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이 거의 끝날 즈음, 나는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 하나님을 만난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머리로만 알았던, 지식으로만 알았던 하나님께서 내게 찾아오셨다.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득 채워주셨다. 하나님을 만난 후 나의 삶은 변화되어 갔다. 비록 넘어짐과 흔들림이 있었지만,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었다. 사도 바울과 같이 180도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차근차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갔다. 말로만 하나님을 안다고,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지금도 여전히 노력한다. 비록 넘어지고 연약한 모습이 많지만, 그런 나에게 손 내미시는 주님을 바라본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태어나보니 아빠가 개척교회 담임 목사님이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교회에 사택이 있어서 자연스레 나가도, 들어와도 교회였다. 그렇게 나름 목사님의 딸로 잘 자라갔다. 교회 성도들에게 인사 잘하는, 동생들을 잘 놀아주는 아이였다. 엄마를 따라 수요예배, 금요 기도회에 나가서 동생들과 놀았다. 특별 새벽기도 기간에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교회 계단을 내려가 본당에 갔다. 항상 어른들에게 칭찬받는 아이였다. 가끔은 엉뚱하여 웃긴 행동도 많이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선생님들에게 사랑받는 아이였다. 친구들도 주변에 항상 있었고, 별걱정 없이 잘 살아가는 아이였다. 항상 잘 웃는, 밝은 아이였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상처가 찾아왔다.
아직도 아빠의 그 한마디가 마음을 찌른다. ‘나는 너보다 교회가 더 중요해.’ 아빠가 이 글을 보시면 마음이 어떠실까. 기억은 나실까 싶다. 하지만 나에게는 큰 상처였다. 지우고 싶어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였다. 그렇게 상처를 받았다. 그 후 교회를 미워했다. 교회에 성도들을 미워했다. 아무 잘못 없는 동생들도 미워했던 것 같다. 내가 왜 목사의 딸로 태어났는지, 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면 이럴 일은 없었을 거라며 하나님께 원망만 했다. 어렸던 나의 초등학교 3학년 이야기이다. 그렇게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상처는 여전히 나의 마음을 찌르고 있었지만,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목사 딸이었고, 여전히 오고 가는 곳은 교회였다. 가기 싫어도 매주 예배를 드렸다. 사람들에게는 또 좋게 보이고 싶었던 마음에 여전히 활짝 웃었다. 똑같이 어른들에게는 밝은 웃음과 함께 인사를 했다. 목사의 딸 황은서로 살아갔다. 잘 보이고 싶은 황은서로 살아갔다. 그때부터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항상 밝은 미소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처음 하는 일들도 잘 해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점점 완벽주의로 자라갔다. 아빠를 향한 미움도 마음에 그대로 둔 채 하루하루 살아갔던 것 같다.
그런 내가 지금은 다르게 살아간다. 목사의 딸 황은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황은서로 살아간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때, 그 전에 있었던 상처는 깨끗이 치료해 주셨다. 변화의 시작점은 정체성 공부이다. 정체성 공부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은 누구신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내 영혼의 갈망’이라는 책을 가지고 공부했었다. 5학년이었다. 수영로교회를 다니시는 김소휘 집사님을 만났다. 처음에는 교사 교육을 목적으로 우리 교회에 매주 오셨었다. 그러다 나 포함 학생 4명에서 정체성 교육을 받게 되었다. 김소휘 집사님과 또 다른 학생들과, 엄마와 정운주 전도사님이 계셨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갔다. 사실 그 당시에 코로나 시기여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처음 모인 날, ‘내 영혼의 갈망(다니엘 핸더슨)’이라는 책으로 공부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매주 주시는 프린트물을 가지고 적으며,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새로운 질문들을 접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곳에 이르기 위해 왜 이렇게 서두르고 있는가?”, “과연 그곳으로 가도 좋을까?” 등, 깊고 진지한 질문을 통해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또 하나님에 관해서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나는 누구인지 정체성에 관한 부분들도 깊이 생각해 보았다. 아직도 소중하게 가지고 있는 프린트물을 펼쳐 보니, 그 당시 나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낮았는지 보이는 것 같다. “오늘 하루 삶의 우선순위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나의 답은 ‘해야 할 일, 숙제 마무리.’라고 적혀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 나이에 맞는 대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지금 돌아보니, 점점 프린트에 적힌 메모들이 변화하는 것이 보였다. 그만큼 정체성 공부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정체성이 정말 중요하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그것을 잊기 마련이다. 점점 세상을 따라가고,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랬으니까. 모태신앙으로 주일성수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아빠가 목회자라는 이유로. 그런데 교회는 나가면서 제대로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헛걸음만 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정체성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 깨닫게 되고, 내가 누구인지 깨닫고 기억하며 살아가니 삶이 점점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너무나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참 이기적이고 부정적인 아이였던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다 보니, 그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말씀을 제대로 읽다 보니 나의 삶은 빠르게 변화되어 갔다. 목사의 딸이어서, 내가 특별해서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니다. 정말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변화될 수 있으며, 하나님을 만나고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 바울이 되었던 것처럼, 그저 담임목사 딸이었던 내가, 예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자녀 황은서로 변화된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이 말씀과 같이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예수님과 동행함으로 이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새 모습으로 자라갔다. 정체성 교육을 하면서 나의 정체성은 물론,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나에게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위해 지금도 매일 훈련하고 있다.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기 위해, 나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기도의 자리에 나아간다. 이제는 목사의 딸이 아니라, 하나님의 딸 황은서로 살아간다. 그 삶이 너무나 행복하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시는 복은 정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크다. 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르게 알길 원한다. 그보다 앞서서 많은 목회자와 교육자들이 바르게 가르치길 소망한다. 교회만 오고 가는 헛걸음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길 소망한다. 나 먼저 변화된다면, 나로 인해 가정과 직장과 학교가 변화될 것을 믿길 바란다. 나를 통하여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이 세상이 변화될 것을 믿길 바란다. 믿고 온전히 순종할 때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길 간절히 소망한다.
정체성 공부를 하기 전, 나는 지금과 정말 다른 모습이었다. 어른들에게는 잘 보이고 싶어서 척하며 살았지만, 뒤에서는 거짓말로 인해 들킬까 봐 두려워 떨었다. 친구들이 주변에 항상 있었지만, 내가 그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을 것이다. 항상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이기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변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했지만, 아직도 넘어지고 무너진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에 욕과 비속어가 나왔고, 부정적인 말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정체성이 끝나고도 계획표를 세우며 시간을 관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지만, 실패한 계획표가 내 방에는 넘쳐난다. 미디어를 정말 좋아했고, 게임도 좋아했다. 부모님과 핸드폰 사용 시간을 약속했지만, 그것을 어기면서까지 핸드폰을 사용했다. 거짓말로 인해 남에게 상처도 많이 주었다.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속이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욕망대로 살았다. 오래된 일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시간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계속해서 변화해 갔지만, 계속해서 무너짐도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나’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내 중심적으로 삶을 살아갔다. 어쩌면 지금도 그런 모습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 모습 때문에, 자꾸만 넘어진다. 처음에는 넘어지는 나의 모습에 그저 나를 자책할 뿐이었다. 연약한 나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고 채찍질했다. 실패한 계획표를 보며 내일을 위해 다시 일어서는 것이 아닌, 과거에 빠져 부정적인 생각에 빠졌다.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이 정말 싫었다. 그 모습이 너무 싫어서 처음엔 숨기려고까지 했던 것 같다. 모두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나는 다 잘하고 싶다는 그런 마음에 말이다. 그런 부정적인 마음이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안 좋은 영향을 주었다. 나는 그 당시 몰랐지만. 하지만 지금은 또 변화했다. 한 주가 끝나고 정체성 모임에 나갔을 때, 내가 집사님에게 보여드린 계획표는 형편없었지만, 집사님은 훈련의 과정이라고 나를 다시 일으켜 주셨다. 매일 나 스스로에게 자책하는 모습에 정운주 전도사님은 이것이 교만임을 깨닫게 해 주셨다. 내가 하나님이 아닌데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냐고, 어쩌면 그 마음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과 같다고 말씀해 주셨다. 내 일상에 항상 함께하는 부모님도 날 깎아내리지 않으셨다. 날 묵묵히 기다려주셨다. 지금도 여전히 기다려주고 계신다. 내가 넘어지고 실패해도, 잘했다, 못했다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내가 스스로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그저 옆자리를 묵묵히 지켜주셨다. 가끔은 내가 죄에 빠져 헤매고 있을 때도 끝까지 기다려주셨다. 나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셨다. 지금도 끝까지, 묵묵히 기다려주신다.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라고 바르게 알려 주셨다. 그러나 끝없이 용서해 주셨다. 그런 부모님을 보며 하나님이 보였다. 소휘 집사님을 통해, 운주 전도사님을 통해, 엄마와 아빠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나에게 붙여주셔서 하나님께로 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나에게 괜찮다고 다독여주셨고, 잘못된 생각과 마음은 바르게 깨닫게 해주셨다. 날 묵묵히 기다리시며, 여전히 나를 사랑해 주셨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믿어주셨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바른길로 인도해 주셨고, 나는 그렇게 계속해서 하나님을 만났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를 만나주신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다. 비록 넘어지고 무너져도, 나의 연약한 모습이 보여도 이제는 그 모습을 자책하지 않는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 연약하고 넘어진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렇게 하나님은 또 보듬어 주시고, 상처 난 부분을 치료해 주신다. 죄에 빠진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회개의 자리를 통해 또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다 보니, 연약하고 힘들 때만 나아가지 않고 기쁠 때도, 행복한 순간에도, 하늘이 유독 예쁜 날에도, 폭우가 내리는 날에도, 그렇게 매일매일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쉽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시간과 훈련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나는 매일 무너지고 넘어졌지만, 그 순간조차 이제 감사하다.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참 행복을 누리기로 했다.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행복과 사랑을 전하기로 마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