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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간음으로 돌을 맞을 여성 앞에서 무언가를 쓰신 이유는
예수께서 불륜으로 돌에 맞아 죽을 위험에 몰릴 여성을 율법의 굴레와 상관없이 구하고 인도해 주시는 장면은 신자가 아닌 이들도 많이 알 정도로 유명합니다. 이른바 명예 살인을 하려는 것인지, 사람들은 간음을 했다고 고발된 어떤 여성을 잡아다 죽이려 합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지려 하며 소란스럽게 굴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이들만 돌을 던져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군들 그 명제 앞에 떳떳할까요. 그런데 이 소란스러운 와중에 예수님은 땅에다 말없이 무엇인가를 쓰십니다.(요한 8,1-11 참조) 당연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겠지요. 요한 복음의 다른 사본에는 “예수께서는 그들 각 개인의 죄들을 쓰셨다.”라고 하는데 이는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 지리이다.”라는 예레미아서 17장 13절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쩌면 예수님 조상으로 언급되는 네 여성과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전혀 검증이 안된 저 혼자만의 추측이지만요. 간음을 한 여성을 야단치는 대신 오히려 돌팔매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그 마음에는 신산한 삶을 살면서도 하느님과의 끈을 놓치 않았던 이스라엘의 여성 조상들에 대한 기억이 들어 있지 않았을까요.
마태오 복음의 시작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평범하지만 그 당시는 물론 후세 사람들도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특히 가부장제가 공고한 사회에서 족보란 특별한 함의를 갖지 않습니까. 2000년 전 중동 역시 동양 못지않은 가부장제적 사회라 예수님이 다윗 가문의 자손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에는 속세의 윤리관점에서 보자면 상당히 부끄러운 이름들이 예수님의 조상으로 버젓이 언급됩니다. 또 남자 영웅으로 가득한 구약에도 이 여성들의 삶은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율법과 도그마로 박제가 되어 가는 유다교 안에서도 도발적이고 혁명적인 사고의 시발점을 찾아낸 것입니다. 간음한 여자에 대한 용서의 마음은 사회에서 소외된 장애인, 이방인, 병자, 세리, 창녀, 자신을 배반하고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내밀었던 따뜻한 손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법이 중요할까요. 제도가 중요할까요. 아니면 사랑이 중요할까요. 예수님의 마음은 온통 약하고 아픈 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찰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와중에도 제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장면은 예수님께서 차분하게 앉아 글로 무언가를 쓰는 대목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 무언가를 쓰시는 장면은 유일하게 이곳뿐입니다. 항상 가르침을 말로 해 주셨지 책을 쓰거나 글을 썼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필이면 돌 맞을 처지에 있는 여성을 구하기 직전, 예수님께서 땅에다 무언가를 쓰셨다는 대목에 전율을 느낍니다.
왜 하필 죄 많은 여성 앞에서 허공에 흩어지는 말 대신 땅에 글을 남기셨을까요. 비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엇이든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만 간신히 그 뜻을 짐작하는 그때의 민중들에게 혹시 무언가를 쓰는 모습을 보이시면서 사고의 획기적인 전환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은 아닐까요. 어떤 당황스런 상황에서도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차가운 이성으로 이해해 보아야 한다는 주문처럼 느껴집니다. 특히나 이성과 학문 논리 같은 것에는 근처도 못 가고 오로지 자식 낳고 살림하고 노동만 하는 여성, 그 중에서도 죄를 지은 여성을 죽이려는 남성 군중들 앞에서 차분하게 한번 더 생각하고 쓰면서 자신의 생각을 객관화 시키라고 말이지요.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이유는 즉각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무언가에 반응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 번쯤 머리로 추측하고 성찰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특히 폭력이나 윤리와 관련된 사건 앞에서는 말이지요. 우리의 이성은 “논리”나 “합리” 혹은 “효율” 등의 명목으로 실은 자신의 파괴적인 감성, 비논리, 비효율을 감추고 포장합니다. 무엇이 옳다고 맞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얼마나 주관적인 감정에 휩싸여 있는지, 아마 살면서 많이 보고 체험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격정의 와중에 자신이건, 타자이건, 직접 삶을 대면하고 말을 할 때와는 좀 다르게 글로 옮기고 성찰할 때 우리의 자기와 타자에 대한 이해는 넓고 깊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쓰셨을 “문자” 혹은 “상(想: image)”이 갖고 있는 추상성(the abstract)은 유일하게 인간만이 갖는 심적 기능입니다. 쉽게 말해 손가락이나 몸으로 보내는 사인, 언어, 그림으로 만든 기호 등등을 짐승은 갖추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짐승도 막연하게 죽음이나 탄생 사랑과 관련된 인지나 감정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인간처럼 미리 상상하고 그 사실을 기호로 재배열하지는 않는 것이지요. 죄지은 여성에 대한 저급한 혐오나 분노 대신 그 본능을 초월하는 큰 자비를 보여 주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수천 년 동안 남성에 비해 많은 것을 참고 견뎌 내야 했을 여성에 대한 따뜻한 자비와 차가운 성찰의 마음을 함께 읽어 내게 됩니다.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광야의 유혹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와 영에 의해 광야로 인도되어 사십 일 동안 유혹을 받으시는 대목(마태 4,1-11; 마르 1,12-13; 루카 4,1-13)은 공관 복음에서 모두 중요하게 다루고, 대중들에게도 생각해 볼 상징들이 매우 많습니다.
우선 사십 일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허기가 지신 상태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는 상황부터 들여다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마음을 갈고 닦아도, 몸의 상태에 휘둘리기 마련입니다. 물도 마실 수 없고 먹지도 못하면 생존할 수 있는 이른바 골든 타임이 며칠되지 않지요. 먹는 것은 물론 잠을 계속 재우지 않는다든가, 빛도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 가둬 놓기만 해도 곧 광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전 먼저 단식을 하고, 광야에 홀로 계시게 되는 상황은 그래서 사는 내내 심리적 고통은 물론 신체적 조건에서 자유롭지 않은 우리들에게 큰 도움과 지혜를 주게 됩니다.
우선 허기가 진 상태에서 받은 악마의 유혹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라는 구절입니다. 특별한 능력과 미션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보통 사람이라면 빵으로 만드는 순간 하느님의 아들임도 입증하고, 허기까지 해결이 되는 셈이니 일석이조의 해결책으로 쉽게 오해하게 될 제안입니다. 심리학적 용어를 쓰자면 나르시시즘적 욕구도 충족시키고 자아의식도 팽창하게 되는 것이니 일시적인 고양감과 행복을 느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런 세속적인 마술쇼는 하느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무리 결과가 이로울 수 있다 해도 악마가 제안했던 의도는 배고픈 사람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까지도 조종할 수 있다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하느님을 시험해서 이겨보자는 속내를 예수님께서 미리 알아차린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악마의 유혹에 화를 내거나 야단을 치며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의외의 답변을 해 주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다. 그 어조까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조용하지만 단호하셨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발아래의 모든 왕국을 보여 준 후 자신에게 절을 하면 이 모든 권세와 왕국들의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다는 거래입니다. 돌로 빵을 만들어 보라고 하는 제안이 다소 청소년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라면, 모든 왕국의 권세를 주겠다는 제안은 청장년들이 혹할 것 같은 제안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돈과 권력의 추구가 인생의 목표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목표를 달성시켜 줄 것 같은 조직이나 사람 혹은 이념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이나 헌신을 하고는 마치 뜻있는 인생을 산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기대는 여지없이 무산되고 말지요. 설령 죽기 직전까지 요행히 돈이나 권력을 붙잡고 있다면, 그 때문에 정말로 중요한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지속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회한에 잠기고 때로는 피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인생의 엄정한 진실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섬길 대상은 속세의 그 어느 것도 아니라 세속을 뛰어넘는 절대자라는 점을 알려 주십니다.
세 번째는 성전 꼭대기, 혹은 성전 마당을 둘러싼 성벽 모퉁이 날개 부분 등까지 세운 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니 여기서 아래로 몸을 던지라. 그러면 천사들이 당신을 보호케 하리라는 제안입니다. 언뜻 보면 마치 신앙의 진실을 테스트해 보라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네가 신심이 깊은데, 그저 위험이나 죽음 따위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만 생각하고 행동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제안을 현대인의 구체적인 상황으로 번역해 보자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고 있으니 위험한 일 네 몸에 해로운 일 해도 돼. 너는 사랑받는 자식이니 별일 없을 거야 라는 근거없는 긍정심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아 중심적인 궤변이지요. 이번에도 예수님은 단칼에 하느님이신 주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을 들려줍니다. 우리 몸이 성전이라는 말은 무슨 짓을 해도 하느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귀하고 거룩한 장소이므로 잘 가꾸고 보존하여 하느님의 뜻이 머물 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생각으로, 당장 달콤한 쪽으로 기울고 결국에는 해롭게 되는 선택을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내 몸을 만든 것도 아니고 키운 것도 아니니, 어떻게 내 몸의 주인이 ‘나’이겠습니까. 크게 보면 창조주가 만드신 것이고, 부모님, 선생님, 또 나를 도와준 많은 이들의 결과물이 내 몸이 아닐까요. 그런데 함부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따위의 일을 하면 안되겠지요.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이 자세하게 사탄의 유혹을 기록하는 반면 마르코 복음은 간단하게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고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시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2000년 전의 고대어로 기록된 사실이므로 현대인들이 문자 그대로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만화같은 장면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이 장면을 다시 심리학적으로 제 나름대로 이해해 보았습니다.
사탄의 영리한 유혹을 받았으나 그 허상을 금방 알아차리신 후 인간의 자연적 본능과 영적인 세계를 통합시키어 보다 완전한 전체 정신을 구현하셨다는 뜻으로요. 우리 모두 살면서 끊임 없이 내적인, 혹은 외적인 유혹과 난관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럴 때 하느님께서 뭐라 말씀하실 것인지에 대해 고민스럽고 혼란에 빠지게도 됩니다. 바로 그 순간 이 부분을 자세히 읽고 묵상하다 보면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세족식 : 연대의 기쁨
요한 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후 가톨릭에서는 세족식의 전통을 이어 발전시킨 것 같습니다. 물론 적지 않은 이들에게 낯설거나 좀 어색한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다른 사람의 몸을 씻어 주는 것은 아주 친밀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인데다가, 특히 별로 깨끗하지 않은 발을 씻으려면 몸을 낮추고, 마음을 겸손하게 하지 않으면 더더욱 거부감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아버지께로 건너가야 할 당신의 시간이 온 것을 아시고, 만찬을 베풀고, 제자들의 발을 씻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 주기 시작합니다. 이미 마리아가 향유를 바를 때, 장례식 준비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발을 씻어 준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차릴 법도 한데, 역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게 둔한 제자들은 그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손사래를 치면서 아마도 어리석고 하찮은 제 발은 못 씻어 주십니다. 하고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당신을 씻어 주어야 나와 함께 새로운 몸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 부분의 신학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성경 학자들과 교회 박사들께서 좋은 말씀을 남겨 주셨기 때문에 저는 심리학적인 의미에만 좀 더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임상에서 상담을 하러 오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상처받은 감정, 그런 일이 일어난 상황 등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몸과 마음이 황폐해진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선 의사들은 객관적으로 그 상황에 대해 듣고 말하게 합니다. 이때 다양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토로하면서 어느 정도는 마음 속의 어두운 부분이 밖으로 나온 것 같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래서 일종의 마음을 밖으로 내놓고 씻는 준비를 하는 단계이지요.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감정들의 원인, 상황, 객관적인 성찰 등 힘든 과정을 찬찬히 거치게 되면서 마음속의 쓰레기 같은 것들이 정말로 깨끗이 정화되어 새롭게 변화되는 것 같다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전통 무속에도 씻김굿이 있지요. 억울하게 죽거나 너무 때 이른 죽음이거나 혹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나치게 겪어야 했던 영혼들의 마음을 씻어 주는 의례였습니다. 이렇게 정화하는 과정은 전 세계적으로 영성과 관련된 많은 의례가 있습니다. 아마 부처님 오신 날, 아기 불상에 물을 붓는 것을 보거나 해 보신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민족들은 물이 아니라 재나 잎사귀 혹은 약물 같은 것으로 몸과 마음을 씻기도 합니다. 자신의 상처뿐 아니라 잘못, 죄 등등을 밖으로 내놓게 되면 일종의 마음 청소 혹은 빨래, 목욕할 때와 비슷한 느낌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고해성사를 받고 날 때도 그런 비슷한 마음이 될 때가 있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는다는 것의 상징은 바로 그런 정화의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은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고 당부하십니다. 이제 스승이자 주님이신 분이 떠나고 나면 서로가 서로를 정화해 주면서 연대하고 위로해 주면서 지난한 정화와 변모의 여정을 떠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서로 이해갈등 요인도 복잡해집니다. 이에 따라 사건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도 다양하면서 해묵은 찌 꺼기 같은 것을 오랫동안 지니고 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일종의 쓰레기를 안고 사는 것이지요. 특히 일이나 관계와 관련된 정신적인 문제가 지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 역설적으로 그 쓰레기를 직면해 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몸을 돌보고, 자신의 감정을 어루만지다 보면 고통이 어느 틈에 해결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듯이 사랑하는 사람이든 혹은 그렇지 않든 겸손하게 상대방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정화의 과정에 동참해 보는 건 어떨까요. 하다못해 가족끼리 힘들고 고단한 발을 서로 마사지해 주는 것도 앉아서 이런저런 일을 갖고 말로 싸우는 대신이요.
[유익한 심리학] BEING과 DOING 사이의 선택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시어 자기 의지와 의도를 가지고 행(行)할 수 있게 하셨다. 우리는 이를 ‘자유 의지’라고 부른다. 인간에게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의지와 의도를 가지고 행한다(살아간다)는 말이고, 행함을 통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은 선택을 통하여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의지와 의도가 없는 것이 ‘반응’이다.
반응은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이고 반사적인 몸의 움직임이다. 반응은 과거 경험과 축적된 정보에 의해 도식화된 것으로 생존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한몫을 한다. 이는 자유 의지보다는 본능에 가깝다. 우리의 뇌는 내가 어떤 의지와 의도를 가지고 선택을 하기 전까지는 몸에 축적된 다양한 도식을 활용하여 효율적인 생활을 하도록 협력한다. 별생각 없이 그냥 살면, 우리는 뇌의 메커니즘, 즉 도식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는 외부 세계에 ‘반응’하는 것이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개나 돼지 등 동물은 ‘존재한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상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은 대상 세계의 일부가 아닌 존재하는 주체다.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선택’이라는 행위를 통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은 ‘존재하라’는 명령인 셈이다. 선택이란 것은 ‘살아야 하는’ 그 어떤 것을 암시한다.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고민해야만 하는 주체로서 인간이라는 것이다.
생각 없이 ‘그냥’ 사는 것은 동물적 삶과 다르지 않다. 그냥 사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반응하는 삶이다. 우리가 생각을 멈추면 우리 뇌의 메커니즘은 최고조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상황을 뇌가 알아서 판단하고 몸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나의 뇌가 사는 것이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라고 여기지만 실상은 뇌에 의해 자동화되고 도식화된 몸의 반응일 뿐이다. 바로 매트릭스의 세상이다. 생각 없이 그냥 살면, 우리 몸은 과거의 도식과 높은 효율성으로 자동화된 반응을 반복할 뿐, ‘지금-여기’에 존재하지 못한다.
매 순간 자유 의지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BEING’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자유 의지로 선택한다는 것은 참된 자유 상태에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욕망의 노예가 된 마음, 명예욕에 빠진 마음, 타인과의 경쟁심에 불타는 마음은 비록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욕망에 의한 반응인 DOING일 뿐 자유로운 선택으로서 BEING이 아니다. 무엇엔가 사로잡힌 마음, 사탄이 들었다든가, 귀신 들렸다든가,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자유 의지를 상실한 상태임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자유 의지의 선택이 불능한 상태라는 것, 존재하는 삶을 살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스스로는 잘살고 있다고 여길지라도 실상은 그렇지 않으니, 코헬렛의 외침은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코헬 1,2ㄴ-3)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어린 나귀(donkey)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까닭은
열왕기 상권 1장 32절에는 다윗 임금이 솔로몬에게 자신의 노새(mule)를 타라고 하면서 후계자로 임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 19장 30절에는 예수님께서 마을로 가서 어린 나귀(donkey, colt)를 끌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어린 나귀를 끌고 오자 사람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어린 나귀에 덮고 예수님께서 그 위로 올라타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마태오 복음 21장에는 암나귀와 어린 나귀를 타고 가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마르코 복음 11장 1-10절에는 어린 나귀를 데리고 와서 제자들이 겉옷을 덮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옷을 땅에다 까는 것으로 기록됩니다. 복음서기자마다 디테일은 조금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이 부분이 열왕기에 나오는 노새 타는 왕의 이미지와 연결된다고 설명하는 신학자들이 많습니다. 왜 하필이면 말이 아니고 나귀나 노새일까요. 또 재미있는 것은 솔로몬 임금은 노새를 탔는데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셨을까요. 우선 당시 이스라엘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말보다는 노새와 나귀가 더 좋은 운송 수단이자 노동력이었다는 것을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나귀건 노새건 선진국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노새나 나귀는 야생말보다 체구는 좀 작지만 훨씬 더 힘이 세고, 주인의 말도 잘 복종하고, 꾀도 있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가성비가 좋은 가축입니다. 반대로 말은 전쟁을 하거나 마차를 끄는데 제격이지만 농사를 짓거나 가까운 곳을 가는 데에는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나귀는 노새를 낳을 수 있지만 노새는 더 이상 새끼를 낳지 않아 대가 끊깁니다. 그럼에도 나귀와 노새는 둘 다 현대사회에 자동차가 발명되기 이전까지는 일종의 훌륭한 운송 수단이었습니다. 말보다 몸집은 작지만 더 많은 짐을 질 수 있었고, 또 말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지혜롭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멋지게 기사나 군인들을 태우고 달리는 말과는 달리 큰 짐을 지고 가다 힘이 들어 움직이지 못해 채찍질을 당해야 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말도 아니고, 노새도 아닌 어린 나귀를 마을에서 끌고 오라고 했는지 혹시 그 속에는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솔로몬 임금 이후로 이스라엘 왕국은 분열되고 그 이후 영성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계속 박해와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다윗의 자손이긴 하지만 예수님의 왕국은 붕괴나 쇠퇴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상징이 혹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아직 크지 않아 짐 싣는 것도 버거울 어린 나귀를 끌고 오라 해서 타신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인류의 죄라는 어마어마한 짐을 대신 지고, 거기에 더하여 채찍질을 당한 후 십자가에 매달릴 것이라는 예시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은 아닐까요. 한편 부처님을 낳은 마야부인은 코끼리를 타고 가다가 부처님을 낳았다고 합니다. 코끼리는 힌두교에서 가네샤, 즉 신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귀족이나 왕가의 귀한사람들이 타는 영험한 짐승입니다. 그러나 힌두 신화에는 인연 업(karma)으로 인해 가네샤가 어머니를 죽여야 하는 일화도 있습니다. 왕자로 태어나 어머니를 일찍 여읜 부처님과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보다 먼저 하느님께 가신 예수님의 탈 것조차 의미가 다른 것 같습니다.
나귀와 노새의 상징을 우리 자신의 심리에 적용해 보면, 대부분 여러 가지 노동에 시달리며 일상을 살아 내고 참아 내야 하는 시기에 대한 비유 같기도 합니다. 내가 이러려고 공부를 했을까, 내가 이러려고 결혼을 했을까. 내가 이러려고 서울로 왔을까, 같은 생각들을 하게 되는 고된 노동과 희생의 시간은 마치 자신이 채찍질 당하며 견디는 나귀나 노새처럼 생각됩니다. 정말 형장에 끌려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몹시 어려운 곤경에 처할 때가 누구든 인생에는 한 번 이상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바로 이런 순간에 있는 약하고 불안한 인류를 위해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여 주셨던 것은 아닌지 상상해 봅니다.
특히 어린 나귀를 타고 가는 모습을 준비하시면서 앞으로 어린 나귀 보다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 주시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물도 다 깊이 사랑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창세기에 인간을 모든 생물을 다스리고 관장하는 존재로 신이 창조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인지, 그리스도인 중에도 인간과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를 마치 주종 관계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짐승이나 식물을 독단적이거나 파괴적으로 대하면서도 마치 하느님께 허락을 받은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약의 예수님은 식물과 동물을 다양하게 비유의 소재로 쓰고 계시지만, 행간에서 따뜻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마치 사람인 것처럼 말입니다. 무화과나무에 저주를 내리셨을 때도 있었지만, 입고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 들풀과 꽃보다 못한 존재라고 우리를 나무라시기도 했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나귀를 타는 모습을 보이신 것도, 그 이면에 많은 뜻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이유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나귀보다 더 고통스런 채찍을 맞으며 죽음에 이르는 예수님의 모습, 모든 것을 미리 아시면서도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한없이 몸을 낮추고 묵묵히 견뎌내셨던 모습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말로만 예수님을 사랑한다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나귀가 되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 등을 내어 드릴 수는 없을까요. 서로에게 의존적인 인간은 사랑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으니, 나귀보다 오히려 더 약한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사랑을 가르치신 예수님이 더 위대해 보이는 이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