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억 1>
레시카미노계 7361년. 일레이스의 주 시장.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 다 큰 키에 어디로 보나 미남이었지만 어쩐지 극과 극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분위기만은 딴판이었다. 그 중 깨끗하게 짧은 금발에 베이지색 겉옷을 입은 사람은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하게 웃으며 응하고 있었고, 다른 한 쪽은 겨드랑이를 넘을 정도로 긴 짙은 바다빛 머리를 뒤로 내려 묶은 채 묵묵히 친구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어머, 제레스님 나오셨군요. 오늘은 세프론님도 함께 오셨네요."
제레스의 인사에 반가워하는 여인에게 세프론은 고개만 까닥해 보였지만 그게 세프론의 성격일 뿐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라는 걸 여인은 잘 알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레스님, 세프론님."
"와~ 제레스님! 언제 오셨어요?"
계속되는 인사에도 전혀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제레스의 주위로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런 광경은 제레스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따스한 웃음 때문에 그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존재였다. 제레스는 천성적으로 사람들을 좋아했다. 아니,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좋아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가끔 세프론은 제레스를 보며 저 녀석이라면 웃는 것만으로도 얼음 덩어리를 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친구는 닮는다지만 아주 어렸을 대부터 제레스와 알고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세프론은 그와는 정반대 타입이었다. 언제나 웃는 얼굴에 모두에게 상냥한 제레스에 비해 세프론은 웃는 일이 드물었고 상냥과는 좀 거리가 있어 오히려 냉정한 편이었다. 하지만 제레스는 따스한 대로 세프론은 차가운 대로 각자 매력이 있었기에 그 둘은 대다수 사람들의 동경이 대상이었다.
"왜 굳이 일레이스까지 나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레시카 대륙 중심에 위치한 일레이스 - 특히 주 시장 - 는 다른 신족들도 자주 찾는 곳이었기 때문에 번잡한 걸 싫어하는 세프론에게 있어 이곳은 최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물건이 오가는 곳이었다.
"재미있잖아."
세프론의 불평에 제레스는 웃음으로만 일관했다.
"그렇게 재미있으면 혼자 다녀.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매정하기는. 혼자 다니면 심심하잖아."
방긋 웃는 제레스를 보며 세프론은 과연 이 녀석이 심심할 때가 있기나 할까 싶었다.
그 둘을 둘러싼 사람들이 어느 정도 극에 달했다 싶을 때 긴 머리를 한 쪽으로 내려 딴 아가씨 한 명이 친구들에게 등을 떠밀려 세프론의 앞에 섰다.
"저… 저기…"
머뭇거리는 아가씨의 음성에 세프론과 제레스가 동시에 돌아보자 순식간에 아가씨의 얼굴을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일이죠?"
다정한 제레스의 물음에 용기를 냈는지 아가씨는 세프론의 앞에 작은 바구니를 내밀었다. 바구니 안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 이거 드세요."
"왜 이걸 나한테?"
세프론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묻자 아가씨는 대답하지 못 하고 땅만 내려다 봤다.
"미안하지만 난 단 걸 좋아하지 않,"
세프론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제레스가 세프론의 입을 막아버렸다.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아가씨에게서 바구니를 건네 받으며 제레스가 살짝 미소짓자 아가씨는 넋을 놓고 바라보다 꾸벅 인사를 하고 후다닥 사람들 저 편으로 사라져버렸다.
"쓸데없는 짓을."
"왜 쓸데없는 짓이야. 널 위해 준비해 준 건데 고맙게 받는 게 당연한 거잖아."
"기대하는 걸 줄 수 없다면 받지 않는 게 옳아."
"그렇게 딱딱하게 굴 것 없잖아. 그저 네가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텐데 울리려 하다니 그게 더 나빠."
"그렇다고 해 두지. 그래도 그건 네가 가져가. 난 정말 단 거 좋아하지 않으니까."
이런 문제로 제레스와 실랑이를 했다가는 끝이 없을 거라는 걸 알기에 세프론은 대충 인정하고 넘어가려 했다. 제레스 역시 세프론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려 하지는 않았다. 세프론의 말에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는 바구니를 잘 챙겨들고 있었다.
석양이 깔리기 시작할 때쯤에야 일레이스를 나오며 세프론은 두 손 가득히 이것저것 들고 있는 제레스를 보고 한숨을 내쉈다. 제레스의 손에 들린 것 중 그들이 돈을 지불하고 산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과일 가게 아주머니가, 보석가게 주인장이, 그 외 다른 것들도 모두 주 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하나씩 준 것이 쌓여 꽤 많이 불어나 버린 것이다.
"월석(月石) 필요하다더니 그건 샀어?"
세프론의 질문에 제레스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잊어버렸나 보군. 하긴, 그 사람들 속에서 정신없지 않았다면 그것도 이상한 거야. 세프론은 혀끝을 내찼지만 제레스는 세프론을 돌아보고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내일 또 오면 되니까. 함께 와 줄 거지?"
"사양하겠어."
"함께 와 줄 거 알아."
"……"
왠지 한심스런 생각에 고개를 내젓던 세프론은 저만치 앞에 열댓명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걸 봤다.
"무슨 일이지?"
제레스도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꼿꼿이 서서 그 쪽을 쳐다봤다. 세프론은 사람들의 중앙에서 스치듯이 흑발을 보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사람들 중 누군가가 세프론을 보고 주춤거리다 길을 터 주자 다른 사람들도 서둘러 길을 비켜주었다.
"무슨 일이죠?"
제레스가 사람들에게 사연을 묻는 동안 세프론의 눈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일방적으로 괴롭힘 당했는지 옷도 엉망이고 여기저기 상처가 나 있었지만 긴 흑발과 하얀 피부가 묘하게 어울려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세프론은 그에게 다가앉아 치유주문을 걸어주려 했다.
"아, 괜찮아."
그는 당황해 하며 세프론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 했지만 세프론은 놓아주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어."
"하지만…"
그는 뭔가 말하려다 차가운 세프론의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저기… 고마워."
그의 인사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 세프론은 곧게 자신을 바라보는 보랏빛 눈동자에 심장이 내려 앉는 것 같았다. 뭐지… 이런 기분은…
"이름이 뭐지?"
"이뉴… 이뉴·에센티엘·라 페르미트."
"특이한 이름이군. 어느 종족이지?"
이뉴는 움찔해져 대답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여긴 세프론이 쳐다보자 이뉴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성신족이야."
제레스의 대답에 세프론은 놀란 눈으로 제레스를 올려다봤고 제레스는 고개만 끄덕였다. 성신족이라니 상상도 못 했다. 근래 성신족들이 자신들의 성지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성신족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당한 건가… 엄청난 적대감이군. 세프론이 다시 이뉴를 돌아보니 이뉴는 불안한 표정으로 세프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안… 역시 싫어하는 구나."
한참만에 나온 이뉴의 말에 세프론은 인상을 찌푸리다 이뉴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이뉴는 맞는다고 생각해 질끈 눈을 감아 버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프론은 잔뜩 움츠리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눈을 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이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싫어할 이유가 있나?"
툭, 투둑. 세프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뉴의 눈에서 맑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아… 미안… 갑자기 긴장감이 풀려 버려서…"
스스로도 당황했는지 이뉴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물을 닦아냈다. 성신족이라면 이 녀석도 중성인가? 남자든 여자든 그런 걸 떠나 무척이나 아름답군. 이 정도면 어딜 가나 싫어도 눈에 띄겠어. 세프론은 한 순간 이뉴에게 넋이 나가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멍하니 보고 있는 거지? 아직도 볼일이 남았나?"
얼음장같이 쏘아붙이는 세프론의 눈길에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천천히 흩어져갔다. 제레스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계속 싱글거렸다.
"이상한 소문이 날지도 몰라. 냉정하기로 유명한 네가 이런 미인을 도와줬으니."
제레스가 세프론의 귓가에 속삭였으나 세프론은 관심없다는 듯이 무시했다.
"이뉴라고 했지? 난 제레스야. 천신족이지. 그리고 이쪽은 세프론. 이래뵈도 수신족의 제 1황자야."
"세…프론?"
이뉴는 제레스의 얘기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세프론의 이름을 되뇌었다.
"저기… 도와줘서 고마워. 그럼 난 이만."
이뉴가 인사를 하고 돌아섰을 때 세프론은 충동적으로 이뉴를 잡을 뻔했다. '보내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역력했다. 하지만 왜?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잖아.
"이뉴, 특별히 가야할 곳이 있는 거야? 아니라면 우리와 함께 가자. 혼자 있는 건 외롭잖아."
갑작스런 제레스의 제안에 세프론과 이뉴, 둘 다 놀라 제레스를 바라봤지만 그는 여전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게 따뜻한 사람이구나. 내가 성신족인 걸 알면서도 저렇게 말해준 사람은 처음이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뉴는 선뜻 대답하지 못 했다.
"하지만…"
"네가 성신족이기 때문이란 말을 하려거든 그만둬."
무뚝뚝한 세프론의 말에 어쩔 줄 몰라하는 이뉴에게 제레스는 오후에 받은 바구니를 내밀었다.
"배고프지 않아? 나는 배고픈데… 함께 먹지 않겠어? 혹시 세프론처럼 단 걸 싫어해?"
씩 웃는 제레스를 보다 이뉴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정말…"
"응? 정말 뭐?"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맥이 빠져버린 이뉴의 목소리에도 제레스는 미소지을 뿐이었고 세프론은 편히 앉아 먹을 수 있는 장소를 찾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느 누구도 알지 못 했다. 이 만남이 세 사람의 운명을 엄청나게 바꿔 놓는 전환점이었다는 것을.
이른 아침. 창 밖으로 정원을 내다보던 세프론은 정원수들 사이에서 이뉴의 모습을 발견하고 밖으로 나갔다. 세프론이 가까이 다가가는데도 이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뉴?"
"아얏!"
이뉴의 어깨를 잡았던 세프론은 비명소리에 손을 뗐다. 이뉴도 세프론의 등장에 꽤나 놀란 것 같았다.
"어디 다쳤나?"
"아, 아니."
이뉴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고통이 남았는지 한 손으로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세프론은 미심쩍은 듯 이뉴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이뉴의 웃옷을 벗기려했다.
"우왓! 세프론! 뭐, 뭐 하는 거야?"
이뉴는 기겁을 했으나 세프론은 이뉴가 도망가려 하기도 전에 이뉴의 웃옷을 벗겨 어깨를 바라보았다. 이뉴의 왼쪽 어깨는 붉게 부어오르다 못해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또 나갔다 온 건가… 도대체 뭐로 맞은 거지?"
"그, 글쎄…"
"여기 뿐이야?"
"응?"
"다친 곳은 여기 뿐이냐고."
이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세프론은 대충 알 것 같았다. 아마 이뉴는 겉으로 보이는 상처만은 대충 치료하고 돌아왔을 것이다.
이뉴와 만난 지 한 달이 지났다. 지난 한 달간 이뉴는 피트리스에서 머물고 있었고 제레스도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세프론은 이뉴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자니 찹찹해졌다. 지금까지 이뉴는 몇 번인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외부에 다녀왔고 그 때마다 여기저기 상처를 만들어서 돌아왔었다. 워낙 적대감이란 것과는 거리가 먼 수신족들이, 더구나 세프론의 손님인 이뉴에게 함부로 대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피트리스 밖까지 나갔다 왔다는 것인데 겨우 몇 시간 안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공간이동을 할 줄 안다는 뜻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이뉴가 공간이동까지 할 수 있는지 의아해 했지만 얼마 전 이뉴가 길거리에서 넘어진 아이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걸 본 후로 그런 의문은 사라졌다. 간단한 치유주문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뉴의 잠재능력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뉴는 세프론과 제레스가 가르쳐주는 수신족과 천신족의 주술들을 단 한번만 보고도 완벽하게 익혔다. 언젠가 한 번은 제레스가 장난 삼아 천신족 상급 치유주문인 쉬윈드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신관인 제레스조차 쉬윈드를 익히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렸기에 제레스는 이뉴가 쉬윈드를 배우는 데 최소한 보름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처음엔 조금 헤매긴 했지만 이뉴는 불과 몇 시간만에 능숙하게 쉬윈드를 구사했다.
이뉴의 말에 의하면 이뉴는 성인식을 치른 지 일년도 채 되지 않았다고 했으니 이뉴의 나이는 이제 겨우 열 일곱이었다. 몇 천년을 사는 신족의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게다가 치유주문 같은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성인식이 지난 후부터니까 이뉴가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테지만 세프론은 이뉴의 능력이 최소한 수신족 제 1황자인 자신과 엇비슷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잠재된 능력이 깨어나면 아마 지금보다 몇 배, 아니 몇 십 배는 엄청나질 것이다. 그것이 성신족과 다른 신족의 근본적인 차이라고 생각하니 유난히 성신족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두려움을 폭력으로 나타내는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당하고만 있는 거지?"
이뉴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세프론을 올려다봤다.
"너라면 당하고만 있지 않을 수도 있었잖아. 조금만 능력을 사용했어도 다들 겁먹고 네게 이런 짓까지는 하지 않았을 텐데 왜 바보같이 당하기만 하는 거지?"
"바보 같아?"
"그래, 충분히!"
"근데 왜 세프론이 화를 내?"
세프론은 이뉴의 맑은 눈동자가 곧게 자신을 향해 닿자 당황했다. 왜 화를 내냐니… 그건…
"세프론, 나한테 화났어?"
이뉴의 목소리가 움츠려들자 세프론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화난 거 아니야."
"정말?"
"그래, 하지만… 다음엔 피하기라도 해라."
세프론이 화가 난 게 아니란 걸 확인한 이뉴는 세프론의 팔에 매달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낮게 세프론을 불렀다.
"있잖아, 세프론. 그 사람들… 날 무서워 해. 나한테 화를 내는 사람도, 돌을 던지는 사람도 사실은 날 무서워 해.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내가 능력을 사용하면 그 땐 정말로 미움 받을지도 몰라. 피가 나는 상처는 아프지 않아. 하지만 그 사람들의 마음은 아파… 어째서 그런 걸까…"
"이뉴…"
세프론은 이뉴를 안아주려다가 그만 두었다. 난생 처음 깨달은 자신의 감정에 움찔해진 것이었다. 이뉴가 소중하다. 이 녀석이 다치면 가슴이 아프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사랑…이란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거의 삼 백년을 살아오면서 누군가가 이렇게 신경 쓰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곤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아니…지금은 그냥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그걸로 충분해.
"세프론, 이뉴, 여기 있었네. 그런 줄도 모르고 한참 찾았어."
제레스가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오자 세프론은 이제 막 깨달은 자신의 감정이 쑥스러워져 팔에 매달려 있는 이뉴를 살며시 떼어놓았다.
"둘이 나만 빼 놓고 뭐하고 있었던 거야?"
제레스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묻자 이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비밀이라고 답했다.
"이 녀석~! 그보다 아침 먹으라던데 어쩔까? 날도 좋은데 그냥 정원에서 먹을까?"
"그래."
"그럼 내가 가서 말하고 올게."
이뉴는 세프론과 제레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또 나갔다 온 모양이지?"
제레스의 물음에 세프론은 대답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또 다쳤겠구나."
"말은 안 하려 하지만 아마."
"후~ 마음 아프군. 도대체 왜지? 이해할 수가 없어. 성신족이란 것만으로 그렇게 거부감을 가질 정도야?"
"글세… 사람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 모든 사람이 다 너같은 건 아니니까."
"한심해…"
세프론과 제레스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사람들의 성신족에 대한 거부감을 없앨 묘책을 떠오르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후 제레스와 세프론은 분수대 곁에서 물장난을 하고 있는 이뉴를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엔 이뉴 혼자였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작은 새들이 이뉴의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새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이뉴의 머리 위나 어깨에 앉았고 그게 즐거운지 이뉴는 자신의 어깨 위에 앉은 새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분수대에서 물방울이 뿌옇게 번져 순간 순간 이뉴에게 예쁜 무지개 빛을 더해주었다. 세프론은 이뉴가 깨끗한 보석 같다는 생각을 했다. 햇빛을 받아도 물빛을 받아도 투명하게 굴절시키는 보석 같았다.
"세프론."
세프론은 제레스의 부름에 돌아봤으나 제레스의 시선은 여전히 이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봐… 저 아이는 누구보다도 맑아. 나… 저 아이를 사랑해."
갑작스런 제레스의 고백에 세프론은 뭔가가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이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저 아이를 원해. 하지만… 알고 있어? 이뉴는 날 사랑하지 않아. 하하…우습지?"
멋쩍게 웃는 제레스의 반응에도 세프론은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난 저 아이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아. 스스로는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난 이뉴를 사랑해. 누군가에게 양보할 생각도 없어. 이뉴가 나만을 바라보도록 하고 싶어."
그제야 세프론은 제레스를 바라봤다. 제레스는 세프론과 눈이 마주치자 엷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공허한 웃음이었다.
"진심인가 보군."
"그래…"
세프론은 다시 이뉴를 바라봤다. 맑은 아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물처럼 투명한 이뉴… 제레스라면 이뉴를 소중히 지켜주겠지. 아프게 하는 일없이 언제나 따스하게 감싸 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뉴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밝아졌어. 처음엔 위태로워 보였었는데… 제레스가 있었기 때문일 거야. 제레스는 워낙 모든 걸 녹일 줄 아는 녀석이니까. 그래… 제레스라면 누구보다 이뉴를 사랑할 거야. 분명히…
"나 내일 프로디스로 돌아가. 너무 오래 여기 있었잖아. 에레나가 있긴 하지만 가 봐야지. 이래뵈도 천신족의 신관이니까. 이뉴에게… 함께 가자고 할거야."
제레스는 세프론에게 보고하듯이 말했다.
"싫다면 억지로라도 데려갈지 몰라."
"……"
"괜찮겠어?"
"뭐가 말이지?"
"아니야, 아무 것도… 이뉴에겐 저녁 때 얘기할게."
이뉴는 자신을 바라보는 제레스와 세프론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 둘에게 달려왔다.
"둘이서 무슨 얘길 그렇게 진지하게 하고 있는 거야?"
"이뉴 네가 무척 아름답다고."
제레스의 넉살에 이뉴는 웃어버리고 만다. 환하게 웃는 이뉴를 보고 있던 세프론은 한 쪽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프로디스로 보내면 지금처럼 보기는 힘들어질 것이다. 저도 모르게 이뉴에게 손을 뻗던 세프론은 제레스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이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프론?"
자신이 다쳤을 때 외에는 무뚝뚝하기만 하던 세프론이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이뉴는 이상하다 싶어 세프론과 제레스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그러나 세프론은 무심히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고 제레스는 그런 세프론을 바라보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뉴의 시선을 느끼고 온화하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거짓말같이 평화롭기만 했던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뉴는 창가에 기대서서 어두운 밤공기를 깊이 들이 마셨다.
…이뉴야, 잊지 말거라. 너는 '리시스'가 택한 아이야. 그건 곧 네가 '성신족' 전체란 뜻이란다. 성신족은 다른 신족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능력을 가졌지만 얄궂게도 거기엔 한가지 약점이 있지. 성신족은 자신의 힘을 제어할 줄 몰라. 그래서 레시카미노계에서 분리되어 버렸지만 그건 우리의 선택이 었단다. 그러니 다른 종족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리시스의 아이'인 너는 남보다 그 힘이 몇 배는 더 뛰어날 테지. 이뉴야, 절대 너만은 폭주해서는 안 된다. 너는 성신족의 상징이야. 그런 네가 힘을 폭발시킨다면 네가 스스로 멈추기 전에는 아무도 막지 못 할 테니… 어린 너에게는 벅찬 짐이구나. 사람을 미워하지 말거라.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을 미워해서는 안돼…
할아버지… 이뉴는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이 사치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허탕이었다. 분명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조금 늦은 것 같았다. 어서 찾아야 할텐데… 다쳤을지도 몰라. 아니, '다이'는 괜찮을 거야. 세프론의 말대로 피하기라도 했을 거야…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뉴는 하던 생각을 접었다.
"누구세요?"
"나야, 제레스."
"들어와."
이뉴가 반갑게 문을 열어주자 이뉴의 코앞에 차와 쿠키가 들이밀어졌다. 이뉴는 사람보다 먼저 들어온 음식에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웃어버렸다.
"이뉴, 난 내일 프로디스로 돌아가. 원래 난 천신족이고 돌아가서 해야할 일도 있으니까."
"아… 그렇구나."
그새 세프론, 제레스와 함께 지내는 시간에 익숙해졌는지 이뉴는 제레스의 돌아간다는 말이 서운했다.
"이뉴, 날 좋아해?"
이뉴는 차를 마시려다 목에 걸려 켁켁거리며 제레스를 올려다봤다.
"갑자기 왜 그래?"
"대답해봐."
제레스는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이었다.
"좋아해. 당연하잖아."
이뉴가 깊게 생각하는 기색도 없이 쉽게 답하자 제레스는 쓰게 웃었다.
"나 뭔가 잘 못 대답했어?"
"아니야, 그보다 이뉴. 내게도 물어봐 줘. 널 좋아하는지."
"에-? 뭘 하자는 거야? 제레스, 이상해."
이뉴는 제레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아 눈망울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나 제레스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계속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할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좋아, 물어볼게. 제레스는? 제레스도 날 좋아해?"
"그래. 누구에게나 말 할 수 있는 그런 좋아함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로 좋아해. 너는 특별해. 다른 누구와도 달라. 이뉴, 널 사랑해."
쨍그랑! 이뉴는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런,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뜨거운 차에 데었을까봐 서둘러 이뉴에게 튄 차를 닦아주는 제레스를 멍하니 지켜보던 이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기…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제레스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이뉴를 바라봤다. 이뉴는 습관처럼 자신의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역시 놀라게 한 건가…
"널 사랑한다고 했어."
"…진심이야?"
"그래."
"하지만 왜?"
"왜라니. 그냥 너니까 좋아하는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이뉴 너니까."
"하지만 난…"
"성신족이라고?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는 거야."
"모…모르겠어."
"괜찮아. 넌 그래도 웃고 있어주기만 하면 돼."
제레스는 살며시 이뉴를 안아주었다. 이뉴는 온 몸에 힘이 빠져서인지 얌전히 있었다.
"나와 함께 프로디스로 가자. 다신 널 다치게 하지 않을게."
"난…"
"싫다고 해도 데려갈 거야."
"…생각 좀 하고 싶어. 혼자 있게 해줘."
"알았어."
제레스가 나간 후 이뉴는 침대에 걸터앉아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정말이지 엄청 놀랐다. 갑자기 사랑한다니… 게다가 프로디스로 함께 가자니 왠지 그건 프로포즈 같잖아. 분명 제레스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게 제레스의 사랑한다와 같은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걸 알기에는 이뉴는 너무 어렸다. 가족을 제외한 사람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더구나 이뉴는 어렸을 적부터 '선택된 아이'로서 신관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가족의 사랑이란 것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좋아하는 것처럼 제레스를 좋아하면 그게 사랑인 걸까? 제레스의 말대로 프로디스에 함께 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가고 나면 그 후엔 어떻게 되는 걸까? 제레스와 영원히 함께 살아? 영원히? 이뉴는 혼란스러워지자 침대에 엎드려 베개 위로 얼굴을 묻어 버렸다.
같은 시간. 세프론은 책을 펴놓고 앉아 있었지만 집중이 되지 않자 곧 덮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은 듯이 그 자리에 서서 뭔가 할 일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기억해 보려 했지만 머리 속은 텅 비어버리기만 했다.
"우습군. 뭐에 이렇게 동요하는 거지?"
세프론은 한심스런 자신을 탓하다가 이뉴의 얼굴이 떠오르자 미간을 찌푸렸다. 관두자. 쓸데없는 짓이야.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잠이나 자야겠다는 생각에 돌아서던 세프론은 자신의 침대 위에 작은 빛들이 뭉쳐 가는 것을 보고 멈칫해졌다.
"이뉴…"
빛 속에서 이뉴의 모습이 또렷해지자 세프론은 신음처럼 이뉴의 이름을 불렀다.
"세프론? 왜 여기에? 여긴… 앗! 미안, 나…"
이뉴는 당황해서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세프론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정말 세프론의 방까지 와 버리다니… 세프론은 어떻게든지 변명을 해 보려는 이뉴를 내려다보다 쿡 소리를 내며 짧게 웃었다.
"세프론?"
"괜찮으니 변명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편히 있어."
"… 미안."
"괜찮다니까."
이뉴는 곁에 앉는 세프론을 지켜보다 풀이 죽어 고개를 푹 떨구었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지? 무슨 일 있었어?"
"아, 아니!"
이뉴는 정색을 했다. 과민반응을 보이는 이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프론이 '그래?' 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이뉴는 성급히 세프론의 옷자락을 잡았다.
"잠깐만 같이 있어줘."
보랏빛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보며 애원하듯 말하는데는 어쩔 수 없었는지 세프론은 다시 이뉴의 곁에 앉았다. 짧은 시간 동안 긴 침묵이 이어졌다. 세프론은 스스로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차분하다는 점에 감사하고 있었다. 이뉴가 왜 갑자기 동요됐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뉴를 보고 있는 자신의 심정이 고요한 걸 보니 분명 자신은 이뉴를 곁에 묶어두고 싶어하는 건 아니였다. 어디서든지 이뉴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거야. 세프론은 조금이라도 흔들린 자신을 비웃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안도하고 있었다.
"세프론, 있잖아… 제레스가 프로디스에 함께 가자고 했어."
"……"
"제레스는 날… 사랑한대. 난… 분명 제레스를 좋아해."
지끈- 각오하고 있었던 말인데도 심장에 압박이 오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세프론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이뉴에게 보이기 싫어 이뉴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세프론, 난 확신하지 못 하겠어. 제레스는 내가 다른 누구보다 특별하다고 했는데 난… 제레스가 좋은 것처럼 세프론도 좋아해. 그건 특별한 게 아니잖아."
생각지도 못 했던 이뉴의 말에 세프론은 얕은 두통을 느꼈다. 그래… 이뉴는 아직 어려. '사랑한다'와 '좋아한다'를 구분하지 못 하는 건 당연할지도 몰라.
"그리고 프로디스에 가면 세프론을 볼 수 없잖아."
"하지만 가지 않으면 제레스를 볼 수 없겠지."
"지금까지처럼 다 같이 지낼 순 없는 걸까?"
"이뉴… 그건 불가능해. 제레스는 널 '사랑한다'고 했어. 그건 아무에게나 말 할 수 있는 '좋아한다'와는 달라. 알고 있지?"
"그건 알아…"
"제레스는 네게 프로포즈를 한 거야."
이뉴는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져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했다.
"프로디스에 가도… 언제든지 놀러올 수 있어."
세프론의 낮고 차분한 음성에 이뉴는 한참 동안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겨우 조그맣게 웃었다.
"응… 그래…"
세프론을 올려다보던 보랏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다가 세프론에게서 멀어졌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세프론은 당장이라도 이뉴를 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마실 거라도 가져다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뉴는 막 방을 나가려는 세프론을 불러 세웠다.
"뭐 더 필요한 거라도 있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세프론은 이뉴의 뒷말을 기다렸지만 이뉴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왜 세프론을 부른 걸까?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아니, 그 전에 난 왜 여기 있는 걸까…
"세프론, 날… 아니야, 아무 것도. 나 그냥 돌아갈게. 이제 자고 싶어. 세프론도 잘 자."
이뉴는 세프론이 어떤 말을 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세프론의 앞을 지나쳐 방을 나가버렸다. 세프론은 이뉴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뒤쫓아 갈 수 없었다. 묵묵히 이뉴가 지나간 길을 지켜보다 다시 방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그 때의 세프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