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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채인택
③ 서울 용산 녹사평역…‘고난과 화해의 맛’ 아랍 음식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과 녹사평역 주변은 이방지대다. 커다란 눈에 히잡을 곱게 쓴 여성과 수염을 길게 기른 남성이 오간다. ‘할랄’(허용된 것이라는 뜻) 표시를 붙인 아랍‧튀르키예‧이슬람 음식점이 즐비하다. 지중해 문화가 바탕인 아랍 음식으로 이 땅의 음식문화를 풍요롭게 해주는 글로벌 음식의 ‘수원지(水源地)’다.
프로들이 운영하는 듯한 튀르키예 음식점에는 예외 없이 한국어에 능통한 현지인 직원이 있다. 하지만 아랍 음식점은 사정이 다르다.
한국말이 능숙한 아랍인 주인이나 직원이 한국말로 주문을 받거나 한국인 직원을 쓰는 가게만 있는 게 아니다. 영어로만 주문을 받는 식당은 물론 프랑스어로만 주문을 받는 가게도 있다. 취급하는 음식도, 맛도 가게마다 조금씩 다르다. 개성이 넘친다. 국적도, 숨은 사연도 그만큼 다양하다. 김치·된장찌개‧닭볶음탕‧양념치킨 등 한국 음식을 무슬림에게 파는 ‘할랄 한식당’도 있다. 술이 없다는 공통점은 있다.
이 지역에 아랍 식당이 여럿 생긴 것은 1976년 이곳과 가까운 한남동 언덕에 한국이슬람교 서울중앙성원(일명 이태원 마스지드 또는 모스크)이 건립되면서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여러 나라가 성금을 보내 세워졌다.
1976년 5월 이태원에 가까운 한남동 언덕에 문을 연 한국이슬람 중앙성원(일명 이태원 마스지드). 건설시장을 중심으로 중동 진출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설립이 추진돼 사우디아라비아·말레이시아 등 이슬람 국가의 성금으로 건립됐다. 그 뒤 자연스럽게 한국 메나(MENA·중동북아프리카) 이주민 사회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인근 용산구 일대가 아랍·튀르키예·파키스탄 등 이국적인 음식문화가 한국에 확산하는 관문이 됐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중앙성원 입구에는 푸른 타일 위에 이슬람 신앙고백(샤하다)인 ‘라 일라하 일랄라 무함마둔 라술룰라’라는 아랍어가 보이고, 문 위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무함마드는 그분의 사도입니다’라는 번역문이 방문객을 맞는다.
금요 예배는 아랍어‧영어‧한국어로 진행된다. 한국 속의 중동이자 이슬람권이다.
인근에 이슬람 센터와 서점, 할랄 육류(이슬람식으로 도축)를 파는 정육점과 수퍼, 음식점과 제과점 등이 몰려 있다. 무슬림 이주민이 이슬람력으로 12월인 ‘두 알히자(순례월)’에 메카를 정규 성지순례하는 하지(또는 하즈)나 순례월이 아닐 때 메카를 찾는 움라, 또는 이슬람 명절 고향 방문 등을 위한 여행사와 항공사 등도 함께 보인다.
마스지드는 학교(이곳에는 유치원이 딸려 있다)가 있는 모스크(이슬람사원)를 가리킨다. 이태원역 3번 출구에서 언덕으로 걸어서 10분쯤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녹사평역 위 언덕이나 해밀턴 호텔 입구에서도 마스지드의 미나레트(첨탑: 아랍에선 ‘마나라’로 부름)가 보인다. 일반인도 들어갈 수 있다. 다만 손발을 씻는 의식(우두·الوضوء)을 마친 뒤 신발을 벗고 들어갈 수 있는 예배실에는 비신자의 방문을 사양한다.
가족 중시와 다출산…3대가 함께 식사, 아랍인 대가족을 만나다
녹사평역 근처에 있는 아랍 음식점 페트라. 요르단의 세계문화유산에서 이름을 딴 이 음식점의 주인은 팔레스타인계 요르단인이다. 요르단 인구의 30~60%가 팔레스타인 실향민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서울 용산구 녹사평대로에 있는 아랍 음식점 ‘페트라(PETRA)’를 찾은 것은 토요일 점심시간이었다. 놀라운 것은 가족 단체가 많이 보였다는 사실이다. 50명쯤 들어갈 수 있는 식당 홀에는 모두 여섯 팀이 있었다. 한국인은 세 명으로 이뤄진 두 팀과 혼자 온 손님이 세 자리를 차지했다. 나머지는 아랍인으로 보이는 단체 손님 다섯 팀과 혼자 온 손님이었다.
단체팀에는 한결같이 하얀 히잡(무슬림 여성의 머릿수건)을 쓴 여성과 수염을 기른 남성이 있었다. 히잡을 쓴 여성 둘과 남자 둘로 이뤄진 젊은이 팀은 유튜브를 하는지 자신들이 먹는 모습을 삼각대에 얹은 휴대전화로 찍고 있었다.
각각 여덟 명과 여섯 명, 다섯 명으로 이뤄진 세 팀은 각각 아이들이 절반 넘게 차지한 다둥이 가족이었다. 그중 두 팀은 노인부터 아이까지 3대가 함께 온 것으로 보였다. 가족 중시와 다출산이라는 중동아랍 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이들은 여러 가지 요리를 시켜 접시를 서로 이리저리 돌리면서 나눠 먹었다. 수염을 기른 남자 손님이 창가에 혼자 앉아 고기 요리와 쌀밥을 시켜 먹고 있었다. 쌀은 중동과 이탈리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굵은 바스타미 쌀이었다.
글로벌 식품으로 자리 잡은 지중해 음식 호무스
나는 세 명이 함께 가서 다섯 가지를 주문해 먹었다. 우선 입맛을 돋우기 위한 전채를 맛봤다. 빵을 찍어 먹는 소스 세 가지로 이뤄진 미자(섞은 것이란 뜻)를 주문했다. 첫째가 삶은 병아리콩을 으깨 타히니(참깨페스트)‧올리브기름‧마늘‧레몬즙‧소금 등과 버무린 노란색의 호무스(홈무스라고도 한다)다. 둘째가 유청을 제거하고 만들어 식감이 쫀득하고 새콤한 요구르트(서구에는 흔히 그리스식 요구르트로 부른다)인 순백색의 라바네흐다. 셋째가 구운 가지를 으깨고 올리브유, 레몬즙과 타히니를 비롯한 각종 향신료를 넣은 회색의 바바 간누즈(바바 가누시라고도 한다. 이 가게에선 바바 가누스라고 적었다)다.
아랍 문자로는 빵이란 뜻의 쿠브스(خبز)로, 라틴 알파벳과 한글로는 PITA(피타‧그리스어에서 기원해 유럽과 미주에서 사용되는 표현)라고 적어놓은 납작빵을 빼놓을 수 없다. 이란과 인도‧파키스탄에선 ‘난’(빵이란 뜻)으로, 튀르키예에선 ‘피데’로 각각 부른다. 이 가게엔 레귤러(일반)와 ‘마늘과 버터 난’, 그리고 ‘바늘 버터 꿀 난’의 세 종류 ‘난’이 있었다.
‘미자’와 ‘마늘과 버터 난’을 시켰다. 피타‧쿠브스‧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납작빵을 잘게 찢어 호무스와 라바네흐, 그리고 바바 간누즈에 각각 찍어 먹었다. 구수한 콩맛이 가득한 호무스, 부드러운 요구르트 맛의 라바네흐, 가지와 이국적인 향신료의 맛이 어우러진 바바 간누즈가 서로 다른 매력을 주면서 여름철 더위에 지친 입맛을 살렸다. 차례로 찍어 먹다 보니 빵이 부족해 더 시킬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도 먹어야지 싶어 자제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것만으로 배를 채울 뻔했다.
중동·지중해 지역 전통 납작빵인 피타(앞)와 병아리콩으로 만든 호무스, 진한 요구르트인 라바네흐, 가지를 갈아 허브에 버무린 가바 간누즈(뒤쪽 왼쪽부터) 등 세 가지 전채 소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이 세 가지 소스와 빵은 중동 음식을 넘어 범지중해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튀르키예와 그리스 식당에서도 똑같은 음식이 나오기 때문이다. 지중해의 남북과 동서가 긴 세월을 거치면서 북쪽과 서쪽의 기독교 문명 지대(이제는 다문화 지대로 변모하고 있다)와 남쪽과 동쪽의 이슬람 문명 지대, 유대국가 등으로 각각 나뉘었지만 오랫동안 인적‧문화적 교류를 통해 공통의 음식문화를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근거다.
이 가운데 호무스는 이미 글로벌 식품이다. 유럽과 미주에서 일상적으로 소비된다. 내가 호무스를 처음으로 만난 게 1996년 영국 런던의 전통 선술집인 퍼브에서 점심시간에 손님 주문대로 만들어주는 샌드위치 판매대였으니 말이다. 평소에도 호무스를 즐기는데 한국 수퍼에서도 살 수 있다. 이제는 한국인의 일상 식생활에 파고들어 건강식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에선 장식용?…파슬리의 진짜 맛과 향을 즐기는 샐러드
미자·빵과 함께 샐러드도 시켰다. 파슬리를 다져 만든 타볼리 샐러드를 주문했다. 한국에선 파슬리가 돈가스 등의 장식용으로 주로 쓰이지만 중동아랍권은 물론 지중해권에선 샐러드의 재료로 나온다. 향긋한 맛과 강한 향기가 식욕을 자극한다.
그런데 이를 주문하자 그 전까지 손님과 영어로 대화하며 주문을 받던 20대 아랍인 여성 홀 서빙 직원 두 명이 서로 아랍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없어요”라고 한국말로 대답을 하는 게 아닌가. 눈치를 보니 파슬리가 충분하지 않아 이 재료가 다량 들어가는 타볼리 샐러드 한 접시를 내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그린 샐러드. 한국에선 별로 먹지 않고 장식용으로 주로 쓰는 파슬리를 다져 만든 타볼리 샐러드가 떨어져 대신 시켰다. 토마토·오이 등에 약간의 파슬리 조각이 있었고 메나 지역 허브를 사용해 향이 좋았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대안으로는 참깨를 갈아 만든 타볼리 소스에 레몬즙을 버무려 토마토와 오이에 뿌린 ‘타히니 샐러드’와 토마토‧오이‧파슬리 등 여러 가지 채소에 납작빵을 손톱 크기로 잘라 튀긴 파투셰 조각을 뿌리고 발삼 소스로 마무리한 ‘파투셰 샐러드’가 있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재료가 부족했는지 홀 서빙 직원이 ‘그린 샐러드’를 권했다. 깔끔하게 그린 샐러드로 입안을 개운하게 정리하자 싶어 이를 시켰다.
그린 샐러드는 토마토·오이 등으로 간단하게 구성하는데, 이 가게는 양파도 썰어 넣은 건 물론 송송 썬 파슬리도 들어 있었다. 거기에 ‘아라비안 소스’를 뿌린다고 했는데 먹어보니 올리브유와 식초가 들어가 개운한 맛이 났다.
콩을 갈아 튀긴 인기 만능음식 팔라펠
전채로 주문했던 팔라펠도 함께 나왔다. 병아리콩을 갈아 동그랗게 또는 직경 3~5㎝, 두께 1㎝ 미만 크기의 납작한 동전 모양으로 만들어 튀긴 음식이다. 단백질이 풍부한 고소한 콩을 식물성 지질의 더 고소한 기름에 튀겼으나 그야말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중동아랍권과 튀르키예 등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식당에서 접시에 샐러드와 함께 담아내기도 하지만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점 음식이기도 하다. 노점에서는 납작한 빵 안에 팔라펠을 몇 개 넣고 채소와 함께 돌돌 말아 소스를 뿌려서 준다. 나는 거리의 팔라펠을 1996년 이집트 카이로의 도키(우연히 주변에 태극기가 보여서 가봤더니 한국대사관이었다)라는 동네의 골목에서 처음 만났다.
길거리에서 사 먹었는데 너무도 고소한 팔라펠이 빵‧채소와 아주 잘 어우러져 여러 개를 잇달아 먹었다. 동네 아이들이 먹는 걸 구경하기에 몇 개 더 시켜 나눠 먹었다. 무슬림 세계에선 당연한 의무인 나눔(자카트)이었다. 카이로에선 똑같이 택시에 합승해도 거리와 무관하게 내리는 사람마다 내는 돈이 달랐다. 각자 형편에 맞춰 낸다고 했다. 외국인에겐 거리와 상관없이 무조건 10파운드를 달라고 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불려서 간 병아리콩을 튀겨 만든 중동·지중해 음식인 팔라펠. 메나 지역은 물론 유럽과 미주에서 폭넓게 사랑받는 맛깔스러운 채식 요리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팔라펠은 이제 유럽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글로벌 음식이 됐다. 런던에선 학교 식당이나 수퍼마켓에서도 판다. 흔히 ‘지중해 음식’으로 표시된다. 중동‧아랍권 음식의 세계화다.
팔라펠은 그냥도 먹고, 샌드위치로 만들어서도 먹고, 샐러드에 얹어서도 먹는 만능 음식이다. 세 개의 찍어 먹는 소스와 빵, 팔라펠과 샐러드가 나왔으면 서로 시너지를 만들 수 있다. 빵을 찢어 팔라펠로 감싸고 샐러드를 얹은 뒤 원하는 소스를 찍어 먹는 것이다. 이전에 함께했던 아랍인 기자들에게 배운 방식이다.
이집트 출신으로 두바이에서 일하던 아랍인 기자는 ‘내가 맛있어하는 음식과 소스를,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결합해 무한한 조합을 만들어 즐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아프리카 원산의 쿠스쿠스와 사우디 전통의 쌀과 고기 요리
메인 요리는 선택지가 많았다. 먼저 쿠스쿠스를 골랐다. 쿠스쿠스는 북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지금은 전 유럽과 북미에 퍼진 음식이다. 좁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듀럼이라는 단단한 밀을 좁쌀처럼 부순 뒤 찐 것이다. 여기에 주문에 따라 닭고기‧양고기‧쇠고기‧채소를 얹어 함께 먹으면 쿠스쿠스 요리가 된다.
채소 쿠스쿠스나 쿠스쿠스 샐러드는 군침이 돌게 해주는 채식주의자용 음식이다. 여기에 샐러드를 얹고 이탈리아산 모데나 발삼 식초를 뿌리면 그야말로 글로벌 하이브리드 음식이 된다. 문화 혼성을 통한 음식문화의 시너지 발현이다.
마그레브(북아프리카)의 상징적 요리인 쿠스쿠스. 현지 베르베르족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단단한 듀럼 밀을 깨서 찐 파스타로 사진의 가운데 노란 곡물 부분이다. 접시에 이를 깔고 고기를 얹어 먹는 요리도 쿠스쿠스로 부른다. 이 파스타에 채소와 올리브유, 식초, 허브를 올린 쿠스쿠스 샐러드도 있다. 메나·지중해 지역은 물론 전 유럽에서 일상 음식이 됐다. 500만의 아랍·베르베르 이주민이 사는 프랑스에선 학교 급식에도 나올 정도로 인기다. 민족·종교를 넘어서고 선주민과 이주민을 화합시킬 통합의 요리로 자리 잡았다. 한국 수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이 가게에선 닭고기 쿠스쿠스를 주문했다. 쿠스쿠스에 푹 조리해 부드러운 닭고기를 얹고 갈색의 콩 소스를 뿌렸다. 소스 없이 쿠스쿠스에 고기만 얹은 것을 주로 먹었는데 소스를 뿌린 건 이 집에서 처음 봤다. 닭고기와 쿠스쿠스가 모두 부드러웠으며, 콩 소스가 향긋했다.
여기에 더해 사우디아라비아 요리라는 캅사도 함께 주문했다. 토마토로 끓인 쌀에 주문에 따라 닭고기‧양고기‧쇠고기를 골라 함께 먹는 요리다. 양고기 캅사를 주문했다. 양고기의 강한 맛을 즐기려고 했는데, 이 집 양고기는 너무도 부드럽고 촉촉하면서 고소했으며, 양고기 특유의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았다. 이렇게 입에 착착 달라붙으면서 살살 녹는 맛의 양고기는 오랜만이었다. 토마토와 함께 조리했다는 쌀은 구수한 향과 맛이 일품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쌀요리인 캅사. 토마토 소스에 끓인 쌀에 고기를 얹어 여러사람이 함께 먹는 유목민 공동체의 전통요리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양고기 램(Lamb)과 머튼(Mutton)의 차이
원래 양고기는 젖니가 나기 전의 어린 양고기는 부드럽고 냄새가 없는데, 유치를 간 다음에는 가끔 강한 향이 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통상 생후 1년7개월 미만의 어린 양은램(Lamb), 그보다 나이 든 양은 머튼(Mutton)으로 부른다.
쌀과 고기‧향신료‧채소로 만든다는 예멘 요리인 만리, 요구르트와 소금으로 만든 소스를 사용한 요르단 요리 만사프, 인도‧중앙아시아 음식점 등에서도 만날 수 있는 고기밥인 비리야니에도 눈길이 갔지만, 다음 기회로 미뤘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베르베르 음식
쿠스쿠스의 기원은 마그레브 지역에 사는 소수민족인 베르베르족의 음식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베르베르족은 알제리·모로코 등 북아프리카 지역 등에 2200만~2500만 명이 살고 있다. 아랍인과 다른 베르베르어를 사용하고 문화적으로도 독자적 정체성이 있다.
『고백록』으로 유명한 4~5세기 기독교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오늘날 알제리와 이탈리아에서 활동)와 14세기 세계 여행가 이븐 바투타(오늘날 모로코 출신)가 베르베르족이다. 현대에는 프랑스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 등이 베르베르 혈통이다.
2022 발롱도르 시상식에 상 수여자로 참석했던 '그라운드의 지휘자' 지네딘 지단. 그는 베르베르 혈통이다. AP=연합뉴스
유네스코는 2020년 12월 ‘쿠스쿠스의 생산과 소비와 관련한 지식, 노하우와 관습’을 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했다.
박단 교수는 정치적으로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북아프리카의 알제리‧모로코‧튀니지‧모리타니가 등재를 위해 공동 프로젝트를 가동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무형문화재 등재는 수천 년 동안 정성 들여 이 음식을 만들어온 이 지역 여성들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는 마그레브 지역 공통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효과도 있다고 평가했다.
주목할 점은 쿠스쿠스가 이제는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유럽에서도 일상의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
박 교수는 “쿠스쿠스 요리에 담긴 ‘공유’의 개념이 이웃에 대한 환대이자 갈등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평화를 상징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어쩌면 쿠스쿠스는 주류와 비주류의 갈등, 선주민과 이주민의 갈등, 심지어 종교 간 갈등도 사그라지게 해주지 않을까”라고 기대했다.
식탁에 커다란 쿠스쿠스 요리를 올려놓고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서로 음식을 나누는 모습은 갈등하는 유로메나에서 화합하는 유로메나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것 같다는 게 박 교수의 생각이다.
쿠스쿠스는 다양한 작품에도 정체성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유명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1945~82)의 74년 작품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 영어제목: Ali: Fear Eats the Soul)’이다. 이 논쟁적이고 문제적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인 모로코 이민자 알리는 먹고 싶은 고향 음식 쿠스쿠스를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위장병에 걸려 입원한다.
60대 미망인과 젊은 외국인 노동자의 사랑을 통해 1970년대 독일 사회의 위선을 비판한 독일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의 식사 장면. 영화 캡처
파스빈더는 서독의 영화감독·극작가·배우로 60년대 초부터 80년대 초까지 사회비판적 작품으로 서독 영화 부흥을 이끌었던 ‘뉴저먼 시네마’ 운동의 기수로 불린다. 이 작품은 검은 피부의 모로코 이민자(북아프리카에도 검은 피부의 주민이 거주한다)가 독일 할머니와 결혼하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독일 할머니가 알리가 원하는 쿠스쿠스 대신 자신이 해주는 독일 음식을 먹으라고 강요하면서 갈등과 충돌이 생긴다. 영화 제목부터 정관사가 빠지고, 격변화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으며, 독일어 특유의 분리전철이 엉뚱한 데 붙는 등 문법이 완전히 엉망인 ‘피진 독일어(외국인이나 이민자의 엉터리 독일어)’다. 이 모든 게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주민에 대한 당시 서독의 시각을 상징하는 정치·문화적 은유법이라는 평가다. 음식이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한다는 사실도 잘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쿠스쿠스는 큰 활약을 한다.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화해…쿠스쿠스 인문학
최근 통합유럽연구회와 서강대 유로메나 연구소가 공동으로 펴낸 『식탁에서 만나는 유로메나-유럽‧중동‧북아프리카의 다채로운 음식 인문학』(책과함께)은 유럽과 중동의 음식문화 교류 전통을 다룬다.
서강대 유로메나 연구소는 유럽과 메나(MENA‧Middle East and North Africa: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이 오랫동안 전쟁과 화해를 반복하며 역사적으로 긴밀하게 얽히면서 문명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인식에서 출발해 다양한 관련 연구활동을 펼쳐왔다.
이 책에서 서강대 사학과 박단 교수가 집필한 ‘쿠스쿠스, 프랑스인이 사랑하는 아랍 음식’ 부분은 쿠스쿠스를 인문학적으로 파고든다. 박 교수는 메나의 음식 쿠스쿠스가 20세기 후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으로 확산, 그 포용력을 바탕으로 유로메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강조한다.
박 교수에 따르면 오늘날 쿠스쿠스는 프랑스의 일반식당은 물론 심지어 학교 급식에서도 흔히 만나는 대중음식이다. ‘마그레 드 카나르(Magret de canard‧오리 가슴살 요리)’ ‘물 프리트(Moulesfrites‧감자튀김을 곁들인 홍합요리)’에 이어 프랑스인들이 세 번째로 선호하는 음식이다.
쿠스쿠스 요리는 주로 마그레브(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즐기던 음식으로, 단단한 듀럼 밀을 빻은 세몰리나를 쪄서 만든 ‘쿠스쿠스 파스타’를 고기·당근·감자·콩 등과 함께 먹는다. 채소를 얹고 올리브 기름과 식초를 뿌린 건강 샐러드로도 즐긴다.
20세기 후반 북아프리카 주민의 이민 확산으로 오늘날에는 세계화가 이뤄져 멕시칸 칠리를 비롯한 다양한 음식과 결합하고 있다. 유럽에선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인기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과거 마그레브를 오랫동안 식민 통치하고 무슬림 이민자가 500만 명이나 되는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소비된다.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에선 매년 세계 쿠스쿠스 요리축제도 열린다.
팔레스타인계 요르단인이 하는 페트라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요르단의 고대 도시 페트라(Petra)를 대표하는 건축물 '알카즈네(Al Khazneh)' 신전. 바위를 깎아 만든, 암벽에 세워진 도시로 페트라의 뜻은 바위다. 중앙포토
이 식당의 이름인 페트라는 기원전 6세기 암벽 건축물로 요르단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198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해리슨 포드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으로 1989년에 나온 ‘최후의 성전(Indiana Jones and the Last Crusade)’의 배경이 됐다.
켜켜이 쌓인 페트라 사암. 붉은 빛깔이 황홀하다. 중앙포토
가게의 곳곳에는 페트라 사진과 기념물이 보였다. 가게의 주인은 처음에는 자신이 요르단인이라고 했다가 곧 사실은 팔레스타인계 요르단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요르단 인구 1100만 명 중 30~60%가 팔레스타인계지만 모두가 같은 아랍인이기 때문에 그런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요르단 국적을 얻지 못한 팔레스타인 난민 약 220만 명이 요르단에 산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48년 5월 14일 자신들의 땅에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그다음 날부터 ‘엑소더스’를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향이 시작된 5월 15일 ‘나크바’(대재앙)는 올해로 75년을 맞았다. 유엔도 올해 이날을 처음으로 기념했다고 미국의 소리(VOA)가 전했다.
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 이후 수십만 명이 추가 탈출했다. 47년 유엔 결의안에서 팔레스타인 몫으로 정했던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동예루살렘 등을 이스라엘이 모두 점령하면서다. 팔레스타인 통계국 등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팔레스타인 출신과 그 후손이 700만~96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팔레스타인인은 높은 교육열 덕분에 의사, 엔지니어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오스만튀르크 시절 팔레스타인 기독교도들이 많이 이주했던 남미에는 칠레에 50만 명, 온두라스에 25만 명, 과테말라에 20만 명이 각각 거주한다. 미국에도 25만 명이 산다. 그야말로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이산(離散)의 아픔이다. 그 깊은 슬픔을 녹사평역 주변 아랍식당 페트라에서 만났다.
에디터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