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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하느님, 성령] 기름부음과 신앙감각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1요한 2,20-27) 요한 1서의 이 말씀은 매우 신비롭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았으므로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신다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먼저, ‘기름부음’은 성령을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받은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세례때 모두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았고 이로써 ‘그리스도인’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받았습니다. 단순한 이름뿐 아니라 이 기름부음으로 우리는 ‘성령’을 받게 됩니다. 기름이 우리 몸에 스며드는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 내면으로 침투하시어 그곳에서 사십니다. 성령께서는 기름부음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내면에서부터 ‘진리’를 가르치십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을 ‘내면의 스승’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내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을 주시고(1코린 12,3),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우리를 변모시키시며 그분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어 “모든 진리 안으로”(요한 16,13)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 바로 기름부음으로 오시는 “진리의 영”(요한 14,17)이신 성령이십니다. 이렇게 신자들에게 ‘진리’를 알게 해 주시는 성령의 역할을 잘 표현하고 있는 교리가 바로 ‘신앙 감각’(sensus fidei)입니다.
이 교리는 쉽게 말하자면, 진리의 성령을 지닌 신자들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된 가르침인지에 대한 ‘본능적인 영적인 감각’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여러 이단들이 있었지만 신자들은 ‘진리’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으로 정통 교리를 식별하여 왔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누군가가 신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니라던지 혹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야기를 하였을 때 신자들은 설령 그 사람을 ‘신학적’으로 논박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해 낼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이러한 진리에 대한 ‘날카로운’ 식별의 능력이 왔을까요? 그것은 “기름부음으로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신” 성령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성녀 소화데레사는 신학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지만, 그분의 저서에는 신학자들을 놀라게 할 진리들이 수없이 숨어있습니다. 성녀는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바로 기름부음으로 오시는 성령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또한, 성모님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와 ‘성모승천’ 교리는 교황께서 세계의 주교와 신자들에게 이 교리에 대한 ‘믿음’이 신자들의 마음속에 뿌리박고 있는지에 대해 조사한 후, 신자 전체가 보편적으로 이를 믿고 있음이 확인되자 ‘믿을 교리’로 교황님에 의해 선포되었는데. 이것은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께서 이러한 믿음을 가르치신 것을 교회가 확인한 훌륭한 예시입니다.
이러한 신앙감각은 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12항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되었습니다. “성령께 도유를 받는 신자 전체는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신자 전체가 하나의 믿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렇게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의 위대한 업적인 것입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제대(祭臺, Altar)
이번 2월 4일(수)에는 사제ㆍ부제 서품식이 거행됩니다. 사제품을 받는 새 신부님들은 이제 제대에서 성체성사를 거행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성당의 중심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제대에 관해 알아봅니다.
성당 건물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비를 드러내는 표지라면, 제대는 교회의 원천이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미사 경본 총지침」은 제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제대는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성사적 표지로 재현되는 곳이며, 미사에 모인 하느님 백성이 다 함께 참여하는 주님의 식탁이다. 또한 제대는 성찬례로 이루어지는 감사 행위의 중심이다”(296항).
제대는 라틴어로 [알타르] (altar)라고 하는데, 이는 [알타] (alta)와 [아라] (ara)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alta는 ‘높은’이란 뜻의 형용사이고, ara는 ‘태우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라레] (arare)에서 온 단어입니다. 곧 제대는 ‘희생물을 태워서 하느님께 바치는 높은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희생물을 불에 태우는 돌로 된 제대가 성전 앞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로 넘어오면서 예수님의 최후 만찬을 통해 나무로 된 식탁이 제대의 역할을 이어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죽음을 맞은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기념 성당이 건립되면서 무덤이라는 의미도 덧붙여집니다. 그래서 제대는 ‘식탁, 무덤, 제사상’이라는 세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며 성찬례를 거행하였는데, 이때 가정에서 사용하던 나무 식탁이 제대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집니다. 이후 성당들이 지어지고, 성당에는 고정 제대가 설치되었으며, 그 재료는 돌이 되었습니다. 돌 제대는 위엄있고 견고하며 교회의 영속성을 표현합니다. 또한 “살아 있는 돌”(1베드 2,4)이며 “모퉁잇돌”(에페 2,20)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효과적으로 상징합니다.
한편,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성당들이 지어지기 시작하는데, 제대 위치는 바로 순교자의 무덤 위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순교자의 석관을 제대 안에 넣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제대 아래에 있는 순교자들의 무덤을 [콘페시오] (confessio) 또는 [마르티리움] (martyrium)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선교지나 전쟁터에 나가 고정 제대를 설치하기 어려울 때는 성인의 유해를 넣은 성석(聖石)을 나무 식탁 위에 올려놓고 이동식 제대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제대에 성인 유해를 모시는 전통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져 “제대를 봉헌할 때 제대 밑에 순교자가 아니더라도 성인들의 유해를 모시는 관습은 적절하게 보존한다.”(「미사 경본 총지침」 302항)라고 규정하는데, 그렇다고 이것이 필수인 건 아닙니다.
「미사 경본 총지침」이 규정하는 제대와 관련한 다른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대는 벽에서 떨어져 있도록 설치하여 봉사자들이 언제라도 제대 둘레를 쉽게 돌 수 있고, 사제가 신자들을 바라보고 미사를 거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제대는 신자들의 회중 전체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집중할 수 있는 성당의 참된 중심이 되어야 한다. 제대는 원칙으로 고정시켜야 … 한다”(299항). “새 성당을 지을 때 제대는 하나만 세운다. 신자들이 이루는 회중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한 분이시고 교회의 성찬례는 하나임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303항).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45) 평신도의 본질과 사명, 「교회헌장」 제31항
「교회헌장」 제31항은 평신도 신분의 본질과 사명에 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공의회는 “평신도”라는 신분을 “성품”과 “수도 신분”에 속하지 않는 모든 그리스도인이라고 정의합니다. 곧 평신도는 성직자와 수도자처럼 제도적이고 법률적으로 제한된 생활 형태의 집단과 구분됩니다. 평신도는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루고 하느님 백성에 속하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에 참여하고, 하느님 백성으로서 자기가 맡은 임무를 교회와 세상 안에서 실천합니다.
두 번째 단락은 이러한 평신도의 고유한 사명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평신도들의 사명 역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사명과 비교해 볼 때 명확히 드러납니다. 성직자들의 삶은 세속과 무관하지 않지만, 그들은 특별한 부르심으로 주로 “직무상 거룩한 교역”에 임명되어 사명을 수행합니다. 수도자들은 복음적 권고의 서원을 통한 고유한 “자기 신분”으로 세상에 있는 천상 보화를 신자들에게 보여주고 영원한 생명의 증거를 드러내며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미리 알려 줍니다.
그러나 평신도들은 교회 안의 특성화된 봉사 직무나 제한된 생활 형태에 대한 의무를 받아들이는 신분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시간과 공간이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생활 영역입니다. 평신도들은 세상의 모든 사물이 하느님을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의회는 평신도들의 고유하고 독특한 특징이 “세속적 성격”에 있다고 말합니다.
평신도들은 “자기 소명에 따라 현세의 일을 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명을 갖습니다. 평신도들은 “세속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곧 세상의 모든 직무와 일 가운데서 그리고 그들의 삶이 이루어지는 가정과 사회 안에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일상적이고 개방적인 생활 공간 안에서, 평신도들은 자기의 고유한 사명을 수행하고, 복음 정신을 실천하며, 누룩처럼 내부로부터 세상을 성화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평신도들은 이러한 “자기 삶의 증거로써 믿음과 바람과 사랑으로 빛을 밝혀”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평신도들의 사명에 대한 공의회의 가르침은 이로써 더욱 분명해집니다.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생활 터전에서 만날 수 있는 “현세의 사물을 조명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평신도들을 통해서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성장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이 되도록 하는 것이 평신도들의 사명입니다.
[교회의 언어]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며 외치던 말씀입니다. 여기서 ‘엘로이’는 ‘나의 하느님’이라는 뜻이고 ‘레마’는 ‘왜’라는 의문사이며, ‘사박타니’는 ‘당신이 저를 버리셨다’라는 뜻입니다. 문장 전체를 번역하면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 이 외침은 시편 22,2를 아람어 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아람어를 사용하시던 예수님께서 직접 외치신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절망 가득한 말씀을 외치셨을까요? 하느님께서 정말 당신을 버리셨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일까요? 이는 시편 22장을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시편 22장은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절망 가득한 분위기로 시작되지만 22절로 넘어가며 완전히 분위기가 바뀝니다. 시편 저자는 하느님이 절망 가운데서 자신을 구원해 주셨음을 노래하며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시편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음 이야기 역시 부활, 승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외침은 결국 하느님을 찬양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교회상식 더하기] (5) 교회는 ‘경전의 종교’가 아니다?
신앙은 살아계신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 따르는 것
성경은 단순히 가르침이 적힌 책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경을 “하느님의 계시가 글로 담겨지고 표현되어 보존된 것”이라면서 “사도의 신앙에 따라 구약과 신약의 모든 책을 그 각 부분과 함께 전체를 거룩한 것”으로 여깁니다. 사람이 기록한 것이지만, 하느님께서 몸소 그 사람 안에서 활동하셨기에 궁극적으로 성경의 저자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기록되기를 바라신 진리가 성경에 담겨 있다고 고백합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계시헌장」 11항 참조)
이처럼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책이기에 교회는 성경의 말씀으로 구원의 양식과 거룩한 힘을 얻고, 성경을 주님의 몸처럼 공경합니다. 미사 입당에도 사제에 앞서 성경(복음서)이 행렬하고, 교회가 거행하는 모든 전례 안에 성경의 말씀이 함께하지요.
성경이 지닌 위상이 이렇듯 특별하다 보니 우리 신앙이 모두 성경으로 귀결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경전의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의 종교”라고 말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8항)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인데 무슨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할 수 있겠습니다. 그 ‘말씀’이란 바로 사람이 되시어 살아계신 말씀,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요한 1,14 참조)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이 사람의 방식으로 썼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 바로 성경 저자들이 살아간 시대와 문화뿐 아니라 당시의 문학 유형, 이해·표현·서술 방식 등을 알아야 성경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성령을 통해 쓰였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교회는 성령을 따라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먼저 “성경 전체의 내용과 단일성에 유의”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 46권과 신약 성경 27권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의 동일한 한 ‘말씀’이 성경 전체에 펼쳐져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성경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체 교회의 살아 있는 성전(聖傳)에 따라” 읽어야 합니다. 성전은 사도들에게서 이어온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 그리고 성령을 통해 배운 것을 전해온 교회의 거룩한 전승입니다. 교회는 성경과 성전을 믿으며, 이 둘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고 상통한다고 가르칩니다.
“신앙의 유비”에도 유의해야 합니다. 이 말은 신앙 진리들이 서로 일관성을 지녀야 하고, 또 계시의 전체 계획 안에서 일관성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성경에서 특정 한 구절만 가져와서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으니 그 교리는 틀렸다”는 식의 해석을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계시헌장」 12항 참조)
성경 해석이 너무 어려우신가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신부님들께서 강론을 통해 이런 기준에 따라 해석한 성경 내용을 잘 풀이해 주실 테니까요. 거기에 교회가 마련한 성경공부도 하면 금상첨화일 듯합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독서대(Ambo)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9년 9월 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에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선포하였습니다. 신자들이 성경을 더욱 친숙하고 경건하게 대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전파할 수 있기를 바라는 취지였습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가장 중요한 자리인 독서대에 대해 알아봅니다.
독서대는 말씀 전례의 중심이 되는 자리입니다. 독서대의 기원은 유다교 회당에서 토라를 낭독하고 설명하던 베마(bema)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에 영향을 주어 전례가 거행되는 공간에도 성경 봉독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지금 남아있는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들에서는 독서대가 회중의 눈에 잘 띄도록 제대 근처 약간 높은 곳에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미사가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로 이뤄져 있으며, 이 두 부분이 하나라고 강조합니다(전례헌장 56항 참조). 이러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개정된 「미사 경본 총지침」에서는 말씀 전례의 장소인 독서대의 중요성을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하느님 말씀은 그 존엄성에 비추어 성당 안에 있는 알맞은 곳에서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장소는 말씀 전례 동안 신자들이 자연스럽게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러한 장소는 보통 고정된 독서대여야 하며 움직이는 단순한 책 틀이어서는 안 된다. 독서대는 성당의 구조에 따라 설치하되 신자들이 성품을 받은 봉사자들과 독서자들을 잘 바라볼 수 있고 그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 곳에 두어야 한다”(309항).
독서대의 중요성을 이처럼 강조한 이유는 성찬 전례와 함께 하느님 말씀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찬 전례의 중심인 제대와 더불어 말씀 전례의 중심인 독서대 역시 성당 구조에 있어 합당한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또한 ‘말씀의 식탁’이라는 의미에 맞게 독서대를 이루는 재료도 제대와 조화되는, 고상하고 튼튼한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11세기부터 13세기에는 하나이던 독서대를 두 개로 늘려 설치하는 경향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는 신자들이 봉독하는 독서들과 화답송을 위한 독서대이고, 다른 하나는 사제(부제)가 봉독하는 복음과 강론을 위한 독서대였습니다. ‘진실의 입’으로 유명한, 로마의 코스메딘 산타 마리아 성당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전례 안에서 하느님 말씀의 통일성을 생각할 때, 제대가 하나인 것처럼 독서대도 하나만 설치하는 게 맞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미사에서 말씀 전례(독서대)와 성찬 전례(제대)를 통해 그리스도 희생 제사의 은총을 충만히 받습니다. 따라서 미사 전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미리 읽어 마음에 새기고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미사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44) 교회 안의 평신도 신분, 「교회헌장」 제4장 제30항
「교회헌장」 제4장은 평신도에 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공의회의 제3회기에서 “제4장 평신도”에 대한 최종안은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승인되었습니다. 하지만 1962년 제1회기에 제출된 초안에서는 평신도가 교회 활동에 있어서 수동적인 존재로 표현되고,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품위와 사명 그리고 보편 사제직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제2회기의 수정안은 하느님 백성에 관한 부분과 평신도의 고유한 부분으로 나누어 작성되었는데, 토론 과정에서 교부들 사이의 견해 차이가 상당히 드러났습니다. 이에 공의회는 새로운 위원회를 조직하여 제3회기에서 최종안을 여덟 개 항목으로 정리하였고, 특히 평신도들의 ‘사제직과 예언자직’에 대해서 새롭게 다루었습니다.
4장의 첫 항인 “제30항 교회 안의 평신도”는 4장 전체의 서문에 해당합니다. 그 첫 문장에서 공의회는, 3장에서 교계의 임무를 다룬 것에 이어서 이제 4장에서 “평신도(laicus)라고 불리는 저 그리스도인들의 신분(status)”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주목할 것은 평신도가 ‘교회 안의 신분’으로 묘사되었다는 점입니다. 주교의 신분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언급되었고, 신부와 수도자는 중세에 교회의 신분으로 나타났지만, 평신도는 1917년 법전까지 고유한 신분이 아닌 비성직자로 정의되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의 신분을 명시합니다. 이에 대해서 「교회헌장」의 신학적 배경을 해설하는 보고서는 ‘교회 안의 평신도들에게 영예를 인정하고 넓은 의미의 신분을 확립’하기 위해서 “신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설명합니다. 평신도는 하느님 백성 안에서 봉사 직무를 맡은 성직자들과 함께 고유한 사명과 권한을 지니는 품위를 가진 신분으로 존재합니다. 공의회는 이러한 평신도의 신분과 사명을 현대의 특수 환경을 마주하여 더욱 깊이 숙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평신도가 교회의 선익을 위해서 기여한 바를 알고 있는 목자들은, 교회의 구원 사명이 성직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고, 모든 이가 각자의 위치에서 공동 활동에 협력할 수 있도록 신자들을 사목하고 그들의 봉사 직무와 은사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 언급은 제3장 교계 제도의 첫 항(18항)에서 ‘하느님 백성을 사목하고 교회의 선익을 도모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여러 봉사 직무를 마련하셨고, 그 목자들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목적을 함께 추구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라는 언명을 떠오르게 합니다.
끝으로, 공의회는 에페 4,15-16의 직접 인용을 통해서 교회 안의 모든 이가 협력해야 할 공동 활동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성장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이르러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이가 결합하고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여, 사랑으로 교회를 완성해 나갑니다.
[교회의 언어] Celo(셀로) : 열정, 질투
열정, 열심, 질투를 뜻하는 스페인어 단어 Celo는 그리스어 ‘ζηλος(젤로스)’에서 왔습니다. 이 그리스어 단어는 뜨거운 열로 인해서 부글부글 끓는 물소리를 흉내 낸 데서 유래하였으며, 내면의 타오르는 감정, 곧 열심, 열의 또는 질투,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 끓어오르는 감정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서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는 열정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zeal’이 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는 질투를 의미하는 ‘jealousy’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인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Celo)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시편 69,10)라는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우리의 Celo는 무엇을 향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Celo가 질투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끓어오르는 열정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가톨릭 교리] 용서의 척도
과거의 잘못이 알려지며 세간의 지탄을 받는 공인들의 모습을 보곤 합니다. 대중들은 가해자의 잘못을 지적하며 적극적으로 반응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있는 우리가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운 복음이 있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특별히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생각하면 이 복음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정의로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법과 윤리는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죄를 저지른 자를 쉽게 용서할 수 없는데 참 난감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러한 질문들 앞에서 예수님의 두 가지 모습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라고 말씀하셨지만, 당신의 뺨을 친 군인에게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3)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불의와 악의 현실 앞에서 그에 대한 오류를 반드시 바로잡고자 하시는 정의로운 모습입니다. 이에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의와 악의 현실은 단순히 무시하거나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의는 반드시 대항해야 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자비가 있다.” 또한 교회는 용서란, 막연한 사랑을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명백하고 객관적인 잘못이 있다면 피해자는 최선의 인내와 강력한 자제로, 필요하다면 법을 발동해서라도 원수 자신이 회개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한편, 가해자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배상하려고 한다면 적극적으로 화해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악의에 찬 증오와 복수심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가해자가 못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는 무지에서 나온 행동의 가능성을 고려하며, 되도록 이해력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자, 이제 명확해집니다. 용서의 척도는 무엇보다 먼저 원수의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가해자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죄를 뉘우친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하려 애써야 합니다. 한편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가해자가 있을 경우 그가 회개하여 하느님의 길을 향할 수 있도록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다만, 이것이 증오심이나 복수심 때문이어서는 안 되며 어디까지나 악에 물들어있는 상대가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키는 사형 제도를 교회는 반대합니다. 또한 알퐁소 성인은 다음의 의미심장한 말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정의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쉽게 복수심을 위장한 위선적 가면을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