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름 찬가 ― 1편
정월 대보름이라고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게 새벽에 방천 뚝에서 불붙인 집단을 빙빙 돌리며 해삼 밭에 불이야!!
를 외치던 광경입니다.
요사이 그러다가는 불이 난다고 당장 처벌받거나 어른들로부터 혼이 날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다른 날은 몰라도 대보름날만은 그것이 특별히 허용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마을에 전기가 보급되기 전이었으므로 요즘같은 가로등은 없었습니다.
사실 그때 서쪽 하늘에서 우리에게 밝은 미소를 쏟아부어 주던 달은 보름달이 아니고 열나흘 달이었습니다.
그 무렵 친구들이 불붙은 짚단의 한 쪽 끝을 두 손으로 잡고 휘휘 돌리면
불꽃은 머리 위에서 허공중에 원을 거리며 너울 너울 춤을 춥니다.
TV가 보급되기 전이었으므로 그러한 불놀이가 우리를 가장 흥분되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 반사적으로 불빛이 너울거리는 밖으로 뛰어나가 해삼밭에 불이야!!를 합창해댑니다.
표준말로는 쥐불놀이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릴 때는 그저 해삼밭에 불이야!! 라고만 했지 쥐불놀이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논밭에는 해삼( 바다의 해삼이 아닌)이라는 줄기가 가늘은 덩굴 식물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칡 덩굴이 나무를 감고 올라가듯 콩줄기등을 칭칭 감으면서 자라는데 이것이 콩, 팥등의 영양가를 빨아먹는
모양이었습니다.
해삼이 감고 올라간 콩등은 거의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불실한 열매를 맺곤했습니다.
그래서 해삼 밭에 불이야!!는 , 콩, 팥,벼등에 기생하는 해삼등 기생식물이나 벼멸구등 해충의 알을 태워죽이는 풍습에서
유래한 놀이라고 합니다.
우리 고향에서 그 놀이를 해삼밭에 불이야!! 라고 한 건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해삼등의 씨, 멸구알등을 태워죽이는 데
주안점을 둔 것 같고 서울등 다른 곳에서 쥐불놀이라고 부른 건 쥐를 태워죽이는데 촛점을 둔 명명이라 생각됩니다.
어느듯 날이 밝아오고 열나흘 달이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이면 우리는 노다리 밟기를 합니다.
당시에는 시냇물에 지금처럼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지지 않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른들은 짚으로 덤성덤성 지름 약 30cm 정도의 바구니를 여러 개 만들어 거기에 모래를 채우고 시냇물에
징검다리를 설칠해두곤 했습니다.
물론 정월 대보름이 되기 이전에도 크다란 돌로 징검다리를 설치해 두긴 합니다.
그러나 대보름날 정도가 되면 징검다리의 돌이 얼어 미끄러워서 그런 흙 징검자리를 설치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것을 밟으며 건너다니는 놀이가 노다리밟기입니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른들은 그 징검다리의 모랫 속에 동전을 파묻어 놓곤 했습니다.
요사이 아이들은 부모님으로부터 주기적으로 용돈을 탑니다.
그러나 우리 때는 용돈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가 너무나도 못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사는 노다리의 모래 속에 묻혀 있는 동전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노다지 금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고무신을 신은 채 발로 징검다리 속의 흙을 열심히 파 헤쳐 겨우 10원짜리 동전 1개만 찾아도 그날의 기분은 날아갈
정도였습니다.
보름날은 대체로 집집마다 콩, 팥등을 넣은 찰밥을 했습니다.
찰밥은 그 양을 푸짐하게 해서 며칠간 먹곤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생일이 되어야 그러한 특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보름날은 생일날에 먹던 그러한 찰밥을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님께선 말려두셨던 아주까리 잎, 취나물,잘게 썰은 호박, 콩나물, 고구마 줄기,무(짠지나물), 배추등 으로
맛있는 나물을 만들어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그날 비록 고기 반찬은 별로 없었지만 나물 반찬만은 다양하고 풍성했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복조리를 들고 떼로 몰려 이집, 저집 찰밥을 얻으려 다녔습니다.
최소한 세집 이상의 집에서 찰밥을 얻어와야 복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은 대체로 인심이 좋아 이웃집 어머니들은 웃는 낯으로 우리에게 찰밥을 주시곤 했습니다.
그날 해가 뜨고 난 뒤에는 친구들이 불러도 대답을 안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00야!!하고 부르면 무심결에 응!! 하고 대답을 하게 되고 그러면 상대방은 의기양양하게 내 더위 다 사가라!!
를 외칩니다. 아무 것도 아닌 데도 더위팔기에 당하면 속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은 대보름날부터 날씨는 따뜻해지고 그 이후에 걱정할 것은 추위가 아니고 더위라는 의미에서 생긴 풍습인 것 같았습니다.
우리 시골 마을의 이름은 동변리인데 동변리 속에는 원동변, 죽동( 죽마), 다만, 구산( 독죽골)등 4개의 마을이 있습니다.
죽마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원동변을 큰마( 큰 마을이라는 뜻)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잘 지내던 동변 마을 아이들과 죽마 마을 아이들은 대보름날만 되면 서로 돌을 던지며 싸우곤 했습니다.
우리는 그 뜻도 모른 채 죽마 놈들 곤달빼기!!라고 외쳤고 죽마 아이들은 큰마 놈들 곤달빼기!! 라고 외치곤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곤달빼기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다만 그 의미는 그 앞에 00 놈들이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좋은
의미는 아닌 듯합니다.
다른 마을에서도 그러한 풍습이 있었는지, 우리 마을과 죽마 간에만 그러한 투석전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한 풍습은 옛날부터 우리 마을은 우리가 지킨다는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생긴 풍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튼 그렇게 적대적으로 싸우던 우리와 죽마 아이들도 이튿날만 되면 정다운 친구로 되돌아가곤 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동네 친구들은 낯부터 이집,저집 다니며 통나무,짚단과 청솔가지를 거둡니다.
그것은 달이 뜰 무렵부터 시작되는 달집거스르기(달집태우기)의 달집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오후부터 달집짓기 공사는 시작됩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모은 것들로 마을의 개울 가에 통나무 몇 개를 우리의 키 높이에서 서로 교차되도록 세우고 그 주변을
마치 움막짓듯 짚단으로 덮어 씌웁니다.물론 달집의 문 쪽은 비워둡니다.
짚단 비깥으론 마치 삐까리( 낫가리의 경상도 사투리)쌓듯 청솔가지를 덮어 씌웁니다.그래야 연기가 많이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달이 뜨기가 무섭게 달집의 문속으로 집단에 불을 붙여 던져 넣습니다.
그러면 달집은 누르스름한 연기를 내기 시작합니다. 달집 그스르기는 좀 먼데서 보야야 제격입니다.
뒷 동산에 올라가 달집 그스르는 장면을 보면 정말 멋들어집니다.
엄청나게 큰 솜뭉치 연기가 소용돌이를 치며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것은 영락없이 상상 속의 거대한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거대한 솜뭉치의 용틀임을 보면 내 가슴은 뛰었습니다.
영국의 시인 위리엄 워즈워드( 1770- 1850)는
무지개를 보면 내가슴은 뛰누나(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라고 노래했습니다.
그 때의 내 가슴도 워즈워드가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와 같이 뛰었습니다.
거대한 황룡의 비상과 함께 대보름날의 행사는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이제는 가슴을 뛰게하던 거대한 솜뭉치의 소용돌이는 하나의 추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워즈워드는 초원의 빛에서 아래와 같이 노래했습니다.
한 때는 그리도 찬란한 빛이었건만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러나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그 속에 숨어 있는 오묘한 힘으로 살아남으리.
우리는 대보름날의 추억에 감추어진 오묘한 힘으로 강인하게 살아 남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