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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72)
===9권 시작====
[갈 수밖에 없는 자들]
까아악! 까악!
전쟁이 남기고 간 상흔은 처참했다. 벌판을 가득 메운 시체들과, 사방에 널린 주인 잃은 병기들 그리고 시체들을 파먹는 까마귀들의 모습은 이곳이 인세일까 싶을 정도였다.
맥적산 동편 벌판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죽어간 무인들의 피는 벌판을 질척한 진흙탕으로 만들고 있었다. 뒤집힌 땅거죽이 붉었고, 뿌리째 뽑힌 초목들이 붉었다.
시체와 피 그리고 까마귀.
지옥이 되어 버린 벌판 앞에 수많은 무인들이 발을 멈췄다. 선발대의 흔적을 더듬어 따라오던 무극계 본대였다.
하지만 수천에 이르는 무인 중 선뜻 벌판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이는 없었다.
벌판의 처참함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탓이었다. 눈앞의 광경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모두들 입을 벌린 채 벌판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단 한 명 침묵하지 못하는 이가 있었다.
“오라버니! 무량아!”
무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뛰쳐나온 왜소한 인영이 시체들 사이로 내달렸다. 커다란 도를 매고 있는 여인, 그녀는 공손여령이었다.
“오라버니!”
벌판 중앙에 다다른 공손여령은 재차 고함을 내질렀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천룡천가의 주력이 출병했고, 오라버니인 권천황(拳天皇) 공손청(公孫淸)이 이들을 이끌었다.
그런데, 오라버니를 비롯한 천룡천가 전 무인이 당하고 말았다. 적의 주력도 아닌 일개 지부와 동귀어진하고만 것이다.
“이럴 수가.......!”
주변을 둘러보던 공손여령은 그 자리에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엉덩이에 고인 핏물이 튀어 올라 옷이 젖어들었지만 그녀는 느끼지 못했다.
그저, 나란히 놓여 있는 두 구의 시체를 넋 없이 쳐다볼 뿐이었다.
목이 잘려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들을 어찌 모를까. 용문양이 수놓아진 무복을 걸친 그들은 오라버니 공손청과 천룡천가 적손인 무량이었다. 조손이 목이 잘린 채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이었다.
“오라버니!”
그녀는 공손청의 동체를 품 안으로 끌어들이며 오열했다. 손자를 잃은 아픔이 몹시 커, 자식을 잃은 그의 슬픔엔 무심했다.
아니 조카의 죽음까지 챙기기에는 심적 여유가 없었다. 그가 선발대로 떠난다며 찾아왔을 때도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 수고하란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그랬던 만남이 마지막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
뒤따라온 순우혁로가 가만히 그녀를 불렀다. 그 또한 눈앞의 광경이 믿어지지 않았다. 팔황신의 일인인 공손청은 심검을 성취한 고수다.
그런 그가 목이 잘린 시체가 되어 있을 줄이야. 더구나 공손청 주변에는 천룡천가 최고 무인집단인 청룡광천단(靑龍光天團)까지 있었다.
그런데 그들마저도 전부 당하고 만 것이다.
“죽일 놈들!”
느닷없이 공손여령의 입에서 짐승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이 잘려 나간 부분 때문이었다. 목이 잘린 단면은 푸줏간에서 썰어 놓은 고깃덩이를 보는 듯했다. 죽인 다음 톱질하듯 천천히 목을 잘라 냈다는 의미였다.
“내 이놈들을!”
칼질하는 장면이 연상되자 공손여령은 진득한 살기를 쏟아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그녀의 신형은 땅속으로 천천히 파고들었다.
“어머니!”
공손여령의 모습에 깜짝 놀란 순우혁로는 재빨리 그녀의 혈도를 두드렸다. 주화입마의 조짐이 비쳤던 탓이었다.
“제발 고정하십시오.”
“혁로야.”
정신을 수습한 공손여령은 아들인 순우혁로를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어머니!”
“나에게 신군대를 다오!”
“어머니!”
순우혁로는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 때문이었다. 도를 넘어선 분노가 어머니를 얼음으로 만들어 놓았다.
더군다나 어머니가 원하는 신군대.
용황신가의 모든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개개인이 검기 이상을 성취한 무인들이고 강기를 얻은 무인들만 해도 백 명이나 된다.
일천의 신군대라면 웬만한 문파 한 곳은 순식간에 초토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신군대를 어머니가 원하고 있는 것이다.
“오라버니와 무량이를 죽인 놈들은 따로 있다.”
그녀가 알기로는 설령 통천연맹 맹주가 왔다 해도 오라버니인 공손청을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천룡천가와 통천연맹의 전쟁에 다른 이들이 끼어들었다는 말이 된다. 공손청을 비롯한 천룡천가 무인들을 없앤 자들은 그들일 것이다.
“여보!”
순우장준은 걱정스레 아내를 불렀다. 그 또한 순우혁로처럼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신군대를 달라 함은 적을 뒤쫓겠다는 말이다.
무극계가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그녀가 아닌가. 대부분이 초행길이고 특히 사천 땅은 오지가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안내인이 있지만 식량조차 부족한 상황.
할 수만 있다면 말리고 싶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아요. 하지만, 참을 수가 없네요. 난 당신에게 시집간 후 가문을 잊고 살았어요. 대등한 가문이 아닌 가신 집안이었기에, 친정이 어려워도 말 한번 꺼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오십 년을 살았습니다. 이미 늦었지만, 처음으로 친정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어요. 신군대를 주지 않으면 혼자라도 가겠습니다.”
공손청의 시신을 치운 공손여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남쪽으로 길게 이어진 시신들의 행렬과 동떨어진 곳에 무수히 찍힌 발자국들. 따라오라는 말이 분명했다.
“함정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가겠다는 말이오?”
순우장준은 맥없이 물었다. 오십 년을 살아오는 동안 그녀가 부탁을 해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용황신가의 일이라면 언제나 묵묵히 따랐다.
그런데 그녀의 그런 행동이 내세울 것 없는 친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신이었던 가문이었기에 숨죽이며 살아왔다고 한다.
그랬던 그녀가 처음으로 요구를 해 왔다. 친정이 멸문당한 시점에서.
들어주고 싶지만 빤히 보이는 함정이다. 따라오라며 흔적을 남겨둔 적이 아닌가.
남편의 물음에 공손여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니면 복수해 줄 사람이 없기에 더더욱 가야 합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허락을 구하듯 고개를 끄덕인 공손여령은 아들을 쳐다보았다.
“신군대는 들어라!”
어머니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순우혁로는 뒤편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하명하소서!”
순간 선두에 도열해 있던 청색 무복 무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무극계 한 축을 담당했던 천룡천가 무인들이 이곳에서 당했다. 가증스럽게도 놈들은 죽은 이들의 목을 잘라 가는 패악마저 저질렀다. 그런 자들을 용서한다면 세인들은 우리 무극계를 비웃을 것이다. 가서 놈들의 목을 잘라 와라. 무극계에 대항함은 곧 죽음이란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줘라!”
“존-명!”
신군대 무인들은 벌판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고맙다.”
공손여령은 눈물 어린 눈으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아닙니다, 어머님. 소자가 직접 해야 할 일인데.......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버거우면 그냥 돌아온다고요.”
하고 순우혁로는 공손청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팔황신의 일인인 공손청은 약자가 아니었다. 무공으로만 따진다면 무극계 서열 삼 위가 그다. 그런 그가 당했다는 것은 상대 또한 가공할 고수라는 의미인 것이다.
“걱정 말거라. 팔황신 둘이면 하늘도 없앨 수 있다. 우리보다는 수하들에게 더 신경을 쓰거라.”
순우장준은 확고한 얼굴로 아들을 향해 말했다. 무공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용황사신무를 완벽하게 익혔고, 강호무림에 자신보다 강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설령 광혈지옥비의 주인이 나타난다 하여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우선은 통천연맹 사천 지부를 먼저 공략하겠습니다.”
순우혁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있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무극계 최강자인 분이 아니던가.
“그래, 우린 가 보겠다. 양 대주는 길을 잡아라!”
아들의 어깨를 두드린 순우장준은 전면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존명! 취탐조는 앞으로 나서라!”
무릎을 꿇고 있던 자들 속에서 한 명이 뛰쳐나오며 고함을 내질렀다. 신군대 대주로 한성철검이란 별호로 불리는 양자성이었다. 취탐조는 신군대에서 수색만을 전담하는 무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양자성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최전방으로 몸을 날렸고, 뒤이어 신군대 본대가 따랐다.
“사천에서 보자꾸나.”
무극계 무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한동안 쳐다보던 순우장준은 공손여령과 함께 떠나갔다.
“주작천가는 이곳을 정리하고 나머진 일정대로 진행한다.”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순우혁로는 수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중원 일정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감숙성을 들러 가는 곳일 뿐 거점으로 삼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순우혁로가 원하는 곳은 사천이었다. 남쪽에는 사령계가 있고, 북에는 통천연맹이 있어 운식의 폭이 좁은 곳이지만, 그러한 면을 감안하더라도 사방이 산으로 가로막힌 사천은 전략 요충지로 최고의 장소다.
더구나 평야로 에워싸진 사천은 물자가 풍부한 곳이다. 순우혁로가 굳이 사천을 고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사천에서 뵙겠습니다.”
“사천에서 뵙겠소이다.”
“그럼!”
순우혁로를 향해 포권을 취한 각 가문 수뇌들은 수하들을 이끌고 남으로 길을 떠났다.
“사천은 시작일 뿐이다. 중원을 손에 넣고 말리라.”
사방으로 흩어져 떠나는 무극계 무인들을 쳐다보며 순우혁로는 두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확인할 수 없지만 공손청을 죽인 자들은 광풍성 무리가 분명할 터였다. 이제 개파대전을 마친 사령계에서 출동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아니 사령계 무인들 중 공손청을 이길 만한 고수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 부류밖에 남지 않는다.
천붕십일천마,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아울러 복수도.......”
아들의 모습이 생각났던 탓일까, 순우혁로의 몸에서 가공할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이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사령전.
뇌우는 벌써 며칠 째 이곳에서 밤을 지새웠다. 광풍성의 전쟁 시작은 뇌우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집들이 운운하며 개파대전을 치를 것처럼 하던 백산. 그랬던 그의 행동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속임수였다.
사령계 개파대전에 참여하여 위지천악과 순우창천 그리고 검운비를 모욕하여 스스로 찾아오게 만들었고, 그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검운비의 출병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뇌우는 말리지 않았다. 여전히 단합되지 않는 사령계를 위해 그를 이용하자는 마음도 있었다.
생각대로 되기는 했으나 검운비를 비롯한 수라구노가 그렇게까지 당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 일로 인해 수라마종까지 잃고 말았으니, 사령계의 단합을 위해 너무 큰 희생을 치렀다고 할 수 있다.
순우창천, 검운비 그리고 수라마종, 각 세력 무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녀석은 태연하게 장강에 배를 띄웠다.
올 테면 오라는 말이다.
“올해 안에 끝장을 보겠다는 말인데.......”
뇌우가 여태 고민하는 부분이었다. 장강에서 끝을 보고자 하는 백산의 의도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가 회의를 소집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오는군.”
아래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오자 뇌우는 자리로 가 정좌하고 앉았다.
“어서들 오시오.”
그리고 아홉 문주들을 미소로 맞았다.
“평안하셨습니까?”
뇌우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안으로 들어선 일행은 각자의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음!”
일행 전부가 자리한 순간 뇌우는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텅 빈 혈마문 자리가 유난히 휑해 보였다. 검운비보다는 수라마종과 수라구노의 빈자리가 더 컸다. 사령전 안에 있는 각 문파 문주들보다 더 강자가 그들이 아니었던가.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마존!”
“아!”
고악상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 뇌우는 일행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개파대전 이후 첫 모임인데 좋지 못한 소식과 같이 하게 되어 유감이오. 하지만 혈마문주의 죽음으로 우린 큰 교훈을 얻었소. 독단적인 행동은 자멸을 초래한다는 사실 말이오. 이점 유념해 주시길 바라오.”
“알겠습니다, 마존!”
“좋소이다. 지나간 일은 잊어야지요. 내가 여러분을 이 자리로 부른 이유는 잘 아시리라 보오. 의견을 듣고 싶소. 기탄없이 그대들의 생각을 말해 보시오.”
뇌우는 무심히 말했다. 각 문파 문주들은 두 패로 의견이 나뉜 상태다. 삼태상의 일인인 환문문주 환마제(幻魔帝) 임주극(林柱克)과 고루문 문주 고루시마(固鏤屍魔) 제엽강(諸葉强), 상문문주 유명귀수(幽冥鬼手) 조익(遭翊), 마라문주 유령신마(幼齡神魔) 차수인(車首仁)은 당장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고악상을 비롯한 나머지 문주들은 급하게 전쟁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다.
“어차피 저희들은 많은 의견을 나눈 상태입니다. 마존의 결정만 남았습니다.”
급한 성격을 참지 못하고, 뇌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임주극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모양이군요.”
뇌우는 엷게 웃었다. 사령계란 하나의 문파로 거듭나면서 생긴 폐단이다. 과거 마교삼태상이란 직책으로 마교를 다스렸던 환마제 임주극과 잠마제 고악상 간의 주도권 싸움이 차전 여부로 확대된 상태다.
하지만 뇌우는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서로의 주장을 두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지만, 도를 넘지 않은 경쟁은 조직을 발전시킨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마존.”
고악상은 어색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좋소이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나 문주의 말을 먼저 들어봅시다. 북경 상황이 들어온 것 같으니.”
고개를 끄덕인 뇌우는 나숙선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의 나찰문은 강호 정세를 파악하는 정보를 담당하고 있다.
그동안 나찰문을 시켜 중점적으로 조사했던 사항이 북경 정계였다. 정계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면 설령 강호 무림을 정복한다 해도 그다지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주홍이 돌아온 것 같습니다.”
나숙선은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잘라 말했다.
“헉!”
나숙선의 말은 일행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일행은 당혹스런 얼굴로 나숙선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 잘못 들었나 싶어서였다. 주홍이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황제가 바뀐다 하더라도 그들과 관계를 맺으면 그뿐이다. 문제는 광풍성주 백산이 주홍의 사위라는 데 있었다.
놀라기는 뇌우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였다.
주홍의 등장은 전혀 생각지 못한 변수임에 분명했다.
“자세히 말해보시오, 나 문주.”
뇌우를 대신하여 고악상이 다급한 얼굴로 채근했다.
“아직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으나 그가 돌아온 게 확실합니다.”
“그가 승리하리라 보는 거요?”
뇌우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주홍이 돌아온 게 확실하고, 그가 황제가 된다면 광풍성주 백산은 황제의 사위, 즉 부마가 된다.
역적이 됨을 무릅쓰고 누가 감히 그를 향해 검을 들이댈 것인가.
광풍성의 강호 정복은 기정사실로 굳어지게 될 것이다.
“현 상황에서는 반반이지만 주홍이 들고일어난다면, 황제가 바뀔 것으로 봅니다.”
“내전이 일어날까 봐 참고 있다는 말인가?”
“소신의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주홍의 입장에서는 내전뿐만 아니라 민란까지 걱정해야 할 테니까요.”
“지금 민란이라 했소?”
“그렇습니다, 마존. 물론 하후장설이 벌여 놓은 일이지만 중원 전역은 황실에 대한 불만으로 팽배합니다. 농기구를 버리고 도적이 되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이었군.”
뇌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적으로 약세인 광풍성이 전쟁을 서두르는 이유를 비로소 알 듯했다. 강호 정복이란 명분으로 전쟁을 시작했지만 그 내면에는 주홍을 측면 지원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다.
주하연과 백산이 원하는 것은 공포다.
전쟁으로 인하여 무인들 수백 명이 죽어 나가는 상황이고 그들의 시체는 황야에 버려지고 있다. 그들의 시체를 본 양민들은 움츠려들 수밖에 없을 터이고, 설령 불만이 있더라도 함부로 발설할 수도 없다.
중원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장강을 전쟁터로 택한 이유도 같은 맥락인 것이다.
“맹랑하군.”
뇌우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백산 곁에 있던 봉선군주 주하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머리에서 나온 작전임에 분명했다.
“원하는 대로 해 줘야겠군. 지금부터 명령을 내리겠소.”
“하명하십시오.”
“잠마제 고악상은 암문 문도 천오백과 혈영고루강시 오백을 동원하여 구당협으로 가라!”
“존명!”
“환마제 임주극은 환문 전원과 반시 오백 구를 대동하여 무협으로 가라!”
“존명!”
“흑검 마금성은 묵검문 전원과 묵철마강시 오백 구를 대동하여 서능협으로 가라!”
“존명!”
말이 필요 없었다. 뇌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호명당한 이들은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부복하고 있는 문주들을 쳐다보던 뇌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천연맹이나 무극계도 머리가 있다면 장강으로 올 것이오. 별다른 작전 지시는 내리지 않겠소. 전쟁이 끝난 다음 중원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겠소.”
“존명!”
아홉 문주는 재차 고함을 지르며 머리를 조아렸다.
적을 전부 없애고 승자가 될 때까지는 사령계로 돌아오지 말라는 말이었다.
“각자 준비되는 대로 보고하시오.”
“알겠습니다, 마존!”
우렁차게 소리를 지른 문주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산을 내려갔다. 잠시 후, 사령전 안에는 뇌우와 나숙선 두 사람만 남았다.
“그 친구는 장강에서 유람하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마존.”
나숙선은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껏 그에게 광풍성주 백산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문주들이 내려간 다음 꺼내려 했던 것인데, 뇌우는 광풍성주의 행적을 정확하게 꿰고 있다.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놀랄 필요 없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그는 기다리고 있는 거야. 우리가 오기를...... 부러운 친구지.”
노위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들은 강약을 조절하며 전쟁의 국면을 이끌고 있다. 통천연맹을 유린할 때는 말 그대로 광풍처럼 움직였다. 그러다가 각 세력이 긴장하고 대비하자 기다렸다는 듯 느슨하게 풀어 버렸다.
숨을 돌림과 동시에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통천연맹이나 사령계에 가입하지 않고 중도적 입장에 있는 자들은 이번 그들의 공격을 보고 광풍성에 투신할 것이다.
그들은 텅 비어 있는 광풍성의 지킴이 노릇을 하게 될 터이고, 광풍성은 더욱 강해진다.
비면 채워진다는 단순한 논리를 그들은 전쟁에 응용하고 있다.
혈마문주 죽음으로 사령계를 단합시켰던 자신에 비해 백산은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치르게 된 것이다.
절대적인 강함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는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뇌우는 그런 백산이 부러웠다.
“하지만 누가 마지막에 웃을지는 아무도 모른다네, 친구. 자네가 될지 내가 될지, 아니 내가 될 걸세, 이 뇌우가.”
장강이 있는 북동쪽 하늘을 쳐다보며 뇌우는 확신하듯 말했다.
“말해!”
중원호 선실 안. 백산은 주하연을 빤히 쳐다보며 명령하듯 말했다.
“뭘 말해요.”
슬며시 강변으로 시선을 던지며 주하연은 얼버무렸다.
“재미없는 싸움을 하려는 이유를 말하란 말이야.”
여전히 주하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 채 백산은 다그쳤다.
그녀가 대와선전 작전을 바꾼 이유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말을 해줄 때까지 기다렸으나 그녀는 중경을 떠나 풍도(豊都)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기다리다 지쳐 먼저 꺼낸 것이다.
“친정 때문이야?”
“킥!”
친정이란 말에 주하연은 낮게 웃음을 토해냈다.
백산의 입에서 친정이란 말이 흘러나오자 생경하기까지 했다.
“웃지 말고, 녀석아.”
제가 생각해도 어색한 듯 백산은 공연히 소리를 질렀다.
“맞아요.”
결국 백산의 말에 대답한 사람은 지금껏 주하연과 머리를 맞댔던 설련이었다.
“왜? 북경이 어려워서?”
“어렵다는 것보다는 불안해서요. 자칫 잘못해 내전이라도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게 되거든요.”
“방해가 되는 녀석들은 다 그어 버리면 안 되는가?”
백산은 제 목을 스윽 긋는 시늉을 했다. 정치는 모르지만 죽은 놈은 말을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게 안 되니까 그러는 거죠. 반대하는 자들을 전부 죽이면 십만 명이 넘어갈 수도 있다고요. 그 정도면 내전이 되잖아요. 오빠 장인은 큰 희생을 치르지 않고 황제가 되기를 원하는가 봐요.”
내내 웃고 있던 주하연이 끼어들었다.
“장인?”
백산은 뜨악한 얼굴로 주하연을 쳐다보았다. 친정이란 말에 주하연이 놀랐듯이 장인이란 마에는 백산이 놀란 것이다.
“그럼, 장인이지.”
“황제잖아. 까마득히 높은 사람.”
“무슨 소리예요. 아버지보다는 사위가 더 높은 사람이란 거 몰라요? 왜 그런 말 있잖아요. 딸 가진 죄인이라고.”
“엥? 정말이야? 내가 큰소리 쳐도 된다는 말이야?”
백산은 놀란 듯한 얼굴로 설련을 쳐다보며 물었다.
“백랑은 충분히 큰소리칠 만하죠. 딸 목숨 구해준 것뿐만 아니라, 도련님들 그분을 도와 하후장설까지 없애 주었잖아요. 백랑을 비롯한 도련님들은 공훈으로 치자면 일등공신이에요.”
설련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안 보는 게 낫겠다.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장인어른 하는 것도 우습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두드러기가 나서.......”
바로 곁에서 한기가 느껴지자 백산은 재빨리 말을 끊었다. 주하연이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고 있었던 탓이었다.
“열아홉 어린애를 임신시킨 사람이 장인이 어렵다면 되겠어요? 언니가 그랬잖아요. 오빠는 큰소리쳐도 된다고. 그러니까 힘을 내라고요. 그리고 마음에 안 들면 자금성이고 나발이고 전부 부숴버리세요.”
주하연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씩씩하게 소리쳤다.
“그러다 또 역적으로 몰리면 어쩌려고.”
“오빠는 부마도위라고요. 호아제의 유일한 사위.”
“몰라! 아까 하던 말이나 계속해 봐.”
고개를 흔든 백산은 채근하듯 말머리를 바꿨다. 십만이 죽든 백만이 죽든 상관없지만, 굳이 장강에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중원의 전 이목을 이곳에 묶어두기 위해서예요. 아버지를 반대하는 자들도 광풍성을 알고 있을 테고, 무림 전쟁에 관심을 두고 있을 거잖아요. 더구나 광풍성의 주인은 황실에서도 어쩌지 못한 천붕십일천마니까.......”
“그러니까 장인어른께 시간을 벌어 주는 전쟁이라 이 말인가?”
“그런 셈이에요.”
주하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은 미묘한 정국이다. 무인들은 북경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고, 군부는 무림에 관심을 쏟고 있다. 이 모든 게 봉선군주인 자신과 남편 백산 때문이다.
아버지를 반대하는 자들의 발을 묶기 위해 장강 전쟁을 준비한 것이었다.
“숨길 일도 아니구먼. 진작 말했으면 좋잖아. 나가자.”
슬쩍 미소를 문 백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실 창문 너머로 기이한 모양의 성이 보였다.
“저 성 이름이 뭐지? 으스스하게 생겼다.”
건물 양편에 선 똑같은 모양의 성을 보며 백산은 어깨를 떠는 시늉을 했다.
안개에 휩싸여 있어서일까. 음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듯했다.
“한나라 때 도사들이 만든 성인데, 후대에 와서 귀성(鬼城)이란 이름이 붙었대요.”
갑판으로 따라 나온 주하연은 귀성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그녀 역시 풍도(豊都) 귀성은 서책으로 보았을 뿐 실제 건물을 처음 본다.
을씨년스럽다는 백산의 말이 딱 어울리는 곳이 귀성이었다.
“녀석들은 뭐하고 있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백산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중원호에 있으면서도 그녀는 개방 무인들을 통해 소식을 받고 지시를 내리고 있다.
한가한 듯 보였지만 배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그녀였던 것이다.
“일휘 도련님과 대근 도련님은 남효운을 향해 가고 있고, 살우 도련님과 진악 사숙은 사천 오지로 적을 유인해 가고 있다네요. 그리고 영 도련님과 신개 할아버지는 이곳으로 오고 있고요.”
“사천 오지?”
“송번인데요, 그곳은 사천 사람들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래요.”
“괜찮을까?”
백산은 걱정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살우가 데리고 있는 이들은 소림사 승려들과 무당파 도인들이다. 사천에 가 본 이들이 거의 없을 터라 내심 불안했다.
“걱정 마세요. 그곳은 녹림수로채 무인들이 잘 알고 있는 곳이니까요.”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살우가 유인한 자들은 누구지?”
“그것까지는 몰라요. 하지만 송번 습지는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견딜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했어요.”
주하연도 개방무인을 통해 들었던 말이다. 민산 근처의 송번은 울창한 원시림과 습지가 들어찬 곳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 또한 한족보다 이민족이 더 많다고 했다. 그곳을 알지 못한 사람은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하였다.
그곳 지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녹림수로채가 있으니 불도각과 무욕각의 승리는 기정사실이다. 다만 얼마나 빨리 그들을 없애고 무협(巫峽)으로 오느냐가 관건일 뿐이다.
“불도각과 무욕각의 활약은 무극계 전 병력을 장강으로 불러들이게 될 거예요.”
서쪽을 쳐다보며 주하연은 중얼거렸다.
무인들이라 할지라도 급격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물며 건조한 사막 지대에서만 살아왔던 무극계 무인들이다. 그들에게 고온 다습한 사천 지방 기후는 견디기 힘든 장애임에 분명했다.
“휴-우!”
순우장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로만 들었던 사천 오지. 이곳은 사막보다 더한 곳이었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사위는 어두컴컴하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수목들과, 그 수목들 사이로 뒤엉킨 넝쿨들은 설령 무공 고수라 해도 뚫고 나가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무나 넝쿨은 앞을 가로막는 장애일 뿐 목숨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울창한 풀숲 아래 숨어 있는 늪지대와 독물들이었다. 늪에 빠지면 그나마 나았다. 이름 모를 독사나 독거미, 또는 지네에게 물리면 손쓸 겨를이 없었다.
물린 부위를 잘라 내는 상황은 그나마 다행이고 늦었을 경우에는 죽음을 지켜볼 때도 있었다. 몇 명이나 죽었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더욱 암담한 현실은 옆 명에 달했던 안내인들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는 거였다.
“정지!”
풀숲을 헤치며 나아가는 부하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순간 전면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취탐조를 이끄는 양자성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냐?”
순우장준은 몸을 날려 취탐조 일행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흔적이 끊겼습니다.”
양자성은 곤혹스런 얼굴로 말했다. 부하들의 희생이 있기는 했지만 원시림을 뚫고 올 수 있었던 건 적이 남긴 흔적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있는 지점에서 흔적이 딱 끊겨 버린 것이었다.
“으음!”
순우장준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적을 놓친 것보다 더욱 큰일은 지금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어둠마저 덮쳐오는 상황.
“양자성, 이곳에서 밤을 지샐 준비를 해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양자성은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대원들은 주변을 정리해라. 나무를 베어 내고 공터를 만들어라!”
“갑조는 풀을 베어라!”
“을조는 나무를 잘라 내라!”
“천조는 주변을 살펴라!”
양자성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후방에서 각 조장들의 외침이 뒤따랐다. 순간 수백 명의 무인들이 흩어지며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름드리나무들을 잘라 내고 그것들을 한편으로 치운 다음 수풀을 잘라 공터를 만들었다.
“빌어먹을!”
부하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순우장준은 낮게 욕설을 뱉어 냈다. 적을 없앨 때 사용해야 할 무공을 야영지를 만드는 데 쓰는 부하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비록 단순 노동에 불과하지만 고온 다습한 기후 속에 하루 종일 강행군을 한 부하들은 정상적인 상태라 할 수 없었다. 급변하는 기후에 몸이 적응하지 못하여 벌써부터 흐느적거리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무인이 가진 바 최대의 능력을 뽑아내려면 항상 몸을 최적의 상태로 두어야 한다. 비무를 할 때는 물론이고, 적의 기습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그래야 한다. 호흡과 걸음걸이를 일치시키는 노력을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신군대 무인들의 몸 상태는 최악이다. 지금 상황에서 적의 기습이라도 받게 된다면.
“정리가 끝났습니다.”
“주변엔 아무도 없습니다.”
“각 조장은 인원을 점검하여 보고하라!”
정리가 끝났다는 보고와 양자성이 지르는 고함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여보, 갑시다.”
“그래요.”
부하들이 마련해 준 자리로 걸음을 옮기던 순우장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힘없이 너부러져 있는 부하들 때문이었다.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자 가슴 한편이 답답해져 왔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과, 정기가 빠져 버린 듯한 눈동자들.
전쟁에 패하여 도망치는 패잔병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태상가주님!”
공터 한가운데 통나무의 풀을 엮어 엉성하게 만들어진 오두막에 도착한 두 사람 앞으로 얼굴이 잔뜩 굳어진 양자성이 다가왔다.
“몇이냐?”
순우장준은 대뜸 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는 얼굴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사상자가 많다는 보고일 것이다. 순우장준의 짐작대로 양자성의 얼굴이 굳어진 이유는 희생자의 수 때문이었다.
“오십 명이 낙오했고, 독물에 물린 자들이 오십 명입니다. 그들 또한 죽어가고 있습니다.”
양자성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적을 쫓아 움직이느라 독에 당한 부하들을 보지 못한 게 실수였다. 설마하니 후미에 쳐져 있던 부하들이 그 정도까지 당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가서 부상자들을 데려오도록 해라.”
오십 명이란 말에 얼굴이 잔뜩 굳어진 순우장준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사천의 독물을 겪어보지 못했다고 하지만 오십 명이란 숫자는 너무 많았다.
처음 당한 자들이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나중엔 대비를 하지 않았던가.
“데려왔습니다.”
잠시 후, 양자성이 부상자 한 명을 데려왔다. 온몸에 검은 반점이 돋아난 장한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미 생기가 빠져나간 장한은 죽음이 임박한 상태였다.
“해독제는?”
장한을 쳐다보며 순우장준은 물었다.
“보유한 해독제를 투입해 보았으나 듣지 않습니다.”
원인이 뭐였더냐?“
“글쎄 그게....... 몸에는 도통 흔적이 없습니다.”
양자성은 말끝을 흐렸다. 독에 당한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어디를 어떻게 당했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그의 몸을 몇 번이고 조사했으나 독충에 물린 흔적을 찾지 못했다.
“처음부터 정신을 잃었다고 했더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양자성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온 부상자 대부분이 같은 증상을 앓고 있었다. 어떤 독에 당했는지 알지도 못하고, 한결같이 정신을 잃은 채 고열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독충에 물린 게 아니고 독(毒)에 당했다.”
한동안 부하를 살피던 순우장준은 신음처럼 말했다.
“설마.......!”
양자성은 경악한 얼굴로 순우장준을 쳐다보았다.
“설마가 아니다. 저 아이 손톱을 보아라. 붉은 반점이 있지 않느냐. 절명독에 당한 증상이니라.”
순우장준은 수하의 손톱을 가리켰다. 주로 기련산 일대에서 자생하는 독초를 배합하여 만든 절명독(絶命毒)이란 독이 분명했다. 절명독에 중독되면 첫 번째 증상이 온몸에 생겨나는 반점이고, 두 번째는 고열과 함께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톱에 붉은 반점이 생기면서 숨을 거둔다고 하였다.
순우장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장한의 고개가 꺾였다.
“그럼?”
“맞다. 녀석들은 우릴 뒤쫓아 오고 있다.”
어둠에 잠긴 주변을 둘러보며 순우장준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많은 병력이 한꺼번에 움직이고 있기에 생긴 약점이었다.
그렇다고 병력을 분산할 수도 없는 일이고 보니 내심 당혹스럽게 그지없었다.
“경계를 철저히 세우도록 하라!”
“존명!”
고개를 숙인 양자성은 오두막을 중심으로 둥글게 포진하고 있는 수하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이 근처 어딘가에 적이 있다! 경계 근무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라.”
양자성의 고함소리가 들리자마자 신군대 무인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사방을 살폈다.
순식간에 공터는 팽팽한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수하들의 모습을 쳐다보던 순우장준은 곤혹스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잖아도 피곤에 절은 부하들인데 잠조차 재우지 못할 형편이 되고 말았다. 모두 경계 근무를 서진 않는다 하여도 지금처럼 긴장된 상황에서 쉬이 잠을 잘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선잠으로 끝날 터인데 그 또한 몸의 피로로 이어진다. 갈수록 상황은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
“놈들.......!”
순우장준은 진득한 살기를 쏟아냈다.
한편 순우장준만 ‘놈들’이란 말을 내뱉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과 오백여 장 떨어진 산등성이에서도 놈들이란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우장준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말투에 조소가 잔뜩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저놈들 말이야, 언제까지 버틸 것 같냐?”
소살우는 이십여 개 모닥불이 밝혀진 공터를 가리키며 사진악에게 물었다.
“글쎄, 적어도 검기 이상을 익힌 자들인데, 하루 이틀 가지고 퍼질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잘 지키고 있어라, 볼일 보고 올 테니까.”
“지킬 게 있기나 하나. 저놈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을 때 우린 쉬어야지.”
흘끔 소살우를 쳐다보던 사진악은 바위 위로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래도 지켜, 임마. 우리가 누워 있으면 애들이 못 자잖아.”
“끔찍이도 챙긴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살우의 목소리에 사진악은 빙그레 미소를 물었다.
“그나저나 저놈들을 전부 죽이려면....... 응?”
틱!
사진악은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뭐냐!”
모기에 물린 것처럼 따끔거리는 목을 쓰다듬으며 사진악은 신경질적으로 말을 뱉었다.
“장족들이 쓰는 무기를 약간 개량했는데, 어때?”
기다란 막대기를 든 소살우가 사진악 곁으로 다가오며 떠보듯 물었다.
“독침?”
사진악은 놀란 얼굴로 소살우를 쳐다보았다.
“언제 감지했냐니까?”
“반장 떨어진 곳에서 감지한 것 같은데? 그런데 정말 자네가 개조한 거야?”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사진악은 물었다. 반장 거리 안으로 다가올 때까지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란 거였다.
일 장 거리에서 감지했다면 충분히 쳐낼 시간은 있다. 하지만 그건 자신과 같은 고수라야 가능할 뿐, 불도각이나 무욕각 무인들은 느끼지도 못하고 당할 게 분명하다.
“막대 주둥이와 함께 바늘의 크기를 좀 줄였을 뿐이야.”
“이것인 모양이구먼.”
바닥으로 슬쩍 손을 내밀자 사진악의 손바닥으로 검은색 바늘이 빨려 들어왔다. 실처럼 작은 깃털이 달려 있는 바늘. 바로 그것이 방금 목을 따끔하게 만들었나 보았다.
“절명독(絶命毒)이군.”
“섯다나 모사가 없는 게 아쉬워. 녀석들에게 있는 독이면 한방에 보낼 수 있는데.”
입맛을 다시며 소살우는 사진악 곁으로 다가앉았다.
“내일 밤부터 저놈들을 없애 줄 물건이지.”
“해이해졌을 때 공격하겠다는 말이군?”
사진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극계 무인들 또한 이편의 존재를 감지하였을 테고 오늘밤은 모두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감시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날이 하루가 더 지속된다면 달라진다.
본인들이야 맑은 정신이라고 여길 테지만 실제 몸의 반응은 평소보다 훨씬 느려질 것이다. 그런 자들을 향해 방금 독침을 사용한다면.
“물소리가 들려오는 곳이면 분위기가 더욱 살겠지.”
소살우는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녀석들이 다음날 쉬어 갈 곳은 이미 봐두었다. 녹림수로채 인물 말로는 진주탄이라 불린다고 하였다. 그곳부터 시작하여 놈들을 사냥할 것이다.
중원 무인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한 놈만 살려 보내기로 했다. 물론 무극계 놈들에 대해 조금만 물어본 다음에.”
“별일이네. 적을 살려 줄 생각을 다하고.”
“그러게 말이야. 나이를 먹으니까 마음이 약해지는가 봐. 아니면 섯다 녀석 말대로 몸속에 사리가 생겼든지.”
소살우는 환하게 웃었다.
“사리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소살우 얼굴에 어린 환한 미소의 의미를 알아차린 사진악은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나이나 사리 때문이 아니었다.
한 놈을 살려 적에게 심부름을 보내겠다는 말인 것이다.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의 목을 들려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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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즐독.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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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하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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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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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0^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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