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화, 마지막 황제 ]
1988년 제60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포함해 9개 부문을 휩쓴 이 영화에는 여러 나라 배우가 출연합니다. 엑스트라가 무려 1만 9000명, 스태프도 이탈리아인 100명, 영국인 20명, 중국인 150명이 동원되었습니다.
서태후가 3살의 푸이를 황제로 지명하고 서거한 1908년부터 하나의 시민이 되어 생애를 마치는 1967년까지 일어났던 일을 중심으로 영화가 진행됩니다. 청나라 황제 자리에서 끌려 내려오고 이후 일본의 꼭두각시 만주국 황제를 지내다가 중간에 전범수용소에서의 혹독한 시련, 거칠었던 문화혁명 시대, 이후 북경 식물원의 정원사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의 파란만장한 푸이의 인생을 그렸습니다.
* 오늘날의 자금성, 아래 호수가 중난하이인데 이곳에 시진핑을 비롯한 공산당 고위층이
기거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푸이(한자로는 부의)의 자서전 <황제에서 시민으로>를 바탕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세계 최초로 자금성에서 로케이션을 한 영화로 당시 큰 화제를 불러 모았습니다. 푸이 역은 존 론이 맡았으며, 일본의 사카모토 류이치가 음악을 담당하였습니다.
* 만주국 황제 시절, 부인 완용과...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각색상, 편집상, 녹음상, 의상디자인상, 미술상, 작곡상 9부문을 휩쓰는 쾌거를 이루면서 개봉 당시부터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중국 대륙을 무대로 한 영화이지만 대부분의 대사가 영어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지 중국계 미국인 배우들이 주요 배역을 맡았습니다,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협력으로, 하루에 5만 명이 다녀간다는 관광명소인 자금성을 몇 주씩이나 빌려 촬영했으며, 당시 중국 문화부 차관이었던 배우 잉뤄청이 전범수용소 소장 역을 맡았습니다.
제작비 2400만 달러 중 1000만 달러 이상을 중국 정부에게 자금성에서의 촬영비로 지불되어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색채감각이 풍부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상미는 압권이었는데, 특히 장엄하고 화려한 즉위식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장면으로 남을 것입니다.
* 푸이의 결혼식은 이곳에서 거행되었습니다
감독 베르톨루치는 푸이를 황제로서 엄청난 권력과 부를 누리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금지된 도시에 감금된 한 인간으로 그립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황제가 되었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궁 밖을 나가거나 자신의 부모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정을 붙이고 살던 유모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헤어지게 되었고, 자신의 두 부인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을 떠나갔습니다. 물론 그의 의지가 드러난 부분이 몇몇 있지만, 대무분의 인생을 푸이는 타의에 의해 살아가야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푸이는 공산당 지배 속에 10년간의 감옥생활이 끝나는 60세가 돼서야 자신의 의지를 영위 할 수 있는 한사람의 보통 인간이 됩니다.
그의 전반부 인생은 화려할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외로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신발끈도 스스로 묶지 못하는 타의적 인간, 청조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어서 만주국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의 주위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갑니다. 마침내 마지막까지 감옥에서도 그를 깍듯이 모시던 그의 하인까지 '당신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해요' 라는 말을 남기며 떠나가는 장면에서 보듯이 그의 인생은 사뭇 외로웠습니다.
* 늙어서 옛날 옥좌에 앉아 보고 있는 푸이
* 세살 때의 푸이
시대의 비극이자 한 인간의 비극인 것입니다. 막바지 장면에서 그가 반평생을 살아왔던 자신의 집 자금성에 늙어서는 돈을 내고 입장권을 사고 들어가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때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베르톨루치는 ‘인간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가 인간을 만드는’ 과정을 이 영화를 통하여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1908년, 겨우 3살 된 푸이는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서태후의 지명으로 광서제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자금성으로 들어갑니다. 6세까지는 청나라의 황제로서 내시들과 궁녀들 사이에서 성장합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황제의 존호와 궁전 및 사유재산만 인정받은 채 6살에 퇴위하게 됩니다.
* 선통제 푸이
동시에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합니다. 어느 날 우연히 궁 밖으로 나간 푸이는 새로운 세상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그만큼 환관들과 궁녀들 사이에서 폐쇄적인 생활을 해 온 겁니다. 14세 되던 해, 영국인 가정교사 레지널드 존스턴이 자금성으로 들어옵니다. 그로 인하여 세상 물정을 배워 나갑니다.
이후 오랜 관습에 반발하면서도 그는 17세의 완용을 황후로, 12세의 문수를 후실로 맞아들입니다.1924년에 일어난 군벌 중의 한사람인 펑위샹의 군사혁명으로 푸이는 궁궐에서 쫓겨납니다. 일본대사관을 방문한 사부 레지널드 존스턴은 감백 대위를 만나 도움을 청하고, 푸이는 두 아내와 함께 일본 조계지가 있는 톈진으로 도피합니다.
얼마 뒤 신사조에 눈을 뜬 둘째 황비 문수는 푸이의 곁을 떠납니다. 한편, 레지널드 존스턴도 영국으로 돌아가고, 대신 푸이의 보좌로 일본군 특무대원이 접근하여 옵니다. 푸이는 마침내 일본군의 획책에 넘어가 신생 만주국의 황제가 됩니다. 완용은 일본에 농락당하기만 하는 푸이에게 실망합니다.
이후 그녀는 아편에 탐익하게 됩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만주국도 멸망하면서 푸이는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소련의 전범 수용소로 송치됩니다. 1950년 소련에서 중국으로 후송되지만 공산정권에 의해 전범 관리소에 수감되면서 10년간 재교육을 받게 됩니다. 10년간의 옥살이 끝에 특사로 석방된 그는 중국 정부의 주선으로 식물원 정원사가 되면서 자유의 몸이 됩니다.
* 왼쪽이 문수, 오른쪽이 완용
[ 마지막 황제, 푸이의 일생 ]
일생에 세 번이나 황제 자리에 올랐던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선통제,1906년 2월7일~1967년 10월17일)는 1967년 10월 17일, 파란 만장했던 61년의 생을 마칩니다.
* 말년의 푸이
1908년 12월2일 겨우 세 살의 철모르는 나이로 푸이는 졸지에 황제자리에 오릅니다. 푸이는 생모와 이별하고 오로지 유모와 환관들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유모는 그에게 있어 엄마와 같은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후일 생모가 아편으로 죽었다는 기별을 받고도 “언제 봤어야, 슬프던지 말던지 하지” 라고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이듬해 1912년1월 1일 손문이 중화민국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개월 후 1912년 2월 12일 청나라가 멸망하고 푸이는 황제 자리에서 퇴위하게 됩니다.
* 아기 시절의 푸이
286년간 지켜온 사직(社稷)과 2000년 이상을 유지해온 중국의 황제 지배체제도 함께 무너져 내렸습니다. 1917년에 7월1일 복벽사건(황제 재추대 사건)으로 황제에 재추대되어 일시적으로 황제 자리를 되찾았으나 12일간의 천하일 뿐이었습니다.
이후 푸이는 1924년까지 자금성에서 바로 내쫓기지 않고 마지막 황제로서 자금성에서 생활했고 그 때까지 형식적인 황제의 칭호는 유지되었습니다. 푸이는 14세 때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인 가정교사 존스턴의 영향으로 서구식 생활방식에 익숙해집니다.
* 감옥에서...
변발을 자르고 양복과 가죽구두를 좋아했습니다. 자전거 타기를 좋아해 고궁의 문턱을 모두 없애기도 했습니다. 16살의 푸이는 동갑인 완용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동시에 12살의 문수를 둘째 황비로 맞이하게 됩니다. 완용은 질투가 심해 문수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수는 후에 자금성에서에서 나와 텐진에 있을 때 결국 푸이와 이혼하였고 1950년 병사합니다.
* 영화에서...사부 존스턴과...
푸이는 1924년 11월 5일 자금성에서 쫓겨나오고 1925년 2월 23일 톈진의 일본공사관으로 가게 됩니다. 그는 톈진에서 7년 동안 일본의 보호아래 생활하게 됩니다.
텐진에서 지내는 동안 푸이는 왕조 회복을 위해 일본군인들 및 정치인들과 접촉하고 일본이 왕정복고의 가장 확실한 지원군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을 합니다. 물론 일본군 특무대의 끊임없는 감언이설이 주효했을 겁니다. 이것이 푸이가 일본제국주의의 품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일본은 푸이를 이용해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 동북지역을 독차지할 생각을 하게 됩니다.
* 만주국 황제시절
1931년 일본 제국 관동군은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지역을 점령하였고, 1932년 3월 1일 일본은 푸이를 황제로 내세워 일본 제국에 철저히 종속된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푸이는 1932년 3월 8일 오후 3시 일본특무의 엄밀한 감시 하에 창춘으로 오게 됩니다. 1932년 9월 15일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를 체결하면서 동북지역의 주권과 영토를 조건 없이 일본에 넘기게 됩니다.
푸이는 1932년 5월 3일 국제연맹 조사단에 일본이 원하는 대로 답변을 한 뒤 1934년 3월 1일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합니다. 이 때 연호를 대동(大同)이라 칭하고 집정을 선언합니다.
* 만주국 황제자리
푸이는 일본을 두 차례 방문했는데 1935년 4월 3일 제1차 방문에서 신사참배를 하고 전쟁 중에 부상당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1940년 6월에는 두 번째 방일을 합니다. 중국 침략을 노리는 일본에 ‘청조 부흥’의 환상에 젖어 있는 푸이야말로 최고의 홍보상품이었고 그래서 방일한 푸이를 일본은 지극정성을 다 합니다.
* 만주국
이런 와중에 푸이는 아편에 쩔은 완용을 못마땅하게 여겨 귀족 출신의 탄위링을 1937년 세 번째 부인으로 맞습니다. 탄위링은 솔직하고 순수한 성격으로 푸이의 호감을 삽니다. 그러나 돌연 1942년에 병사하게 되는데 실제로 알려진 대로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인지 아니면 일본 관동군이 살해한 것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푸이는 자서전이며 반성문이기도 한 <내 인생의 전반부>에서 그녀를 내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었다고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 만주국 집무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일본 혈통의 여자를 푸이과 혼인시키려 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푸이는 결국 1943년에 평민 출신의 리위친을 새로운 부인으로 맞이합니다.
* 말년의 정원사 푸이
만주국은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 발발이후 만주의 물자를 일본에게 지원하는 전쟁보급기지 역할을 하게 됩니다. 푸이는 일본이 패망한 뒤 일본으로 도주하려다가 선양공항에서 소련군에게 체포돼 소련 하바로프스크에서 5년간의 감옥생활을 합니다.
푸이는 1950년 7월 21일 중국에 돌아온 뒤 푸쑨 전범관리소에서 수감되어 소위 정신개조 과정을 거칩니다. 10년의 감옥생활이 지나는 1959년 12월 4일 모택동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어 북경식물원의 노동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때 비로소 그는 진정한 땀이 무엇인지를 처음 경험했다고 합니다.
* 영화에서...감옥소 소장이었던 이가 홍위병들한테 고문당하는 장면, 놀란 표정의 푸이
그리고 1962년 4월 30일 중국정부의 소개로 항저우 출신 간호사인 리슈씨엔과 결혼합니다. 1967년에 푸이가 신장암으로 사망하기까지 그들은 꽤 다정했던 결혼생활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망인 리슈씨엔은 1997년 사망했습니다.
* 모택동과...
< 청조의 멸망을 앞당긴 권력욕의 화신, 서태후 >
* 젊은 시절의 서태후
19세기 말, 서태후는 황제는 아니었지만,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며,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합니다. 20세기도 아니고 19세기에, 거기다 남성중심의 유교국가 중국에서 여성이 47년 간 통치자였다는 사실은 서태후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정치적으로 감각이 탁월한 인물임은 틀림없을 겁니다.
서태후가 집권할 당시 청나라는 대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서구열강이 호시탐탐 중국의 땅과 이권를 챙기고 있었고 안으로는 250여 년 간 만주족의 지배를 받던 한족들이 여기저기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면서 들고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중국역사상 가장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시기였을지도 모를 19세기 말,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의 행보가 이후 중국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 젊은 시절의 서태후
자희태후라고도 불리우는 서태후는 1835년 몰락한 만주족 관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1851년 16세에 궁녀가 되어 자금성에 들어간 서태후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욕심 많고 드셌던 서태후는 궁녀 이상의 그 무엇을 원했습니다.
젊음이 있었고 거기에 더해 묘하게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말솜씨가 있었던 서태후는 당시 후일 남편이 되는 황제인 함풍제 주변 환관들의 환심을 샀고 곧이어 황제의 눈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나중에 동치제가 되는 황제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그녀에게 준 일생일대의 기회였습니다.
* 함풍제
서태후는 일개 궁녀에서 일약 귀비로 뛰어 올랐습니다. 서태후는 이 지점에서 더 큰 야망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귀비가 되어 황제의 옆에 있다 보니 나라의 정사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 것이죠. 그저 황제의 후궁으로, 황태자의 모후로 얌전히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던 서태후는 때때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함풍제는 이런 그녀의 야망을 알아차리고 이를 무척 경계하였다고 합니다. 유일한 혈육의 어머니인 서태후가 훗날 폭주할 것을 두려워한 함풍제는 그녀를 죽일 계획까지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860년 서구 열강의 북경 침범과 피난 과정에서 시달리던 함풍제는 31세에 요절하고 맙니다. 유일한 후계자인 황태자의 어머니 서태후. 그녀의 6살 난 아들이 동치제로 황제가 되자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그녀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입니다.
* 자식마저 희생시킨 권력욕
수렴청정은 함풍제의 정비인 동태후와 같이 했지만, 그다지 정치에 관심이 없고 문맹이었던 동태후는 서태후에게 정치전반을 맡겨 버렸습니다. 이때 서태후는 비로소 서태후라는 명칭을 얻게 됩니다.
동치제를 허수아비로 두고 발 뒤에서 실제로 중국을 다스렸던 서태후였지만 그녀의 권력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녀가 중국을 다스릴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고맙고도 고마운 존재, 바로 아들 동치제가 언젠가는 그녀로부터 반드시 권력을 빼앗아갈 정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 동치제
자신의 권력은 황제가 성장하여 친정을 하게 되면 내주어야만 했습니다. 아들의 성장을 대견스러워 해야 할 어머니로서는 절대 가져서는 안 될 생각이 서태후를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권력욕 앞에서는 비록 아들이었지만 다 자란 황제는 무조건 눈의 가시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동치제는 생모인 자신보다 후덕한 동태후를 더 따랐고 황후도 동태후의 가문에서 골랐습니다. 지방의 몰락한 관리의 딸인 서태후가 쉽게 다룰 수 없는 명문가 출신의 며느리인 황후는 눈엣가시였습니다. 언젠가 황제가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할 때쯤 황후의 가문은 득세하고 자신은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될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었습니다.
서태후는 며느리인 황후와 황제 사이를 갈라놓고 끊임없이 황후를 구박하였습니다. 또한 황제의 관심을 정치에서 돌려 환락에 빠져들게 하였습니다. 동치제는 서태후의 사주를 받은 환관의 손에 이끌려 궁궐 밖 홍등가에 뻔질나게 드나들었습니다.
쾌락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던 황제는 마침내 몹쓸 병에 걸립니다. 황제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서태후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이미 동치제는 아들 이전에 권력을 뺏으려는 라이벌이었습니다. 서태후는 동치제가 치료받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죽어 가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죽고 나자 아이를 가진 황후를 구박하여 자살하게 만듭니다. 서태후의 눈에는 황후의 뱃속에 든 아이마저도 손자라는 애틋한 마음보다는 미래의 경쟁자이기에 없애버려야 할 존재였던 것입니다.
* 황제 위의 권력
** 서태후가 황제로 고른 광서제
권력 앞에 모성애마저 버린 비정한 어머니, 서태후는 동치제를 이을 다음 황제로 함풍제의 동생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난 광서제를 골랐습니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큰어머니이자 이모이기도 했습니다.
즉위 당시 광서제의 나이는 불과 네 살이었습니다. 여타 성인 황족들을 물리치고 구태여 네 살의 광서제를 황제로 고른 것은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통해 계속 중국을 다스리겠다는 의지 표명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광서제는 친아들마저 희생시킬 수 있는 비정한 서태후에게 주눅 들어 기 한번 펴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1889년 서태후는 동치제와 광서제에 이은 오랜 수렴청정 끝에 광서제를 결혼시키면서 뜻밖에 황제의 친정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자금성 북쪽에 새로 지은 이화원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외형상으로는 광서제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뒤로 물러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미 궁궐과 조정에는 서태후의 사람들뿐이었고 광서제는 자주 이화원으로 문안인사를 가서 서태후에게 국정을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발을 드리우건 걷어버리건 중국을 통치 하는 것은 광서제가 아니라 서태후였고 그녀는 황제 위의 최고 권력이었을 뿐입니다.
* 광서제
* 변법자강운동의 실패와 수렴청정의 재개
그러나 명목상이든 허수아비든 간에 중국의 황제는 광서제였습니다. 이제 어엿이 성인이 된 광서제는 자신의 나라를 자기가 직접 통치하고 싶었습니다. 서태후의 전횡으로 기울어가는 청조도 광서제에게는 큰 걱정이었습니다.
열강의 압박은 심해졌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분위기가 청나라 지식인 사회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광서제는 이 지식인층의 새로운 분위기에 적극 동조했습니다. 그들의 의견을 수용함으로써 나라도 부강하게 하고 서태후로부터 벗어나보자는 것이 광서제의 속셈이었습니다. 캉유웨이, 링치차오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 학자군이 시대에 맞지 않는 법과 제도를 고쳐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취지로 이른바 변법자강운동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운동은 서태후와 그녀를 둘러싼 보수파들에 의해 번번이 방해를 받았습니다. 서태후 세력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개혁파와 광서제는 당시 군부세력으로 뜨고 있던 위안스카이(원세개)를 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겉으로는 개혁파에 동조하는 척 할 뿐 뿌리 깊게 이해타산을 따지는 인물이었습니다.
* 위안스카이(원세개)
그는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쪽이 어디일까 주판알을 튕겼고 서태후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서태후의 애인 영록을 찾아가 광서제의 모든 계획을 낱낱이 고자질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광서제와 개혁파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던 서태후는 이때를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녀는 광서제를 자금성 영대에 유폐시켜 버리고 그를 도와 변법자강에 나섰던 지식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습니다. 캉유웨이를 비롯한 일부는 해외로 망명하여 목숨만은 건졌지만, 어쩌면 청조의 마지막 시도였을지도 모를 변법자강운동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무술정변 후에 모든 견제 세력이 사라진 조정에 서태후의 독무대가 차려졌습니다. 비록 명분상으로는 수렴청정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지만, 서태후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을 것입니다.
* 사치와 향락의 나날
정치에서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였던 만큼 그녀는 어린 시절의 가난에 복수라도 하듯 사치를 즐겼다고 합니다.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은 중국 역사상에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녀가 먹는 음식은 한 끼에 128가지나 되었습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백은 100만 냥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 치의 끼니에 해당하는 정도의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서태후가 부린 사치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바로 현재까지도 중국의 대단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이화원입니다. 서태후는 청일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려 자신의 처소인 이화원을 건설하였습니다.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 중에도 오로지 처소 꾸미기에 급급했던 서태후의 배짱은 크다면 크고 달리 보면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이화원은 현재까지도 그 화려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데, 특히 인공으로 파낸 호수는 마치 바다와도 같습니다.
국가 최고 권력에 오른 서태후에게 황제의 후궁으로서 지켜야 할 정절 같은 건 콧방귀꺼리도 되지 않았습니다. 함풍제가 죽고 27세에 젊은 과부가 된 서태후는 권력을 잡자마자 고향에 버리고 온 애인, 영록을 불러들였습니다. 영록은 평생의 그늘 속 애인으로 머물면서 그녀의 사치와 향락을 뒷받침하였습니다. 서태후는 영록 외에도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지 남자를 취했고, 수시로 갈아치웠다고도 합니다.
* 청일전쟁과 맞바꾼 이화원, 함대를 구축할 돈으로 이 걸 지으려다...
* 청나라의 운명과 함께한 서태후의 죽음
그 어떤 정적도 두렵지 않고 외세의 압박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철의 여인 서태후도 이겨내지 못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월이었습니다. 그녀도 나이 들어 노쇠해졌고 극심한 사치와 향락은 노인에게 오히려 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몇날 며칠 동안 계속된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너무 많은 음식을 먹은 서태후는 이질에 걸려 버렸습니다. 그보다 며칠 앞서 10년간 유폐되어있던 광서제는 위안스카이가 보낸 보약을 먹고 3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위안스카이가 보낸 약은 보약이 아니라 독약이었습니다. 광서제의 죽음을 전해들은 서태후는 매우 담담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역시 독단으로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의 불과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했습니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였습니다.
세 살짜리 푸이를 선택했을 때 서태후는 곧 병을 털고 일어나 수렴청정을 이어갈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노령은 이질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살아생전 그토록 핍박했던 조카를 따라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다시는 여자가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 푸이와 함께 한 여인들 >
푸이의 주변에는 평생 5명의 여성이 있었습니다. 매력적이고 미모가 뛰어난 동갑나이 17살 완용과 1922년 결혼하였으나 완용과의 결혼생활은 그닥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만주국 황제가 된 푸이가 일본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며 둘 사이에 더욱 골이 깊어집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완용은 아편에 빠지게 됩니다.
* 푸이와 완용
완용은 운전사와 불륜관계를 맺어 임신을 하였고 이를 알았던 푸이는 아이를 낳자마자 죽여 버렸다고 합니다. 1945년 8월 19일 선양에서 비행기로 일본으로 탈출 하려다 쏘련 공수 부대에 잡혀 중국에 인계되어 감옥에 수감, 1946년6월20일 40살에 연길감옥에서 슬픈 일생을 마감합니다.
12세에 완용과 함께 들어온 후궁 문수는 완용으로부터 시기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푸이가 출궁당하고 텐진에서 생활할 때 소외받던 이 여인은 서양의 일부일처제 및 신사조에 눈을 뜨고 푸이 곁을 떠납니다. 1931년 푸이에게 정식으로 이혼을 요구하여 황실 최초로 황제와 이혼한 여성이 됩니다. 그 후 아동 교육 등 사회사업에 헌신하며 독신으로 살다 1950년 사망했습니다.
* 후실 문수
만주제국을 중국대륙 점령을 발판으로 삼은 관동군은 장기적으로 푸이의 후계자를 생각하며 푸이에게 일본여성을 후궁으로 들인 것을 요구하였으나 푸이는 거절했다고 합니다. 푸이는 후궁 문수도 떠났고 완용도 아편에 중독되자 다시 17세 만주족 처녀 탄위링을 1937년 3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7년을 함께 보냈으나 그녀는 24살 나이로 갑자기 죽습니다.
* 탄위링
푸이는 항상 탄위링의 사진을 몸에 지닐 정도로 탄위링을 몹시 사랑했다고 하는데 가벼운 병중에 일본인 의사의 처방을 받고 돌연사하여 관동군이 독살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탄위링이 사망한 후 1943년 15살의 한족처녀 리위친을 4번째 부인으로 맞았고 이 여인은 푸이가 감옥에 있을 때도 지속적으로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나이 차이와 황제의 첩이라는 주변의 시선에 1956년(29살)에 이혼한 후 장춘 TV 방송국의 엔지니어랑 결혼했습니다.
* 린위칭
마지막으로 1962년 항저우 출신 한족 30대의 처녀 간호사인 리수셴과 결혼하여 말년을 보냈습니다.
* 주은래,리수센,푸이 주은래는 푸이를 잘 보살피도록 부하들에게 항상 지시를
했다고 합니다
* 레지널드 플레밍 존스턴
* 존스턴
존스턴은 1874년 10월 31일 스코틀랜드 에디버러에서 태어났습니다. 에딘버러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였습니다. 그는 1898년 홍콩 주재 영국 영사관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919년에는 당시 영국 조계지 위해위의 행정장관인 로카트의 비서관이 되어 중국 북부로 활동무대를 옮깁니다.
중국의 전통문화를 애호하고 중국 고전에도 밝았던 그는 1919년 이홍장의 아들 이경매의 천거로 푸이의 사부가 됩니다. 이것은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으며, 이후 존스턴은 어린 황제의 가장 따르고 존경하는 그의 정신적인 스승이 됩니다.
사부 존스턴은 본인도 이야기 하고 있듯이 그는 단순히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었습니다. 그 직위는 황제의 정치 고문이었고, 황제 제자의 개인적 고민까지 들어줘야 하는 스승이었으며, 자금성 안에서 교자(가마)와 말을 탈 특권을 가진 최고의 관리이자 귀빈이었습니다.
그는 자금성의 주인에게 영어는 물론 서양의 문물과 제도와 가치를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젊은 제자가 진심으로 원하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서양인 사부가 자금성 안에 들어오면서 많은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돈독한 신뢰를 쌓아나갑니다.
이 관계는 존스턴이 세상을 하직할 때 까지 이어집니다. 1924년 말, 자금성에서 쫓겨난 푸이가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되자, 존스턴은 영국 관리의 신분으로 돌아갑니다. 1927년 위해위의 행정장관에 취임한 존스턴은 1930년 영국이 위해위를 중국에 반환할 때까지 그곳에서 근무했습니다.
1931년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1932년부터 런던대학 동양학과의 주임교수로 일했습니다. 존스턴은 말년에 ‘엘란 리’라는 무인도를 사들여 그곳에 중국식 정원을 갖춘 집을 짓고 살며 만주 국기를 매일 게양했다고 합니다.
중국 차와 중국의 모란꽃을 좋아했던 그는 눈을 감는 그날까지 중국의 마지막 왕조에 그리고 그 왕조의 마지막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 마지막 신하였습니다. 그가 지은 저서 중 <자금성의 황혼>이 가장 유명한 저서로 남아있습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한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