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75> 관람 후 토론... "억만금 줘도 그런 안락사 안 해" - "월 천만원 주면 100세 신청" 분분
[유지영 기자]
정부가 75세 이상의 국민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안락사 정책을 도입하면 어떻게 될까. 가까운 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영화 <플랜75>의 설정이다. 주인공 78세 여성 '미치'(바이쇼 치에코 분)는 호텔 청소일을 하다가 해고된 뒤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친구의 고독사 현장을 목격한 뒤로 안락사를 고민한다.
비단 영화적 상상에 불과한 걸까? 지난 2023년 2월 일본 도쿄대 출신의 30대 예일대 교수가 고령화 사회의 해법을 두고 "고령층이 집단 자살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주장해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논란이 되자 '집단 자살은 은유적 표현'이라고 해명했으나, 이후에도 안락사 의무화를 논의해야 한다라고 발언했다.
한국 역시 2025년에는 65세 이상 국민들의 비중이 20%를 넘어서는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다. 지난 5일에는 네덜란드 전 총리 부부가 93세의 나이로 동반 안락사를 선택해 한국서도 큰 이목을 끌었다.
지난 15일 오후 영화 <플랜75>를 본 70대 시민 10명이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인근에 모여 노년과 죽음, 안락사를 이야기했다. 참가자들은 종로구 종로시니어클럽 내 자조모임으로 시작한 '내 생애 마지막 기부 클럽' 구성원들로, 지하철 택배 등 노인 일자리를 통해 번 돈을 형편이 어려운 청년에게 기부하는 등의 활동을 해왔다. 또 이들은 노인의 삶과 죽음, 질병, 장례식, 안락사 등을 공부하는 자리를 최근 1~2년간 가져왔다.
"75세는 너무 이르다"부터 "안락사 반대"까지
"플랜75 같은 법 국회 통과된다면 반대 서명운동 할 것"
"이런 식으로 사람을 비용 문제로 접근하면, 장애인은 설 자리가 없다"
할 말 많은 노인들... 낮은 목소리로 두번 묻기도 "정말 노인 위한 나라는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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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플랜75> 스틸사진. 미치는 노래를 잘 하고, 볼링을 잘 친다. 그 또한 살아있는 인간이다. |
ⓒ 찬란 |
"우울하고, 슬프네요."
<플랜75>를 보고 모인 자리, 70대 시민들은 나이라는 기준으로 안락사 대상자를 정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75세는 너무 이르다, 요즘은 80대에도 정정한 사람이 많다"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도 곧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할 한국의 현실을 우려스러워 했다.
"일본의 출생율보다 한국의 출생율이 더 낮기 때문에 앞으로 초고령화는 일본보다 더 큰 문제가 될 것"(김은숙)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71세 신용현씨는 이날 자리에서 낮은 목소리로 두 차례나 되물었다. "정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 걸까요?" 태철원씨는 "만일 '플랜75'와 같은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다면 법안 통과 반대 서명 운동에 참석할 것"이라고 했다.
구성원 중에 가장 나이가 적은 김은숙(70)씨는 "요즘에는 젊은이들이 결혼도 다 늦게 하지 않나? 여태껏 애들을 정신없이 다 키워내고 70대가 되니 이제서야 비로소 홀가분하고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데..."라고 덧붙였다. 여유가 생기자마자 고령층이라는 딱지가 붙는다는 비판이다.
안락사에 대해서는 의견이 극명하게 갈렸다. 정인숙(72)씨는 "영화는 75세 이상 노인들은 원하면 획일적으로 안락사를 시킨다는 내용인데, 내가 생각하는 안락사는 좀 다르다. 오히려 안락사는 고통스러운 환자에게 마지막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종교적인 신념 등의 이유로 안락사를 하지 않겠다고 말한 시민도 있었다. 정운득(75)씨는 "신의 섭리에 따라 (안락사가 아닌) 자연으로 돌아가는 죽음의 길을 맞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한영천(가명, 75)씨는 안락사 기준이 75세임을 지적하며 몇 분 가량 열변을 토했다. 한씨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비용의 문제로 접근하면, 장애인은 설 자리가 없다"라며 "국가는 75세가 넘은 국민이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줘야 한다. 이 사람은 육체가 건강하던 젊은 시절에 국가를 위해 할 일을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한씨는 "생산성이 없으니 죽는 게 좋지 않느냐고 묻는 건 국가가 할 일이 아니다"라며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느끼는 고통 역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인데, 이런 효용가치 아래 안락사가 도입된다면 노인들이 가족이나 의사 눈치를 보다가 등떠밀리면서 죽게 될 수 있다"라고 안타까워 했다. 또 한씨는 "당장 죽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많지만, 죽으라고 할 수 없다. 젊기 때문이 아니라 가치를 갖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묵직한 질문 "75세 이상 노인들이 다 죽으면 과연 남은 이들의 삶이 나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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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플랜75> 스틸사진. 친구와 행복한 한 때를 보내는 미치. 미치는 훗날 친구가 고독사로 사망하자 안락사를 고민하게 된다. |
ⓒ 찬란 |
영화 <플랜75>에서는 75세 이상 노인들이 안락사 신청을 하면 월 10만 엔 지급, 15분의 상담 제공, 장례비 지원 등을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만일 어떤 조건이 주어진다면 안락사를 신청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떤 조건이 주어진다면 굳이 안락사를 신청하지 않아도 될까.
정영식(73)씨는 "만일 나라에서 월 1000만 원 정도를 준다면 100세 때 안락사 신청을 해보겠다"는 깜짝 제안을 한 반면, 태철원씨는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절대로 응하지 않겠다. 국가의 정책에 나의 귀하고 소중한 생명을 내줄 수는 없다"라고 반대했다.
이동규(73)씨는 끊임없이 주인공 '미치'가 "마치 내 이야기 같았다"라면서 공감을 표했다. 그는 영화 속 미치에게도 안정적인 일자리가 주어진다면 안락사는 후순위가 아니겠느냐고 되물었다. 태철원씨 또한 "정부가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노인들을 고용하지만 지하철 택배 등 주로 저임금·육체적 노동이 대부분"이라며 "국가에서 노인 일자리 정책이 지금보다 더 활성화되면 굳이 안락사를 할 필요가 없을 것"라고 말했다.
이날 모인 이들은 "앞으로 안락사 문제를 두고 세대 간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다"라고 걱정하면서도 동시에 이 영화에 대한 젊은층의 반응을 궁금해 했다. 이들은 동석한 30대 기자에게 "청년층과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이런 모임을 만들면 오늘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가 나올 것"(정영식)이라며 역제안을 했다.
민경숙(71)씨는 "요새 젊은이들은 75세 이상 넘은 노인들을 사람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부담스러운 존재로 받아들인다. 지금도 연세가 있고 조금이라도 편찮으면 요양원으로 보내버리지 않느냐"라고 현실을 짚었다. 정영식씨는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애를 많이 낳으면 사실 초고령화 사회는 자연스럽게 해결이 될 수 있는데"라면서 안타까워 했다.
민경숙씨는 "75세 이상 노인들이 다 죽으면 과연 젊은이들의 삶이 나아질까? 돈만 남은 사회에서는 젊은이들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울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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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대 시민 10명이 모여 영화 <플랜75>와 안락사를 두고 이야기하는 자리를 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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