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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에스라 제4강
에스라의 결심
말씀 / 에스라 7,8장
요절 / 에스라 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서 1~6장은 총독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제1차 포로 귀환자들이 어떻게 성전을 재건했는지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이제 7~10장은 에스라를 중심으로 한 제2차 포로 귀환자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말해줍니다. 오늘 말씀 7장의 시대적 배경은 성전이 재건된 이후, 약 57년의 세월이 지난 때입니다. 포로 귀환 1세대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나서 큰 기대와 꿈에 부풀었을 것입니다. 성전만 짓고 나면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해주셔서 모든 일이 다 잘될 것만 같았습니다.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게 되고, 군사적으로도 강력하게 되어 보란 듯이 잘 살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약해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열정이 식고 세속적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던 포로귀환 1세대들은 점점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위험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이 바로 에스라입니다. 에스라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 어떤 결심과 각오를 다졌습니까?
7장 1절을 보십시오. “이 일 후에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왕 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그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여기 ‘이 일 후에’는 다리오 왕 제 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된 것을 가리킵니다. 총독 스룹바벨의 인도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백성들은 무너진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 제사를 회복합니다. 에스라서 6장과 7장 사이에는 약 60년이라는 시간 간격이 있습니다. 이 사이에 제4대 왕 아하수에로가 통치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에스더서에 기록된 내용이 바로 이 시기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지금은 시간이 더 지나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이 통치한 지 제 칠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때 누가 있었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 ‘에스라’입니다. ‘에스라’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도우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 만큼이나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언급하는 구절이 곳곳에 나옵니다.
에스라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누가 나옵니까? 첫번째 대제사장인 아론이 나옵니다. 에스라는 대제사장의 혈통을 이어받은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제사드리며,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도록 가르치고 지도하는 사람입니다. 에스라의 족보는 에스라가 하나님이 정하신 대제사장의 혈통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에 영적 각성과 개혁을 일으키고 그들을 가르치고 지도하기에 합당한 인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무너진 성전이 재건되었고 성전 봉헌식도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재건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전 건물이 본질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회복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 개혁과 각성을 위해 지도자 한 사람을 예비하십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에스라입니다.
에스라가 어떤 사람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먼저,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입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율법에 ‘능통한’ 학자라고 했고, 공동번역에서는 ‘통달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비록 바벨론에서 태어난 포로 2세였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통달할 정도로 빼어난 성경학자가 되었습니다. 14,25절을 보면,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도 에스라를 예루살렘에 보내면서 그가 하나님의 율법의 전문가임을 인정하고 율법에 비추어 예루살렘 백성들의 형편을 살피고, 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율법을 따라 재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학자’라는 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학자’는 ‘기록자, 서기관’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에 생긴 새로운 직업으로 ‘율법을 기록하고 연구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다가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다 파괴되고, 유대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대신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필사하고 연구하고 조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자연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에스라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라는 특별히 모세의 율법에 통달한 학자로서, 당대를 대표하는 신학자요, 탁월한 설교자였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구하여 성경 역대기서를 편찬합니다. 또 모세오경을 비롯한 시가서, 선지서들을 집대성하여 구약 성경을 완성하는데 토대를 마련합니다. 그래서 에스라를 제2의 모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에스라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였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유대인이었던 에스더를 왕후로 맞이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왕후였던 에스더를 통해 유대인들과 그들의 신앙에 대해 상당한 호의를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을 많이 등용시켜 자기 곁에 둡니다. 에스라를 총애하여 궁중에 불러 가까이 두었고, 역시 유대인이었던 느헤미야를 술관원으로 두어 일하게 했습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적극적인 신임을 받았고, 왕이 에스라의 예루살렘 귀환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줍니다. 이것을 본문의 저자, 에스라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9절도 보십시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바벨론에서 길을 떠나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에스라서 7,8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말이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받아’라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사막에 강도들이 많아 참으로 위험한 여행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과 보호하심, 인도하심으로 예루살렘까지의 머나먼 여정을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에스라가 이처럼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게 된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한글 번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어성경을 보면, 10절 맨 앞에 ‘왜냐하면’을 의미하는 ‘키’라는 접속사가 나옵니다. 영어 성경도 보면, ‘왜냐하면’을 의미하는 ‘For’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10절 말씀은 9절에 대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에스라가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은 이유는 그가 일찍이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고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자 결심했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고 그것을 이스라엘에서 가르치고자 결심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고, 하나님도 이런 에스라의 결심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한 손길로 에스라를 도와주셨습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오기 위해서는 그동안 그가 페르시아에서 누리고 있던 수 많은 특권들을 내려놓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예루살렘에 오지 않아도 편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자기는 페르시아에서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보내고 자신은 멀리서 지원만 해줘도 될 것 같습니다. 또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은 강도들의 침몰로 위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기어코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예루살렘에 올라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에스라는 예루살렘에 올라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자 결심했을까요?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점점 믿음이 약해져 세속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당시의 영적 상태를 알려면, 느헤미야서와 말라기서를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병든 것, 질 떨어진 것들을 드렸습니다.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였고, 가정생활에도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또다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과거의 수치가 반복될 수도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이런 현실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과 자기 백성들에 대한 애타는 목자 심정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면,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결심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합니다. ‘연구한다’는 것의 원어 의미로는 ‘묻다, 찾다, 샅샅이 조사하다’ 이런 의미입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뜻을 찾기 위해 더 간절한 심정으로 연구하고자 결심한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미 율법에 능통한 학자라고 했습니다. 율법에 통달한 사람인데 뭘 또 연구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데도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율법을 더 깊이 연구하기로 결심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심오하고 깊습니다. 평생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해도 그 안에 담겨있는 무궁한 비밀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사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인간이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는 샘물과도 같아서 파면 팔수록 더욱 신선한 생수가 솟구쳐 올라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도 이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도 새롭게 짓고, 제사도 드리고, 율법도 어느 정도 배웠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죄악됨으로 퇴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영적 상태가 말라버린 우물과도 같았습니다. 신선한 말씀의 샘물이 계속해서 솟구쳐 올라와야 하는데, 우물은 마르고, 더 이상 생수는 흘러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에스라는 깊은 문제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말씀의 샘을 파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수를 공급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단지 영적 도탄에 빠진 동족들을 책망하고 훈련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새롭게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함으로 말씀의 샘물을 파서 생수를 맛보고자 결심했습니다. 그 감격과 은혜와 기쁨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말씀의 생수를 공급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땅속에 깊이 숨겨진 보배와도 같습니다. 오직 그것을 캐내는 자만이 그 보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잠언 2장 4,5절은 말씀합니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보석은 땅에 널려있지 않습니다. 깊은 땅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땅을 파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수고를 해야만 합니다.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자 연구하고, 묵상하고, 참고 도서도 찾아서 읽어보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할 때 비로소 말씀에 담긴 깊은 의미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UBF 공동 설립자이신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전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그 깊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 없는 깊은 바닷속과도 같다. 지금까지 세계의 수 많은 성경학자들이 평생을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도 연구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연구할 것이다. 성경 말씀은 감추어진 보화와 같아서 본질을 이해하고 정리하며 파악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그러나 광부들이 생명을 걸고 어둡고 깊은 탄광으로 들어가 힘들게 금 줄기를 찾고 금을 퍼내듯 우리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성경을 연구하고 찾아서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 이 힘든 작업을 회피하지 말고 샘물이 나올 때까지 깊이 파고파서 양들에게 시원한 생수를 마시게 해야 한다.”
우리도 에스라와 같이 말씀을 연구하며 새롭게 공부하고자 결심을 해야겠습니다. 새롭게 연구하고 묵상하면, 하나님께서 또다시 새롭게 신령한 뜻을 깨닫게 하시고 감동을 주십니다. 일용할 양식 말씀을 꾸준히 묵상하고 쓰면서 신선한 감동과 은혜가 주어집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얻어지는 기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신령한 은혜와 감동입니다.
둘째, 율법을 준행하기로 결심합니다. 에스라는 율법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이 그 율법을 준행하고자 결심합니다. 아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아는 것도 어렵지만 말씀대로 사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삶은 매번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알아도 믿지 못하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삶이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알았다면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자요, 위대한 성경학자인 존 칼빈도 그의 명저 ‘기독교강요 제1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모든 바른 지식은 순종을 통해 얻어진다.” 말씀을 연구하고 즐기는 것으로 끝나는 사람은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준행하는 자는 말씀 앞에 항상 겸손합니다. 말씀 앞에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기에 힘을 씁니다. 사도바울은 신약성경의 13권을 저술한 대성경학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사도바울은 수많은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많은 교회도 개척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말씀 앞에 쳐 복종하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운전면허 필기시험에 합격했다고 운전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필기시험은 여러 가지 주의할 점을 배우고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는지 이론적으로 습득하는 것입니다. 운전을 하려면 학원에서 돈을 내고 강사의 지도하에 실제적인 연습을 해야 합니다. 실기시험에도 합격해야 합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할 수 있습니다. 연수를 받아야 하고 실제 도로에서 실전 경험을 할 때 점점 운전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이러다 보면, 나중에는 차와 자신이 일체가 되어 운전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씀이 실제 삶에서 익숙해지도록, 말씀이 나의 삶과 분리되지 않고 삶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성경책 속에 박제되어 있는 말씀이 아니라 나의 삶에서 말씀이 살아서 운동해야 합니다. 그것이 실제로 말씀을 준행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격언에 ‘당신은 당신의 친구가 보는 성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은 기독교가 어떤 종교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접하게 됩니다. 말씀을 준행하는 삶은 자기도 살리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길입니다.
셋째, 율법을 가르치기로 결심합니다. 에스라는 그가 깨달은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자 결심했습니다. 느헤미야 8장 8,9a절에 보면, 에스라가 수문 앞 광장에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에스라가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그 말씀에 준행하면서 자신이 깨닫고 감동된 말씀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에스라가 하루종일 말씀을 가르치는데도 백성들은 다 일어서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감격에 겨워 울며 자신의 죄들을 자복하기 시작했습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성전 건물 건축은 컴퓨터에 비유하면 ‘하드웨어’입니다. 그런데 컴퓨터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려면 ‘소프트웨어’가 있어야 합니다. 성전의 ‘소프트웨어’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전 건물만 있다고 해서 성전이 아닙니다. 그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 핵심 내용이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전의 핵심 사역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 공동체가 힘써야 할 본질적인 핵심 사역도 바로 이 말씀 사역입니다.
10절에서 ‘결심했다’는 것은 영어성경에 ‘devoted himself’로 번역합니다. 에스라 자신의 온 마음을 쏟아부은 것입니다. ‘결심했다’를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헌신했다’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 밖에는 없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에스라는 말씀 연구와 준행,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 백성들을 깨우치고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어 헌신한 것입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살아계실 때 매달 발간한 월간지가 있었습니다. 그 월간지의 제목이 바로 <decision>입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해서 결심한 것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다시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새롭게 결심, 결단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 준행, 가르치기에 힘쓰는 우리 교회 되기를 기도합니다.
11-26절은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초본입니다.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에스라에게 페르시아 제국의 창고를 열어 모든 필요한 인적, 물적 지원을 아끼지 말고 신속히 지원하도록 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각종 면세 혜택을 주고, 혹시 에스라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죽이거나 귀향 보내고, 재산을 몰수하고 감옥에 감금할 수 있는 사법적 권한까지 부여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결심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에스라에게 왕은 백지수표와 같은 권한을 부여해 줍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또 나로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 에스라는 페르시아 왕의 호의 조치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8장에는 제2차 포로 귀환 명단과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과정이 나옵니다. 그런데 15절을 보십시오. 문제가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귀환자들 중에 레위인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예배공동체를 이루고 율법을 가르치고자 하는데 성전에서 봉사할 레위인들이 함께 가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레위인들은 페르시아에 정착한 이후, 안정된 삶을 버리고 다시 힘든 성전 제사 도우미를 하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가지 않으려 한 것 같습니다. 에스라는 레위인들을 찾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섬길 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레위 사람 사십여 명과 레위인들을 돕는 성전 일꾼 220명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례뱌와 그의 아들들과 형제 십팔 명과” 에스라는 레위인들을 찾는 이 모든 것도 하나님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에스라는 예루살렘을 향한 대장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금식을 선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길이 평탄하도록 겸손히 간구합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모든 소유를 가지고 예루살렘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오직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이 있도록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전에 바칠 것을 구별해 처음부터 제사장들에게 맡깁니다. 3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손이 에스라 일행을 도우심으로 대적과 강도의 손에서 건져주셔서 그들은 예루살렘까지 안전하게 도착합니다. 돌아온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며 예배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의 손길이 일평생 함께 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에스라의 결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 준행, 가르치기에 힘쓰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살아가는 교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