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를 가장 좋아하고 매미처럼 노래하다 간 사람은 아마도 정조 때 이덕무(李德懋;1741-1793)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 “술에 취해”(십일월십사일취)에서
“내 마음은 깨끗한 매미, 향기로운 귤 같으니
나머지 번다한 일 나는 다 잊었노라 ...“
자기 자신을 매미에 비유 했으며, 자신에 대해 쓴 글, ‘나란 사람은’(자언:自言)에서는 자신의 호를 ‘선귤당(蟬橘堂)’이라고 한 연유를 밝히고 있다.
“...이욕을 말하면 기운이 없어지고, 산림을 말하면 정신이 맑아진다. 문장을 말하면 마음이 즐겁고, 도학을 말하면 뜻이 정돈된다. 완산 이아무개(이덕무 자신)란 사람은 오할(마음이 넓고 탁 트임)하여 옛 도에 뜻을 둔 사람이다. ... 요컨대 그 심지를 굳고 한결같이 하고자 한 사람이다.. 그 때문일까? 이아무개는 선귤(蟬橘)이란 글자를 택해 자호하며 고요하게 담백하게 말할 뿐이다.”
그는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등 당대의 문필가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시적 감수성이 빼어나고, 흔히 말하는 창의력이 발군이었다. 그의 ‘고추잠자리’(홍청전영희)란 시는,
“담장의 가는 무늬 같기도 하고 항아리 금이 간 듯도 하고
개(个)자 모양의 푸른 댓잎 같기도 하지
우물가 가을볕에 그림자 어른어른
가는 허리 하늘하늘 고추잠자리“
빨랫줄에 몸을 밀착하고 날개를 아래로 숙이고 착 달라붙은 잠자리를 보고 담장에 금이 간 무늬 같기도 하고, 듬성듬성 금이 간 깨진 항아리 같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댓잎파리 같기도 하고, 무리 져 우물 위를 날개짓 할 때는 파리한 그림자가 어른어른한 모습의 연약한 잠자리를 그리고 있다. 그의 다른 시 ‘국화향’(남산국:南山菊)에서는,
“바위에 기대어 핀 국화
드리운 가지 시내에 노랗게 비치네
한 웅큼 물 떠서 마시니
손에도 국화향, 입에도 국화향.“
가을 아침, 국화가 한 송이 피었다. 동양화에서 보듯 바위 옆에 붙어서 피었다. 바위 옆 개울물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노랑 국화가 들어와 박히니 국화향기가 개울물에 퍼졌다. 그 물을 한 웅큼 떠 마시니, 손에도 입에서도 국화향이 그득하다. 국민학교 때 배운 ‘초록 빛 바닷물에 ....’ 로 시작되는 동요가 생각난다. ‘... 파란 하늘빛 물이 들지요, 파란 하늘빛 손이 되지요.’ 손에서 뚝뚝 듣는 파란 물방울이나, 손에서 은은히 퍼지는 국화향이나 참신한 시적 감수성이다.
그의 창의력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의 산문, ‘사봉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고’라는 작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덕무가 28세 되던 해인 1768년에 황해도 장연을 여행하게 되는데, 그 때 지은 수필집 ‘서해 여행기’안에 있는 작품으로, 장연 근처에 금사산이란 모래산을 두 소년과 함께 오르면서 모래산에서 발을 옮길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지고 모래가 미끄러져 내려가는 신기한 체험을 하면서, 열 길 높이(약 18m)의 금사산 정상에 서서 서해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감회를 적은 글이다.
“... 마침내 사봉 정상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았다... 한 뜨락 가운데 울타리를 치면 마주 보면서 서로 이웃이라고 한다. 지금 나와 두 소년은 이 쪽 언덕에 서있고 중국 등래 지방의 사람들은 저쪽 언덕에 서 있으니, 마치 이웃처럼 서로 바라보며 얘기를 나눌 만도하다. 하지만 아득한 바다가 가로 놓여 있어 볼 수 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니 이웃의 얼굴도 알지 못한 채 지내고 있는 셈이다. 비록 귀로도 들을 수 없고 눈으로도 볼 수 없으며 발길 역시 닿을 수 없지만 오직 마음만은 내달릴 수 있어 아무리 멀어도 못 가는 데가 없다. 이미 이 쪽에서 저 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저쪽에서도 역시 이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렇다면 바다는 하나의 울타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서로 보고 있고 서로 듣고 있다고 말한들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일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구만리 상공에 올라 이쪽과 저쪽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다면야 모두가 한집안 사람일 뿐일 터이니 굳이 울타리를 사이에 둔 이웃이라고 말 할 건 또 무어란 말인가....”
이쪽과 저쪽 굳이 편 갈라 울타리를 칠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바다라는 것도, 그에 의하면,비교적 규모가 큰 울타리일 뿐이어서 바다 건너 중국도 어찌 보면 다 이웃이란 생각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울타리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바다까지도 아우르는 혁신적인 사고방식이다. 연 전에 친구의 공장이 있는 청도(칭다오)에 놀러 간 적이 있다. 그 곳 사람들이 우리가 서해라고 부르는 황해를 동해라고 부르는 사실을 알고는, 적이 당황한 적이 있다. 당연히 그 곳에서는 황해가 방위상으로 동쪽에 있으니 동해일 수밖에 없는데, 우리의 고정관념으로는 동해는 태평양 쪽으로 열려 있는 깨끗한 바다이고, 서해는 황하의 황토물과 뻘이 모이는 탁한 바다라는 생각이 얼른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역적인 울타리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는데, 동해안 고성 지방에 있는 통일전망대다.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의 해금강은 이곳 동해안의 해안선과 이어져 있고, 바다 위에는 어떤 울타리도 없건만, 땅위에 철책선을 두르고 여기는 내 편, 저기는 니 편하는 식으로 금을 그어 놓으니 ‘오직 마음만은 내달릴 수 있어 아무리 멀어도 못 가는 데가 없다.’라고 한 표현을 실감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덕무의 이러한 울타리 개념은 지역적인 개념에서 공간적인 개념으로 더욱 확대된다. ‘구만리 상공’에 있는 달나라에서 찍어 보낸 지구의 모습을 보면 파란색 공의 모습에다 하얀 구름 띠를 두른 형상이다. 여기에 무슨 울타리, 국경과 같은 지역적 구분이 있는가. 그냥 하나의 지구 가족(Global family)일 뿐이다. 이덕무의 이러한 상대주의적 세계관은 당시 청나라를 통해서 들어오던 서구의 과학사상에 기인한 바가 크고, 조선의 성리학 일변도의 폐쇄적인 사회에서 청국인들의 다양한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실학으로 발전시킨 일과 무관하지 않다.
이덕무와 매미와의 연관성을 얘기하면서, 이덕무란 인물을 소개하려고 했는데 사설이 길어 졌다. 이덕무를 소개하면서 그가 서얼(庶孼)이라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이덕무은 서파였다. 그 자신이 서자라는 말이 아니다. 그의 직계를 거슬러 올라가 서자가 있으면 자동적으로 그 후손은 서파가 된다. 조선시대에 서파라는 것은 관료로서의 출세 길이 막힌다는 것, 사회적 차별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사회적 여건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책 읽는 일’ 뿐이었다. “이덕무는 독서에 골몰하는 자신을 간서치(看書癡), 곧 ‘책 읽는 바보’라 불렀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쓴 간서치전(看書癡傳)에서,
“... 글을 막 배웠을 때부터 스물 한 살이 될 때까지 하루도 손에서 옛글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가 지내는 방은 아주 좁았다. 하지만 동쪽 남쪽에 모두 창이 있어 동쪽 서쪽으로 해가 옮겨가면 햇볕이 드는 밝은 창 쪽으로 가서 책을 보았다. 예전에 보지 못한 책을 보게 되면 기뻐 웃으니, 집안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는 곧 그가 기이한 책을 구한 것을 알곤 하였다. 그는 두보의 오언율시를 더욱 좋아해 중얼거리는 것이 마치 병자의 앓는 소리와 같았다. 그러다 심오한 뜻을 깨치면 기쁜 나머지 일어나 방 안을 빙빙 돌곤 했는데, 그 소리가 마치 까마귀가 우는 것 같았다. 때로는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곳을 응시하기도 하고, 혹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간서치라 해도 그냥 기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이런 이덕무가 책만 읽는 백수로 지내다가 그의 나이 39세(1779)에 규장각 검서관이라는 직업을 갖게 된다. 검서관은 규장각에서 출간하는 책을 필사하고 교정하는 직임이다. 거기서도 53세로 죽을 때(1793)때 까지 책만 읽었으니 그는 평생 책과 씨름하며 살다간 책벌레, 공부벌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강명관 지음, 푸른역사 刊)에 소상히 나와 있다. 이렇게 늦깍이로 규장각 검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덕무는 경기도 적성 현감까지 지내다가 1792년(정조16년), 그러니까 이덕무가 죽기 1년 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소위 ‘문체반정’이다. 정조는 당시 청의 영향을 받아 소설류의 번잡한 문체인 패관소품문으로 흐르던 ‘이단적 사유’를 바로잡아 “사상과 학문, 문학에 있어서도 독자적이고 초월적인 위치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자 하였고, 사대부들의 습속을 바로잡는 군사로서의 역할을 명실상부하게 수행하고자 하였다.” (개혁과 갈등의 시대) 정조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견책의 주 대상으로 지목했고, 이하, 이서구, 이덕무, 김옥, 김조순, 남공철, 심상규 등에게 ‘자송문’(自訟文), 즉 반성문을 써내게 했다. 박지원과 이옥은 끝내 반성문 제출을 거부했고, 심지어 이서구는 왕에게 “대책(對策)”을 올려 정조의 문체반정을 비판했다.
“... 가만히 살피건대 대저 근래의 문풍에는 가히 근심할 것이 두 가지가 있고, 근심하지 않아도 될 것 또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문장의 기상이 쇠약한 것은 딱히 걱정할 것이 없고 오히려 기록해야 할 사실이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는 것이 근심스러운 점입니다. 또한 문풍이 유약한 점은 걱정할 필요가 없으나, 문장에서 의리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는 점은 우려할 만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문체의 높고 낮은 수준은 오로지 세도(世道:세상을 이끄는 도리)가 훌륭한가 아닌가하는 상황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도의 훌륭하고 나쁜 상황이 문체의 높고 낮은 수준에 연계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전하께서 마땅히 근심하셔야 할 것은 여기 이 세도의 상황에 있는 것이지 저 문체의 상황이 아닙니다....”
우선 문장을 논하면서,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전하고자하는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느냐(글의 내용), 그리고 글의 논리적 구성이 중요한 것이지, 소위 말하는 스타일, 그것이 산문체이든 소설체이든 문제 삼을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조가 문제삼고자하는 문체의 수준은 왕의 정치적 역량에 달린 것-왕이 선정을 베풀면 자연 문체가 높아진다는 말-이지, 역으로 문체가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국가의 기강이 안 선다는 식의 발언은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신료들의 문체를 바로잡으러 들기 전에 군주는 세도를 바로잡기 위하여 선정을 베푸는데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충고하였던 것이다.” 언론 탄압에 대한 이서구의 준열한 비판이다.
하지만 이서구, 박지원, 이옥을 제외한 대부분의 식자들은 정조의 문체반정책에 순응하여 반성문을 써냈지만, 서얼 출신인 이덕무는 정조의 다그침을 침묵으로 일관하다 이내 세상을 뜨고 만다. -정조는 박제가, 이덕무의 문체는 소품체라고 지적하면서, 자신이 두 사람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거두고 있는 것은 그들이 결코 잘 나서가 아니라, 그들의 처지를 고려해 ‘배우’ 곧 광대로 여겨 데리고 있는 것이라고 두 사람에 대한 속내를 여과없이 드러냈다.(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강명관)-
10년을 땅속에 살다, 세상에 나와 일주일을 살고 죽는 매미(蟬;선)의 모습을 자신에 빗대어 그렇게 아호(雅號)한 것일까. 대부분의 생을 가난하게 살다가, 늦깎이로 벼슬길에 들어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삶의 동반자로 여겼는데, 자신을 알아준 왕, 정조에 의해 여지없이 그 환상이 깨진 것이다. 그는 권력놀음의 들러리였던 것이다. 이덕무는 자신의 아호를 ‘선귤당(蟬橘堂)’이라고 했는데,‘선’은 앞에 얘기한 매미를 말함이고, ‘귤’은 그냥 귤이다. ‘남귤북지(南橘北枳)’란 사자성어가 있다. 춘추 전국시대 제나라 안영의 고사에서 유래됐다고 알고 있는데, 귤의 속성상 남쪽에서는 귤로 자라지만, 북쪽의 추운 곳에서는 귤로 자라지 못하고 탱자가 된다는 것이다. 정조는 이덕무 사후, 그를 기려 그의 아들 광규를 검서관으로 특채하고, 그의 시문을 골라 유고를 간행하게 하면서 그 비용으로 500냥을 하사했다고 한다. 시대를 잘 못 만나, 추운 지방에서 서얼로 태어나 탱자가 된 것인지, 사후에 남쪽 지방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귤로 자란 것인지,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
참고문헌:
1. 깨끗한 매미처럼, 향기로운 귤처럼(우리고전 100선, 이덕무선집, 강국주 편역)
2. 규장각, 그 역사와 문화의 재발견(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3. 개혁과 갈등의 시대-정조와 19세기(신구문화사, 유봉학)
4.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푸른역사, 강명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