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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만난) 사람들.
(눅 24:13-35)
쿼바디스 영화를 보면 로마성에 기독교인들이 견딜 수 없는 박해를 당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잡혀 원형 극장에서 굶주린 사자들에게 찢겨져 순교를 당했습니다. 베드로는 숨어 다니다가 교인들의 권면으로 로마를 탈출합니다. 로마성을 막 빠져 나오는 데 예수님께서 도망하는 베드로를 만나 주셨지만 아무 말 없이 로마로 향하여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붙들고 ‘쿼바디스 도미니’,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예수님께서 ‘네가 버리고 나온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고자 하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제가 로마로 들어가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다시 로마로 들어가 잡혀 십자가에 달려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릴 때도 ‘내가 감히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바로 달릴 수 있느냐 십자가를 거꾸로 세우라’고 하여 거꾸로 달려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네로의 박해가 너무나도 잔인해서 기독교인들이 살아남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로마성을 탈출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후로 다시 로마로 들어가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전에는 죽음을 두려워 숨어 다녔고 로마를 탈출했던 비겁한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위하다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궤바디스’는 작가의 예술 작품이기 때문에 사실이라고는 말 할 수 없지만 기독교인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기독교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기독교인이 할 수 없습니다. 한 나사렛 청년의 사역으로 생긴 기독교가 아닙니다. 나사렛 예수가 3년 동안 병든 사람을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이적을 베풀었다고 기독교가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기독교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고, 성난 바다를 잠잠케 하셨다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고 기독교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부활 사건 때문에 기독교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셨으므로 기독교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믿음은 헛된 믿음이 될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믿음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뿐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5:17). 부활을 믿을 때 비로소 죄 사함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을 믿어야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믿음은 구원도 없는 죽은 믿음입니다. 부활이 없는 다른 종교는 구원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이 있기 때문에 구원이 있습니다. 만약 기독교도 부활이 없다면 구원없는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생명 있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건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건은 사실이요 진리일 뿐입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알아준다고 사실이요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사실은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건은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해를 한다고 해서 사건이 있고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사건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른다고 해서 사건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건은 믿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사건을 내가 확인하고 이해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느냐는 자기 생각으로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부활을 믿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이해가 되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는 것입니다. 믿을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셨다고 믿을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을 때 비로소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생명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음으로 나도 죽어도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을 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을 듣고 믿지 못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손에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으로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하셨습니다.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가 비로소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다”(요 20:28)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길로 도마는 인도로 내려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다가 순교를 당하였다고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믿지 못했을 때의 모습과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은 후에 모습을 봅시다. 이 말씀에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과 부활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 어떤가를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했을 때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이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글로바”(18)라고 하지만 한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을 잘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어디를 가든지 항상 같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 무덤에 장사되신 것까지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리가 죽은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새벽에 여자들에 무덤에 갔다가 죽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의 말을 듣고 함께 한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보았으나 예수를 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슬픈 빛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슬픈 빛으로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은 그동안 예수님을 따르고 믿었던 것에 대한 실망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어디까지 믿었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치는 말씀도 잘 듣고 배웠습니다. 이적을 베푸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도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신 예수님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더 이상 무덤에 머물러 있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이 두 제자는 죽은 예수님이 살아나시고 더 이상 무덤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것을 실망하고 슬픈 빛으로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두 사람의 믿음은 어디까지입니까? 죽은 예수님을 찾는 믿음입니다. 죽은 예수님이 무덤에 그대로 있어야 하는데 없어진 것을 실망하는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은 시체라도 무덤에 있는 것을 보아야 하는데 무덤을 찾아간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보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실망한 것입니다. 천사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말해 주었다고 하는데도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예수 믿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도 십자가에 죽음도 무덤에 장사되심도 믿지만 살아나신 예수님은 믿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니까 믿음 생활이 즐겁지 않습니다. 남들이 하니까 하는 것이지 자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끌려 다니는 신앙생활은 피곤합니다. 아내의 권유에 못이겨 교회에 나오고, 부모의 잔소리 듣지 않으려고 예배드리는 한 시간은 피곤하게 보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기쁨이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5)라고 하셨습니다.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여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풀어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열한 제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33). 부활을 믿음으로 죽었던 믿음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떠나던 예루살렘을 다시 돌아가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죽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 믿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 믿는 즐거움이 충만해 집니다. 피곤을 느끼지 못합니다. 핍박도 이길 수 있습니다. 실패를 해도 실망하지 않으며 병들어도 마음이 평안함을 느끼며 죽어도 소망이 있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살아나신 예수님을 두어 번 만났고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했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름 받기 전에 하던 고기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내려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신앙은 교회 다니기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고기 잡던 제자들에게 찾아 오셔서 만나주셨습니다. 더 이상 부활하신 예수님을 부인 할 수 없도록 부활에 대한 확신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된 베드로와 제자들은 변했습니다. 잡았던 고기도 배도 그물도 다 버리고 부활을 증거 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부활 사건을 믿을 때 믿음이 생기는 것이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증거 하므로 유대인들에게 잡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돌에 맞아도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6:15)고 했습니다. 부활을 믿는 스데반에게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돌 던지는 사람을 향하여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6)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소리쳐 돌을 던지는 자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자신을 향하여 돌질하는 자들도 용서할 수 있는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찾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하는 장면에 사울이라고 하는 바울의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전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증인들이 스데반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스데반의 옷을 지키고 있었고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습니다(8:1). 부활을 믿지 못할 때는 예수님을 대적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미워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로 사울은 완전히 변하였습니다. 부활을 믿음으로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을 믿음으로 이제 예수를 위해 일생을 바쳤으며 마지막에 생명까지 바쳤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죄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첫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첫 열매라는 말은 두 번째 세 번째,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을 믿는 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심 같이 부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부활은 하지만 심판받을 부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요 5:29).
예수님의 부활은 곧 부활을 믿는 자의 부활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진리요 생명입니다. 성도는 부활을 믿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가 되시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영광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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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