와 마형대구(馬形帶鉤) 등은 지배층이 힘의 상징으로 이들 동물을 숭배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구지가에 등장하는 거북,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의 거북형태 미니어처, 창원 성산패총과 사천 늑도유적에서 나온 사슴뼈 등은 이들 동물이 힘과 다산의 상징으로 인식됐음을 보여준다. 동물뼈를 이용한 복골(卜骨·점치는 뼈)도 유행했다.
함안 도항리 고분에서 나온 여러 마리 새가 달린 미늘쇠는 해신 산신 천신과 인간세계를 연결해주는 메신저로 새가 숭배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늑도 유적에서 개가 사람과 함께 매장된 사례는 가야인들이 개를 영혼이 있는 동물로 인식한 증거다.
가야에는 이밖에도 두개골 성형의 풍습(편두), 파형동기, 통형동기, 청동제 정(鼎)과 같은 의기(儀器), 판상철부 철정 등 벽사로서의 철기의 부장, 샤먼과 철에 관한 바이칼 연안의 민속지적 자료, 고분 부장품의 배열상과 출토위치, 각종 제사유적 등 당대인들의 토속신앙 자취를 보여주는 유적이 부지기수다.
이들 자료를 바탕으로 가야인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것은 향후 과제다.
경남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장유택지개발지구 대로변에는 ‘생소한’ 삼국시대 마을 하나가 형성돼 있다. 처음보는 사람은 “웬 이상한 고상건물?”하고 의문을 갖게 되지만 다가가 안내판을 보면 예사로운 곳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관동고분 공원’이라 이름된 이곳은 지난 97년 장유지구 택지개발사업을 위한 시굴 및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아랫덕정 유적’의 일부를 옮겨 복원한 근린공원이다. 삼국시대 생활유적을 복원하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발굴조사를 맡았던 동의대박물관 임효택 관장은 “이곳은 국내에서 발굴이 전무한 6~7세기대 삼국시대 생활유적으로 가옥 및 창고 유구, 마을길 유지, 우물지, 옹관을 비롯 토기·철기유물이 나왔다”며 “고상주거에 이용된 사다리(계단)가 처음 확인된 것도 큰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학자들은 신라가 서기 532년에 김해 금관가야를 점령, 이곳에 진주했을 개연성은 있으나 500년 넘게 지속돼온 가야문화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는 만큼 가야 생활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지적한다.
복원된 것은 고상건물 5개동, 반수혈 건물 1개동, 우물 1개소이며, 전체 복원부지는 2천4백70㎡다.
사업시행자인 한국토지공사는 3억여원의 예산(부지비 제외)으로 지난 2000년 8월 공사를 완료해 2001년 12월 관리권을 김해시로 넘겼다.
그러나 이 고분공원은 썰렁하기 그지없다. 주변 도로표지판에 공원안내가 되어 있지 않아 찾기가 힘들고, 찾아가더라도 안내자 한명 만날 수 없다. 김해시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이곳은 제대로 소개돼 있지 않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어렵사리 고분공원을 만들어놓고 방치한 것은 난센스”라며 “홍보를 강화해 산 교육장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호리 유적은 없다?
한국 고대사를 다시 쓰게 만든 창원 다호리 유적은, 허망하게도 현장에 아무런 흔적이 없다.
국도 25호선이 지나는 창원시 동읍 삼거리의 이정표에는 ‘주남저수지·다호리 유적’이라 적힌 표시가 분명하게 돼 있다. 그러나 30번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주남저수지 가는 길만 안내되어 있을 뿐, 다호리 유적은 온데간데 없다. 이상한 일이다.
어렵사리 다호리 유적 안내판을 찾는다 해도 실망하기는 마찬가지. 고분군이 있어야 할 자리에 논밭과 과수원, 그 중간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나 있기 때문. 논배미 귀퉁이의 안내판만이 이곳이 사적 제327호라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다.
고고학적 발굴사의 쾌거로 평가되는 다호리 유적은 왜 이 모양인가.
“사적지의 절반 가량이 사유지다. 예산확보가 안돼 보존 정비계획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고분을 정비하고 전시관이라도 지어야 할 것으로 안다.” 창원시 문화계 담당자의 말이다.
지난 88년초 도굴된 고분이 신고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발굴이 이뤄진 다호리 고분군은 그해 9월 3일 다호리 237번지 일대 120필지, 10만1천8백2㎡가 사적지로 지정됐다. 그러나 이후 10년이 넘도록 당국은 예산부족을 이유로 방치하고 있다.
다호마을 주민 김용기(66)씨는 “다호리 유적은 일제때부터 도굴이 자행됐으며 정식 발굴 직전까지 도굴꾼들이 수시로 들락날락했다. 다호리 일대 모두가 고분이라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옛날 낙동강 제방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마을 동남쪽에 있는 야산(현지에서 ‘댐등’이라 부름)까지 물이 들어왔다고 하며 조개무지 흔적도 발견되고 있다”고 전했다.다호리 유적에서 나온 2천여년전의 칠기와 목재유물이 기적적으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김씨가 말하는 지형적 조건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가야 철의 뿌리
경남 창원시 동면 다호리. 부산~마산을 잇는 14번 국도를 타고 가다 동면 삼거리에서 30번 지방도를 따라 북쪽으로 10분쯤 가면 ‘의창 다호리 유적’이 있다. 철새도래지인 주남저수지 들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다호리 유적은 삼한시대 연구, 특히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대 변한의 실체를 규명하는 결정적인 고고학 자료를 제공한 곳이다.
다호리에서 다량 출토된 칼, 창, 화살촉 등 무기류와 각종 형태의 도끼를 비롯해 괭이, 따비, 낫 같은 농공구 등은 기원전 1세기 무렵, 이 지역에 이미 철기가 실생활에 이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가야의 모태인 변한이 철기사회였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다호리 유적을 한반도 역사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다호리의 기원후 1세기대 무덤에서는 철광석까지 출토돼 당시에 이미 철 생산이 이뤄졌음을 암시한다.
국립김해박물관 임학종 학예연구실장은 “무덤의 철기 부장과 철 생산이 있었다는 것은 기원전 1세기에 철을 지배하는 유력자가 존재했다는 것을 말한다”고 지적했다.
한반도 남부 즉 변한지역이 철 생산-공급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은 3세기대 중국측 기록인 ‘삼국지’ 위서동이전 변진조에 잘 나타나 있다.
‘나라에서 철(鐵)이 생산되는데 한(韓),예(濊),왜(倭) 모두가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는 철을 중국의 화폐처럼 사용했고 또한 낙랑군과 대방군에도 공급했다(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여기서 말하는 국(國)이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변한 혹은 가야의 어느 지역을 일컫는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다호리뿐만 아니라 김해 양동, 대성동, 부산 복천동 고분 등에서도 다량의 철기가 쏟아졌고 곳곳에서 철기제작에 이용되는 단야구까지 나와 가야사회와 철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확인시킨다.
기록에 나오는 단야족(鍛冶族) 역시 철 지배자의 이야기다. 수로왕의 성이 후대에 김씨(金氏)로 일컬어지고 신라 김씨가 생겨난 배경에는 단야족에 대한 숭배, 즉 철강과 성화(聖火)를 다루는 신비한 힘을 가진 지배자를 상정했기 때문이다.
수로왕 시대의 인물인 신라의 4대왕 탈해 역시 야철 기술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놀랄만한 기술수준
지난 2001년 가을, 인제대 내 김해발전전략연구원은 흥미있는 연구 보고서 하나를 냈다. ‘가야 철기유물의 과학적 분석을 통한 가야 철기문화 복원에 관한 연구’라는 긴 제목의 보고서는 가야 철기에 대한 금속공학적 접근이어서 크게 주목됐다.
연구는 홍익대 박장식(금속공학) 교수가 주도하고 신경철(부산대 고고학), 이영식(인제대 사학) 교수가 동참해 각각 고고학적·문헌학적 코멘트를 붙였다.
연구대상 철기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수습된 환두대도, 철촉, 철정, 꺾쇠, 주조철부 등 1~5세기 철기 유물 12점. 연구진은 이들 철기의 미세조직을 관찰, 공학적 분석을 통해 당시 철 기술체계를 역으로 추론하는 방법을 택했다.
연구결과를 요약하면 전성기때 가야는 동북아 최대의 철기 제작기술을 보유한 철강산업 강국이며, 금관가야는 최소한 4세기까지 신라보다 세(勢)의 우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가야의 철기 기술체계는 단조에 의한 형태가공, 표면침탄법(浸炭法)에 의한 제강과정, 열처리 과정 등 세단계로 이뤄졌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영식 교수는 “이같은 3단계 제작기술은 철기생산에 관련된 각기 다른 공방의 존재와 전문가 집단(조직)을 상정케 하고 나아가 이들 집단을 장악했던 강력한 정치권력, 즉 ‘철의 왕국’을 확인시켜 준다”고 지적했다.
가야의 기술자들은 필요에 따라 강 소재의 기계적 성질을 자유롭게 조절하는 효과적인 열처리 기법도 활용한 것으로 분석됐다. 주된 열처리 기법은 담금질이며 제한된 부위에만 담금질 효과가 미치도록 하는 특별한 기술도 적용됐다.
주조철부 역시 완성된 제품을 녹지 않을 정도의 높은 온도에 장시간 유지시키는 특별한 열처리를 했다. 이렇게 생산된 주조철부는 실제 도끼로 사용됐다.
신경철 교수는 “주조철부가 실용도구라는 금속공학적 분석결과는 부산 복천동 21, 22호분 등 대형 고분의 묘광을 팔 때 이 철부가 실제 사용된 것으로 보여 고고학적 연구성과와도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주조철부에서는 상당량의 비소(As)가 검출, 이 유물에 사용된 철광석의 산지를 추정하는 단서를 제공했다. 연구진은 철부의 성분으로 보아 울산 달천광산에서 채굴된 철광석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내놓고 있다.
박장식 교수는 “가야의 철기 기술체계는 형태가공-제강공정으로 이루어지는 신라식 기술체계와 비슷하지만, 백제식(제강공정-형태가공 순)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철기에 대한 금속공학적 연구는 지난 80년초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처음 시도한 적이 있고 이후에도 간간이 개별연구가 시도되기도 했다. 박 교수는 “가야 철의 실체 규명작업은 이제 갓 시작단계”라며 “철기 기술체계의 시기적인 변천문제, 가야 연맹체내 국가간 기술체계 비교, 신라기술과의 관계, 제련기술 및 원산지 추정, 일본과의 비교연구 등은 앞으로의 과제”라고 말했다.
<19> 제4부 가야의 힘과 미 ②철산지를 찾아라 '가야 철 연구가 손명조씨'
가야사 연구자 중 드물게 ‘가야의 철’을 집중 연구해온 손명조(41·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지난 6일 본사 주최 ‘가야사 시민강좌’의 강사로 참여, ‘가야의 철’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강연 후 그를 인터뷰했다.
-가야사 연구자 중 철기연구가는 얼마나 되나.
▲가야사를 푸는 열쇠가 ‘철’인데도 연구가는 2, 3명이다. 그만큼 접근이 어렵다는 말도 된다. 철은 시간이 가면 녹이 슬고 햇빛을 보면 부식된다. 다루기가 까다롭다.
-철이 왜 중요한가.
▲고대사회의 철은 오늘날 석유나 핵무기에 비유된다. 그 자체가 사회변동 요인이기도 하다. 철을 가진 자, 강철을 만드는 자가 사회를 지배했다.
-고대 철생산은 어떻게 이뤄졌나.
▲철이 생산되려면 원료(철광석), 연료(나무와 숯), 구조물(제련로), 노동력, 기술력이 모두 구비되어야 한다. 그렇잖으면 수입해야 한다. 구조물인 노(爐)는 하이테크다. 그래서 제작이 끝나고 나면 모두 뜯어낸다. 기술보안 때문인 것 같다. 조사해보면 대부분 바닥뿐이다.
-고대인들은 철광석을 어떻게 찾아냈나.
▲아직도 의문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철광석은 전국에 두루 분포한다. 문제는 철의 함유량이며 경제성이다. 20~30%의 쇠가 함유돼 있는 철광석은 경제성이 없다. 70% 이상은 돼야 철을 뽑을 수 있다. 탄소함유량을 잘 맞춰야 강철이 된다. 그런 원료를 어떻게 찾아내 제련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김해의 생림, 생철에는 철산지가 있을 법한데.
▲10여차례 현장을 조사했으나 찾지 못했다. 김해지역 고분에서 쏟아진 엄청난 철기를 볼 때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찾아야 한다.
#철 생산의 단서들
가야의 그 많은 철기들은 누가 어디서 어떻게 생산해 유통시켰을까. 철의 힘을 대내외에 과시했던 가야는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어려운 질문을 던져 놓고 해명을 기다리고 있다.
아쉽게도 가야의 철 생산유적(철산지·제련로)이 조사된 예는 아직 없다. 단편적인 단야(鍛冶·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벼리는 것) 유물들이 나오긴 했으나 가야 철의 실체에는 접근이 안된다.
재미있는 단서들은 있다. 조선시대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등에는 김해 창원 밀양 합천 양산 안동 등지의 가야 옛 지역에 철산(鐵山)이 있다고 기술돼 있다. 또 이들 지역에 불무골 쇠똥섬 똥뫼 금곡 야로 생철 생림과 같은 철산지를 암시하는 지명이 많고 지금도 적지 않은 철똥(슬래그)이 발견되고 있다.
#산더미처럼 쌓인 쇠똥
먼저 6세기대 제철유적으로 확인된 밀양 사촌으로 가보자.
밀양 시내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울산쪽으로 10㎞쯤 가다 보면 최근까지 철을 캐냈다는 금곡(金谷)이란 마을을 만난다. 이곳 삼거리에서 표충사 가는 길을 따라 금곡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 감물가는 길로 들어서면 사촌(沙村)마을이다.
마을 외곽의 나지막한 구릉이 2년전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조사한 사촌 제철유적. 주민들이 ‘똥뫼’라 부르는 유적 주변에는 ‘철재(鐵滓·쇠똥)’가 야산을 이룰 정도로 규모가 방대하다.
조사 결과 여기서는 제련로 7기, 송풍관 및 노벽 조각 등이 확인됐다. 제련로의 조업시기는 함께 출토된 토기로 보아 6세기 전반~7세기 전반으로 추정됐다.
시기적으로 보건대 가야의 철 생산 거점을 신라가 장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발굴을 맡았던 손명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제련로의 형태, 송풍관 편 등을 보면 대규모의 철생산 기지가 틀림없다”면서 “조업시기의 상한을 5세기 후반까지 올려볼 여지도 있어 가야 철과의 연관성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원통형의 노(爐), 노벽의 재료와 축조기술, 송풍기술 등을 보면 4세기대의 제철유적인 충북 진천의 석장리 유적과 기술수준이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밀양의 동쪽 송곡산(금곡마을 뒷산인 용암산으로 추정)에서 철이 난다는 기사가 있는데, 사촌유적이 그 현장일 가능성도 있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아리송
이번에는 함안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남해고속도로 의령IC에서 의령 쪽으로 난 1004호 지방도로를 따라 3km 정도 들어가면 함안군 군북면 월촌(月村)마을에 닿는다.
이 마을 동남쪽의 나지막한 구릉에는 시기를 알 수 없는 고분군이 있고, 군북면 월촌출장소 인근에는 ‘쇠똥섬’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농경지와 맞닿은 구릉지를 살펴보면 슬래그로 짐작되는 흑갈색의 유리질 돌이 수북이 쌓여 있다. 여기서는 회청색 경질토기편까지 채집됐다고 한다.
주변 정황으로 보면 야철지가 분명한데 시기가 논란이다. 향토사 연구자들은 가야시대 야철지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으나, 김해박물관측은 고려 초기의 제철지일 개연성이 크다고 본다.
함안군 여항면 주동리(별천), 군북면 원북리 신사동, 군북면 덕대리 대암동에도 야철지가 있다. 주동리에는 고인돌군과 고분군이 산재하고 많은 슬래그와 노 파편이 수습돼 가야시대 야철지일 개연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아라가야향토사연구회 조희영 회장은 “함안 도항리 말산리 고분에서 많은 철기가 출토된 것을 보면 함안 어딘가에 가야시대 야철지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며 “가능성이 있는 곳을 선정, 체계적인 학술조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름이 걸작인 야로
합천군 야로면 야로리 돈평마을의 야로(冶爐) 철산지는 이름부터 걸작이다. 권병석 합천문화원장은 “문헌기록이나 지명, 현장에 널린 슬래그 등으로 볼때 가야의 철산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돈평마을 뒷산은 불무골(또는 불뫼골)로 불리며, 주변에는 금평(金平)마을, 금굴동 같은 철산을 암시하는 지명이 있다.
고령군청 이형기 학예연구사는 “대가야의 강성한 힘은 야로 철산지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며 “연구자에 따라 3세기 후반부터 채광되기 시작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고 하나 조사가 미비하다”고 지적했다.
경남발전연구원은 지난 연말 야로 철산지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 표층에서 슬래그와 조선시대 기와편을 발견했다. 이일갑 조사1팀장은 “철 제련시설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이므로 퇴적층을 본격적으로 발굴해 들어가면 가야 유물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조사된 가야지역 철기생산 유적은 부산 동래패총, 김해 대성동 소성(燒成)유구, 김해 봉황동 유적, 고성패총, 창원 성산패총 등 11곳. 그러나 대부분의 유적은 단편적인 단야(대장장이 일) 유구이다.
제련 공정을 알 수 있는 곳은 밀양 사촌유적과 양산 물금유적 2곳인데, 그나마 신라의 철 생산집단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시기도 6세기 이후다.
가야세력이 주도한 가야 철의 생산기지는 과연 어디였을까. 이를 찾아내는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이 부분이 해명돼야 ‘철의 왕국’이 제대로 세워진다.
가야지역의 철제유물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물건은 철정(鐵鋌)이다. 일명 덩이쇠로 불리는 철정은 철기의 중간소재이면서 교역시 화폐로 사용됐다는 것이 학계의 연구 결과다. 학계에 보고된 최초의 철정 자료는 일제때인 1918년 경남 창녕고분군에서 출토된 ‘철편(鐵片)’을 통해서다. 철정은 7세기말에 편찬된 ‘일본서기’에도 언급돼 있다. 4세기 중반 백제의 근초고왕이 왜에 보낸 물품목록에 덩이쇠 40매가 나타나고 있어 당시에 이미 교역이 이뤄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철정은 이른 시기의 판상철부(板狀鐵斧)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세기께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다량의 판상철부가 나왔으며 이후 3~4세기 가야지역 분묘에서 다량이 쏟아졌다.
5세기대 김해 양동리와 울산 하대 등지에서는 10장씩 묶음이 된 ‘10배수 매납’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일정한 형태와 규격성은 화폐 기능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때부터 판상철부는 철부(도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소형의 철정으로 바뀐다.
철정이 화폐로 사용됐다는 것은 ‘삼국지’ 변진조에도 언급돼 있다. 가야지역 유적에는 잘룩한 철판이 묶음이 된 상태로 발견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마치 중국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이 노끈으로 묶인채 발견되는 것과 같다.
철정의 기원은 판상철부(板狀鐵斧)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야지역에서는 기원전 1세기께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처음 판상철부가 나왔다.
동래 복천동 고분에서 나온 철정은 분석결과 단타(鍛打)에 의한 여러 겹 상태, 미세한 조직결정, 낮은 탄소함량 등의 특징을 보여 철기제조를 위한 중간소재임이 밝혀졌다.
이 철정은 신라 백제지역에서도 발견되지만 기능과 수량 면에서 가야유적의 것과 비교가 안된다. 일본열도에서는 규슈와 오사카가 있는 긴키(近畿)지방에서 집중 출토되고 있다. 그 형태를 비교해보면 한반도에서 유입된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국립김해박물관에 복원 전시된 가야의 무사. 이같은 철갑옷은 지금까지 가야지역에서 70여벌이 출토됐다
#늠름한 기마무사
철기(鐵騎), 즉 철갑을 입은 중무장한 기병이라면 얼른 고구려군을 떠올리기 쉽지만, 가야에도 이런 철기가 있었다. 가야지역 고분에서 출토되는 철갑옷과 마갑, 무구, 마구 등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부산 동래구 복천박물관 제2전시실에는 가야의 철기병이 복원 전시돼 있다. 머리에는 몽고발형주라 불리는 길쭉한 투구를 쓰고, 목가리개(경갑)를 둘렀으며 몸에는 철갑옷을 껴입은 1천6백여년전 기마 무사다. 말 역시 머리에 투구(마면주)를 쓰고 몸에 마갑을 빈틈없이 둘렀다. 말안장과 재갈, 등자 같은 마구도 갖췄다.
왠만한 창이나 화살 공격에도 끄떡없을 성 싶다.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이 철갑옷이다. 제작기법이 정교해 가야 철 기술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철갑옷은 모두 70여벌. 이는 한반도 철갑옷의 90%에 해당한다.
#두께 1㎜의 하이테크
지난해 6월 국립김해박물관은 ‘한국고대의 갑옷과 투구전’을 열면서 국내 처음으로 철갑옷을 복제했다.
복제를 맡았던 경주민속공예촌 내 ‘삼선방’의 김진배(41) 대표는 “철판을 오려서 단조를 하고 접합 부위에 리베팅을 해 철갑옷과 찰갑(비늘갑옷) 등을 복제했다”며 “두드려가며 곡면을 잡아내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말했다. 갑옷 복제에는 약 한달이 걸렸다고 한다.
이때 모델이 된 것이 김해 퇴래리 출토 판갑옷. 가슴 부위에 고사리 문양을 덧대어 장식성을 높인 가야의 가장 대표적인 종장판정결갑옷이다. 높이는 64.8㎝이며 무게는 대략 10㎏ 정도다. 두께는 1㎜를 넘지 않는다.
갑옷을 집중연구해온 부산 복천박물관 송계현 관장의 설명. “두께가 1㎜를 넘으면 무거워져 실용성이 줄어든다. 너무 얇은 것도 문제는 있으나 30~40m 거리에서 화살을 쏠 경우 판갑과 수직으로만 맞지 않으면 튕겨버린다. 설령 수직으로 맞는다 해도 위력은 현저히 약화될 것이다. 여러모로 볼때 판갑옷은 방어에 유용했을 것이다.”
퇴래리 판갑옷은 모두 27개의 철판조각으로 되어 있고 연결했을 때 곡면처리가 되도록 입체적으로 재단되어 있다. 갑옷에는 또 8㎝ 내외의 간격으로 구멍이 뚫려 있고 구멍마다 작은 못이 고정돼 있다. 정결(釘結)이라 불리는 이 기법은 요즘의 리베팅과 같다.
이렇게 사용되는 못은 80개가 넘는다. 5세기 이후의 판갑에 사용된 못은 매우 작아 주물을 하지 않으면 만들기 힘든 형태다.
재단이 입체적으로 된 것도 눈길을 끈다. 전문가들은 나무 본을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인체에 맞는 곡면을 만들기 위한 것인데, 이 부분은 정교한 기술이 요구된다. 연결된 철판을 불에 달궈 반복해서 두드리는 단조(鍛造)도 빼놓을 수 없는 공정. 이때 사용되는 것이 단야구(鍛冶具)다. 가야의 무덤에서 나온 쇠집게나 망치는 오늘날 대장간에서 보는 도구들과 흡사하다.
이들 단야구는 가열된 철판을 일일이 재단해 잘라내거나 갖다붙이는데 쓴다.
판갑 제작은 이처럼 복합적이고 입체적 과정을 거치게 되므로 단조기술의 발달 정도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갑옷의 형태가 마무리되면 개폐를 용이하게 하는 경첩으로 앞판과 뒤판을 연결한다. 입체 디자인과 정결, 단조기술이 결합돼 비로소 하나의 철갑옷이 완성되며 이것이 가야 철 기술의 핵심이다.
#철갑옷에 스민 꿈
철갑옷이 무덤에서 완제품으로 출토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녹슨 쇳덩어리 형태로 철투구나 마구 등이 함께 발견된다. 이 철갑옷들은 작업실로 옮겨져 화학처리를 통해 약화된 철조각을 단단하게 한 다음, 마치 퍼즐을 맞추듯 낱낱의 쇳조각을 끼워 맞춘다. 갑옷 한벌을 보존처리 하는데는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2년까지 걸린다.
철갑옷이 본격 등장하는 시기는 4세기초로 울산 중산리 등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 나왔고 부산 복천동, 경남의 김해 대성동·양동, 함안, 합천, 경북 고령 등지의 가야고분에서도 다량 출토됐다.
판갑옷은 제작방법 및 철판의 형태에 따라 사각판(方形板), 긴사각판(長方形板), 삼각판(三角板) 등으로 구분된다. 가야지역의 갑옷은 세로로 긴 철판을 이어 만든 종장(縱長)판갑옷이 많다.
비교적 큰 철판을 이용하여 만든 판갑옷과 달리, 물고기 비늘모양의 철판을 가죽끈으로 엮어 만든 찰갑(札甲)도 있다. 4세기초 고구려에서 가장 먼저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부산 복천동, 경북의 경산 조영동 등 삼국시대 고분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4세기대의 판갑옷은 보병용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는 당시의 전술이 보병전임을 시사한다. 5세기대가 되면 비늘갑옷의 출토량이 늘어나고 말투구, 재갈, 안장 등의 마구가 함께 부장되는 경우가 많아 이 시기에 중무장한 기마전사가 가야지역에 등장했음을 암시한다.
송계현 관장은 “가야의 철갑옷은 4세기대부터 출토되어 5세기대에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인다”며 “철갑옷이 무덤에 다량 부장된 것은 권력 및 권위를 상징하는 풍습에 따른 것으로 파악된다”고 지적했다.
가야의 철갑옷은 자체 문자기록을 갖지 못해 잊혀져온 가사야를 조각조각 기억하고 있는 ‘철의 타임머신’이다.
경남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낙동강가에는 가야진나루가 있다. 1900년 초반까지 이곳이 ‘하서면’으로 불릴 때에는 면소재지가 있었을 만큼 흥성했던 포구였으나, 지금은 배도 사공도 떠나고 모래언덕만 남았다.
이 나루의 기원은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나루 앞에 세워져 있는 ‘가야진사’라는 사당은 나루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동국여지승람’ 등의 사료를 보면 가야진사는 신라 19대 눌지왕(서기 450년)이 강 건너 가야를 공격하기 위해 왕래하던 자리로, 후에 낙동강 수신(水神)에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삼국사기’ 제사조에는 신라의 지방 제후가 왕명에 따라 국가제사를 지내는 중사(中祀)가 있고 4독(瀆)을 두어 그런 제사를 행하게 했는데, 그 중 한곳이 ‘황산하’라고 돼 있다. 이곳의 제사전통은 오늘날 용신제로 바뀌어 이어지고 있다.
가야진사는 김해시 상동면 여차리 용당나루와 마주보는 위치에 있고, 용당나루 뒤편에는 용산(龍山)이 있다. 가야진사에 용신(龍神)이 모셔진 것도 특이하다. 기록에는 조선 태종때 사우(祠宇)를 세웠다고 하나 없어졌고, 지금의 것은 지난 1990년 재축조한 것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황산진(黃山津), 황산하(黃山河)는 바로 가야진 일원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가야·신라의 교전도 여기서 벌어졌을 것이다.
이곳을 왜 ‘가야진’이라 했는지 알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
가야진 용신제 기능후보자인 김진규(72)씨는 “신라 통일 전에는 가야세력이 이곳까지 미쳤을 것이고 후대에 전승되면서 그리 이름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주민 정순진(52·양산시 원동면 용산리)씨는 “신라가 (강건너) 가야를 치러가는 나루란 뜻에서 가야진이라 하지 않았겠는가”하고 말했다. 가야진사 재축조때 직접 참가했다는 정씨는 “건물 주변에서 주춧돌과 토기편이 나왔다”며 발굴을 촉구했다.
이런 역사적 전통을 살려 주민들은 ‘가야진 용신제’를 행하고 있으나 최근 맥이 끊길 위기라며 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경남 양산시 원동의 가야진 나루 전경. 삼국사기에 가야와 신라가 전쟁을 벌인현장으로 나오는 황산진은 바로 이곳을 지칭했을 가능성이높다
#황산진 전투
‘탈해이사금 21년(서기 77년) 8월에 아찬(阿) 길문(吉門)이 황산진구(黃山津口)에서 가야병(加耶兵)과 싸워 1천여명을 목베었다’.
기록에 보이는 가야와 신라의 첫 군사적 충돌이다. 두 나라는 이후 ‘피튀기는’ 싸움을 계속한다. 전쟁상황을 조금 더 보자.
‘지마이사금 4년 봄 2월에 가야가 남변(남쪽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에 왕이 친히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를 건넜다. 가야인이 숲속에 군사를 숨기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왕이 알지 못했다. 똑바로 나아가니 가야 복병이 일어나 몇겹으로 에워쌌다. 왕이 포위망을 뚫고 퇴각했다’.
‘지마이사금 5년(116년) 가을 8월에 장군을 보내 가야를 치게 하고, 왕이 직접 정병일만(精兵一萬)을 이끌고 뒤따랐다. 가야가 성을 굳게 닫고 지켰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므로 되돌아왔다’.
모두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초기 기록이다. 주어는 예외없이 신라다. 기록의 사실 여부와 편년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 몇가지 메시지가 있다. 신라에 맞서고 있는 가야세력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수로왕대 어떤 기사는 자신감이 넘쳐 난폭하기까지 하다.
‘파사이사금 23년 가을 8월에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서로 강역을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판결을 청하였다.
왕이 어렵게 여기고 금관국 수로왕이 연로하고 지식이 많다고 생각하여 불러 여쭈었다. 수로가 의견을 세워, 분쟁이 되는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 판결을 해준 수로왕은 낮은 신분의 사람이 접대하는데 노해 아랫사람을 시켜 보제(保齊)를 죽이고 돌아갔다’.
이들 기사가 언제적 이야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홍익대 김태식(역사교육) 교수는 “낙동강을 경계로 한 가야와 신라의 팽팽한 대결상황으로 봐서 소국단계를 지나 자기 세력권 내에서 연맹장 지위를 확보한 3세기 무렵의 사실로 짐작된다”고 지적한다.
주목되는 것은, 구체적인 전쟁장소로 황산진구(黃山津口) 또는 황산하(黃山河)가 나오고 있다는 점. 황산진은 낙동강 하류인 양산시 원동, 물금 일대를 말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는 김해 가락국의 동쪽 경계가 황산강(黃山江)이라고 언급해놓고 있는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맥이 닿는다.
낙동강 가야진나루에는 지금도 ‘가야진사(伽倻津祠)’라는 사당이 남아 있고, 지역주민들은 전통민속으로 ‘용신제’를 행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이곳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양산시 원동면과 김해시 상동면이 마주보는 형국으로, 고대 경주의 신라세력과 김해의 가야세력이 맞섰던 현장일 가능성이 높다.
양산지역이 언제 신라로 편입됐느냐는 논란이 따르지만, 양산 북정 고분군(사적 93호)과 부부총에서 출토된 많은 가야계 유물로 미루어보건대, 이른 시기에 가야계 정치집단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학계는 북정고분군이 대체로 5세기 중반께 신라로 넘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군 5만에 대적?
가야에 상비군이 있었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지만, 고분의 출토유물로 보아 김해, 함안, 고령 등에 포진한 군사력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길림성 집안의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에는 가야의 군사력을 유추할 수 있는 편린이 있다.
서기 400년 광개토왕은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보기(步騎) 오만(五萬)의 군대를 남쪽으로 파견, ‘임나가라(任那加羅)’까지 진출해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격퇴한다. 이른바 광개토왕 남정(南征)이다. 당시 고구려군은 동북아 최강의 철기병과 보병을 움직이고 있었다.
광개토왕 남정은 임나가라(김해세력으로 추정)에 엄청난 타격을 가해 전기가야를 해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신라·백제·가야·왜의 국제적 역학관계 변화를 유발했다.
논란은 있지만 이때 김해세력의 일파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또다른 일파는 경남 합천(옥전고분)으로 갔다고 보는 가설도 있다(신경철, 김태식, 조영제 교수 등 주장).
역시 논란은 있지만 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아라가야의 수비병)’의 존재도 5세기 초반 가야군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지난 93년 발굴된 함안 마갑총은 여러 철기부장품과 함께 국내 처음으로 완전한 형태의 말갑옷이 수습돼 5세기초 대고구려전을 수행했던 안라국 왕자의 모습을 떠올려준다.
비록 고구려군에 패퇴했다고는 하나 가야 연합군도 결코 만만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한성대 윤석효(사학과) 교수는 “가야군이 신라의 대병과 맞섰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더러 보이고 심지어 신라와 구원 관계를 주고받았다는 내용도 있다”며 “삼국의 틈바구니에서 가야가 최소 500여년을 버틸 수 있었던 바탕에는 그만한 정치력과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또 “고구려 남정때 백제-가야-왜의 연합군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황상 가야군이 주력을 이루어 고구려 5만 군대에 대적할 정도였다고 하니 가야군의 규모와 분위기를 엿볼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야의 마지막 전쟁은 경북 고령에서 펼쳐진다. ‘삼국사기’는 ‘가야가 반(叛)하여 신라왕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했다’는 기사로 가야사를 끝맺고 있다. 신라 진흥왕 23년(562년) 7월의 일이었다.
인제대 이영식(사학과) 교수는 “‘삼국사기’를 토대로 김해와 경주의 세력판도를 보면, 3세기 이전의 전반기에는 가야 우세, 중반기에는 균형, 5세기 이후 후반기에는 신라 우세로 돌아갔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목록으로
3세기말의 귀달린항아리. 이때부터 도질토기가 시작된다
가야사22. 제4부 가야의 힘과 미 ⑤노래하는 가야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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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말의 대변혁
서력기원 3세기말, 낙동강 하류역(域)에서 대변혁이 일어난다. 앞 시기에 보이지 않던 도질토기(陶質土器)가 등장하고, 순장 기마용 마구와 같은 북방문화 요소가 나타나는 것이다. 김해 대성동 29호분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이 가운데 귀달린항아리, 즉 양이부호(兩耳附壺)라 불리는 토기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이전의 것과 달리, 쇳소리가 날 정도로 단단한 도질토기였기 때문.
“양이부호는 중국 서진대(西晋代)의 것으로 일본의 고고 유물과 비교해보면 기원 280년대 전후일 것으로 여겨진다. 한반도에서는 낙동강 하류역에 가장 일찍 나타나고 있다. 도질토기의 시작 신호로 보아도 될 것이다.”(부산대 신경철 교수·고고학)
도질토기는 1천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운 회청색의 토기로, 이전의 와질토기(일명 김해식토기, 1~3세기에 나타남)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도질토기의 등장에 대해서는 기원전후 와질토기가 제작될때 함께 나왔다는 견해, 와질토기에서 발전했다는 견해, 낙랑군이 멸망한 4세기초로 늦춰보는 견해 등 다양한 의견이 제기돼 있다.
신 교수의 가설도 그러한 주장 가운데 하나이나, 양이부호보다 앞서는 도질토기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상당한 공감을 얻었다. 김해 대성동 고분을 발굴한 신 교수는 이를 금관가야 성립과 연계시키고 있다.
#절대연대 논란
가야토기는 도질토기 출현 이후 낙동강 서안에서 주로 생산된 것을 말한다. 가야토기의 압축파일을 풀어보면 가야사의 시공간이 어렴풋하게나마 보인다. 토기양식의 분포권으로 편년(編年)과 영역을 설정하는 것이다. 물론 논란이 있다.
신경철 교수와 박천수(경북대 고고인류학) 교수는 최근까지 절대연대를 놓고 첨예한 ‘토기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신 교수는 가야토기를 6단계로 편년한다. 1단계는 ‘김해형 목곽묘’(대성동 29호분) 출현시기, 즉 양이부호가 등장하는 3세기말이다. 이어 대성동 고분군 축조중단 시기를 4단계로 보아 4세기 3/4분기로 설정한다. 이는 경주 월성로 가-29호분의 토기들을 근거로 했다.
반면, 박천수 교수는 신 교수보다 절대연대를 50년 정도 올려 잡고 있다. 박 교수는 일본 고분연대의 연구성과를 추출하고 국내 고고학 자료를 비교 검토했다. 그는 백제 무녕왕릉과 고령 지산동 39호분에서 각각 출토된 용봉문 환두대도를 동일형식이자 동일시기의 것으로 본다.
실례로 기원 400년 광개토대왕 비문의 경자년, 즉 고구려 남정 전후 시기의 영남지역 고분인 경주 황남동 고분(3, 4호분)과 동래 복천동 고분(21, 22호분)에 대해 신 교수는 5세기 2/4분기, 즉 430년대로 보지만, 박 교수는 4세기 후반대로 파악한다.
경북대 이희준(고고인류학) 교수는 신라고분에서 나온 마구(馬具)를 대상으로 절대연대를 도출하고 있는데, 박 교수의 견해와 비슷하다.
부산대와 경북대의 토기 편년이 다른 것이다.
토기 편년에서의 50년 시차는 아주 큰 문제다. 금관가야의 멸망과 한반도 도질토기의 일본 전파 등이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가야지역에서 아직 기년(紀年)을 말해주는 비석 등이 발견된 예가 없어 절대연대 논란은 한동안 계속될 수밖에 없다.
#토기로 본 영역
토기 분포권을 통한 영역설정 또한 학계의 ‘뜨거운 감자’다.
신경철 교수는 금관가야 전성기에는 낙동강 하류역은 물론 서부경남, 심지어 영산강 유역까지도 금관가야의 정치연합에 가담한 것으로 본다. 신 교수는 일본에서 출토되는 초기 스에키가 영산강 유역의 토기와 유사하다는 것을 근거로 삼는다.
부산시립박물관 홍보식 학예연구관은 ‘외절구연고배’라 불리는 토기를 주목한다. 이 토기는 4세기 후반~5세기 초의 짧은 시기에 나타나며 김해·부산지역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이를 근거로 홍 학예연구관은 “외절구연고배의 분포범위는 금관가야의 최대 영역을 나타낸다. 그 범위를 보면 동으로는 철마-해운대, 북으로는 낙동강, 서로는 창원 가음정동-도계동-진해 웅천으로 연결되는 지역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와관련, 그는 4세기 이후 김해세력은 외절구연고배와 노형토기가 분포하는 부산의 복천동 세력까지 포괄했을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대가야의 영역에 대해 박천수 교수는 “대가야 양식의 토기는 고령 지산동 35호분 단계인 5세기초에 성립하며, 고령을 중심으로 합천 거창 함양 남원 장수 진안 구례지역에 6세기 중엽까지 넓은 분포권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같은 방법으로 김형곤 창원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아라가야(안라국)는 5세기를 지나면서 함안분지를 중심으로 그 외곽 지역인 칠원 창원 진동 군북 의령권까지 직경 35㎞의 영역을 설정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함안지역의 특징적 토기인 화염형투창고배가 김해, 경주를 비롯, 일본 긴키지방(오사카)에서도 다수 출토되고 있는 현상도 주목된다. 화염형투창고배는 굽다리부에 불꽃모양(火焰形)의 굽구멍(透窓)이 뚫린 독특한 형태의 토기다.
이주헌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4세기때 함안양식 토기문화의 전개와 화염형투창고배의 상호관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고구려 신라 백제보다 더 풍성하고 다양한 토기를 남기고 사라진 가야. 최근 활발한 발굴조사 덕에 ‘말하는 가야토기’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22> 제4부 가야의 힘과 미 ⑤노래하는 가야토기 '스에키 토기'
미니/도질토기와 스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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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토기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본 고분시대(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상당) 중기에 나타나는 스에키(須惠器)이다. 일본판 도질토기인 셈인데 가야에서 전파됐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스에’는 ‘쇠’를 말한다.
회색빛이 도는 단단한 스에키 토기는 앞 시기에 나타났던 적갈색의 무른 하지키(土師器) 토기와는 뚜렷이 구별된다.
일본 오사카시 부근의 스에무라(陶邑), 오바데라(大庭寺)고분은 스에키 토기가 나온 곳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출토된 초기 스에키 제작품 중에는 김해나 함안, 고성지역의 토기양식을 빼닮은 것이 많다. 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장군형 토기같은 것도 눈에 띈다.
5세기 초반의 스에키는 가야지역 곳곳의 토기양식이 혼합된 양상을 보이다 이 시기가 지나면 모두 ‘일본식’으로 바뀐다. 스에무라, 오바데라에서 나온 초기 스에키는 일본 고분시대 편년의 기초를 제공했을 만큼 일본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초기 스에키는 가야지역의 도공들이 일본으로 대량 이주해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원 400년 고구려군 남정으로 낙동강 하구의 국제교역항이 쇠퇴한 것을 계기로 가야인이 대량 이주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전부터 이주가 진행되다가 이때 본격화됐을 가능성도 있다.
부산대 신경철 교수는 “5세기초 신라의 팽창으로 인한 가야연맹의 붕괴-김해 대성동 고분군 축조중단-일본 초기 스에키 생산은 동일선상에 있다”고 주장한다.
가야인들의 일본이주 배경과 현지에서의 역할, 가야 후손들의 일본내 위상과 활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미니/방치되는 비지정문화재
“지난 60년대초 이곳에 집을 지을 때 작은 항아리같은 토기를 주워 깨소금단지로 썼다 하더라구. 토기조각은 처치가 곤란했을 정도로 많았고…”
경남 함안군 가야읍 묘사리 윗장명마을에 사는 김기만(65)씨의 회고다. 김씨의 집 뒤란 대밭에는 지금도 흙속에 토기파편이 시루떡처럼 쌓여 언덕을 이루고 있다. 지표조사 결과 이곳은 4~5세기대 토기 폐기장 유적으로 파악됐다.
현장을 동행한 백승옥 함안군 학예연구사는 “이렇게 토기편이 다량 노출된 유적은 전국적으로도 찾기 어렵다”면서 “대략 보아도 단경호, 기대, 목 짧은 항아리에 들어간 토기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아랫장명 도요지’라 불리는 황두연(70)씨 집 주변에도 곳곳에 토기편이 흩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3세기대까지 올라가는 쇠뿔모양의 우각호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문제는 이같은 비지정 문화재가 방치되고 있다는 것. 백승옥 연구사는 “보존을 위해서는 문화재로 지정해 토지 등을 매입해야 하나, 해당 지자체는 민원을 우려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자치단체장이 문화재 지정을 건의토록 한 것도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비지정 문화재를 훼손·절취할 경우 처벌케 하는 규정이 있기는 하나, 고발이 없으면 적발이 거의 안된다. 문화재보호법과 건축법이 따로 놀고, 도시계획·국토이용 관련 법규가 서로 겉돌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라가야향토사연구회 조희영 회장은 “지표조사 등을 통해 보호가치가 확인된 매장유물은 발굴보다 보존조치가 더 중요하다”면서 “가야문화권에는 비지정 문화재가 널려있다시피 해 관리방안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시리즈23. 4부 가야의 힘과 미 ⑥토기가마의 비밀
#가야시대 도요촌
가야시대에도 도요촌(陶窯村)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어디일까.
경남 함안군 가야읍 묘사리 장명마을은 학자들이 가야시대 도요촌이 자리한 곳으로 주목하는 지역이다. 상당한 근거가 있다. 장명마을에는 토기가마터와 폐기장 유적이 비교적 생생하게 남아 있고, 입지 또한 도요촌으로 손색이 없다.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부서진 노(爐) 조각과 토기편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어 ‘노천 박물관’이 따로 없다는 느낌도 든다.
남해고속도로 함안IC에서 법수면 쪽으로 난 지방도를 따라 2㎞ 가량 가다 좌회전,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 장명마을이 나온다. 마을 앞쪽은 ‘한바다’라 불리는 함안평야와 맞닿아 있고 주변은 완만한 구릉이 형성돼 있다.
‘아랫장명 도요지’라 불리고 있는 유적지는 지난 97년 여름, 아라가야향토사연구회(회장 조희영)의 유적 지표조사 과정에서 존재가 드러나 지난 99년말 함안군의 의뢰로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조사결과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함안지역 일원에 퍼진 각종 토기의 제작거점이 바로 장명마을이었던 것. 발굴팀은 2기의 토기가마와 유물을 조사한 결과 이 일대에 대단위 전문 토기생산 집단이 존재한 것으로 추정했다. 토기가마는 구릉의 경사면을 이용, 기반암을 굴착해 만든 반지하식 등요(登窯·굴가마)로, 대량생산체제가 갖춰져 있었음을 암시했다.
소성(燒成)상태가 불량하긴 했으나 유물도 다수 수습됐다. 송이버섯 형태의 토기제작도구(製陶具)인 내박자(內拍子)를 비롯해 단경호, 통형고배, 노형기대, 압수부배, 시루 등 다양한 종류의 토기(편)가 확인됐다.
경남문화재연구원 김시환 연구원은 “대지조성, 경작 등으로 유적이 부분적으로 파괴돼 완전한 조사가 되진 않았으나, 아라가야 성장기인 4세기대 함안지역의 토기제작 및 공급체계를 엿보게 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묘사리 일원은 고대 도요촌의 입지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신음천(옛 대문천)-남강-낙동강으로 연결되는 지리적 이점에다, 남강 연변 및 배후습지에서 양질의 태토를 구할 수 있고, 연료수급에 용이한 구릉성 야산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 위쪽 이른바 ‘윗장명’이라 불리는 김기만(65)씨 가옥 뒤에는 토기폐기장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있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법수면에는 ‘우거도요지’가, 군북면에는 ‘유현도요지’가 각각 자리해 있다.
전문가들은 이들 세곳의 자연환경이 비슷해 상호 연관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국립김해박물관은 지난달 17일부터 법수면 우거도요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생산과 유통
‘장명 도요촌’에서 제작된 토기는 어디까지 퍼져 나갔을까. 이는 아라가야 성장기의 영역 및 교류범위를 파악하는 문제로 학계의 뜨거운 관심사이다.
경남문화재연구원은 아랫장명 도요지의 조업연대를 4세기 2/4분기~4/4분기로 추정하고, “함안군의 외곽에 해당하는 법수면 윤외리고분군, 황사리고분군, 의령군 예둔리고분군 등에서 출토되는 토기가 아랫장명에서 나온 유물과 제작기법, 색조, 기형 등이 거의 동일하다”고 분석했다.
다시 말해 아랫장명에서 일괄 제작되어 인접지역에 공급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백승옥 함안군 학예연구사는 “장명마을의 도요지가 보여주듯, 함안지역은 가야사의 비밀을 풀어줄 유적이 많아 향후 한국 고고학의 메카가 될 수 있는 곳”이라며 “주요 유적지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계획을 수립해 학술적 규명을 한뒤 역사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도요지들
가야지역 도요지가 함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경남 창녕군 여초리 칠봉산 남쪽 사면에 위치한 ‘여초리 가마터’는 국내 최초로 조사된 4세기대 가마터로, 가야·신라토기의 초기 생산체제와 제작기술 해명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난 93~94년 국립진주박물관에 의해 2기의 토기가마가 발굴조사됨으로써 그 구조가 밝혀졌다. 가마터는 낮고 완만한 구릉의 사면에 자연경사를 이용하여 설치한 타원형의 터널식 등요였다. 여초리 B유적 토기가마는 길이가 12.2m, 최대폭이 1.9m, 바닥 경사는 약 11도로 조사됐다. 형태상으로 가늘고 긴 특징을 드러냈다. 이곳에서 나온 유물들은 자연유가 흐를 만큼 매우 단단하게 소성된 회청색 경질토기가 주류지만, 회색 또는 적갈색 연질토기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이는 당시 소성조건을 달리하여 도질토기와 적갈색 연질토기를 같은 구조의 가마에서 구웠다는 것을 말해준다.
김해시 능동유적에서도 2기의 토기가마가 조사됐다. 이곳의 가마는 6세기대로 추정됐으며, 길이 5.3m, 폭 1.5m로 비교적 소규모였다. 규모로 볼때 장유지역의 소집단이 자체 필요에 의해 생활용 토기를 제작한 지역단위 가마터로 짐작된다.
능동유적에서는 전형적인 김해지방 토기인 외절구연고배와 서부경남지역의 고배, 신라식 고배 등이 동시에 출토돼 가야토기와 신라토기의 분화·융합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가야의 옛 땅에는 아직 많은 토기와 토기가마가 잠자고 있다. 이를 깨워 말을 시킬때 가야사는 비로소 본 모습을 햇살아래 드러낼 수 있다.
① 대가야 옛땅에서 고령요를 운영하고 있는 백영규씨. 그는 가야토기는 희망과 절망을함께 안겨줬다릳고 말했다. ② 김해 진례에서 가야토기를 재현하고 있는 강효진씨. 그는제대로 된 재현을 위해 아직 할일이 많다고 말했다. ③ 영산 송강요 의 유현종씨가 재현한 가야토기형 생활도자기들
시리즈24. 4부 가야의 힘과 미 ⑦가야토기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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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긴 맥 누가 잇나
가야의 옛땅에 신라-고려-조선이 차례차례 들어섰지만 가야도공의 맥이 이어졌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맥은 끊겼는가. 아니다. 가야가 망한 지 1천4백여년. 끊어진 맥이 다시 이어지고 있다. 가야의 고지(故地)인 김해와 고령, 창녕에는 흙과 씨름하며 혼불을 지피고 있는 가야도공의 후예들이 있다. 너무 힘이 들어 손을 털고 돌아선 이도 있고, 아직 제대로 된 재현품을 만나지 못했다며 계속 열정을 불태우는 이도 있다.
백영규(白永奎·66)씨는 경북 고령지역의 대표적 도예인이다. 고령군 운수면 신간리 대가야의 옛땅에서 ‘고령요’를 운영하고 있는 백씨는 50여년간 전통도예를 고집하고 있다.
백씨는 지난 90년초부터 10여년간 가야토기에 ‘미쳐’ 지냈다. 그가 고생고생해서 재현해낸 토기는 100여종. 발형기대, 통형기대, 광구장경호, 유개고배 등 재현되지 않은 가야토기가 없을 정도였다.
“질박하면서도 부드러운 곡선미가 가야토기의 특징입니다. 우리 조상들의 심성이 이랬을 겁니다. 내화도(耐火度)가 강해 일부는 실생활 용기로도 사용되었다고 봐요.”
90년대 후반 백씨가 ‘손맛’을 낼때는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가야토기에 한껏 근접했다’는 평을 들었다. 일부 일본인 관광객과 국내의 스님들은 백씨의 재현품을 사가기도 했다.
그러나 가야토기를 기껏해야 장식품·기호품 정도로 여기는 풍토속에서 백씨는 생활고에 직면했고 결국 두손을 들었다. 지난 2000년 마음먹고 추진했던 ‘가야토기장’ 기능보유자 지정이 무산되자 그는 다시 분청사기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지원 한푼 되지 않는 가마에 무슨 수로 계속 불을 때느냐”고 반문하는 백씨는 “왜 아쉬움이 없겠는가, 여건이 되면 다시 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가야의 찬란한 토기문화 재현은 이 지점에서 멈춰 있다.
#김해토기의 조용한 부활
김해시 진례면 송정리에서 ‘두산도예’를 열고 있는 강효진(姜孝鎭·52)씨는 자타가 인정하는 가야도공의 후예다. 경남 산청 출신으로 옹기장이였던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도예를 배운 그의 뒤를 두 아들과 딸이 다시 잇고 있다.
지난 94년 김해시가 ‘두산도예’를 가야토기 재현 업체로 지정하자 강씨는 가야의 혼을 찾는 지난한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토기재현 10년째를 맞는 지금, 강씨의 작업은 미진한 구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무형의 적지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우선 끊어진 김해토기의 맥을 이은 것은 가장 큰 성과였다. 토기 제작공정 연구 및 경험축적, 한·일 고고학도들에 대한 실습마당 제공, 그리고 토기의 관광자원화에도 한걸음 다가섰다는 평도 따른다.
강씨는 “아직 멀었다고 본다. 토기의 색상과 모양 등 눈에 보이는 부분은 어느 정도 따라갔는데, 단단함이나 가벼움같은 것은 여전히 미흡하다”고 말한다.
재현 과정을 체크해 온 부산대 신경철(고고학과) 교수는 “소성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고 외관도 아주 비슷하다. 하지만 세부적인 형태나 문양, 제작기법은 더 연구가 있어야 하겠고 제작공정을 데이터화하는 문제가 과제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학계에서는 그동안 토기제작의 노하우와 경험이 축적된 만큼 이제 이를 심화하는 2단계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잠자는 토기를 깨워라
비화가야의 옛땅인 경남 창녕군 영산면 신제리. 구마고속도로 영산IC에서 나와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2㎞ 정도 내려가다 도천면사무소앞 네거리에서 우회전해 1㎞ 가량 들어가면 유현종(劉鉉鍾·45)씨의 ‘송강요(松剛窯)’가 있다.
한때 ‘토기형 생활도자기’를 붙잡고 끈질기게 씨름했던 유씨는 ‘가야토기’라는 말에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거 어려워서 못해요. 채산성을 맞추려면 엄청난 투자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누가 챙겨줘야 말이죠.”
경기도 여주출생으로 김해 진례에서 10여년간 도자기를 굽다 지난 95년 영산에 새 둥지를 튼 유씨는 도예연구소를 차려 토기연구에 매달릴 정도로 토기형 생활도자기 생산에 열정을 쏟았다.
토기 표면에 금동운주무늬 등을 음각한 다기세트, 커피잔, 머그잔 등은 옛멋과 현대미를 접목시킨 독특한 향토관광상품으로 초기에는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좋은 태토를 확보할 목적으로 광업권 확보를 꾀하던 유씨는 당국의 무관심과 비협조에 실망해 가야토기 현대화 작업을 조용히 접었다.
유씨는 “가야토기는 굉장한 문화자원이다. 잠자는 가야토기를 깨워야 한다. 지자체에서 하든지, 개인이 하든지 누군가는 이 문화자원을 보석으로 다듬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야토기의 맥은 이어질듯 끊어질듯 위태위태하다. 오늘의 가야후손들은 가야토기의 맥을 확실히 이어 후대에 물려줄 책임이 있다.
토기 재현에는 ‘왕도’가 없다. 어떤 흙을 쓰고 어떻게 빚어 구워내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제작과정에서 야기되는 논란은 어쩌면 당연하다. 가야토기는 보통 등요(登窯)에서 1천2백50도의 고온으로 4~10일간 구워야 하므로 제작과정이 복잡하고 까다롭다.
굽다리접시를 만드는 방법만 해도 도공에 따라 다르다.
‘고령요’의 백영규씨는 “물레를 이용해 접시부를 만든 뒤 남은 흙을 빚어 올려 다리부를 만든다”고 설명한다. 반면 ‘두산도예’의 강효진씨는 “접시부와 다리부를 따로 만들어 붙이는 것이 보통이다”고 주장한다.
‘자연유’ 생성을 둘러싼 논란도 뜨겁다. 장경호같은 토기의 목부분에 유약 비슷한 회청색빛의 물질이 스며 있는데 이것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것.
일반적으로는 진흙속의 광물질이 녹아서 기벽에 유리질의 막을 형성하는 자연현상이라고 본다. 김해시 송원영 문화재전문위원은 “토기에는 유약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라며 “흙 속에 함유된 장석, 규석같은 물질이 녹아 자연유로 변했을 수도 있고, 인위적으로 장석을 넣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강효진씨도 옹기제작 과정을 예로 들면서 흙이 녹아 자연유가 됐을 것으로 본다.
반면 백영규씨는 “가마속의 고열로 인해 재가 녹아붙어 자연유가 된다는 주장은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오랜 실험을 통해 확인한 결과 흙이 녹아 자연유가 된 게 아니고 유약(자연유)을 발라서 나타난 현상이었다”고 주장했다. 가야시대때 이미 유약이 만들어졌다는 지적이다.
가야토기의 미스터리는 끝이 없어 보인다.
88고속도로 고령IC에서 합천 해인사 쪽으로 5분 남짓 들어가면 백산초등학교(교장 김두환)가 있다. 행정구역은 경북 고령군 쌍림면 백산리이다. 전교생은 47명. 시골의 미니학교? 천만에!
정문에 들어서면 ‘가야문화 체험장’이란 글귀와 가야토기를 손으로 떠받든 석조상이 먼저 눈길을 끈다. 교정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다양한 가야토기 석조상이 세워져 있다. 운동장도 넓다. 한때 1천3백명의 학생들이 뛰놀던 터다. 교정 한쪽의 야생화 동산과 전통놀이 광장도 동심을 자극한다. 이 학교의 으뜸 자랑거리는 가야토기 체험장이다. 토기부 학생 10여명은 장경호 같은 것을 우습게 빚어낸다. 가야토기에 관한 한 백산초등생들의 제작솜씨와 자부심은 전국 최고다.
백산초등교는 지난 89년 고령군 지정 가야토기 재현 시범학교가 된 이후 초·중학생들의 토기체험학습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해에 2천5백~3천명의 학생들이 이곳을 다녀간다. 외지인들과 외국인들도 수시로 찾아와 토기재현 체험을 한다.
이 학교 가야토기 체험장은 전문화된 토기공방을 방불케 한다. 전기물레 30대, 발물레 5대, 손물레 10대, 토련기, 분쇄기가 마련돼 있고, 전통가마 전기가마 석유가마가 각각 1기씩 설치돼 토기제작의 전과정을 한꺼번에 체험할 수 있다.
강사인 염상우(42·고령 평전도예 운영)씨는 “흙을 만지며 가야토기를 배울 수 있어 아이들이 좋아한다. 창의력 배양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김두환 교장은 “가야문화를 느끼고 배우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체험학습장은 없을 것”이라며 외지인들도 환영한다고 말했다. (054)955-0074
<25> 제5부 동북아속의 가야 ①고대 일본의 빛 - 가야의 '부뚜막신앙' 오사카에 오롯이
지난 2월 24일 오후 1시께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일본 후쿠오카시 하카다(博多)역 식당가의 한 음식점.
‘ヒビソバ’(비빔바·950엔)와 ‘チヂミ’(찌지미·480엔)라는 메뉴가 벽에 붙어 있었다. 한국의 비빔밥과 전이었다. 비빔밥은 내용물과 맛이 한국에서 먹는 그대로였다. ‘漢風’(한풍)이라는 식당 이름. 주인 시바타(58)씨는 ‘간후’라 발음되는 漢風에 대해 “대륙 즉 한반도에서 왔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시바타씨는 “우리 식당에서 비빔밥이 가장 많이 팔린다. 원래 한국과 일본은 국경이 없었던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다음날 오후 후쿠오카시 박물관 학예실. 미야 요시로(40) 학예사는 “맞는 말이다. 7천~8천년전의 유적인 부산 영도구 동삼동패총에서 일본에서 생산된 흑요석과 전기 조몽토기 등이 발견된다. 후쿠오카의 도도로키패총과 나가사키 시라하마유적 등에서도 부산과 김해 등지에서 생산된 융기문토기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웃처럼 넘나듦이 자유로웠다”고 말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가야지역과 일본열도가 관계를 가지는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취재에 동행한 부경대 이근우(사학과) 교수는 “일본에 벼농사와 청동기문화가 전파되는 기원전 4세기께부터 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원전 3세기 유적인 규슈 이타즈케(板付)에서 일본 최초의 벼농사를 시작한 농경취락지가 발견돼 후쿠오카 박물관에 그 모형이 전시돼 있다. 물론 한반도 남부에서 넘어간 것이다.
김해가야인들은 일본으로 집단이주하면서 당시 그들이 사용하던 행정단위인 고을(郡.고리)이라는 명칭도 가져갔던 것으로추정된다. 이 사실을 증명하는 듯한 것이나라현의 지명이자 지하철역명인 고리야마(郡山)다.
부산대 신경철(고고학) 교수는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는 김해를 위시한 남부지방 주민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갔지만 일본에서도 일정한 사람들이 남부지방으로 들어와 살았다”고 말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물이 한반도 남해안에서 많이 발견되는 일본의 야요이토기다.
야마토 정권 이전까지 김해지역 등 한반도 남부와 북부 규슈를 중심으로 민간차원의 교류가 지속됐다는 게 한·일 양국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후쿠오카시 매장문화재센터 구수미 다케오(33) 연구원은 “3세기 중엽 토기를 대량생산한 후쿠오카시 니시진마치(西新町) 유적에서 상당량의 가야계 토기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볼 때 그 시기에도 가야계 도공들이 많이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인들이 일본역사의 획을 그으면서 집단이주한 시기는 5세기 초엽 무렵과 6세기 중엽으로 잡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백제·왜·가야세력과 고구려·신라세력의 충돌로 인한 정치·사회적 혼란과 금관가야(532년)·대가야(562년)의 멸망이 그 요인이었다.
2월 27일 밤 10시께 교토역 인근의 한 식당에서 만난 도쿠시마대학 사다모리 히데오(50) 교수는 “가야인들의 이주 루트는 후쿠오카에서 오사카 바다에 이르는 세토우치 지역을 거쳐 점차 기나이(畿內) 지역과 동북지역으로 옮겼다”고 설명했다. 사다모리 교수의 말대로 규슈와 오카야마, 기비, 오사카, 나라 등 곳곳에는 가야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10살된 딸 이름을 ‘가야’로 지은 그는 또 “사카이 아래 지역인 기시와다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와 부산 동래구 복천동 31호분에서 발견된 토기는 같은 시기(5세기 전반)의 것으로 모양과 만든 형식이 똑같아 동일 도공이 제작한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라고 밝혔다.
기시와다 유적에서 7.5㎞ 떨어진 오바데라(大庭寺) 인근에서는 김해가야 도공들이 그 주인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마터 1천여기가 발견돼 가야인들의 이주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기록돼 있듯이 김해지역에서 생산된 철(철원료 철제품 철기제작술)이 일본으로 전해져 야마토 정권, 즉 일본 고대국가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한·일 역사학자들이 서로 인정하고 있는 내용이다. 국내의 혼란상황과 야마토정권의 필요에 의해 일본에 건너간 토기와 직물, 토목, 농사, 축성 등 다방면의 기술자들이 오사카에서 이코마(生駒)를 중심으로 한 지역 등에서 활동하면서 일본 고대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고대 김해가야인들이 가족들의 생존을 관장하는 신이 깃든 것으로 인식한 부뚜막형 토기. 지카츠아스카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나라의 ‘고리야마’(郡山) 라는 지명에서 보듯 가야 등 남부지방에서 사용하던 ‘고리’(고을)와 ‘무라’(촌) 등 행정단위와 제도도 그대로 넘어가 일본 국가제도의 기틀을 세웠다. 또 일본의 조리문화에 큰 기여를 한 시루와 부뚜막, 난방시설인 구들과 흙벽도 전래됐다. 게다가 가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가와치(河內)씨와 기비(吉備)씨는 왜의 사신으로 다시 가야에 파견되기도 했다.
한편 문물의 배경에는 정신과 신앙이 바탕이 된 인적교류가 있었다.
지난 2월 27일 낮 12시께 오사카 남부 가와치에 있는 지카츠아스카 박물관. 마침 가야를 중심으로 한 도래계 유물 특별전(1월21~3월16일)이 열리고 있었다. 관 파편과 신발 파편, 가야인들이 만든 스에키 토기와 김해 가야식토기, 여인들이 쓰던 머리핀 등이 전시돼 있었다.
그중 기자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유물이 전시장 끝에서 발견됐다. 부뚜막형 토기였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변진조에 ‘가야인들은 부엌을 집의 서쪽에 두는 신앙 및 풍습을 가졌다’고 기록돼 있다.
인제대 이영식(사학과) 교수는 “이러한 습속의 실재는 김해 부원동 유적에서 확인된다”고 말했다.
즉 고대인들의 종교였던 불교가 정착되기 전 김해가야인들의 정신을 지배했던 ‘부뚜막신앙’이 현 오사카 남부 일대에 그들이 정착한 뒤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가야인들에게 부뚜막은 집안의 온기를 유지해줄 뿐만 아니라 가족의 생명을 이어주는 밥을 짓는 곳, 즉 가족의 생존을 관장하는 신이 머무는 곳으로 인식됐다고 한다.
이 부뚜막토기는 이주한 가야인들이 살았던 지역의 고분에서는 어김없이 부장품으로 출토될 만큼 가야인들의 삶속에 정신적인 신앙으로 자리매김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 잃은 가야인들의 공동체적인 끈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25> 제5부 동북아속의 가야 '고고학자 규슈대 니시타니교수'
지난 2월25일 오전 9시30분 일본 후쿠오카시 ‘스테이션 플라자 후쿠오카호텔’에서 규슈대 니시타니 다다시(66·사진) 명예교수를 만났다. 다다시 교수는 일본의 대표적인 고고학자로 지난해 정년퇴임을 했지만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발표한 논문만 500여편이 되며 ‘동아시아 지석묘 종합연구’ 등 그의 저서들은 일본은 물론 한국 고고학도들에게도 필독서가 되고 있다. 동아대 심봉근 교수를 비롯, 한국 고고학자 중에도 그의 제자들이 많다.
-일본 고대국가 형성에 가야의 역할이 컸다는데.
△그렇다. 가야에서 생산된 철을 바탕으로 일본 고대국가인 야마토정권이 성립됐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여러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 보면 3세기 후반부터 가야로부터 철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4세기 이후부터는 가야의 토기와 갑주, 마구 등이 들어왔다. 물론 5세기 이후에 일본열도에서 철생산이 이루어지나 가야가 멸망하기까지 300년 동안 일본은 가야로부터 대부분 수입했던 것이다. 가야 멸망후 가야의 철기술자들이 일본에 건너옴으로써 6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인 생산이 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에 일본이 가야를 필요로 했다고 주장했는데.
△그 시기에는 가야에 의존했다고 볼 수 있다. 강력한 권력을 형성하기 위해서 가야의 선진문물과 문화가 절대적으로 요구됐던 것이다. 그리고 5세기에 일본이 중국의 남조와 교류를 하게 되는데 가야, 백제를 거쳐 중국과 관계를 했다. 즉 당시 일본은 기술적으로, 외교적으로 가야가 필요했던 것이다.
-가야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는가?
△다 셀 수 없을 정도다.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부산 복천동고분군도 여러 차례 답사했다. 가야지역의 유물과 유적을 보면 마치 일본의 고향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26> 제5부 동북아속의 가야 ② 日 기비지역의 가야인들
가야식 산성으로 알려진 기노죠성. 각루가 있고 돌 쌓인 사이에 나무기둥이 독특하며 이러한 축조양식을 분석,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인의 기술이라고 해석한다
#즈쿠리야마 고분과 가야인들
지난 2월 26일 오후 취재진은 가야인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했던 곳의 하나인 오카야마현 기비(吉備)지역을 찾았다. 소자역에서 택시를 타고 10분쯤 산요도로를 타고 가니 즈쿠리야마(造山) 고분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 지역이 어떤 곳인가. 1천6백년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진 등으로 인한 혼란의 상태를 피하고자 두려움을 안고 나라를 떠난 가야인들이 정착한 땅이다.
일본학자들은 기비지역은 463년 이 지역호족들이 야마토 정권과 싸워 패배하기전까지 철기를 바탕으로 60여년간 일본전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있었던 지역이라 주장하며 그러한 것을 증빙하는 자료로 현지의 고분을 든다. 이 고분을 중심으로 기비세력이 형성돼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 발굴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즈쿠리야마 고분은 기비시기인 5세기초에 조성됐으며 일본에서 네번째로 규모가 큰 전방후원분으로 길이가 360m나 된다.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트였다. 이 사방 시야가 닿는 곳에는 전부 가야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한 것은 발굴된 5, 6세기의 수많은 유적이 웅변해주고 있다. 그러면 이 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이날 만난 오카야마 리카대학 가메다 슈우이치(50) 교수는 ‘철과 도래인’ 주제의 논문에서 ‘발굴이 되지 않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즈쿠리야마 고분은 분명 가야인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밝혔다.
인제대 이영식(사학과) 교수는 “‘국조본기’를 참조하면 기비지역에 가야계인 가야쿠니노미야즈코와 아나쿠니노미야즈코 씨족이 있었으며 이들이 8세기까지 이 지역을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가메다 교수는 뜻밖의 주장을 조심스레 펼쳤다. “고구려와의 전쟁에 왜가 참가했는데 당시의 전쟁에서 주로 활약한 왜의 주체는 기비지역의 호족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그러니까 광개토왕 비문에 나오는 왜란 다름아닌 기비지역의 세력이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만큼 기비세력이 강력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부산대 신경철(사학과) 교수는 “일반적으로 한국 학계에서는 비문에 있는 왜의 주체를 기타큐슈나 기나이(畿內)세력으로 본다”고 말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는 2세기말~3세기초에 규슈와 기비, 야마토지역이 서로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부경대 이근우(사학과)교수는 “당시 야마토의 히미코 여왕이 240~250년에 후쿠오카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체크했다는 것으로 봐서 이 시기가 되면 아먀토와 기비 2대 중심세력권이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야마토정권에 패했지만 476년 기비지역의 호족세력이 난을 일으키자 유라쿠 천황이 70명을 죽였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와있다. 이 사건 이후 기비지역에서는 전방후원분을 크게 쓰지 못했다.
이 지역에서 기원전 1천년에 이미 한반도 토기가 출토되는 등 한반도와 교류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이 고분을 중심으로 가야인들이 살았던 주거지와 일터, 즉 철을 생산했던 공방과 무덤이 곳곳에 있다. 이를테면 이 고분의 뒤쪽에 5세기초인 구보키 야쿠시(窪木藥師) 유적이 있다. 기비 지역에서 처음으로 가야인에 의해 철이 생산된 곳으로 알려진 이 유적은 철을 만들던 공방으로 철정(덩이쇠)과 철작업 후 남은 찌꺼기, 그리고 부산 복천동 고분군 21·22호분에서 나온 철촉과 유사한 철촉 등이 출토됐다. 또한 이 시기 일본에는 없었던 시루와 부엌도 나왔다.
여기서 1㎞ 정도 떨어진 다카즈카(高塚)유적은 이 공방에서 일했던 가야인들의 주거지로 추정되며 부엌 시루 등의 시설이 많이 조사됐다. 즈쿠리야마 고분과 구보키 야쿠시 유적의 중간쯤인 호래(法蓮)유적은 이들의 사후 거주지였던 무덤이었다. 즉 이 지역에 이주해 살았던 가야인들의 주거지와 일터, 무덤이 세트로 인근에 많이 형성돼 있었던 셈이다.
또 즈쿠리야마 고분 바로 인근인 사카키야마 고분은 고위직 가야인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다카즈카 유적 뒤 즈이앙(隨鹿)고분에서 일본에서는 5곳 밖에 없는 단야세트가 나오며 수혈식석실분으로 원통형 목관을 가야식 꺽쇠로 고정하고 있다. 이처럼 이곳에서 7세기 후반까지 200년간의 단야관계 유구가 확인되며 기비의 호족들은 이처럼 가야인들의 철을 기반으로 해 강력한 세력을 키웠다.
#가야식 산성 기노죠성
취재진은 즈쿠리야마에서 나와 가야식 산성으로 불리는 기노죠성으로 향했다. 60대의 택시 기사는 기골이 크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것으로 봐 가야인의 후손이 아닐까라는 막연한 호기심까지 발동했다.
산성입구에서 10분 정도 오르니 성이 나타났다. 전체적으로는 둥글게 쌓여있는데 일정부분이 튀어나와 있고 나무기둥을 중간중간에 박아 놓은 것이 특이했다. 보통 치(稚)라고 부르는 각루(角樓)였다. 당시 일본에는 이러한 축조방법이 없었다.
7세기 중엽으로 파악되는 이 산성은 5, 6세기대 기비지역에 왔던 가야인들 또는 그 후손들이 만들었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이영식 교수는 “이 산성은 입지조건이나 축조방식이 김해의 분산성과 경북 고령의 주산성과 흡사한 테뫼식으로 여기에 관련돼 전해지는 우라(溫羅)전승이 가락국의 수로왕과 신라의 탈해왕이 서로 변신하면서 다투던 내용과 아주 닮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지역에 이주한 가야인들이 자신들의 가족과 재산을 방위하던 상징이라는 것이다.
남문 북문 동문 서문이 있으며 특히 이 산성의 곳곳에 사람이 드나들 정도로 배수구가 잘 발달돼 있다. 이 곳에서 보면 즈쿠리야마를 비롯한 오카야마 시가지가 다 보인다.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씨는 1960년대 임나분국을 주장했다. 즉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기노죠성을 중심으로 한 기비지역에 건너간 가야인들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는 것이다.
한낮에 기노죠성을 둘러보는 취재진은 마치 부산과 김해를 내려다보며 금정산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26> 제5부 동북아속의 가야 '한국고대사 연구 가메다교수'
지난 2월26일 오전. 가메다 슈우이치(사진) 교수의 연구실은 겨우 한 사람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각종 자료로 꽉 차있었다.
그는 기비지역에 이주한 한반도인들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해오고 있다.
논문 ‘고고학에서 본 기비의 도래인’ 등을 발표하는 등 이 분야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많은 연구성과를 낸 학자로 한국 충남대에서 2년간 연구활동을 하기도 했다.
-기비지역과 가야인들의 관계를 정의한다면.
△고대 4세기말부터 7세기까지 기비지역은 가야인들의 주거지로 봐도 될 만큼 이 시기 유적을 조사해보면 전 지역에 걸쳐 가야인들의 흔적이 나타난다.
특히 가야인들이 철을 직접 생산한 철 관련 유적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이주 규모는 엄청나다고 본다.
기비세력은 가야인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고 이해하고 있다.
가야인들이 기비지역으로 들어왔던 나루터는 1세기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데 나뭇가지를 쌓은 후 흙을 쌓는 축조방식으로 한국 벽골제식이다.
-기노죠성을 가야식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주장을 폈는데.
△돌을 쌓은 사이에 기둥이 남아있는 축성 양식의 대표적인 것으로 평양성이 있다. 그리고 한반도 중부지방에도 보이므로 기본적으로 고구려 계통으로 생각한다.
즉 기노죠성은 북한지방에서 신라를 거쳐 왔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경주에는 이런 양식을 보이는 성이 없다. 규슈지방에 있는 백제계 산성과는 확연히 다르다.
만약 충청북도를 가야의 범주에 넣는다면 가야식으로 봐도 무리는 없겠지만 가야식 산성이라고 못을 박는 것은 주저한다.
<27> 제5부 동북아속의 가야 ③日 야마토 정권의 가야인들
취재에 동행한 부경대 이근우 교수가이치스카 고분군에 있는 한 무덤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 무덤 가운데 있는 석실은 방문객들을 위해 발굴당시의 모습으로 놓여있는 것이며 일본화가 많이 진행돼 있다
#오사카 가와치 지역
지난 2월 27일 오전 취재진은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인 오사카 남부 가와치군에 위치한 지카츠아스카 박물관에 들렀다가 오후에 박물관 옆길을 따라 이치스카 고분군을 찾았다.
박물관 관계자는 “이치스카 고분군에서는 금관 파편뿐만 아니라 금칠 신발과 초기 스에키토기 등 한반도 가야 관련 유물이 수없이 나왔다. 이치스카 고분군 지역은 가야인들에 의한 일본 최초의 스에키 생산지역”이라고 가야와의 관계를 자랑스럽게 말했다. 박물관측은 또 이치스카 고분군의 관파편과 금칠 신발 등의 주인공은 5세기 무렵 한반도내 정세 탓으로 가야인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넘어온 가야계의 최고 지배자급의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니까 가야인들은 4세기말부터 6세기까지 오카야마 기비지역과 시가켄 오오츠와 쿠사츠, 나라 아스카지역 등에도 건너왔지만 가장 집단적이고 조직을 갖춘 체제로 넘어온 곳은 역시 당시 야마토 정권이 있었던 오사카 가와치 지역이었다.
가야인들이 가와치 지역에 집단 이주한 이유는 아무래도 야마토 정권의 필요와 가야인들의 어쩔 수 없는 상황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치스카 고분 인근은 갑주와 마구 등을 제작하던 제철유적은 물론이고 스에키토기 등을 만든 도요지가 특히 많다. 이를 반증하는 것으로 이 인근에 스에키기타(陶器北)라는 지명이 있으며 오바데라를 포함한 스에무라(오사카와 이치스카 사이에 위치한 지역)엔 가야인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수의 가마터가 발견됐다. 이들 지역은 가야인들의 일터였다. 이치스카 고분군에서 3㎞ 거리의 카시바시에는 가야인들의 생활유적이 있다. 즉 가야인들은 천황이 살았던 지역에 생활지와 일터, 그리고 사후세상인 고분군을 갖추고 특별대우를 받으면서 독립적으로 생활했을 것으로 고대사학자들은 추측한다.
부경대 이근우(사학과) 교수는 “야마토 지역에 건너온 가야인들은 매우 집단적이었으며 이들은 자체 지배조직을 갖고 있었고 가야지역에서 사용하던 행정단위도 그대로 옮겨올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이치스카 고분군은 반경 1.5㎞ 29㏊에 걸쳐 광범위하게 자리해 있다. 현재 발굴된 고분만 250기(6세기초~7세기초 조성)로 이중 99%가 횡혈식석실묘로 한 묘에 2,3명의 가족이 매장돼 있었다.
간바야시 시로(47) 지카츠아스카 박물관 주임 학예원은 “이 무덤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주한 가야인들 1세대나 그 자손들로 보인다”고 말할 만큼 당시 야마토 정권의 중심지는 가야인들의 땅이었다.
가와치의 가야인들에 대한 보충취재를 위해 이날 해거름 무렵 가와치의 동북쪽인 시가현 구사츠 지역 아즈치 박물관을 방문했다. 이 박물관 오하시 노부야(56) 학예관은 “이치스카 고분군에서 오사카쪽으로 몇㎞ 떨어진 구로히메야마(黑姬山·길이 160m) 고분에서 나온 갑주유물 중 특히 핀으로 갑주를 고정시킨 것이 있는데 이는 틀림없는 가야계”라며 “보통 갑주는 검은데 왕이 입는 건 금이 칠해져 있다. 쇠의 표면에 금도금하는 기술은 당시 일본에 없었다. 이러한 작업을 한 주인공 역시 가야인들”이라고 말했다.
한편 오사카만에 인접, 길이 486m로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방후원분인 닌토쿠(仁德·또는 大仙)릉 고분에서는 부산 복천동 갑주와 동일한 5세기 갑주가 발견됐다. 미쿠니가오카 전철역 맞은 편에 건물과 집에 둘러싸여 온갖 소음에 시달리며 동산으로 변한 닌토쿠릉 고분을 마주한 취재진은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한때는 무덤만큼이나 큰 권력으로 오사카만을 바라보며 야마토지역에 오는 외래인들에게 위엄을 나타냈을 것이다. 5세기 초 야마토지역에 가야인들을 이렇게 대규모로 불러들이고 일본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닌토쿠왕이었다. 지난 96년 지카츠 아스카 박물관은 도굴된 닌토쿠릉 고분 유물을 모아 특별전을 개최했지만 이 고분의 주인공이 닌토쿠왕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또 구로히메야마 고분의 피장자가 가야인들의 최고 지배자 신분이었을 것이라는 게 현재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두 고분에서 나온 갑주와 마구 칼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지난 4세기대 전방후원분의 동경과 옥 등에서 보이는 주술적인 성격에서처럼 철제의 무기로 완전 무장을 하고 말을 탄 무사 캐릭터의 군사적인 이미지로 급변했다는 것이다. 즉 가야인들의 제철기술 등에 의해 무력적인 강력한 왕권이 형성됐고 가야인들의 행정조직을 바탕으로 야마토 정권의 행정력이 체계를 갖춘 것이다. 또한 이치스카고분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오바데라 등지에서 가야인들에 의해 생산된 스에키토기가 왕권을 상징하는 부장품으로 매납된 사실도 일본 고대국가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하시 학예관은 또 “당시로서는 신분이 높거나 특정 기술력을 가진 가야인들은 가와치지역으로 이주를 했고 그 보다 하급계층의 가야인들은 그 주변지역인 오오츠와 쿠사츠 지역 등으로 이주를 한 것으로 추정한다”며 “당시 가와치 지역은 왜의 중심지였다”고 덧붙였다.
2월 나라 카시하라 고고학연구소에서 만난 반 야스시(41)학예사는 “나라지역은 전성기인 4세기 이후에도 가와치 지역의 변방으로 가야인들의 이주가 계속됐다. 이는 ‘일본서기’에도 가츠라기 지역의 가야인들 관련 기록이 있듯이 고세시 난고유적과 니아자와 센즈카 유적에서 나온 갑주와 토기 등을 비롯, 5세기 초반인 미야야마(宮山) 고분군 소츠히코 추정 무덤에서 김해형 배모양의 도질토기가 발견된 것으로도 증명된다”고 말했다.
5, 6세기 고구려의 남진 등으로 나라를 등질 수밖에 없었던 가야인들이 매화꽃 하얀 이치스카 고분군의 햇살 속에 당시 모습으로 살아나 이곳을 처음 밟은 취재진에게 말을 거는 듯 했다.
“아! 1천6백년전 한치앞을 가늠할 수 없었던 그 혼란스런 시대에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으로 와 뼈를 묻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당신들의 그 얄팍한 역사의 눈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27> 제5부 동북아속의 가야 '지카츠아스카 박물관 간바야시 시로 학예원'
지난 2월27일 오전 지카츠아스카 박물관 학예실. 취재진을 맞은 간바야시 시로 학예원(사진)은 취재진에게 황금색 마분지로 만든 관과 투구, 신발을 보여주었다.
-이것들을 보여주는 의미는.
△가와치 지역에 이주해온 가야인들이 묻힌 이치스카 고분군에서 나온 유물들의 모형이다. 최고 지배자급 가야인도 이 지역에 왔다는 증명이다. 이 모형들은 박물관에서 여는 일반인들 대상 교육 프로그램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고분군에 박물관이 있다. 이 고분군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를 해석한다면.
△야마토정권이 불러들인 가야인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그들은 천황에게 조언을 하고 권위를 갖추게 해준 가야의 지배계급과 관료, 철제와 도자기를 만드는 고급기술자들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들은 일본 고대국가의 기틀을 만들었다.
-5, 6세기대 가야인들에 의한 이런 수준높은 문화 수입에 대해 부정하는 일본 학자들도 있다는데.
△우리는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도 사실대로 이야기 한다. 고고학적인 자료를 어떻게 왜곡해 해석할 수 있겠는가, 나도 가야의 후손인지도 모르는데…. 관람객들 중에도 거꾸로 해석하려는 경우가 있으나 유물을 예로 들며 이해시킨다.
-이코마 산맥을 끼고 제철유적과 도요지 유적이 많은데.
△둘 다 불, 즉 숯이 필요하다. 그러다보니 산기슭에 공방 등이 위치해야 나무를 베어 숯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산맥 너머 나라지역의 경우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가츠라기 지역에도 공방 유적이 많다.
<28> 제5부 동북아 속의 가야 ④ 중국의 가야 원류
지린성 노하심촌 인근에서 발견한 조선족 거주지의 고려방 안내판
광막한 만주평원이 비행기 차창을 통해 흐릿하게 다가왔다. 흐릿함의 실체는 매연 섞인 옅은 황사였다. 북방의 가야 원류를 찾아가는 길이다.
만주땅에 가야? 쉽게 믿기지 않겠지만, 많은 학자들은 가야문화의 바탕색에 북방 색채가 배어 있다고 보고 있다. 한반도 남부의 많은 고분 발굴품들은 최소한 삼국시대까지 우리 조상들이 기마민족의 야성을 유지하며 역동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중국의 최근 발굴성과들은 이런 심증을 굳혀주고 있다.
취재진은 지난달 21일 오전 11시 20분(현지시각) 중국 지린성(吉林省)의 성도(省都) 창춘(長春)에 도착했다. 인천서 출발한지 2시간 만이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연도에는 매화와 복사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부여를 닮은 토성
첫날 첫 일정으로 찾아간 지린성박물관. “잘못 오셨네요. 수리중이어서 전시품이 거의 없습니다.” 30대 박물관 여직원은 낯선 관람객을 황당하게 했다.
이어 찾아간 지린(吉林)대학 옆 ‘동북아역사문화연구소’. 현지에 유학중인 이 연구소 이종수(36·지린대 고고학과 박사과정) 소장은 중국에서 간행된 도록과 고고자료를 꺼내 보이며 “뭐 좀 비슷한 게 있느냐”고 물었다. 낯익은 철검과 여러 형태의 환두대도, 철촉, 호형대구…. 바로 김해 대성동,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 출토된 것들과 비슷했다. 이 소장은 “랴오닝성(遼寧省)과 지린성 일대 무덤에서 나온 것들이며 흉노나 선비, 부여 계통의 유물로 파악되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이튿날 취재진은 만주땅의 고대 유적지 몇 곳을 직접 찾기로 했다. 행선지는 지린성 상하만(上河灣) 유적과 유수현(楡樹縣) 노하심촌(老河深村), 그리고 지린시 일대.
오전 7시. 취재진은 ‘시아리’라 불리는 빨간색 중국택시를 전세 내 타고 창춘을 빠져 동쪽으로 향했다. 자동차와 자전거, 수레를 끄는 말이 함께 뒤섞인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자 이내 평원이 시작됐다. 평원의 경작지는 듣던 대로 지겨울 정도였다.
“전부 옥수수 밭입네다. 세계 옥수수의 20%가 여기서 난다지요.” 조선족 운전사 이정화(47)씨의 설명이다.
경작지에서 농민들은 밭갈이에 바빴다. 두 마리의 말이 채찍질 당하며 쟁기를 끄는 모습이 이채롭다.
울퉁불퉁한 2차로 포장길을 3시간 가량 달려 닿은 상하만은 전형적인 중국 농촌마을이었다. 30여호의 작은 마을에 들어서자 거름냄새가 확 풍겼다. 산인지 구릉인지 모를 곳을 향해 20여분 올라가니 보루(堡壘) 비슷한 토성이 나타났다.
“지표조사에서 부여의 방어진지로 드러난 곳입니다. 기원전후 부여 연맹체의 어떤 대가(大家)세력이 이곳에서 말갈족(혹은 읍루)을 방비했겠지요.”(이종수 소장)
창춘과 지린의 중간쯤에 자리한 이 유적은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고성으로 부여 연맹체 거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한다.
전망 좋은 이 토성을 비단 부여만 사용했을까. 대흑산산맥이 끝나는 이 지역은 수천년간 켜켜이 쌓인 역사가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한때는 부여, 한때는 말갈, 그 다음은 고구려, 이어 요(遼), 금(金), 원(元), 청(淸)이 주인이 되어 한시절을 호령했을 것이다.
#황량한 유수 노하심
상하만을 빠져나온 취재진은 다시 두어시간을 달려 유수현 대파향(大坡鄕) 노하심촌에 도착했다. 흔히 ‘유수 노하심’으로 불리는 이곳은 제2 쑹화장(松花江) 북쪽 기슭에 형성된 분묘군. 상·중·하층으로 층을 이뤄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다양한 민족의 유물이 출토됐다. 한과 부여 시기의 무덤만 129기가 발굴됐는데, 애초 선비족의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부여의 것이란 주장이 더 힘을 얻고 있다.
국내 고대사 전공자들이 북방문화를 논할 때 단골메뉴로 거론하는 이 유적은 가야와도 직·간접 관련이 있다는 보고가 있다.
북방문화의 한반도 영향에 대해 지린대 고고학과 위존성(魏存成) 교수는 “후연의 수도였던 랴오닝성 조오양(朝陽)에서 출토되는 철제품과 길림성 일대의 금속제품들이 주민의 집단이동 등에 의해 한반도로 흘러들었을 개연성이 있다”고 했다.
어렵게 찾은 노하심 유적지는 황량함 그 자체였다. 내용물을 모두 빼먹고 껍데기만 남겨둔 꼴이랄까.
노하심촌 인근에서 취재진은 ‘고려갱산(高麗坑山)’ ‘고려방(高麗房)’이라 적힌 이색 안내판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었다. 모르긴 해도, 만주땅에 뿌리내리고 사는 한민족의 생생한 자취일 것이다.
#고구려의 힘
지린시 용담산성(龍潭山城)에 도착한 것은 22일 오후 2시께였다.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는 용담산은 입구부터 ‘고구려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곳 산성은 토성혼축으로 높이 2∼10m에 길이 2.4km이다. 고구려 호태왕 때 축조됐다…’. 지린성 문물보호당국이 세운 안내판에는 ‘고구려’란 글자가 이례적으로 명기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힘은 1천4백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들의 북쪽 변경, 그러니까 국내성이 있는 지안(集安)에서 400여㎞ 떨어진 이곳까지 확실히 미치고 있었다.
용담산에는 돌을 정교하게 쌓아올려 만든 수뢰(水牢·축수지), 땅을 파들어간 뒤 둘레에 돌을 쌓아 범죄자나 포로를 가두는 데 쓴 한뢰(旱牢) 등 고구려인의 예지가 번뜩이는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용담산의 산책로 정상부는 훌륭한 전망대였다. 쑹화장을 낀 지린시와 주변 형세가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잡혔다. “저 앞쪽에 솟은 야산이 동단산입니다. 3단의 토성과 옹성이 있지요. 저 부근에서 부여 왕궁터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굴됐습니다. 동단산 뒤편은 남성자고성, 왼쪽에 길게 누운 산자락은 모와산(帽瓦山) 유적입니다.”
동행한 이종수 소장은 북부여를 설명하고 있었다. 도도히 흐르는 쑹화장과 주변의 유순한 지형을 보고 있자니 문득 해모수, 영고, 순장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북방 민족들의 삶의 자취가 켜켜이 퇴적되어 있다는 모와산 유적지를 답사하던 취재진은 인근 농가에서 뜻밖의 유물 하나를 발견했다. 철로 된 항아리, 바로 철복(鐵腹)이었다. 한쪽 모퉁이가 깨져 구멍이 난 이 철복은 김해 양동리에서 출토된 것과 형태가 거의 같았다.
3세기 후반, 중국 동북지역에는 소수 민족들의 격렬한 에너지가 분출됐다. 285년 모용씨의 부여공격, 서진의 내분을 틈탄 흉노·선비의 중원진출 등 당시 국제정세는 한반도 남부의 가야지역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부여족의 일파가 남하해 김해의 금관가야를 세웠을 수도 있다. 논란이 따르지만 부산대 신경철(고고학과) 교수는 오래전부터 ‘부여족 남하설’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 고고학을 전공한 단국대박물관 복기대 박사는 “가야의 원류를 이른 시기에서 찾으려면 랴오닝성 조오양의 유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고, 교류차원에서 보면 3세기 이후 선비문화에 초점을 맞출수 있다”며 “인류학적 관점에서 부여족 남하설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부여와 가야. 맥이 닿을 것 같지 않은 두 나라는 과연 무슨 곡절로 민족적 인연을 가진 것일까. 고대 동북아의 국제정세를 살피면 이 의문의 실마리가 풀릴 것도 같다.
취재진이 찾아간 북방(北方)은 결코 먼 곳이 아니었다. 북방의 문물이 물결쳐 한반도 남쪽으로 흘러들고 남쪽의 것이 또 북방으로 스며든 것이 고대사의 정황일진대, 우리는 그동안 북방을 막연히 먼 곳으로만 알고 ‘마음의 3·8선’을 친 것이 아닌지.
<29> 제5부 동북아 속의 가야 '고구려 유적 정비 한국은 철저 배제'
“지안(集安)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곧 호태왕(광개토대왕)의 능묘와 능비가 하나의 경역으로 꾸며지게 됩니다.”
광개토대왕 비 주변에서 안내를 하던 중국인 조홍매(趙弘梅·여·21)씨는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 당국은 올해안으로 광개토대왕 비와 능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하나의 경역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비와 능은 약 200여m 떨어져 있으며, 능에 대한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았다.
지안의 변화는 시내 중심에 자리한 고구려 국내성 유적에서도 확인됐다. 중국당국은 국내성에 대한 발굴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중국인 이수(李秀·80)씨는 “발굴이 끝나면 당국에서 이곳의 낡은 아파트를 뜯어내고 국내성을 복원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총길이 2.6㎞의 국내성은 도심에 위치해 있어 일부 성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파괴됐다.
중국 문화재 당국은 지난 2000년부터 3개년 계획으로 지안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작했으며, 올해까지 광개토대왕릉과 능비, 국내성을 복원·정비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안은 고구려가 두 번째 수도(국내성)를 세우고 나라의 기틀을 다져 동북아 최대의 강성 제국을 만든 곳이다. 시 인구 3만여명 중 조선족은 3천여명이다. 도시 전체가 고구려의 고고학 박물관이라 할만큼 고구려 관련 유적이 널려 있다. 광개토대왕릉과 능비, 장군총(장수왕릉), 무수한 무덤떼와 고분벽화까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유적이 없다. 지안의 통구 무덤떼는 세계 최대 규모로 총 1만2천기를 헤아린다.
지안의 변화바람은 취재진을 착잡하게 했다. 유적발굴 및 정비가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고구려 유적정비에 한국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9> 제5부 동북아 속의 가야 ⑤가야와 광개토대왕 '광개토왕 南征 가야에 큰 타격'
지안 (集安) 시내에 있는 국내성. 남아 있는 일부 성벽이 아파트 화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4~5세기는 광개토대왕의 시대였다. 대왕의 기마군단은 당시 만주벌을 지나 따싱안링(大興安嶺) 산맥을 넘어 동몽골초원(중국 내몽고자치주)까지 나아갔고, 중원과 만주의 경계인 랴오허(遼河)의 서쪽, 만리장성 인근까지 뻗쳐 있었다. 지금의 한반도보다 더 넓은 땅이다.
지난달 23일 취재진은 지린성(吉林省) 창춘(長春)에서 출발해 고구려 옛 왕도였던 지안(集安)까지 달렸다. 이른바 고구려 북쪽길(北路)이다. 거리로는 약 400㎞. ‘광개토경(廣開土境)’을 밟아보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렸다.
#고구려의 바탕색
광활한 평원과 아득한 구릉지대에 난 길을 달리고 달려 닿은 곳이 퉁화(通化). 창춘과 지안의 중간쯤되는 인구 2백20만명의 유서깊은 도시다.
“퉁화는 고구려의 목에 해당합니다. 나아가고 들어갈 때 반드시 거치게 되지요. 그래선지 주변에 고구려 산성이 많습니다.” 창춘의 동북아역사문화연구소 이종수(36) 소장의 설명이다.
퉁화에 닿기 전, 취재진은 고구려 산성 한곳을 찾아갔다. 유하(柳河) 부근의 나통산성(羅通山城)이란 곳이었다. 해발 960m 나통산 정상 일대에 구축된 이 성은 둘레가 7.5㎞에 달하는 고구려 최대 산성이다.
남문의 ‘회마령(廻馬嶺)’에 오른 취재진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득한 시선 저편에 펼쳐진 장쾌한 경관. 깎아지른 절벽 위에 쌓은 철벽 요새는 당당하고도 아름다웠다. “아,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바탕색이구나!”
한시절 피비린내를 풍겼을 산성의 돌틈새엔 붉은 진달래가 피고 있었다. 산성 너머에서 고분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병사라도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았다.
취재진은 역사기록에 나오는 고구려 북쪽길을 따라가며 가야를 찾기에 앞서 고구려에 흠뻑 취해 있었다.
#고구려와 가야의 만남
지안의 광개토대왕 비를 찾은 것은 다음날 오전 9시께. 현지 안내원은 “높이가 6m39㎝로 세계에서 가장 크고, 비문 네 면에 1천7백여자가 적혀 있다”고 소개했다.
근세에 와서 광개토대왕 비는 제국주의의 발톱을 숨긴 일본에 의해 ‘임나일본부설’의 먹잇감이 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절대적인 사료가치를 갖는다. 중국땅에 남겨진 아쉬움이 있지만, 이 비석은 한국인의 의식기저에 불멸의 표식으로 곧추서 있다.
비문에는 고구려와 가야의 첫 만남을 알려주는 단서가 있다. 비문의 제2면 영락십년경자년조(永樂十年庚子年땥), 즉 서기 400년 기사에 ‘임나가라(任那加羅)’라는 수수께끼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것이다.
기사는 고구려가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성의 왜적을 쫓아내고, 임나가라 종발성(從拔城)까지 추격해 귀복시킨 것으로 돼 있다.
‘임나가라’에 대해서는 김해설(김태식, 신경철)과 고령설(주보돈, 이영식), ‘김해+고령설’(이도학)등이 제기되고 있으나, 지금까지는 김해설이 가장 유력하다.
홍익대 김태식(역사교육) 교수는 “광개토대왕 남정은 임나가라에 큰 타격을 입혀 금관가야 멸망의 원인이 된다. 이는 곧 전기가야 연맹의 해체를 뜻한다”고 주장한다.
지안(集安)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고구려와 가야의 첫 만남을 알려주는 소중한사료다
광개토대왕 남정이 가야와 신라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학계의 통설이다. 4세기 무렵에 가야적인 색채를 내면서 발전하던 김해 대성동과 양동리, 창원 도계동 등의 고분에서 5세기 이후 고분 규모가 작아지고 신라계열의 토기가 나타나는 것은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신라의 득세현상을 말해준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10호, 11호분에서 출토된 갑주류·마구류 등을 고구려 계통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풀리지 않는 ‘역사퍼즐’
비문에 세번이나 언급되고 있는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도 풀어야 할 과제. 가야사 해명의 열쇠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종전의 통념은 안라, 즉 아라가야(함안)의 수병으로 보는 것이었으나, 1980년초에 중국학자 왕건군(王健群·작고)이 ‘나인(羅人)’을 신라인으로, 안(安)을 ‘두다, 배치하다’로 해석하는 새로운 설을 내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국내 학계에서 ‘왕건군설’을 지지하는 학자도 적지않다.
지난달 중순 개최된 김해시 주최 가야사 학술회의에서는 ‘나인’을 고구려인(백승옥), 또는 임나가라인(이도학)으로 보는 새로운 설도 제기됐다.
이에대한 중국학자들의 입장은 신중하다. 광개토대왕 비의 탁본을 연구해온 중국 사회과학원 서건신(徐建新) 교수는 “고구려 호태왕의 전승기록이란 점을 중시, 안라인수병을 구절로 여겨 ‘安’을 동사로 보고 싶다”고 했다.
베이징대(北京大) 마세장(馬世長·고고학) 교수는 “비문의 용법과 용례를 충실히 비교 검토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라며 결론을 유보한다.
중국측은 고구려 논의는 경계하면서도 고구려 유적의 관광자원화에는 큰 관심을 보였다. 안타까운 것은, 중국 당국이 고구려를 자기들의 변방 소수민족사로 파악하면서 그들의 시각으로 고구려를 해석·관리하고 있다는 사실.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손색없는 장군총(장수왕릉)에 철제난간을 설치, 관광객을 오르내리게 하면서 파손위험을 도외시하는 것도 문제였다.
‘고구려연구회’ 서길수 회장(서경대 교수)은 “중국 지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한·중 공동연구가 절실한데도 중국측이 외면하고 있다”고 말했다.
늦었지만 우리 학계가 중국 속의 고구려 찾기, 고구려 속 가야찾기에 전략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
준수하게 생긴 말이 쟁기를 끌고 있다. 매를 맞으면서도 고분고분하다. 야성을 잃어버린 듯한 새까만 눈빛-.
“옛날 같으면 이 만주벌을 거침없이 뛰어다녔을테죠. 신세가 바뀌어 이제는 일을 해야 먹고 살아요.”
동행중인 중국 조선족 운전수 이정화(47)씨의 말이다. 그는 “중국 동북에서는 아직도 말이 일꾼이다. 여기선 한국돈으로 몇 십만원이면 말을 산다”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오전, 취재진은 지린성(吉林省)과 랴오닝성(遼寧省)의 남쪽 경계지점인 신빈(新賓)에서 ‘일하는 말’을 가까이서 살필 수 있었다.
쟁기를 끄는 말은 모두 2두1조였다. 제각기 입가리개를 하고 고삐와 굴레, 가슴걸이 같은 ‘말갖춤’을 했다. 견인저항이 버거운지, 말들은 이랑 끝에서 반전(反轉)을 할때 ‘히힝-’하며 콧김을 뿜었다.
이 말들의 고향은 필시 북방 초원지대일 것이다. 북방의 이민족사를 들춰보면 말의 거친 숨소리가 배어난다. 흉노(匈奴), 오환(烏桓), 선비(鮮卑) 등 기마유목민족들이 초원에 새긴 역동적인 역사 탓이다. 이들 종족은 말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부여와 고구려도 연원을 따지면 기마민족의 후예다. 이뿐인가, 신라와 가야는 어떻고.
#랴오허에 흐르는 한국사
이튿날, 취재진은 랴오닝성의 선양(沈陽)에서 역사도시인 차오양(朝陽)으로 차를 몰았다. 차오양은 북방과 중원을 잇는 랴오시(遼西) 지방의 요충지다.
랴오허(遼河) 중류의 장황지대교를 지날 무렵, 창춘(長春)의 동북아역사문화연구소 이종수 소장은 고조선에 대해 잠시 설명했다. “논란이 있지만 다릉허(大凌河)와 랴오허 일대는 동이권, 고조선의 세력권입니다. 이를 말해주는 유물도 꽤 있습니다.”
랴오허는 북방의 한민족사를 더듬을 때 반드시 만나는 강이다. 비파형 동검을 만들었던 고조선의 근거지이며, 고구려가 후연 등과 쟁패하던 곳이 이 강의 중·하류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중국 동북평원은 남과 서로 병풍같은 장대한 산맥들을 거느리고 있다. 서쪽의 다싱안링(大興安嶺) 산맥과 남쪽의 창바이(長白)산맥이다. 두 병풍 산맥이 남쪽과 서쪽을 향해 달리다 한군데로 수렴되는 끝자락에서 다싱안링의 시랴오허(西遼河), 창바이의 둥랴오허(東遼河)가 각각 발원한다. 이 물줄기들은 남쪽으로 수천리를 흘러 하나의 랴오허가 되어 발해만으로 들어간다.
인구 29만명의 차오양은 선비족이 세운 후연(後燕)의 수도다. 현지의 연도(燕都·연의 수도)라는 말이 암시하듯 시내에는 연나라의 자취가 많다. 도심에 우뚝 서있는 높이 42m의 북탑은 3연(燕)시대(349~436년)에 세워진 것이다.
차오양시 주변에서는 근래 유적 발굴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이 중 상당수 무덤이 선비(鮮卑) 계열이다. 시내 동쪽을 흐르는 다링허 유역의 벌판에는 4세기 중반 선비족의 족적을 간직한 무덤 수백기가 흩어져 있다.
선비가 누구던가. 단순히 ‘북방 오랑캐’로 알았다면 오산이다. 3~4세기 격동의 동북아에서 이들 만큼 역동적인 삶을 산 종족은 찾기 어렵다. 3세기말 모용선비(慕容鮮卑)는 차오양에 도읍을 정하고 전연·후연·북연 즉 3연을 세웠고, 탁발선비(拓跋鮮卑)는 혼란한 5호16국시대(304~439년)를 평정, 북위(北魏)를 열었다.
주목되는 것은, 바로 이 시기의 선비족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들. 선비 무덤에 부장된 마구류 및 장신구 등은 고구려, 신라, 가야에서 출토되는 것의 기원을 따져보게 한다.
선비무덤을 집중 연구해온 충남대 박양진(고고학) 교수는 “선비족 묘제는 토광묘→석곽묘→석실묘 식의 변화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백제 가야 등지의 수혈식→횡혈식 묘제 변천과 유사성을 갖는다”면서 “특히 4세기 중엽부터 선비 무덤에 부장되는 각종 마구류(馬具類)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야문화에 투영된 鮮卑色
변화의 핵심은 역시 말과 마구다. 지난 1988년 차오양시 인근 십이대자(十二臺子)에서 발굴된 선비족의 철제 말투구는 고대 동북아의 비밀 하나를 푸는 실마리가 됐다. 전연시대(349~370년) 선비족이 만든 것으로 밝혀진 이 말투구는 중국에서 처음 확인된 것으로, 시기적으로 가야보다 다소 빠르다고 한다.
비슷한 형태의 철제 말투구가 가야(부산 복천고분, 합천 옥전고분)와 일본 열도에서 시차를 두고 발견된 것은 어떤 의미일까. 랴오닝성(요녕성)박물관 마청(馬靑·34) 연구원은 “형태적 유사성으로 보아 문화전파의 관점을 중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학자 에가미 나미오(작고)의 ‘기마민족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선비문화가 어떤 경로로 한반도에 유입됐는지는 국내에서도 논란거리다. 일반적으로는 고구려→신라→가야로 전해졌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동국대 강현숙(고고미술사학) 교수는 “서기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이 선비문화 전파의 계기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의 마구는 백제를 거쳐 유입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한다.
4세기 중엽 이후 가야와 신라 고분에서 나온 마구와 무구, 금속제 장신구에 ‘선비 색채’가 가미돼 있고, 그것이 가야사회의 성장배경이 됐다는 것은 자연스런 추론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곧 가야문화의 원류일까.
중국 고고학을 전공한 복기대 단국대박물관 연구원은 “가야문화는 넓게보면 고조선의 영향이 드리워져 있고, 좁게는 4세기대 선비와의 교류·전파를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가야사회 자체의 자생력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취재진은 차오양을 빠져나와 다시 랴오허를 건넜다. 랴오허에 깃든 고대사의 비밀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변의 평원에는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30> 제5부 동북아속의 가야 '가야 고상가옥 中 농촌에 있네'
중국 지린성 퉁화 인근 농촌의 옥수수보관 창고
“어, 가야시대 고상가옥과 비슷하네!”
중국 지린성(吉林省) 퉁화(通化) 인근의 농촌에서 취재진은 원두막처럼 생긴 창고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네 기둥의 중간쯤에 곳간같은 공간을 꾸미고 뗏목을 엮듯 나무로 벽체를 만든 독특한 형태였다. 단순히 보면 한국식 뒤주에 높다란 기둥을 세운 구조다. 중국에서는 이를 ‘창즈(倉子)’라고 부르고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70대 초반의 할머니는 “조상들이 사용해온 창고다. 주로 옥수수를 넣어둔다. 통풍이 잘 되기 때문에 옥수수 보관에 좋다”고 말했다.
중국 동북지방의 농촌에는 이같은 창고가 집집마다 하나씩 설치돼 있어 농가의 필수 시설이 되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이 창고는 외견상 가야시대 때 이용했다는 고상가옥과 비슷하다. 김해 봉황대 유적지와 김해 장유 신도시의 ‘아랫덕정 유적지’에 복원돼 있는 ‘고상가옥’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다.
중국의 이런 창고는 문헌기록에 나오는 고구려의 ‘부경(뷻京)’을 연상시킨다. 중국인이 기록한 3세기대의 사료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인의 생활풍습을 묘사하면서 ‘無大倉庫, 家家自有小倉(무대창고 가가자유소창)’이라 소개하고 이를 ‘부경’이라 부른다고 했다. 즉, 집집마다 작은 창고가 있다는 말이다.
학자들 중에는 이를 근거로 고구려 때의 농경풍습이 중국 동북지방에 전래되었다고 보는 이도 있다.
고구려식 창고인 부경은 일본열도로 건너가 일본식 창고가 됐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 도다이지(東大寺) 뒤편에 있는 곳간과 그곳의 정창원(正倉院)은 형태상으로 고구려 부경을 모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國出鐵…’. 3세기대의 사실을 기록한 중국사서인 ‘삼국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나라(가야)에서 철이 생산된다’는 이 말은, 김해지역에서 쏟아진 철기류와 함께 ‘철의 왕국’ 복원의 결정적 단서가 됐다.
한자의 숲속에 숨어 있던 ‘國出鐵…’기사를 처음 찾아낸 이는 이병도 박사로 알려져 있다. 문헌자료의 실증을 통해 역사연구의 기초를 닦은 이 박사는 또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을 국역하면서 ‘가야’의 존재를 소개했다.
비슷한 시기에 언론인이자 사학자였던 천관우 선생은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 활용의 길을 텄고, 부산출신 김정학 선생은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문헌자료를 보완·검증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광복후 1세대 연구자로 분류되는 이들은 ‘가야’라는 미답의 경지로 들어가는 길을 열었다. 그후 가야사 연구는 ‘젊은 피’를 만나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최근 20년간 한국고대사의 성과를 되돌아보면 가야사 연구가 단연 선두에 놓인다.
#눈부신 연구성과
김해시가 운영하는 가야사 홈페이지(www.gayasa.net/gaya/) ‘역사자료실’을 노크하면 가야사 논저 목록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일별해 보니 연구 단행본이 43건, 논문이 977건(문헌사학 544, 고고인류학 433건), 발굴보고서가 286건이다.
이는 엄청난 숫자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관련된 발굴보고서가 각각 100건 정도라고 하니 가야사 연구가 어느 정도 활발했는지 짐작된다.
홍익대 역사교육과에서 운영하는 ‘한국역사 서지검색’ 사이트에는 고대 국가들, 즉 삼국과 가야의 연구성과물을 비교해 놓고 있어 흥미롭다. 1870~2000년 전반까지 나온 논저 수는 신라 2천3백19건, 백제 1천3백6건, 고구려 806건이고, 가야가 504건이다. 삼국과 달리 가야사 논저의 대부분이 1980년대 이후에 나온 것을 감안하면 적은 숫자가 아니다.
연구자 수에 있어서도 가야는 삼국에 뒤지지 않는다. 가야사 및 고대한일관계사로 국내외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만 약 20명. 고구려나 발해 연구자가 각각 6~8명에 머물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가야 연구의 폭이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타급 연구자들
가야사 연구자 중에는 시쳇말로 ‘골수’가 적지 않다. 본지 가야사 취재팀이 학계의 추천과 개별 연구자의 저서, 논문, 발굴조사 및 대외활동 등을 토대로 분석해 보니 ‘스타급 연구자’가 10여명에 달했다.
먼저 문헌사학 쪽에는 김태식(47·홍익대) 이영식(48·인제대) 백승충(45·부산대) 교수, 백승옥(41·함안군 학예연구사)씨 등이, 고고학 쪽에는 신경철(52·부산대) 조영제(50·경상대) 박천수(42·경북대) 교수 등이 꼽혔다.
김태식 교수는 전·후기 가야연맹체설의 이론적 실체적 토대를 마련한 연구자다. 1993년 ‘가야연맹사’(일조각)에 이어 지난해 펴낸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전3권(푸른역사)은 국내외 가야사 연구의 결정판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장인 이영식 교수 역시 연구활동이 활발하다. 1993년 일본에서 ‘加耶諸國と任那日本府(가야제국과 임나일본부)’를 펴내 큰 반향을 불러모았고 가락국 성립, 전쟁, 가야불교, 정신세계 분야의 중요한 논문들을 발표했다.
백승충 교수는 가야의 지역연맹사 연구에, 백승옥씨는 가야 각국의 성장과 발전연구에 각각 의미있는 성과를 쌓고 있다.
이밖에도 문헌사학 쪽에는 권주현(계명대 강사)씨가 생활사 분야에 독보적인 연구성과를 낸 바 있고, 주보돈(경북대) 이근우(부경대) 윤석효(한성대) 노중국(계명대) 교수 등의 연구가 눈에 띈다.
신경철 교수는 ‘가야 고고학’의 바탕을 마련했다 할 정도로 많은 발굴조사를 하고 그에 따른 연구성과를 냈다. 김해 대성동, 부산 복천동고분 등을 발굴했으며 금관가야 성립과 관련해 부여족 남하설을 제기,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조영제 교수는 합천 옥전고분의 발굴(1985~1991) 주역으로 ‘다라국’ 존재를 부각시켰고, 박천수 교수는 대가야의 토기편년과 영역을 정리했다.
고고학 쪽에는 이밖에 임효택(동의대) 심봉근(동아대) 김세기(경산대) 김두철(부산대) 교수, 송계현(복천박물관장) 홍보식(부산시립박물관)씨 등의 조사연구 활동이 주목되고 있다.
#외국 연구자 및 향토사학자
일본에도 ‘가야통’이 10명 정도 있다.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학자는 다나카 도시야키(田中俊明·51) 교수. 사가현립대에 재직중인 그는 5~6세기 대가야 중심의 연맹체를 상정, 외국인으로선 드물게 전론(全論)을 편다.
규슈대의 니시타니 다다니(西谷 正·66) 교수는 고대한일관계사를 주로 다루는데, 발표한 논문만 500여편에 이른다. 그가 펴낸 ‘동아시아 지석묘 종합연구’는 한국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일본국제문화재연구소 나가시마(永島 暉臣愼·62) 소장도 고대한일관계사 연구분야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그는 고구려 벽화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다.후쿠오카대의 다케스에 주니치(武末純一·53), 도쿄 국학원대학의 스즈키 야스타미(鈴木靖民·60), 오카야마 리카대의 가메다 슈우이치(龜田修一·50) 교수 등도 가야에 깊은 관심을 갖는 학자들. 주로 가야와 왜, 철과 도래인
서양의 가야사 연구자로는 폴란드 바르샤바대의 요안나 루알레즈(여·30)씨와 영국 더람대학의 지나 리 반스(여·55) 교수가 꼽힌다. 요안나씨는 지난 2000년 인제대에서 수학한 뒤 자국에서 ‘가야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가야 각 지역의 향토사 연구도 활발한 편이다. 김해의 허명철(58·금강병원장)씨, 창녕의 김세호(86)씨, 경북 고령의 김도윤(80)씨 등은 전문 연구자 못지 않은 활동을 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 허명철씨는 ‘허왕후 초행길’ ‘가야불교의 고찰’ ‘가야와 초기 임나(任那)’ ‘아리랑 원류’ 등의 저서를 통해 학계에까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다.
김세호씨는 ‘가야사’와 ‘비화가야사 연구’라는 책을 통해 창녕지역 가야사의 줄기를 잡아냈고, 김도윤씨는 50여년간 가야사 연구에 매달려 ‘대가야의 철기문화’ 등 40여권의 책자를 묶어냈다.
국내외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가야사는 뒤늦게나마 긴잠에서 깨어나 한땀 한땀 조각보같은 역사를 복원해 가고 있다.
<31> 제6부 깨어나는 가야 '박노자 오슬로大 교수'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에 재직중인 박노자(30·사진) 교수가 모처럼 자신의 전공인 ‘가야사’에 대해 입을 열었다. 러시아 태생으로 지난 99년 한국에 귀화한 박 교수는 ‘당신들의 대한민국’(한겨레신문사) 등의 책을 통해 한국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젊은 사학자. 오슬로에 있는 그를 e메일을 통해 인터뷰했다.
-가야사를 전공했는데 요즘엔 근현대사에 더 관심을 두는 것 같다.
“근현대사에 빠져 가야사 논문을 안쓴지 3~4년이 된다. 이렇게 가야사 이야기를 들으니 양심의 가책이랄까 약간 미안한 느낌이 든다.”
-가야사는 어떤 계기로, 언제부터 공부했나.
“1992년부터 러시아에서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번역했다. 흥미가 있어 그것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어 박사과정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가야사를 시작했다. 당시 지도교수인 모스크바 국립대 미하일 박 선생님이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파악해 보라 해서 ‘일본서기’ ‘신찬성씨록’ 같은 일본자료까지 섭렵했다.”
-임나일본부설을 어떻게 보나.
“그건 당대의 명칭이 아니다. 5세기에 일본에서는 ‘일본’이란 말도 없었다. 그래서 난 백제의 일본계 관료와 연관이 깊은 일종의 무역기구라고 생각한다.”
-박사학위 논문은 어떤 내용인가.
“1996년 10월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받은 ‘5세기말부터 562년까지 가야 초기국가의 역사’라는 논문이다. 가락국기와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남가야를 분석하고, 일본 문헌자료에 의거해 대가야 및 안라(함안), 그리고 왜와의 관계를 연구했다.”
-앞으로 가야사 연구계획이 있는가.
“있다. 근대 일본 사학에서 임나일본부라는 허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식민지 때 그곳 학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조작, 이용했는지 밝혀내고 싶다.
-국내외 가야사 연구현실에 대해 촌평한다면.
“김태식 교수를 비롯한 일련의 학자들이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발굴작업이 더 활발해져야 한다. 예산이 늘어나고 발굴기술도 보완돼야 한다.”
<32> 제6부 깨어나는 가야 '기고-가야사 이렇게 고쳐 써야'
기고/중등 국사 교과서의 가야사 서술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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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가야의 위치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거의 대등한 수준이다. 이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확인이 된다. 고대 유물을 전시하는 2층에서 기획전시실, 선사실과 통일신라실을 제외하면 원삼국실, 고구려실, 백제실, 신라실, 가야실이 대등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 중에서 원삼국실은 이른바 ‘삼국’의 초기 단계를 보여주고 있으나, 고구려 초기의 유물은 없고 백제나 신라 지역의 것도 소수일 뿐이고, 실은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3세기 이전 유물 위주로 전시되고 있다. 이제 가야사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중학교 및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고대사 분야에서 가야사 서술을 크게 늘려야 한다. 구체적으로 고교 국사의 서술 현황과 그에 반영시킬 가야사 내용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제3장 1절 3항의 ‘삼국의 발전과 통치 체제’ 중 ‘삼국의 정치적 발전’이라는 항목에서 4~6세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발전하는 모습이 서술되었으나, 가야는 생략되어 있다.
가야는 5세기 전반 이후에 가야지역의 세력 판도가 변하여 5세기 후반에 고령의 대가야 하지왕이 나타나면서 후기 가야연맹을 형성하고, 대외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거기에는 후기 가야연맹의 범위가 전라남북도의 동부 지역 전반에까지 미쳤던 점에 대한 정확한 서술, 후기 가야연맹 전성기의 20여 개가야 소국의 국명과 위치에 대한 기술 및 지도 등이 보충되어야 한다.
그에 이어 ‘삼국 간의 항쟁’ 항목에서는 삼국의 항쟁 사이에 가야의 흥망이 함께 서술되었는데, 여기서는 5세기의 대가야 대두에 대한 기술은 생략하고 6세기 이후 가야연맹의 분열과 멸망과정이 좀더 구체적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즉, 호남 동부 지역의 영유를 둘러싸고 일어난 대가야와 백제 사이의 분쟁과 그로 인한 대가야와 신라의 결혼 동맹, 그 속에서 가야 제국이 긴밀하게 결속할 수 없었던 상황 등이 드러나야 한다.
또 당시에 활약한 이뇌왕, 우륵, 구형왕, 도설지왕 등 구체적인 가야 인명들도 나타나야 한다.
제4장 1절 ‘고대의 경제’ 부분에는 가야에 대한 서술이 전혀 없다. 한국 고대 경제의 발전에 미친 가야의 기여는 매우 크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가야의 철 생산 기술의 우월성, 가야의 원거리 해상교역 입지조건의 우월성, 농경 입지조건의 안정성, 가야의 철제 농기구의 발전상 등에 대한 서술이 포함되어야 한다.
제5장 1절 ‘고대의 사회’ 부분에도 가야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는 가야 관련 기록과 고분군 분포 및 유물 출토 상황을 통해 볼수 있는 각 소국 내부 및 소국 사이의 사회 구조, 계층 발달 상태, 순장 문제의 성격 등이 언급되어야 한다.
제6장 1절 ‘고대의 문화’ 부분의 ‘금속 기술의 발달’과 ‘농업 기술의 혁신’ 및 ‘고분과 고분 벽화’, ‘삼국 문화의 일본 전파’ 항목에도 가야에 대한 서술이 없다. 이 부분은 지금까지의 가야사 및 고고학 연구성과와 비교해 볼 때 허탈감을 안겨 준다.
여기에는 철제 갑옷, 무기, 마구, 토기 등에 보이는 가야 문화의 우수성과 개성, 가야금 음악의 신라 전수, 강수와 김유신 가계와 같은 가야 후손들이 신라 문화에 미친 영향, 일본의 농경, 제철 및 철기 제작, 경질토기(스에키) 제작술 등에 미친 가야문화의 영향 등을 언급해야 한다.
여기서 나아가 가야문화의 특성을 보여주는 사진 자료도 적극 게재해야 한다.
다른 문제를 모두 차치하고 일본 검인정 교과서에 숱하게 나타나는 ‘임나일본부설’의 관념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가야의 자주적 발전상은 중등 교육에서 한층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 김태식 · 홍익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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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6부 깨어나는 가야 ②교과서속 가야사 '국사책에 나타난 변화'
#국사책에 나타난 변화
‘가야’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나시는지. 5가야 혹은 6가야? 임나일본부? 아니면 신비의 왕국?
대개 이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중·고교 ‘국사’ 교과서를 한번 펴 볼 일이다. 현행 국사책(2003년 3월 1일 발행)에는 5가야 혹은 6가야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없다. 대신 전기·후기가야 연맹이 소개돼 있다. ‘삼국유사’에 언급된 ‘6가야’는 가야 당시의 것이 아니고 나말여초 의 본관제 성립 때 생긴 개념이다.
국사책에는 임나일본부설도 보이지 않는다. 일본 신공황후가 가야땅을 지배했다는 황당무계한 논리를 깨끗이(?) 씻어낸 듯하다.
가야가 더이상 신비의 왕국으로 묘사되지도 않는다.
현행 7차 교육과정의 중·고교 국사책은 몇가지 주목되는 변화가 있다.
고교 국사책이 시대별 통사에서 분류사 체제로 바뀌었고, 가야사의 쟁점이던 ‘6가야’도 다르게 정리됐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교과서의 가야사 푸대접은 여전하다. ‘삼국’의 틈바구니에서 주변부로 다뤄지면서 역대왕조 계보나 연표에는 나라이름조차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고교 국사의 경우, 분류사가 되면서 종전보다 서술 면수가 오히려 줄었다. ‘정치’ 항목에서 겨우 1쪽 정도 다뤄지고 있을 뿐, 경제·사회·문화 항목에는 가야사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부경대 이근우 박물관장은 “올해 고교 국사에는 전기가야연맹 지도가, 중학교 국사에는 후기가야연맹 지도가 새로 들어갔으나 소국(小國)이 명기되지 않는 등 알맹이가 없다. 무엇보다 절대 서술면수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교과서 누가 쓰나
현행 고교 국사책의 고대 정치 즉, 가야사 부분 집필자는 정만조(57·국민대 국사학과) 교수와 구덕회(48·서울 미성중) 교사다. 기본 서술은 구 교사가 맡았다고 한다. 그런데 집필자 2명 모두 고대사 전공자가 아닌 조선시대사 전공자이다.
한국고대사학회 소속의 P모 교수는 “고대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한테 고대 정치분야의 교과서 집필을 맡긴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구덕회 교사는 “여러 통로를 통해 자문을 받아 썼다. 가야사의 경우 적지않은 연구성과가 있지만 일반화된 부분이 적다. 앞으로 연구성과가 늘어나면 더 많은 부분이 반영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야사 서술면수가 태부족이라는 지적에 대해 서 그는 “교육부 준거안을 따랐으며 다른 부분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객관적으로 쓴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사 교과서 집필과정의 정책상 허점도 있다. 집필자에게 주어지는 원고료가 1쪽당 6만8백원으로 일반 언론사 고료의 절반수준이며 집필시간도 넉넉하지 않다는 것.
국사편찬위원회 관계자는 “가야사는 다른 분야에 비해 최근들어 연구성과가 많이 반영되는 편”이라며 “향후 교과서를 계속 국정으로 할지, 검인정으로 바꿀지 정리되면 사정이 또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사국시대는 가능한가
가야사가 교과서에서 ‘낮게’ 평가되는 가장 큰 이유는 ‘삼국’에 끼워져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제기되는 것이 ‘사국시대론’이다. ‘삼국’에 의식적으로 짓눌려 있는 가야를 되살리기 위해 사국의 체제로 역사를 보자는 것이다.
향토사학계에서 간간이 제기해온 사국시대론은 근래 홍익대 김태식(역사교육) 교수가 이론적 틀을 잡아 새롭게 주창하고 나서 크게 주목되고 있다.
김 교수는 “가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100년 정도 앞서 멸망했지만 사료상으로 42~562년까지 약 500년간 존재했고, 영역이나 문화수준의 우수성, 중국과 왜와의 교류 등을 볼때 당당한 일국의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1990년초부터 발해사가 교과서에 남북국 시대로 되살아났듯,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 복원도 시대적 과제라는 지적이다.
이에대한 학계의 반응은 지지·비판 양론으로 엇갈리고 있다.
단국대 윤내현(사학과) 대학원장은 “삼국이란 명칭은 일제때 일본인들이 가야를 속국화하는 논리로 만든 것”이라며 “가야사 복원을 위해서는 사국시대로 불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의대 임효택 박물관장은 “삼국에 가야를 더해 사국시대라 말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면서 “논란이 된다면 일본처럼 고분시대라 해도 된다”고 지적했다.
반면, 인제대 이영식(사학과) 교수는 “가야를 넣어 사국이라 부르면 부여는 또 5국이 되느냐”면서 “중요한 것은 내실있는 연구를 통한 가야사 복원”이라고 밝혔다.
학계에서는 ‘삼국시대’의 다른 대안으로, 다국시대 또는 열국시대(백승옥 함안군 학예연구사), 전국(戰國)시대(이영식 교수), 3국1체제(이기동 동국대 교수) 등을 제기하기도 한다.
◇ 가야사 관련 주요 논저 | ||
시 기 |
연구내용 |
비 고 |
조선후기 |
한백겸·정약용 등 연구 |
지명고증에 주력 |
1930 |
末松保和 ‘임나일본부설’ 정리 |
“신공황후 369~562년 한반도 남부 통치” |
1937 |
이병도 ‘삼한문제의 제고찰’ |
|
1949 |
江上波夫 ‘기마민족설’ 제기 |
“4세기초 기마민족이 일본에서 왜한연합왕조 경영” |
1966 |
北 김석형 ‘초기조일관계연구’ |
분국론(“4~5세기 왜는 한국계통의 소국”) |
1976 |
이병도 ‘가라사상의 제문제’ |
|
1977~78 |
천관우 ‘복원가야사’ |
백제군사령부설 |
1993 |
이영식 ‘가야제국과 임나일본부’ |
도쿄서 발간 |
1993 |
김태식 ‘가야연맹사 연구’ |
전기·후기가야 체계화 |
1995 |
백승충 ‘가야의 지역연맹사연구’ |
부산대 박사학위 |
1998 |
권주현 ‘가야문화사 연구’ |
계명대 박사학위 |
2000 |
정중환 ‘가라사연구’ |
가야문제·사상연구 |
2001 |
백승옥 ‘가야각국의 성장·발전연구’ |
부산대 박사학위 |
2002 |
김태식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전3권) |
가야사 체계적 정리 |
1천6백여년만에 되살아난 금관가야인들. 왼쪽은 남방계 형질, 중간은 북방계 형질의 무사다 . 이들은 김해 예안리 고분의 인골을 토대로 복원됐다. 여자는 김해 대성동 목곽묘의 주인을 복안했다
가야문화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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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于勒)이란 사내가 있다. 생몰이 분명치 않은 이 사내는 ‘나라가 어지러워지자(國亂)’ 가야금을 들고 신라에 투항한다(‘삼국사기’ 기록). 투항이 아니라 망명이라는 지적도 있다. 조국을 등지고 지켜낸 것이 가야금이고 보면 망명설은 제법 설득력이 있다. 신라군에 의해 납치됐다는 말도 있다.
우륵이란 이름 속에는 조국과 음악혼, 한(恨)과 정(情)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 가야금 소리가 오열조(嗚咽調)인 것은 이 때문일까. 사무치는듯, 울부짖는듯, 간장을 녹일듯 오묘한 음률. 그것이 1천5백여년간 줄곧 민족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가야(伽倻)’의 ‘금(琴)’이다.
경북 고령군이 우륵을 생각하는 마음은 아주 각별하다. 공원을 만들고 기념탑을 세우고 매년 추모제를 열고 가야금 경연을 펼치면서도 뭔가 부족해한다. 고령군은 현재 25억원을 들여 우륵기념박물관을 짓고 있다.
김문구 고령군 문화체육과장은 “우륵은 가야문화를 대표하고 민족음악을 상징하는 악성이다. 우륵과 가야금은 고령의 빼놓을 수 없는 관광자원이다”고 말했다.
#거듭나는 가야 고도
가야권 지자체들은 지금 새로운 가야를 꿈꾸고 있다.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아 지역의 정체성을 세우고 시대에 맞는 역사문화콘텐츠로 적극 활용한다는 꿈이다.
김해시의 가야문화 복원사업은 여러모로 화제다. 전체 3단계 사업 중 1단계(1999~2003) 사업비만 1천2백97억원. 연간 투자액으로 따지면 김해시 전체 예산의 10%선이다. 사업비 중 국비지원은 50%다.
주요 사업내용을 보면 △대성동 전시관 및 고분 정비(1백11억원) △봉황동 유적정비(18억원) △가야유적 연결로 조성(44억원) △구지봉 정비(15억원) 등이 있다.
김해시는 이어 △가야인 생활체험촌(1백25억원) △테마공원 A, B(1백15억원) △분성로 정비사업(30억원) 등을 설계중이고, △가야의 숲(근린공원 40억원) △패총단면전시관(47억원) △왕릉길 조성공사(17억원)를 곧 발주할 계획이다.
사업의 가짓수나 외형은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김해시에 산재한 문화유적이 약 200곳인데, 이번에 손을 댄 곳은 고작 5~6곳에 불과하다. 또 전체 사업비 중 절반은 토지매입비라고 한다. 그러니 겉만 요란했지 전체에서 보면 지엽적인 정비라는 것이다.
이홍식 김해시 문화정비과장은 “김해의 가야문화 정비는 이제 갓 시작단계”라며 “신라고도인 경주처럼 김해를 가야고도로 만들려면 특단의 정부지원이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고령군의 ‘대가야 복원작업’도 주목된다. 고령군은 우륵박물관 외에 △대가야 역사관 건립(예산 86억원) △대가야 테마공원(3백6억원) △지산동 고분 및 주산성 정비(1백30억원) △국도 26호선 지맥잇기(25억원) 등을 추진중이다. 또 조만간 학예관(5급) 1명, 학예사(6~7급) 2명을 채용, 대가야 연구·홍보를 본격화할 계획이다.
#가야 ‘소국’들도 부활 몸짓
김해시와 달리, 경남의 다른 가야권 지자체들은 ‘소국(小國)’의 설움을 겪고 있다. 분립을 특징으로 하는 가야는 소국 하나하나가 중요한데도 정부와 시민들의 관심은 김해와 고령에 쏠려 있다.
경남도의 제 2차 가야문화권 정비계획(1999~2003년)을 보면, 5개권 7개사업에 총 1천7백59억원이 투입됐으나, 김해를 빼고 나면 4백20억원(함안 2백79억, 합천 80억, 고성 46억, 창원 15억원)에 불과하다.
경남도의 3차 가야문화권 정비사업(2003~2007년)도 전체 예산이 2백2억원이다. 주요 사업은 합천 옥전유물전시관(32억), 함안박물관(79억), 고성유물전시관(39억), 창녕 교동고분 정비(52억원) 등으로 지자체별 전시관 건립이 고작이다.
신용민 경남도 문화재 연구위원은 “경남의 뿌리이자 정체성인 가야를 새로운 역사문화콘텐츠로 활용하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부산시도 최근들어 가야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부산시사편찬위원회는 지난해 ‘항도부산’ 18집을 통해 ‘삼한·가야시대의 부산’을 다뤘고, 지난 96년 개관한 복천박물관은 가야사 전문박물관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부산시는 기장에 추진되는 ‘역사문화촌’에도 ‘가야·신라코너’를 마련할 계획이다.
홍완식 부산시 문화관광국장은 “부산이 일찍 신라화했다는 지적이 있지만 뿌리는 역시 가야”라면서 “학계 시민이 함께 나서 가야문화 르네상스를 앞당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역대학이 ‘가야사’를 커리큘럼에 부분적으로 흡수시키고 있는 것도 긍정적인 변화다. 동아대는 전공선택으로 ‘가야사’를, 부산대는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교양과목으로 각각 개설하고 있다. 부산대 강좌에는 학기마다 250여명의 학생이 수강할 정도로 인기가 있다. 또 동의대는 학부와 대학원에 전공선택으로 ‘가야사’를, 부경대는 교양과목으로 ‘부산의 역사’를 각각 가르치고 있다.
경남에서는 창원대가 가야사 강좌를 개설중이다. 창원대박물관은 지난 1999~2001년 시민상대 가야사 심화 과정을 열어 관심을 모았다.
#가야문화클러스터 주목을
가야사의 특징은 분산·분립이다. 각 소국이 따로따로 성장·발전하며 전·후기 연맹체를 이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다. 가야의 분산·분립적 특성을 살리면서 가야사 복원을 한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부산시 시사편찬실 홍연진 상임위원은 ‘가야문화클러스터(집적단지)’를 제안한다. 그는 “가야사가 부산과 김해 따로, 함안, 창녕, 고령이 따로 따로 되어서는 안된다. 일관된 관점에서 가야사를 연구, 정리, 홍보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가칭 ‘가야역사문화원’ ‘가야문화자료센터’ 등을 만들 수 있다. 가야권 지자체가 합심, 정부지원을 받아 ‘가야문화클러스터’로 풀면 효과적일 것이다.”
홍익대 김태식(역사교육) 교수도 이에 공감, “각 지자체에 분산돼 있는 가야의 힘을 모으고, 가야사 연구 및 교육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가야문화자료센터’ 설립이 적극 검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33> 제6부 깨어나는 가야 '김해 대성동 전시관 화제'
금관가야인이 되살아났다. 지금부터 1천6백여년전, 김해 예안리 및 대성동에 살았던 무사와 여자다. 무사들은 철갑옷에 창과 환두대도를 들고 있다.
김해시는 대성동 유물전시관 개관을 앞두고 최근 금관가야인 5명(남자 무사 4명, 여자 1명)을 복원, 전시관에 들여놓았다. 이 중 여자는 랜티큘러(영상변화 표시장치)로 제작돼 생동감을 주고 있다. 이같은 복원은 국내 처음이다.
예안리 19호분 인골을 토대로 복원된 남자무사 2명은 북방계 형질로, 코가 오똑하고 얼굴이 갸름한 미남형이다. 발굴 당시 부장품으로 미뤄 상위계층의 무사로 추정된다. 반면 예안리 41호분의 남자 2명은 코가 옆으로 퍼져 낮고 눈에 쌍꺼풀이 져 있어 남방계 형질의 특성을 보여준다. 이들의 평균키는 167.4㎝로 남방계가 상대적으로 작다.
복원작업을 맡았던 한서대 부설 ‘얼굴연구소’ 조용진 소장은 “예안리의 가야인은 북방계·남방계가 반반씩 섞여 있어 주민 형질특성 및 변화과정을 보여준다”며 “편두(이마 부위를 납작하게 하는 풍습)를 한 사람은 대체로 남방계였다”고 설명했다.
랜티큘러로 복안(復顔)된 ‘금관가야 여자’도 관심거리. 대성동 57호분 목곽묘의 주인이었던 이 여자는 키 149.7㎝에 이마가 넓고 이목구비가 얼굴 아랫쪽으로 처져 있다. 때문에 전형적인 한국인의 모습과도 다소 차이가 난다.
30대 초반으로 추정된 이 여자는 발굴 당시 좌측 손 부위에 평소 사용한 생활도구로 여겨지는 자그마한 칼들을 놓아두고 있었다.
복안 작업을 한 동아대 김재현(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골반 상태로 보아 1~2회 출산경험이 있고, 다리근육이 발달해 생전에 육체노동에 종사했던 것 같다. 치아를 보면 발육기에 영양이 부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 금관가야인은 내달 10일부터 시민들과 만난다.
“가야사가 좀 보이등교?” 본지의 ‘가야사’ 시리즈가 대단원을 향해 가던 이달 초, 경북 고령에 사는 김도윤(金道允·80) 옹이 본사를 불쑥 방문해 던진 질문이다. 김 옹은 50여년간 줄곧 ‘가야사’와 씨름해온 향토사학자다. “어려울 끼지요. 그러타캐도 그기 우리 삶의 원형이니까 꼭 찾아야지.” 그의 당부는 간절했다.
지난해 9월 ‘가야사 복원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취재진은 가야의 온전한 지도(地圖)를 그리겠다고 했다. 결과적으로는 희망사항이 됐다. 그것이 곧 한국 고대사를 다시 쓰는 작업이니 어찌 쉬울 것인가.
가야사는 아직도 드러난 것보다 숨겨진 것이 휠씬 더 많다. 이제야 겨우 복원의 시동이 걸렸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지도든, 도판이든 섣불리 말하고 규정하기가 어렵게 돼 있다.
무리가 있겠지만, 학계의 그간 연구성과를 중간 정리하는 차원에서 가야의 지도 하나를 그려본다. 물론 가설(假說)로서의 지도다. <그림참조>
가야의 최대 판도가 형성된 시기는 후기가야(연맹) 때인 5세기 후반~6세기 초다. 이 때의 영역은 경남과 경북 일부, 호남 동부까지 포함된다. 경상 남도에서는 낙동강과 가까운 창녕 밀양 부산까지 들어온다.
북쪽으로는 가야산과 덕유산을 경계로 삼고, 서쪽은 만덕산-경각산-오봉산-내장산-무등산-천운산-제암산-방장산-존제산 등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 서쪽 줄기를 경계로 그 안쪽의 섬진강 수계를 포괄한다. 남쪽은 순천만부터 낙동강 하구까지, 동쪽은 고령 이남을 기준으로 낙동강 중류의 창녕과 영산면이 들어온다.
가야는 시간적 범위로도 한국 역사상 어느 국가 못지 않다. 문헌사료로는 서기 42~562년이다(삼국유사). 고고학적 자료를 종합해 보면 철기를 수반하는 목관묘 문화가 시작되는 기원전 1세기까지 올라간다. 창원의 다호리, 사천의 늑도 유적은 가야의 전신인 변한의 문화를 생생하게 웅변해준다.
이렇게 보면 가야는 최소 500년, 최대 700년간 존속한 셈이 된다. 고려(918∼1392년)·조선(1392~1910년)의 ‘500년 왕업’은 긴 것으로 보면서 ‘700년 가야사’를 별 것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은 난센스다. 더구나 가야의 시기는 민족문화의 원형이 만들어지던 때다.
가야에 대한 갖은 오해와 편견의 언덕을 비비고 헤집는 사이 성과도 있었다. 시리즈가 계속되던 지난 3월, 교육인적자원부 발간 중학교 및 고교 국사책에는 가야사 지도가 바뀌었다. 종전의 6가야 지도가 사라지고 전기가야(고교), 후기가야(중학교) 연맹을 보여주는 지도가 각각 새로 들어갔다. 주목되는 변화였다. 그에 앞서 본지는 2002년 11월 9일자 가야사 시리즈 9회분에 ‘6가야의 실체’를 다뤘다.
가야는 통념처럼 6가야가 연맹을 형성했던 것이 아니라, 최소 12개국 최대 32개국이 이합집산하며 전기·후기연맹을 만들었다. 따라서 이제 6가야는 ‘가야 제국(諸國)’으로 바꿔 불러야 옳다.
본지는 시리즈와 병행해 가야사 시민강좌 8회, 국내 답사 3회, 일본탐방 1회를 비롯해 심포지엄과 토론회, 설문조사 등을 진행했다. 가야사 강좌에는 매회 100여명의 시민이 참여했고 가야사 답사는 호응이 높아 앙코르 행사까지 마련됐다.
10개월간의 ‘가야사 항해’를 통해 취재진이 새삼 확인한 것은, 가야문화가 낙동강 문화의 원류이자 영남문화의 맥이었다는 사실이다. 가야의 토양에서 통일신라의 화려한 문화가 움텄다는 것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가야의 옛땅인 부산과 경남·북 지역에 사는 가야의 후예들은 오늘 가야사의 꿈을 되찾고 그 명예를 회복시킬 책무가 있다.
◇ 가야사 주요 연표 | ||
연 대 |
사 건 |
근거문헌 |
BC 39년 |
변한이 신라에 항복 |
삼국사기 |
AD 42년 |
수로왕, 가락국 건국 |
삼국유사 |
48년 |
인도공주 허황옥, 수로왕과 혼인 |
삼국유사 |
189년 |
가락국 허왕후 157세로 죽음 |
삼국유사 |
199년 |
수로왕 158세로 죽음 |
삼국유사 |
209년 |
포상팔국 가락국 공격 |
삼국사기 |
400년 |
고구려 광개토대왕 가야 공격 |
광개토대왕 비문 |
452년 |
가락국 질지왕 왕후사 세움 |
삼국유사 |
479년 |
가라왕 하지, 남제로부터 보국장군 본국왕 작호 받음 |
남제서 |
532년 |
금관국왕 김구해 신라에 항복 |
삼국사기 |
530년대후반 |
탁순국이 신라에 병합됨 |
일본서기 |
541년 |
제1차 사비회의(백제와 가야연맹이 임나 논함) |
일본서기 |
544년 |
제2차 사비회의 |
일본서기 |
551년 |
신라 진흥왕, 가야에서 망명한 우륵의 가야금 음악을 들음 |
삼국사기 |
560년 전후 |
안라국이 신라에 병합 추정 |
일본서기 |
562년 |
대가야가 신라공격으로 멸망 |
삼국사기 |
국제신문 연재(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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