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왕정의 영화가 자취로 남은 베르사유 궁전
광장에 용맹스런 군사들의 함성 들리나니
그들의 발굽에 천만개의 돌들이 반짝이도다
웅자로 늘어선 궁전의 건물은 루이왕의 영화를 되삭이고
아름다운 정원도 아직도 가꾸고 있도다
빈방에는 프랑스의 자존심을 담았도다
수백의 방마다 주인들은 살아 있는듯
복도에서 그들의 넋을 만나고 지혜로운 얘기소리 들린다
금빛 찬란한 장식들은 남아서 왕들의 존엄을 알리고
화려하고 넓은 연회장에는 귀족들의 춤 이어지누나
음악은 울려 퍼져 궁정악사들 아름다운 선율 들리나니
밤새워 춤추고 축가를 부를지니 영광을 잊지 말지라
궁정 화가들이여 이 궁에 살아온 이들 모두 그려서
늘 아름답게 영원히 살게 하리로다
조각가는 그들의 모습 영원히 잊지 말게 하라
베르사유의 영광을 그들과 함께 빛나게 하라
천상의 그들의 모습 부활하여 천사와 함께 하는도다
그들의 왕들은 잔잔한 호수 위를 걸을지라
베르사유의 영광을 물위에 비추이며
대 정원을 그들의 야심으로 아직도 채우는도다.
- 연전 임병기님의 시에서
(베르사유 궁전 광장 중심에 우뚝 선 루이 14세 상)
"짐(朕)은 곧 국가다"....
이 말을 루이14세의 대명사처럼 쓰고 있으나,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남겼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회상록을 비롯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고 한다.
다만 전설처럼 전해진 그에 대한 많은 일화(逸話)가운데 한 가지,
1655년 4월 어느날, 파리고등법원에서는
안 도트리슈의 섭정 정부에서 제출한 법안에 항의하기 위해서
회의 중에 있었는데, 이 자리에 열 일곱 살의 국왕 루이 14세가
승마복 차림에 채찍을 들고 사냥 길에서 돌아 온 듯한 모습으로
불쑥 나타나 법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들은 짐이 내놓은 법안을
과연 국가의 이익을 위해 검토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너무 오해하고 있다.
짐을 떠나서는 국가가 없다.
국가 그것은 곧 짐이다(L'Etat c'est moi)"..........
이런 이야기도 있다.
수염이 하얗게 세어버린 어떤 궁정 문지기가,
그 앞을 지나가는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자
젊은 국왕은 그에게 "경의 나이가 얼마인고?.....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나이가 소신(小臣)의 나이 입니다".....
자기의 나이조차도 국왕의 뜻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것이
비록 늙은 문지기의 생각만은 아니었고,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 프랑스 절대왕정의 모습이다......
파리의 남서쪽 11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베르사유(Versailles)는 이 궁전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숲이 우거진 여니 한촌(寒村)과 다름없었다.
1624년 루이 13세가 사냥 중의 쉼 터로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지었는데,
그 뒤를 이은 소년 왕 루이 14세는
정치를 모후와 마자랭에게 맡기고,
가끔 그의 애인 라 발리에르
(La Valliere, Louise Francoise de la Baume le blanc, 1644 ~ 1710)와 함께
이 곳에 와서 머물다 가곤 했었다.
여기에 궁전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1661년 9월,
앞서 이야기한 루이 14세가 저 문제의 푸케의 성관을 다녀온 뒤,
푸케를 공금횡령 죄로 구속하고,
"국왕의 궁전이 조신(朝臣)의 저택보다 초라 해서야 되겠는가?
즉시 베르사유에 새로운 궁전을 세우라"라고 착공을 명령했다.
사소한 명성(名聲)까지도 독점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로서는
화려한 푸케의 성관을 보고
시기와 질투와 더불어 오기가 발동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친정(親政)을 시작한지
채 6개월도 되지 않았을 때 일이고 보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루이 14세는 파리를 몹시 싫어했다.
프롱드의 난 등으로 숱한 고난을 겪었고,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파리보다는
아늑하고 조용한 베르사유를 몹시 좋아해서
이곳에 궁전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평소에도 애첩(愛妾)과 자주 드나들던 이곳에는
루이13세 때 지은 작은 집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신축(新築)이 아니고 개축(改築)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어쨌든 저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새로운 궁전 착공의 명령이 내리자,
푸케의 성관을 드나들던 예술가들은
모두 이 새로운 궁전공사에 동원되었다.
건축 담당은 L. 르보(Le Vau, Louis / 1621~ 1670),
정원 담당은 르 노트르(Le Notre, Andre / 1613 ~1700),
전체의 장식 담당은 르 브룅(Le Brun, Charles / Lebrun, Charles / 1619 ~ 1690),
진행은 콜베르, 총지휘는 국왕 자신,
사람과 돈의 힘(人工, 黃金)으로 자신의 취향에 맞게
자연을 개량하고 정복하는 것이
루이 14세에게는 몹시 즐거운 일이었다.
따라서 돌 하나 옮기고 나무 하나 심는 것도
일일이 국왕 자신이 결정했다.
1662년경부터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된 베르사유 궁전은
대정원을 시작으로, 1668년에는 중앙부가 증축되고,
1680년대에는 남북으로 뻗는 익부(翼部) 가 추가되었다.
이런 외형에서부터, 왕의 거실을 비롯하여
궁정성당,거울의 방, 전쟁의 방 등이 갖추어지기 까지
20 수년간의 공사 기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성급한 루이 14세는 착공 3년 뒤인 1664년 봄,
정원의 일부가 완성되자 이 곳에서
그의 애첩(愛妾) 라 발리에르를 위하여
"마법(魔法)의 섬의 환락"이라는 이름의 대축제를 1 주일간 열었는데,
이 곳에 가기 위해 루이14세가 길을 나서자,
파리에서 베르사유까지의 연도에는
국왕의 행렬을 보기 위한 인파로 가득 차고,
미완성의 정원에는 조신(朝臣)들을 비롯한
귀족, 군인, 의장대등이 입추(立錐)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축제는 기마경기를 비롯해서, 음악, 연극, 무용 등 매우 다양했다.
음악과 무용은 이탈리아 피렌체 태생의
륄리(Lully, Jean - Baptiste/ 1632 ~ 1687)가,
연극은 극작가 몰리에르(Moliere(1622 ~ 1673)가 각각 맡았는데,
특히 몰리에르는 그의 유명한 운문희극(韻文戱劇)
"타르튀프(Le Tartuffe)"를 여기에서 첫 번째로 공연할 행운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루이 14세는 이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 참석한
귀부인들에게는 평균 300 리브르(livres) 상당의 고급 보석이나,
금·은 세공품의 선물도 빠짐없이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5막짜리 운문희극(韻文戱劇) 타르튀프가
당시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의 부패·타락을 고발하고,
위선(僞善)을 풍자(諷刺)한 대담한 희극이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은 물론, 일반 신자들까지 외면,
시중에서의 공연은 중지당하였고,
세 차례의 개작을 거친 후 허용되었다고 한다.
몰리에르가 그의 연극이 공연 중지 당하여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루이 14세는 그를 국왕 전속극단으로 임명하고
1만 5000리브르의 연금을 주어 보상하였다고 하는데,
한 예술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으나,
이런 한 번의 행사에 들어가는 이런 저런 엄청난 비용은
왕실의 재정에도 타격을 주었지만,
보다 더 큰 타격은
국민들에게 돌아 갔다는 것은 너무도 뻔한 사실이었다.
애첩(愛妾)을 위한 "마법의 섬의 환락"이라는 이름의
축제를 시작으로 루이 14세의 화려한 궁정생활은 계속된다.
왕의 궁전에는 귀족들이 줄을 이어 드나들고,
이미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 물질적으로도 과거의 기반을 다 잃어버린 귀족들에게는
국왕 한 사람의 은혜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힘을 잃고 있었다.
귀족들이 지방으로 내려가면
몸과 마음은 자유롭지만 먹을 것이 없고,
궁정에 출입하면 먹을 걱정은 없으나
종(奴僕)의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그리고 국왕의 총애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늘 긴장하고 자리를 지켜 국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고,
그렇지 못할 경우 반역의 혐의를 뒤집어 써야 했다.
누구도 믿지 못했던 루이 14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면서,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당장 의혹을 품었다.
궁정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국왕에게 눈 도장이 찍혀야 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장기적일 때 사람들은 피로감을 느낄 것이다.
왕이 몸 져 눕기라도 기대해 보지만,
왕성한 체력을 가진 국왕은 지칠 줄도 몰랐다.
궁정의 하찮은 시중꾼의 직책도
3만에서 10만 리브르를 내고 사야 했고
살 수 있는 것만으도 당시로서는 특권이었다.
지금도 윗 사람에게 그 눈 도장 하나를 찍기 위해서
스스로 찾아가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치장하고
줄을 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래도 출세하는 것을 보면
이것 또한 사회생활에서는 필요악(必要惡)일까?
그래도 루이 14세는 자신이 아랫사람들을 찾아 다녔다니
아랫사람들로서는 어렵게 찾아 가야할 수고는 면해 준 셈이다.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한 영화만큼이나
그 영욕의 역사도 가지가지다.
1783년에는 영국 대표를 불러들여
이곳에서 영국으로 하여금 미국독립을 승인케 하였고,
1789년 프랑스 대 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분노한 파리시민들에게 타도의 표적이 되어
베르사유로 가자고 외쳤고, 이때 많은 유물들이 흩어졌다.
1871년 파리를 점령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이 베르사유궁전에서 독일 황제의 즉위식을 가짐으로서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에 치명타를 가했으나
1919년에는 다시 이곳에서 독일의 대표를 불러들여
저 유명한 베르사유 체제에 굴복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고궁으로 일반에게 공개된 지금은
세계의 관광객을 이곳으로 모으고 있다.
베르사유궁전을 17세기에 나타난
화려하고 장엄한 바로크(Baroque) 풍의 건축물이라고 한다.
16세기 르네상스 고전양식에 이어 등장한
화려하고 웅장한 새로운 기법의 회화와 조각을
고전미술과 구분해서 바로크라고 했고,
이 말에는 변칙(變則), 이상(異常), 기묘(奇妙) 등의 뜻을 가진
모멸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루이14세 상 2)
(나폴레옹)
(마리 앙뜨와네트 침실 1)
(마리 앙뜨와네트 침실 2)
(마리 앙뜨와네트 침실 3)
루이 16세의 부인이며
비운의 왕비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간
Marie-Antoinette(마리 앙뜨와네뜨)가 사용했던 것을 재현한 침실
(마리 앙뜨와네트 침실 4)
왕비의 침실로 사용되던 곳,
현재 공개하는 부분은 마리 앙뜨와네트가 사용하던 방들이다.
과거에 이 방은 왕실 전용 조산소 역할도 했는 데,
관습에 따라 가족 입회하에 출산이 이뤄졌다고 한다.
(루이 마리애, 루이 15세의 딸?)
(거울의 방 1)
(거울의 방 2)
(거울의 방 3)
(마리 앙뜨와네트)
(궁전 외부)
(정원 1)
(정원 2)
(정원 3)
(정원 4)
(정원 5)
(정원 6)
베르사유 궁전에는 당시 화장실이 없던 것으로 또한 유명하죠?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에 호화스런 궁전을 짓고
이를 바탕으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사실은 너무도 유명하다.
베르사이유 궁전이 완성되고
루이 14세가 이 궁전으로 옮겨 살게된 것은 1682년의 일이다.
루이14세는 각 지방의 영주들을 불러 이 궁전 안에서 살게 하였으므로
당시 이 궁전에는 약 5천 명이 살았다.
게란트가 쓴 〈화장실 문화사〉를 보면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궁전을 출입했던 수 많은 귀족들이
그들의 배설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상상하면 그저 아찔해질 뿐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건물의 구석 벽이나
바닥 또는 정원의 풀숲이나 나무 밑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이 비단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파리의 유명한 샤르르 가르니에의 오페라 하우스도 마찬가지이다.
관람객들은 몇 시간이건 변욕을 스스로 참아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각자가 용기를 지참하는 수 밖에 없었다.
루이 14세가 그때까지 살던 파리의 루브루 궁전을 버리고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옮긴 이유도
루브루 궁전이 오물로 뒤덮였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강하다.
어쨌든 왕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화장실 이외에는
궁전 안에 화장실이라고 불릴만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마다 화려한 무도회가 열렸으니
이들은 부득이 정원의 꽃이나 잔디를 밟고
용무를 해결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궁중 무도회에 초대된 귀족들은 휴대용 변기를 지참하여
생리적인 응급 대비를 하기도 했으나
오물을 비우는 일은 하인들의 몫이다.
이들이 오물을 버리는 곳 역시 으슥한 정원 구석이었고
궁에서 생활하는 궁신들의 배설 또한 이러했다고 하니
오물로 덮힌 궁전의 실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무도회에 참석할 때 여성들은
커다란 모피 주머니에 휴대용 그릇을 넣고 다녔다.
그것은 지름 25센티미터 정도의 길쭉한 도기로서
손잡이가 달린 것이었는데
하이리이스 소스를 담는 그릇같이 생긴 것이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옷을 여러 겹 겹쳐입고 그냥 옷속에 실례하였을 거라고
하던데... 어쨌든
프랑스에서 향수가 발달한 이유 또한
악취에 대한 대처로 생긴 것이라 하죠.
또한 당시 최초로 남자들로부터 하이힐이 등장합니다.
이유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면서...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그웅장함에목달아나느줄알았죠,새롭내요.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