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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너희는 식사와 음료의 단식재와 절제로 너희 육신을 제어하여라. [3,1]
공동 식탁에 앉으면 일어날 때까지 관례대로 독서하는 내용을 소음을 내거나 떠들지 말고 귀담아 들을지니, 너희 입으로 음식만을 먹지 말고 또한 귀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것이다. [3,2]
☕ 수도자들은 식사때 육신의 양식뿐만 아니라 영혼의 양식도 함께 먹었다.
과거의 생활 습성으로 인해 허약한 자들이 식사에서 달리 대우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와는 다른 생활 습성으로도 더 건강한 자들은 이를 불쾌히 여기거나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건강한 자들은 허약한 자들이 먹는 것을 먹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보다 건강한 것을 기뻐해야 한다. [3,3]
☕ 건강한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있겠는가? 아파봐야 건강의 소중함을 안다.
요구 사항이 적을수록 그만큼 하느님의 종으로서 합당한 자이다. [3,5]
☕ 주어진 것에 만족함이 수도자의 삶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부유하고 소비 지향적인 세계다. 현시대의 이러한 면모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유혹 요인이 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과잉 축적, 과잉 탐욕, 그리고 돈과 재물에 대한 욕망 등으로 그들 삶의 올가미에 얽매여 있어 결국 하느님과 그들의 지상 삶의 참다운 목표를 점점 망각해 가고 있다. (94쪽)
☕ 우리는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탐욕을 향해 질주하는, 돈이 제일의 가치인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자기 극복, 육신의 극기, 감각과 감정의 절제 등은 바람직한 크리스천 생활에 필요 불가결한 요소들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었을 때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95쪽)
아우구스티누스가 요구하는 자기 극복과 수덕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는 "육신을 제어하여라”고 말한다. 이는 육신을 절제하라는 것이지, 육신의 충동과 감정들을 "말살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는 이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말(馬)과 기수의 비유를 사용한다: “내 육신(내 몸)은 내가 타고 있는 말이다. … 내가 단식하지 않고서도 육신의 높은 정신으로 하여금 내 의지를 따르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인가?”(『단식의 유용성』 3,3). 그는 육신에 대해 적개심을 가진 마니교도들의 태도를 거듭 배척한다. 그들은 "건전한 규율로 육신을 다스리는 대신에 마치 원수인 양 박해하는 자들이다”(『절제』 12,26).
☕ 육신은 섬멸해야 할 적이 아니다. 단지 절제의 대상일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는 그리스도적 모든 수덕의 목적은, 그 능력과 충동을 포함한 인간 본성 안에 질서를 주입시켜 본성으로 하여금 모든 선한 행위를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려는 의향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덕과 극기는 적극적인 목적을 갖게 되니, 즉 원죄의 결과로 흐트러진 질서를 신자들의 마음 안에 올바로 복원시키고 굳건히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96쪽)
☕ 수덕과 극기는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질서있게 다스리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종교적 이유로 하는 그리스도인의 단식과 수덕적 극기는 더 뜻있다고 확신한다: “육신의 기쁨을 끊어 버림은 영혼의 기쁨을 가져온다”(『단식의 유용성』 5,6)
“자네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 우리가 아주 쉽게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그분께서 우리에게 지라고 명하신 십자가는 다름 아닌 죽을 우리의 육신이네. … 자네는 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고, 하느님 두려워함의 못으로 뚫려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고삐 풀린 듯 제멋대로 날뛰는 지체들이 반항하여 자네는 십자가를 질 수 없게 될 것이네. …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라 5,24)라고 사도께서 말씀하셨네”(『서간』 243,11).
창조주께서는 당신 지혜를 통해 인간의 먹고 마심을 감각적인 만족의 원천으로 삼으셨다. 그것들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에 맞게 적당한 정도로 이루어질 때, 용납되며 선한 것이 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먹고 마심에 있어서 지나치게 탐식하거나 지나치게 까다롭게 굴거나 또는 절제가 없다면 올바른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다. (98쪽)
☕ 먹고 마심에도 질서가 있다. 그 질서를 깨뜨리면 문제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신에 대해 이렇게 탄식한다: "주님, 그 누가 이 일에 있어 약간이나마 필요의 한계를 넘지 아니하는 자 있나이까?" 이어서 그는 “나는 그렇지 못하옵니다.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겸손되이 자인(自認)한다(『고백록』 10,31,47).
☕ 육신의 절제는 어려운 일이다. 다윗도, 솔로몬도, 아우구스티누스도 넘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적 수덕의 정신이 포기의 숫자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실천하는 항구함과 성실성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본다. (100쪽)
☕ 그리스도의 삶의 가치는 포기가 아니라 적극적인 실천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 어떠한 무질서를 용납해서도 안 되며 우리의 욕구가 우리를 좌우하게끔 내버려 두어서도 안 된다. 이성과 의지가 육신의 욕구를 항상 감시하고 질서 속에 보존시켜야 한다. (100쪽)
☕ 절제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사는 삶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직자 수도원’의 형제들에게 "관례로 되어 있는 금지 조항이 없어지지 않는 한”(『전기』 27;『설교』 356,13) 수도원 밖에서 식사하거나, 만찬에 참석하는 것을 금하였다. 주교가 되고 나서도 그는 이 문제에 관하여 자신과 어떻게 싸워야 했는지를 『고백록』에서 전하고 있는데, 이유인즉 그가 예전의 풍성하고 지나칠 정도로 호화로운 식사에 습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I나는 이런 유혹들을 물리치려고 날마다 힘겹게 노력하나이다","그러므로 나는 식욕(음식과 음료)의 고삐를 죄었다 늦추었다 하며 적당히 조절해야 되나이다"(『고백록』 10,31, 44와 47)(101쪽)
아구구스티누스는, 어느 정도의 극기와 자기 훈련 없이는 어떠한 수도생활도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수덕생활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수단에 불과해야 한다. (101쪽)
수덕의 궁극적이고 주된 목표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수덕 행위의 가치는 외적 실천에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행하는 마음 자세에서 매겨지는 것이다. 열심한 수덕이 교만하고 사랑 없는 마음의 가면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의 단식으로 죄를 자초하는 자들은 사탄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기쁘게 해 준다”(『서간』 36,9,11). (102쪽)
☕ 수덕 생활의 목적은 외적 실천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다.
“나는 어떤 형제들의 비타협적인 옹고집 때문에 마음 약한 사람들 안에 큰 불안을 야기시켰던 사실을 슬프게 보아 왔다”(『서간』 54,2,3). 진정한 수덕은 사랑을 보존하도록 하며 연약한 형제자매들을 염려한다. (102쪽)
☕ 자기 생각만 주장하는 사람은 사랑이란 말에 어울리지 않는다.
‘성직자 수도원’에서는 식사 시간에 독서와 대화를 병행했던 것 같다. 포시디우스에 의하면, “주교는 먹고 마시는 것보다 독서와 식탁에서의 대화를 더욱 즐겨하셨다”(『전기』 22,6). 그러나 형제적 사랑을 해치는 대화는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를 병들게 하는 나쁜 습성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는 식탁에 '부재자를 비평하는 자는 이 식탁에 부당한 자임을 알 것이다’라는 글을 새겨 넣게 하였다". (103쪽)
☕ 험담은 형제적 사랑을 해치는 행위다.
처음부터 그는 허약한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하라고 한다. 그가 심중에 둔 사람은 실제로 아픈 사람들이 아니라 건강 상태가 늘 취약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 나은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좋고 또 그래야 한다. (104쪽)
☕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사람에 대한 배려 또한 사랑이다.
히포 주교관 내의 수도원에서는 병자와 회복기의 형제들이 공동 식탁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포시디우스가 우리에게 분명히 전해 주고 있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들에게 이른 아침에 영양 보충하도록 허락했으며, 이런 목적으로 일반 사람들이 그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가져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설교』 356,13 참조).
우리는 누군가 필요에 대한 배려로 무엇을 받는 것을 보더라도 덩달아 그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더 많은 요구 사항을 갖고 있는 형제들에 대해 경솔한 판단이나 냉혹한 비판을 삼가야 한다. (105쪽)
☕ 사랑 없는 비판은 사탄의 칼날이다.
자기 수준에 따라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경향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른 모든 이도 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가 갖지 않고도 지낼 수 있는 것을 다른 이도 똑같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가운데서 건강이 좋거나 아직 젊기 때문에 격한 노동과 궁핍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특별히 이러한 유혹을 받을 염려가 있다. 이런 사람들은 예외적인 것들을 요청해야 하는 사람들보다 수덕과 덕행에서 더 훌륭하고 앞서 있다는 생각에 빠져들기 쉽다. 그러나 그들의 ‘덕행’이란, 예수께서 성전에서 기도하던 저 바리사이에 대한 비유에서 꾸짖으셨던 그 위선과 매우 비슷하다. 하느님은 고행의 숫자나 검소한 생활 자체를 보고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순수한 마음과 사랑의 깊이를 보고 판단하신다. (106쪽)
☕ 하느님은 외적인 실적이 아니라 마음을 보신다.
그는 우리가 차원 높은 가치관을 가지고 지상 생활의 주변 여건들을 보고 판단하기를 바란다. 세상은 많은 재물을 갖고 있는 사람을 부자로 여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많은 소지품 없이도 지낼 수 있다면, 우리를 부자라고 부른다. 세상은 자기에게 필요한 음식과 옷보다 훨씬 더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을 행복한 자로 여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적은 음식과 의복에 만족해한다면, 우리를 행복한 사람으로 여긴다. (107쪽)
☕ 진정한 부자란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세속적인 눈으로 보아서는, 어떤 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재물을 갖고 있을 때 부러움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눈으로는 그것은 연민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107쪽)
☕ 재물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젊은 동료 수도자 레투스가 성소에 대해 갈등을 느끼고 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에게 한 충고를 우리는 마음 깊이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 자네 생각의 초점을 맞추게. 전에는 지상 아담의 모상을 갖고 있었지만 이제는 자네 안에 이 천상 아담의 모상을 간직하도록 하게”(『서간』 243,10) (107-8쪽)
☕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 천상 아담인 주님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
너희 복장을 유별나게 하지 말지니, 옷으로써 호감을 사려 하지 말고 생활로써 남의 마음에 들게 할 것이다. [4,1]
☕ 수도자는 겉이 아니라 속으로 사는 사람이다.
걷거나 서 있거나 모든 거동에 있어서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어떠한 것도 하지 말고 너희의 거룩한 신분에 맞게 처신할 것이다. [4,3]
만약 너희 눈길이 여인들 중의 어떤 이에게 가게 되더라도 그 시선을 고정시키지 말 것이다. 너희가 외출할 때 여자들을 보는 것을 금하지는 않지만,그들을 탐하거나 그들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은 죄짓는 것이다. 만짐으로나 감정으로뿐 아니라 봄으로도 욕정이 일어나며 또 여자들에게 욕정을 일으켜 주기도 한다. 만일 너희가 부정한 눈길을 하고 있다면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지 말지니, 부정한 눈길은 부정한 마음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4,4]
거룩한 사람(수도자)은 그분을 상심케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불의하게 여자의 호감을 얻기를 탐하지 말 것이다. 그분이 만사를 보고 계시다는 점을 명심하여 여자를 불순하게 쳐다보기를 탐하지 말 것이다. 사실 성경은 이 점에 있어서 하느님께 가져야 할 두려움을 이렇게 권하고 있다: “(정욕의) 눈길은 주님께 혐오를 일으킨다"(잠언 27,20: 칠십인역본). [4,5]
☕ 성직자, 수도자는 늘 여자를 경계해야 한다.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다.
그가 비록 동정을 "더 높은 선”으로 보고 있지만, 동정을 높이 평가한다 해서 어떠한 의미에서도 결혼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러한 생활을 실제로 선택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더 낮은 것을 경멸하지 않으면서도 더 높은 은사들을 얻도록 해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한다. 왜냐하면 “순결한 독신생활의 고원한 축복은 결혼 역시 하나의 축복임을 인정한다 해서 결코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거룩한 동정성』 18,18). (112쪽)
☕ 결혼 생활 역시 거룩한 성소다.
규칙서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상생활에서 수도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몇 가지 충고를 한다. 우리의 외적 습성 ― 외모와 복장 같은 것 ― 은 검소하고 유별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너희 복장을 유별나게 하지 말지니, 옷으로써 호감을 사려 하지 말고 생활로써 남의 마음에 들게 할 것이다"(규칙 4,1).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외모에 지나치게 신경 쓰기 쉽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수도적 청빈 때문만이 아니라 영혼의 선익을 위해서도 단순한 복장을 하도록 규정한다. 단순함과 진실은 서로 통한다. 우리는 때로 텅 빈 마음과 참다운 그리스도적 덕행의 부족함을 감추려고 사치스러운 옷과 장신구를 걸치는 사람들을 만난다. 지나치게 치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실제 그들 자신보다 더 중요하고 낫게 보이려는 경향이 있다. (113-4쪽)
☕ 진실은 단순함에 있다. 사치로 장식한 성직자를 성직자라 할 수 있을까?
“걷거나 서 있거나 모든 거동에 있어서" 외적 태도까지도 우리의 "거룩한 신분”과 어울려야 하며, 잘 정돈된 내면을 반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부름받았으며, 아우구스티누스가 바오로 사도의 말로써 이를 생생히 표현하듯이, 우리는 “착한 수도생활에서 오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자”(규칙 8,1) 되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이다. (115쪽)
☕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으로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람이다.
이성(異性)을 보는 것이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음탕한 욕정의 눈길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록하고 있다. 부정(不貞)은 죄스런 행위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그릇된 개념을 그는 경고한다. 사악한 행위는 사실 마지막 결과에 불과하고 그 뿌리는 더 깊다. "부정한 눈길은 부정한 마음의 표시"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정결한 마음은 정결을 보존하는데 필수 요건이라는 확신을 갖도록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 보시기에 불결한 마음이 아니더라도 육체는 격정으로 괴로워할 수 있듯이, 그 반대로 육체는 깨끗한 상태일지는 모르지만 마음은 부정함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16쪽)
성경은 외톨이들을 경고하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를 일으켜 줄 다른 사람이 없다"(코헬 4,10). 우리가 수도 공동체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116쪽)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심을 우리 앞에 생생히 제시한다. 그는 한 설교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발전시킨다: “여러분이 외출할 때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돌아올 때에도 그분은 여러분을 보고 계시고, 등불이 켜져 있을 때에도 보고 계시고, 등불이 꺼졌을 때에도 보고계십니다. 여러분이 잠자리에 들 때에도 그분은 여러분을 보고 계시고, 여러분이 잠심할 때에도 보고 계십니다. 그분을 두려워하십시오. 그분의 관심은 여러분을 그분 앞에 항상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여러분을 정결하게 지켜 줄 것입니다”(『설교』 132,2,2). (117쪽)
☕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금욕의 짐’을 그리스도의 짐으로 돌려 놓을 수 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 친히 이 짐을 지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고 두려워 마라. 그분은 피하지 않으시고 너를 떨어지게 하지 않을 것이다”(『고백록』 8,11,27). (118쪽)
☕ 내 짐을 하느님께 맡겨 드릴 때 내 짐은 하느님의 짐이 된다.
교만한 자들이 그분께 조롱하는 바로 그것이 그분 안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의 눈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상처들, 부활하신 주님께 남아 있는 흔적들, 운명하시면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응시하십시오. 이것들은 신자들의 보화이며 우리 구원을 위한 대가들입니다.(『거룩한 동정성』 54,55-57). (119쪽)
☕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기에 구원의 보화다.
여러분 때문에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신 그분은 여러분의 마음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기를 원하십니다.(『거룩한 동정성』 54,55-57). (119쪽)
너희 형제를 지적하여 고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멸망하게 내버려 둔다면, 너희도 절대로 무죄하지 않다. 만일 너희 형제가 몸에 상처를 입었는데도 그가 치료받기를 두려워하여 숨기려 한다면 너희가 침묵하는 것은 무자비한 짓인 반면, 이를 지적해 주는 것이 오히려 사랑의 행위가 아니겠는가? 하물며 그 마음이 썩어서 더 악화되지 않도록 알리는 것이 얼마나 더 당연한 처사이겠는가! [4,8]
☕ 형제가 잘못하면 고치도록 충고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 사실을 부인할 경우, 지적당하고도 고치기를 게을리하면, 확증을 얻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알리기 전에 먼저 원장에게 보고해야 한다. 이는 그가 은밀히 교정을 받음으로써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도 그가 부인하면, 그때에는 그가 모르게 다른 이들을 이용할 것이니, 한 증인이 꾸짖을 것이 아니라 모든 이 앞에서 두세 증인에 의해 그의 질못이 확증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의 잘못이 확증되면 그는 원장이나 수도원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사제의 판단에 따라 엄한 벌을 받아 고치게 할 것이다. 만일 그가 벌받기를 거부하면, 비록 스스로 떠나지 않더라도 그를 너희 공동체로부터 쫓아낼 것이다. 이는 가혹한 처사가 아니라 그들의 나쁜 표양으로 인해 많은 이를 잃지 않기 위한 사랑의 처사이다. [4,9]
내가 금지된 시선을 들어 말한 이 모든 사항은, 다른 죄들을 발견하고 금지시키고, 알리고 확증하고 벌주는 데 있어서도 정확히 그리고 충실히 준수하되, 사람은 사랑하고 그의 악습은 미워하는 마음으로 할 것이다. [4,10]
☕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따라서 예수께서는 교정을 사랑의 행위와 의무로 보시는 것이다. 즉, 교정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서로에 대한 책임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실 교회는 초창기부터 적절한 교정을 영적 자선 행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왔다. 토마스 성인은 그것을 형제자매들에게 베푸는 ‘영적 자선’이라고 부른다. 윤리학자들은 영적 자선 행위가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병자들을 돌보는 일과 같은 육적 인 자선 행위보다 하느님 눈에 더 가치 있다고 확신한다. (123쪽)
☕ 잘못된 길로 들어선 이를 바로 이끄는 것은 영적인 자선의 행위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즉 성령께서 거처하시는 사랑의 공동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형제(자매)애의 질긴 끈으로 서로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모두는 서로에 대해 그리고 신비체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123쪽)
☕ 하나인 교회는 또한 하나의 운명 공동체다.
교정은 사랑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형제(자매)적 충고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 교정은 요구라기보다는 하나의 요청이며, 문제가 아무리 심각해도 상대방을 부끄럽게 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하고 도와주도록 힘써야 한다. 교정을 통해 하느님 자비가 잘 드러나야 한다. (123-4쪽)
수도원에서는 아무도 카인이 했던 것처럼,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라는 반문으로 변명할 수 없다. 그렇다. 우리는 형제자매들을 하느님 앞에서 책임져야 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부담스러운 감독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랑의 관심을 보인다는 뜻이다. (124쪽)
☕ 사랑의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으로 책임을 지는 곳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 공동체가 표방하는 신비, 즉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그리고 공동체 안에 친히 거처하신다는 신비를 우리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이 책임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제시한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사랑으로 염려할 때, 서로에게 필요한 충고의 말을 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그분의 자리에서 거룩한 봉사를 하는 것이다. (124-5쪽)
신중하며 책임감 있는 교정은 수도 공동체에 유익할 뿐 아니라 필수적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확신하였다. 잘못한 형제들은 “시작된 그 결점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빨리 고쳐지도록” 교정이 필요하다. 곁들여, 교정은 “그들의 나쁜 표양으로 인해 많은 이를 잃지” 않게 보장해 주기 때문에 공동체도 해악으로부터 보호받게 되는 것이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코린 12,26)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많은 사람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수도원에 특별히 적용된다. (125쪽)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이에게 충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거북스러운지 알았지만, 그것을 회피해서는 안 될 의무라 여겼다. (125쪽)
☕ 충고는 어렵지만 공동체를 위해서는 회피해서는 안 될 의무이기도 하다.
그는 교정을 양심의 의무라고 까지 한다: “너희 형제를 지적하여 고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멸망하게 내버려 둔다면, 너희도 절대로 무죄하지 않다.” 지적해 주어야 할 때 침묵하는 사람들은 그 게으름 때문에 같이 죄짓게 되며 다른 이를 잃게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설교에서, “규율을 부과하지 않는 자는 잔인한 자”라고 말한다(『설교』 13,8). (126쪽)
“사랑하면서도 엄격한 것이 관대하여 해를 자초하는 것보다 더 낫다”(『서간』 93,4) 그는 그 의미를 비유로 밝혀 준다: 누군가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면서도 치료받기가 무서워 그 상처를 숨기고 덮어 두고 있다고 하자. 우리가 그의 상처를 찾아내어 그의 목숨을 구해 준다면 아무도 우리를 무자비하다고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자비를 행한 것이다. 하물며 영적인 상처를 찾아내어 낫게 하는 것은 결코 무자비한 사람의 처사가 아니다. (126쪽)
다른 이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 사랑으로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참다운 그리스도적 사랑에서 나온 봉사라 할 것이다. 고칠 수 없는 사람으로 판명된 사람을 공동체에서 내보내더라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이 매정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사랑의 정신에서 취해진 조처라고 믿는다. (126쪽)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도자가 자기에게 내린 벌을 받지 않으려 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런 자들은 겸손이 부족할 뿐 아니라 순종하지 않고 교정 불가능한 자로 자신을 드러내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런 자를 수도 공동체에서 내쫓으라고 말하는 것은 납득할 만하다. 앞서 인용한 마태오 복음서의 구절에서 예수께서 친히 교정 불가능한 자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피하라고 명하셨다. “그들의 나쁜 표양으로 인해 많은 이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128쪽)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것이 “사람은 사랑하고 그의 악습은 미워”하라는 정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견책하고 경고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을 항상 의식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떤 기회에 말하였듯이, 이로써 “자비가 … 책망이나 견책을 위한 길을 열어 줄 것이다"(『산상수훈에 대한 설교』 2,19,64). (129쪽)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반성해 보고 하느님 앞에서 “저는 사랑의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있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교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근본 정신으로 삼는다. 사랑, 사랑만 있다면, 심한 말을 하는 것이 용납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 그러면 입버릇 사나운 말일지라도 실제로는 그렇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갈라티아서 주석』57). 그러므로 다른 이를 교정하는 의무는 공동체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우리에게 계속 생생히 일깨워 줄 뿐 아니라 또한 우리 자신을 반성하도록 계속 고무시켜 줄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남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보면서도 우리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마태 7,3 참조). (129쪽)
견책을 내적 평화와 기쁨으로 받아들일 만큼 완전한 사람이 극히 적다는 사실을 그는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견책당하는 순간에 기분 나빠하며 반항하고 따지려 하는 사람들이 종종,아니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후에 하느님과 단둘이 있게 될 때 이 점을 반성하게 됩니다. 그들은 견책받은 일 때문에 사람들 눈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잘못을 고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언짢게 해 드린 것을 더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합당하게 견책받은 그 행위를 더 이상 저지르지 않게 됩니다. 사실 자신의 죄에 대한 미움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자기 죄의 원수처럼 보이던 형제나 자매들에 대한 사랑이 커질 것입니다”(『서간』 210,2). (130쪽)
☕ 악습은 방치하지 말고 없애도록 노력해야 한다.
첫댓글 "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