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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초기 연전연패 부른 국군의 무능함과 미군의 오만함
▲ 한국전쟁 격전지 개미고개에 설치된 조형물 ⓒ 윤태옥
1950년 6월 28일 새벽에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자 채병덕 휘하의 국군 장병 대부분은 함정에 빠졌다.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는데 윗선 육해공군 본부의 철수계획은 있었으나 아랫선 일선 사단의 철수작전은 없었다.
지휘부가 버린 것과 다를 바 없는 서울 강북의 국군 장병들은 제 손으로 나룻배나 뗏목을 구해 도강해야 했다. 보급품이 실린 트럭 1300여 대는 그대로 인민군의 손에 들어갔다. 통신두절로 지휘체계도 무너진 상태였고 강을 건너 수습된 병력은 3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계속된 패전과 후퇴에 피로가 극심했고 사기랄 것은 없었다.
수원으로 후퇴한 육군본부는 서둘러 한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채병덕은 시흥보병학교에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만들고 중화민국 국민당 군대에서 2성 장군까지 지낸 김홍일(소장)을 사령관에 임명했다. 김홍일은 수습된 병력들을 혼성7사단, 혼성수도사단, 혼성2사단으로 재편하고 한강 방어선을 구축해갔다. 명칭은 사단이지만 실제로는 1개 연대 수준의 병력뿐이었다. 김홍일이 세운 작전목표는 실지회복이 아니었다. 유일한 희망인 미군 참전까지 어떻게든 버티는 것이었다.
북한 인민군의 진격 속도는 매우 빨랐으나 국군이 한강 이남에서 이만큼이라도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7월 1일까지 3일간 한강 너머로 진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3일은 한국전쟁사에서 수수께끼로 운위되기도 한다. 만일 인민군이 서울에서 3일을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남하했다면 미군이 참전할 여지가 더 좁아졌고 한국전쟁은 자칫 조기에 종결될 수도 있었다.
한국전쟁사의 수수께끼... 서울 점령한 인민군의 '3일'
▲ 한강에서 대전까지 한국전쟁 주요 격전지 ⓒ 이은영
왜 3일을 기다렸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이 있다. 한 가지는 박헌영이 장담했던 남한의 인민봉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봉기를 일으킬 수 있는 인적 자원의 상당수는 이미 월북했고 남한 어디서도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둘째는 애초에 서울을 점령하면 그것으로 남북통일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을 압박해서 통일을 결의하게 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인 통일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들이닥쳤을 때 서울은 정부도 국회도 모두 피란을 했으니 헛발이라 할까.
전술적 분석도 있다. 개전에서 크게 승리한 인민군 부대와 장병들에 대한 포상과 함께 전쟁 이전부터 누적된 피로를 해소하기 위한 휴식이 필요했고, 한강을 건널 도하장비도 충분치 않았다는 것이다. 앞의 글에서 살핀 바, 춘천의 6사단에 막혀 인민군 2군단의 2사단, 12사단이 수원 쪽으로 진공해오지 못했기 때문에 전선이 동서로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다렸다는 분석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인민군이 3일 동안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6월 28, 29일 도강을 준비했고 몇 차례 여의도로 소규모 도하를 시도했으나 국군 8연대와 18연대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인민군은 한강철교를 복구했고 7월 3일 새벽 4사단의 전차 4대를 도강시켜 영등포 일대를 헤집기 시작했다.
3사단은 한남동에서 신사동으로 도강해 판교로 진출했고, 이미 한강하구에서 김포로 도강했던 6사단이 김포비행장을 거쳐 영등포를 공격해 왔다. 이로써 한강 방어선은 무너지고 시흥지구전투사령관 김홍일은 방어선은 안양으로, 사령부는 평택으로 후퇴시켜야 했다. 이 전투를 한강방어선 전투(6월 28일~7월 3일)라고 한다.
빗나간 소련의 예상, 신속했던 미국의 개입
▲ 미국이 보낸 첫 번째 전투부대인 스미스특임부대 ⓒ 윤태옥
한편 남침을 감행해도 미국이 참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북한과 소련의 예상과는 달리 미국은 빠르게 움직였다. 주한 미국대사는 개전 당일 오전 9시 반 북한이 개성을 함락시켰고 이는 곧 전면전이라고 본국에 타전했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미국과 유엔이라는 새로운 세계질서, 곧 자신의 패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했다. 미국은 한국 시간으로 6월 26일 새벽 4시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유엔의 이름으로 북한에게 경고하며 철군을 요구했다.
26일 정오에는 미국의 안전보장회의를 열어 극동군 사령관에게 현지 조사반을 파견하고 탄약을 지원하며 자국민 철수를 보호하기 위해 해군과 공군을 운용하라고 지시했다. 27일 오전 10시에는 38선 이남의 북한 인민군에 대한 공격을 허가하고 한국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8일 새벽 4시 북한의 침략을 격퇴하는 데 필요한 군사원조를 대한민국에게 제공하기로 결의했다. 주지하다시피 일련의 유엔 차원의 조치들은 소련이 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한 상태에서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 결의에 따라 미국은 해군·공군의 작전구역을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했다.
6월 29일 오전 미국 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가 70세의 노구를 끌고 수원공항에 착륙했다. 이승만이 직접 영접을 나갔는데 인민군 야크기가 나타나 공격을 했다. 잠시나마 이승만과 맥아더는 모자를 움켜쥐고 근처 논두렁에 몸을 숨겨야 했다. 전투상황을 둘러본 맥아더는 해군 공군의 지원에 더하여 지상군을 파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극동군 산하의 미8군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7월 1일 드디어 미군 지상군이 한반도에 투입됐다.
아울러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평택으로 후퇴한 7월 4일부터 국군과 미군은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경부국도를 중심으로 서쪽은 미군이, 동쪽은 국군이 맡기로 한 것이다. 이에 맞춰 국군도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1군단으로 개편하여 평택의 동쪽에 재배치했다. 해군은 북위 37도를 기준으로 분담하여 남쪽은 한국이, 북쪽은 미군이 해상봉쇄를 했다. 북한 인민군은 1, 2군단의 10개 사단과 1개 연대가 계속해서 남쪽으로 몰아 부치고 있었다. 인민군 1군단은 미군과, 2군단은 국군과 대치하는 형국이었다.
미국이 보낸 첫 번째 전투부대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8군 24사단 21연대1대대에 포병52대대를 배속시켜 만든 태스크 포스(Task Force)였다. 대대장의 이름을 붙이고 우리말로 번역해서 '스미스특임부대'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일본 큐슈의 구마모토에 있는 캠프우드에서 이타즈케 공군기지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4대의 C54-더글라스 수송기로 7월 1일 부산에 도착했고 대전까지 기차를 타고 와서는 오산의 죽미령에 진지를 구축했다. 7월 5일 바로 이곳에서 인민군과의 첫 전투가 벌어졌다.
이렇게 하여 한국전쟁은 인민군이 국군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전투에서 미군과의 직접 대결이라는 국제전으로 전환됐다. 38선을 넘어가는 것은 국제전을 불러오고 또 확대했다. 38선을 넘어선 남침은 미군을 불러왔고, 한국군과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중국이 경고한 대로 중국군이 개입하지 않았는가.
기대와 달랐던 미군의 연이은 참패
▲ 대전전투 현장 ⓒ 강성현
스미스특임부대가 부산을 거쳐 열차로 대전에 도착했을 때 이승만은 물론 한국군도 열렬히 환영했다. 이때 촬영된 사진에서 활짝 웃는 국군 장교들의 표정이 그동안의 공포와 그 순간의 안도감을 동시에 말해주는 것 같다. 선발대로 온 스미스특임부대에는, 세계 최강 미군을 보면 북한 인민군 따위는 제풀에 꺾여 퇴각하리라는 자신만만한 태도가 깔려있었던 것 같다. 미국의 역전노장 70세의 별 다섯 개 맥아더 역시 서른여덟 살 김일성을 잠시 반짝이는 애송이로 인식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첫 전투는 미군의 참담한 패배였다. 죽미령에 진지를 구축한지 몇 시간 만에 인민군 전차에 의해 돌파를 당했고, 이어진 보병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12시간 만에 후퇴해야 했다. 스미스부대는 부대원 440명 가운데 150여 명이 전사 또는 실종됐다. 이를 지원하던 52야전포병대대의 A포대는 모든 화포를 잃고 131명 부대원 가운데 31명이 전사 또는 실종됐다. 인민군도 사상자도 127명이나 됐지만 전투는 승패로 갈리는 법이다. 세계 최강 미군의 선발대로서 찔러보기를 했다고 하기에는 피해가 컸다.
그러나 미군의 패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평택-안성에 방어선을 구축했던 미군 34연대가 7월 6일 아침 단 1시간 만에 방어선을 포기하고 천안으로 후퇴했다. 이에 격분한 사단장은 연대장을 즉시 해임하고 새 연대장을 임명했다. 그러나 새 연대장은 임명 바로 다음날 의욕을 앞세워 공격에 나섰다가 인민군의 전차포격에 전사하고 말았다.
개미고개에서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7월 12일 전의-조치원에 배치된 21연대도 무너졌다. 미군은 이제는 금강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게 됐다. 연이어 참패를 당하고 나서야 인민군을 가볍게 보았던 것이 오판임을 자각한 것 같다. 그러나 한국전쟁사에 지연전이라고도 묘사되는 국군과 미군의 연이은 후퇴는 낙동강 전선까지 계속됐다.
▲ 오산 죽미령 유엔군초전기념관에 설치된 조형물 ⓒ 윤태옥
오산의 죽미령을 찾아갔다. 경부선 철도와 경부국도 1호선이 나란히 지나는 밋밋한 고개다. 바로 동쪽에는 반월봉이라는 113.7미터의 작은 봉우리가 있다. 반월봉의 허리춤에 검은 회색의 돌로 만들어진 기념탑이 있고 그 바로 아래 유엔군초전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일층에는 '미국과 함께 한 독립운동'이란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미군 OSS와 함께 추진했던 한반도 침투공작인 독수리작전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었다. 2층에서 죽미령 전투의 전개상황을 자세히 볼 수 있다. 기념관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유엔군 참전국가를 하나하나 소개하는 조형물도 둘러볼 수 있다.
한 가지 의아한 것은 기념관의 명칭이다. 국방부에서 출간한 <한 권으로 읽는 한국전쟁>은, 국군이 7월 초순 유엔의 1·2차 결의에 따라 미군과 함께 연합전전을 형성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7월 7일 3차 결의로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결의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미국 대통령이 맥아더를 임명하겠다고 공표한 것이 7월 8일이다.
따라서 죽미령 전투가 벌어진 7월 5일에는 유엔군이란 개념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나중에 미군을 주축으로 유엔군 편제가 이루어지지만 왜 굳이 미군의 첫 전투를 유엔군의 초전이라고 했는지 궁금하다. 역사의 기록으로 이런 기념관을 만들면 작은 팩트 하나에도 허점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명칭 자체에 나같은 여행객이 갸우뚱하고 있으니 뭔가 말끔하지는 않다.
천안을 지나 조치원 가까이 가면 개미고개가 있다. 개미고개에는 '6.25격전지'라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옛날에는 이 길이 경부선 국도였지만 4차선 새 국도가 다른 곳으로 나는 바람에 지금은 아주 한적한 시골의 고갯길(운주산길, 왕복 2차선)로 남아 있다. 고갯마루의 휴게소 식당마저 고요하기만 했다. 이곳 역시 미군이 격전을 치렀지만 참패를 당한 곳이다.
개미고개에 설치된 조형물의 명칭이 전승비나 전적지가 아니라 격전지라고 명명된 것이 패전의 쓰린 속내를 보여준다. 조형물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것은 이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들의 이름들이다. 잊지 않겠다는 한국인의 다짐도 있다.
지휘부의 결함을 장병들의 죽음으로 메꾼 현장들
▲ 한국전쟁 격전지 개미고개에 설치된 조형물 ⓒ 윤태옥
▲ 한국전쟁 격전지 개미고개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들 이름을 새겨놓은 조형물 ⓒ 윤태옥
북진통일을 외치던 대한민국 국군이 한국전쟁 초기 전투에서 북한 인민군에 형편없이 패한 이유는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능함이었고, 세계 최강 미군이 신생국가 북한의 인민군에게 참패를 당한 것은 오만함이 아니었을까. 무능하면 무능해서 패하지만, 세계 최강은 스스로 패했기 때문에 패한 것이다. 38선에서 죽미령과 개미고개, 그리고 낙동강까지의 전장은 지휘부의 결함을 장병들의 죽음으로 메꾼 현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개미고개에서 어색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미군 병사 3인의 상을 받치고 있는 기단에 부착된 설명이었다. "3인을 삼각구도로 배치함으로써 조형적 균형을 이루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참 쓸데없는 설명이다. 남의 나라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곳에 느닷없이 특별하지도 않은 조각가의 균형 감각을 자랑스레 내세운 꼴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에게 희망의 전부였던 미군이 연전연패를 했지만 일부 희망적인 전조도 나타났다. 국군과 미군이 연합전선을 구축하면서 국군 1군단은 경부선 동쪽으로 재배치됐다. 이때부터 병력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흩어졌던 병력이 복귀하고, 낙오자도 수습하여 재배치했다. 대한청년단과 학도병 등의 지원입대도 있었다. 아직 보급과 장비에서는 큰 어려움이 그대로였지만 긍정적인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전선이 계속 남쪽으로 밀리는 가운데 승전보도 전해졌다. 수도사단은 7월 9일 진천지구에서 매복작전을 펴 큰 전과를 거뒀다. 인민군의 포 4문과 차량 27대 노획했다. 6사단 7연대는 7월 5일과 6일 충주시 신니면의 동락리 전투에서 인민군 15사단 48연대를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거뒀다. 군수참모를 비롯해 132명을 포로로 잡았고 포 54문과 차량 75대 등 많은 장비를 노획했다. 7연대는 대통령 부대표창과 전장병 1계급 특진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지금 그곳에는 마을을 바라보는 널찍한 야산중턱에 동락전승비가 멋지게 세워져 있다. 안내표지는 당시의 전투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 동락전승비에 설치된 조형물 ⓒ 윤태옥
"북한군의 선두부대인 15사단 48연대는 현재의 충주시 신니면 동락리 일대까지 진출하게 되고, 이들은 동락초등학교 주변에서 장비를 배치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당시 피난을 가지 않았던 김재옥 교사는 국군이 멀리 후퇴했다며 북한군을 안심시킨 후 4km 떨어진 곳에 있던 국군 6사단 7연대 2대대장 김증수 소령에게 이 사실을 알려 기습의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이곳은 6.25전쟁의 첫 전승지가 되었다."
이와 함께 차량과 장갑차 90대를 포함해 많은 장비와 무기를 노획했고, 이곳에서 노획된 소련제 무기는 유엔 16개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촉진했으며, 7연대 전 장병이 한 계급씩 특진했다는 것도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