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평화촌(平化村) 시대
(1) 평화촌으로 이주한 이유
판사공의 후예들은 장원봉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유족의 기둥은 아들 통선랑공 덕룡(悳龍)이었을 것이다. 판사공은 왕조실록에는 왕의 비서실장인 별시위패두 1412년까지 역임하고 경상도 경차관도 했다. 그러니 일국의 시중까지 배출한 후손으로서 전통을 이어 가야할 통선랑공으로서는 이주처를 놓고 많은 고민 끝에 평화촌을 선택했을 것이다.
평화는 장원봉의 남쪽에 있다. 직선거리로는 채 10리가 되지 않을 위치다. 원래 평화촌은 고려시대(918~1392) 억불산(億佛山) 봉수대를 관리하던 병정들이 거주하는 정화소(丁火所)의 소재지다. 그런데 고려 말 왜구토벌에 공을 세운 신경원(申敬源)이 조정으로부터 하사(下賜)받은 사전(賜田)이 있었다. 그의 손자 신원수(申元壽)가 정착하면서 평산인(平山人)의 화속지(化屬地)라 하여 마을 이름을 평화촌(平化村)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왜 이곳 평화를 선택했을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신(申)씨들과 인척관계를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기록은 아무 것도 없다. 그 다음으로 고려할 수 있는 이유는 원거주지인 장원봉과 지근거리에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기 정도면 조상들의 구거(舊居)를 건너다보면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선택한 보금자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장원봉 밑 예양강 건너편의 경작지다. 삶의 수단이 농지에 있었던 당시로서는 소유한 경지를 한꺼번에 팔고 외딴 곳으로 가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작지가 주로 평화촌쪽에 있어서 큰 무리 없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이 곧 평화촌으로 옮기는 원인이 될 수 있었다. 다른 여러 이유 가운데 삶의 수단인 농경지가 보금자리 선택의 중요한 변수였을 것이다.
(2) 평화촌은 제2의 보금자리
통선랑공(通善郞公)은 우여곡절 끝에 장원봉에서 평화촌 다전등(茶田嶝)으로 거처를 옮겼을 것이다. 그 시기는 아무래도 장흥도호부가 수령현으로 치소를 이전한 1414년(태종 14년 甲午) 안팎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부터 제2의 보금자리인 평화촌 시대를 열어갔을 것이다. 비록 도호부의 치소 소재지를 피해 왔지만 지방 관료들의 감시와 핍박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 단적인 사례가 후손들이 출사(出仕)를 단념한 점이다. 통선랑공은 슬하에 자온(自溫)·자량(自良)·자공(自恭)·자검(自儉) 4형제를 둔다. 아마 아들은 장원봉 집에서 출생해 상당히 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자온(自溫)은 종형(宗亨)·석중(碩重), 자량(自良)은 종복(宗復)·종로(宗魯) 두 아들에 종복은 유형(由亨)·유정(由貞), 종로는 용(庸) 등 손자를, 자공(自恭)은 아들 종립(宗立)이 서(瑞)와 돈(頓) 등 손자를 두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물론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 이유는 조정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응시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 않아서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많은 후손들이 출사를 단념한 것은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친위혁명 음모자 후손에 대해 3대에 걸쳐 금고령을 내렸지만 얼마가지 않아 풀어줬으나 위씨들은 출사를 않은 집안의 전통을 고집한다.
판사공의 현손인 습독공 휘 유형은 조선이 건국한지 한 세기에 가깝거나 넘을 때의 인물이다. 그는 다산등에 산정(山亭)을 짓고 주변에 동백과 대를 심어 정자를 가리며 살았다. 건너편에 있는 치소에서 보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사후에는 묘소의 좌향(坐向)이 유향(酉向)으로 강진 화방산(華坊山)이 정봉이나 제대로 분간하기 어렵다. 묘소의 방향도 식별하기 어렵게 한 것은 지방 관료들의 핍박이 심해서 자기방어를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습독공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과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1491~1554)과 같은 중앙의 인물들과 산정에서 수창했다. 그들과 각별한 사이였다면 학문이나 재력도 대단했을 것이다. 산에 정자를 짓고 선비들과 수창한 것은 보통사람들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관료들이 고깝게 여기는 처지에 반정부적 성향의 인물들과 가깝게 지냈으니 말이다. 지방관청의 곱지 않은 시선을 외면하고 그들과 교류한 것은 역으로 보면 힘이 있다는 얘기도 된다.
아쉬운 것은 이런 사실을 담은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이다. 최소한 생졸년도 알 수 없으니 딱한 노릇이다. 남효온과 신잠의 나이 차가 만 37세이니 습독공은 어느 정도의 나이였을까. 두 사람과 격의 없이 수창했다면 어울릴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 신잠보다는 많고 남효온보다는 적었다고 추정된다. 추강과는 1480년대 전후, 영천자와는 1521년대에 종유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추강 남효온이 장흥에 와서 습독공과 종유했던 시기는 그의 나이 30세쯤인 1480년 앞뒤의 시기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습독공과는 연치가 25세 전후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영천자 신잠과는 1521년에 장흥에 귀양 왔으니 그의 나이가 30세 때이다. 그러므로 습독공은 환갑을 넘긴 노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30년 이상의 나이차가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근거는 아들 휘 진현(晉賢)의 생년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셋째 아들인 강릉참봉공은 1482년생이다. 그때는 조혼이라서 10대 후반에 장가를 들어 첫 아들인 진보(晉寶) 둘째 진수(晉秀) 등 아들의 나이를 감안하면 그런 추정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습독공의 졸년은 1530년대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니 습독공과 남추강과 영천자와의 종유는 연치를 뛰어넘은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잘보고 공부하고 갑니다.
위문의 성지가 있는 회주사의 역사적 전통이 깊습니다. 위문의 정착경로를 밝힌 소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