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무엇이 더 성경적인가(요5 24)_
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의 설교 중에서>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면 모든 것은 게임 오버예요.
게임 오버.
다른 것은 뭐, 그렇게?
칼빈이 얘기했다?
루터가 얘기했다?
쯔빙글리가 얘기했다?
민처가 얘기했다?
존 낙스가 얘기했다?
웨슬레가 얘기했다?
좀 더 나가서 어거스틴이 얘기했다?
좀 더 가서 바울이 얘기했다?
속지 말아야 되요.
일부분을 얘기한 거예요.
또 잘 못 얘기한 것도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분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얘기했어요. 할렐루야.
그 다음에 그분은 완전하게 얘기했고 시대를 초월하여 항상 옳아.
이것이 장소를 떠나서 항상 옳은 거예요.
바울의 말은 그렇지 않아요.
바울의 말은 그 시대는 맞았어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가르치는 것 허용하지 않는다."
그때는 그랬어요.
왜?
그때는. 여자는 종처럼 여겨진 시대였으니까.
여자는 사람의 축에도 들지 않는 그런 시대였으니까.
그때는 그게 맞아요.
그러면 지금은 그게 맞지 안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여자를 그렇게 취급한 적이 없어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어요.
심지어 창녀가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혔어도 그 여자를 자유롭게 놔 줬어요.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그로 하여금, 억압에서 그를 속박해줘서 그가 진정 복음을 듣고 복음을 알고 진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여자를 존중해 준 거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의 말씀을 따라가야 되요. 할렐루야.
shiner>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에 대해서 정병진 목사가 설교 한 내용인데
정목사는 장로교 칼빈주의 신학을 하신 분 같은데
칼빈주의보다 알미니안 주의가 더 성경적이라고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성경을 오해 하고 있는 지를 위의 글에서 잘 보여 주고 있다.
내가 칼빈주의는 무엇이고, 알미니안 주의가 무엇인지
여기서 백프로 완전하게 해부하겠다.
성경은 칼빈주의도 알미니우스주의도 아니다.
어느 인생 어느 누구의 사상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만 말씀하려는 책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이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 되시어 하나님 자신이 구원에 이르렀다는 말씀이다.
그 이외에 인간이 구원을 받느니 마느니 그 따위 논쟁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의 안식을 말씀하고 있지 인간이 안식일을 지켰느니 마느니 율법을 지키니 마니 그 따위 논쟁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율법을 다 지켜 내셨는데 그분이 예수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영원한 복음의 내용인 것이다.
기독교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 두 사상으로 나뉘어 있다.
나는 결론부터 말하지만
둘 다 어느 입장에서는 맞기도 하지만 또 어느 입장에서 둘 다 틀리기도 하다
어느 입장에서 보느냐 하는 입장 차이일뿐이다.
문제는 칼빈주의가 맞고 틀린 문제도 아니고
알미니안주의가 틀리냐 맞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둘 중에 누가 맞고 틀리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둘의 주장이 어느 입장에서 본 것이냐의 문제이다.
모든 이론은 얼마든지 펼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입장에서 보느냐의 문제이다.
율법이 맞는 것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니다.
어느 입장에서 보면 의이지만 그 의가 다른 입장에서는 정죄를 낳는다.
칼빈이 어느 입장에서 말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그 주의가 맞고 틀린 문제가 아니다.
알미니우스 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알미니우스가 성경을 자기 입장에서 보고 낸 확신이 알미니안주의이고,
칼빈이 자기 입장에서 성경을 보고 낸 것이 칼빈주의이다.
그럴 때는 둘 다 틀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두 사상이 맞다.
그러나 둘 다 아니다.
둘 다 틀렸다.
왜?
인간들이 자기 입장에서 성경을 논하고 하나님을 논한 신학 교리 논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입장에서 교리 논쟁은 맞는 것이 아니다.
끝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맞는 것이지 어느 인간 어느 누구의 입장에서 볼 때 맞는 것이 결단코 아니다.
그러므로 신학 논쟁이란 할 수는 있지만 틀린 것도 아니고 맞는 것도 아니다.
그 주의를 누가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맞게도 여겨질 수도 있고 틀리게도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받는 자가 누구냐 인 것이다.
그 사상을 받는 내가 누구고 네가 누구냐 하는 문제이다.
내가 육적인 자라면 알미니우스 주의가 맞다.
내가 영적인 자라면 칼빈주의가 맞다.
나는 지금 알미니우스 주의가 틀렸다 맞았다거나
칼빈주의가 맞았다 틀렸다고 논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누가 어떤 입장으로 성경을 대하면 그렇게 볼 수 있다.
모든 주의는 그 사람의 그러함에 의해서 봐진 입장을 낸 것이고
그 입장이 동조 되는 자가 있고 동조 되지 않는 자가 있을 뿐이다.
두 사상은 현재 있고 필요하며
나중에는 둘 다 필요 없을 때가 있다.
내가 누구냐누구로서 그 사상을 받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알미니우스 주의도 맞기도 하고 칼빈 주의 사상이 틀린 부분이 있기도 하다.
이것이 전적으로 내 개인의 주장이고 관점이지 누구나 다 나처럼 봐라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러하면 그의 사상이 나에게 그렇게 다가오는 것이다.
내가 그러함으로 그것이 나에게만 그러한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니까 그렇게 받아들이고 그렇게 다가올 것이다.
이를 내가 이렇다 저렇다 맞다 틀리다 할 수 없다.
그 사람이 그러하니까
그 사상이 이렇고 저러함이 아니다.
그 사상이 맞고 틀린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사상, 주의 관점은 그 사람 자신이 그러함이다.
이는 존재론적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내가 그러하므로 맞게 다가오기도 하고 틀리게 다가 오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나의 존재의 그러함이다.
내가 그렇지 아니하면 다른 모든 사람이 맞다 할지라도 나에게는 그것이 안 맞다.
그 음식이 다 맛있다 하는데 나에게는 맞없다.
그렇다면 그 음식이 맛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이렇기 때문에 나에게 그 음식이 그러함으로 다가온 것뿐이다.
인간의 주의란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다.
율법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내가 그러함의 문제로 정죄로 다가오기도 하고 죄 용서로 다가오기도 한 것이다.
내가 누구냐에 따라서
내가 육이냐 영이냐에 따라서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도 다가오고 저렇게도 다가오는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육적인 입장이라면 알미니안 주의가 맞다.
영적인 입장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칼빈주의가 이론, 사상이 맞다.
그렇다고 해서 칼빈주의가 맞고 알미니안 주의 틀리다는 것은 아니다.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이는 맞고 틀린 문제가 아니다.
그 자체는 그것일 뿐이지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입장이 그러할 뿐이다.
-----------------
네가 그러하면 그 사상이 너에게 맞는 것이다.
네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너에게 맞지 않을 것이다.
어느 사상이 맞냐 틀리냐 비교하여 논하는 것은
마치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고기가 맞다 할 것이고,
고기를 좋아하고 채소를 싫어하는 자는 채소는 틀리다고 하는 꼴이 된다.
이것이 바로 종교의 사상 논쟁이다.
종교 사상 논쟁 교리 논쟁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고 결단코 끝나지 않는다.
끝이 없다.
------------------
모든 종교는 자기가 누군지는 전혀 고려치 않고, 인간들끼리 모여서 네가 맞냐 내가 틀리냐를 논쟁하고 있다.
이 사상이 맞냐 저 사상은 틀리느냐의 하는 논쟁거리만 벌여 놓는 것이 종교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인간의 입장이라고 내 놓은 어떤 것도 맞는 것이 한 개도 없다.
다 틀린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이외에 다 틀리다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다 틀린 것이다.
이를 애둘러 표현하기를
하나님만 의이시고 그 의 앞에서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없다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죄인으로 규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의는 법이며 율법이다.
그 율법 하나님의 의가 없다면 어느 누구도 죄인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로 죄인은 반드시 하나님의 의 규정된 죄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이란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한 죄인인 것이다.
그 죄 이외에 어떤 죄도 하나님은 죄로 인정치 아니하신다.
인간의 윤리도덕은 그 본질적 죄의 모형 그림자일 뿐이다.
-----------------------
사람마다 먹는 음식, 좋아하는 음식이 서로 다르다.
서양 사람들은 버터를 좋아한다.
그러나 동양 사람은 된장(발효음식)을 좋아한다. 특히 한국사람,
그렇다고 버터는 틀렸고 된장은 맞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틀리고 맞는 문제가 아니라 그에게 맞느냐 맞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이는 그가 누구냐의 문제이다.
그 생명이 그러하면 그것이 맞다 할 것이다.
그 생명이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좋은 것을 줘도 맞지 않으므로 틀리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엽적인 것들에 매여서 앞으로 진행이 되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종교의 앉은뱅이 된 현실이다.
모든 종교는 자기 입장에서 자기만 옳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배격하는 것이 종교의 특성이다.
이는 그 사람이 그러한 것이다.
모든 문제는 네가 누구냐 하는 문제로 귀결이 되는 것이다.
내가 육이냐 영이냐?네가 영이냐 육이냐?
영적인 자의 먹는 양식과 육적인 자의 먹는 양식은 전혀 다르다.
종교는 육적인 자로부터 나온 것이다.
아담이 육(육체)이 되고 난 후에 나온 것이 종교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자기가 생기고 자기가 되고 나라고 하는 것이 생기고 난 후에 종교가 나온 것이다.
내가 된 내가 종교의 뿌리이다.
인간이 자기가 되면서 나온 것이 종교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라고 하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종교의 숫자는 인류의 숫자만큼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종교는 나이다.
나 중심이 종교이다.
내가 됨
하나님만 ‘나’이신데
하나님만 ‘나는 나다’ 라고 하실 수 있는 ‘존재자’이신데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
피조물인 인생이 피조물인 아담이 피조물인 사람이 ‘나’가 생기고, ‘내가’ 되어 ‘나를 주장하는 자’ 가 된 것이다.
내가 생김,
이를 하나님이 죄라 하신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내가 된 나’를 향하여 ‘너 죄인’ 이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다.
‘너는 죄인이다.’ 라고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시다.
죄로 정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이외에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죄가 홀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죄가 스스로 굴러다니는 것이 아니다.
죄로 정하시는 분에 의해 죄가 정해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정죄 됨인 것이다.
죄로 정하시는 분이 죄로 정하실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그분 자신의 의이다.
하나님 자신의 의로서만 죄로 정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죄로 정하심’ 은
곧 ‘나만 의이다. 나만 의롭다.’ 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의로서, 죄를 정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 내용이다.
이를 로마서에서 자세히 풀어주신다.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로마서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려고 죄로 정하신 것이다.
그 죄로 정하시기 위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선악과이다.
선악과는 곧 율법의 전신이다.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놓아 두셨다고 하는 것은 뻔히 보고 날마다 보고 시도 때도 없이 볼 수 있는 장소이다.
이는 먹고 바라보고 따 먹으라고 놔두신 것이다.
딱 먹지 말아야 할 것 같으면 숨겨놓으시지 왜 동산 중앙에 놓아 두셨겠는가?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놓아두신 것은 말씀을 듣는지 아니 듣는지 테스트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두고 보자 하고 거기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놓으신 것이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선악과를 따 먹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손을 댄 것이다.
하나님만 가진 고유의 권한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이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법이다.
법은 기준이다.
법은 의이다.
공의이다.
이게 다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하나님 자신이다.
율법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율법 자체이시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 자신의 의이다.
하나님 자신의 공의이다.
이게 다 법을 설명하는 것들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 의이다.
하나님의 잣대
기준
캐논
옛 날에는 잣대를 갈대로 썼다.
이런 정확한 인식과 개념이 없이 성경을 보면 다 오해 뿐이다.
선악과가 뭔지를 모르고 성경을 보면 아무리 봐도 모른다.
선악과가 풀리지 않으면 성경 한 구절도 풀릴 수 없다.
그래서 정확하게 성경을 알기 위해서 자세히 풀어주는 것이다.
이런 개념들을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한 통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된다.
성경을 한 통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학설 학파 교파들로 나뉘어 논쟁, 논란 꺼리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주 심각한 종교의 문제들이다.
위의 설교를 들어보니 정병진 목사는 똑똑하고 말도 잘 하고 지식도 있는 것 같으나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다.
육적인 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목사들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 다 육적인 자들이다.
신학 자체가 육적이지 영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학을 해서 목사 된 자들은 전부다 다 육적인 자들이라고 보면 된다.
저 사람은 스스로 대단하다고 자부하고 책도 써내서 큰 반향을 일으킨다고 스스로 자화자찬하고 있는데
내가 볼 때는 초등 수준도 안 된다.
저 사람은 성경을 편협적으로 보고 있다.
칼빈주의도 오해하고 있다.
알미니안 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위 설교를 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자이다.
성경도 모르는 자이다.
정 목사는 '예수님의 말씀만 제대로 알면 게임오버'라고 말했는데
이는 맞는 말 같은데
그 뒷말을 들어보면 그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말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만 백프로 이해하면 성경 백프로 알아버린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알면 게임 오버라고 해 놓고 여러 신학자들을 나열하면서 바울을 집어넣는다.
성경을 기록한 바울의 말은 바울의 말이 아니다.
비록 바울이 기록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성령의 감동으로 쓴 것이다.
그 속에 담아낸 내용이 틀린 것이 아닌데도 틀렸다고 단정을 짓는다.
바울이 여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그 시대에는 맞는데 지금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성경을 편협적 관점인가?
바울이 지금 여자 얘기를 하는 것은 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성인 교회
여성성인 사람
여성격인 사람,
교회를 말하기 위해 여자를 끌어다 쓴 것이고
그리스도와 교회를
남편과 아내 이야기로 적용시킨 것뿐이다.
남자 여자
육적 결혼 관계 남편과 아내인 육적인 관계를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말한다고 분명히 결론을 짓는다.
이 비밀이 크도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말하노라
남편과 아내 이야기를 쭉 해 놓고 결론으로 한 말이다.
에베소서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성경을 통으로 보지 않고 조각조각으로 보기 때문이다.
모든 이단들은 성경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조각조각 오려서 필요한 부분들 필요한 구절들만 똑 따서 그것이 마치 전부인 냥 오도하고 있다.
이는 오해이다.
첫댓글 칼빈주의는 틀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