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군(河東郡) 現하동읍을 중심’, 한시(漢詩)편 1.>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경상남도 서남단에 있는 군.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경계에 있다. 소백산맥의 영향으로 군 전체가 험준한 산지를 이루고 있다. 1차 산업의 비중이 높으며, 쌀과 임산물의 생산이 많다. 쌍계사를 비롯하여 십승지지의 한 곳인 청학동 등이 관광지로 유명하다. 영남과 호남의 화합 장소로 상징되는 화개장터도 관광지가 되었다. 면적 675.5㎢, 인구 50,259명(2015)이다.
삼국시대에 신라의 한다사군(韓多沙郡)이었으며,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 하동군(河東郡)으로 개칭하고 악양현(岳陽縣)·합포현(陜浦縣 : 花開) 등 4개현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고려시대의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1018년(현종 9) 진주(晉州)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1172년(명종 2)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다. 조선초에 남해현과 합해 하남현(河南縣)이라고 했다가 뒤에 다시 분리하여 하동현이 되었다. 1461년(세조 7) 섬진강 변으로 읍의 중심지를 옮겼다. 1702년(숙종 28) 섬진강이 요충이라고 하여 악양면(岳陽面)·화개면(花開面) 등 4개면을 진주로부터 편입하고, 이듬해에 읍의 중심지를 진답면(陳畓面 現하동읍) 두곡(豆谷)으로 옮겼으며, 1704년에는 하동도호부로 승격했다. 1730년(영조 6) 읍치를 다시 나동(螺洞)으로 옮겼다가 1745년에 다시 항촌(項村)으로 이전하는 등 여러 번 읍의 중심지를 옮겼다. 하동의 별호는 청하(淸河)이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에는 진주부 하동군, 1896년에는 경상남도 하동군이 되었다.
하동군의 대표적 관광지로는 쌍계사(경상남도 기념물 제21호)의 문화적 관광자원을 비롯하여 불일폭포 등이 있는 지리산, 하동읍 광평리 섬진강가 2,000평에 200년 가까이 자란 소나무숲 등 자연적 관광자원도 풍부하며, 청암면 묵계리의 청학동은 <정감록>에서 예언한 십승지지의 한 곳으로 지금도 조선시대의 생활양식을 고수하는 곳이다. 유교문화재로는 조선시대 1557년(명종 12)에 건립된 하동읍의 하동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3호)와 1830년(순조 30)에 창건된 옥종면의 옥산서원(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7호)이 있다. 그밖에도 금남면 일부가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하며, 섬진강의 맑은 물과 넓은 모래사장으로 인해 여름철에 많은 피서객이 찾아들고 있다.
8) 하동현을 지나가며[過河東縣] / 정홍명(鄭弘溟 1582∼1650)
嶺外區分七十官 영남에는 칠십 고을 관청이 구분되어 있는데
河東爲縣最凋殘 현이 된 하동은 가장 쇠잔한 고을이다.
篁茅繞郭村居尠 대숲과 띠풀이 성곽을 두르고 드문드문 촌락이 있고
廯宇臨江瘴雨漫 강가의 곳간 집엔 축축한 비로 질펀하다.
長吏誅求無小大 수령의 가렴주구는 크고 작음이 없으니
遺民供給飽酸寒 유민 되어 서글픈 어려움 실컷 겪게 되었네.
却思才子曾淪謫 재자(才子)가 일찍이 귀양살이 했던 일이 생각나는데
采得風謠與後看 둘러 본 뒤에 함께 풍속 노래를 수집했다네.
재자는 조이숙[趙怡叔 조희일(趙希逸)의 字]을 가르킨다.(才子指趙怡叔) 그는 1618년 9월 하동으로 이배된 후에 1619년 5월에 풀려났다.
9) 숙 하동 신현[宿河東新縣] / 김창흡(金昌翕 1653∼1722)
蟾津一衣帶 섬진강은 한 옷에 띠(帶)를 두른 듯하고
分野只煙沙 나뉜 들판에 냇가의 모래톱뿐이네.
越岸光陽火 언덕 넘어 광양의 불빛이 보이고
浮江智嶠花 강에는 지리산의 꽃이 떠다닌다.
星河隨步闊 은하수 따라 활보하면서
書劍趁身賖 학문과 무예 쫓아온 이 몸은 더딘데
港口樓船繫 항구에 매인 누선(樓船)은
潮來自蕩摩 조수 따라 절로 움직이며 서로 스치누나.
其二
新邑河東窄 새로 옮긴 읍치 하동은 군색하여
崇阿賣酒家 높은 가옥 술집에서 술을 팔고
牕櫺臨浦口 포구에 임한 창문 난간이 나의
衾枕到天涯 하룻밤 잠자리로 하늘 끝에 닿아있네.
月露中江靜 이슬 어린 달빛이 강 가운데서 고요하고
風篁兩岸摩 대숲에 이는 바람이 양 언덕을 스쳐 간다.
淸愁兼浩興 맑은 시름과 호탕한 흥취 일어나지만
望裏釣船斜 내 시야 속엔 기울어진 낚싯배만 보이네.
10) 숙 하동 신현[宿河東新縣] 섬진강변으로 옮긴 읍치에서 / 김창흡(金昌翕 1653∼1722)
仙山咫尺興翩躚 신선의 산이 지척이라 흥이 춤추듯 일어나는데
春入花開月欲圓 봄날 꽃이 피니 달도 둥글어지려네.
信是懷山妨主靜 정말로 가슴에 품은 산이 마음의 청정(淸靜)을 방해하니
晦翁猶自不能眠 회옹(晦翁)조차 잠들 수 없으리라.
[주1] 주정(主靜) : 망상을 버리고 마음을 청정(淸靜)하게 갖는다는 뜻.
[주2] 회옹(晦翁) : 송나라의 유학자 주희, 주자(朱子)의 호이다. 여기서는 김창흡 자신을 두고 한 말이다.
11) 하동[河東] / 조수삼(趙秀三 1762∼1849)
行至河東郡 가다가 하동군에 이르러
多聞太守賢 어진 태수의 소문을 듣고 놀랐다.
居官無使酒 술도 끊고 벼슬살이하는 그는
導俗不爭田 풍속을 인도해 전답으로 인한 다툼이 없었다.
安得佳聲譽 어찌 명성과 명예가 아름답지 않으랴.
曾看妙少年 진즉 소년 때부터 뛰어남을 보였다한다.
客來吳會想 손님이 오니 오회(吳會)가 생각나는데
鱸鱠政堪憐 농어회는 정말 사랑할 만하네.
[주] 오회(吳會) : 오군(吳郡)과 회계군(會稽郡)을 연칭(連稱)하여 오회라 하며, 일반적으로 두 군의 관할지를 가리킨다. 본디 오군 송강(淞江)의 농어가 유명하다.
12) 하동[河東] 二首 / 김택영(金澤榮 1850∼1927)
湖南行不厭 호남을 다니매 싫지 않았는데
嶺右復如何 경상우도로 어찌 다시 되돌아왔나.
回首雲峯合 돌아보니 구름이 봉우리에 걸려있고
流涎水市過 줄지어 흐르는 물이 저자를 지나간다.
荒荒溪近海 거친 시냇물 바다 근처로 흘러가는데
漠漠葑連禾 연이은 순무와 벼가 광활히 아득하네.
風氣殊分畫 풍속과 관습이 특별히 나누어진 곳,
因之感濟羅 신라 백제의 역사로 인한 것이다.
백제 신라 2개국(百濟 新羅二國)
前登黃土嶺 예전에 황토령에 올랐는데
落日見辰韓 지는 해에 진한(辰韓)이 보였다.
天地蟠方丈 천지(天地)가 방장산에 서리어
英雄最發翰 영웅은 최고의 발한(發翰)이었다.
신라 명장 김유신의 관명(官名)이 서발한(이벌찬)이라 했다.(新羅名將金庾信官名曰舒發翰)
興亡飛鳥盡 흥망성쇠는 날던 새가 사라지듯 하고
勛業古碑刓 그 옛날 공적은 옛 비석에만 새겨있네.
念此能無慨 생각건대 이에 슬퍼하지 않으랴만
儒冠轉益酸 유학자로써 더욱더 서글퍼지누나.
<경남 ‘하동군(河東郡) 古 하동읍성 중심’ 한시(漢詩)편 2.>고영화
하동읍성(河東邑城)은 조선 태종 17년(1417)에 축성된 조선전기의 전형적인 연해읍성(沿海邑城)의 하나로서, 일명 고현성(古縣城)이라 하며, 해발 149m의 양경산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전기 산상(山上)에 축조된 산성에 가까운 포곡식 석축성이다. 하동읍성이 위치한 고전면 고하리는 삼한시대의 변한 12국 중 낙노국(樂奴國)에 속한다고 추정하고 있으며, 가야에 속하여 대외교섭상의 위치에 있어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가야가 멸망하고 백제의 세력권에 들면서 다사성(多沙城)이라 하였으며, 신라 통일 후 한다사군(韓多沙郡)이라 하여 읍기(邑基)를 고하에 둔 이래 고려, 조선조에 걸쳐 읍기였다. 1593년 임진왜란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대에 의해 성이 함락되어 객사, 관아, 향교 등이 불타버려 1661년에 횡포촌 내기동으로 관아를 이전하였다. 1667년에 다시 성내로 관아를 이전하기도 하였으나, 1703년 진답면 우동(비파리 우치동)으로 이읍(移邑)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둘레 1,019척, 높이 13척으로 성안에 우물 5개, 연못 1개가 있었다고 하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여장의 높이가 3척, 적대(敵臺)가 11개, 원아축 4문, 옹성이 3개로 성은 높으나 협소하여 전시에 방비하기가 힘들다고 적고 있다. 문종연간의 기록을 보면 주위가 2,943척, 높이가 평지는 8척, 높고 험한 곳은 7척이며, 여장의 높이는 3척이고, 적대가 11개소로 이미 쌓은 것이 4개소이며, 문이 3개소에 옹성이 있고, 여장이 588개이고, 성안에 샘이 5개소, 못이 1개소, 해자는 미착이라고 되어 있다. 읍성의 주변으로는 해발 150∼300m 내외의 산줄기가 뻗어 있으며, 산줄기에서 동향 혹은 동남향하여 뻗은 50m 내외의 능선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성내는 작은 곡부(谷部)를 이루고 있어 물은 대부분 남서쪽의 남문터 주변에 집중되어 동쪽으로 흘러 남서방향으로 배수되는 지형을 이루고 있다. 현재 잔존둘레는 1,400m이고, 폭 4.5m이며, 잔존 최고높이는 5.2m 정도의 규모이고, 동·서·남쪽 체성 중간에는 옹성을 두른 문지와 그 좌우 및 성 모퉁이에 방대상(方臺狀)의 치성을 배치하고 체성 바깥에는 다시 해자를 두었으며, 해자와 나란하게 양마장(羊馬墻 흙 둔덕)을 두른 구조로 되어 있다.
13) 하동관[河東館] / 오숙(吳䎘 1592∼1634)
河南秋氣夜來多 하동(河南)에 가을 기운이 밤이 깊어갈수록 두터워지고
山接金鼇驛路賖 산에 접한 금오의 역마 길은 더욱 아득하다.
客裏關心唯藥餌 여정 속의 관심은 오직 약이 되는 음식뿐이고
天涯極目更雲沙 한없이 넓은 하늘가에는 구름 낀 백사장뿐이네.
四時靑見無名樹 사시사철 이름 모를 나무에 푸른빛 더하는데
百日紅知此地花 백일홍이 이 지방의 꽃임을 알겠네.
忽有人煙生島嶼 홀연히 인가의 연기가 여러 섬에서 생겨나니
遙憐鹽戶竝漁家 저 멀리 늘어선 소금 집과 어부의 집 어여쁘구나.
14) 하동 객관[河東客館] / 김의정(金義貞 1495~1547)
醉折梅花揷水甁 매화에 취해 꺾은 꽃을 물병에 꽂아놓았는데
燈開影落壁間橫 밝혀 놓은 등불에 그림자 드리워 벽 사이에서 아련 그리네.
笑拈栗尾描疏影 웃으며 붓을 들어 성긴 그림자를 그려보니
殊勝龍眠作意成 특히 그림에 뛰어난 용면거사(龍眠居士)가 그린듯하네.
[주] 용면(龍眠) : 송(宋) 나라 이공린(李公麟)을 말한다. 그가 그린 산장도(山莊圖)는 세상의 보물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인물의 묘사에 뛰어나 고개지(顧愷之)와 장승요(張僧繇)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공린이 늙어서 용면산(龍眠山) 산장에 거처하면서 날마다 용면산을 그렸다고 함. 이공린이 벼슬을 그만두고 용면산(龍眠山)에 들어가 지내며 용면거사(龍眠居士)라 자호하였다.
15) 하동 길에서[河東路上] / 오숙(吳䎘 1592∼1634)
山氣扶輿入海中 상서로운 산의 기운이 바다 가운데서 들어왔는데
一年行役路還窮 일 년 동안 여행의 피로가 누적되었건만 길은 다시 궁해지네.
楚天謾誦離騷體 초나라 하늘 보며 굴원의 이소체(離騷體) 외우지만
心地曾無汗馬功 마음속에는 일찍부터 한마(汗馬)의 공(功)은 생각지 않았다.
直北音書秋雁遠 북녘 서신을 가을 기러기가 멀리서 가져오고
河東村落暮煙籠 하동 고을의 촌락에는 저문 연기가 둘러싸네.
時危每憶蓬壺島 위태로운 시절마다 매번 봉호(蓬壺)섬이 생각났는데
一掛高帆萬里風 높은 돛을 한번 걸고 만 리 바람 안고 달려 갈까나.
[주1] 한마(汗馬)의 공(功) : 말이 땀을 흘리게 한 공로, 즉 전공(戰功)을 말한다. 여기서는 저자가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한 점과, 정묘호란을 때 왕을 강도에 호송했던 일을 말한다.
[주2] 봉호(蓬壺) : 바다 가운데 있는 삼신산(三神山)으로 봉래(蓬萊)ㆍ방호(方壺)를 말함.
16) 하동[河東] / 조희일(趙希逸 1575∼1638)은 1618년 9월 하동으로 이배된 후에 1619년 5월에 풀려났다.
十室河東縣 작은 마을 하동현,
孤城海上頭 외딴 성이 해상의 변두리에 있네.
靑煙起鹽井 푸른 연기가 염전 웅덩이에서 피어나고
白浪打漁舟 흰 물결이 고깃배를 두드린다.
故國何時返 고향에는 어느 때 돌아가려나?
嚴程此夕休 빠듯한 여정 속에 오늘저녁은 쉬는데
君恩隨處在 임금의 은덕은 가는 곳마다 있었으니
籬障好綢繆 울타리로 촘촘히 묶은 모습 참 보기 좋아라.
17) 하동 동헌운에 차운[次河東東軒韻]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北極漸遙馬首東 북극에서 점점 멀어져도 말머리는 동쪽을 향하며
有懷何處好音通 어디에서 좋은 소식 알려줄까 은근히 기대한다.
海山無數蠻雲重 무수한 바닷가 산에 거친 구름 겹겹이 쌓이고
一鳥長天獨遡風 아득한 하늘에는 한 마리 새가 바람을 홀로 거슬러 날아가네.
18) 하동 물가 포구에 밤에 도착해[夜到河東沿浦] / 총쇄록(叢瑣錄) 오횡묵(吳宖默 1834-?)
繊波不動日黃昏 물결 잠잠한 황혼 즈음에
潮送沙鷗出海門 해문에서 조수 따라온 백사장 갈매기,
天八滄浪浸地 하늘 아래 푸른 물결이 땅의 입구까지 스며들고
路經灩頤爽神魂 지나가는 길까지 물결 출렁이니 정신이 상쾌하네.
如流漁火月中島 달빛 속의 섬에 고기잡이 횃불이 유수와 같은데
無數松燈猪口村 무수한 관솔불이 마을 입구까지 늘어섰다.
已判明將從陸去 이미 불 밝히며 뭍으로 줄지어 들어갔지만
何人先我餒壺飱 어느 누가 나부터 주린 저녁밥을 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