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미술 공부에 필요하여 쓴 글인데
세잔느의 미술세계는 지워버리고, 에밀 졸라와의 관계 부분만 올립니다.0
세잔느와 에밀 졸라
세잔느(1839-1906)는 1839년 1월 19일에 액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중학교에 다닐 때에 급우로 ‘에밀 졸라’를 만났다. 에밀 졸라는 파리 출신이었으나 토목기사인 아버지의 일자리를 따라 이곳에 왔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함께 여기에 정착하여 어렵게 살고 있었다. 졸라는 몸이 약하고, 말씨도 이곳 사람과 달라서 아이들로부터 왕따를 당하여 놀림을 받았다.
이럴 때는 세잔느가 나서서 졸라의 편을 들어 주었다. 세잔의 회고에 의하면 졸라의 편을 들다가 아이들한테 늘씬하게 얻어 맞은 일이 있었다. 저녁에 졸라의 어머니가 고마움의 표시로 사과를 한 바구니 선물로 보냈다. 이후로 사과는 졸라와의 우정의 표시가 되었다, 라고 하였다.
세잔느는 사과를 많이 그렸다. 곧 잘,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정복하겠어, 라고 말했다. 그는 사과로 파리뿐 아니고, 전 세계를 정복하였다.
상징주의 화가인 모리스 드니는 ‘역사상으로 유명한 사과가 세 개 있다. 하나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이다. 두 번 째는 뉴튼의 사과이고, 나머지 한 개는 세잔느의 사과이다.’라고 하였다. 더욱이 시공사에 펴낸 세잔의 전기는 책 이름이 ‘사과 하나로 시작한 현대 미술’이라고 하였다.
중학교 시절은 졸라, 세잔느와 건축가가 된 바이유는 삼총사처럼 친하게 어울려 다녔다. 졸라의 회고에 의하면 액상프로방스의 들녘과 산을 돌아다닌 이야기가 그리움에 젖어서 기술하고 있다.
졸라는 졸업을 앞두고 파리로 떠나갔다. 세잔느는 아버지의 강력한 열망을 이기지 못하여 지방에서 법과 대학에 지망하였다.(아버지는 모자 장수로 돈을 벌어서 은행가가 되었다. 가문과 신분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학과 공부가 재미없어 그림이나 그리면서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고민을 파리에 있는 졸라에게 편지로 하소했다. 졸라가 세잔느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림이야말로 자네가 유일하게 취미로 하고 있는 일이잖아. 이러한 자네의 소원과 행동에는 일체감이 보이지 않아. 내가 까놓고 말하더라도 화내지 않기 바라네. 내가 보기에는 자네는 강단이 없는 것 같아.’
싫어하는 법과 대학을 억지로 다니고 있는 세잔느에게 보낸 졸라의 편지였다. 어머니도 세잔의 편을 들어서 아버지를 설득하였다.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면서 ‘인간은 빵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예술의 재능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1861년에는 겨우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서 파리의 졸라를 찾아갔다. 화가의 길을 택하여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하고자 하였으나 시험에 낙방하였다. 이때 졸라는 인상파 화가들을 소개해 주었다. 이때 알게 된 피사로와는 평생 동안 우정을 나누었다. 시험에 낙방한 세잔느는 고향에 내려가서 아버지의 은행일을 도우면서 보냈다.
1862년에는 은행일을 그만 두고 다시 파리로 나와서 그림 공부를 하였다. (이때 아버지의 옆모습과 졸라의 초상화 등 초기 작품 몇 점이 있다. 레미제라블이 출판되었다.)
그는 살롱전에도 여러 번 출품하였으나 번번이 낙선하였다. 살롱전은 포기하고 졸라를 따라서 그가 잘 나가는 카페 게르브와에 나갔다. 여기서 마네, 피사로와 어울렸다. 이들은 살롱전을 반대하는 인상파 화가들이었다. 생활은 아버지가 보내준 돈으로 꾸려나갔다.
그는 파리에서 무명화가로 10년이나 세월을 흘러보냈다. 어느덧 30대가 되었다. 그는 살롱전에 거듭 낙선하자 살롱의 부당함에 분노하였다. 그러다가 포기하였다.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졸라에게 핀잔도 들었다. 자기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하면서 성격도 불안정해갔다.
그는 10년 세월이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동안에 그림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는 사이에 세잔느는 독선적이고, 고집이 센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누구든지 자기를 나쁘게 말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 인상주의자들의 모임에 참석은 해도 그들과 특별히 가까이 지내는 것도 아니었다. 모임에서는 예의없이 무뢰한처럼 놀아서 소개해준 졸라를 난처하게 한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1870년에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병역을 기피하려 남불의 조그만 해안마울 ****에 도피하여 숨어 지냈다. 그가 어떤 정치적 사상을 가졌는지는 모른다, 전해오는 기록이 전혀 없다. 다만 그림에 대한 열정은 뜨거워서 그림을 열심히 그린 것은 틀림없다. 어머니가 죽던 날의 오후에도 그림을 그리면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1870년은 그의 모델이었던 오르탕스 피케와 가정을 이룬다.(정식 결혼은 않고 동거를 하면서 아버지에게는 속였다. 나중에 아버지가 알고 대노하여 생활비를 줄여 버렸다. 이때 돈이 궁하면 졸라를 찾아갔고, 졸라는 이들의 생활비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72년에는 아들 폴이 태어났다.
그는 자기 부인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이때부터 그의 그림에 여자가 등장한다고 하였다. 그림을 보면 얼굴이 둥글고 갸름하며, 후덕하게 보인다. (70년은 졸라도 세잔느의 모델을 맞아 결혼하였다.) 그는 인물을 세밀하게 그리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자세를 재정비하여(연출하여) 그렸다.
세잔느는 인상주의자들의 그림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순간의 인상보다 기본적인 구조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는 배경, 시간, 계절조차도 명백하게 드러내는 법이 없다. 그의 관심은 회화의 균형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자연적인 형태의 외관조차도 왜곡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3차원의 표현을 원근법이나 단축법이 아니고, 미묘한 색조의 변화로 표현하려 하였다. 그는 회화적 구조를 완성하기 위해서 해부학적 구조의 정확성을 포기하였다. 단순화된 인물의 형태는 나무 줄기와 반향하고 있다.(대수욕도에서) 세잔느는 '나는 자연을 재생하지 않고 재현한다.'라고 말하였다 자연의 객관적 실제, 즉 물자체(物自體)를 그렸다.
정물화에서 그는 한 화면에 여러 개의 시점을 설정하여 그렸다. 1시점 그림은 3차원을 2차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그리는 행위라고 하였다. 그는 옆에서 본 물체와 위에서 본 물체를 한 화면에 그렸다. 다만 조화를 이루도록 그렸다.
그는 사과를 그리면서 형태를 실제와 다르게 그렸다. 즉 심하게 왜곡시켜서 그렸다. 그러나 완성된 그림을 보면 전체가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문제점이 느껴지지 않는다.
서양화에서 1시점의 전통은 르네상스 이래로 꾸준히 지켜져 왔다. 그것을 무시해도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사실에 젊은 화가들은 그를 아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의 친구 ‘에밀 졸라’는 그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에밀 졸라는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도 나중에는 그들의 그림을 좋게 보지 않았다. 1886년에 ‘작품’이라는 소설을 발간하면서 주인공을 실패한 화가로 설정하였다. 그 화가가 세잔느가 모델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이 나올 적마다 세잔느에게 선물로 한 권씩 기증하였다. 이번에도 책을 보냈다. 세잔느는 졸라에게 아주 짧은 편지를 한 통 보냈다.
‘친애하는 에밀에게
친절하게 보내준 ‘작품’을 지금 막 받았네. 루공 마카르 총서의 저자가 잊지 않고 기억해 준 것에 감사드리네. 그리고 지난 세월을 추억하면서 저자의 손을 잡고 악수를 청하는 바이네‘
졸라의 추종자들은 주인공이 세잔느가 아니다라고 항변하였지만 이들은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았다. 졸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세잔느는 그때서야 땅을 치고 통곡하였다고 한다.
세잔느는 동료도 없었고, 제자도 없었다. 저항적이고, 반항적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외로웠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오직 그림에만 자신을 쏟아 부으면서 살다간 화가이다. 이런 성격이 졸라와 절교를 한 이유였을 것이다. 1906년 10월 15일에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졸도를 하였다. 세탁물을 싣고 오는 마차에 실려 온 그는 1주일 뒤에 이 세상을 떠나갔다.
첫댓글 비현실적인 색감에 각각 다른 시점. 입체파(큐비즘) 화가 브라크와 피카소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이죠.
저도 좀 열심히 그려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그려야 하는군요.
카페글을 읽으면서 자극을 받습니다.어제 대봉도서관에 가서 에밀졸라의 작품을 대출했습니다. 세잔과 졸라의 관계를 소설을 통해서 엿볼 수 있을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