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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73)
[우릴 건들지 말았어야 했다.]
전날과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후덥지근한 날씨와 온갖 독충, 독물들, 하늘을 덮은 수림을 헤치며 적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쉼 없이 이어지는 긴장감은 심신을 더 빨리 지치게 만들었다. 전날 동료가 적에 당했던 터라, 물 한 모금, 야생 열매 한 잎 마음대로 따먹지 못했다. 해쓱한 얼굴과 탁한 눈동자들, 저녁 무렵 무극계 무인들에게 남은 것들이었다.
“태상가주님, 전방에 폭포가 있습니다.”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던 양자성은 뒤편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목소리에는 반가운 기색이 완연했다. 흐르는 물. 내내 괴롭혔던 독을 이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더구나 흐르는 물이 대기를 식혀 제법 서늘했다. 휴식처로는 최상의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좋다, 오늘밤은 이곳에서 쉬어 간다.”
전면으로 나온 순우장준은 폭포를 쳐다보며 말했다. 하룻밤에 불과할지라도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 그런 면에서 보자면 시원한 물가 이상은 없을 듯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경계 근무를 철저히 세워야 한다.”
“알겠습니다, 태상가주님.”
고개를 숙인 양자성은 후위로 몸을 날려갔다.
잠시 후 폭포 근처로 다가간 무극계 무인들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미 경험을 했던 탓에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폭포와 가장 가까운 쪽에 통나무집을 세운 다음, 방사형으로 빙 둘러 나무와 풀을 쳐냈다.
일을 끝내고 주변 정리를 마쳤을 땐 주변은 이미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뒤였다. 하지만 마른 나무를 구해 불을 피우는 무극계 무인들의 얼굴은 밝았다.
전날과 달리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사천기후에 조금씩 적응해 가는 이유가 더 컸다.
“끝난 조는 씻어라!”
주변을 둘러보던 양자성은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통나무집으로 향했다.
“정리 끝났습니다, 태상가주님.”
“수고했다. 운기행공을 시키도록 하고, 교대로 잠을 재우도록 해라.”
방사형으로 포진한 부하들을 보며 순우장준은 말했다.
“운기행공을 시켜도 괜찮을까요.”
양자성은 모닥불 너무 어둠을 흘끔 쳐다보았다. 내공을 익힌 무인에게 있어서 몸의 피로를 풀어 주는 덴 운기행공만 한 것이 없다.
하지만 어둠 어딘가에 적이 숨어 있는 상황.
운기행공을 하는 중에 심적 타격이라도 받게 되면 곧바로 주화입마로 이어지는데, 그러한 상황이 우려되어 하는 말이었다.
“지금 상태로 적과 마주친다면 제 실력을 발휘하기 전에 당하고 만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운기행공을 해두는 수밖에 없다. 각 조별로 열 명씩을 뽑아 저곳으로 보내라.”
순우장준은 폭포 아래를 가리켰다. 위험부담이 없진 않지만 그 방법이 최상이었다. 언제 나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마냥 운기행공을 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태상가주님!”
고개를 숙인 양자성은 무극계 무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우리도 좀 씻읍시다.”
양자성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순우장준의 시선이 공손여령에게로 향했다.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전면 어둠을 쳐다보며 공손여령은 혼잣말처럼 물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줄곧 생각해 보았다. 중원무림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여 무림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다.
하지만 중원 무림의 최고라는 사황이란 자들에 대해서는 손자에게 들었다. 창천은 백 초면 그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남은 자들은 한 부류.
“당신 생각과 같소. 처남을 살해한 놈은 천붕십일천마 중 한 명이오.”
순우장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통천연맹 감숙지부 무인들과 혼전 중이었다고는 하지만 공손청은 심검을 성취한 고수다. 아는 바로는 심검을 이룬 공손청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고수는 천붕십일천마밖에 없다.
“결국 그놈들이 우리 집안은 물론이고 용황신가 대까지 끊어놓았군요.”
공손여령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친정을 비롯하여 손자까지 전부 그놈들에게 당하고 말았다. 양 가문의 대를 끊어놓은 자들이 바로 천붕십일천마인 것이다.
“그렇다고 봐야지. 갑시다. 기다리고 있으면 놈은 나타날 거요. 일부러 이곳으로 유인했는데 도망치지는 않았을 거요.”
“그래요.”
두 사람은 통나무집 밖으로 나왔다. 부하들이 있는 전방은 벌써 정리가 끝나 있었다.
경계근무를 서는 일부를 제외하곤 나머지는 자리에 누웠고, 폭포 근처에는 운기행공에 몰두하는 부하들이 보였다.
손을 잡은 두 사람은 슬쩍 지면을 찼다. 온통 부하들 천지인 이곳에서 몸을 씻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계곡을 따라 조금 이동하자 조그마한 못이 나타났다. 못 근처로 다가간 두 사람은 내공을 끌어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군.”
폭포 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오자 순우장준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하고도 적을 걱정하다니. 더구나 위에 포진한 신군대 또한 최강의 무인들이 아닌가.
“당신 먼저 씻으시오.”
상념을 떨쳐 내듯 고개를 흔든 순우장준은 공손여령을 향해 말했다.
씻는 데 기껏해야 일각이 채 걸리지 않을 터인데 공연한 노파심 아닐까 하며.
그러나.
순우장준은 알지 못했다.
일각이란 짧은 시간이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은 폭포 근처에 선객이 있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했다.
“사진악, 저 진(陣), 예술이지 않냐?”
공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폭포 위. 소살우는 무극계 무인 진영을 가리키며 농담처럼 말했다.
“새삼스럽게 예술은, 저놈의 진은 지겹게도 써먹는구먼.”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환영미로진(幻影迷路陣)은 보면 볼수록 대단했다. 아니 적의 배치도를 정확하게 판단하여 환영미로진을 설치한 소살우의 능력이 더 놀라웠다.
무극계 무인들 주변으로는 열 개의 환영미로진이 설치되어 있고, 각 환영미로진 안에는 각기 삼십 명씩 들어가 있다. 전부 삼백 명을 무극계 진영 주변에 배치한 것이다. 전달 선보였던 기다란 막대를 들고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가끔은 말이야, 아주 평범한 것이 최고가 될 때도 있다고. 지금 경계 서는 녀석들이 최강자일 거라는 말도 맞았잖아.”
“그건 돌머리라 할지라도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거라네.”
사진악을 빙그레 웃었다. 무극계 무인들을 뒤따르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저들은 불도각이나 무욕각 무인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자들이었다. 나무를 쳐내는 모습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강기를 성취한 무인들이 백여 명이고, 나머지도 대부분 검기 이상을 구사하고 있었다.
무극계 최강 세력이 바로 저들이라는 사실을 금발 알아챘다.
“피로에 절은 부하들을 경계 근무에 세운다면 그놈은 지휘관 자격도 없는 거라네.”
사진악이 말을 이었다.
전술의 기본이다.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강자들이 경계 근무를 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이틀 동안 잠 한숨 자지 못하고 강행군을 감행한 저들이 아닌가.
“좀 인정해 주면 어디 덧나냐? 뭐해 새꺄. 안 내려가고.”
사진악을 향해 눈을 흘긴 소살우는 아래쪽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깃털처럼 날아 내린 소살우는 전면 어둠을 향해 차례로 심어를 보냈다.
잠시후, 환영미로진이 걷히고 불쑥불쑥 검은 인형들이 튀어나왔다. 그들 중 한 명이 이편을 돌아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무당파 장문인인 현진자였다.
[잘해! 저놈들은 전부 강기를 성취한 무인들이란 사실을 명심하고. 우린 늙은 잡것들을 잡으러 가마.]
[알겠습니다, 각주님!]
현진자는 전면을 쳐다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막대의 사정거리는 십 장, 요란하게 떨어지는 폭포 소리가 기척을 숨겨 주어 다행이란 생각뿐이었다.
강기를 성취한 무인 백여 명은, 무당파를 전부 투입한다 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엄청난 전력인 것이다.
[준비하라!]
십여 장 근처까지 다가간 현진자는 제자들에게 전음을 보낸 후, 막대 끝을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상대의 가슴을 겨냥했다. 이틀 간 한 번도 쉬지 않고 연습을 했고 십 장 거리에서는 눈가고도 맞히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현진자는 소살우를 향해 심어를 보냈다.
그가 소란스럽게 하는 순간 독침을 발사할 것이다.
[좋다. 한 방에 끝내야 한다.]
현진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타핫!”
폭포 소리를 잠재오구 터져 나오는 광포한 고함 소리가 강타한 순간 한껏 머금었던 숨을 힘차게 토해 냈다.
슉! 슉!
“크아악!”
“아악!”
“적이다!”
폭포수 쪽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경계를 서던 자들의 고개가 틀어졌다.
바로 그 순간 삼배 깨의 막대기는 동시에 독침을 토해냈다.
“허억!”
고개를 돌렸던 양자성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등 뒤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다가들었던 것이다. 더하여 왼쪽 팔뚝에 따끔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양자성은 재빨리 왼팔 소매를 뜯어냈다.
“독?”
검은 반점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전날 부하 백여 명의 목숨을 앗아 갔던 절명독이 분명했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부하들을 쳐다보았다.
“이럴 수가.......!”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경계 근무를 서던 대부분의 부하들이 목을 만지거나 가슴을 쳐다보고 있었다.
“중독된 부위를 잘라 내라!”
질겁한 양자성은 검을 뽑아 왼팔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이미 늦어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그 방법밖에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팔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양자성은 부하들을 쳐다보았다.
“죽일 놈들!”
양자성은 진득한 살기를 쏟아냈다. 팔이나 다리를 잘라 내는 수하들은 몇 없었다. 대부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몸 안으로 유입된 독을 몰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잘라 낼 수 없는 부위에 독침을 맞았다는 말이리라.
“신군대는 전면으로 나서라! 저들을 보호하라!”
하지만 적이 다가와 있는 상황에서 부상자를 보호한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그의 말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면 어둠으로부터 검은 인형들이 도검을 앞세우며 뛰쳐나왔다.
“와-아!”
무욕각과 불도각 무인들은 천둥 같은 고함을 지르며 무극계 진영을 향해 돌진했다.
“적을 주살하라! 한 놈도 남기지 마라!”
현진자의 태청검에서 기다란 검강이 튀어나왔다. 강기 경지에 오른 무인들을 대부분 없앴다지만 남아 있는 자들 또한 검기 단계에 오른 자들. 만만한 자들이 아닌 것이다.
“태극만천(太極滿天)!”
현진자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푸른 검강을 발하는 태청검이 허공에 무수한 원을 그렸다. 순간 열여섯 개에 달하는 태극문양이 무극계 무인들을 향해 물밀 듯이 밀려갔다.
부드러움이 주를 이루는 무당검법은 겉보기에는 그다지 강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에 불과할 뿐이었다.
“크악!”
“아악!”
태극 문양을 이루며 나아가는 전면은 잔인함의 극치였다. 주먹 크기의 둥근 문양이 무극계 무인의 머리에, 가슴에, 배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놓았다. 무당을 검의 조종이라 부르는 이유를 현진자는 태극검법을 통해 여실히 보여 주었다.
열여섯 개에 달하는 태극 문양은 현진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그가 검을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그것들은 오른편에서 다가오는 무극계 무인들을 도륙했고, 왼편으로 이동하면 왼편에서 다가오는 적을 주살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진자를 뒤따르는 무당파 무인들의 무위 또한 적에 비해 그다지 밀리지 않았다. 물론 강자들을 전면에 배치한 상황이지만 무당 장로들의 검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자신들이 만든 빈 공터에 무극계 무인들은 차례로 몸을 뉘였다.
무극계 진영은 급속하게 무너져 내렸다.
아니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극계 진영의 피해는 독침에 당한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통나무집 뒤편에서 운기행공에 몰두하고 있던 무인들 또한 무리하게 운기행공을 마치려다 내상을 입고 말았던 것이다.
내상을 당한 무인 백여 명에 독침을 당한 자들을 합치면 거의 절반에 달한 무인이 무공을 펼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들을 향해 소림사 승려들과 무당파 도인, 그리고 녹림수로채 무인들은 무차별하게 무기를 휘둘렀다.
비명 소리와 피가 난무하는 이곳은 점차 지옥으로 화해 가고 있었다.
“태상가주님!”
달려드는 무인들을 쳐내며 양자성은 고함을 내질렀다. 전세를 뒤집기 위해서는 그들 두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두 사람의 심검이면 적의 수뇌 정도는 얼마든지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만 나타나도 숨통이 트일 터인데 몸을 씻으러 갔던 태상가주 부부는 나타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비틀!
갑자기 어지럼증이 밀려와 양자성은 휘청거렸다.
“빌어먹을!”
독이었다. 왼팔을 잘라 내면서까지 중독되는 걸 막아보려 했지만 실패한 모양이었다. 아니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하면서 절명독은 더욱 빠르게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으-아-아!
느닷없이 화가 치밀었다. 실력이 아닌 비겁한 암수에 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전 내공을 끌어올려 전면으로 돌진했다. 양자성이 저승으로 가는 동반자로 선택한 인물은 무극계 무인들을 도륙하고 있는 현진자였다.
“무량수불!”
현진자는 나직하니 도호를 읊었다. 달려오는 상대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척 보기에도 목숨을 담보로 동귀어진을 펼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미안하외다. 같이 죽어 줄 수가 없어서.”
현진자는 전면을 향해 태청검을 쭉 내밀었다. 그 또한 전 내공을 끌어올렸다. 푸르스름하게 변한 태청검은 십여 개의 태극 문양을 실처럼 뽑아냈다.
“크아악!”
절명독으로 인하여 내공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 양자성은 현진자의 상대가 아니었다. 처음 몇 개는 검으로 쳐냈으나 뒤이어 따라온 태극문양에 가슴을 관통당하고 말았다.
“태상가주!”
양자성은 원망스런 얼굴로 공터 아래를 보았다. 한 사람이라도 와 주었더라면 하면서.
그러나 양자성은 죽어가면서 까지도 태상가주 부부가 오지 못할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두 사람 역시 적에 의해 발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그댄가? 천붕십일천마중 하나가?”
순우장준은 사진악을 쳐다보며 낮게 물었다. 몸을 씻고 있던 도중 위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들었다. 소스라쳐 서둘러 옷을 입고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자 했다.
그러다 만난 자들이 바로 저들이다. 무공을 익힌 흔적조차 나타나지 않는 고수. 처남인 공손청과 그의 일행을 없앤 자가 분명했다.
“그 녀석이 아냐. 공손청인가 하는 놈을 죽인 사람은 나야. 그 녀석 목도 내가 썰었고.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좀 질기더라.”
“천붕십일천마 전부가 무식하다고 하더니 소문이 사실이었군. 제자 놈에게 저런 교육을 시킨 걸 보면 말이야.”
“픗! 하하하!”
제자라는 말에 사진악은 호쾌한 웃음을 토해 냈다. 소살우를 제자로 보는 사람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적을 죽이러 왔다는 생각을 잊게 해 주는 말이었다.
“어떤가, 살우. 앞으로 내 제자 하는 게. 다른 제자들도 많기는 하지만 자네만 하겠는가?”
“죽고 싶으면 뭔 짓을 못할까.”
사진악을 향해 살기를 흘리던 소살우는 고개를 돌려 순우장준을 쳐다보았다.
“임마, 그러니까 무극곈게 하는 잡것들이 망하는 거야. 무극계 최강자라는 놈이 사람을 볼 줄 모르는데 그런 조직이 어떻게 강호를 정복하겠냐.”
“내가 실수를 했군. 그럼 그대가 광마도(狂魔刀)겠군.”
그제야 소살우를 알아본 순우장준은 차갑게 말했다. 천붕십일천마 중 한 팔이 없는 자를 일컬어 광마도라 부른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대가 공손청을 죽였나?”
“그건 아까 대답했잖아.”
“그랬군. 인간이면 해선 안 되는 짓을 저질렀더군.”
“아냐, 난 지극히 정상이야. 짐승을 죽일 때는 언제나 그렇게 해. 먼저 심장을 찔러 피를 전부 뽑아낸 다음에, 목을 썰어. 이렇게 말이야.”
소살우는 혈월을 톱질하듯 천천히 움직였다.
“죽일 놈!”
공손여령의 몸에서 살을 엘 듯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놈은 도를 움직이면서도 환하게 웃고 있다.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전신으로 치달았다. 그런 공손여령을 쳐다보며 소살우는 더욱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맞아, 나도 처음 말을 들었을 때 그랬어. 하우장설인가 하는 개 잡것들 하고 관련된 놈들은 전부 없애버리기로 했다고. 그 개 잡것이 말이야, 내 아들을 역적으로 몰았다고. 그 정도면 말도 안 해. 역적으로 만든 황제라는 새끼를 죽여 버리면 되니까. 더욱 개떡 같은 것 말이다, 강호 무림인들을 선동하여 내 아들을 무림 공적으로 만들어 짐승 몰 듯 사냥을 했다는 거야. 너희들이 죽어야 할 이유는 그 때문이야. 묵안혈마이자 내 아들인 소령의 인생을 가지고 장난치려 했다는 것. 너희 잡것들도 마찬가지다. 머리를 잘라서 네놈의 집에 보내 줄 거다. 이렇게........”
재차 톱질하듯 혈월을 앞뒤로 움직이며 소살우는 순우장준 앞으로 걸어 나갔다.
“놈! 강호 무림의 젖비린내 나는 애들만 상대하다보니까 하늘 높은 줄은 모르는구나.”
말을 태연스레 내뱉었다. 하지만 순우장준은 내심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천붕십일천마가 활동했던 시기는 오십 년 전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나이는 적게 잡아도 팔십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광마도 소살우의 얼굴은 사십 대에 불과했다.
그가 진정 천붕십일천마라면 세월을 거슬렀다고 봐야 한다. 심검을 성취한 무인들이 바라는 경지. 바로 반노환동인 것이다.
“반노환동을 한 모양이군.”
순우장준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자. 그 앞에서 감히 경거망동할 수가 없었다. 폭포 앞 공터에서는 부하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그들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놈을 죽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터이다.
“지금부터 네놈의 목을 취하겠다. 손자와 처남의 복수를 위해.”
순우장준은 검을 천천히 뽑았다. 백색 투명한 검신이 어둠 속에서 새하얀 광채를 토했다.
용아검(龍牙劍), 용의 이로 만들었다는 전설을 가진 검으로, 녀석과 평생을 같이 했다. 용아검이 있어 용황신가 가주가 되었고, 팔황신의 수좌가 되었다.
“잘못 생각하고 있다, 늙은이. 복수는 내가 하는 거야.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내 아들을 희롱한 죄는 무극계 너희 잡것들이 전부 뒈져도 모자라. 다 죽일 거다. 한 놈도 남김없이 씨를 말려 버리겠단 말이다.”
소살우의 몸에서 혈광이 서서히 새어나왔다.
스르릉! 소리를 내며 혈월(血月)이 모습을 드러냈다. 혈월의 도신을 가만히 쳐다보던 소살우는 슬쩍 내공을 주입했다.
“예도(銳刀)? 예맥황가의 진전을 이었던가?”
도신 위로 둥실 떠오른 붉은 달을 쳐다보며 순우장준은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예맥황가, 고대 용황신가의 최대 숙적이었던 가문이다.
용황신가는 검(劒)으로 세상을 평정했고, 그들은 도(刀)와 궁(弓)으로 세상을 평정했다. 두 가문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결국 지저사령계를 이용하여 예맥황가의 맥을 끊었다.
그런데 아득한 시절에 사라진 예맥황가의 지존보도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린 양립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구나.”
검을 수평으로 들어 올려 소살우를 겨누며 순우장준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예맥황가?”
소살우는 놀란 눈으로 혈월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황가라 불리는 걸 보니 혈월 또한 한 가문을 대표했던 도인 모양이었다.
“그럼 더더욱 질 수가 없겠네. 이름값을 해야 하니까.”
슬쩍 미소를 문 소살우는 더욱 강한 내공을 혈월 애부로 밀어 넣었다. 순간 일 장에 달하는 붉은 강기가 튀어나와 도 끝에 자리했다.
순우장준의 검 또한 다르지 않았다. 검 모양과 비슷한 백색 투명한 강기가 용아검 끝에서 폭발적으로 솟구쳐 나왔다.
“우리 용황신가의 무공인 용황사신무는 전부 오 초식으로 되어 있다. 수천 년을 걸쳐 보안된 용황사신무를 막아낼 자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내 무공도 오 초식으로 되어 있는데 오십 년도 안 됐어. 하지만 개 잡것들을 없애는 데는 충분해. 광풍도법이라고 불러.”
짓씹듯 뇌까린 소살우는 순우장준을 향해 몸을 날리며 혈월을 휘둘렀다. 붉은 달이 떠오름과 동시에 부드러운 기운이 바람처럼 전면을 향했다. 마치 초봄에 불어오는 산들바람 같았다.
흠칫 순우장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산들바람 같은 기운에서 형언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던 탓이었다.
순우장준은 쥐고 있던 용아검을 아래로 내리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멸지백호세(滅地白虎勢)!”
순간 용아검을 비집고 나온 검강 끝에서 백색 광채가 폭발할 듯 요동쳤다. 뒤이어 거대한 백호 한 마리가 전면에서 불어오는 미풍을 향해 나아갔다.
찌이잉! 파앙!
폭죽 놀이였다. 탄주하던 악기의 현이 끊어질 때처럼 강한 소성을 남기며 두 사람이 쏟아낸 기운은 중간에서 폭발한 듯 터졌다.
폭풍을 만난 듯 휘청거리던 나무들은 급기야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졌다. 두 사람의 신형은 동시에 십여 장 물러났다.
“광염주작세(光焰朱雀勢)!”
허공을 박차며 순우장준은 재차 용아검을 휘둘렀다. 커다란 불새가 허공을 나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엄청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광염주작세는 불이되 불이 아니었다.
주변 대기마저 일거에 태워 버리기에 불새가 스치는 모든 것들은 가루가 되었다. 탈 시간조차 주지 않는 가공할 열기였다.
“그 정도로 뜨거운 거라 말하면 형님이 섭섭해 한다고!”
소살우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처음이라면 모르되 광혈지옥비의 화천비를 무수히 겪어 보았다.
전면에서 다가오는 불새를 보며 소살우는 번쩍 혈월을 치켜들었다. 이어 그의 입에서 광포한 고함 소리가 터졌다.
“광혈강풍(狂血强風)!”
하늘을 향했던 혈월이 장작을 패듯 휘둘러지고, 그곳으로부터 시뻘건 강기들이 뭉텅뭉텅 쏟아져 나왔다.
강풍이란 말처럼 강기의 폭풍이었다. 완만하게 휘어진 반장 길이의 강기들이 꾸역꾸역 혈월에서 밀려나왔다. 한천맹무도법(恨天彭武刀法) 이 초인 혈극폭에서 유래한 무공. 백팔 개에 달하는 도탄강기가 허공을 빼곡하니 채웠다. 마치 수백 개의 반월도가 나아가는 듯했다.
새하얀 빛무리를 쏟아내는 불새와 혈기를 가득 담은 백팔 개의 도탄강기는 주변 환경을 바꿨다.
십장 높이의 나무가 꼭대기부터 가루로 흩어지고, 집채만 한 바위들이 가루로 되었다. 두 힘이 부딪치기도 전에 나타나는 현상이 그러했다.
쿠웅!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 같았다.
쓰쓰스!
풀숲을 헤치고 나가는 바람 소리 같았다.
콰콰쾅! 쾅쾅! 콰앙!
수백 개의 범종이 동시에 울린 듯 이러한 소리가 나올까. 천지를 진동하는 폭발음은 가공할 음공이 되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쓰러진 나무가 재로 변하고, 뒤집어진 땅거죽이 가루로 변했다. 두 사람 주변 이십여 장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와 풀과 바위, 그 모든 것들이 재로 변해 있었다.
“으음!”
“음!”
폭음에 이어 나직한 신음이 뒤를 따랐다. 삼십 장 거리로 벌어진 두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이었다.
“역시 반노환동인가?”
한 치도 밀리지 않는 소살우의 무공에 순우장준은 감탄사를 흘렸다. 적이지만 대단한 자가 아닐 수 없었다. 기껏 해야 오십 년 전에 만들어진 무공이라 하였다. 그런 무공으로 용황사신무와 대등하게 싸우다니.
천붕십일천마, 천하제일이란 말에 충분히 어울리는 자들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대결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낮게 소리친 순우장준은 용아검을 하늘 높이 던져 올렸다. 용황사신무 삼 초인 한빙현무세(寒氷玄武勢)를 펼치기 위해서였다.
그의 손을 떠난 용아검이 어둠을 뚫고 사라지자, 순우장준은 양팔을 활짝 폈다.
“그럴지도. 하지만 넌 반드시 죽는다. 나에게 목이 잘릴 거라고.”
확신하듯 말하며 소살우는 혈월을 내던졌다. 광풍도법 삼 초인 광마선풍이었다. 용아검과는 달리 혈월은 공간을 가로질러 순우장준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소살우의 발이 허공을 찍었다.
“한빙현무세(寒氷玄武勢)!”
광포한 고함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슈아악!
육안으로 확인하게 힘들 정도의 속도로 내려오는 용아검은 거대한 빙하였다. 조금 전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던 주변이 급속하게 식었다. 얼음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차가운 기운이 사방에 몰아쳤다.
“차앗!”
전면을 향하던 소살우의 신형이 방향을 틀었고, 붉은 광채를 뿌리던 혈월이 뒤를 따랐다. 소살우의 신형은 회전하는 불꽃이었다.
회전은 곧 힘을 불렀다. 손과 바에서 쏟아진 엄청난 내공이 극빙의 기운을 쏟아내는 용아검을 향해 빛살처럼 밀려갔다.
쿠웅! 쾅쾅! 쾅쾅쾅!
두 번째 격돌과 마찬가지로 폭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두 거력이 부딪친 영향은 이십 장을 넘어 삼십 장 주변까지 미쳤다. 하얗게 얼어붙은 나무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후덥지근한 산중에 때 아닌 얼음 꽃이 피어났다.
이기어검술과 이기어도술의 대결, 단순히 검을 날려 싸우는 게 아니다. 각자의 무기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내공이 필요하고, 내공이 고갈된 사람이 지게 되어 있다. 어느덧 순우장준과 소살우는 내공 대결로 들어선 것이다.
“대단하지 않소?”
두 사라의 대결을 쳐다보던 사진악은 공손여령을 향해 말했다.
“시간을 충분히 주었으니 이젠 죽어야 할 시간이구나.”
표독한 얼굴로 공손여령은 말을 받았다.
“이것 섭섭하군요. 시간은 소생이 준 걸로 아는데. 사실 도망쳐도 잡지 않을 생각이었소이다. 연약한 여자를 상대로 싸우는 게 마음에 차지 않아서 말이오.”
화황척을 꺼내 들며 사진악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군자라 불렸던 젊은 시절의 습성이 여전히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없애야 할 적이 분명할 터인데, 저들이 부부라는 사실 때문에 생긴 연민인지 투기가 일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껏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광풍성을 위해서, 저들과 싸울 부하들을 위해서 반드시 없애야만 한다.
“준비하시오.”
사진악은 화황척을 들어 공손여령을 겨냥했다.
“준비는 네가 해야 한다, 놈! 죽을 준비를 말이다.”
등에 메고 있던 도를 뽑아 든 공손여령은 십여 장 가까이 몸을 날리며 도를 휘둘렀다. 그녀의 도에서 쏟아진 푸른 기운은 기다란 청룡 모양이 되었다. 포효하듯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청룡은 바람이 되어 사진악을 덮쳤다.
“성미가 급하시군요.”
슬쩍 지면을 찬 사진악의 신형이 둥실 떠올랐다.
십여 장 높이까지 솟구친 사진악은 가볍게 화황척을 내밀었다. 오십 년 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그때는 전 내공을 동원하여 화황척을 휘둘렀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먹은 대로 내공이 화황척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하나의 불덩어리를 만들 수도 있고, 일거에 십여 개의 불덩어리를 쏘아낼 수도 있다.
이번에 사진악이 쏘아 낸 불덩어리는 단 하나였다.
화황척에서 쏘아진 불덩어리가 공손여령을 향해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건방진!”
여유 있는 사진악의 얼굴에 공손여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면을 박찬 그녀는 도를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천황천룡도법(天皇天龍刀法)의 제 이 식인 천룡승천(天龍昇天)이었다.
천황천룡도법의 시작은 용황신가 수호신무인 천황천룡세에서 출발했다. 그 무공으로부터 심법이 나왔고, 그 심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무공이 천황천룡도법과 천황권이다.
이식인 천룡승천은 이기어도술이었다.
그녀의 손을 떠난 도는 거대한 청룡이 되어 사진악을 향해 광포하게 날아갔다.
입을 쩍 벌린 청룡의 꼬리가 길게 반원을 그리며 사진악이 날린 불덩어리를 사정없이 쳐냈다.
콰앙!
강한 폭음과 함께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소살우와 순우장준 주변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 주변도 황폐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벽력혼원황(霹靂混元荒)!”
반발력에 의해 한참을 날아 올라가던 사진악이 공손여령을 향해 몸을 날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번쩍 들어 올린 화황척에서 수십 개의 불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길게 꼬리를 남기는 수십 개의 불덩어리는 한꺼번에 떨어지는 유성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청룡만리(靑龍萬里)!”
지면을 박차고 오르며 공손여령은 재차 고함을 내질렀다. 그녀의 의지를 받아들인 도가 푸른 기운을 뿜어냈고, 전보다 더 큰 용 모양으로 변해 허공으로 향했다.
콰앙!
“요옵!”
“타핫!”
두 사람은 동시에 고함을 내질렀다.
공손여령은 다시금 튕겨진 도를 재차 날렸고, 사진악은 다른 불덩어리를 조정하여 공손여령에게 쏘아 보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재차 폭음이 터져 나왔다. 순우장준과 소살우와는 달리 두 사람은 곧바로 내력 대결로 접어들고 말았다.
사진악이 주도한 상황이었다.
주도권을 잡기 위함이었다. 주도권을 잡는다함은 장기전으로 갈 경우 승패에 상당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 공격을 가하는 사람은 수비하는 사람보다 덜 지치기 때문이다. 그가 먼저 허공으로 차고 올라갔던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더하여 사진악이 노렸던 사실은 멀리서 치열하게 얽혀 있는 순우장준이다. 부인이 위기에 처하면 정신이 산만해질 터이고, 그 기회를 소살우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싸움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최고였다.
사진악의 예상대로였다.
부인인 공손여령이 싸움을 시작하면서 순우장준의 얼굴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싸움 와중에도 힐끔힐끔 공손여령을 살폈다.
그런 순우장준을 소살우는 모른 척 전과 마찬가지로 공격을 가했다. 풍부한 실전 경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승기를 잡았다는 생각에 무작정 몰아친다면 순우장준 또한 죽음을 무릅쓰고 덤빌 터이고, 이긴다 하더라도 부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소살우가 염려하는 것은 그 점이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조금씩 순우장준을 무너뜨리고자 함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심검의 기운을 쏟아내고 있었다. 정신력을 유형화하여 공격하는 무공을 심검이라 하고 내공보다는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다.
잔뜩 붉어진 얼굴과, 불끈 튀어나온 힘줄만 보아도 두 사람이 얼마나 힘겹게 싸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숨조차 내쉴 수 없고, 내공의 흐름도 끊어서는 안 된다. 조금 전 이기어검술부터 이어진 내공 대결은 여전히 유효한 채다.
두 사람 전면에는 검은 죽음의 기운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순우장준의 얼굴이 붉어지면 검은 기운은 소살우를 향해 밀려가고, 소살우의 한 팔과 두 다리가 연거푸 움직이며 그 기운은 순우장준을 향해 밀려갔다.
‘죽일 놈!’
힐끔 공손여령을 쳐다본 순우장준은 내심 욕설을 뱉어 냈다. 놈의 얼굴 때문이었다. 처음 대할 때부터 기분이 나빴다.
놈은 생사대전을 치르면서도 상대를 무시하는 양 미소를 짓고 있다. 힘이 들수록 미소는 진해지고, 지금은 얼굴 전체에 미소가 가득하다.
신경이 조금만 분산되어도 죽음을 당하는 다급한 지경이 아닌가.
“개자식....... 으음!”
용황신가 무공의 최고 장점이자 치명적인 단점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면 적의 공격이 아닌 용황사신무에 의해 충격을 받는다.
지금 상황이 그랬다. 잠시 정신이 흐트러지자 곧바로 머릿속이 멍해지며 강한 통증이 밀려들었던 거였다.
콰앙!
“악!”
“헉!”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순우장준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용황사신무에 의한 충격과 함께 전면에서 검은 기운이 물결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재빨리 마음을 진정시켜 합장하듯 양손을 모았다. 그의 전신에서 쏘아진 반투명한 기운이 요동치듯 나아가 전면을 강타했다.
휘청!
조금 늦었던지 순우장준의 몸이 비틀거렸다.
“아-악!”
“허억!!”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또 들려오자 순우장준은 입을 쩍 벌렸다.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뒤엉켰다. 먹물이 번지듯 머릿속은 암흑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부인의 부명 소리만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헤집었다.
아득한 정신을 부여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의 귓전으로 폭탄 같은 말이 흘러들었다.
“팔이 잘린 모양이야.”
“크억!”
급기야 순우장준은 한 움큼 피를 토해 내고 말았다. 억양조차 느껴지지 않는 놈의 말은 심검보다 더 강한 무공이었다.
몸에서 급격하게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음이 무너지자 심검의 기운이 빠르게 소멸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가랏!”
순우장준을 주시하던 소살우가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고 심검의 기운을 앞세우며 몸을 날렸다. 심검을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 재차 이기어도술을 펼치는 행위는 분명 무리수였다.
하지만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슈악!
지면에 버려져 있던 혈월이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되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허억!”
전면과 아래에서 가공할 기운이 다가오자 순우장준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두 곳을 동시에 방어하기엔 늦은 상황이었다.
“죽일 놈!”
낮게 소리친 순우장준은 전 내공을 끌어올렸다. 선천지기고 뭐고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놈보다 강한 심감을 쏟아내 예도와 연결된 심력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 연결 고리를 끊어내야만 그나마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
“타핫!”
광포한 고함을 지르며 순우장준은 날갯짓하듯 양팔을 휘저었다.
“내가 빨랐다, 놈!”
소살우 역시 고함을 내질렀다. 순우장준이 뿌린 심검의 기운은 지금껏 겪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멈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 번만 막아내면 될 터이다.
그 다음은 혈월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다.
전면을 향해 육 할의 힘을 집중하고 혈월에 사 할의 힘을 불어넣었다. 일순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소살우는 사정없이 혀를 깨물었다.
“으-아-아!”
“컥!”
두 마디 비명 소리가 밤하늘을 타고 울려 퍼졌다. 순우장준이 펼친 심검의 기운에 당한 소살우의 신형은 삼십 장 너머 어둠 속으로 처박혔고, 순우장준의 머리 위로 붉은 광채가 솟구쳤다.
“끄윽! 네놈이.......!”
순우장준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소살우가 사라진 어둠 속을 쳐다보았다. 찰나지간, 그 순간에 놈은 예도와 연결된 심령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최선을 다한 놈의 승리였다.
“빌어먹을!”
순우장준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어 냈다.
심정 충격에 따른 아득함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눈앞에 백색 광채가 떠다녔다.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은 너무나 편안하게 다가왔다.
“우엑! 심검이니 나발이니 해도 손맛이 최고야.”
피를 토하는 소리와 함께 소살우의 신형이 어둠을 뚫고 순우장준을 향해 다가갔다.
모험이나 방심이 아니라 시간 싸움이었다. 혈월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동귀어진하고 말았으리라.
두 사람은 동시에 땅으로 내려섰다.
“질기네. 혈월에 관통당하고도 살아 있는 걸 보면.”
바닥에 떨어진 혈월을 집어든 소살우는 순우장준 앞으로 다가갔다.
“우리 목을 무극계로 보낼 테냐?”
“맞아. 그러니까 넌 딱 한 번만 비명을 질러 주면 돼!”
“맞아 우린 독해. 독하고 싶어서 독한 게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어. 우린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뭔 말이냐 하면 너희들이나 나나 같은 족속이라는 거야.”
환한 미소를 지은 소살우는 순우장준의 허리를 향해 혈월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순우장준의 몸이 접히듯 꺾였다. 도면으로 척주를 부러트려 버린 것이었다. 부르르 떨던 순우장준의 몸이 잠잠해지자 소살우는 그의 목을 향해 혈월을 그었다.
“아악!”
순우장준의 목을 집어 든 순간 멀리서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의 죽음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음에 분명했다.
잠시 후, 순우장준의 목을 챙기고 있는 소살우 앞으로 사진악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조금 전 비명을 내질렀던 공손여령의 목이 들려 있었다.
“세상에 가장 큰 약점이 뭔지 아냐?”
사진악의 손에 들린 공손여령의 수급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소살우가 씁쓸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가족?”
“맞아, 사랑하는 사람이야. 무공이 약한 것보다 더 큰 약점. 우리 광풍대가 그렇게 당했지.”
“그럼 가장 강한 자는 가족이 없는 사람인가?”
“그럴지도. 녀석들도 끝난 것 같은데 올라가자.”
고개를 끄덕인 소살우는 무극계 진영이 있는 공터를 가리켰다. 그곳도 끝이 났는지 비명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지.”
잠시 후, 두 사람은 전쟁이 일어났던 공터에 도착했다.
“끝났습니다.”
온몸이 피로 점철된 현진자가 소살우 앞으로 다가왔다.
“희생은?”
주변을 둘러보던 소살우는 짧게 물었다. 시체를 끌어 모으고 있는 것을 보면 상당수 무인들이 당한 듯했다.
“이백 명입니다.”
“그랬구나, 묻어 줘라. 부상자는 기련산으로 보내도록 하고.”
“이미 조치를 취했습니다.”
“적은?”
“한 명은 살려 두었습니다.”
저만치에서 무극계 무인 한 명을 질질 끌고 오며 거령이 대답했다. 거령의 몸 또한 현진자와 다르지 않았다. 제 피와 무극계 무인들의 피로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무극계 대장 이름이 뭐냐?”
차가운 눈으로 장한을 쳐다보며 소살우가 물었다.
“순우혁로 되십니다.”
사내는 오들오들 떨며 대답했다. 신의 군대라는 자존심은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용황신가 무인이란 사실이 목숨을 지켜주지도 못했다.
다만 심부름꾼이 필요해서 살아 있을 뿐이었다.
“이놈들은?”
“그분의 부모님입니다. 태상가주님이시고요.”
“잘됐군. 네 녀석은 살려 줄 거다. 가서 순우혁로라는 놈에게 전해라. 우린 구당협에 있을 거라고 말이다.”
차갑게 말한 소살우는 순우장준과 공손여령의 목을 사내 앞으로 던졌다. 그리고 사내의 가슴을 슬쩍 쓰다듬었다.
“아마 이틀 안에 순우혁로 앞에 도착하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협!”
일순 답답해진 제 가슴을 쓰다듬으며 장한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한시바삐 이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금제니 뭐니 하는 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웃옷을 벗어 두 수급을 싼 장한은 등 너머를 힐끔 쳐다보다가 어느 순간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거령아! 가서 저 녀석 길 안내해주고 그곳에서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각주님!”
꾸벅 고개를 숙인 거령은 기련산의 녹림수로채 인물을 대동하고 도망치듯 떠나간 사내를 뒤따라갔다.
“장례를 마쳤으면 떠난다. 휴식은, 구당협에 도착한 다음 취하도록 한다.”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수하들을 향해 소살우는 고함을 내질렀다.
“불도각 무인들은 날 따라라!”
“무욕각 무인들은 날 따른다!”
동시에 두 마디의 외침이 울려 퍼지자 광풍성 무인들은 어둠을 뚫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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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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