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읽다가 만 이유
어느 나라 어느 시절을 막론하고 정권 다툼 이면에 꼭 끼는 것이 여자였다.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요소인 남과 여가 공존하는 것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는 이야기지만 똑 같은 시대에 생사를 걸고 천하를 다루면서 공존하는 여성관이 하도 달라서 하는 말이다.
지난해 소설을 쓰는 친구를 통해서 일본어 대하소설 전 26권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라는 책을 기증받았다. 어느 유명 정치인이 읽고 있다는 "대망(大望)"이라는 소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번역물이라는데서 무척 관심이 가든 때였다.
권당 400쪽이 훨씬 넘는 분량의 책을 다 읽으려면 한달에 2 권식 읽어도 1년이 넘는 분량이다. 보내준 친구의 성의를 봐서도 그렇지만 일본이라는 나라나 국민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내가 아는 일본인들에 대한 상식은 어렸을 때 함께 자라면서 내 마음 속에 앙금처럼 남은 기억과 내 책장에 누렇게 변색된 100 여권의 문고본에서 얻은 편견일는지 모를 기억뿐이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중반에 일본에서 벌어진 전국시대의 영웅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이해하는 것이 일본의 근대화의 과정을 이해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서너 달동안에 6권째를 읽고 잠시 중단했다.
어렸을 때 중국의 삼국지를 무척 좋아해서 서로 다른 저자의 "삼국지" 외에 수호지나 초한지등도 읽어 댔다.
크고 작은 규모의 차이도 없이 권력을 탐하는 영웅들의 지략이나 권모 술수 그리고 배신등 그 수법은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의 테두리를 맴돌 뿐이었다.
그런 아류의 소설인데다 등장 인물마다 장식처럼 의례히 따라 붙는 여자관계에 식상해 왔다.
옛 말에 "天生陽하고 地生陰하니 陰陽配合은 利之所在"라 하였지만 이는 인간의 남녀 성배합을 엄중히 다루는 윤리의문제를 기본으로 하는 상식의 문제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부는 이웃 적군 성주의 아내(華陽院)를 빼앗아 보쌈(輿入)하여 아내로 삼고 그 아내
(華陽院)이 전 성주에게서 난 딸을 이에야스의 아비와 혼인시켜 이에야스를 낳고 이에야스는 볼모로 잡혀 있었든 적국의 성주의 여인의 부정을 알면서 혼인을 하는 등 동양의 도덕적인 성문화에 길들여진 우리 상식으로는 도무지 용서 못하는 사례를 걸르지 않고 다루고 있다.
16세기의 많은 일본의 영웅(사무라이?)들이 자손이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문란한 성문화로 인하여 유럽 특히 포르추걸을 통하여 오염된 성병(매독)등으로 생식능력을 잃고 죽었기 때문이다.
특히 해방 전 일본군에서 나온 군출신들이나 일본의 사업가들을 대하면 입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싸나이는 뱃꼽아래가 한 일은 논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무슨 자랑인 것처럼 입에 달고 다니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일본 정치인들은 2차대전에 희생된 200만명 이상의 전쟁 미망인들이 종전 후 생계를 위하여 매춘행위를 한 여인들을 일컬어 전후 일본을 이르킨 "산업의 역군"이라고 추켜세운 기록이 있다.
심지어는 일본의 여성들이 국민으로써 참정권을 얻는 때가 2차대전에 패망한 때였다고 하면 명색이 동양의 선진국으로써 자처한 일본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는가?
지금도 사귀는 남녀끼리는 서로 경어를 쓰다가 결혼만 하면 일본 남자들은 자기 아내에게 철저히 반말을 쓰고 여자들은 다소곳이 무릅꿇고 이를 받아 드린다.
일본은 아직도 여성의 인권이나 성문제를 논하는데에 그다지 심각하지도 않다.
자기 아내에게 "당신"이란 말 대신에 "오마에(너~")라는 호칭으로 고압적인 언사를 쓴다.
일본이 바짝 고개 쳐들고 위안부 문제를 "불가역적(不可逆的)인 과거"로 치부하고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것은 역사적으로 자신의 치부를 활복할 망정 굴복하지 않겠다는 사무라이 기질과 여성의 성문제를 "싸나이의 뱃꼽아래가 한 장난"으로 몸에 밴 일본 정치지도자들에게서 가슴 싸하게 사죄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란 일본 열도가 바닷 속에 가라 앉기 전에는 불가능하리라 느낀다.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에 식상해 가던 중 나문희의 영화 "I can speak"를 보고나서 다시는 이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 글 / 쏠 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