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사벳 -
☆ 2013년 가해 12월21일 (자) 대림 제3주간 토요일
[청주] 행복하십시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아가 2, 8 - 14(또는 스바 3,14-18ㄱ)
† 복음 : 루카 1, 39 - 45
★ 아가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연인으로 묘사한 구약
성경이다. 여인은 연인이 다가오는 소리에 설레며, 지난날 자신에게
와서 사랑을 고백했던 순간을 떠올린다(제1독서).
★ 마리아는 아기를 잉태하자 기쁨에 넘쳐 친척 엘리사벳을 서둘러
찾아간다. 성령으로 가득 찬 두 여인은 서로 축복하며 주님을
찬미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느 수녀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 수녀님의 가정은
오래된 천주교 집안이었는데, 아침이면 언제나 어머니가 그녀 방에
들어와서 깨우며 이렇게 인사하였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체칠리아와
함께!” 그러면 그녀는 “주님께서 엄마와 함께!” 하고 대답하며
일어났답니다. 수녀님은 그 경험을 떠올리면서, 이 인사말이 수도
생활을 하는 데에 크나큰 위로와 용기를 준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인사말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사벳이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우리 삶에는 같은 인사말
이라도 겉치레처럼 느껴지는 말이 있고, 체칠리아 수녀님의 체험처럼
기쁨과 힘을 주는 인사말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인사말을 듣고 온몸으로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모님의 인사말에 주님의 현존이 강하게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가운데 아기 예수님을 모시게 되었기에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기쁨을 자신의 인사말에 담을 수 있었고, 그것이
엘리사벳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인사말에는 처녀가
아기를 가진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요셉에게서 쫓겨날 것이라는
걱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인사말은 환희의 외침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사말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사말에다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담으면 상대편에게 더욱 큰 기쁨이
전달될 것입니다.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미사를 통하여 우리
몸에 모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행복하십시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21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루카 1,39-45
행복하십시오.
행복은 무엇인가? 만족한 삶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추구하는 방법과 구체적으로 느끼는 형태가 다양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만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유하는 것에서, 어떤
이는 지배하는 것에서, 어떤 사람은 베푸는 사랑에서 만족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말하였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루카 복음11장 27-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결국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세상에서 행복을 찾지만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행복이요,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실행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업에 성공하고 재물도 명예도 얻었고 좋은 집에 좋은 차를 가지고
있으며 귀한 자녀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학생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해도 거기에서 행복이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통령이 되어도,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고 할지라도 때가되면 내려 놓아야 합니다.
인생 여정에 있어서 예기치 않는 많은 일들을 접하게 되고 그 안에서
이유도 모르는 가운데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또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성공과 실패 안에서도 그분이 역사하시고 섭리해 주심을 알기에
행복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알맞은 종류의 행복을 주십니다.
시련과 고난을 겪기 전이나 겪는 중이나 혹은 겪고 난 뒤에 반드시
주십니다”(성 알로이시오 슈월츠).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의 것을 추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행복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소유와 지배를 하는 욕구에서 벗어나 천상을 갈망하며 베푸는 삶
안에서 행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베푸는 삶, 사랑의 삶에서 만족하는
삶은 ‘약속에 충실한 주님을 믿는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 안에서 행복에 행복을 더하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어떤 학생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이번 시험을 망쳤다면서 큰 일
났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 학생에게 “다음 시험 잘 보면 되지 뭐.”
라면서 좀 더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학생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표정을 멈추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신부님, 성적이 안 좋으면 취직이 안 되잖아요. 또 취직을 못하면
결혼도 하지 못하고. 신부님, 저 그럴 바에는 아예 신학교나 가서
신부나 될까요?”
미래에 대해서 미리 걱정하는 학생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공부가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지금 공부를 못하면 미래도 없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즉, 공부를 못하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장밋빛 미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때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서
매스컴에서 사회의 커다란 문제점으로 부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요?
제 친구들을 봐도 학창 시절에 공부 잘 했던 아이가 꼭 사회에서
일등 구성원이 되는 것은 아니더군요. 오히려 공부는 잘 못했어도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고 또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친구들이 지금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저도 그렇게 공부를 잘 하지는 못했지요. 공부보다는 노는 것을 더욱
더 좋아했던 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사제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당시에는 공부가 전부인 것 같지만,
공부는 부차적인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걱정을 비롯한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을 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지금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성모님께서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두고 ‘성모님의 겸손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등등의 많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문득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 하나만
으로도 당시에는 커다란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지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졌다고 하지만,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어쩌면
스스로도 믿기가 힘들어 답답한 마음에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곧바로 성령으로 가득 차서 엘리사벳이
말하지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불신으로 가득 찰 수 있는 순간이지만, 자신의 굳은 믿음을 절대로
놓지 않으신 성모님.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방에 숨어 있어야 할
것 같은데도, 자신감 있게 세상 밖으로 나오신 성모님.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기보다는 겸손하게 자신이 먼저 다가가신 성모님.
이러한 성모님이시기에 우리의 구원자를 자신의 몸 안에 모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도 가능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성모님의 이 모습을 기억하면서, 현재의 상황에 대해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쓸데없는 걱정으로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굳게 믿으면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힘차게 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삶이 힘들면 힘들수록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거야. 내게 닥친
문제가 크면 클수록 인생에서 느끼는 맛은 깊어지는 거야
(앤서니 퀸).
주안1동 청년들입니다. 예전에 제가 보좌신부로 있을 때, 다
꼬마였는데... 이제는 성인이네요. 시간의 빠름을 깨닫게 됩니다.
저두 늙은 것인가요? ㅋㅋㅋ
100세 건강법(‘위트[wit]상식사전’ 중에서)
한 남자가 의사를 찾아와서 상담을 받고 있었다.
남자: '선생님, 저는 100살 까지는 꼭 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100살까지 살 수 있을까요?'
의사: '혹시 담배 피우십니까?'
남자: '아니오.'
의사: '술은 하시나요?'
남자: '아니오, 전혀 마시지 않습니다.'
의사: '음식 드시는 건 어떻습니까? 많이 드시는 편입니까?'
남자: '먹는 걸 딱히 즐기지도 않고 많이 먹지도 않습니다.'
의사: '잠은 늦게 주무시나요?'
남자: '아니오, 잠자리에는 일찍 듭니다.'
의사: '혹시 여자친구가 많았습니까?'
남자: '거의 없었습니다.'
의사: '그러면 당신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래 살고 싶으신
겁니까?'
그 어떤 사람도 오래 살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빨리 죽어야지.’라는 말이 가장 큰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래 살고자 한다면, 왜 오래 살아야 하는지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내 삶의 목표도 분명해집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믿음을 청하십시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믿음을 청하십시오.'
2013년 가해 12월21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1,45)
“Blessed are you who believed that what was spoken to you
by the Lord would be fulfilled."(Lk1, 45)
“主が仰ったことは必ず?現すると信じた方は、
何という幸いしょう.”(ルカ1,45)...
“Bem-aventurada a que creu, pois hão de cumprir-se as
coisas que da parte do SENHOR lhe foram ditas.”(Lucas1,45)
“Beata colei che ha creduto nell'adempimento delle parole
del Signore.”(Luca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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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개의 번역을 올린 데는 이유가 있다.
오늘은 일본어 번역이 가장 마음에 든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은 분은 그 얼마나
행복하신 분이신가?”
그만큼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말이며,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함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천지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는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믿는다.
외아들 예수님을 믿고, 그의 성체와 성혈을 믿는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렇다면 …… 그 믿고 있는 하느님을 위해서 지금 나의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면, 당신의 반응은 과연 어떨까? 머뭇거리지 않을
이 없고 온갖 종류의 의심 속에 흔들리지 않을 이 없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삶과 죽음을 걸고 이야기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라 한다면 우리는 믿는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낭떠러지에서 한 발을 내디뎌야 할 것 같은 극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
그분을 믿고 결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서 믿음이라는
말이 허락될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순교 정신이라는 것도 결국
이러한 믿음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삶을 다할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약한
믿음 때문에 힘들어 할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신앙의 삶이란 스스로 약함을 인정하고, 강한 믿음을 달라고
청하는 삶이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고 있어서 행복합니다”
라는 고백을 희망하는 삶이다. 그리고 그 힘은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2012년12월21일)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대림 제3주간 토요일
2013년 가해 12월21일
교구청 숙소에서 사무실로 가려면 명동 성당 앞을 지나야 합니다.
어제도 명동 성당 앞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추워서 옷을 꼭
껴입고 모자를 썼습니다. 한 자매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본인은
평화신문 리포터라고 하면서 제게 ‘가톨릭 신자’인지 물었습니다.
저는 제가 사제라고는 말씀드리지 않고, 가톨릭 신자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자매님께서는 ‘성탄’을 맞이해서 한 말씀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평소에
그런 질문을 받은 적도 없었고, 저 자신 성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이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가 가득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저의 대답이
너무 상식적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자매님은 또 다른 질문을 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만나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순간 저는
당황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으니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평화방송 리포터께서 제가 사제인줄 알았다면 그렇게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질문을 하지 않고, 제가 사제인줄 몰랐다고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문뜩 ‘넷째 왕의 전설’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아기 예수님께 선물을 드리려고 했던 동방박사들은 4명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네 번째 왕은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아픈 이, 가난한
이, 굶주린 이, 헐벗은 이, 강도를 만난 이, 외로운 이’들을 만났습니다.
넷째 왕은 준비한 선물들을 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베들레헴
근처에 왔을 때는 준비한 선물이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결국 넷째
왕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지 못하고 되 돌아와야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넷째 왕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해 준 사랑과
정성, 나눔과 희생’은 곧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넷째 왕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지는 못했지만 기쁜 마음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거리로 나가야 합니다.
비록 흙이 묻어도, 세상의 것들 때문에 더러워 져도 거리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모습으로, 아픈 사람들의
모습으로, 억울한 이들의 모습으로, 굶주린 이들의 모습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화려한 건물 한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교회가 깨끗한 모습으로 남기를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의 이러한 모습은 엘리사벳을 찾아간 성모님의 노래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이제 곧 대림이라는 터널을 빠져 나갈 것입니다. 저 멀리 환한 성탄의
빛이 보일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가슴 설레는 여행길
12월 21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R) - 루카1,39-45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가슴 설레는 여행길>
반가운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이 저녁에 잡혀있다면 오후부터
마음이 설렐 것입니다. 혹시나 늦지나 않을까 서둘러 길을 나설 것입니다.
미치도록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하러 갈 때 조금이라도 빨리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왜 이리 길이 막히나, 왜 이리 시간이 더디 가는가, 하는
조바심이 나기도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의 발걸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리아
입장에서 이 위대한 사건을 조금이라도 빨리 지혜롭고 경륜이 풍부한
사촌 엘리사벳에게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징표를 엘리사벳을 통해 확인하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서둘러’ 길을 떠났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진의를 파악하고, 그분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일에 있어 게을러도
미적미적 마지못해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까지의 여행은 아직 앳된 청소년이었던 마리아에게
보통 어려운 여행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할 상황이었기에
사흘이나 되는 여행길을 홀로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느님의 영으로 가득 차 있었고,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려는 열망으로 가득했던 마리아였기에 용감히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조금은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때로 막막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조금이라도 빨리 그분의 뜻을 확인하고 싶었던
마리아였기에 기쁘고 관대한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윽고 엘리사벳의 집에 도착한 마리아가 인사를 하니 그 인사말을 들은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가 뛰놀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이 외침은 오늘날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차례, 수백 차례씩 암송하고 있는
성모송의 둘째 부분입니다.
성모송의 첫째 부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는 하느님의
천사가 마리아를 향해 외친 말입니다.
그리고 성모송의 둘째 부분은 이스라엘, 더 나아가 인류 전체를 대신한
엘리사벳이 놀라 경탄한 말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그리고 성모송의 마지막 부분은 죄인인 인간들의 필요에 따라 교회가
첨가하였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이렇게 성모송은 아주 짧고 간단한 기도문이지만 구약을 상징하는
엘리사벳이 신약을 상징하는 마리아와 연결되는 매우 아름답고 심오한
기도입니다. 신약과 구약은 이 성모송 안에서 수렴되고 조화를 이룹니다.
마침내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확신에 찬 믿음을 칭송하는 말로 환영의
인사를 마무리 짓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놀라운 하느님의 업적,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 앞에
우리 인간들의 의혹과 불신은 컸지만 마리아의 믿음은 찬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구원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계시는 하느님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인간
측의 진심어린 동의와 기여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인간 측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인간 측의 협력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번 해보지요.’
라며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행위가 뒤따라야 합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전인적(全人的)인 동의와 적극적인 참여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인사말
2013년 가해 12월21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복음 : 루카 1,39-45
< 인사말 >
“안녕하세요.” 또는 “좋은 아침이에요”라는 말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항상 다정한 인사를 건네면,(그렇게 하지 않으면 형성되지 않을)
인간적인 유대 관계가 형성된다. 야파 엘리아크의 주목할 만한 저서
<대학살 이후 하시디즘 유다인 이야기 Hasidic Tales After the
Holocaust>는 1930년대 단지크Danzig 에 살았던 어느 하시디즘
랍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규칙적으로 아침 산책을 한 그 랍비는 랍비 요카난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새기며 남녀노소 막론하고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다정한
미소를 띠며 “좋은 아침이에요.”라는 정겨운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많은 주민을 알게 된 이 랍비는 항상 그들의
정확한 칭호와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넸다. 한편, 도시 근교 농장에
한 농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 역시 종종 이 랍비와 마주치곤 했다.
랍비가 그에게 “좋은 아침이에요, 뮐러 씨.”하고 인사를 건네면,
그는 “좋은 아침입니다, 랍비님.”하며 답례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랍비의 산책은 중단됐고, 뮐러는 농장을
떠나 나치 친위대에 입대했다. 랍비는 트레블링카Treblinka 죽음의
수용소에서 가족을 잃고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어느 날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유대인 전원에 대한 선별 작업이 이루어졌다.
수감자들이 한 나치 장교 앞에 서면 그는 그들을 왼편이나 오른편으로
보냈는데, 왼편은 가스실에서의 죽음을, 오른편은 강제 노동의 삶을
의미했다. 당시 랍비는 오랜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려 이미 ‘걸어
다니는 해골’처럼 보였다.
앞의 줄이 점점 줄어들면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라는 지시하는
목소리가 랍비에게 낯익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랍비는 수감자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나치 장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랍비가 마침내 나치 장교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좋은 아침이에요, 뮐러 씨.”하고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랍비님” 장교는 답례를 하고 말을 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랍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힘없이 웃어 보였다. 몇 초 후,
뮐러는 자신의 지휘봉으로 오른쪽을 가리키며 “오른쪽으로.”라고
말했다. 다음날 랍비는 좀 더 안전한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결국
전쟁에서 살아 남았다.
랍비 야파 엘리아크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현재 여든이 넘은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것이
아침 인사의 위력이죠.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야 합니다.’”
엘라아크 <대학살 이후 하시디즘 유대인 이야기> 109-110 페이지
죽기전에 한번은 유대인을 만나라(랍비 조셉 텔루슈킨 지음)
재인용.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게 만드십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찼던 순간이
바로 성모님의 ‘인사말’을 듣는 순간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인사말은
인사말로 그친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 있는 성령님을 전달해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장 먼저 건네줄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은 무엇일까요? 바로 ‘인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가득 찬 인사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받은 사랑으로
되돌려줍니다.
한국 정부가 처음 수립되었을 때 미국에서는 무초를 초대 미대사로
한국에 파견하였습니다. 그 때 우리나라 국민들은 미국의 신탁통치를
맹렬히 반대했었습니다. 무초 대사는 부산항에 입항하여 한국
사람들에게 반갑다고 손을 들어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신탁통치 때문에 미국인들을 싫어하던
터이므로 무초 대사에게 욕을 하면서 팔뚝질을 하였습니다. 무초
대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통역관에게 저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통역관은 차마 욕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없어서 우리나라
풍습에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저렇게 팔뚝질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무초 대사는 만나는 사람마다 팔뚝질을 하며 인사를
하였습니다. 경부선 열차를 타고 상경하면서도 무초를 향해 손을
흔드는 아이들에게까지도 무조건 팔뚝질을 했습니다. 청와대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신고하러 가면서 정문으로부터 비서실을
지나가기까지 계속 팔뚝질을 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자마자
팔뚝질을 하니 이 대통령도 아연실색하였습니다. 통역관은 부산항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여 간신히 이승만 대통령을 이해시켰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인사를 듣고 태중의 아기도 복되고 성모님도
복되다고 하며 성모님을 칭송합니다. 그 이유는 성모님으로부터
먼저 사랑의 인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준대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내게 싸늘한 눈빛을 보인다면 먼저 내가 웃어
보이는 것은 어떨까요? 그 차가운 눈빛이 따뜻함으로 바뀔 수 있는
에너지를 내가 상대에게 선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눈빛 때문에
나도 기뻐지게 될 것입니다. 팔뚝질을 받지 않는 방법은 내가 먼저
손을 흔들어주는 것입니다.
- 수원 교구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 희망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글 -
◈ [수도회] 외로워서 사람이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서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21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아가2,8-14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루카1,39-45
외로워서 사람이다.
-우리의 영원한 도반(道伴)이자 연인(戀人)이신 주님-
외로워서 사람입니다.
외로워서 자살입니다.
외로워서 도반입니다.
외로움에 대한 답은 도반 하나뿐입니다.
평균수명을 80세 로 잡아 현재의 내 나이를 빼보십시오.
남은 햇수가 나올 겁니다.
영원히 살 것 같은 인생이지만 짧은 인생이라 혹자는 초로(草露)
인생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하여 도반의 중요성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네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하느님 목적지(目的地)요, 둘째는 이정표(里程標)요,
셋째는 도반(道伴)이요, 넷째는 기도(祈禱)입니다.
네 요소가 충족되어야 후회 없는 하느님 향한 완주의 인생순례
여정입니다.
오늘은 이들 중 도반에 대한 집중적인 묵상입니다. 눈이, 귀가,
손이, 발이 둘임은 바로 도반의 필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임종 시 에는 사랑하는 이가 두 손으로 그 손을 꼭 잡아주는 것이
제일이라 합니다.
기도하라, 일하라, 악수하라, 박수치라 있는 두 손임을 깨닫습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이래서 평생 도반입니다.
도반 중의 도반이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이십니다.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주님이 마리아의 영원한 도반임을 알려준 주님의 천사 가브리엘입니다.
주님의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 뒤에는 어김없이 ‘내가 너와 함께
있다’가 나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나다(I AM)’입니다.
즉 ‘나는 너와 함께 있다(I AM with you)’ ‘나는 너를 위해 있다
(I AM for you)’ 는 우리의 영원한 도반임을 천명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영원한 도반인 주님(I AM)이 빠진 인생은 위태하기 짝이
없는 반쪽짜리 허무한 인생인 겁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마지막 말씀에서도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도반임을
선언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하여 우리는 끝기도 시 찬미가 때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라는 기도 후 잠자리에 듭니다.
늘 손에 묵주를 잡고 기도하는 이들이 바로 주님이 영원한 도반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느 영성가는 묵주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패스포드라고 말합니다.
영원한 도반인 주님은 물론이고 보이는 도반도 현세의 삶에는
절대적입니다. 도반의 부부관계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마리아를 보십시오. 주님의 천사를 통해 구세주 잉태의 놀라운 소식을
듣는 순간 즉시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에
살고 있는 도반 엘리사벳을 찾아 나섭니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일을 겪었을 때 본능적으로 찾는 도반입니다.
과연 이런 도반이 있으신지요.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심전심, 동병상련, 도반은 도반만이 알아봅니다. 도반의 심중을
꿰뚫어 존중하고 배려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 참 도반이요,
바로 엘리사벳이 그러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 두 도반의 만남과 더불어 태중의 두 도반인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감격적인 만남입니다.
믿음도 유전됩니다.
새삼 그 어머니들에 그 자식들임을 깨닫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두 도반 어머니들의 만남과 친교는 태중의 아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에게도 참 좋은 태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가서의 연인 또한 참 좋은 눈에 보이는 도반입니다.
두 젊은 도반인 연인들이 주고받는 사랑의 언어가 참 감미롭습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 같습니다.”
옛 교부들은 위의 ‘내 연인’을 그리스도 주님을 상징하는 풀이했고
또 믿었습니다. 이런 우리의 연인이자 영원한 도반인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입니다.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부지런히 우리를 찾아오시는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자 도반인
주님이십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마치 이 거룩한 새벽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의 영혼을 일깨우는
주님의 음성 같습니다. ‘나’가 가리키는 바 주님이요 ‘아름다운
여인’이 가리키는바 우리의 '영혼'입니다.
영원한 도반이자 연인이신 주님을 목말라 하는 우리 영혼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의 영원한 도반이자 연인이신
주님과 하나 되는 복된 시간입니다.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시편33,20).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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