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지배자 프로메테우스에 대항하는 디오니소스의 그림자 미셸 마페졸리는 그간 여러 저서를 통해 포스트모더니티를 잘 특징짓는 것은 윤리와 미학 간의 연결이라고 지적했다. 이를 통해 공유되는 감정, 혹은 집합적 감정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사회적 연결(에토스)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인식론적 의미에서 광란은 바로 이러한 에토스이다. 따라서 마페졸리는 광란성 속에서 아방가르드나 예술적 방랑자 같은 몇몇 사람들이 사용하는 어떤 사소함을 보고자 하기보다는, 현대 사회에서 재등장하고 있는 사회적 삶의 본질적 요인들을 포착한 것이다. ... 더보기 시대의 지배자 프로메테우스에 대항하는 디오니소스의 그림자
미셸 마페졸리는 그간 여러 저서를 통해 포스트모더니티를 잘 특징짓는 것은 윤리와 미학 간의 연결이라고 지적했다.
이를 통해 공유되는 감정, 혹은 집합적 감정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사회적 연결(에토스)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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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각은 오래전부터 프랑스의 지적 전통 속에 각인되어 온 것이다. 그 전통은 초현실주의자들은 물론 조르주 바타유나 미셸 푸코, 장 보드리야르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경험과 열정, 그리고 공통적인 감정을 통합하는 전체적이며 총체적인 시각이다. 마페졸리는 여기서 폭넓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직시한다. 즉, 세상을 지배하고 변화시키려는 프로메테우스적인 태도를 버리고 ‘명상’을 통해 세상에 스스로 동화하려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적 광란으로 표출되는 민중의 힘
미셸 마페졸리의 『디오니소스의 그림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또 다른, 그러나 타당한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끈다. 마페졸리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인류 역사의 어느 시기, 어느 사회에서도 디오니소스적인 집단적 광란, 성적 방탕, 폭력성, 탐닉, 비도덕주의가 만들어 내는 ‘미쳐 돌아가는’ 부분이 항상 존재했고, 또 새롭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산성과 효율성, 유일신 숭배가 지배하는 역사적 시대와 비교해서 그는 “시적이며 에로틱한 시대, 사랑하는 육체의 시대, 그리고 그 주위로 사교성이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숨겨져 있고 부수적인 시대가 존재한다”라고 지적하고 이 과정을 은밀한 중심성(centralit? souterraine)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동시에 일상에서 겉으로 순간순간 드러나는 힘이고 움직임이며 함께하는 힘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나 집합적으로나 그림자의 부분과 “어두운 순간”은 광란성 속에서 받아들여진다. 이성의 옆에 광기가 자리 잡고 있으며, 논리적인 것은 “논리적이지 않은 것”과 연결되면서 총체적인 균형이 강화된다.
.. 사실 살고자 하는 욕구는 종종 아노미적이거나 비도덕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행위와 태도로 나타난다.
그러나 마페졸리는 살고 싶어 하는 존재 속에서 비도덕주의의 역동성을 읽어 낸다.
이 역동성은 도덕이 아닌 윤리의 모습이다.
이 윤리는 당위, 즉 ‘어떻게 해야 한다’, ‘무엇이 되어야 한다’ 같은 것이 만들어 내는 딱딱하고, 생기 없고, 고착화되는 강제적 유형의 모든 것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것들을 결정화하고 있고 이 사회에 내재하는 것이 바로 디오니소스적인 광란성이라고 본다.
이러한 광란성 속에서 마페졸리는 분위기, 공통적 감정의 격렬함, 잉여, 넘쳐남의 필요성(과잉의 필요성)이 지배하는 감정의 문화가 분출되는 것에 주목하면서, 바로 이 감정의 문화를 통해 우리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인 것의 변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예전에는 인권, 자유, 민주화라는 숭고하고 엄숙한 목표가 있었다면, 촛불 시위, 붉은악마 응원은 종종 과도하고 격렬하게 분출됨으로써 감정의 문화가 어떻게 정치와 결합될 수 있고 새로운 정치의 모습으로 나타날 지를 잘 보여 주는 예다.
누가 주도하지도 않고 누구의 통제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감시, 통제, 억압은 또 다른 폭발을 야기한다.
이것이 민중적 일상의 힘이다. 이제 ‘통치’, ‘지배’와 관련된 모든 권력과 권력 관계는 사라져야 할 시기가 왔다.
그것은 우리 사회 민중의 힘이며, 기존의 정치 권력, 정당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힘이다. 일반인들, ‘특질 없는 사람들’의 ‘들끓음’(뒤르켐), 폭발, 즉 디오니소스적 광란이야말로 일상의 유토피아에 인해 일어나고, 또 일상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내는 원인이자 결과가 된다.
그것이 “조직 틈새의 자유 찾기”가 되었건, 혹은 “사회적 호흡”이 되었건,
이 폭발은 결국 조직의 결합과 파열의 원인이자 동시에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부분은 타락해 가는 세계의 결과로서 어떠한 역사적 시기에 지배적이었던 가치가 소멸하고, 또 소멸한 가치가 다시 지배적인 것이 되는 자리바꿈의 끝없는 순환 속에서, 일련의 가치가 지닌 효력이 목까지 차오르고 피로해졌을 시기에 다른 역동적인 법칙에 자리를 내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마페졸리가 이 책의 결론을 “서곡”이라 이름 붙인 것은 그 때문이다. 종언이라는 것은 없다.
언제나 결과는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의 서곡이 된다. 로마 제국의 문화가 정점에 달해 팍스 로마나를 외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로마의 몰락이 시작된 것은 많은 예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즉 마페졸리는 이 책에서 역사는 나선적이며, 합리적 추상화가 승리하는 추세에 있을 때 그래서 한 사회가 어떤 이들의 소유물이 됐을 때 우리는 그 사회의 폭발을 감지할 수 있다는 점을 다양한 현상 분석을 통해 보여 주었다.
상상을 해 보자. 스프링이 압력을 받아 최대한으로 수축되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튀어 오르는 모습을. 그것은 순환하는 역사의 모습이며, 바로 생명력으로 충만한 “삶의 도약”(베르그송)의 원형적 과정이다. 지금 이 시대의 지배자 프로메테우스에 맞서 대항하는 디오니소스의 등 뒤로 넓게 퍼져 나가고 있는 그림자는 이제 ‘전복’의 징조로 점점 다가오고 있다.
첫댓글 억누르면 (반드시) 튀어오른다!
드러나지 않은 또다른 힘의 원리, 논리가 있는것이며
드러나 보여지든 숨어 사라지든 없는듯 있고, 있는듯 없어서
오히려 그 존재성이 살아있으며
가면 돌아오고
내가 한건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