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여(77) 총장은 1932년 5월 9일 전북 옥구군 대야면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 1958년 인천에서 산부인과를 개원했다. 미국 퀸스종합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쳤으며 늦깎이로 일본에 유학, 1977년 일본대에서 의학박사를 받았다. 이듬해 여의사로는 최초로 전 재산을 출연해 의료법인을 설립, 오늘의 길병원을 만들었다. 현재 길의료재단 이사장, 가천학원 이사장, 가천문화재단 이사장, 경인일보 회장 등을 맡고 있다.
본사 강천석 주필이 지난 10월 13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경원대 이길여 총장을 만났다. 뽀얀 피부를 지닌 이 총장은 취재진을 환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그는 50여개의 직함을 가지고 있는데, 소지한 명함에 적힌 것은 경원대 총장·의학박사였다. 이 총장은 지난 4월 ‘과학의 날’에 최근 5년간 1800억원을 투자해 ‘뇌과학연구소’ ‘이길여 암당뇨연구원’ ‘바이오나노연구원’ 등 세계적 수준의 과학연구소 3개를 설립, 우리나라 기초과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받아 정부로부터 과학기술훈장 창조장(1등급)을 받은 바 있다.
강천석이 총장님의 직함은 50개가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이 총장님이 이끌고 있는 조직은 어떤 것이 있나요.
이길여 제가 설립한 가천길재단의 사업은 크게 교육, 의료, 언론, 문화, 봉사 부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면 종합대가 2곳(경원대, 가천의과대) 있고, 길의료재단 산하에 가천의대 길병원 등 5개의 병원이 있습니다. 또 경인일보가 있으며 가천문화재단, 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 가천미추홀청소년봉사단 등을 통해 문화, 봉사 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 photo 유창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강최근 노벨상 수상자가 많기로 유명한 미국 벨 연구소와 공동연구 사업을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인천 송도에서 벨 연구소와 공동연구 MOU(양해각서)를 체결했습니다. 녹색 성장의 핵심기술인 스마트 그리드(smart grid·지능형 전력망) 연구 사업입니다. 연구 시설이 들어설 장소는 저희가 개발 중인 길재단 BRC(바이오 리서치 콤플렉스·20만5000㎡) 부지가 될 것입니다.
강 뇌과학연구소, 이길여 암당뇨연구원, 바이오나노연구원 등 연구소들을 설립해 가천길재단이 국내 기초과학을 선도해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하는데요.
이 뇌과학연구소는 세계 최초로 원형 PET(양전자방출단층촬영술)를 개발한 조장희 박사를 영입해 문을 열었습니다. 조장희 박사를 중심으로 한 연구진은 ‘뇌를 손바닥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퓨전영상 시스템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요. 암·당뇨연구원은 암과 당뇨병 정복이라는 인류의 꿈을 실현하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김성진 박사를 비롯한 세계적 석학 20여명과 100여명의 연구원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어요.
또 바이오나노연구원은 현대과학의 총아(寵兒)라고 불리는 바이오기술(BT)과 나노기술(NT)의 융합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2년 전 경원대에 바이오나노연구원을 만들면서 노벨상 수상자인 스티븐 추 박사를 명예원장으로 모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오바마 정부에서 에너지 장관으로 취임하는 경사도 있었죠.
우리 재단의 3대 연구소는 교육과학기술부가 뽑은 ‘세계수준의 연구중심대학(WCU· World Class University)’에 모두 선정되어 그 역량을 공인 받은 셈이죠.
강이 총장께서는 인재를 가장 중시하시는데, 이 총장님의 인재 선정 기준은 무엇입니까.
이 21세기는 인재의 시대입니다. 인재를 양성하고 발굴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어요. 저는 석학들을 만나면 늘 인재에 대해 얘기하고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합니다. 외국에 가서 사람을 만나 이력과 능력을 제 눈으로 확인해요. 유능한 사람을 뽑아야 병원과 대학이 발전하거든요.
강말씀하신 대로 뇌과학 분야의 세계석학 중 한 사람인 조장희 박사를 미국으로 직접 가서 영입했고, 민간기관이 생각하기 힘든 600여억원의 거액을 투자해 뇌과학연구소도 지었습니다.
이 탐나는 교수가 있으면 지구 끝이라도 달려가 데려올 생각입니다. 같은 재단 소속인 가천의과대 교수 중 몇 명을 이런 식으로 뽑았지요. 지인으로부터 석학으로 알려진 한 교수 이야기를 듣고 미국 현지에 ‘만나보고 싶다’고 연락했어요. 시카고에서 잠깐 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시카고로 달려가 점심시간에 면접만 하고 바로 돌아왔어요. 비행기에서 잠을 잤으니 ‘무박2일’인 셈이지요.
강조장희 박사는 강력한 노벨상 수상자 후보라고 들었습니다.
이 조 박사는 PET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 MRI(자기공명영상)까지도 섭렵한 세계 유일의 의·과학계 석학입니다. 이 두 가지 뇌 영상기술은 곧 뇌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결정적 키워드라고 볼 수 있어요. PET는 뇌 세포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고 MRI는 뇌의 구조, 즉 뇌 속의 형태를 읽을 수 있어 이것을 하나로 융합하는 퓨전영상을 개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강이 총장께서는 가천박물관도 운영하고 있는데요.
이 1995년 사비를 털어 만들었어요. 박물관을 세우게 된 동기는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어머니 때문이었어요. 어머니는 버선이나 골무, 귀주머니 같은 생활필수품을 대부분 손수 만들어 쓰셨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을 대표하는 공예품이었죠. 언젠가 이런 전통 공예품들을 전승하는 박물관을 설립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강박물관에는 국보와 보물도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수집하셨나요.
이 한번은 50대 중반의 남자가 찾아와 고서 전시회를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전시회가 끝난 후 팔리지 않은 몇 가마니 분량의 고서와 골동품을 사달라고 해, 도와주는 셈 치고 모두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 고서 중에 국보(제276호)인 ‘초조본 유가사지론’이 있었어요. 고려 때 만들어진 이 책은 우리 조상들의 호국정신이 담긴 불교문화재로, 대장경의 초판 격이죠.
강경원대와 가천의과대는 언제쯤 통합하게 됩니까.
이 경쟁력 강화를 위해 가능한 한 빨리 하려고 합니다. 교육부에서도 적극 지원하고 있어요. 대학들도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성공 모델이 없습니다. 교육부에서 현재 재정적 문제 등을 안고 있는 20여개 부실대학이 구조조정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해요. 하지만 소유권 문제와 승계 문제가 장애가 된다고 합니다. 저희가 ‘성공 모델’이 되려고 해요.
강이 총장께서는 한국 교육의 문제점과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먼저 대학에 자율권을 줘야 해요. 미국 중등교육의 다양성과 대입 자율성을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미국에선 장래성이 있는 인재인지를 보고 학생을 뽑아요. 우리는 어떤가요. 그 학생이 얼마나 암기력이 있는지를 봐요. 당연히 교육이 암기에 치중하게 되죠. 그런 환경에선 훌륭한 인재가 나오기 어려워요. 중등교육과 대학교육이 공존하면서 인재를 양성하는 제도 마련이 절실합니다.
강이 총장이 경원대의 발전 슬로건으로 내건 ‘G2+N3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
이 1999년 경원대학교와 경원전문대학을 인수한 뒤 ‘국내 10대 명문 사학’으로 육성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이를 위해 2007년 경원대와 경원전문대를 통합했어요. 통합 당시 내가 비전으로 제시한, G2+N3(Global Top 2+National Top3) 프로젝트는 경원대학교를 10년 내에 세계 최고 학과 2개, 국내 최고 학과 3개를 만들겠다는 계획입니다.
강이 총장께서 운영하고 있는 대학이 오래 번창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이 결국 사람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사람에게 투자해서 실패한 적이 없어요. 배신을 당한 적도 없습니다. 함께 일하는 교직원들에게는 당장보다는 20년, 30년 뒤를 위해 일하자고 격려합니다.
강이 총장께서는 교육자가 되기 이전에는 의료인으로 일했습니다. 1960년대 인천에 ‘이길여 산부인과’를 열었을 때 ‘보증금 없는 병원’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모든 병원이 보증금을 받았는데 길병원만 안 받았으니 일종의 역발상이었네요.
이 제게 ‘보증금 없는 병원’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일단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고 난 후 돈을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할 사람이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아픈 몸을 이끌고 진료실을 나가는 것을 의사의 양심으로 용납할 수가 없었거든요. 일단 살려야 했기에 의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오라고 했습니다. 환자에게 일일이 설명하기 어려워 병원 벽면에 ‘보증금 없는 병원’이라고 큼지막하게 써 붙였죠.
강이 총장께서는 초(대야초등)ㆍ중(이리여중)ㆍ고교(이리여고)를 지방에서 다녔습니다. 서울대 의대에 진학해서 공부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나요.
이 초·중·고 시절 항상 1등을 했습니다. 하지만 서울대 의대에 진학하니까 똑똑한 친구들이 너무 많았어요. 영어 웅변대회, 독일어 웅변대회를 보고 기가 죽었죠. 저는 기초가 약해서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자주 밤을 새며 공부에 매달려야 했지요.
강콤플렉스를 긍정적으로 잘 사용해 사회에서 더욱 성공하게 됐나 봅니다. 콤플렉스는 사람을 지쳐서 넘어지게도 하지만 날아오르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죠. 콤플렉스를 자기 파괴의 에너지로 사용하느냐, 성공을 위한 에너지로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소녀시절 세 살 연상인 언니에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언니는 코가 오똑했고, 저는 그보다 낮은 코를 가졌거든요. 하지만 항상 마음속에는 ‘긍정’이라는 단어가 품어져 있었습니다.
강이 총장께서는 방앗간집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의 가정교육은 어땠습니까.
이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폐렴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 어머니, 언니와 함께 살았어요. 하지만 집안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어머니가 항상 웃는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할머니와도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제 친구 중에 박지홍이라는 아이가 있었어요. 만석꾼의 딸이었습니다. 그 집에서 함께 월반 공부를 했는데 집안 분위기가 너무 어두웠어요. 지홍이는 저희 집처럼 자유롭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좋아했습니다.
강그 친구분은 지금 어떻게 지내시나요.
이 34세에 최고령으로 서울대 의대를 들어가서 일간지에도 등장했습니다. 저처럼 의사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제가 32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퀸스병원에서 수련의 생활을 하는데 추운 겨울이불을 둘러쓰고 공부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저처럼 평생 혼자 살았고, 길병원에서 함께 일했는데 몇 년 전 타계했어요.
강이 총장께서는 1964년 32세 되던 때에 잘되던 병원을 갑자기 그만두고, 미국 뉴욕으로 가서 4년 반 동안 수련의 생활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나요.
이 이전부터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친구와 함께 개원한 병원에서 모은 돈으로 비행기 표를 샀고 선진 의술을 배우기 위해 떠났습니다. 제게는 달나라 같은 미지의 세계였지만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침대에서 자다가 떨어지기도 했지만요.
강이 총장의 모친은 어떤 분이었나요.
이 저에게 어머니는 너무 특별한 존재입니다. 저를 있게 한, 제 모든 것이고요. 어머니의 삶을 묘사한 ‘어미새의 노래’라는 책이 있는데, 저는 끝내 모두 읽지를 못했어요. 몇 줄 읽다 보면 눈물이 앞을 가려 실패하고 실패해서 지금껏 완독하지 못했어요. 1998년 89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살았습니다. 군산에 있는 선산에 모셨어요. 제가 너무 바빠서 어머니 주무실 때 나오고 주무실 때 들어가서 불효를 한 것 같아요. 늘 저를 보고 싶어하셨고 기다리셨죠.
강모친의 바느질 솜씨가 좋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것이 의사 딸에게 전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어머니는 정말 바느질을 예쁘게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수술 솜씨를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거였네요. 어머니는 음식, 술, 된장, 간장도 맛깔스럽게 만드셨습니다. 손으로 하는 걸 모두 잘하셨죠. 그래서 제가 손만으로도 진료를 잘했나 봅니다. 산부인과 의사 시절 내진(자궁입구까지의 검진)을 한 번 해보면 아기의 건강상태까지 느껴졌어요.
강칼로 자르고 바늘로 꿰매는 수술을 하는 의사가 적성에는 잘 맞았나요.
이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행복했어요. 사실은 제가 무서운 장면도 잘 못 봐요. TV에서 ‘동물의 왕국’을 보다가 사자가 노루를 잡아먹는 장면이 나오면 다른 채널로 돌릴 정도입니다.
강이 총장께서는 결혼할 뻔한 적이 있습니까.
이 젊을 때는 어머니의 강권으로 선도 몇 번 봤습니다. 성공했으면 결혼했겠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아주 오래된 이야기네요.(웃음)
강이 총장께서는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자면서 어떻게 성공하려고 하냐?”는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지금도 네 시간 이하로 주무시나요.
이 초·중·고 시절에는 통학 때문에 네 시간 이상 잘 수가 없었어요. 새벽과 밤에 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대학 때는 부족한 기초를 메우느라고 잠을 못 잤고, 의사가 된 후에는 환자 보다가 밥도 못 먹을 정도였어요. 산부인과니까 환자가 시도 때도 없이 오게 되어 있지요. 한번 푹 자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건강을 위해서 7시간 정도 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