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이 金範伊 (1884 ~ 미상】 "순사파출소 습격하는 등의 의병 활동전개”
1884년경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남면(南面) 계자동(鷄子洞)에서 태어났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7년 어윤성(魚允成)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의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도 광주군 송파진 및 뚝섬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뚝섬의 순사파출소를 습격하는 등의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이어 한일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하면서 차관정치를 실시하였다. 또한 한일신협약(정미칠조약)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추진하였다. 1907년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를 시작으로 지방의 진위대까지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시작되었다. 전격적으로 추진된 군대해산에 반발하여 박승환(朴昇煥) 참령이 자결한 것을 신호탄으로 서울의 시위대가 봉기하였다. 시위대의 봉기는 일본군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이를 계기로 원주진위대가 봉기하는 등 전국에서 의병 봉기가 일어났다. 경기도에서도 허위(許蔿)를 비롯하여 여러 의병장이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경기도 광주에서 어윤성 의병장이 봉기하자 이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어윤성 의진에서 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07년 (음)11월 13일경 어윤성 의병장을 비롯한 동료 의병 수십 명과 함께 군자금을 확보하고자 총검으로 무장하고, 경기도 광주군 송파진(松波津)의 객주 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군수물자를 요구하고 군자금으로 30원을 획득하였다.
이어 12월 5일경에는 최씨 성을 가진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1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총검을 휴대하고 동대문 밖 뚝섬으로 이동하였다. 뚝섬에 들어가서는 뚝섬의 촌락순사파출소를 공격하여 보관 중이던 모포·시계 등의 비품을 비롯하여 총기·군도 등 무기류 수십 점을 획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순사 김원제(金元濟) 외 3인의 두건·등걸이 등 잡품 수십 점도 군수물자로 노획하였다. 또한 뚝섬에 거주하던 일본인 이즈모 류타로出雲龍太郞의 집을 공격하여 구타하고 처단하였으며, 함께 살고 있던 요코다 츠네시로우(橫田常四郞)도 구타하였다. 요코다 츠네시로우는 그 자리에서 죽지 않고 여러 개의 깊은 상처를 입고 살아남았으나, 같은 달 8일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자금으로 현금 8원 50전과 돈지갑을 획득하였다. 이처럼 군자금 모금과 일본인 처단에 주력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경시 요비코 유이치로呼子友一郞의 심문을 받고 재판에 넘겨져 1909년 10월 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검사 히시야 세이고菱谷精吾의 관여로 심리하여 이른바 강도 및 강도살인으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경성공소원(京城公訴院)에 항소하였으나, 1909년 11월 15일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