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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말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1850~1864)
광동성(廣東省) 화현(花縣) 출신의 서생 출신이던 홍수전(洪秀全, 중국명 홍슈치안)은 여러 번 원시(院試, 과거의 초기단계)에낙방하였기에 실망하여 약 40일간 병석에 드러누웠는데, 이 때 불가사의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꿈은 상제<야훼>라고 생각되는 기품있는 노인이 파사(破邪)의 검을 주었고, 또 예수처럼 생긴 중년남성이 요마를 베는 도끼를 주었었다.
홍수전은 병이 완치되자 광저우(廣州)에서 열린 과거에 참가하러 갔을 때, 그곳에서 프로테스탄드 입문권유 팜플렛인 권세양언(勧世良言)을 입수하여 이전에 꾸었던 불가사의한 꿈의 의미를 <이해>하여 기독교에 눈뜨게 되었다. 이 불가사의한 꿈과 기독교의접합은 로버트 모리슨이 성서를 번역할 때 God를 음으로 표기하지 않고, 상제(上帝)라는 번역에 따른 기인이라 여겨진다.
홍수전은 기독교의 가르침 중에서 특히, 상제가 유일신인 것을 강하게 의식하여 우상파괴를 열심히 실시했다. 원래 다신교적인 기풍의 중국에서 유교, 불교, 도교와 관련된 사당이 많았는데, 이것을 파괴하고 단지 상제만을 섬기라고 요구했기에 고향인 광동성에서의 포교활동은 일족과 몇 명의 찬동자를 빼고는 등을 돌려 성공하지 못했다.
홍수전은 효과적인 포교방법을 모색할 수 밖에 없어, 원도구세가(原道救世歌) 및 원도성세훈(原道醒世訓)이라는 포교문서를 집필했다.
1847년에 태평천국의 전신 조직인 배상제회(拜上帝會)를 광시성(廣西省) 계평현(桂平縣) 금전촌(金田村)에서 창설했는데, 여기서 찬동자 중 한명이던 풍운산(馮雲山, 중국명 펑윤샨)이 포교활동을 펼쳐 약 3천명의 신도를 모아 홍수전을 받들었다.
배상제회의 참가자는 광부, 빈농, 막노동자, 몰락유생 등의 하층민이 중심이 되었다. 고향인 화현에서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계평현에서 성공을 이룬 가장 큰 이유는 현세이익 중심의 포교였다. 단순한 종교열정과 이론만 설파한 것이 아니라 현재 생활에 득이 생기는 일을 강조한 것으로 풍운산은 많은 신도를 끌어모았다.
그러나 조직의 확대는 공권력과 지주들과의 마찰을 불러 일으켰다. 풍운산을 비롯해 배상제회의 신도들이 차례로 체포되면서 홍수전은 이제까지의 종교활동에서 정치혁명으로 발을 돌렸다. 1850년에 배상제회는 금전촌에 집결해 단영(団営)이라는 군사조직을 결성했다.
여기엔 엄격히 남녀를 구분한 후 각각 남영(男営), 여영(女営)에 입영시켰다.
그리고 비밀리에 총과 대포 등의 무기를 만들며 혁명의 준비를 진행해 나갔는데 금전촌에 집결하는 과정에서 청나라 군대와 자경단과 소규모 경합이 발생했다. 금전촌에 집결한 삶들은 1만~2만 정도였는데 그 중 성인남자는 3천명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은 몇 배나 앞선 청나라 관군을 격파하여 혁명의 기치를 들어 올리게 되었다.
1851년 1월 11일에 금전촌에서 배상제회는 국호를 태평천국(太平天国)을 하고, 홍수전은 자신을 천왕(天王)이라고 칭하였다. 하지만 태평천국을 칭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 명확하지는 않다. 정식으로 정해진 것은 얼마 후인 3월 23일로, 이 날을 등극절이라 칭했다.
국호를 세움으로서 청국 조정에 공공연히 반기를 든 태평천국이었지만 난징(南京)에 머무르기 전까지는 각지를 떠도는 유랑도적에 불과했다. 태평천국군은 먼저 등현을 거쳐 영안(永安)을 점령했다. 등현에서는 태평천국을 담당하는 각 무장들이 참가했다. 영안에서 반년간 체재한 태평천국군은 여기서 관제와 관직 등을 결정하여 나라의 체제를 정비했다.
그리고 천왕인 홍수전 아래, 오왕(五王)이라 하여 동왕(東王)으로 양수청(楊秀淸), 서왕(西王)으로 소조귀(蕭朝貴), 남왕(南王)으론 풍운산, 북왕(北王)으론 위창휘(韋昌輝), 익왕(翼王)으로 석달개(石達開)가 최고간부가 되었다. 그 중 양수청은 천부하범(天父下凡), 소조청은 천형하범(天兄下凡)이라 칭하며 각각 야훼와 기독교의 수탁을 받은 자라 말하면서 따로 명령을 내려 차제에 홍수전의 발언력은 줄어들고 말았다.
앞선 아편전쟁에 국력을 소모하고, 같은시기 일어난 애로 호 사건의 여파로 인해 청국 조정은 군대를 넓은 지역에 분산배치해 태평천국군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태평천국군은 청군을 몇 번이나 격파했는데, 그렇지만 식량과 탄약이 고갈되자 양수청의 의견을 따라 북상하여 호남성(湖南省)과 호북성(湖北省)을 목표로 진군했다.
청국 군대와 몇 번이나 충돌하면서 북상을 거듭하던 태평천국군은 1852년 6월에 상강(湘江)에 도착시 남왕 풍운산, 9월에 장사(長沙)를 공략시 서왕 소조청이 전사했다. 두 왕의 전사는 태평천국 수뇌부의 권력구도에 미묘한 변화를 주어 후에 천경사변(天京事變)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두 왕의 전사는 청군과의 교전시 이들을 조상하는 색채를 띄어 태평천국군의 사기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계림과 장사를 공략하지는 못했지만 12월 하순에 한양(漢陽)과 한구(漢口)를 점령하면서 1853년 1월에는 무창(武昌)을 떨어뜨렸다. 무창은 태평천국군이 최초로 함락시켰던 성도(省都)여서, 이 점령은 막대한 금은재보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다시 양수청의 의견에 따라 남경방면으로 수륙양군을 편성해 양자강을 따라 내려간 태평천국군은 3월 19일에 강령(江寧, 남경)을 함락시킨 후 이곳을 천경(天京)이라 개명한 후, 태평천국의 왕조를 세웠다. 4월 27일에 영국 군함<헤르메스>가 남경에 도착해 영국공사인 조지 본햄이 북왕인 위창휘와 익왕 석달개와 회견하여 영국은 청나라와 태평천국간에서 중립입장임을 고했다.
계림을 공격시 격전 끝에 5,000명까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남경을 함락시켰을 때엔 태평천국군은 20만 이상의 병력으로 불어났었는데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 등의 패전배상금 및 재정확보를 위해 몇 배에 달하는 세금을 특히 동남해안부의 지방에서 징수했다.
거기에다 은귀전천(銀貴銭賤)의 현상도 실질적 증세를 강요했다. 당시 토지세는 은으로 납부해야 했기에 사람들은 동전을 은으로 교환하여 납부했다. 그러나 외국과의 교역으로 인해 은이 국외로 유출하는 등, 은과 동전의 교환통로가 변동하여 그때까지 은 1냥에 동전 1,000문이었던 것이 동전 2,000문 이상이 되었다.
이러한 세금의 불공평에 대해 불만을 가진 백성들이 대거 태평천국군에 참가한 것이 수가 늘어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아편전쟁의 여파로 전후 많은 비적들이 횡행했는데, 이들을 태평천국이 흡수한 것도 팽창의 요인이었다. 난징조약으로 인해 교역이 광동의 1개 항구로 한정된 결과 국내의 물류로가 변하게 되어, 화물수송에 관련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일자리를 잃어 비적화되었다.
또 향용(郷勇)이라 불린 임시모병군도 백련교도의 난 이후 해산되어 이들도 비적으로 변했다. 태평천국군은 유랑도적과 비슷했지만 그 성격은 확연히 달랐다. 비적을 흡수해도 군율은 엄격하여 적어도 남경의 함락 전까지는 통솔이 잘되었었다. 이때는 약탈도 금하여 만약 민가에 침입하는 자는 그 발을 자른다는 엄벌에 처했다. 하지만 청군은 비적보다 더 군율이 어지러웠었다.
또, 사기도 매우 높은 것이 특징이었는데, 당시 진압에 나섰던 흠차대신 새상아(賽尚阿)와 양광총독 서광진(徐廣縉)에 의하면 기존의 비적과 달리 태평천국군의 병사들은 구성원들 사이의 결속이 강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상주문을 올렸었다. 그러나 남경이 함락되면서 태평천국의 도읍이 되자 청나라도 남경의 남북으로 강남대영(江南大營), 강북대영(江北大營)을 만들어 압력을 가했다.
이에 태평천국군은 군을 둘로 나누어, 북벌과 수도인 천경(남경)의 방어에 나섰다. 천경방어에 최대한의 군사를 남기고 금전촌에서 궐기한 이후 따라온 정예 2만을 북벌로 돌렸다. 1853년 5월에 이개방(李開芳), 임봉상(林鳳祥)을 대장으로 하는 북벌군이 출진했는데 사문경(査文經)의 계략에 의해 태평천국군은 베이징(北京)으로 바로 향하지 않고 산서성(山西省)을 우회하면서 소모전이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10월에 텐진(天津)에 도달했지만 이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도로 남쪽으로 후퇴해야했다. 청나라 조정은 몽골인 용장인 셍게린첸(僧格林沁)을 기용하여 맹공을 퍼부어, 드디어 1855년 3월에 북벌군을 전멸시켰다. 북벌군의 패배로 인해 태평천국군의 베이징 공략은 지체되면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북벌군이 참패한 원인으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특히 병력의 분산과 지휘계통의 불일치, 느슨한 진격으로 인한 군의 해이, 그리고 태평천국군 병사들의 대부분이 남방출신이어서 화북의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병이 잦았던 것도 사기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서정군(西征軍)은 북벌군의 출진 한달 후에 호이황(胡以晃)을 대장으로 호북(湖北), 호남(湖南)탈환에 나섰다.
하지만 한구와 한양을 일시 점령했지만 안정되게 지배하지 못하고 성과도 미미했다. 여기에다 태평천국군이 원수로 여긴 증국번(曾國藩)의 상군(湘軍)이 이들을 가로막았다. 태평천국군이 증국번을 자살로 내몰만큼 여러 번 밀어붙였지만 최종적으로 1854년 4월에 상담(湘潭)에서 상군이 태평천국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태평천국군은 명장인 나대강(羅大綱), 석달개가 합류하여 공세로 전환해 1856년 6월에 강남과 강북대영을 괴멸시켜 태평천국은 안정기에 들어섰다.
태평천국은 초창기엔 홍수전과 양수청의 두 사람에 의해 운영되었다. 종교적 권위자는 홍수전, 실무를 양수청이 담당하였는데 원래 둘은 군신관계였다. 그러나 양수청이 태평천국 건국 후에 둘의 관계는 역전되어 홍수전이 남경입성시 첩 문제로 시끄러웠던 것도 천왕의 지위 추락에 한몫 했다.
표면상 양수청을 따랐던 홍수전은 그를 배제하기로 결의하여, 양수청을 미워했던 북왕 위창휘를 꼬드겨 1856년 9월 아침에 양수청의 일족 및 휘하군사를 포함해 그 가족 약 4만명을 학살했다. 이는 군왕에 의한 쿠데타라고 보아도 좋았는데, 얼마 후 천경에 입성한 석달개는 이런 내부항쟁에 매우 노하여 위창휘의 처분을 홍수전에게 요구했다. 이에 홍수전은 위창휘마저 숙청하였다.
홍수전은 위창휘의 목을 석달개의 진영에 보내 얼마간 그와 협력체제를 이루었다. 그러나 홍수전은 육친 이외엔 중용하지 않아 석달개는 몇 달 후 천경을 떠나 별도로 행동하게 되었다. 태평천국은 얄궂게도 지배영역을 안정화하던 중 내분으로 약체화되어 금전촌에서 궐기한 주요인물은 홍수전 하나만 남았다. 하지만 태평천국은 석달개같은 유능한 장군도 있었기에 얼마간 존속이 가능했다.
태평천국의 내분은 청나라 조정에 절호의 기회였다. 이를 놓치지 않고 증국번 및 상군은 양자강 상류에서 공격하며 남하했다.
1858년 5월에 파멸된 강남, 강북대영을 재건하여 천경을 포위한 결과, 태평천국은 풍전등화에 내몰린 상황이 되었다. 이 때 홍수전은 새로운 젊은 장수들을 투입했다.
등현에서 참가한 이수성(李秀成)과 그의 종형제인 이세현(李世賢), 그리고 진옥성(陳玉成)이 그들이었다. 상군은 다시 안휘성 싸움에서 대패하여 태평천국은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안휘성 전투 후 이수성, 이세현은 강남을 제압하고 진옥성은 안휘성으로 진군했다. 태평천국이 한숨을 돌린 1859년에 풍운산과 함께 가장 먼저 배상제회에 입신했던 홍인간(洪仁玕)이 천경에 도착했다.
그는 청군과의 싸움에 패해 홍콩의 영국인 선교사 아래 몸을 숨기고 있다가 몇 번이나 합류에 실패한 끝에 간신히 천경에 도착했다. 천경사변으로 인해 5왕 체제가 무너진 이후여서 홍수전은 조카인 그가 온 것을 매우 기뻐했다. 홍수전은 홍인간을 간왕(干王)으로 세우고 내정을 맡아보게 했는데, 홍인간은 홍콩에 숨어있을 당시 런던 전도회의 조언자로 일하면서 의사와 교사로 활동했었다.
홍수전과 달리 세례를 받았던 홍인간은 홍콩에서 서구식 생활을 접하여 태평천국 내부의 유교지식인들과는 다른 사고를 가졌었다. 이에 그는 태평천국에 서유럽을 모방한 제도개혁을 추구했다. 그는 자정신편(資政新編)에서 내정에 철로, 기선 등 교통망의 정비와 광산개발 등 인프라 정비, 신문 발행과 복지실현, 과거개혁을 제언했다.
외교적으론 서유럽을 대등하게 상대하며 통상관계를 구축해 선교사 활동의 자유를 주장했다. 허나 이러한 선진성은 실제로는 실현되지 못했다. 홍인간의 사상은 당시 사고로는 이해부족이어서 태평천국 내부에서 이를 구현하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하지만 그의 자정신편의 내용은 천적이던 증국번과 이홍장에 의해 이어져 이러한 개혁은 후에 양무운동으로 불렀다.
홍수전은 새로 뽑은 장군들을 왕으로 인정하여 이수성을 충왕(忠王), 이세현을 시왕(侍王), 진옥성을 영왕(英王)으로 각각 봉했다. 하지만 사기를 고무하기 위해 왕위를 남발하면서 이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
태평천국군에 맞서 상군을 지휘했던 증국번(중국명 청궈판)
1860년 2월부터 5월에 이어진 제 2차 강남대영 공략에서 간왕 홍인간, 충왕 이수성, 보왕(輔王) 양보청(楊輔清), 시왕 이세현, 영왕 진옥성은 청군을 격파하였는데 이후 영왕 진옥성은 증국번이 이끄는 상군을 상대하게 되었다. 홍인간의 참가에 홍수전은 큰 위안을 얻었지만 이수성 등은 불만을 가졌다.
초기의 신자라 해도 홍인간의 개혁은 현실과 동떨어졌고 전공도 없었기에 그가 왕으로 봉해진 것은 홍수전의 친적이라는 이유 하나때문이라는 불만이었다. 이 때문에 이수성 등을 새로운 왕으로 봉했지만 이들 왕과 홍인간 사이의 골은 깊어가 다시 태평천국은 내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특히 이수성, 이세현은 홍씨일족에 맞서 이씨일족의 파벌을 형성하여 서서히 독단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1860년에 일어난 상해공략시 강남지방의 제압을 진행하던 이수성군은 상해가 열강의 조계이기에 공격하지 않았다. 이때 홍인간은 서유럽과 협상하여 조금이라도 청나라 조정에 기울지 않도록 획책했다.
그러나 협상을 싫어했던 이수성은 바로 공세에 나섰다가 역으로 반격을 받아 자신마저 부상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사태가 일어났는데 영왕 진옥성은 양자강 중류에서 상군과 사투를 벌이다가 무한에서 이수성군과 합류해 공동으로 증국번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이수성이 강남제압을 중시하면서 합류하지 않아 결국 진옥성은 고립되어 섬멸당하고 말았다.
이전의 태평천국이었다면 패주한 병력의 보충은 문제되지 않았다. 규율이 엄정했던 태평천국군은 민중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말기에 이르자 규율이 점차 문란해지고 왕들이 남발되면서 무질서와 마구잡이식의 징발, 약탈로 민심은 멀어졌다. 이에 병사들의 질도 낮아져 태평천국은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태평천국의 열세는 비단 내부분열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전의 팔기와 녹영을 기본으로 한 청군을 대신하여 증국번의 상군, 이홍장의 회군 등 개인과 개인의 연대가 강한 향용에서 탄생한 군사조직은 새로운 군벌의 출현을 예고했다. 태평천국은 또 외국인 용병부대와도 싸워야만 했다.
상해의 관료와 상인들이 돈을 내어 서양식의 총과 대포를 갖춘 외국인을 용병으로 고용했었다. 이들은 미국인인 프레드릭 타운젠트 워드를 지휘관으로 하여 양창대(洋槍隊)라는 이름으로 발족했다. 이듬해 중국인을 4, 5천명 정도 징병하여 상승군(常勝軍)으로 개명한 이 부대는 중국 최초의 서양식 군대라 해도 좋았다.
워드의 전사 후에 다소 혼란이 있었지만 영국인 지휘관인 찰스 고든이 취임하면서 다시 파죽지세로 이어나갔다. 상승군의 성공에 힘입어 각지에서 이와 비슷한 군대가 만들어졌다. 상안군(常安軍)과 정승군(定勝軍), 상첩군(常捷軍)이 그것이었다. 같은 중국인이라해도 서양식 군제를 갖추면 강해진다는 것을 상승군이 증명한 것이었다.
이러한 강함을 몸소 체험한 증국번은 이후 군대의 근대화에 나서게 되었다. 결국 상승군은 양무운동의 원점이 되었다. 1860년 10월에 체결된 베이징 조약 이후에 서구열강은 태평천국을 적대시하게되어 상해와 영파에서의 전투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태평천국군은 더욱 고전하게 되었다.
1863년 이후 태평천국은 태창주(太倉州), 무석(無錫), 소주(蘇州), 항주(杭州)를 차례로 잃고 천경이 고립되었다. 시왕 이세현 등 각 왕들은 모두 홍수전을 버렸지만 충왕 이수성만이 청군의 포위를 뚫고 천경에 돌아왔다. 그리고 홍수전에게 천경을 버릴 것을 권했지만 홍수전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로 이수성에게 방어를 명령했다.
고립된 천경은 식량사정이 나빠지면서 잡초를 감로로 부르며 먹을 정도였다. 이에 방어를 맡은 병사들은 폭도로 변하여 누구도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864년 6월 1일에 홍수전은 영양실조로 인해 병사했다. 이수성에 의하면 직접적인 사인은 영양실조가 아니라 독약을 마신 것이라 하였다. 자살설도 있지만 이것은 상군의 공적을 과대평가하기위해 의도적으로 꾸며진 것이었다고 한다.
홍수전은 <나는 천국으로 돌아가니 천부천형들이 병사들로 천경을 수호하라>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1864년 7월 19일에 상군의 공격으로 천경이 함락되면서 태평천국의 난은 종결되었다. 당시 천경성 안에는 소주의 상실 후 태평천국병사 8천명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에 투항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 또 점령 후 노인과 이이를 포함해 약 20만명이 죽었다고 전해진다.
홍수전의 묘도 파헤쳐져 시체는 불태워졌다. 충왕 이수성은 홍수전의 아들을 데리고 천경을 탈출했지만 곧 붙잡혀 모두 처형되었다.
살아남은 각 왕들은 산발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1870년대에 거의 모두 진압되었다. 한편, 태평천국의 난은 청국의 상선 및 조선에서 쓰시마번을 통해 에도막부 말기의 일본에도 전해졌다.
당시 태평천국은 기독교가 토착화해 발생한 반란이 아니라 명나라의 후예들이 일으킨 재흥운동으로 일본은 생각했다. 즉 만주인의 지배에 반항하는 한족의 민족운동이라 보았는데, 이는 멸만흥한(滅満興漢)이라는 구호와 변발을 잘랐던 원인에서 기인했다. 하지만 만청기사(満清紀事), 윌비대략(粤匪大略)같은 서적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태평천국에 대한 호의적인 생각이 급변했다.
홍수전이 명의 후예가 아니라 기독교에 입신한 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특히 시마바라의 난 등 기독교인의 대규모 반란을 두려워한 에도막부는 태평천국 운동을 죄악시하여 입에 올리는 것을 금할 정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