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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의 詩學} 서문
가스통 바슐라르/ 김현 역
方法이어, 方法이어, 뭘 원하는가. 너는 내가 무 의식의 열매를 먹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
----라포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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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상상력에 바쳐진 책들을 끝막음하는 최근에 쓴 한 책에서 우리는 그러한 탐구를 하는 데 있어 현상학적 방법이 보여주는 이점利點을 제시하려 하였다. 현상학의 원칙에 따르면 문제가 되는 것은 시적 이미지에 감동한 주체자의 의식을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현대의 현상학이 모든 심리현상과 결부시키려 하는 이 각성은 우리가 보기에는 흔히 의심스러운 객관성, 일시적인 객관성 밖에는 갖고 있지는 않는 이미지에 주관적인 지속성을 부여하려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시인이 만들어 낸 이미지에 대해서, 우리 자신에게로 조직적으로 되돌아 오게 하면서, 그리고 의식의 각성을 명확하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현상학적 방법은 우리들로 하여금 시인의 창조적 의식과의 교통을 시도하게 한다. 시적인 이미지는----단순한 이미지라도!----그래서 정말 단순하게, 절대적인 기원, 의식의 기원이 된다. 대단한 발견의 시간에,시적 이미지는 세계의 씨, 시인의 몽상이 상상한 우주의 씨가 될 수 있다. 시인이 만들어낸 이 세계 앞에서의 감동의 자각은 아주 순진무구하게 행해진다. 틀림없이 의식은 더 큰 폭발을 하게 되어 있다. 의식은 그것이 더 잘 조직화된 작품을 향할 때, 그만큼 더 강렬하게 구성된다. 특히 ‘합리성의 의식’은 현상학자에게는 아주 어려운 문제가 될 영속성이라는 덕목을 갖고 있다. 그로서는 어떻게 해서 의식이 일련의 진실과 관련을 맺을 수 있는가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고립된 이미지를 향하게 되면 상상적 의식은----적어도 척 보기에는----훨씬 책임감을 덜 느낀다. 개별적 이미지와의 관련하에서 생각될 때, 상상적 의식은 현상학적 이론의 기본적 교육체계에 여러 주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중의 역설과 마주치고 있다. 비전문적인 독자는 물을 것이다. 몽상에 대한 책을 쓰는 데, 현상학적 방법이라는 무거운 도구를 왜 쓰는가?
그 곁에서 직업적인 현상학자는 물을 것이다. 현상학적 원칙을 내세우면서 왜 이미지와 같은 유동적인 자료를 선택했는가?
우리가 자기가 관찰한 것을 묘사하고, 층위를 재고, 전형을 가르고----사실을 말하자면 보통 어른들에게서는 상상력이 어떻게 죽어버리는가는 검사하지 않고, 어린애들에게서만 상상력이 생겨나는 걸 관찰하는 심리학자의 멋진 방법들을 사용한다면 모든 게 더 쉬울 것이다. 아니 그럴 것 같다.
그러나 철학자가 심리학자가 될 수 있을까? 필요한 정열을 다 동원하여 가치의 체제 속에 이미 들어갔는데 사실의 검증으로 만족할 정도로 자신의 자존심을 굽힐 수 있을까? 오늘날 흔히 말해지듯 철학자는 ‘철학적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때로는 모든 걸 이제 시작하는 척 하지만, 그러나 오호라 그는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그는 정말 많은 철학책을 읽은 것이다! 그걸 공부하고, 그걸 가르친다는 미명하에, 그는 많은 ‘체계’를 왜곡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저녁이 내릴 때, 이제는 가르치지 않을 때 자기가 선택한 체계 속에 잠겨 들 권리를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시선으로 내가 아주 좋아한 이미지들을, 내 기억 속에 너무나 단단히 자리잡아 내가 몽상할 때 그걸 되살릴 때마다 내가 기억해 내는 것인가, 아니면 상상해 내는 것인가를 이제는 알 수 없는 그 이미지들을 다시 검토하겠다는 희망에서 나는 현상학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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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이미지에 대한 현상학적 요구는 하기야 단순하다. 그 요구를 따르자면, 이미지들의 원초적 질감에 역점을 주고, 그것의 독창성의 존재 자체를 파악하고, 그래서 상상력의 생산성이라는 놀라운 심리적 생산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시적 이미지가 심리적 세계의 원천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아주 강하게 뿌리박힌 원형에 작용하는 변형 자체에서 독창성의 요소를 발견해 내지 못한다면, 지나치게딱딱한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현상학자로서 감동의 심리학을 심화시키려 하기 때문에 놀라움이 가득 찬 이미지의 아주 사소한 변형도 우리의 탐구를 세련시키는 데 쓰일 것이다. 섬세한 새로움이 그 원천을 생생하게 하여 감동하는 즐거움을 쇄신하고 배가시킨다.
시에서는 말하는 즐거움이 감동에 덧붙여진다. 그 즐거움은 완전한 실증성 속에서 얻어져야 한다. 새로운 언어 존재로 나타나는 시적 이미지는 널리 알려진 은유의 형태를 따르면, 자기가 잡아 논 곤충을 풀어주려고 입을 벌리는 꽃판과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 시적 이미지는 거기에서 무의식적 행적을 찾아내는 게 헛된 일일 정도로 의식을 새롭게 비춘다. 적어도 현상학은 시적 이미지를 그 자체로서, 그 이 전의 존재와 절단되어 있는 말의 절대적인 정복처럼 생각해야 하게 되어 있다. 정신분석학자의 말을 따르자면, 시를 대단히 장엄한 말의 실수로 정의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흥분한다고 속지는 않는다. 시는 말의 한 운명이다. 시의 차원에서 언어의 자각을 세련시키려 하면, 우리가 새말, 생각이나 감각을 표현하는 데만 한정되지 않고서, 미래를 갖고자 하는 말을 쓰는 사람과 접촉하는 인상을 갖게 된다. 시적 이미지는 새로움으로 언어의 미래를 열어주는 것 같아 보인다.
그것과 상관하여, 시적 이미지의 검토에 현상학적 방법을 이용하다 보니까, 우리가 자동적으로 정신분석되고, 명증한 의식으로, 우리가 갖고 있던 정신분석학적 문화적 선입견을 억압할 수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우리는 현상학자로서 우리의 편애----문학적 취미를 습관으로 변화시켜주는 편애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현상학이 현장성에 특별한 위치를 부여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시인이 우리에게 보여준 새로운 이미지를 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미지는 시인의 넋 속 에 그걸 준비할 수 있었던 모든 과거와 떨어져서, 우리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시인의 ‘콤플렉스’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시인의 생애를 뒤지지 않고서 우리는 자유로이, 조직적으로 자유로이, 부유한 변형에 의해서 시적 가치를 드러내 주는 소박한 이미지를 따라, 이 시인에게서 저 시인에게로, 대시인에게서 소시인에게로 옮겨 갔다.
이렇게 현상학적 방법은 아주 사소한 변형일지라도 그 이미지의 변형의 기저에 있는 완전한 의식을 극명히 드러내게 하였다. 다른 생각을 하면서 시를 읽을 수는 없다. 시적 이미지는 그것의 여러 특성 중의 하나라도 쇄신되기만 하면, 원초적인 단순성을 내보여 주는 것이다.
시를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바로 조직적으로 되살아 난 이 단순성이다. 능동적 상상력에 관한 우리의 연구에서 우리는 현상학을 단순성의 학파처럼 취급하고 따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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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이 이미지 앞에서, 우리 자신은 결코 상상할 수 없었을 이 이미지 앞에서, 단순하게 감동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러나 정열적으로 그러한 감동을 달게 받는다 하더라도 아주 깊숙이 창조적 상상력을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의 현상학은 우리들이 창조적 상상력에 참여하는 것을 활성화시키길 요구한다. 현상학의 목적이 그 자각을 극단적인 긴장의 순간에 현재형으로 취급하는 것이므로, 상상력의 성격에 관계되는 한, 수동성의 현상학은 없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흔히 오해되고 있는 이상으로, 현상학이 현상의 경험적 묘사가 아니라는 것을기억하자. 경험적으로 묘사하게 되면 주체자를 수동성의 상태에 유지시키는 규칙을세우게 되어 대상에 복종하게 만들 것이다.l 심리학자의 묘사는 틀림없는 자료를 이루게 될 것이다. 현상학자는 거기에 개입하여 그 자료를 의도성의 축에서 취급하여야 한다. 오! 나에게 조금 전에 주어진 이 이미지가 내 것이기를, 정말 내 것이기를, 오만한 독자의 극치이지만-----그것이 내 작품이 되기를! 시인의 도움을 받아 ‘시적 의도성’을 살 수 있다면 독자로서 얼마나 영광일 것인가! 시적 상상력의 의도성에 의해서만 시인의 넋은 모든 진짜 시의 의식적인 열림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우리의 책 전부가 우리의 몽상에서 나와야 한다는 사실과 이 한없는 야심을 덧붙여 놓고 보면, 현상학자로서의 우리의 시도는 근본적인 역설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심리적 방기상태 중의 하나로 몽상을 기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는 결합하는 힘이 없는 시간, 헤풀린 시간 속에서 몽상을 산다. 그것은 의도없이 작용하므로 흔히 기억없이 작용한다. 그것은 현실 밖으로의 도피이며, 언제나 지속적인 비현실적 세계를 찾아 내지도 못한다. ‘몽상의 경사’를 쫓아가다 보면----그것은 언제나 밑으로 내려가는 경사인데----의식은 헤풀리고 흩어지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모호해 진다’. 우리가 꿈을 꿀 때, ‘현상학을 하는 것’은 올바른 시간이 그러므로 아니다.
그런 역설 앞에서 우리의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몽상의 순연히 심리학적인 연구와 소위 현상학적인 연구 사이에 있는 명확한 반대명제적 용어들을 결함시키려 하기는 커녕, 우리는 우리가 우선 옹호하려 하는 철학적 주장에 의거해서 우리의 탐구를 계속함으로써 그 대조를 더욱 강화시킬 작정이다. 우리로서는 자각이란 의식의 증대, 빛의 증가, 심리적 조리의 강화이다. 그것은 재빠름 혹은 그것의 순간성이 우리에게 그것의 증가를 숨겨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은 원기 있는 심리적 생성이며, 전심리 상태에 그 원기를 퍼뜨리는 생성이다. 의식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활동, 인간적인 활동이다. 그것은 생기 있는 활동, 충일한 활동이다. 계속되고, 계속되어야 했고, 계속되어야만 했었을 행동이 유예되어 있다 해도 의식적 활동은 충일한 적극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 행위를, 이 에세이에서는 언어의 영역에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상적 의식이 시적 이미지를 창조하고 그것을 살 때의 그 시적 언어에서만 연구할 작정이다. 언어를 증가시키고 언어를 창조해 내고, 언어에 가치를 부여하고, 언어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말하려는 의식이 고조될 수 있는 활동들이다. 아주 협소하게 한정한 이 영역에서, 우리는 온갖 자각의 본질적으로 의미확대적인 생성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우리의 철학적 주제를 입증해 줄 수 있을 많은 예를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시적 자각의 명백성과 힘의 증가 앞에서, 만일 우리가 현상학의 교훈을 이용하려 한다면 어떤 각도에서 몽상을 연구해야만 할 것인가? 왜냐하면, 결국에 가서는 우리 자신의 철학적 주장이 우리가 제기한 문제의 어려움을 증대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사실상 다음의 논리적 귀결을 이루어 낸다. 줄어 들어가는 의식, 잠드는 의식, 부질없는 ‘꿈을 꾸는’ 의식은 이미 의식이 아니라 귀결 말이다. 몽상은 우리를 귀찮은 경사, 밑으로 내려가는 경사에 위치시킨다.
관형사 하나가 모든 걸 다 해결해 줄 것이고, 피상적인 심리학적 반대의견 따위에는 개의치 않게 해줄 것이다. 우리가 연구하려는 몽상은 ‘시적’ 몽상, 시로 말미암아 좋은 경사에 위치하게 된 몽상, 증가하는 의식이 뒤따를 수 있는 몽상이다. 이 몽상은 글로 씌어진 몽상, 아니 적어도 글로 씌어지게 되어 있는 몽상이다. 그 몽상은 벌써 백지라는 이 거대한 우주와 대면하고 있다. 그때 이미지가 구성되고 정리된다. 그러기도 전에 몽상가는 글로 씌어진 말의 소리를 듣는다. 누군가 다시 찾아봤으나 그 이름을 발견 못한 어떤 작가는 펜 촉은 뇌의 한 기관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그걸 믿는다. 내 펜이 잉크를 튀길 때, 나는 엉뚱하게 사고한다. 누가 내 학창시대의 그 멋진 잉크를 가져다 주겠는가?
시적 몽상에서는 모든 의미가 깨어나 조화를 이룬다. 시적 몽상이 귀기울여야 하고 시적 의식이 잡아두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多音的 의미이다. 시적 이미지에는 그것이 ‘단숨에 나오는 창작’이라는, 프레데릭 슐레겔이 언어에 대해 말한 것이 걸맞는다. 상상력의 현상학자가 되살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은 이 상상력의 도약이다.
확실히, 심리학자라면 영감받은 시인을 연구하는 게 더 직접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특별한 천재에 대하여, 영감에 대한 구체적 연구를 행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영감의 현상을 그렇다고 해서 경험할 수 있을 것인가? 영감받은 시인에 대한그의 인간적 기록은 외부에서의 객관적 관찰이라는 이상 속에만 이야기 될 수 있을 것이다. 영감받은 시인들을 비교하다 보면 영감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모든 비교는 비교된 어사의 표현가치를 감소시킨다. 영감이란 너무 일반적인 말이어서 영감을 받고 씌어진 말의 독창성을 말할 수가 없다. 사실상 영감의 심리학이란 인공낙원에 대한 얘기를 이용할 때라도, 분명히 엉성하다. 심리학자가 검토할 수 있는 서류란 그런 연구에서는 지나치게 적고 특히 심리학자에 의해 진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영감에 ‘육체를 부여하는 것’을 도와줄 ‘영감을 주다’라는 동사에 초월적인 주체자가 있다는 것을 믿게 할 개념인 ‘뮤즈’라는 개념은 물론 현상학자의 어휘 속에 들어올 수가 없다. 아주 어렸을 때에 벌써, 나는 내가 그토록 좋아한 시인이 루트와 예신藝神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확신을 하면서, 어떻게 웃음을 터뜨리지 않고서, 다음과 같은 위대한 시의 첫 시행을 낭송할 수 있으랴?
시인이어, 너의 루트를 쥐고 나에게 키스를 해다오.
이건 샹파뉴 출신의 아이로서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 있나! 예신藝神이나 오르페의 리라나, 대마초의 환영이나 아편의 환영은 ‘영감의 존재’를 숨겨 줄 수 있을 뿐이다. 글로 씌어져서 한 페이지의 문학을 이룰 수 있게 된 시적 몽상이란 반대로 우리에게는 양도될 수 있는 몽상, 영감을 주는 몽상, 말하자면 독자로서의 우리의 재능에 따른 영감이 된다.
그때 고독한, 체계적으로 고독한 현상학자에겐 자료가 넘쳐 난다. 현상학자는 책 속에서 잠자고 있는 수천의 이미지들과 접촉하면서 자신의 시적 의식을 깨울 수가 있다. 그는 으제느 민코브스키가 아주 잘 그 특징을 지적한 현상학적인 ‘울림’이라는 바로 그 의미로 시적 이미지에 반향한다.
하기야 몽상이란 꿈과 다르게,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하자. 그것을 전달하려면 그것이 씌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생생하게 그걸 되살려서, 감동적으로, 멋있게 ‘글로 그것을 써야 한다.’ 우리는 거기에서 ‘글로 씌어진 사랑’의 영역에 부딪친다. 한물간 유행이나 그 이점은 남아 있다. 아직까지도 사랑이란 두 개의 시의 접촉, 두 개의 몽상의 융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한 소설은 사랑을 멋진 이미지와 은유의 경쟁으로 표현한다. 사랑을 말하려면 글로 써야한 다. 아무리 많이 써도 지나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멋진 데이트를 끝내고 돌아와서 문방구 상자를 여는 것일까! 사랑은 계속해서 표현되어 왔고, 그것이 시적으로 몽상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 잘 씌어진다. 고독한 두 넋의 몽상은 부드러운 사랑을 준비한다. 정열에 대해 리얼리스트적인 관점을 가진 자는 거기에서 덧없는 형식만을 볼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정열은 위대한 몽상 속에서 준비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랑을 비현실성에서 떼내면서 사랑의 현실성을 잘라 내는 것이다.
이런 조건하에선, 몽상가에 대한 관찰에 의거한 몽상의 심리학과 창조적 이미지의 현상학, 겸허한 독자에게서까지, 시적 언어의 쇄신작용을 돌려보내 주는 경향이 있는 현상학 사이의 싸움이 얼마나 복잡하고 불안정한 것인가를 곧 이해하게 되리라. 보다 일반적으로 상상력이 심리생성의 직접적인 자극원칙으로의 자신의 자리, 첫 번째 자리에 자리잡는 상상적인 것의 현상학을 결정하는데서 오는 커다란 흥미를 또한 이해하리라. 상상력은 미래를 유혹한다. 그것은 우선 무거운 안정성에서 우리를 떼내어 주는 경망스러움의 요인이다. 우리는 어떤 시적 몽상이란 우주 속에 우리를 안심하고 맡기면서 우리의 삶을 넓히는 삶의 가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책 도중에 몽상에 의지하여 우주내에 안심하고 자신을 맡기는 사실의 여러 증거를 제시할 것이다. 하나의 세계, 우리의 세계라는 하나의 세계가 우리의 몽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꿈꾸어진 세계는 바로 우리의 세계인 이 우주에서의 우리 존재의 성장 가능성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꿈꾸어진 세계에는 언제나 ‘미래주의’ 같은 게 있다. 죠에 보스께는 쓴다.
자신에게서 태어나는 세계에서는, 인간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만일 시를 인간적 생성의 격앙 속에서 생각한다면, 새로운 말을 우리에게 부과해 주는 영감의 정점에서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과거, 시인의 무거운 과거에 대해 말해 주는 전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논쟁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과장된 전기를 다루는 참고자료는 모아서 무엇한단 말인가. 견본 하나만을 들어 보자.
반세기 전에, 한 문학비평계의 왕자가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베를레느의 시를----어떻게 문단 변두리에 있는 시인의 시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설명하는 일을 떠맡았다.
거리에서도, 극장에서도, 살롱에서도 그를 본 자는 없었다. 그는 파리의 어느 끝에, 포도주 상인의 뒷방에서, 푸른 포도주를 마신다.
푸른 포도주라니! 그때 몽따뉴 생뜨 쥬느비에브의 조그마한 카페에서 흔히 마시던 보졸레 포도주를 얼마나 모욕한 것인가!
바로 그 문학비평가는 모자를 묘사함으로써 그 시인의 성격을 규정하고 끝낸다. 그는 쓰고 있다. “후줄근한 그의 모자는 그것 자체가 그의 구슬픈 사고에 걸맞는 것 같았다. 이 근심 많은 이마를 보면 일종의 검은 달무리 같은 그의 머리 주변에 모자 끝이 후줄근하게 내려와 있었다. 그 모자! 그러나 때로는 그것 역시 즐겁고 거무스름한 여인처럼 변덕스럽고, 때로는 오베르뉴나 사브와의 아이들이 쓰는 모자처럼 둥글고 순박하고, 때로는 티롤식으로 모자 꼭대기가 찢겨서, 한쪽 귀에 와장창 쏠려 있었다. 한번은 익살스럽게 무서웠다. 되는 대로, 한쪽은 내려가 있고, 한쪽은 올라가 있고, 앞은 투구 앞 같고 뒤는 목덜미 덮개 같은 무슨 도둑놈의 머리쓰개를 보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 시인의 전 작품을 통해서, 모자에 대한 문학적 왜곡으로 설명될 수 있는 시가 단 한 편이나 있는가?
삶과 작품을 결합시킨다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일이다. 전기가 우리에게 도움을 줄 때는 아래의 시가 씌어진 것은 베를레느가 몽스의 감옥에 있을 때라는 것 따위를 말해 줄 때이다.
지붕 위로 하늘은
너무 푸르고 조용하고나!
감옥에서! 우울할 때에는 누군들 감옥에 있지 않겠는가. 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파리의 내 방에서, 나는 베를레느의 몽상을 끌고 간다. 옛날의 하늘이 돌의 도시 위에 펼쳐 있다. 내 기억 속에서는 레일날도 한이 베를레느의 시에 부친 음악이 떠오른다. 짙은 감동, 몽상, 추억이 이 시 위로 나를 위해 자라난다. 시 위로----시 밑으로가 아니다, 내가 체험하지 못한 삶 속에서가 아니다, 불행한 시인의 잘 못 산 삶 속에서가 아니다. 작품이 삶을 지배한 것이 아니었는가? 작품은 잘 못 산 자에 대한 사면이 아닌가?
여하튼, 바로 이 의미로, 시는 몽상을 모으고, 꿈과 추억을 주워 모은다.
심리학적인 문학비평가는 다른 곳에 관심을 두게 한다. 시인을 그는 일반 사람으로 만든다. 그러나 아주 성공한 시에서는, 문제가 그대로 남는다. 어떻게 해서 그의 삶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인이 될 수 있는가?
시적 몽상의 구성적 성격을 지적하는 우리의 소박한 작업으로 그러나 되돌아오자. 그리고 이 일을 준비하기 위해 몽상이란, 어느 정황에서건, 고전 심리학이 암시해 주듯, 이완과 포기의 현상인가 생각해 보자.
4
심리학이 어원에 따른 파생에 비추어 몽상의 기본적인 개념을 만들어 낸다면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게 더 많을 것이다. 바로 그래서 꿈과 몽상을 구별하는 눈에 확 뜨이는 차이도 어원을 따지면 없어져 버린다. 더 나아가, 심리학자들은 아주 특징적인 것에 매달리는 법이므로, 그들은 먼저 꿈, 놀라운 밤의 꿈을 연구하고, 몽상, 그들이 보기에는 구조도 없고 이야기도 없고 수수께끼도 없는, 모호한 꿈에 지나지 않는 몽상에는 별로 주의를 하지 않는다. 몽상은 그때 대낮에는 기억되지 않는 약간의 밤의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꿈의 물질이 조금은 몽상가의 넋 속에 압축된다면, 몽상도 꿈 속에 떨어져, 정신병 의사들이 주목한 {몽상의 입김}이 심리 상태를 질식시키게 되고, 몽상은 수면상태가 되어, 몽상가는 잠이 든다. 일종의 추락의 운명이 이처럼 몽상에서 꿈으로 이어지는 것을 특징지운다. 오수로 인도하는 한심한 몽상. 이 ‘잠에 떨어짐’에서 무의식 자체가 존재의 몰락을 겪지 않나 자문해야만 한다. 무의식은 진짜 수면의 꿈 속에서야 제 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심리학은 명확한 사고와 밤의 꿈이라는 두 극점을 향해 일을 하는데 그럼으로써 인간 심리의 전영역을 검토하게 된다.
그러나 낮의 삶과 밤의 삶이 섞이어 있는 황혼 상태에 속하지 않는 다른 몽상이 있다. 낮의 몽상은 여러 면에서 직접적인 연구를 할 만하다. 몽상은 아주 자연스러운----또한 심리적 평정에 아주 유용한----정신적 현상이어서, 그것을 꿈에서 파생된 것으로 취급할 수 없으며, 다짜고짜 꿈의 현상 속에 위치시킬 수는 없다. 간단히말해서 몽상의 본질을 규정하려면 몽상 자체로 되돌아오는 것이 좋다. 그리고 바로 현상학에 의해, 꿈과 몽상 사이의 구별이 명백해질 수 있을 것인데, 왜냐하면 의식이 몽상 속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은 결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꿈의 의식이 있는가 없는가를 자문해 볼 수 있다. 꿈이란 참 이상한 것이어서, 어떤 다른 사람이 우리 속에 와서 꿈을 꾸는 것같이 보인다. “어떤 꿈이 나를 방문했다.” 이것이 그 대단한 밤의 꿈의 수동성을 지적해 주는 좋은 공식이다. 이 꿈들이 바로 우리 것들이라는 것을 확신하려면 그것들을 다시 살아야만 한다. 일이 끝난 후에, 우리는 그걸로 이야기, 다른 때의 이야기, 다른 세계의 모험담을 꾸민다. 멀리서 오는 자는 거짓말을 해도 나무랄 자가 없는 법이다. 우리는 흔히 고지식하게, 무의식적으로, 밤의 왕국에서 일어난 우리의 아름다운 모험을 더 멋있게 하는 한 특징을 덧붙인다. 자기 꿈 얘기를 하는 자의 얼굴을 주의해 본 적이 있는가? 그는 자기 드라마, 자기 공포에 대해 웃는다. 그것을 그는 즐기고 있다. 당신들도 그걸 즐기길 바라기까지 한다.
꿈을 얘기하는 자는 자기 꿈을 마치 독창적인 창작품처럼 즐긴다. 그는 위임받은 독창성을 산다. 그래서 정신분석가가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은 ‘독창성’을 꿈꾼 바 있다고 말하면 아주 놀라는 것이다. 자기가 말하는 꿈을 ‘살았노라’는, 꿈을 꾸는 자의 확신 때문에 우리가 속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야기할 때마다 강화되는 옮겨 심은 확신인 것이다. 이야기하는 주체자와 꿈을 꾼 주체자 사이에 동일성은 거의 없다. 밤의 꿈의 완전히 현상학적인 설명은 이 사실에 비추어 아주 어려운 문제이다. 몽상의 심리학, 그리고 뒤이어 몽상의 현상학이 더 발달한다면, 그 문제를 푸는 데 쓰일 수 있는 자료들을 갖게 될 것이다.
몽상에서 꿈을 찾는 대신, 꿈 속에서 몽상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악몽 가운데도 조용한 해변가가 있는 법이다. 로베르 데스노스는 꿈과 몽상의 이 간섭에 유의한 바 있다. “잠자면서 꿈인지 몽상인지 명확히 구별해 낼 수 없을 정도로 꿈꾸면서도 나는 배경이라는 개념을 간직하고 있다.” 무슨 소린가 하니 밤에 자면서, 꿈꾸는 자가 찬란한 대낮을 되찾는다는 소리다. 그는 그때 세계의 아름다움을 의식하고 있다. 꿈속의 세계의 아름다움이 일순 그의 의식을 되돌려 준 것이다.
이처럼 몽상은 존재의 휴식을 깨닫게 해주며, 안존을 깨달게 해준다. 몽상가와 그의 몽상은 몸과 마음이 다 행복의 실체 속에 들어간다. 1844년 느무르를 방문했을 때, 빅토르 위고는 ‘몇 개의 야릇한 사암 도기’를 보려고 황혼녘에 외출을 하였다. 밤이 내리고 마을은 말이 없다. 마을은 어디에 있는가?
이 모든 게 마을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강도 아니고, 색채도 아니고,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니었다. 그것은 몽상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서, 이 표현할 수 없는 총체가, 이 고요한 하늘이, 이 우울한 시간이 내 속에 삼투해 오게 하였다. 내 정신 속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나는 지금 알지 못한다. 그것을 말할 수는 없으나, 그것은 자기 자신 속에서 무엇인가가 잠들고 무엇인가가 깨어나는 것을 느끼는 그 지울 수 없는 순간 중의 하나였다.
이처럼 몽상이 우리의 휴식을 강조하러 올 때는 온 우주가 우리의 행복에 기여하러 오는 것이다. 잘 꿈꾸려는 자에겐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선 행복하세요. 그러면 몽상이 자기의 진정한 운명을 답파한다. 그것은 시적 몽상이 된다. 그 시적 몽상을 통해, 그것 속에서 모든 것은 아름답게 된다. 몽상가가 ‘손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자기의 몽상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작품은 웅장할 것인데 왜냐하면 꿈 속의 세계란 자동적으로 웅장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자들은 자주 ‘세계로 열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들의 말을 듣자면 휘장만 걷으면, 대번에, 단 한번의 조명으로, 세계와 마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적 몽상에 더 주의를 하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구체적인 형이상학적 경험을 하게 될 것인가! 객관적 세계 앞에 몸을 열고, 객관적 세계 속에 들어가서,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간주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실증적 심리학에 의해서만 묘사될 수 있는 오랜 과정이다. 안정된 세계를 수많은 교정을 거쳐 구성하기 위한 이 과정은 우리로 하여금 처음 열릴 때의 광채를 잊게 만든다. 시적 몽상은 우리에게 세계의 세계를 보여준다. 시적인 몽상은 우주적인 몽상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세계, 아름다운 여러 세계로 열림이다. 그것은 자아에게 자아의 재산인 非自我를 준다. 나의 소유인 이 비자아야말로 몽상가의 자아를 매혹하는 것이며 시인들 덕분에 우리가 그것을 나눠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것인 이 비자아’는 세계 내에 있다는 나의 확신을 살게 해준다. 실제 세계와 직면하여, 우리는 자신 속에서 염려의 존재를 발견해 낼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세계 속에 던져지고, 세계의 비인간성에 인도되고, 세계의 부정성에 인도된다. 세계는 그때 인간적인 것의 부정이다. 우리의 ‘현실기능’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 적응하여, 현실로서 구성되기를, 현실이라는 작품을 제작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러나 몽상이란, 그 본질 자체가, 우리를 현실기능에서 해방시키지 않는가? 그것을 그 단순성에서 생각할 때부터, 그것이 ‘비현실 기능’, 급작스러운 적의 있는 비자아, 이방인 같은 비자아의 여백에 있는 인간적인 심리상태를 보유하고 있는, 정상적인 기능, 유용한 기능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된다.
시인의 삶 속에서는 몽상이 현실 자체를 동화하는 시간이 있다. 그가 지각하는 것은 그때 동화된다. 현실세계는 상상적 세계에 흡수된다. 상상력은 “우리가 보는 것을 우리에게 창조시킬 수 있다”고 셸리가 말할 때, 그는 우리에게 진실된 현상학의 한 공리를 제시한 것이다. 셸리를 뒤따르면, 시인들을 뒤따르면, 지각의 현상학은 창조적 상상력의 현상학에 자리를 내놔야 한다.
상상력을 통해서, 섬세한 비현실적 기능 덕분에, 우리는 신뢰의 세계, 신뢰하는 존재의 세계, 바로 몽상의 세계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후에 몽상가와 그의 세계를 연결해 주는 우주적인 몽상의 숱한 예를 제시할 작정이다. 현상학적으로 추적을 하게 되면, 이 결합은 저절로 주어지게 된다. 현상세계에 대한 지식은 복잡한 현상학적 탐구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꿈 속의 세계, 정신이 멀쩡할 때의, 낮의 몽상의 세계는 정말 초보 현상학에 속한다. 그래서 우리는 몽상을 통해서 현상학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셈이다.
우주적인 몽상은, 후에 우리가 연구하게 되겠지만, 고독이라는 현상, 몽상가의 넋 속에 뿌리가 닿아 있는 현상이다.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기 위해서 그것은 사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의 변명만으로도----명분이 아니다----우리는 “고독한 상황 속에”, 꿈꾸는 고독한 상황 속에 자리잡을 수 있다. 그 고독 속에서는 추억들이 그림처럼 자리잡는다. 배경이 드라마를 지운다. 슬픈 추억도 적어도 우수의 평화를 얻는다. 이것 또한 몽상과 꿈의 차이를 이룬다. 꿈은 대낮의 삶에서는 잘못 경험한 정열로 과중한 짐을 지고 있다. 밤의 꿈속에서 이루어지는 고독은 언제나 적의를 갖고 있다. 그것도 이방의 것이다. 그것은 정말 ‘우리’의 고독이 아니다.
우주적 몽상은 우리를 기획의 몽상에서 떼 놓는다. 그것은 우리를 세계 속에 자리잡게 하지, 사회 속에 자리잡게 하지 않는다. 일종의 안정성, 평온성은 우주적 몽상에 속한다. 그것은 우리가 시간에서 도피하는 것을 도와 준다. 그것은 하나의 ‘상태’이다. 그 본질 깊숙이 가보면, 그것은 넋의 상태이다. 이 책에 앞선 책에서, 우리는 시가 ‘넋의 현상학’을 위한 자료를 가져다 준다고 쓴 바 있다. 넋 전체가 시인의시적 세계 속에 제시되는 법이다.
세계 이해를 시도하기 위해 체계를 세우고, 여러 경험을 정리하는 일은 정신이 해야 할 일이다. 지식의 역사를 따라 인내심 많게 배우는 것은 정신에 알맞은 일이다. 넋의 과거는 아주 먼 것이다! 넋은 시간을 따라서 살지 않는다. 넋은 몽상이 상상하는 우주 속에서 휴식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러므로 우주적인 이미지가 넋, 고독한 넋, 모든 고독의 원칙인 넋에 속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사고는 정신이 서로 교류함에 따라 세련되고 증대되어 간다. 이미지들은 그들의 장려함으로 아주 단순한 넋의 일치를 이룬다. 공부하는 데는 지식과 시라는 두 개의 어휘 체계가 조직되어야 하리라. 하나 이어휘들은 서로 교통하지 않는다. 사전을 들고 한쪽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려 해봐야 헛일이다. 시인의 언어는 바로 넋의 언어처럼 직접 터득되어야 한다.
시적 가치보다 훨씬 중요한 것으로 통하는 인간적 혹은 초인간적 가치를 끌어 넣으면서, 철학자에게 보다 극적인 영역에서 이 넋의 일치를 연구하라고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넋의 위대한 경험들이 그렇다고 주장됨으로써 이득을 얻을 수 있을까? 저마다 감성적인 글을 읽으면서 시적 몽상의 초대에 자기 식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깊이 있는 온갖 울림에 몸을 맡길 수 없을까? 우리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 책의 한 장을 거기에 바칠 예정이지만, 무명의 유년시절이 가족사라는 배경 속에 파악된 한 개인의 유년시절보다 인간의 넋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계시해 주리라고 믿고 있다. 본질적인 것은 이미지가 정확하게 울린다는 것이다. 그때에야 그것이 넋의 길에 접어들어, 비판적인 정신의 항의 속에서 난처해 하지 않으며, 무거운 억압의 메카니즘에 사로잡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바랄 수 있다. 몽상 깊숙이서 자기의 넋을 다시 발견하는 것은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몽상은 우리를 태어나는 넋의 상태에 있게 한다.
그래서 단순한 이미지를 소박하게 연구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철학적 야심은 크다. 그것은 몽상이 우리에게 한 넋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것, 시적 이미지가 자기 세계, 자기가 살고자 하는 세계, 자기가 살 만한 세계를 발견해낸 한 넋을 증언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5.
이 에세이에 취급된 개별적인 문제들을 더 정확하게 지적하기 전에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정당화시키고 싶다.
‘시적 몽상’이라는 아주 간단한 제목이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는데도 ‘몽상의 시학’이라고 쓴 것은 몽상가가 정말 자신의 꿈에 충실하고 그래서 그의 몽상이 바로 그 시적 가치 때문에 수미일관성을 얻게 될 때 그가 얻는 수미일관성의 힘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시는 몽상가와 그의 세계를 동시에 구축한다. 밤의 꿈이 넋의 질서를 파괴하여, 바로 그 낮에 밤에 시도한 광태를 퍼뜨릴 수도 있는 반면, 좋은 몽상은 정말로 넋으로 하여금 휴식을 즐기고, 쉽게 통일성을 즐길 수 있게 도와준다. 심리학자들은 지나치게 열광적으로 현실주의에 집착하여 우리 몽상의 도피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들은 몽상이 몽상가 주변에 부드러운 관계라는 천을 짜고 있으며, 그것이 ‘붙임성 있는 것’이며, 간단히 말해 그 말의 가장 강렬한 의미로 몽상가를 ‘詩化’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몽상가편에서, 몽상가를 이루며, 우리는 그러므로 심리학적인 시학, 모든 심리적 힘이 조화를 이루는 심리의 시학이라고 지칭될 수 있는 詩化力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러므로 정돈과 조화의 힘이 형용사에서부터 명사로 미끄러져 가기를 바라며 그래서 시적 몽상의 시학을 수립하기를 바란다. 같은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명사가 존재의 색조를 얻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지적하고 싶다. 시적 몽상의 시학! 대단한 야심, 너무 대단한 야심이다. 그것은 시의 모든 독자에게 시인의 의식을 부여해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적 표현에서 창조자의 의식으로 우리를 옮겨가게 할 이 전도를 완전히 이루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몽상하는 존재에게 거리낌없는 마음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그런 전도에 시동을 걸 수 있다면, 우리의 몽상의 시학은 그 목표를 이미 달한 것이다.
6
그러므로 아주 간단하게 어떤 정신으로 이 에세이의 여러 장을 썼는가 말해 보자.
조심성 많은 철학자로서의 우리의 습관에 따라, 명확한 자료에 의거한 탐구, 실증적 시학의 탐구에 종사하기 전에, 우리는 보다 연약한, 아마도 보다 개인적이며, 서론에서부터 설명되어야 하는 한 장을 쓰려 하였다. 그 장의 제목으로 우리는 ‘몽상에 대한 몽상’을 택했으며, 우리는 그것을 두 부분으로 나눴는데, 첫 번째 부분은 ‘말의 몽상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고, 두 번째 부분은 ‘아니무스와 아니마’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두 장에서, 우리는 쉽게 항의할 수 있는, 우리가 바로 그걸 두려워하는 것이지만, 사고를 조직하게 해주는 책에서 무위라는 오아시스를 찾아내는 걸 싫어하는 독자들이 팽개쳐 버리기 십상인 매우 위험한 생각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꿈꾸는 심리상태의 안개 속에서 사는 게 문제되고 있으므로, 우리를잡아끄는 온갖 몽상, 흔히 우리의 추론적인 몽상을 혼란시키는 특이한 몽상을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성실한 의무였으며, 우리에게는 친숙한 착란 전선을 끝까지 따라가 보는 것이 의무였다.
나는 사실 말의 몽상가, 글로 씌어진 말의 몽상가이다. 나는 내가 책을 읽고 있다고 믿는다. 말 하나가 나를 사로잡는다. 나는 그 페이지를 떠난다. 말의 음절이 파닥거리기 시작한다. 강세 악센트가 역류되기 시작한다. 말을 꿈꾸는 걸 방해하는 아주 무거운 짐인양 의미를 내던져 버린다. 말들을 그때 자기들에게 그걸 짊어질 권리가 있다는 듯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말들을 어휘라는 숲속으로 새로운 무리, 나쁜 무리를 찾아간다. 방황하는 몽상에서 추론적인 어휘로 되돌아올 때 숱한 하찮은 갈등 따위야 해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책을 읽는 대신 글을 쓰기 시작할 때면 사정은 더 나빠진다. 펜 밑에서, 음절의 관절이 서서히 풀린다. 말은 내적 몽상의 위험에 빠져 음절로 산다. 어떤 문장 속에 관습적인 굴종 상태에 억지로 잡아매 놓음으로써----어쩌면 초고에서 지워버릴 지도 모르는 문장 속에 말이다----그 말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문제가 그때 남는다. 몽상이 어제 시작한 문장에 가지를 치지 않는가? 말이란 잔가지가 되려는 싹이다. 그러니 글을 쓰면서 어떻게 꿈을 안 꾼단 말인가. 꿈꾸는 것은 펜이다. 꿈꿀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흰 페이지이다. 자신만을 위해 글을 쓸 수 있다면! 책을 만드는 자의 운명이란 얼마나 고달픈 것이랴! 생각을 이어나갈려면 잘라내고 다시 꿰매야 한다. 그러나 몽상에 대한 책을 쓴다면 펜이 마음대로 달려다니고 몽상이 말을 하고, 더 좋은 것으로는, 몽상을 베낀다고 믿는 시간에 몽상을 꿈꾸는 날이 왜 안 왔겠는가.
나는 이걸 말할 필요가 있을까마는, 언어학에는 문외한이다. 말들은 그들의 오랜 역사 속에 내 몽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들은 몽상가에겐, 말의 몽상가에겐, 광기로 잔뜩 부풀어 있다. 하기야 누구나 말의 꿈을 꾸어서 잠시 친숙한 말의 ‘알을 품게’하라. 그러면 화석화된 의미처럼 생기 없는 의미 속에서 잠자고 있던 말로부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아주 드문 것들이 부화되어 나온다.
----그렇다. 정말, 말들이 꿈꾼다.
허나 말에 대한 나의 몽상의 광태증에서 하나만 얘기해 보고 싶다. 남성명사마다나는 잘 결합된, 씩씩하게 결합된 여성형을 꿈꾼다. 나는 아름다운 프랑스 어휘들을 한번은 남성으로, 한번은 여성으로, 두 번 꿈꾸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단순한 문법적 어미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여성형이 하위 성이라는 것을 믿게 할지 모른다. 거의 그 뿌리에서, 극단의 깊이에서, 다시 말해 여성다움의 깊이에서 여성형을 발견했을 때에야 나는 행복하다.
말의 성이라----어디로 갈 것인가? 허나 잘 갈라놨다고 사람들은 안심하고 있는 건가? 단어집은 아주 편파적인 것같이 보인다. 그것은 흔히 여성형을 부차적, 하위의 성으로 취급하면서 남성형을 우대한다.
말들 속에 여성적인 깊이를 다시 열어 놓는다는 것, 이제 언어학적 효능에 대한 나의 꿈 중의 하나이다.
이 헛된 꿈을 다 털어 놓게 되었다면, 그 꿈들이 우리가 이 책에서 옹호하려 하는 중요한 주장 중의 하나를 우리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였기 때문이다. 흔히 남성형의 딱딱한 어투라는 특성을 갖고 있는 꿈과 아주 다르게 몽상은 사실----이번에는 말을 뛰어넘어----여성적인 본질로 나타났다. 조용한 대낮의 몽상, 평화로운 휴식 속의 몽상은----진짜 자연스러운 몽상은 휴식을 하고 있는 존재자의 힘 자체이다. 그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있어 넋의 여성적 상태이다. 우리는 제2장에서 이 주장에 맞는 훨씬 비개인적인 증거들을 내세워 보도록 하겠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해내려면 몽상들을 아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몽상을 이미 인정했다. 이 몽상의 실마리를 뒤따라가기를 수락하는 자들은, 자신의 몽상을 몽상의 몽상으로 구분하는 자들은, 아마도 꿈 저 밑에서, 대단히 조용한 내면의 여성적 존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기억, 아주 오랜 기억, 추억의 그 규방에 되돌아올 것이다.
제1장보다 훨씬 실증적일 제2장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상의 몽상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심리학자가 제공한 자료를 잘 이용할 터이지만, 그 자료를 우리 자신의 몽상과 뒤섞을 것이므로, 심리학자의 지식을 이용하는 철학자가 자기 자신의 과오를 책임져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여성의 지위는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시몬느 드 보브와르와 F. J. J. 뷔텐지이크의 책 같은 것들은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다.
우리는 여성형과 남성형----특히 여성형----이 어떻게 우리의 몽상에 작용하는가를 조금 명확히 하려고 시도하면서 ‘꿈의 상태’에 대해서만 관찰하겠다.
우리는 그때 우리의 논지 대부분을 심층심리학에서 빌어올 작정이다. C. G. 융은 그의 숱한 책 속에서 인간심리학의 심오한 이중성의 존재를 밝혀 주었다. 그는 아니무스와 아니마라는 기호로 이 이중성을 설명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남성심리건 여성심리건, 모든 심리현상에는, 때로는 서로 협력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로 부딪치기도 하는,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존재한다. 우리는 심층심리학이 이 내적 이중성이라는 테마와 관련시켜 전개한 논지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을 작정이다. 우리는 단지 아주 단순하고, 아주 순수한 상태의 몽상은 아니마에 속한다는 것만을 입증해 보이겠다. 확실히, 도식화는 현실을 재단해 버릴 위험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관점을 고정시킬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대충 우리에게 있어서 꿈은 아니무스에, 몽상은 아니마에 속한다고 말해 두자. 드라마, 사건, 과거 없는 몽상이란 진정한 휴식, 여성다움의 휴식을 우리에게 부여해 준다. 거기서 우리는 삶의 부드러운 면을 알게 된다. 부드러움, 느릿느릿함, 평화, 그것은아니마의 몽상이 내세우는 신조이다. 몽상 속에서야 우리는 휴식의 철학의 기본요강을 발견할 수 있다.
아니마라는 극점을 우리의 몽상이 향할 때, 그것은 우리의 유년시절로 우리들을 다시 이끈다. 유년시절로 되돌아가는 몽상이 제3장의 대상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어떤 각도에서 우리가 유년시절의 추억을 다룰 것인가를 지적해 두어야겠다.
이전에 쓴 책에서, 상상력과 기억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한다면 창조적 상상력의 심리학을 세우지 못하리라고 우리는 자주 말했다. 그것의 구별이 아주 어려운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유년시절의 영역, 사랑받아, 유년시절부터 기억 속에 간직된 이미지의 영역이다. 이미지를 통해, 이미지의 효능 속에서 살아나는, 이 추억들은 우리의 삶의 어느 순간에는, 특히 나이들었을 때는, 복잡한 몽상의 원천이며 자료이다. 기억은 꿈을 꾸며, 몽상은 추억한다. 추억의 몽상이 시 작품의 씨가 될 때면, 추억과 상상력의 복합체가 긴밀하게 이루어져, 시인의 성실성을 배신하는 복잡하고 상반되는 행위를 하게 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행복한 유년시절의 추억은 ‘시인의 성실성’을 가지고 말해진다. 계속해서 상상력은 기억을 부추기고 기억을 비춰준다.
우리는 요약된 형태로 유년시절의 항구적 성격을 드러내 주는 유년시절에 대한 존재론적 철학을 제시하도록 애를 쓸 작정이다. 그것의 어떤 특성을 통해, “유년시절은 일생 내내 지속된다”. 그것은 성년의 삶의 커다란 부분을 활기 있게 만든다. 우선 유년시절은 자기의 밤의 숙소를 절대 떠나지 않는다. 우리 속에서, 때로는 한 어린 아이가 우리 꿈 속에 우리를 감시하러 온다. 그러나 깨어나 있을 때, 몽상이 우리의 과거로 향할 때, 우리 속에 있는 유년시절은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다. 때로는 아주 좋은 일인데 우리에게는 어린 아이였을 때의 우리와 함께 살 필요가 있다. 그런 삶에서 우리는 뿌리를 의식하게 된다. 존재의 나무 전체가 그걸로 튼튼해 진다. 시인들은 우리 속에 있는 이 생생한 유년시절을, 영원하고 영속적이고 움직이지 않는 이 유년시절을 되찾게 도와 줄 것이다.
서론에서부터 우리는 ‘유년시절에 대한 몽상’에 대한 이 장에서 어린이의 심리학을 발전시키지 않겠다는 것을 강조해야만 하겠다. 우리는 유년시절을 몽상의 테에마로만 받아들이고 있다. 어떤 연배에서나 되찾을 수 있는 테에마이다. 우리는 몽상과 아니마의 묵상에만 머무른다. 유년시절의 드라마를 밝혀내려면, 특히 이 드라마가 없어지지 않으며 다시 태어날 수 있으며, 다시 태어나길 바라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다른 많은 탐구가 필요할 것이다. 분노는 지속한다. 원초적인 분노는 잠들어 있는 유년시절을 깨운다. 때로는 고독 속에서, 이 억압된 분노는 복수의 계획, 범죄의 계획을 살찌게 한다. 그건 아니무스의 건조물이다. 그건 아니마의 몽상이 아니다. 그걸 검사하려면 우리는 계획과는 다른 조사 계획이 필요할 것이다. 드라마의 상상력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는 누구나 어린 아이의 분노, 청년의 반항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시인 삐에르 쟝 쥬브 같은 심층심리학자는 틀림없이 그렇게 한다. ‘피어린 이야기’라고 제목을 붙인 꽁트집에 서문을 쓰면서, 시인은, 정신분석학적 문화를 요약하여, 자기 얘기 밑에는, ‘유년시절의 상태’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끝나지 아니한 드라마는, 아니무스가 활동하고 있고, 제대로 보고 있고, 신중하고 호방하며 복잡다단한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낸다. 몽상을 분석한다는 우리들의 일에만 매달려, 우리는 아니무스 연구는 옆으로 밀어 놓을 작정이다. 유년시절을 향한 몽상에 대한 이 장은 그러므로 哀歌의 시간의 형이상학에 대한 기여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이내적인 애가의 시간, 지속되는 회한의 시간은 심리적인 현실이다. 지속하는 지속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장은 그러므로 잊혀지지 않는 것의 형이상학의 밑그림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철학자로서의 그의 오랜 사고의 습관에서 벗어나기가 힘이 든다. 여가에 대한 책을 쓰는데도 말들이, 옛날 말들이 작동하려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몽상가의 코기토’라는 아주 현학적인 제목을 붙인 한 장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철학자로서 40년을 살아오면서, 나는 철학이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을 다시 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하곤 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아마 이 제일과를 말해야 했었나 보다. 사고의 세계에서는 그것은 너무나 명백한 좌우명이다. 그러나 만일 몽상가에게 네가 바로 꿈을 꾸는 존재라고 확신하느냐 묻는다면 그 독단론을 어지럽히지나 않을런지? 그런 질문으로 데카르트 같은 사람은 고생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사고, 의지, 사랑, 꿈이 다같이 자기의 정신활동인 것이다. 그 행복한 사람은 그게 바로 자기, 정말 바로 자기, 정열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자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밤의 광태를 겪는 꿈꾸는 사람, 진짜 꿈꾸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계속 밤의 꿈의 분석은 미루어 두었다. 그래서 우리는 약간 개략적인 다음과 같은 구별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리의 조사를 밝게 해주게 되어 있다. 밤에 꿈꾸는 사람은 코기토를 진술할 수 없다. 밤의 꿈은 꿈꾸는 사람 없는 꿈이다. 반대로 몽상을 꿈꾸는 사람은, 몽상을 꿈꾸는 자는 나다, 내 몽상을 꿈꾸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은 나다, 내가 사고하는 일을 주지 않는 이 휴식에 행복해 하는 것은 나다라고 말할 만한 의식은 갖고 있다. 시인의 몽상에 힘입어 ‘몽상가의 코기토’라는 제목을 단 이 장에서 우리가 밝히려고 애를 쓴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몽상을 꿈꾸는 사람은 코기토의 고독에 몰두하지는 않는다. 꿈꾸는 그의 코기토는 철학자들이 말하듯 코기타툼(생각하는 대상)을 곧 갖게 된다. 곧 몽상가는 하나의 대상, 몽상가의 친구이며 동반자인 단순한 대상을 갖게 된다. 물론 시인들에게서 우리는 몽상에 의해 詩化된 대상의 예를 얻어 왔다. 시인들이 제공한 온갖 시의 반사광을 살면서, 몽상을 꿈꾸는 나는 자신이 시인이 아니라, 시인화하는 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경직화된 철학에 접근한 뒤,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자극받은 주체자와 극단적인 세계의 변증법에 의해 계속 유혹받는 몽상의 극단적인 이미지들을 검토하였다. 나는 세계를 개시해 주고, 세계를 키워주는 이미지들을 뒤쫓고 싶었다. 우주적인 이미지는 때로는 너무 장엄해서 철학자들이 그것을 사고로 취급할 정도이다. 우리에 알맞게 그것을 다시 살면서, 우리는 그것들이 몽상의 이완이라는 것을 입증하려 애를 썼다. 몽상은 세계에 거주하도록, 세계의 행복에 거주하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장의 제목을 ‘몽상과 우주’라고 붙였다. 그렇게 광범위한 문제를 짧은 한 장 속에 취급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상상력에 대해 연구를 하면서 여러 번 거기에 접근해 보았으나 깊이 있게 취급하지는 못했다. 이제 조금 더 분명하게 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하겠다. 상상되는 세계는 몽상의 깊은 일치를 야기시킨다. 관조된 세계의 위대함 앞에서의 감탄, 깊은 관조 속에서 상상된 세계의 위대함 앞에서의 감탄을 고백해 보라고 요망하면서, 어떤 사람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될 정도로 그러하다. 정신분석학자들처럼, 이 간접적 조사의 대가들도, 우주 분석을 시술한다면, 넋 깊숙이 내려갈 수 있는 새 열쇠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우주 분석에 대해서는, 프로망땡에게서 빌어온 예가 하나 있다. 도미니끄는 자기 정열의 결정적인 순간에, 마들레느를 그가 오랫동안 골라 놨던 풍경화로 이끌고 간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겪었던 심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체적인 어떤 영향이 마들레느에게도 작용하나 시도해 보고 싶었다. 나는 그녀를 어떤 풍경화 앞에 세웠다. 언제나 약간의 초록색, 짙은 햇빛, 거대한 넓이의 바다로 이루어져, 어쩔 수 없게 나를 감동시키는 그림 중에서 뽑은 것들이었다. 나는 어느 정도로 그녀가 감동을 받는지, 빈곤의 면, 아니면 거대함의 면, 그 어느 면에서 이 쓸쓸하고 존엄하고 언제나 장식 없는 이 수평선이 그녀의 마음에 드는지를 관찰했다. 할 수 있는 한, 완전히 외적인 감수성의 세목들에 대해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이처럼, 무한한 공간 앞에서, 질문을 받은 존재는 자연스럽게 성실하게 되는 것 같다. 풍경은 한심하고 유동적인 사회적 ‘정황’을 지배한다. 우리의 고독한 존재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우지 자신이 되기 위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세계를 우리에게 개시해 준다면, 그 풍경첩은 얼마나 가치를 가지고 있으랴! 이 풍경첩을 우리는 몽상에서 아주 풍요하게 얻어 낸다. 잦은 여행에서도 얻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완전히 불타오르고, 완전히 열기를 내뿜고, 완전히 퍼져 나가는 세계를 상상한다. 시인은 우리를 게속 쇄신되는 우주로 이끌고 간다. 낭만주의 내내 풍경은 감상성의 도구였다. 우리는 그래서 마지막 장에서 우리가 우주적 몽상에서 얻게 되는 존재의 확산을 연구하려고 해보았다. 우주에 대한 몽상가는 책임감이 필요 없는 몽상,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 몽상을 알게 된다. 끝으로 우주를 상상한다는 것은 몽상의 가장 자연스러운 운명이다.
7
이 서론의 끝에, 간략하게, 우리의 고독 속에서 심리적 조사에 의뢰하지 않고서, 어디서 우리의 자료를 찾아야 하나를 말해 보자. 그것은 책에서 온다. 우리의 온 생애는 글쓰기이다.
글읽기는 현대적 심리현상의 ‘차원’이다. 글쓰기에 의해 벌써 바뀌어진 심리현상을 다시 바꾸는 차원이다. 글로 씌어진 언어는 특이한 심리적 실재로 취급되어야 한다. 책은 영속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대상처럼 우리 눈 아래 있다. 책은 저자 자신도 갖지 않고 있는 단조로운 권위를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말한다. 글로 씌어진 것은 잘 읽어야 한다. 글을 쓰기 위해서, 하기야, 저자는 벌써 바꾸어 놓기를 행한 것이다. 그는 그가 쓴 것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항의해 봐야 소용없는 일인데, 그는 이미 글로 씌어진 심리현상의 지배 밑에 들어간 것이다.
교육받은 심리현상이 거기서는 영속성을 갖는다. 에드가 끼네가 라마야냐의 전달력을 말하는 그 대목은 얼마나 심오한가! 발미키가 그의 제자들에게 말한다. “천계의 시를 배우라. 그것은 덕과 부유함을 준다. 그게 삼박자에 걸맞을 때는 부드러움에 가득차고, 악기 소리와 어울릴 때 그리고 七聲帶에 맞추어 노래될 때는 더 부드럽다. 황활한 귀는 사랑, 용기, 고뇌, 공포를 자극한다...... 오 위대한 시여, 진실의 충실한 영상이어.” 묵독, 느린 책읽기는 귀에 이 모든 콘서어트를 들려 준다.
그러나 책의 특수성의 가장 멋진 증거는, 그것이 잠재적 성질의 실재이며, 실재의 잠재적 성질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로 하여금 고통하게 하고, 희망을 갖게 하고, 관대하게 하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삶의 인상은 아주 복잡하여, 우리의 고뇌는 우리의 자유의 지배하에 있으며, 우리의 고뇌른 근본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고뇌하는 책은 그때 고뇌축소기술을 줄 수 있다. 고뇌하는 책은 고뇌하는 자들에게 고뇌 유사유법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유사요법은 특히 생각을 하며 하는 글읽기, 문학적 호기심에 의해 가치부여된 책읽기 속에서 작용한다. 그때 심리현상의 이 두 레벨은 분열되고 독자가 이 두 레벨에 참여한다. 그가 ‘고뇌의 미학’을 잘 의식하게 될 때, 그는 그것의 부자연성을 발견하게 될 찰나에 이른다. 고뇌는 인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숨을 잘 쉬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모든 미학적 즐거움의 정상인 시가 유용하다.
시인의 도움이 없다면, 나이만 먹은, 그러면서도 정신력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철학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테스트해 볼 사람이 없다. 심리학자가 검토한 주체자가 날뛰고 있는 테스트와 대응 테스트의 미로 속에 그는 곧 빠져버릴 것이다. 하기야 심리학자의 창고에 정말 상상력 테스트가 있는가? 고양된 상상력 연구의 객관적 방법을 계속 쇄신할 수 있는 고양된 심리학자가 있는가? 시인들은 항상 그들이 상상하는 것을 바라다보는 자보다 더 빨리 상상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시세계 속에 어떻게 들어갈까? 자유로운 상상력의 시대가 열렸다. 사방에서 이미지들이 대기를 침범하고,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건너가고 강대한 꿈에 혹은 귀를 혹은 눈을 부른다. 시인들이 넘쳐난다. ----대소시인, 유명한 시인,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 사랑받는 시인, 매혹하는 시인, 시를 위해 사는 자는 모든 걸 다 읽어야 한다. 하찮은 팜플렛에서도 나로서는 새로운 이미지의 빛이 얼마나 자주 솟구쳐 나왔던가! 새로운 이미지에 의해 활기를 얻는 걸 받아들인다면, 낡은 책의 이미지에서도 무지개 빛을 발견할 수 있다. 여러 시의 세대는 생생한 기억 속에 통합된다. 새 세대가 옛 세대를 깨운다. 옛 세대가 새 세대 속에 다시 살아난다. 시는 다양화될 때에야만 통합된다.
새 책들은 얼마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는가! 정말 매일 새로운 이미지들에 대해 말해 주는 책들이 바구니 가득 하늘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 이 誓願은 자연스럽다. 이 기적은 쉽다. 저기 하늘에서는, 천당이란 거대한 도서관이 아닐까 싶어서다.
하지만 받은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잘 접대해야 한다. 같은 목소리로 교육학자와 영양학자는 말하고 있는데 ‘동화’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 빨리 읽지 말기를, 너무 큰 덩치를 삼키지 않도록 충고한다. 사람들의 충고를 듣자면,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난제를 가능한 한 많은 부문으로 나누라는 것이다. 그렇다, 잘 씹으세요, 조금씩 마시세요, 시를 한 행 한 행 맛보세요. 이 모든 규범은 아름답고 좋다. 그러나 하나의 원칙이 그것을 통괄한다. 우선 먹고 마시고 읽으려는 좋은 욕망이 있어야 한다. 많이 읽고, 또 읽고, 계속 읽으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아침부터 내 책상 위에 쌓인 책 앞에서 독서의 신에게 나는 게걸스런 나의 독자의 기도를 드린다.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굶주림을 주시옵고......”
편집자 주: 가스통 바슐라르(1884- 1962)는 프랑스의 상파뉴 지방의 소읍에서 태어났으며,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독학으로 수학전공의 이학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중, 고등학교의 물리--화학교사와 철학교사를 거쳐서 43세 때 소르본느에서 과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소르본느의 과학철학의 교수가 되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인식론적 단절’, 혹은 ‘인식론적 장애물’이라는 개념은 프랑스의 철학사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개념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는 과학철학의 반대방향에서, 너무나도 반데카르트적이고, 너무나도 반뉴턴적인 ‘시학 이론’의 선구자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몽상의 시학}, {공간의 시학}, {공기와 꿈}, {촛불의 미학}, {물과 꿈}, {불의 정신분석학} 등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시는 한 편, 한 편의 소우주이며, 우리는 그 우주에서 행복하게 살게 되어 있다.
우리 시대의 시세계 속에 어떻게 들어갈까? 자유로운 상상력의 시대가 열렸다. 사방에서 이미지들이 대기를 침범하고,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건너가고 강대한 꿈에 혹은 귀를 혹은 눈을 부른다. 시인들이 넘쳐난다. ----대소시인, 유명한 시인,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 사랑받는 시인, 매혹하는 시인, 시를 위해 사는 자는 모든 걸 다 읽어야 한다. 하찮은 팜플렛에서도 나로서는 새로운 이미지의 빛이 얼마나 자주 솟구쳐 나왔던가! 새로운 이미지에 의해 활기를 얻는 걸 받아들인다면, 낡은 책의 이미지에서도 무지개 빛을 발견할 수 있다. 여러 시의 세대는 생생한 기억 속에 통합된다. 새 세대가 옛 세대를 깨운다. 옛 세대가 새 세대 속에 다시 살아난다. 시는 다양화될 때에야만 통합된다.
새 책들은 얼마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는가! 정말 매일 새로운 이미지들에 대해 말해 주는 책들이 바구니 가득 하늘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 이 誓願은 자연스럽다. 이 기적은 쉽다. 저기 하늘에서는, 천당이란 거대한 도서관이 아닐까 싶어서다.
하지만 받은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잘 접대해야 한다. 같은 목소리로 교육학자와 영양학자는 말하고 있는데 ‘동화’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무 빨리 읽지 말기를, 너무 큰 덩치를 삼키지 않도록 충고한다. 사람들의 충고를 듣자면,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난제를 가능한 한 많은 부문으로 나누라는 것이다. 그렇다, 잘 씹으세요, 조금씩 마시세요, 시를 한 행 한 행 맛보세요. 이 모든 규범은 아름답고 좋다. 그러나 하나의 원칙이 그것을 통괄한다. 우선 먹고 마시고 읽으려는 좋은 욕망이 있어야 한다. 많이 읽고, 또 읽고, 계속 읽으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아침부터 내 책상 위에 쌓인 책 앞에서 독서의 신에게 나는 게걸스런 나의 독자의 기도를 드린다.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굶주림을 주시옵고......”
가스통 바슐라르는 니체와 쇼펜하우어 이후, 가장 멋진 서문을 쓴 철학자이며,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가장 멋진 ‘시학’을 정립한 철학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 책은 김현 역의 {몽상의 시학}(기린원, 1989년)이며, 독자 여러분들 꼭 이 책을 구입해서 정독하기를 바란다.
첫댓글 이처럼 도끼날 같은 서문을 어느 책에서고 본적이 없다. 책을 잘 읽지 않는 나로서는 충격적인 서론이다. 이 아침이 상쾌하다. 귀한 글을 올려주신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