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
- 영화 ‘올빼미’를 보고…
영화감독은 역사로부터 영감을 받아 영화를 제작하고 관객은 그 영화를 보고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 영화 올빼미는 소현세자의 죽음이 독살에 의한 것임을 암시하는 역사적 자료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서 만들어진 영화다. 그리고 영화로 만들어져 상영되는 순간 그것은 다시 관객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새로운 영감이 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나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본 것을 증언한다는 요한의 편지였다. 그의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요한일서 1:1~2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 제자들의 신앙고백이다. 초기교회는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한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증언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본 것을 증언하다가 죽은 사람들을 순교자라고 부른다. 그 순교자라는 말은 본래 헬라어로 마르튀스(martys)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법정에서 선 증언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르튀스였다. 그들은 본 것을 증거하다가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본 것을 증거하는 것을 죽음보다 더 중요한 일로 여긴 사람들이었다. 신앙은 우리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지만 그 대신에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그런 결단이 없는 신앙이라면 그것이 주는 위안은 별것도 아닐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신앙인으로서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짐이 없는 증언에 무슨 진실이 있겠는가? 이것 저것 고려하다가 가장 중요한 진실이 빠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설교자로서 내가 받은 첫번째 교훈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 영화는 오늘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보고 들은 것을 제대로 말하면 방송국이 위태롭게 되는 현실이다. 대통령이 말한 것을 들은 대로 방송하면 국익을 해친 방송사라는 낙인이 찍힌다. 그래서 대통령의 주변에서는 무엇이 제대로 된 소리인지를 해석해주는 사람도 등장했다. 아마 국민들이 제대로 듣지 못하는 줄 잘 아는 모양이다.
영화 올빼미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맹인이 '나는 분명히 보았습니다!’라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외치는 그 대목이다. 그것은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의 한국판이다. 죽음을 각오한 맹인이 보았다고 말할 때 비로소 사람들은 진실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었다. 아이에게 진실을 들어야 하는 것처럼 맹인에게서 진실을 들어야 하는 우스운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엄연한 현실이다.
신앙에 진실이 사라지면 그 신앙은 사람들에게 결코 참된 위안을 줄 수 없다. 그래서 신앙인은 목숨을 걸고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신앙이라야 칠흑 같은 어두움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등불이 되고 절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는 위안의 생수가 될 것이다.
언론에 진실이 사라지면 그 언론은 세상을 밝힐 수 없다. 밝은 세상은 신뢰가 견고한 세상이다. 어두운 세상은 모든 것이 희미하고 불투명하다. 그런 세상에서 중요한 결정은 소수의 사람에 의해서 밀실에서 이루어지고 그 피해는 대중에 돌아간다. 당연히 소수의 사람들이 이득을 얻는다. 그런 세상에서 언론은 소수의 사람들을 대변하는 홍보물일 뿐이다.
신앙이 가장 위험한 상황에 빠진다면 그 이유는 신앙심이 약해지고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까닭은 진실을 말할 용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는 아무도 자신이 본 것을 제대로 말하지 않는다. 아니, 제대로 보려고 눈을 크게 뜨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위험하게 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앙인은 세속화된다.
마찬가지로 사회가 가장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 때는 그 사회의 언론이 신뢰를 잃었을 때이다. 독재자들의 권력이나 재력가의 돈이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 할 때마다 그 사회는 위태롭게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바르게 알아야 바른 대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른 대처를 할 수 없게 만드는 언론은 국민의 눈과 귀를 막으려는 악행을 범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론이 바른 소리를 내지 못하게 위협을 하는 일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문화방송 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 배제가 대통령실에서 버젓이 발표되고 가장 신뢰를 받는 방송인을 몰아내기 위해서 서울시의회는 법을 어기면서 조례안을 통과시켰다. 대통령과 서울시장은 이런 나쁜 결정의 중심에 있다.
얼핏 보면 신앙이나 언론이나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자기 진영의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결국 진실이 무엇인지보다는 자기 진영의 주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실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길 때 신앙도 언론도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진영은 논조나 색깔을 반영할 뿐이다. 그러나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은 진영논리에 갇히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맹인은 볼 수 있는데 보는 사람은 보지 못하는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음 속에서 진실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새로운 다짐을 해야 한다는 결심이 솟아났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9:39
보는 자들이 맹인이 되는 세상은 그 자체로 심판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런 심판을 받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