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06-puNWFuMQ?si=j_tvt8tSNR1lqnsE
Chopin: Ballade No. 1 In G Minor, Op. 23 · Maurizio Pollini
쇼팽 [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
폴란드 작곡가·피아니스트. 바르샤바 출생. 주요 작품의 대부분이 피아노곡인데, 개성적이며 참신한 기법은 서정성을 기조로 웅장함·기품·멜랑콜리 등 다채로운 성격을 겸비하여 <피아노의 시인>으로 칭송받는다. 아버지 니콜라스는 16세 때 폴란드로 이주해 온 프랑스인이며 어머니 유스티나는 폴란드의 몰락한 귀족 출신이다. 양친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음악을 애호하였는데, 쇼팽은 4∼5세부터 누이 루드비카에게 피아노의 초보를 배웠으며, 1816년부터는 A.W. 지브니에게 배웠다.
7∼8세 무렵부터 작곡에 흥미를 느껴 민속무곡이나 론도 등 피아노곡을 작곡했는데 17년에 작곡한 폴로네즈는 작곡 뒤 곧 출판되어 가장 초기 작품으로서 전해진다. 18년 2월 24일, 최초의 공개연주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두었고 <모차르트의 후계자>라 불리며 귀족사회의 총아가 되었다. 이윽고 스승 지브니를 능가하여 바르샤바음악원의 원장 J. 엘스너의 지도를 받았고 26년에는 바르샤바음악원에 입학하였다.
엘스너의 교육법은 독창성을 주안으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쇼팽의 개성적인 작곡어법의 형성에 매우 유익하였으나, 동시에 생애를 통하여 대위법 등의 기술 습득에 대한 갈망과 규모가 큰 작품의 구성으로 고심하게 되는 원인도 되었다. 2학년 때 작곡한 모차르트 주제에 의한 《라 치 다렘 라 마노의 변주곡》은 뒤에 R. 슈만에 의해 소개되어 쇼팽의 명성을 높인 작품이다. 이 무렵은 유럽악단에의 진출과 자작자연(自作自演)에 의한 음악활동의 포석으로서 협주형식의 피아노작품을 집중적으로 작곡하였는데, 《론도 아라크라코비아크(1828)》 《피아노협주곡 제2번 F단조(1830)》과 《피아노협주곡 제1번 E단조(1830)》 등으로서 K. 체르니 등의 명기주의(名技主義)와 J.N. 훔멜 등의 서정미를 다분히 의식한 기교적이며 화려한 작풍이 특징적이다.
음악원을 졸업하고 더욱 폭넓은 활동을 위하여 빈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바르샤바를 떠났는데, 고국의 반러시아폭동과 독립혁명 실패의 소식에 비분과 절망으로 상심하였다. 그 자신은 고국의 위기에 대해 동지들과 행동을 같이 하지는 않았으나, 이 사건은 젊은 영혼에 결정적인 그림자를 드리워 그의 창작의 근본에 흐르는 비극성과 허무주의의 근원이 되었다. 쇼팽은 예술가로서 살 것을 명확히 자각하고 귀국을 단념, 다시 고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31년 9월 중순에 파리로 이주, 불우한 시대였으나 그의 음악세계로서는 중요한 수년간의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V. 벨리니 등의 음악을 통하여 선율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영감을 얻어 피아노라는 악기로 인간의 목소리와 같은 부드러운 멜로디를 노래하는 표현방법을 연구하여 악센트의 이동과 리듬의 고안, 화성상의 혁신과 음색변화, 3부형식을 발전시켜 독자적인 음악적 발상을 담는 등 개성적인 음악어법을 확립하였다. 당시 파리는 온갖 문학인·지식인·예술인의 집회장소가 되어 있었는데 쇼팽도 32년 파리에서 개최된 데뷔연주회에서 성공하여 이들과 교분을 맺었다.
36년에 F. 리스트의 소개로 여류작가 G. 상드를 만났으며, 2년 뒤에는 함께 지내기 시작하여 9년간 계속되었다. 이 사이에 폐결핵을 앓고 있던 쇼팽의 요양을 위해 옮긴 마요르카섬에서 《24개의 전주곡(1839)》을 완성하였다. 그 후에도 건강이 계속 악화되는 가운데 리듬의 세련·복잡화, 형식의 확대, 환상성의 중시 등 창작력은 더욱 원숙해져서 《피아노소나타 제 2 번 B 단조(장송, 1839)》 《환상곡(1841)》 《피아노소나타 제 3 번 B단조(1844)》 《환상폴로네즈(1846)》 《발라드 제 2번 (1839)》 《발라드 제 3 번(1841)》 《발라드 제 4 번(1842)》 등의 걸작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48년 2월혁명을 피하여 런던과 스코틀랜드를 여행하였는데 안개와 한기 때문에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다시 파리에 돌아와 궁핍과 고독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쇼팽은 피아노의 성능이 급속히 개량되어 발달하던 시대에 창작기의 정점을 맞았으므로 작품은 연주법이나 페달 기법의 확충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특히 에튀드(연습곡)는 고도의 음악적 착상이나 그 성과가 나타나 있어, 연주기술을 연마하기 위한 연습곡임과 동시에, 그가 발견한 피아노 표현의 연주법상의 비결에 여러 가지 형식을 가미한 기념비적인 명곡이 되었다. 선배 작곡가 중에서는 J.S. 바흐·W.A. 모차르트·J. 필드의 녹턴(야상곡)양식 등을 애호, 이에 대한 연구의 성과를 작곡에 도입하였다. 폴란드의 민속무곡인 마주르카나 폴로네즈의 리듬과 정신은 그의 큰 지주가 되어 그것들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명곡을 많이 작곡하였다. 연주하기 쉬운 왈츠나 녹턴, 연주하기가 어려운 에튀드까지 다양하게 있으며, 피아노작품 이외에도 첼로소나타와 가곡이 많이 알려져 있다.
https://youtu.be/7t6rGX-LVr4?si=9Ni4Qi-cAsSfKFiy
Ballade No. 3 in A-flat, Op. 47 · Frederic Chopin · Artur Rubinstein
'쇼팽'은 1810년 2월 22일 폴란드의 바르샤바 근교 제라조바 노라에서 태어나 1849년 10월 17일 프랑스 파리에서 39세로 세상을 떠난 폴란드의 작곡가이다. 고금을 통해 거의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피아노를 다루었고 또한 피아노음악을 작곡하고 있지만 '쇼팽'처럼 피아노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살려 피아노가 갖은 특색을 효과적으로 작품을 통해 구성한 작곡가는 드물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피아노를 노래시키고 피아노를 통해 시 를 읇은 사람은 바로 '쇼팽'인 것이다. 그를 가리켜 <피아노 시인>이라고 하는 러시아의 피아노의 거장 안톤 루빈시타인의 찬사는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쇼팽'은 프랑스 사람을 아버지로 폴란드 사람을 어머니로 폴란드에서 태어난 혼혈아이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프랑스 로렌주 낸시 출신으로 당시 프랑스혁명으로 국내불안을 피해 17세때 단신 바르샤바로 온 사람이다. 처음에는 담배공장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그 공장 이 문을 닫게 되자 그 후 바르샤바에서 약 50㎞ 떨어진 제라조바 보라에 있는 스카르벡 백작의 아들 프레데릭의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백작부인의 먼 친척이 되는 폴란드 귀족 출신 유스티나 쿠지자노프스카와 1806년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네아이가 태어 났는데 외아들인 '쇼팽'은 두번째 아이였다. 그러나 이 집안은 '쇼팽'이 태어나던 해 바르샤바로 이사를 하고 말았다. '쇼팽'은 그 혈통이 말해 주듯이 음악에 있어서도 폴란드 민속적인 요소와 프랑스의 세련된 감각이 그의 음악의 바탕이 되고 있고, '쇼팽'이 20세 때 바르샤바를 떠나 주로 파리에서 나머지 반생을 보낸 것을 보면 그의 생애도 폴란드와 프랑스로 20년씩 반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쇼팽'은 스스로 폴란드인이란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조국에 대한 사랑과 긍지는 대단히 강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조국을 떠날 때 가지고 떠난 한줌의 흙은 일생을 통해 간 직했고 조국 폴란드가 국난을 겪을 때 마다 의연금을 보내는 등 한시도 그의 조국을 잊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쇼팽'은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서 여섯 살 때에는 보히미아 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지브니라는 사람에게 정식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덟살 때에는 그 해 2월 26일 바르샤바 청중들 앞에 나타나 기로베츠의 협주곡을 연주 데뷔해서 폴란드사람드로부터 제2의 모차르트라고 그 재능을 높이 평가 받기도 했다. 이 무렵 '쇼팽'은 즉흥연주에도 능해서 그의 천재적인 재능으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는 작곡가로서의 소양을 일찍부터 제시 해준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12세때 바르샤바 음악학교의 창립자이자 교장인 요제프 엘스너에게 화성학과 대위법을 지도 받았다. 그러나 이 교수는 공식적인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그의 독창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그를 자유롭게 방임하는 지도법을 택했다. 이러한 방법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와 쇼팽으로 하여금 피아노 작곡가로서 고금을 통한 독 보적인 존재로 만들어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쇼팽은 피아노의 정식레슨을 받지 않고 주로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
'쇼팽'은 19살때 이상적인 여성을 발견하고 그녀에 대한 연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상대는 당 시 바르샤바 음악학교 성악과 학생인 콘스타치아 그라도코프스카였다. 그러나 내성적인 '쇼팽' 은 그의 심정을 그녀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f단조>에서 특히 제2악장<아다지오>는 그녀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담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쇼팽'은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진 외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고 1830년 11월1일 그의 나이 20세 때 바르샤바를 떠나 세계여정에올랐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고국을 영원히 떠나는 여정이 될 줄은 그 당시 아무도 몰랐었다. '쇼팽'이 조국 폴란드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친구들이 보내준 한 줌의 흙을 간직하고 보다 넓은 예술활동의 무대를 찾아 바르샤바를 떠났다.
친구인 티투스 보이체코프스키와 더불어 세계 여정에 오른 쇼팽은 처음에 비인에 들렸으나 그 전해에 들려 환영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그를 따뜻하게 맞이할 선배 음악가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기대에 부풀 었던 그를 실망시켰다. 더욱이 바르샤바혁명이 일어나 폴란드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러시아와 외교적 우호관계를 가지고 있는 오스트리아도 폴란드와 폴란드사람을 적대 시하게 되었다. 친구인 티투스는 조국으로 되돌아 갔고 홀로 남은 그는 고독과 실의의 구렁 텅이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인에 더 이상 머물 필요를 느끼지 않아 '쇼팽'은 런던으로의 여권을 얻어 1831년 7월, 21세때 비인을 떠났다. '쇼팽'은 1831년 9월말에 화려한 문화의 중심지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는 당시 정치적으로 러시아나 오스트리아와는 반대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쇼팽'에게는 자연 호의적으로 대하게 되어 '쇼팽'의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 그리고 영원한 안주의 고장으로 삼게 되었다. 당시 파리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사상적으로나 사회풍조로나 자유를 고가하고 있었고 문화인, 지식인, 예술가들이 유럽전역에서 모여 들어 당시 전성을 이룬 낭만주의 사조에 물들 고 있을 때였었다. 그는 멘델스존과 리스트 그밖에 카르크브랜너 등의 음악인들의 따뜻한 도 움을 얻어 활동하게 되었고 우연히 파리에서 만난 옛 친지인 폴란드 귀족 라지뷜공작의 주선으로 로스차일드 남작의 사교 모임에도 드나들게 되어 파리의 사교계를 중심으로 연주와 작 곡에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그의 악단에서의 기반이 확고해지고 사회적인 명성도 높아진 쇼팽은 1836년 겨울 그 나이 26세때 친구인 리스트의 소개로 인기 여류작가였던 죨쥬상드와 알게 되었다. '쇼팽'은 처음에는 그녀에 대한 인상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미 폐결핵을 앓고 있던 쇼팽으로서는 상드와 같은 활동적이고 모성적인 여성의 애정과 간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이 두 사람은 9년간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고 쇼팽은 그녀로부터 따뜻한 간호를 받으며 평화로운 생활 속에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다.그러나 이러한 생활도 길지 못해 1846년 11월 36세때 그는 상드와 영원한 이별을 하고 그 와 동시에 그의 건강도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이때부터 한 곡의 작품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쇼팽'은 생활을 위해 1848년 영국에 건너갔고 옛날 그의 피아노 제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부호의 딸 젠스터링의 초청으로 스코틀랜드 연주여행을 했으나 이것이 건강에 치명상을 주어 다시 파리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는 건강의 악화로 1849년 10월17일 오전 2시 '쇼팽'은 파리 프랑스 봔둠 자택에서 3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파리 페르 라세즈의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그가 20년전 고국을 떠날 때 가지고 온 폴란드 흙이 유해 위에 뿌려졌고 그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고국의 바르샤바 성 십자교회에 안치 되었다.
그의 작품중에 실내악곡과 가곡등이 약간 있으나 뭐니 해도 피아노 작품이 '쇼팽'의 본질이며 이는단지 피아노를 통한 음악의 시를 엮은 낭만주의 작곡가라는 것을 지나 피아노 그 자체를 음악으로 승화시킨 '쇼팽'의 인생이요 철학이라는데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쇼팽'의 작품중에 폴로네이즈나 마즈르카는 분명히 폴란드적이지만 전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화려한 장식적인 요소나 섬세한 감각은 파리에서 출입한 귀족사회의 취미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음악을 국적불명의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 흐르고 있는 그의 정신과 감정은 어디까지나 폴란드적이며 이것은 외적의 침략을 받은 고 국에의 애국심으로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폴란드적인 체질과 더불어 그의 작품의 특징은 깊은 서정과 풍부한 정서, 여기에 고상한 품위가 큰 매력이 되고 있다.
<주요작품> "즉흥 환상곡 c# minor op.66 [1835] "뱃노래 F# op.60" [1846] "피아노 콘체르토 No,1 e minor" [1380]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폴로네이즈" [1831] "피아노 트리오" [1829] "첼로 소나타" [1846] "군대 폴로네이즈"
자료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oOGYtZeHoQg?si=R0FpgbC9f3DTEyt2
Chopin: Ballade No. 2 in F Major, Op. 38 · Krystian Zimer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