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이란 말은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기준에 합치되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더 좋은 자동차와 더 큰 집, 더 새로운 휴대폰을 갖고 싶은 마음이 우리 욕망의 자유로운 표현이라 생각하지만...", "노동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예측되는 결핍을 적절하게 충족시켜줄 정도로만 필요하고, 그래서 그런 노동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수적인 것이다."
마르쿠제는 고도 산업사회가 인간의 모든 욕구를 획일화시킨다고 보았다. 현대인들은 상품을 소비하는 삶을 최고의 삶, 유일한 삶으로 받아들인다. 마르쿠제는 이런 인간형을 ‘일차원적 인간’이라고 명명했다.
첫머리에 소개한 문장은 그의 대표작 ‘일차원적 인간’에 나오는 말이다.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의 욕구는 진실된 욕구가 아니라 거짓된 욕구라고 규정했다.
노동이란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예측되는 결핍을 적절하게 충족시켜줄 정도로만 필요하다는 말을 통해서 사용자의 욕구에 의해서 한없는 노동을 부가하는 행위, 그런 노동은 진짜 노동의 가치와 유리된 노동이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일차원적 인간에게 행복한 삶이란 상품을 많이 소비하는 삶과 동의어라는 게 마르쿠제의 생각이다. 그는 “일차원적 인간은 돈과 연관되지 않은 행복,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 경제적 가치로 환산될 수 없는 행복을 생각하고 욕망하는 능력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행복을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소비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 더 많은 돈을 벌려고 밤낮없이 일하는 것이 고도 산업사회의 전형적인 인간이다. 마르쿠제는 이렇게 얻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본다. 가짜 행복일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다. ‘지금 나는 행복해’라고 아무리 말해도 대부분 가짜 행복이라는 것이다.
진실된 욕구를 가져야 진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마르쿠제는 진실된 욕구와 거짓된 욕구를 구분할 책임은 온전히 본인한테 있다고 말한다. 행복을 위해서는 본인의 각성이 필요하다는 말로 들린다. 그가 이런 말을 한 이유이기도 하다.
“행복의 역사는 스스로 행복을 탐구하고 발견하는 사람들의 역사다.”
독일계 미국인 철학자, 정치학자, 사회학자. 20세기 후반 신좌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좌파 사상의 핵심 이론을 제공하여 신좌파의 아버지라 불린다. 젊었을 때는 하이데거의 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가 나치로 인해 미국 망명을 하면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활동했었다. 이후 강단에서만 활동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비판하면서 갈라져나와, 사회주의 운동 노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68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OSS에서 그는 파시즘을 패배시키기 위한 연구 및 분석 부서에서 일했다. 독일의 미래 군사 정부에 대한 포괄적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에 대한 배경 정보와 실질적인 조언을 제공하는 그룹이었다. 이 그룹에는 스튜어트 휴즈, 배링턴 무어, 폴 스위지, 칼 쇼스크, 프란츠 노이만 및 오토 키르히하이머 등 독일계 유대인 이민자와 미국 인문학 및 사회 과학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마르쿠제는 중부 유럽 섹션에서 노이만, 키르히하이머 등과 함께 정보분석가로서 일했으며, 에우게네 안데르손의 지시에 따라 다양한 정치 및 문화적 기원을 가진 40명의 전문가들과 함께 근무했다. 마르쿠제의 작업 중 하나는 민주적인 독일의 건설에 대한 것이었다.
이 시기 호르크하이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자신의 역할이 "미국 국민, 언론, 영화, 선전 등에서 적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제안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1946년에 설립된 OSS 후임 기관인 미국 국무부 산하 정보연구실에서도 근무했다. 1951년까지 유럽 지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지시에 따라 세계 공산주의위원회(CWC)의 심리전에 대한 과학적 결과를 분석했는데, 이 때의 관찰과 분석은 소련 뿐만이 아니라 국제 공산주의 조직 외부의 공산당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광범위한 연구에서 냉전 체제 시대의 공산주의 이해와 미국 정부 기관의 전략적 논의에 대해서 분석하면서 데탕트 정책을 옹호하고 있다.
훗날 마르쿠제는 CIA의 전신이었던 곳에서 일했다고 좌파들의 비난을 받는다. 마르쿠제는 이에 대해서, "나치체제를 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하기 위해서" 그 일을 맡았다고 자신을 변호했다. 그리고 그는 한 인터뷰에서 "만일 내가 했던 일 때문에 비판자들이 나를 공격했다면, 당시 전쟁이 파시즘에 대한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잊은 그들의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나는 내가 미국정부에 봉사했던 것에 전혀 수치심을 느낄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
마르쿠제는 호르크하이머를 비롯한 비판이론가들을 여전히 비난하기도 했지만, 학생들과의 분쟁에서 아도르노의 입장을 대변했던 하버마스와는 죽을 때까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마르쿠제는 인간 종이 살아남기 위해서 문명에 있어서 필수적인 억압을 '기초억압'이라 하고, 탐욕스럽고 적대적으로 확장하는 필요 이상의 억압을 '과잉억압'이라고 구분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과잉억압'은 합리성을 내세워 노동을 전문화시키는데, 노동의 전문화로 인해 인간은 단지 사회가 미리 설립해놓은 기능들만 수행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노동자는 쾌락원칙의 제약을 합리적인 법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조종당하며, 광고, 대중문화, 이데올로기는 노동자에게 이 법을 내면화시킨다. 이제 자본가를 위해 상품과 이윤을 생산하고 소비하도록 이미 계획된 기능들이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워져서 우리의 또다른 본성이 된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욕망하도록 정해진 것을 욕망한다. 그러나 이렇게 변질된 욕망은 본디 우리의 것이 아니므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인간은 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
마르쿠제는 단지 우리가 놀기만 하고 일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노동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예측되는 결핍을 적절하게 충족시켜줄 정도로만 필요하고, 그래서 그런 노동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수적인 것이다. 다만 그 이외의 과잉노동이 불필요한 것이라는 게 마르쿠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이해하기 쉽게 지금의 용어로 말하자면, 마르쿠제의 의도는 워라벨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렇게 과잉억압이 없는 사회에서의 '적절한 노동'은, 자기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될 수 있도록 해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선진산업사회에서는 물질적 번영이 점차 확산되어, 마르크스주의에서 혁명의 주체로 지목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없어진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는 끝난 것이 아닌가? 그렇진 않을지 모른다. '배고픔과 비참함으로부터의 해방'이 반드시 종속과 타락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은 자본주의 체계에 의해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구원에 있었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마르쿠제는 일찍이 『에로스와 문명』에서 섹슈얼리티의 해방이 혁명을 이끌어내는 주요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9년 뒤 『일차원적 인간』에서는 섹슈얼리티의 해방이 더 이상 전복적이지 않고 도리어 현존 억압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서술한다. 즉, 일차원적 사회에서 성적 쾌락은 이제 억압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이 사회에서 섹스와 성적 노출은 도처에서 일어나고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억압에서 해방되었다고 착각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성적 매력 마저도 또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구속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주인을 자유롭게 선출한다고 주인이나 노예가 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일차원적 인간》 中
첫댓글 "주인을 자유롭게 선출한다고 주인이나 노예가 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일차원적 인간》 中
우리는 진실된 욕구와 거짓된 욕구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거짓된 욕구란 개인을 억압하는 것이 이익이 되는 특정 사회적 세력이 개인에게 부과하는 욕구를 말한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1898~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