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저명한 철학자(에머슨)가 어느 날 아들과 함께 송아지 한 마리를 외양간에 넣으려 하였다.
그러나 송아지가 고집을 부리며 한사코 버티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땀만 뻘뻘 흘릴 뿐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늙은 가정부가 그들 앞으로 다가와 말하였다.
“저는 송아지를 힘 하나 안 들이고 외양간에 넣을 수 있습니다.”
놀란 철학자가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소?”
가정부가 웃으며 말하였다.
“그 전에 한 가지 여쭈어 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선생님께서 갖고 계신 많은 책에는 대체 무엇이 씌어 있나요?
예를 들어,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는데 밭일을 할 시간이 부족할 경우,
해를 붙들어 매라고 씌어있나요, 아니면 등불을 밝히라고 씌어 있나요?”
“책에는 그런 데 대한 언급이 없소.
굳이 비슷한 경우를 찾으라면 그럴 경우 책에는 ‘자연을 거스르지 말라’고 적혀 있소.”
“그렇다면 책에는 그런 경우 등불을 밝히라고 쓰여 있다는 얘기로군요.
그렇다면 선생님은 왜 송아지 문제에 대해 그런 슬기를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말하고 나서 가정부는 송아지 앞으로 가더니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송아지의 입에 물려주었다.
송아지는 젖을 빨듯이 손가락을 빨기 시작하였고,
가정부는 천천히 뒷걸음을 침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송아지를 외양간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것을 본 철학자가 탄식하였다.
“부끄럽구나!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으면서도 이럴 때 슬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힘을 사용하려 했으니!”
아들이 아버지의 말에 덧붙여 말하였다.
“가정부 할머니의 손가락 힘은 아버지와 나, 거기에 송아지를 합친 것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확실히 슬기는 힘보다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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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 너무 많다 보면 양에 치여 정리가 안 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편성이 안 된 무리는 오합지졸에 불과하고,
정리가 안 된 지식은 인터넷과 사전을 뒤지면 얼마든지 대체 할 수 있다
재삼 강조하지만 지식의 정리는 여유와 한가로움에서만 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아마추어적인 물리학자로서 달성하였는데,
그것은 그에게 여유와 한가로움을 누릴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인슈타인은 과학자 일수록 상상력이 풍부하여야 한다고 말하곤 하였다.
특수 상대성 이론을 내놓던 때 아인슈타인은 특허국 직원에 불과하였다.
그는 직장에서 일을 마친 다음 퇴근하여 연구를 하였고,
국가나 연구소가 제공하는 시설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이론 물리학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그가 아마추어적인 환경에서 일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20세기 최고의 과학적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는 그것을 거의 시적(詩的)인 상상력으로부터 달성하였다.
당시의 과학자로서 공간이 휜다느니, 시간이 중력에 따라 다른 속도로 흐른다느니,
시간과 공간이 연속체(連續體)라느니 하는 개념이 들어설 여지는 일억 분의 일도 없었다.
그런 생각은 과학자가 아닌, 시인이나 예술가, 특히 공상과학 소설가나 만화가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설로 수용할 수 있는 탄력적인, 아니 탄력적이라기보다는
바람처럼 가벼운 정신을 갖고 있었고, 마침내 그것을 이론적으로 증명하였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유머 감각이 매우 풍부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매우 한가하고 여유로운 심정을 갖고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해서 그의 한가함은 낭비가 아니라 재충전이었다. 아니, 재충전 이상이었다.
그는 시간을 내어 바이올린을 연습하여 프로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런 예술적인 감성과 한가로운 생활은 그의 물리학을 같은 시대 동료 물리학자들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게 했다는 점에서 재충전을 넘어선 폭발적인 확대 재생산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볼 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철학자는 아인슈타인 시대의 일반 물리학자와 같았고,
가정부 할머니는 아인슈타인과 같았다.
철학자는 앎의 양만을 늘이고 이었을 뿐 그것을 정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백만 가지를 알지만 정리되지 못한 앎은 백가지를 갖고 잘 정리한 앎보다 못할 때가 많다.
때로 가정부나 농부, 어부가 교수, 박사보다 나은 것은 그 때문이다.
정리가 안 된 앎을 지식이라고 하고, 정리되고 음미된 지식을 지혜(슬기)라고 한다. 아니다 지혜는 그 이상이다.
지식이 정리된 다음 깊게 음미되어 천천히 발효되어 나오는 것을 가리켜 지혜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지식이 발효된 이상 그것은 이미 지식이라고 불릴 수 없다. 술이 어찌 보리이거나 포도이겠는가.
술은 보리와 포도에서 나오지만 보리와 포도가 술은 아닌 법, 지식을 발효하여 지혜를 만드는 것도 그와 같다.
-《리더의 아침을 여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