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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그래픽과 결합한 ‘퓨전 동양화’ 검게 칠한 한지 위에 형광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 잔물결 위로 꽃 무리가 소용돌이치기도 한다. 한글과 한문, 때로는 영어로 쓴 문구들이 그림 사이에 숨어있기도 하고, 그림과 같은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홍지윤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정중동(靜中動)의 미(美), 관조 등의 단어가 어울리는 기존 동양화와 달리 활기, 환희 등의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동양화가 그저 옛 그림양식의 하나로 머물길 원치 않는다는 홍 작가는 “단순히 매체가 섞이는 것을 뛰어넘어 인간과 자연의 관계, 결국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동양의 철학을 작품으로 보여주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앞서 간다’, ‘선도 한다’는 해석 때문에 요즘 의도치 않게 제 이미지가 너무 진지해진 것 같아요. 물론 이런저런 모습이 저겠지요. 꽃과 새도 모두 개별적인 하나의 존재이지만 한마디로 존재를 규정할 수 없잖아요. 여러 겹의 꽃잎이 한 송이의 꽃이 되고, 여러 깃털이 모여 한 마리 새의 형상을 이루죠. 제 작품도 음과 양, 동과 서, 과거와 미래 등의 이분법에 의한 융합이라기보다는 그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간극, ‘겹’에 주목하고 있어요. 수많은 겹이 새롭게 하나가 되는 것이야말로 예술세계의 근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홍지윤 작가의 캔버스에는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뇌가 동서양의 경계를 넘어 종횡무진 펼쳐진다. 동양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다채로운 색감이 우선 강렬하게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방색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꽃 그림은 동양화의 몰골법을 이용해 윤곽선 없이 단번에 그렸다. 오행의 각 기운이 직결된 오방색과 형광색을 병치한, 꽃 사이사이에는 작가의 시(詩)가 자리 잡았다. 영상이라는 첨단매체와의 결합도 시도했다. 수묵 그림에 자작시를 담아 만든 영상에는 전통과 현대,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함께 담겼다. 머리에 붓을 꽂다 “저는 음악, 드라마, 영화, 광고, 패션에 관심이 많고, 만물에 생명과 에너지가 있다고 믿어요. 정원의 작은 새나 도둑고양이, 풀벌레, 꽃들을 바라보고 교감하는 것을 즐깁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와 사건을 서사적으로 이해하려고도 노력하죠. 그리고 이 모든것이 하나로 연결돼있다고 믿고, 공감각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모든 요소가 하나로 합쳐져 둥근 꽃이 되어 서로를 품고, 새가 되어 화려한 날갯짓으로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며 노래한다. 찬란한 색동꽃과 새, 그 위를 흥얼거리는 글자들이 하나 되어 춤춘다. 동양화의 단조로운 속성을 벗어던진 공감각적 이미지들은 한지에 머물지 않고 영상, 그래픽, 사진, 설치 등 다양한 매체와 결합하며 무한 변주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2004년 작품 <백만 송이 장미>는 동명의 샹송을 배경음악으로 꽃과 글이 움직이는데, 이미지의 움직임이 재미있으면서도 애틋한 감정을 자극한다. <봉별(逢別)>은 어느 날 문득 손톱에 바른 분홍 매니큐어를 보고 그린 꽃나무 그림과 그 무렵 읽은 이상(李箱)의 시가 모티브가 됐다. 일제강점기에 날개를 접고 고전과 모던의 틈을 살아간 지식인 이상, 그리고 그의 자화상인 기생 금홍의 만남과 이별이 홍 작가의 자작시 <생멸>과 조형 오브제, 비디오 작품으로 구현됐다. 이상과 금홍의 방에는 사랑과 서글픔이 공존하며, 고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이내 시들기도 한다. “시의 문학적 특징은 수묵 동양화의 회화적 특징과 같아요. 함축과 은유로 표현하거든요. 동대문종합상가 오뚜기주단 언니, 동화상가 초원자수 아줌마, 황학동 상보당 아줌마, 그리고 일찍 돌아가신 엄마까지, 자신들만의 꽃나무를 피워냈을 현대판 ‘금홍’들과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신작 <봉별>을 완성했어요. 내 엄마가 나를 피워냈고 시들어갔던 것처럼, 이상과 금홍이 그렇게 만났고 헤어졌던 것처럼, 저에게 작품 <봉별>은 새로 피워낸 꽃나무가 되었죠.”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홍지윤 작가는 미술관과 갤러리 말고도 대중이 미술을 더 가까이서 만나고 공유할 수 있는 프로젝트에 늘 마음을 연다. <어진 바다-화려한 경계>는 군사분계선 부근에 위치한 남한의 최북단 백령도에서 촬영했다. 여성의 옷과 군복, 그림을 넌 빨랫줄 사이를 춤추는 무용수의 퍼포먼스는 무수한 경계를 허물고 그 사이를 오가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을 대변했다. 동양의 사유 확장하는 모험가 새로운 시선을 갖기 위해서는 시도를 겁내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대중이 반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내 대기업 사옥 외벽의 대형 LED 스크린에 작품이 전시됐는가 하면, 런던 피카딜리서커스에서 공개한 그녀의 수묵 영상은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랜드마크 노스(홍콩), 갤러리 TN(중국), 쿤스트디렉트 갤러리(독일) 등에서 개인전을 성황리에 마친 홍지윤 작가는 플로렌스비엔날레 로렌초 일 마니피코상(2001, 2003), 올해의 주목할 예술가상(2013,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서울문화재단기금 중진작가상(2014) 등을 연이어 수상하며 주목받고 있다. 당분간 홍지윤 작가를 만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연이은 개인전과 작품전을 비롯해 오는 9월 창원조각비엔날레에 출품할 조형물도 제작해야 하고, 홍콩 프린지클럽의 초청으로 갤러리 평면작품과 함께 건물 외벽에 전시할 대형 미디어 작품도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술’과 ‘미술 주변’의 경계 넘기를 시도해온 그녀답게 다양한 분야와의 협업도 멈추지 않을 계획이다.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더욱 즐거운 인생을 사는 묘책이라고 말하는 홍지윤 작가의 표정이, 난생처음 붓을 머리에 꽂아본 소녀처럼 들떠 보인다. “수묵은 물처럼 유연하게 살아가는 동양적 사유체계를 제 삶의 태도로 삼게 하고, 제 작품의 형식적 기반이 됐어요. 저의 최대 화두는 동양화를 통해 어떻게 지금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에요. 그래서 그림뿐만 아니라 설치나 사진, 그래픽, 영상, 디자인, 인테리어 등 다양한 각도에서 작업을 시도하죠. 동양화뿐만 아니라 동양의 정신이 경계를 넘어 확장될 가능성을 부단히 찾아 나설 겁니다.” 늘 꽃길만 걸을 수는 없을 터이다. 예술이, 인생이 어찌 늘 찬란할 수만 있겠냐만은, 홍지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너에게 꽃을 꽂아줄게. 그러니 두려워 말고, 무겁고 가벼운 인생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듯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춤추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