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 6: 스티로폼
부쩍 추워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창이 덜컹거렸고 창틀과 창문 사이로 황소바람이 들어왔다.
마루는 차가워서 발도 디디기 싫을 정도였다. 마루를 가로질러 화장실이라도 갈라치면 한기가
달려들었다. 베란다 쪽으로 창문이 나 있고 그 창문은 벽의 삼분지 이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베란다에서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마루는 한 데나 다름없었다. 커튼으로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계단 입구를 막았어도 소용없었다. 없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모퉁이 집이고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어 저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바람, 불어치는 바람을 막아줄 다른 건물이 없어 바람이 바로
이층으로 불어쳤다. 아래 층, 주인집은 경사아래에 있어 축대로 가려져 있는 터라 그나마 나았다.
안방 하나만 썼다. 기름을 아끼려는 것이었다. 안방은 비탈길 쪽으로 가장 안쪽이었다. 비탈길 쪽으로
면한 창문이 제법 컸고 베란다 쪽으로 햇볕을 받기 위한 것인 듯 싶은 유리창이 하나 있었다.
열 수 없는 유리창이었다. 자고 나면 유리에 이슬이 송송 맺혀 있었다. 쪽커튼을 달았다. 예전에
커튼을 만들고 남은 천을 마땅히 쓸 데가 없어 만들어두었던 것이었다. 그 커튼을 달고 나니
한기가 한결 덜해졌다. 대신 온도차이 때문에 유리창 주변에 곰팡이가 까맣게 피었다.
작은 방에는 잡동사니를 넣어 두었다. 작은 방이라고 해도 꽤 컸고 그 방 안쪽에는 방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이 또 있었다. 베니어합판으로 된 밀문으로 공간을 가로 막았는데 꼭 무당집
같은 생김새였다. 아니 일본집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방 안쪽에 공간을 만들어 커튼이나
장지문으로 가린 그 집들. 드르륵하고 장지문을 열면 안쪽에 또 다른 공간이 보이는 그런 집.
그 얄팍한 베니어합판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어 텅 빈 합판 사이 공간이 보였다. 그 밀문도
세월이 평탄치 않았던 것이다.
“내일 엄마랑 아버지 모셔올 거야. 준비 좀 해.”
아침을 먹으면서 그가 말을 꺼냈다. 음식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이사했는데 엄마랑 아버지가 와 보셔야지. 어떻게 사는지 보셔야 할 거 아냐.”
그 말을 남겨놓고 그는 출근했다. 과천까지 승용차로 가는 것이었다. 다들 자가용을 가지고
있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집은 없어도, 월세를 살망정 차는 있어야 하는 시절이었다.
그만큼 자가용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그러나 이 동네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활을 위해서 차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십여분 정도 걸어 나가야 버스가 있었고, 버스마다
만원이었다. 편의 시설은 말할 것도 없었고 교통편도 열악했기에 동네 사람 누구나 할 것
없이 차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말썽이 생기기도 했다.
주중에는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하고 주말, 토요일이면 퇴근 후 이내 시댁에 가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물을 데워다주면 씻고 상을 차려다 주면 먹고 옷을 다려주면 입고
그리고는 나갔다가 컴컴해지면 들어왔다. 토요일에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시댁에 갔다.
갈 때는 산에 가서 약수를 떠가거나 간혹은 내가 만든 음식을 들고 갔다. 그리고는 일요일
저녁에 돌아와서 “엄마가 매작과가 너무 두꺼워서 씹기가 불편하대.” 라던가 “엄마가
그러는데 식혜가 시커멓대.”라던가 하는 불평을 전달했다. 그랬으니 물 없는 가운데
손님을 치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 턱이 없었던 것이다.
시장을 봐야 했다. 가까이에는 가게가 없었다. 비탈길이 끝나는 저 아래, 5분 정도 거리에
작은 가게가 있기는 했으나 구멍가게 수준이라 아이들 군것질감이나 사는 정도였다.
조금 더 걸어 비산 초등학교 가까이로 가면 문방구들이 몇 개 있었고 주공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작은 슈퍼들이 세 개 있어 서로 경쟁하면서 물건을 팔았다. 말이 슈퍼지 물건
값은 싸지 않았다. 경쟁한다고 했지만 가격 또한 거기서 거기였다. 더 걸어 내려가면
삼호 아파트 상가 내에 슈퍼가 있었다. 지금도 그 아파트 단지는 남아 있다. 아파트
단지가 상당히 컸던 만큼 인구도 많아 상가 내 슈퍼도 꽤 컸다. 그들은....
나와 다른 것 같았다. 아무리 다독여도 주눅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널찍한 땅에
큰 도로 옆에 대단지 아파트, 무엇보다도 시세가 그렇게 만들었다.
돈이란 묘한 것이다. 훗날 아들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도 촌지를 주지 않았던 탓에
아들아이는 선생에게서 구박을 받아야 했고 그 때문에 아이는 주눅이 들었다. 사람들은
봉투를 찔러주어야 한다고 했다. 학부모 모임의 여인은 큰 소리로 주절댔다.
“그거 일년에 한 번 30만원이 뭐가 나빠? 우리 아이 가르치는데 30만원이야 감사한 마음으로
줘야 하는 거 아냐?”
아픈 소리였다. 그 돈은 한 달 생활비의 절반이었다. 그 담임, 젊은 여선생이었는데 그녀는
일 학년짜리 아들아이가 글을 빨리 쓰지 못한다고 사정없이 칠판에 쓴 것들을 지워버리곤 했다.
아이는 늘 부족한 채로 알림장을 가져왔던 것이다. 가난한 동네였는데 무얼 바랐던 것일까.
삼호 아파트 아이들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지금도 그녀의 표정이 생각난다. 그녀는 내가
가져간 쑥 인절미를 받아들기는 했으나 몹시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쑥을 캐서 직접 만든
인절미였다. 그녀는 내게 화분을 내놓으라고 했고 직접적인 그 요구는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왜 하필이면 나였을까. 후에 학부모 모임의 여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선생들이 정한
기준이 있다고 했다. 장남이거나 아이가 하나인 집이 표적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파트 평수.
아버지 직업. 내 아이는 장남이기는 했다.
평촌이 평촌이던 시절이다. 평촌은 그야말로 평평했다. 들판이었던 것이다. 삼호 아파트
건너편은 죄다 논이었다. 슈퍼 물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가격이 비쌌다. 관양동쪽으로 가면
재래시장이 있었다. 사십 여분 걸어야 했다. 마을버스가 있다고 듣기는 했으나 이용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반찬 목록을 적었다. 갖고 있는 돈을 세었다. 카드가 없던 때였다. 아니 있었지만 나와는
상관없던 때였다.마지막 십 원까지 긁어 모았다. 큰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놓고 작은 아이를
유모차에 태웠다. 짙은 청색의 줄 무늬진 그 유모차는 큰 아이 돌때 둘째 외숙모가 생색을 내면서
선물한 것이었다. 유모차를 사주마고 해서해서 “이왕이면 예쁜 거 사 주세요.” 라고 했더니
“이왕이며 비싼 거 사달라고 하더라.”고 이리 말을 내고 저리 말을 내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그 유모차였다. 후에 알았지만 그 유모차는 가장 싸구려 축에 속했다. 그야말로 최소한의 것만 있는,
튼튼하지도 좋지도 않은 물건이었다.하긴 모든 친척어른들이 내가 하는 모든 일, 행동을 가지고
자기네들끼리 입방아를 찧었으니 그 정도야 흉도 아니었다.
딸아이를 태우고 삼호 슈퍼로 갔다. 녹두와 밀가루, 돼지고기 간 것, 고사리와 파, 양파와 배,
그리고 파래를 샀다. 빈대떡과 파래 무침을 할 참이었다. 물론 다른 물건도 있었을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 것들....산 물건들을 비닐봉지 두 개에 나누어 담고 유모차 손잡이에 달고
밀었다. 오랜 만에 큰 슈퍼에 간 세 살짜리는 먹고 싶은 것이 많았다. 이것저것 사달라고
떼를 썼다. 금세 야쿠르트 하나를 비운 아이는 바나나 우유를 집어 들었지만 나는 도로
진열대에 돌려놓았다. 올라오는 길은 버거웠다. 야쿠르트를 손에 든 아이는 울어댔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오는 길에 간혹 돌멩이가 채어 툴툴대면서 굴러갔다.
토요일, 퇴근한 남편은 시댁에 가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왔다. 말하자면 집들이였다.
남편이 모셔온 시부모님은 곧장 안방으로 들어갔다. 상을 들여갔다. 연방 왔다갔다하면서
시중을 들다가 남은 것이 파래였다. 파래무침을 만들어야 하는데. 생각하고 나와 보니
물이 똑 떨어졌다. 당황한 나는 금호빌라로 뛰어갔다. 그 즈음에는 앞빌라 사람들과
그럭저럭 친해졌던 것이다. 반지하에 살던 이가 소야네였다. 소야는 큰아이보다 한 살
적었고 소야 엄마는 나보다 두 살 많아 터놓기 좋았던 것이다. 파래를 씻어 들고
돌아오니 이미 음식을 다 드신 후였다.
시부모님이 오셨다 간 이후 마루가 유달리 컴컴했다. 웬일인가 하고 살펴보니
창문이 무언가로 가려져 있었다. 시어머니가 창문 새에 스티로폼을 끼워 넣었던 것이다.
“이렇게 찬바람이 들어와서 어쩐다니...마루가 어쩌자고 이렇게 삐걱대니. 우리 아들,
고생해서 어쩐다니.”
그 말이 전부였다. 그 스티로폼은 베란다로 통하는 문과 문틈을 막아놓았던 것이었다.
첫댓글 에구... 난 모르는 사실인데 우리 옆지기는 됫박으로 쌀을 팔아먹던 시절을 회상하며 가끔씩 날 윽박지르더군요.
여자들은 직접 일상을 지켜야 하잖아요. 됫박으로 쌀을 사야할 때 남들과 비교되는, 그 속상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남자들은 자기 직장에서 일어난 일들은 다 기억할텐데요.
손님~하면 저도 진절머리 납니다. 결혼하고 10여년 가까이 거의 매달 1박2일 손님 치뤘지요. 어머님 계시는 집이다보니 형님내외랑, 나보다 1년 늦게 결혼한 시누이내외가 인사차로 매달 한번씩 들렀지요. 그러면 어머님은 신이 나셔서 가까이 사는 친척들은 죄다 불러 모았어요. 생일이라고 제사라고 명절이라고 보름이라고 동지라고 하다못해 이틀 쉬는 연휴라고... 밤새 술먹고 화투치고 놀다가 다음날 점심까지 먹고 흩어졌지요. 명절때 한번도 친정엘 가 본 적이 없어요. 나중에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뒤에야 남편이 그 때 내가 얼마나 힘들고 속상해 했었는지 느끼대요....애구~ 생각하니 또 눈물 나려 하네....
ㅠ.ㅠ 아이고 창님. 제가 장담컨대 창님이 없었으면, 그리고 아마 창님이 반항했더라면 절대로 그렇게 안하셨을 거예요. 저희 시어머님 역시 마찬가지셨거든요./근데 절대로 그거 가지고 지금 아파하지 마세요. 그랬기에 지금 창님이 있는 거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절대로 넘보지 못할 창님이요. 아마 형님내외분이나 시누이 내외는 창님만큼 살림을 잘 하지도 마음이 넓지도 음식을 잘 하지도 못할 거예요. 특히 살아가는 방도에서요.
1월에 결혼하면서 시댁에 들어갔고 3월부터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했는데 소위 맞벌이라는 것을 했지만 가끔은 지갑에 동전 몇개 밖에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시댁에 살다 보니 생활비에 경조사비까지 장남인 우리가 다 책임져야 했었거든요. 그때는 서글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답답한 생활이었다 싶습니다. 희야님 글 읽으면서 30년 전으로 기억을 더듬어 가게 됩니다.
정말 공감갑니다. 동전 몇개....그 땐 정말 그 상황을 헤쳐 나가야한다는 생각뿐이었네요. 서럽기는 했어요.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해주지 못할 때가 가장 서럽더군요. 그 아픔이 지금도 남아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래요. 답답했지요.
참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글입니다...신혼때로 돌아가 생각에 잠깁니다..희야님을 보면 참 강인하다는 인상으로 떠올려집니다...열심히 살아왔구나...라는 생각도요...
ㅎㅎ 저 참 강하죠? 아니요. 주위에 다른 분들을 보면 어찌나 존경스러운지. 다들 저보다 열심히 사셨더군요.
천연기념관에 올려야 할 글입니다. 희야님 대단하시고 생활력 강하시고 학업에 열의 있으시고 현재 학자로서의 길 걸으시고, 번역도 하시니 존경합니다. 창넘어하늘님 바라지님 다 그런 세월을 사셨군요. 님들이 계셔서 이 나라가 이리 유지되는 겁니다. 힘 내시고,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기기를 기도합니다. 묵주5단 바칠게요. 다른 건 해드릴 게 없습니다. 애고 답답하여라. 이런 분들 모셔다가 크게 잔치를 함 베풀어 드리고, 퀸 에리자베스호 90일 세계일주 표를 끊어 드려야 하는데... 표를 알아 보니 읔 하겠네요.^^ 제 형편엔 안 되겠사옵니다.
윽! 말씀은 왜 꺼내셔가지고 주눅들게 하신답니까!
우리 아들, 고생해서 어쩐다니.... 그 마지막 귀절에 우리 아들, 입 부르트는 거 다신 못 본다....가 덥쳐지네요. 그런 시어머니가 안 되려고 마음의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는 중이고 주머니도 열심히 채워가는 중입니다만..... 그 많은 촌지는 다 어느 선생 주머니로 들어간 걸까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