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장소 : 무등산 약사암
일 시 : 2024.03.14(목)
참 가 : 강공수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이용환 장휘부 등 8명
불 참 : 김상문(서울행) 김영부(함평농장) 김재일(집안일) 정원길(고향행) 등 4명
회 비 : 70,000원 갹출(나종만 산행 후 결식, 7명만 식사)
식 대 : 52,000원(김치찌개 애오박찌개 파전 등 52,000원(리정훈 선배 탁주 2병 협찬)
금일 잔액 : 18,000원
이월 잔액 : 661,000원
총 잔 액 : 679,000원
부곡정에 모인 회원은 7명(강공수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이용환 등)이었다. 박남용이 승용차로 내자와 동승하여 서구 복지관을 다녀서 오게 되면, 제2순환도로의 유료도로 진출입로에서 요금 정산을 하느라 차량들이 줄서서 대기하는 관계로 시간을 많이 잡아 먹어버려, 약 10분 정도 늦을 것이라는 카카오 톡 문자를 보내왔는데, 오늘은 오히려 10분이나 일찍 부곡정에 도착해 버렸다. 그래서 10시 정각에 산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 광주광역시의 유료도로의 진출입로에서는 현금으로 요금을 정산하고 있어서 줄을 선 대기 차량들로 시간을 많이 지체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시간을 단축시키려면 하루 빨리 현금 결제 대신 무인정산 방식(하이패스)으로 결제수단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박남용은 현금 결제 대신 하이패스 카드를 요금 결제기에 터치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약간 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오늘에야 박남용에게 그 방법을 배웠으니, 앞으로 써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오늘의 기온은 내 상의가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창한 날씨였다. 그래서 박남용은 아예 상의 파카를 벗어서 손에 들고 산행을 시작하였다.
오늘은 박남용과 둘이서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로 산행을 시작하였다. 우리 십오야 회장 강공수는 연금을 받으면서도 교회에 <십일조>를 아주 착실히 내고 있다고 한다. 나와 같이 근무했던 어떤 영어 선생님은 평소에 강공수처럼 교회에 아주 착실히 헌금을 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연말 정산제도가 생기면서, 연말에 1년 동안에 교회에 내었던 헌금 총액 영수증을 가져 오면 기본 공제금에 포함시켜 소득공제를 받으면 세금을 적게 낼 수 있다면서, 교회에 가서 1년간 헌금 총액 영수증을 발급받아 제출하면 그만큼 세금을 줄여주겠다고 하였지만, 그 선생님은 이미 헌금하면서 정신적인 행복을 누렸기 때문에, 더 이상의 실질적인 세금 공제의 이익을 누리지 않겠다는 신실한 신자를 보고 감탄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거의가 나름대로 교회에 헌금을 내는데, 교회에 따라 신도들에게 경쟁적으로 헌금을 하도록 종용하니까, 신도들이 이 문제로 정신적 압박감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하여 모아진 교회의 재산으로 교회 간부들 사이에 재산 싸움이 벌어지는가 하면, 끝내는 재산 싸움으로 교회가 쪼개져서 새 교회를 만들어 나가버리는 경우도 가끔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들은 교회에 내는 교납금에 대한 정신적 부담을 비교적 덜 받는 다고 들었다. 그래서 신도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반면, 천주교의 신부들은 금욕(성욕)으로 자신을 단련해야 하니까 그것에 대한 부담은 있지만 그 외의 것들은 기독교 목회자들에 비해, 음주나 끽연 문제 등에서 좀 더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덧 약사암에 도착하였다. 석등에서 나오는 석간수를 받아 음양탕을 만들어 마셨다. 그리고 해우소를 다녀 나오는데 만개한 매화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주에는 그냥 지나쳤었는데 오늘은 하얗게 만개한 매화가 우리의 눈을 확 끌어 당겼다. 윤상윤은 약사암 대웅전 앞 오른쪽에 있는 수양(垂楊) 매실에 휘영청 늘어진 매화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많은 선비들이 매화를 사랑하였지만 특히 매화를 사랑한 사람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1)을 들 수 있다.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조선시대 13대 임금 명종(明宗)이 가장 사랑한 신하가 바로 퇴계였다. 그래서 명종은 항상 퇴계를 옆에 두고 그의 자문을 받고자하였지만 그럴수록 주위의 시기로 탄핵을 당하기도 하고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되어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하곤 하였는데, 언젠가 단양군수로 제수되었을 때는 임금님의 측근으로 활동하는 중앙요직이 아닌 지방관은 시기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므로 단양군수를 받아들이고 부임하게 되었다.
퇴계가 48세에 단양군수가 되어 부임하였는데, 단양 땅에는 18살 먹은 두향(杜香)이라는 관기(官妓)가 있었다. 이때 퇴계는 아내와 자식을 함께 잃어서 심신이 매우 피폐한 상태였다. 그런데 단양 고을의 관기였던 두향이 수령으로 온 퇴계의 인품(人品)을 흠모하게 되면서, 퇴계에 대한 연모의 마음으로 퇴계의 마음을 극진히 위로하게 되면서 열여덟 청순한 여인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두향은 원래 양인(良人) 출신으로 관기가 되었는데 영특한 자질을 가져 그동안 시서화(詩書畵)를 배워-지금으로 말하면 <아이돌 연예인>으로-18살의 그녀 앞에 나타난 퇴계선생을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 퇴계의 형님이 충청 감사로 부임하면서 형제간에 동일지역에 근무하지 못하게 되는 규정 때문에, 아랫사람인 퇴계는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출하게 되었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재직하던 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두향이 퇴계에게 바친 30년의 나이 차를 극복한 풋풋한 사랑은, 당시로서는 ‘세기적인 사랑’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향은 관기였기 때문에 풍기군수로 전출한 퇴계를 따라 가지 못하고, 헤어지면서 퇴계에게 매화분(梅花盆) 하나를 선물로 드렸다 한다.
풍기군수에서 물러난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도 그가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21년 동안을 두향을 만나지 못한 체, 두향이 준 그 매화분(梅花盆)을 간직하면서, 돌보기를 두향을 대하듯 하였다는데, 퇴계가 죽기 전(71세)에 제자들에게 매화분에 물을 주도록 하고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두향은 21년 동안을 떨어져 살며 관기에서 벗어나 이제는 양민으로 살면서도, 퇴계 앞에 나타나지 않고 퇴계선생를 그리워하다가 그가 죽은 후에야 무덤으로 찾아가 통곡하였다는데, 71세의 노쇠한 주검이 묻힌 무덤 앞에는 41세의 농염(濃艶)한 여인이 머리를 풀고 통곡하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살아서는 못 만나고 죽어서야 만나게 된 슬픈 연인들이었다. 두향은 외로이 살았던 단양으로 돌아와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남한강의 어느 한적한 곳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한다. 마을 사람들이 두향의 시신을 건져 무덤을 만들었고, 그 후 퇴계의 후손들이 그녀의 무덤을 돌보고 제사까지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우리는 다시 음악정자에 모였는데 기온 관계로 다음 주부터 노래공부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다시 부곡정으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13회 남인(南人) 리정훈 선배가 오늘도 막걸리 두 병을 보내왔다. 고맙기 그지없는 선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