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이파(李坡)가 졸(卒)하였다. 조회를 철폐하고 조제(弔祭)하고 예장(禮葬)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이파의 자(字)는 평중(平仲)이고 자호(自號)를 송국재(松菊齋)라 하였으며, 본관은 한산(韓山)으로서,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달라서 나이 겨우 15세에 여러 사서(史書)를 널리 읽었다. 경태(景泰) 경오년 17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신미년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교서관 저작랑(校書館著作郞)에 뛰어올려 제수되었다가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로 전직(轉職)되었다. 누차 천직(遷職)되어 응교(應敎)에 이르렀고,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ㆍ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ㆍ세자 보덕(世子輔德)ㆍ판내자 예빈시사(判內資禮賓寺事)를 두루 거쳤다. 천순(天順) 계미년에 통정 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승직(陞職)되었고, 승정원 우승지(承政院右承旨)로 발탁되어서 임명되었다. 성화(成化) 을유년에 도승지(都承旨)로 승직되었으나 일로써 임금의 뜻을 거슬려서 첨지중추원사로 천직(遷職)되었다.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옮겼다가 얼마 안되어 가선 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승직되었다. 병술년에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였고, 정해년에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가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옮겼다. 무자년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제수되었고, 기축년에 가정 대부(嘉靖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승직되었다.
일찍이 집을 짓는 역사(役事)에 근수(根隨)가 언덕을 파 가면서 터를 넓히다가 2명이 압사(壓死)하였으므로 파직되었다. 갑오년에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 제수되었다가 곧 지사(知事)로 승직되었으며, 을미년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제수되었다. 정유년에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승직되어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는데, 사민(徙民)한 자들이 대부분 흩어지고 도망하였으므로 무육(撫育)을 잘못한 것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가 곧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북경(北京)에 새해를 하례(賀禮)하러 갔다가 돌아오면서 팔참(八站)에 이르렀는데, 눈의 깊이가 수척이나 되었다. 이파는 사로잡힌 군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뜻밖의 일에 놀라서 어찌할 줄 몰랐으나 서장관(書狀官) 박삼길(朴三吉)의 도움으로 사졸(士卒)들이 흩어져 도망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눈오는 것을 무릅썼기 때문에 얼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경자년에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임명되었다. 임인년에 임금이 자주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재상들과 성리학(性理學)을 논하였는데, 이파가 분석하여 대답하였으므로, 임금이 현명하게 여겨 특별히 서대(犀帶)를 내려 주고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뛰어올려 품계를 더하였다. 을사년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임명되었고, 얼마 있다가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직되었으며, 좌찬성(左贊成)으로 전직(轉職)되었다. 이 파는 젊어서부터 술을 즐겨서 이로 인하여 병이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갑자기 졸(卒)하였으며, 나이는 53세이다. 시호는 명헌(明憲)인데, 생각하는 바가 과단성있고 멀리 내어다보는 것이 명(明)이고, 견문이 넓고 다재 다능한 것이 헌(憲)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이파는 사람됨이 활달하고 시원스러우며, 용모가 아름답고 담론(談論)하기를 좋아하였으며, 풍류(風流)와 문아(文雅)가 한 시대에서 추앙(推仰)받았다. 의리(義理)의 학문에 널리 통하였고, 문장의 화려함이 그 장점은 아니었으나 자못 문장과 경제(經濟)로써 자부하였다. 총명함이 남달리 뛰어나, 무릇 나라 사람들 가운데 벼슬한 자의 이력(履歷)과 씨족(氏族)ㆍ세대(世代)를 기억하지 못하는 바가 없었으며, 조정(朝廷)의 전고(典故)를 상세히 아는 바가 많았다. 다만 일을 의논할 때 영합(迎合)하려고 많이 힘썼으며, 성품이 또한 호사스럽고 허황되어 재리(財利)를 널리 경영하였다. 일찍이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대간(臺諫)과 함께 시종(侍從)하였는데, 장차 진강(進講)하려고 전문(殿門)에 모여 앉아 바야흐로 경전(經傳)의 뜻을 강론(講論)하려 하였다. 그 때 이파가 홀연히 말하기를, ‘금년은 쌀값이 매우 싸니 면포(綿布)를 많이 살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온 좌중이 잠잠하였고 이파도 얼굴과 목이 붉어졌으니, 마음속으로 산업(産業)을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말이 나오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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