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한 김교신이 일본 유학의 길에 나선 것은 1920년 3월이었다. 3.1운동 이후 조선의 청년들은 민족주의의 열기에 휩싸여 도쿄 유학길에 나서지만 그 열기는 곧 사그라들고 만다. 근대도시 도쿄에서 근대학문의 세례를 받고 근대인으로 거듭난 청년들은 좌절과 혼돈 속에서 각기 자신의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러던 중 김교신은 도쿄 거리에서 청년 전도자를 통해 처음 기독교를 접하게 되는데, 1920년 4월 16일 저녁, 김교신의 나이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성서조선> 6호와 9호(1928.11, 1929.9)에 수록된 <입신의 동기>와 19-20호(1930. 8-9)에 수록된 <내촌감삼론內村鑑三論에 답하야>에서 김교신은 기독교를 믿게 된 사정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이 두 글은 사실을 전하는 목소리가 사뭇 다르다. <입신의 동기>가 비교적 담담한 어조의 고백적인 글이라면, <내촌감삼론에 대하야>는 다소 논쟁적인 글이다. <내촌감삼론에 대하야>는 김인서의 글 <무교회주의자 내촌감삼씨에 대하야>(<신학지남> 1930. 7)에 대한 답으로 쓴 글로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 그에게 배우던 일에 대해 자세히 밝히고 있다.
<입신의 동기>는 김교신의 신앙의 바탕에 유교적 윤리관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 기독교 신앙은 유교적 수양과 마찬가지로 현세에서 달성해야 할 인간 완성에의 길이었다.
나의 관심사는 사후성불死後成佛의 문제가 아니었고 철두철미 현생의 문제로만 생각한 것이었다. 사후에 천사로 화化하거나 혹은 지옥열화地獄熱火 중에 태히거나 이런 것이 나의 심령의 오전奧殿에 반거盤據한 최대긴급의 문제는 아니었다. 여하히 하면 나의 현재의 육체와 심정 이대로 가지고서 현생에서 일일이라도 완전에 달성할까 이것이 나의 최대 관심사이었다.
<성서조선> 6호, 1928. 11. 38면.
김교신은 유교적 수양을 통해 인격 완성에 이르고자 했다.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 칠십에 이르러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공자는 칠십 세에 인격 완성에 이르렀지만 자신은 공자보다 십 년을 단축해 보겠노라 다짐했다고 한다. 단 하루라도 완성된 삶을 살고자 했지만 유교적 수양으로는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고 절망하고 있을 때 김교신은 전도자를 만나게 된다. 그 전도자의 말은 칠십 세까지 갈 것도 없이 이십 세 청년도 기독교를 믿기만 하면 ‘종심소욕불유구’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김교신의 완성에의 욕망은 진지한 것이었다. 그가 기독교 신앙으로 나아가게 된 것도 완성에의 욕망이 그를 이끌었던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식민지 조선이 마주한 과제, 즉 민족의 독립과 근대국가 수립에 유교적 윤리가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는 회의가 내재해 있었던 것 같다.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고 근대식 교육을 받은 김교신이 보기에 유교적 수양으로는 근대적 자아의 윤리를 다 담아낼 수도 없고 더욱이 민족의 장래를 도모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기독교는 구도의 길이었다. 이후 <성서조선>에 수록된 글과 그의 삶 전체에 구도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나 있다. 그는 식민지의 구도자였다.
「입신의 동기」는 김교신이 유교의 도덕률에 견주어 산상수훈을 이해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산상수훈의 도덕률이 유교의 도덕률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예컨대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으면 용기가 아니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보다 의를 보고 행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더 우월하고,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보다 자기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더 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기독교를 도덕률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깨달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김교신은 이후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 재차 기독교의 진리를 깨우치게 된다.
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올 당시 유교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소수 종교의 하나였던 기독교로서는 당시 지배층의 윤리로 자리 잡고 있었던 유교와 조화를 모색해야 했는데, 그 하나가 기독교의 도덕률이 유교 도덕률을 완성하는 길이 된다는 것이었다. 유교의 도덕률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룬 것이라면 기독교는 인간과 신의 관계를 화해시킴으로써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옥성득, '한국 초기 개신교와 유교의 공생',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새물결플러스, 2016 참고). 김교신이 기독교를 처음 접할 때 가졌던 관념도 이와 비슷한 것이었다.
청년 김교신은 1920년에 또 한 번의 중요한 만남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우치무라 간조와의 만남이었다. 「입신의 동기」에서는 우치무라 간조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때에 신뢰할 만한 기독교 교사에게서 산상수훈해설을 청강하게 되어 나의 기독교관이 그 근저에서부터 동요케 되었다. 공자의 언행보다도 더 완미장엄完美莊嚴한 기독교 도덕률을 신자 각인各人이 살아생전에 실행대성實行大成하는 데에 기독교의 기독교인 소이所以가 있는 줄로 신信한다는 여余의 감화에 대하여 교사는 솔직하게 대담하게 차此를 부정하고 성서에 그 근거가 없음을 지적하였다.
<성서조선> 9호, 1929. 9. 19면.
김교신은 이전까지 기독교를 도덕률로 받아들인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치무라 간조를 통해 알게 된다. 인격 완성의 길은 자아를 수양하여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자기를 근본에서부터 부정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성서조선> 초기 김교신이 우치무라 간조와의 관계를 겉으로 드러내기를 주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위 인용문에서 김교신은 우치무라 간조의 이름을 감추면서 ‘신뢰할 만한 기독교 교사’라고 칭하고 있다. <성서조선> 동인들은 창간 이후 거의 삼 년이 될 때까지 우치무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1930년 6월 우치무라가 서거하게 되자, 이때부터 비로소 우치무라와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드러내어 말하기 시작한다. <성서조선> 17호부터 20호에는 우치무라 간조에 대한 추념의 글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성서조선> 초기에 동인들이 우치무라의 이름을 감추어야 했던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조선산 기독교를 내세웠던 그들이 일본인에게서 기독교를 배웠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우선 그것은 비판의 빌미가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우치무라가 서거한 직후 김인서는 「무교회주의자 내촌감삼씨에 대하야」(1930. 7)라는 글에서 김교신 등 <성서조선> 동인들을 우치무라의 제자로 거명하면서 기독교마저 일본인에게 배워야겠느냐며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김교신은 「내촌감삼론에 답하야」에서 우치무라와 자신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김교신은 청년 전도자의 전도를 통해 성결교회 교인이 되었지만 목회자 사이의 알력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게 된다. 1920년 10월 우치무라의 책 <구안록>, <종교와 문학> 등을 읽었으며, 11월 초순 우치무라의 자택을 방문하였으나 실망과 불만을 가지고 돌아온다. 그 후 우치무라의 욥기 강연, 로마서 강연 등을 들으면서 큰 감화를 받게 되고, 우치무라와의 관계는 1927년 3월 김교신이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한편 <성서조선> 동인들이 우치무라와 거리를 두고자 한 것은 그들의 내면에 식민지적 정체성이 작동했기 때문일 수 있다. 우치무라의 죽음은 민족적 정체성을 제쳐두고 그와의 관계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우치무라에 대한 거리두기의 시도를 포함하여 <성서조선> 동인들과 우치무라와의 관계는 <성서조선> 동인들이 내세웠던 조선산 기독교의 함의가 무엇이었는지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조선산 기독교에 내재된 식민지적 정체성에 대해 이 글에서 다 논의하기는 어렵다. 여기에서는 김교신의 「내촌감삼론內村鑑三論에 답하야」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자. ‘조선에 만일 그와 같은 애국자가 출현하였더면’이라는 가정에서 위대한 일본인 애국자 우치무라에게서 성서를 배웠던 조선인 청년의 내면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가 아무 것이 아닐지라도 일본의 진정한 애국자인 것은 초기부터 이것을 간취하였었다. 자연과학자의 정신에 입각한 성서연구와 국적國賊으로 전 국민의 비방 중에 매장된 지 반생 여일에 오히려 그 일본을 저버리지 못하는 애국자의 열혈, 이것이 무엇보다도 힘있게 여배余輩를 견인하였었다. 조선에 만일 그와 같은 애국자가 出現하였더면 쏟아 바쳤을 터이었던 경포敬暴의 염念을 전혀 저에게 표정表呈하였다.
<성서조선> 19호, 1930. 8.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