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i72cZ-53u7o
제40회:녹진권외..이야기(진도군)
1.일시:2022.1.8.토
2.장소:지도읍-진도대교 휴게소-울돌목-진도타워-거북선한식부페-삼별초왕온의묘-운림산방-운림삼별초공원-무안식자재마트-귀가
남도 유적지를 모두 탐사하려면 어떻게 계획을 세워야 할까.
남도 2년차에 올해는 전남 5개시와 17개의 군의 문화 유적지를 돌아보려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1박2일 일정으로 마친다면 44일이 걸리고 3일 일정은 66일이소요된다.
한 달에 세번 시와 군을 탐사한다면 얼추 7개월이 걸린다.
1차 년도에 산행을 하면서 다녀온 곳들이 있어서 조금은 여유로운 생각이 들기는 한다.
보배로운 섬 진도라고 하는데 왜 보배로운 섬이라고 하는가.
대한민국 민속문화예술특구라는 문구가 먼저 눈에 띈다.
진도는 강강술래.진도아리랑.진도개의 발상지다.
진도의 관문 진도대교까지 2시간 거리 동트기전 7시에 집을 출발한다.
해안을 끼고 있는 목포 외곽도로 드라이브코스가 좋은 것은 도로는 낮아서 바다와 수평을 이루고 바다를 끼고 달린다.
주위 풍경은 평화롭고 친근하다.
언덕같은 낮은 산들은 주위를 감싸고 있어 포근한 느낌을 준다.
남도는 어디를 가더라도 고향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풍경들을 접한다.
국내 최초 쌍둥이 사장교 진도대교를 건너니 진도휴게소다.
휴게소 관광안내소 주위를 녹지권관광지라 칭한다.
진도타워,명량해상케이블카.해양에너지공원.울돌목이 있는 곳이다.
뒷편 언덕에 진도타워는 녹지권과 해남우수영 주변까지 가시권에 들어온다.
남도 어디를 가도 이순신장군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다.
23전 23전승의 해전사가 펼쳐진 곳은 부산에서 시작하여 여기 명량까지 노량진 앞바다에서 7년 전쟁은 끝나게 된다.
남해 바다 전체가 무대다.
직원의 친절한 가이드를 받고 먼저 울돌목으로 향한다.
23전 23승의 현장들을 표로 보고 지도로 확인한다.
-울돌목에서-
진도와 해남반도 우수영 사이에 유리병의 목처럼 갑자기 좁아진 해로가 있는데...
진도대교 바로 아래 바닷물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데....
이곳이 명량대첩의 승리의 장소 울돌목이다.
울돌목이라는 말은 ‘소리를 내어 우는 바다 길목’이다.
한자어로는 鳴梁해협이라 불린다.
해협의 폭이 좁고 해구는 깊은 절벽을 이루고 있어 흐르는 물살이 이에 부딪쳤다가 솟아오르기 때문에 해협을 뒤흔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품이 일고 물이 용솟음치며 회오리가 생기는 신비로운 장관이 연출된다.
이런 울돌목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한 명량대첩을 상상한다.
통쾌하다. 감개무량하다.
공원 서쪽 언덕에 이순신장군 동상이 울돌목 소용돌이치고 있는 바다를 향하여 손을 들고 호령하고 있다.
그날의 함성을 상상하는 시간이 이리도 엄호한데
30이립-40불혹-50지천명-60이순-70고희 넘어 이제서야 오다니…
··¶.명량대첩해설··
133(330척)척에 맞선 13척의 배.
역사가 기록한 가장 위대한 전쟁이 시작된다.
정유재란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이순신(李舜臣)이 울돌목에서 원균이 대패한 칠천량해전에서 배설(裵楔) 장군이 탈출시킨 12척과 수리중인 백성의 배 1척으로 일본 수군의 133척을 상대하여 승리한 기적을 연출한다.
그 생생한 이야기를 요약한다.
우수영에 숨어 있던 이순신은 적을 맞아 12척의 배를 이끌고 울돌목으로 나와서 一字陣을 만들어 대기시킨다.
대장선 가장 큰 판옥선으로 홀로 앞으로 나가서 수로 통과를 저지하려 하자 일대 혼전이 전개된다. 왜 수군은 선두에 있던 이순신이 타고 있는 전선을 포위하려는 기세다.
매우 위급한 순간, 이순신은 뒤에 처져 있는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中軍) 김응함(金應諴) 등에게 적진으로 돌진하게 하자, 전투는 절정에 이른다. 썰물이 밀물로 바뀌자 많은 전선의 왜군에게 불리하게 된다.
서로의 진형(陣形)과 대오(隊伍)가 붕괴되고 있던 중에,
이순신의 전선에 동승하였던 투항한 왜인 준사(俊沙)가 적선을 내려다보며 “꽃무늬 옷을 입은 저자가 바로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 때의 일본의 수군장수 구루시마(來島通總)다.”라고 외친다. 그러자 이순신이 김석손(金石孫)을 시켜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자, 이를 본 일본 수군은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으며,
이에 전투의 기세를 잡은 조선 수군은 현자총통(玄字銃筒)과 각종 화전(火箭)을 쏘면서 맹렬하게 공격한다.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대장 정응두(丁應斗) 등 여러 장수와 병사들이 적선 31척을 분파하자 일본 수군은 물러나 도주한다.
도주하던 왜 수군 뒤에는 식량을 싣고온 화물선 197척(330-133=197)이 있었는데 뱃머리를 돌려 도망가려 했으나 화물선들의 속도가 느려지게 되어 중간에 끼어 있게 된다.
우왕좌왕하던 차에 역류를 맞은 배들끼리 서로 엉키고 서로 부딪치며 패닉과 혼란에 빠지게 되고 돌려서 빠저 나가기도 힘든 상태가 되어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자멸하게 된다.
광주에서 온 남도투어팀 해설자의 설명이 그날의 전황을 상세하게 설명하여 주니 도움이 되었다.
통쾌하다...! 기적이다...! 하늘이 도왔다...!
그리고 수군의 배 판옥선 (板屋船)은 크고 높아서 작고 왜소한 왜군의 배를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었던 것도 승리의 요인이였으며, 거북선은 빠르고 어느 쪽을공격해야 할줄모르게 위장되어 있었으며 열세한 병력을 감추기 위해 피난선 100여 척을 전선으로 위장해 뒤에서 성원하게 하였다는 것과, 철쇠(鐵鎖)를 협수로에 깔아서 적선을 전복시켰다는 기록도 전해오고 있다.
아래는 정유일기 9월 16일 난중일기에서 발쵀한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다.
‘27일 을유, 맑다.
배설이 와서 만났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하였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라고 했으며,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대들 뭇 장수들은 살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
9.16일 『정유일기』에 기록된 전쟁중에 부하들에게 호령하며 이순신장군이 한 말들이다.
‘安衛、欲死軍法乎?汝欲死軍法乎?逃生何所耶?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汝爲中軍而遠避不救大將、罪安可逃!欲爲行刑、則賊勢又急姑令立功。
너는 중군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만 있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죄를 어찌 면하겠느냐! 당장이라도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기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조정의 여론 동요를 잠재운 이순신의 명량해전의 어록-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왜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진도타워에서-
울돌목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오르니 주차장 옆으로 ‘1597.9.16일 명량’의 전적을 요약한 비석들이 있다.
이순신장군이 명량에서의 빛나는 어록들이다.
타워 입구에는 9.16일 명량해전 당일 난중일기와 참전 진도장수들의 업적을 비석에 세겨 놓았다.
十景圖 그림 앞에서는 성웅 이순신의 생애와 그의 해전사를 적어놓았다.
十景圖애 적혀있는 이순신장군의 일생의 모습을 순서대로 알 수 있어서 옮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1.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역적의 가문에 태어나서 외갓집에서 자랐다)
2.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마라
-(첫 시험에 낙방하고 서른 둘의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하였다)
3.좋은 지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급 장교로 돌았다)
4.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라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5.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라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 세 번 싸워 스물 세번 이겼다)
6.윗사람의 지시라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
-(불의한 직속 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7.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하지 마라
-(스무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였다)
8.윗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 갖지 마라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빼앗긴 채 옥살이를 하였다)
.만약 호남이 없었으면 곧바로 나라가 없어졌을 것이다.
아직배가 12척이나 있고 저는 죽지않았습니다.
-(명량해전에서)
10.죽음을 두렵다고 말하지 마라.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7층 전망대에서 셋방낙조 해남두륜산 영암월출산이 가물가물한 모습을 사진에 담아본다.
안내판에는 관매도의 손가락섬,발가락섬도 표시해 두었다.
12시 넘어 전망대를 나선다. 이순신 자료들을 보느라 많은 시간을 전망대에서 보냈다.
-고려 삼별초 왕온의 묘에서-
三別抄란 고려 무신정권(武臣政權) 때 몽골 병사와 싸운 좌별초 ·우별초·神義軍신의군을 말한다.
몽고 침입에 40년 동안 저항하였던 고려 왕실은 1270년 몽고와 강화를 맺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다.
그러나 삼별초군은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侯温)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고 진도로 내려와 몽고에 대항하여 항쟁하였다.
용장산 기슭에 둘레의길이가 13km의 용장성은 삼별초가 진도를 근거지로 관군과 몽고군에 항전했던 성인데 그 크기가 놀랍다.
9개월의 고려 왕궁터였다고 하는데 다음에 가보기로 한다.
왕무덤재에 다시 차를 돌려 거북선한식부페에서 굴비구이를 실컷 먹는다.
남도 한식에서 남도 사람의 후한 인심을 다시 체험한다.
-운림산방에서-
첨찰산아래 커다란 정원 운림산방이 있다.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룬다고 하여 雲林山房이라 이름 지었다.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小痴 許鍊)이 1856년 9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타계하자 고향에 내려와 초가를 짓고 이름은 운림각이라고 지었고 거실은 묵의헌으로 지었다. 마당에는 연못을 만들고 다양한 화훼와 임목을 심었다.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남도투어 해설자가 연못 가운데 심은 배롱나무를 가르키며 배롱나무는 비틀어지며 자라니 집안에 심으면 일이 틀어진다고 금수라 한다.
여러 나무들에 대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어 솔깃했다.
등나무는 꼬여서 자라니 집안 대소사가 꼬이게 되고 중병을 앓은 사람이 생기게 된다고...
동백나무는 꽃잎이 뚝뚝 떨어지니 집안의 일도 그렇게 되어 간다고 하고
밤나무 향기는 남자의 거시기 냄새와 같으니 집사람 바람이나고 반대로 복숭아나무는 남편이 바람을 피게 된다고...
복숭아는 귀신 쫒는다고 멀리 심으라고 한다.
은행나무가 집안에 있으면 그 집 기운이 음으로 떨어저 가세가 기운다고 한다.
그리고 향나무는 과일나무에 병을 일으키는 나무라고...
집안에 심으면 좋은나무는 없을까?
사과나무는 봄부터 가을까지 열매를보는 즐거움이 솔솔하니 좋고
능소화는 선비나무라 하여 정원수로 심는다. 당연히 집안에 선비나 학자가 나온다고.
남도 전통미술관은 수채화이며 동양화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따스한 햇볕이 반갑다.
운림산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삼별초공원이 있다.
잠시 들렀던 삼별초공원내의 캠핑촌에는 캠핑하고 있는 젊은이들로 붐비고 있었다. 어느덧 4시다.
진도에서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다.
용장성과 셋방낙조와 관매도 그리고 봄이 오면 진도개테마파크에서 토 일요일에 열리는 진도개 경주와 어질리티(장애물경기). 2월말 3월초 열린다는 신비의 바닷길도 기억해 두어야겠다.
그런데 진도에서 금.토.일요일에 열리는 진도민속공연을 보지 않고서 어찌 진도를 보배섬이라 말 할 수 있겠는가.
성웅이순신을 기리게된 첫날의 진도나들이는 그 무엇다도 가치있고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이제 손주들에게 한산도대첩의 鶴翼陣과 一字陣이 펼쳤던 명량해전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게 되었다.
유식해진 오늘 하루의 여정에 감사하련다.
2022.1.19.수.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