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논평]
원칙에 충실한 조세개편 ‘재검토’를 원한다
박근혜 정부가 지난 8월 8일 세법개정안을 발표했다. 당초 발표되었던 보도자료에는 현오석 기획재정부 장관이 ‘원칙(原則)에 입각한 세제의 정상화(正常化)’라고 굵은 글씨로 강조까지 했던 개정안이었다. 하지만, ‘원칙에 입각한’ 세제 개편안을 불과 4일 만에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원점부터 재검토하겠다고 한다. 저잣거리 장사치의 가격흥정도 4일 만에 손바닥 뒤집듯 하지는 않는다. 도대체 현오석 장관이 입각했던 ‘원칙’이 무엇인지 심히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정부와 여당의 입장 변화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정작 국가 살림의 수장인 대통령은 무슨 생각으로 4일 만에 ‘원점 재검토’를 요청하고 있는가도 이해하기 어렵다. 설마 대통령의 검토도 거치지 않고 세제개편안이 발표되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는 대통령의 직무유기일 터이다. 그렇지 않다면 기왕 결제한 기획안을 딴 사람 눈치 보다 반려하는 무능한 책임자 같은 행태다. 어떤 경우라도 적절하지 않고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다.
더 심각한 한 문제는 당초 제출되었던 세제개편안의 핵심 기조가 엉뚱한 방향을 가르키고 있는데, 대통령의 한 말씀에 따라 수정하겠다는 내용 역시 고장 난 네비게이션은 놔둔 채 방향등만 교체하겠다는 것이다.
새누리당 김태흠 원내대변인은 박근혜 대통령의 한 말씀이 있은 후, “세제개편안 원점 재검토 지시에 적극 공감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새누리당이 제시한 것이 ‘연간 소득 3450만원’ 기준선을 5000만원으로 상향하는 방안이다. 하지만 이는 원점에서의 재검토가 아니라, 조삼모사의 행태다. 99개의 도토리를 가진 자가 3개의 도토리를 내놓은 테니 10개 가진 자도 3개 내놓으라 했다가, 그건 심하니 12개 가진 자부터 3개의 도토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21세기 판 조삼모사다.
당초 세법 개정안이 발표된 이후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은 ‘사실상 증세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증세는 세목을 신설하거나 세율을 인상하는 것으로 명시적인 의미에서 분명히 증세는 아니다”고 답하면서, “월 1만3000원 정도는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말했었다.
복지 재원 확충은 물론 조세를 통한 재분배 기능 확대를 주장해 온 노동당은 보편 증세의 불가피성을 줄곧 이야기 해 왔다. 따라서 ‘월 1만 3천원 정도’의 증세에 대해서는 충분히 동의한다. 아니 그 이상의 부담이 있다고 할지라도 적극 함께할 의지가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세제개편안의 문제는 중산층의 부담이 1만 3천원이라서가 아니고, 중산층의 정의가 3450만원부터여서도 아니다.
문제는 현대사회 조세 정책의 기본인 과세 형평성과 누진성의 원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미 수차례 지적된 바와 같이 고소득층과 대기업의 낮은 실효세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이 이번 세제개편안에는 찾아 볼 수 없다. 법인세에 대해서는 여전히 감세기조를 유지하고 있고, 2008년 전세계적 경제위기를 가져왔던 파생상품 등 금융자본에 대한 과세 방안도 전혀 포함되지 않다.
이번 조세개편안이 자본과 고소득층에 대해 우호적인 것은 조세개편의 기본 기조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기획재정부는 제시하는 향후 5년간 조세정책 방향으로 제시한 ① 조세부담수준의 적정화 ② 조세구조의 정상화 ③ 조세지원의 효율화 3가지 중 ‘조세구조의 정상화’ 방안의 핵심 내용은 소득·소비과세 비중을 높이고, 법인·재산과세는 성장친화적으로 조정한다는 것이다.
재정기획부가 제시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법인세 세수 비중은 GDP 대비 3.5%로 일본(3.2%), 영국(3.1%), 미국(2.7%), 프랑스(2.1%), 독일(1.5%)에 비해 높은 수준이다. 그래서 법인세를 ‘성장친화적으로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재계가 오랫동안 법인세 인하를 주장하면서 한국의 법인세 세수 비중이 OECD 중 4번째라고 주장하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같은 보도자료에 나와 있는 법인세율을 보면, 한국의 법인세는 3단계 누진세율 구조(10%. 20%, 22%)로 최고세율은 OECD 평균(23.3%)과 유사하나, 최저세율은 OECD 국가 중 복수세율을 가진 11개국의 평균(17.1%)에 비해 매우 낮다고 평가하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제시한 비교국 최저세율은 스페인이 25%, 영국 20%, 일본 18%, 미국 15%, 프랑스 15%, 캐나다 11%다.
최저세율이 낮다는 것은 각종 감면 제도 등으로 인해 결국 실효세율(실제 적용되는 세율)이 떨어진다는 걸 의미한다. 실제로 한국의 평균 실효세율은 2010년 기준 16.56%에 불과하다.
상식적으로 실효세율이 상대적으로 낮을 경우, 실제 걷히는 법인세 세수 비중 역시 적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낮은 실효세율에도 불구하고 실제 걷히는 법인세의 세수 비중은 높은 편이다.
이처럼 법인세의 세율이 낮은데도 세수 비중이 높다는 것은 ① 세금 내는 기업의 절대수가 많거나, ② 기업의 과세 소득, 즉 기업의 이윤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연구원의 「한국경제의 가계와 기업간 소득성장 불균형 문제」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 이후 가처분소득 기준 기업소득은 두 배 증가한데 반해 가계소득은 1/4수준으로 급락하였다. 즉, 조세제도가 기업에 불리하기 때문에 기업의 납세 비중이 큰 것이 아니라, 경제 활동의 성과를 대부분이 기업이 가져갈 정도로 한국의 경제 환경이 친기업적이기 때문이다.
조세정책의 기초는 소득과 재산이 있는 곳에 과세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기업과 가계 소득이 불균형한 상황에서 기획재정부가 이야기한 것처럼 ‘조세구조를 정상화’하려면 소득이 있는 곳, 그러니까 기업고 고소득자에 대한 과세를 높여야 한다. 즉, 조세구조를 기업친화적으로 조정할 것이 아니라, 노동친화적, 서민친화적으로 조정해야 한다.
원점부터 재검토하겠다고 했으면, 원점부터 재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말 한마디로 부랴부랴 수정하지 않으려면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조세 정책의 기본 원칙은 소득과 부가 있는 곳에 과세한다는 것이며, 예외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업과 고소득자부터 예외 없이 과세해야 한다. 그 출발은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시절 진행된 각종 면세 제도를 철폐하고 최소한 OECD 수준의 조세 부담률을 기업과 국민 모두에게 적용하는 보편 증세이며, 그 도착지점은 더 많은 복지를 통한 재분배 기능 강화와 양극화 해소이다.
2013년 8월 13일
노동당 정책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