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고 작은할아버지는 金學奎 장군이라면서 親日청산 문제를 주도적으로 거론해온 열린당 金希宣 의원의 「독립군 家系」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金學奎 장군의 큰며느리 田鳳愛씨 등 복수의 인사는 『金의원의 아버지 金一鍊씨(사망)가 만주국 경찰로 근무했다』고 증언했다. 기자의 취재결과 金學奎 장군은 金希宣 의원의 작은할아버지가 될 수 없고 촌수도 따질 수 없는, 또 본관도 다른, 족보상 완전한 남남으로 밝혀졌다.
金學奎 장군의 아들은 6·25 직후 戰死
열린당 金希宣(김희선·61) 의원이 지난 7월23일 국회에서 金學奎 장군의 아들인 金一鎭(김일진)씨와 광복회 金祐銓(김우전) 회장과 함께 자신의 「독립군 家系」 의혹에 대해 기자회견을 열고 있을 즈음, 한 노인이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金瓚鎬(김찬호·77)씨였다.
金씨는 평안도 사투리로 『金一鎭씨 외에 金學奎 장군에게 또 다른 아들이 있다』고 했다. 그는 『나의 부친(金致♥)이 평안남도 순천에서 3·1 운동 직후 만주로 건너가 滿拓(만주척식회사-조선척식회사와 마찬가지로 만주지역의 토지조사·수탈작업을 벌인 일본의 식민지 운영기구)에서 주사로 일했으며, 내 큰아버지와 金學奎 장군과는 呼兄呼弟(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고 했다.
그의 설명이다.
『金學奎 장군은 만주 柳河縣(유하현) 三源堡(삼원보)에서 본처 金鳳洙(김봉수)와 결혼했고, 그 사이에 아들 金一鉉(김일현)과 두 딸을 두었다. 金學奎 장군이 만주 魚亮子(어량자)에서 살 때 우리 사촌형집과 이웃하고 살았다. 나는 一鉉 형님과 같이 山城鎭(산성진)국민고등학교에 다녔다. 내가 2년 후배였다. 一鉉 형님은 6·25 때 육군 장교로 전사했다』고 알려줬다.
기자는 지난 8월20일 金瓚鎬씨와 함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았다.
민원실 직원에게 『6·25 때 전사한 육군 장교 金一鉉을 찾을 수 있겠나. 부친의 성함은 金學奎이다』고 문의했다.
직원은 컴퓨터로 전사자 명단을 확인했다. 직원은 즉각 「육군 장교 金一鉉」의 신원을 확인해 줬다.
『金一鉉 대위는 7사단 1연대 중대장으로 동두천 지구 전투에서 1950년 6월26일 전사했다. 유가족으로 金學奎씨가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金一鉉 대위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그는 현충탑 지하에 있는 「위패 봉안관」에 이름 석 자로 남아 있다. 金대위에게는 1951년 정부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됐다.
우리는 현충탑의 위패 봉안관을 나와서 「애국지사 묘역」에 들렀다.
맨 앞 열 50번째 봉분이 金學奎 장군의 묘였다. 묘비에는 1962년 건국 공로훈장 敍勳(서훈), 부인 吳光心(오광심)씨와의 합장, 아들 一鎭씨가 유족이라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다.
부인(후처) 吳光心(1910 ~1976)은 평북 선천 출신으로 1935년 民革黨 부녀부 차장을 지냈고, 광복군 3지대 간부로서 광복군 선전활동을 담당했다. 1976년 사망했고, 이듬해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金學奎 장군의 며느리와 친손녀를 만나다
기자는 수소문 끝에 金學奎 장군의 큰며느리 田鳳愛(전봉애·80) 여사가 경기도 파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지난 9월2일 金瓚鎬씨와 함께 田여사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찾았다.
金씨가 문 앞에서 『一鉉이 형님을 찾아왔습니다』고 하자, 田여사가 반색을 하며 문을 열었다. 집에는 金學奎 장군의 며느리 田여사와 金장군의 친손녀 金貞姬(김정희·46)씨가 있었다.
金學奎 장군은 본처 金鳳洙(1891~1976)씨와 그 사이 아들 一鉉과 두 딸을 두었다. 金장군이 처자식을 남겨둔 채 독립운동을 위해 떠나자, 金장군의 가족들은 魚亮子로 이주했다.
金一鉉(1922년생)은 1943년 通化縣(통화현) 통화국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 때의 단짝이었던 田鳳愛와 그해 9월 결혼했다. 魚亮子(어량자) 국민 우급학교 교사로 광복 직후까지 근무하던 金一鉉은 고향인 평남 평원군으로 일시 귀향했다가, 좌익들이 발호하자 1946년 가족을 이끌고 월남했다.
金一鉉은 1948년 5월 육사 7기 정규반으로 입교해 6개월의 훈련을 거쳐 정부수립 직전 소위로 임관했다. 7기 정규반에는 북한에서 공산당의 박해를 받다가 남하한 우익청년들이 많았다.
그가 6·25 발발 다음날 동두천에서 중대장으로 전사하자, 유족들은 부산으로 피란했다. 남편 金一鉉이 전사했을 때 田鳳愛 여사는 스물여섯 살이었고, 슬하에 두 딸이 있었다.
남편을 잃은 田여사는 1·4 후퇴 때 시어머니(金鳳洙 여사=金學奎 장군의 본처)와 시누이, 딸 둘을 이끌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田여사는 부산市 동구 초량동에서 40여년간 삯바느질 등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딸 둘을 키웠다.
그녀의 바느질 가게는 이후 20명의 종업원을 둔 양장점으로 성장했다. 부산시내 선화여중·선화여상·중앙여상 등 3개교에 校服(교복)을 납품했다고 한다.
『平地風波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거실 한편에는 그녀의 인생을 말해 주는 美製 재봉틀이 골동품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母女는 기자 일행에게 50년간 묻어두었던 家族史를 조심스레 털어놨다. 답변은 주로 田여사가 했고, 딸 貞姬씨는 가끔 부연설명을 하는 식이었다.
조선일보 1967년 9월21일자에 실린 金學奎 장군의 訃告(부고)는 다음과 같다.
<독립투사 金學奎옹이 20일 오후 4시 서울 마포구 망원동 57의 188자택에서 신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8세. 광복회는 사회장으로 치를 예정인데 유족으로는 미망인 吳光心 여사와 장남 一鎭(14)군이 있다>
金學奎 장군의 며느리 田여사와의 일문일답은 이렇게 전개되었다.
―장례식에는 가셨습니까.
『신문에 유족으로 부인 吳光心과 장남 一鎭이 있다는 기사를 봤어요. 시어머니(김봉수 여사)는 「남편 金學奎」를 머리에서 지웠는지, 「나는 안 간다」고 하셨어요. 저는 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어머니가 말리셨습니다. 저와 시누이들이 장례식장에 갔다면 큰 난리가 벌어졌겠죠. 본처와 큰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테니까요. 독립운동을 한 분들은 우리 집 사정을 다 알고 계셨지만, 공연히 平地風波(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 김봉수 여사는 왜 광복 후 남편 金學奎 장군과 결합하지 못했습니까.
『시아버지 金學奎 장군이 동명중학교 교장시절이었던 1927년 무렵 교사였던 오광심 여사와 가깝게 지냈습니다. 당시 오광심 여사는 유부녀였습니다. 두 사람이 눈이 맞은 거죠. 그리고 함께 독립운동을 하면서 더 가까워졌어요. 시아버지 金學奎 장군이 처와 두 딸은 놔두고 아들(김일현)만 上海로 데리고 가려는 걸, 시어머니가 막았어요.
오광심씨는 광복 후 「서울에 본처와 아들 며느리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느냐」며 서울로 들어오지 않았어요. 시아버지(김학규)가 시어머니(김봉수)를 찾아왔는데, 시어머니가 「가족 다 팽개치고 갈 때는 언제고, 이제야 돌아오느냐」고 쌀쌀하게 대했어요. 그러다가 곧 시아버지가 1949년에 金九 암살 배후 혐의로 구속됐어요. 오광심 여사가 그 후 본처 행세를 했어요.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은 우리 집 사정을 다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吳여사가 본부인인 줄 알았을 거예요』
金一鉉씨의 호적에 따르면, 金學奎 장군은 1909년 2월5일 18세 신부 金鳳洙(1891년생)를 아내로 맞았다. 당시 金장군은 아홉 살의 「꼬마신랑」이었다. 장남 金一鉉은 1922년에 태어났다. 金學奎 장군이 22세 때였다.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1967년 사망한 金學奎 장군과 1976년에 사망한 吳光心 여사가 합장돼 있습니다. 가족들이 항의하지 않았습니까.
『시어머니(김봉수 여사)가 합장한 걸 알았어요. 미국에 있는 시누이(김은순)가 분노했지만, 더 이상 문제를 삼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같아도 아버지는 다르다고요!』
―金學奎 장군이 군사재판에서 15년刑을 받았는데, 남편 金一鉉씨가 면회를 가지 않았습니까.
『몇 차례 면회를 갔는데, 시아버지가 남편(金一鉉)에게 「軍人으로서 이런 곳에 출입하는 것이 좋지 않다」면서 오지 말라고 했답니다』
―金希宣 의원은 자신의 「독립군 가계 의혹」이 제기되자, 『증조할머니 선우순이 안동金씨 집안에 再嫁하면서 우리 할아버지 김성범과 김학규를 데리고 갔다. 이 과정에서 작은할아버지 金學奎 장군은 안동金씨가 됐고, 친할아버지 金成範은 生父의 본관을 따라 의성金씨로 남았다. 두 사람은 본관이 다르지만 친형제』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입니까.
『시아버님(金學奎 장군)이 어떻게 의성金씨예요? 金의원의 증조할머니인 鮮于順 할머니가 希宣이 할아버지인 金成範을 데리고 의사(金基燮)한테 시집가서 金學奎 장군을 낳았어요. 두 사람은 형제가 아니에요. 씨가 다른데 어떻게 형제가 될 수 있어요』
―金學奎 장군과 金希宣 의원의 할아버지는 남남이라는 얘기인가요.
『(김희선 의원이) 핏줄이라는 것을 주장하려고 낳아서 갔다고 했나 봐요. 시아버지 金學奎 장군은 누가 뭐래도 안동金씨 자손입니다. 아버지가 같아야 이복이고 동복이고 촌수를 따져볼 수 있는 거잖아요』
―金學奎 장군이 안동金씨의 핏줄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세요.
『시어머니(金鳳洙 여사)가 심심하면 내게 시할머니(鮮于順)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金基燮이란 한의사가 첫부인과 사별을 하고 後妻(후처)로 시할머니를 맞은 겁니다. 시할머니는 우리 시어머니에게 「남편이 죽고 혼자 되니 살 수 없어서, 아들 하나를 데리고 안동金씨 집안으로 시집왔다」고 늘 얘기했답니다』
―데리고 들어간 자식(김성범)과 前妻의 자식들이 잘 어울렸답니까.
『鮮于順 할머니가 마음씨가 고왔고, 金基燮 할아버지도 내 자식 남의 자식 구분하지 않고 키웠답니다. 내(金學奎 장군의 며느리 田여사)가 큰딸을 만주에서 임신해서 평남 평원군 사산리에 있는 큰시아주버님(金基燮의 큰아들) 집에서 큰딸을 낳았는데, 얼마나 잘 대해 주시던지… 1947년에 월남할 때 큰시아주버님이 슬피 우시던 기억이 납니다. 집안의 우애가 대단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金學奎 장군은 金希宣 의원이 혈연적으로는 친손녀가 아니지만, 친손녀처럼 가깝게 대하셨던 거예요』
―金希宣 의원은 『할아버지 金成範과 할머니 吳炳熙(오병희·1893~ 1932)가 독립군 자금을 모아 3개월에 한 번씩 방문하는 작은조모(吳光心)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고, 아버지 一鍊(일련)도 그 일을 도왔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는 우리 시어머니(金鳳洙 여사)로부터 그 사람들이 독립운동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어요』
―金學奎 장군이 의성金씨가 아니라면 안동金씨 족보에는 왜 올라 있지 않습니까.
『정부 수립(1948년) 직후에 영어의 몸이 되셨고, 4·19 이후에 풀려났지만 곧바로 몸져 누워서 족보를 정리할 경황이 없으셨을 겁니다』
―왜 남편 金一鉉씨를 안동金씨 족보에 올리지 않았습니까.
『나도 삯바느질하면서 시어머니 모시고 두 딸을 키우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죠』
「鮮于順」과 「黃氏」 미스터리
月刊朝鮮 9월호 「金希宣 의원의 독립군 家系 의혹」 기사가 나간 직후 자신을 의성金씨 종친이라고 소개한 노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月刊朝鮮을 읽고 의성金씨 大同譜(대동보) 13권을 밤새 확인한 결과, 金希宣 의원이 德驥公派(덕기공파) 34세손임을 찾아냈다』고 했다.
金의원은 자신의 족보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독자가 대신 확인해 준 것이었다.
기자는 의성金씨 대종회 관계자에게서 입수한 족보를 譜學(보학)의 권위자인 명지大 사학과 金渭顯(김위현) 교수에게 보여주었다. 金교수의 설명이다.
<1992년에 만들어진 의성金씨 대동보에 따르면, 金希宣 의원의 증조부 金淳玉은 己巳年(1869년생) 武科 급제자로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兼 五衛將(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이란 관직과 官階(관계)를 지냈다. 1869년생인 金淳玉은 丁酉年(1897년) 2월2일 별세했다>
1992년판 대동보에는 증조부 金淳玉의 배우자로 己巳年(1869년) 동갑인 「貞夫人(정부인) 黃氏」가 올라 있었다. 貞夫人은 정·종 2품 文武官의 妻에게 남편의 품계에 따라 주던 것이다.
金希宣 의원은 자신의 증조모가 鮮于順(선우순)이라고 밝혔다. 金교수는 『鮮于順이 金淳玉의 부인 자리에 올라 있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일제下인 1936년 작성된 泰川公派譜(태천공파보)에는 金淳玉의 부인으로 「鮮于」씨가 등재돼 있고 黃씨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부인 鮮于씨는 貞屹(정흘)의 딸로 辛酉年(1861)생이다.
―金希宣 의원 증조부(김순옥)의 부인은 黃氏입니까, 鮮于씨입니까.
『대개 옛날에 만들어진 족보일수록 짜임새가 더 있습니다. 그런데 1936년에 제작된 「태천공 派譜(파보)」는 엉성한 느낌이 들어요. 1992년에 제작된 대동보는 김순옥의 生年이 己巳(1869년)로 돼 있고, 1936년派譜는 乙巳(1845년)로 돼 있습니다. 己와 乙이 비슷해 收單(수단: 인적사항을 적은 메모지인 單子를 모으는 일)할 때 誤記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누가 정부인인지 저도 헷갈립니다』
金希宣 의원의 「슬픈 가족사」
그런데 이 1936년 派譜에는 金希宣 의원의 할아버지인 金成範이 올라 있지 않다.
김순옥의 부인 「黃氏」와 아들 「金成範」이 대동보에 새로 이름이 오른 것은 1992년부터였다.
金교수는 『1936년 파보에 없다가 1992년 대동보에 金成範이 올라 있는 것은 金成範이 庶子(서자)로 못 오르고 있다가 나중에 오른 것일 수도 있다』고 해석했다. 즉, 鮮于順이 小室(소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본처가 사망하거나, 이혼해서 얻은 「후처」일 경우, 족보에 본처와 동일한 자격으로 이름이 오른다.
金希宣 의원은 『金淳玉의 아들인 金成範과 金學奎는 친형제』라고 주장했었다.
그런데 의성金씨 대동보를 보면, 金希宣 의원의 증조부인 金淳玉의 長子 자리에 金尙林(김상림·1885년생)이 올라 있고 金學奎의 이름은 없다. 족보학자들에 따르면 金學奎가 의성金씨 집안에서 출생한 것이 맞다면 비록 안동金씨 집안으로 입적했다 하더라도 족보에는 그 이름이 오른다고 한다.
장자 金尙林은 金成範보다 나이가 세 살 어리다.
세 살이나 어린 김상림이 어떻게 김성범의 형으로 올라가 있을까? 明知大 사학과 金渭顯 교수의 설명이다.
『1992년 대동보에 오른 金成範은 壬午年(1882년)생으로 형 金尙林(1885년생)보다 세 살이 많습니다. 족보에 나이가 많은 아우가 나타날 경우, 譜學에서는 庶子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派譜와 대동보에 따르면, 金淳玉의 사망 연도는 1897년으로 일치한다.
이때 1885년생인 김상림은 12세, 1882년생인 金成範은 15세, 1900년생인 김학규는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증조모 鮮于順이 어린 金成範과 金學奎를 데리고 안동金씨 金基燮에게 재가했다』는 金希宣 의원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족보上으로 남남』
金學奎 장군은 의성金씨 핏줄이 아닌 것이다. 즉, 金學奎 장군은 어머니(鮮于順)와 의성金씨(金淳玉) 사이에서 난 것이 아니라 안동金씨인 金基燮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의성金씨 金淳玉의 증손녀인 金希宣과 안동金씨인 金學奎 장군 사이는 「손녀-할아버지」 관계가 아니라 족보상 남남인 것이다.
기자는 안동金씨 (新·舊)대종회에 金學奎 장군 일가가 족보에 등재돼 있는지 확인을 요청했다. 舊안동 金씨 대종회 관계자는 『1935년 발간된 화수록과 한국전쟁 이후 발간된 족보에 나오는 15개파 45만 명을 샅샅이 뒤졌지만 金學奎라는 이름은 없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는 『外地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족보를 만들 때 식구 전체가 누락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현행 民法이 정하는 친족(배우자, 혈족, 인척)의 범위는 8촌 이내의 血族(혈족)과 4촌 이내의 姻戚(인척), 그리고 배우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증조모인 鮮于順이 안동金씨 집안에 재가해서 낳은 金學奎 장군과 의성金씨인 金希宣 의원과는 민법상 어떤 관계일까.
명지大 金渭顯 교수는 『金希宣 의원이 작은할아버지라고 주장한 金學奎 장군은 金의원과 생물학적으로는 먼 친척뻘이지만 족보上으로는 「남남」』이라면서 『父系(부계)로 따지면 아무 관계가 없고, 母系로 따지면 조금 관계가 있는 정도』라고 했다. 그의 얘기다.
『돌아가신 증조모의 명예를 생각했다면, 재가한 사실을 감춰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혹을 해명하기 위해 조상의 과거사를 들춰내는 것은 후손으로서 온당한 태도가 아니다』
기자는 1932년에 金學奎 장군이 스스로 만든 호적을 입수했다.
金장군은 출생지를 평안남도 평원군 서해면 사산리로, 「金基燮의 子」로 신고했다. 그리고 1929년 10월1일 吳光心 여사와 혼인한 것으로 신고했다. 金장군은 吳씨와의 사이에서 1954년 3월 아들 金一鎭씨가 태어나자, 서울市 중구청에 신고했다.
그가 신고한 자신의 前 호주란에는 「父 金基燮 母 鮮于順」이 적혀 있고, 그 옆 本貫(본관)란에는 「安東」이라고 적었다.
親日 과거청산을 주도하고 있는 열린당 金希宣 의원은 자신을 「金學奎 장군의 손녀」라고 주장했다. 「독립군 가계」에 의혹이 제기되자, 「金學奎 장군의 종손녀」라고 한발 물러섰다.
金希宣 의원은 독립군 가계임을 내세워 親日문제제기에 앞장 서왔다. 이번 취재결과 金의원은 족보상 金學奎 장군과 남남임이 확인됐다. 金學奎 장군의 며느리·손녀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金의원은 金學奎 장군을 친할아버지처럼 따르고, 金學奎 장군도 그녀를 친손녀처럼 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金의원이 金學奎 장군을 「친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다. 더구나 그가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이고, 親日 과거사 규명을 외치는 공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말을 단순한 실수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金希宣 의원의 보좌관은 이같은 사실 확인을 요청하자 『알아서 쓰세요』라고 했다. 그 후 여러 차례 확인을 요청했지만, 金希宣 의원 측은 기사 마감일에 이를 때까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 金希宣 의원의 아버지 金一鍊이 독립군이었다는 주장 검증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만주국 형사』
田鳳愛 여사를 인터뷰하던 지난 9월10일 기자에게 예기치 않은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한 독자가 『金希宣 의원의 부친 金一鍊씨는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아니라 親日한 사람』이라는 내용을 제보한 것이다. 그는 광복 이전 金一鍊씨의 행적을 이렇게 들려줬다.
<金一鍊(김일련ㆍ1919~1954?)씨는 광복 전 만주 柳河에서 살았다. 金一鍊은 柳河경찰서에서 형사로 근무했다. 金一鍊은 독립운동가를 색출해서 취조했고, 그 과정에서 때리는 등 고문을 했다. 동족끼리 취조하다 보니 때로는 감정이 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취조한 독립운동가들에게서 욕을 먹고 분을 삭이지 못했다고 한다. 고문하고 돌아온 날이면 그의 妻 趙仁淑(조인숙)에게 『힘들어서 못 해 먹겠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金希宣 의원은 총선기간을 비롯, 자신의 부친 金一鍊씨를 독립운동가로 소개해 왔다. 특히 金의원은 지난 7월 독립군 가계 의혹이 제기되자, 『저에 대한 의문제기의 시기가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이 추진되는 시점이라는 점과, 軍 일부의 냉전시대 대결주의적 사고를 지적한 직후에 나온 의문제기라는 점에서 의아심을 갖게 된다』며 「정치공세」로 일축했었다.
기자는 제보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 9월11일 金學奎 장군의 큰며느리인 田鳳愛 여사를 다시 찾았다. 田여사는 1943년 12월경 魚亮子우급학교(만주 學制로서 초등학교 5~6학년에 해당) 교사로 근무하는 金學奎 장군의 큰아들인 남편 金一鉉을 따라 金一鍊씨가 살던 柳河와 가까운 魚亮子에 살았었다. 田여사는 친정인 四平省(사평성) 山城鎭에 다니러 갔다오는 길에 柳河에 있는 金一鍊 댁을 들르곤 했기 때문에, 제보 내용을 확인해 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田여사는 기자가 제보받은 내용을 확인하자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柳河경찰서에서 근무한 것이 사실』이냐고 묻자 田여사는 수긍했다.
田여사는 『우리 가족이 魚亮子에 이사를 오니까 金一鍊씨는 柳河에 살고 있었다』며 『柳河는 내가 살던 魚亮子와 내 친정인 山城鎭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고, 친정에 다니러 갔다 오는 길에 柳河에 있는 金一鍊씨 집에 들렀던 것』이라고 했다.
『金一鍊씨는 아들(철수, 사망) 하나와 딸 金希宣이와 네 식구가 단칸방에 살고 있더군요. 그래서 하룻밤 묵지도 못하고 그냥 魚亮子로 돌아왔습니다』
柳河縣은 3·1 운동 이후 독립군 기지인 三源堡(삼원보)가 생기는 등 西間島(서간도)의 독립운동 거점이었다. 耕學社(경학사)·扶民團(부민단) 등 30여 개의 韓人 자치기구·독립운동기관이 설치돼 있었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新興武官學校(신흥무관학교)도 있었다. 이에 놀란 日帝는 중국 현지의 괴뢰국인 萬洲國을 통해 독립운동을 탄압했다.
田여사는 『郡(군)에 해당하는 군청소재지인 柳河에 경찰서가 있었고, 山城鎭, 魚亮子 등에도 경찰서가 있었다』면서 『당시 柳河에서 독립운동가들이 경찰에 잡혀가는 것을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金一鉉도 金一鍊이 경찰이란 사실을 알았다
―日帝下 만주국 형사라면 도둑 등 잡범을 잡는 형사도 일 수도 있고, 독립군 등 사상범을 잡는 고등계 형사(特高)일 수도 있습니다. 직책에 대해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경찰 직책을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金一鍊씨가 제복 입은 것은 못 봤고, 사복을 입은 것만 봤습니다. 그러니 고등계인지 일반계인지 모르지요』
―金一鍊씨와 부인 趙仁淑씨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金一鍊씨는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좋았어요. 趙仁淑씨는 명랑한 성격에 잘 웃곤 했어요』
―제가 받은 제보 내용은 金一鍊씨가 취조를 하는 과정에서 고문을 하고 나면, 집에 돌아와 감정이 북받쳐 분을 삭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同族(동족)이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수도 있고요. 그리고 부인 趙仁淑씨에게 『힘들어서 못 해 먹겠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들은 적이 있습니까.
『金希宣 의원 어머니에게서 들었습니다. 趙仁淑씨에게 「요즘 어떻게 사냐」고 하니까, 「요사이 남편이 (일 때문에) 집에 들어올 시간이 없다」고 하더군요』
―남편 金一鉉씨는 형님뻘인 金一鍊씨가 만주국 柳河 경찰서에서 형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알지요! 그건 그 주위에 흩어져 살았던 金希宣 의원의 삼촌들도 다 알 겁니다』
―金希宣 의원 주장에 따르면, 金學奎 장군이 독립운동을 할 때 吳光心 여사가 서너 달에 한 번씩 金의원의 조부인 金成範씨(魚亮子 거주)를 찾아와 독립운동 자금을 받아갔다고 합니다. 그때 그의 아들 一鍊씨도 아버지인 金成範씨가 독립운동 자금 대주는 것을 거들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을 했다면 경찰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독립운동 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시요』
金希宣 의원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金學奎 장군은 金希宣 의원의 부친 金一鍊씨를 광복 후 韓獨黨 청년비밀당원으로 가입시키고, 一鍊씨가 29세 되던 1949년 金九 선생으로부터 정보수집 密命(밀명)을 받고 동료 4명과 주임책임자의 임무를 띠고 중국 大連(대련)으로 떠났다. 그후 1954년 시베리아 벨호얀스크 감옥으로부터 「오영일」이라는 사람 명의로 한 통의 엽서가 서울 동대문구 숭인동 81번지(일명 숭인장)에 있는 金의원 모친 앞으로 배달됐다. 독립운동 때문에 아버지가 행방불명되고 그때문에 어머니가 再婚(재혼)했다. 그래서 우리 남매들이 불행하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金希宣 의원 집안과 가까운 익명의 증언자는 이렇게 말했다.
『日本이 패망하고 광복되자 金一鍊씨는 할 일이 없어져 남한으로 내려왔고, 장사에 뛰어들었어요. 1949년 그는 배에 물건을 잔뜩 싣고 여러 사람과 함께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고 합니다. 그후 金一鍊은 러시아에서 납치돼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이에게서 왔다는 엽서도 「못 돌아올 것 같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해요』
金의원의 모친 趙仁淑(조인숙ㆍ1921~작고)씨는 1953년 황해도 신계군 적여면장을 지낸 張光鐵(장광철ㆍ작고)씨와 재혼, 3남1녀를 낳았다고 한다.
한편, 金希宣 의원이 「金學奎 장군이 부친 金一鍊씨를 韓獨黨 비밀청년당원으로 가입시켰다」고 주장하는 것과 관련, 金學奎 장군(당시 조직부장)은 白凡 金九 선생 암살 직후, 安斗熙(안두희)를 韓獨黨 비밀당원으로 입당시켰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으면서 『韓獨黨에 비밀 당원은 없다』고 증언했다.
金希宣 의원 측은 지난 8월19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최근 한나라당 고발과 언론보도에 대한 金希宣 의원의 입장」을 밝혔다.
金의원은 『저는 지난 4년 국회의원이 된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역사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 열심히 달려왔다』면서 『저는 최근 「아니면 말고」 식으로 악성루머를 생성하여 제 도덕성에 흠집을 냄으로써, 親日 역사청산을 비롯한 민족정기 활동을 폄하시키려는 일부 세력들의 비열한 정치공세에 대해 우리 국민과 역사가 반드시 단죄할 것이라 확신한다』고 했다.
金의원은 『앞으로도 독립운동 가문의 자부심과 의연함을 잃지 않고 이 시대정신에 맞는 역사 바로 세우기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덧붙였다.●
⊙ 金希宣 의원의 「아버지의 독립운동」 관련 주장 내용
▲<1930년 초반 조부(金成範)와 조모(吳炳熙)는 독립군 자금을 모아 3개월에 한 번씩 방문하는 작은조모(吳光心: 金學奎의 처)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제 부친인 一鍊도 그일을 도왔다.
1937~1938년경 金成範은 독립군 자금책인 것이 발각되어 일본군 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집에 돌아온 후 앓다가 곧 사망했다고 한다. 이후 작은조부 金學奎는 형수 吳炳熙와 조카들을 돌보았고, 조카들(일선, 일신, 일련)에게 독립운동을 시켰다고 한다(홈페이지)>
▲<독립군 집안의 딸, 김희선. 할아버지 김성범 장로는 독립군 선임 자금책, 작은 할아버지 김학규 장군은 독립군 제3지대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또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한독당 비밀청년당원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 김일련. 그는 김구 선생의 명으로 중국 천진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결국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 아버지가 벨호얀스크 감옥에서 보낸 엽서 한 장. 결국 이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인연이 되었지만, 그 엽서 한 장은 김희선 의원이 어린 시절 월남하여 동대문에서 힘겹게 성장하면서도 항상 꿋꿋하게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해 준 마음의 등불입니다(17代 총선 홍보물)>
▲<1954년. 감옥의 소인이 찍힌 엽서가 내게 날아들었다. 어머니가 재가하고 난 뒤 셋째 작은아버지 댁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을 즈음이었다. 발신지는 러시아 벨호얀스크 감옥. 지금의 엽서 크기만 한 누런 엽서였다. 푸르스름한 빛이 나는 둥근 소인이 네 군데나 찍힌 걸로 보아 소련에서부터 서울로 돌아 내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아버지의 엽서를 나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이 엽서야말로 아버지가 나와 내 가족에게 남겨준 유일한 유산이다. 어머니는 늘 그 엽서를 보고 싶어했지만 눈을 감는 순간까지 나는 보여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가슴 깊숙이 비워놓은 그 자리를 나는 끝내 모른 체했다. 천당에선 잊으시라고. 어머니 당신 가슴에 고이 묻고 가시라고.
아버지. 애석하게도 내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질 않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아버지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나를 낳았다고는 하지만 정작 나는 아버지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하셨는지 조금도 아는 게 없다.
아버지가 마련해 주었다는 쌍림동 집에서 아버지는 어느 날 먼 길을 떠나셨다. 어린 나로서는 아버지가 어디를, 무슨 일로 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즈음은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종종 그 엽서를 꺼내놓고 바라보곤 했다. 45년이라는 반세기를 지나오는 동안 그 엽서도 세월의 무게가 덕지덕지 앉아 누렇게 바래 있었다.
「사랑하는 당신」으로 시작하는 짧은 글. 아버지가 감옥에서 쓴 글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모른다. 아버지가 왜 낯선 소련 땅 감옥에 갇혀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지를.
해방이 되고 남쪽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한독당 청년 당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당시에 함께 활동했다는 분과 어머니 생전에 들은 말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 아버지는 한독당 당수였던 金九 선생님으로부터 모종의 임무를 받았다. 金九 선생님이 암살되기 전이었다. 아버지는 도자기 장수를 가장하여 인천에서 배를 타고 천진으로 갔다고 한다.
어머니에게는 넉넉잡아 두 달이면 돌아온다고는 약속을 굳게 했단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고 아들이 죽고 온 식구가 배를 곯아도 아버지로부터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너무나도 간단한 이 이야기가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전부다.
연년생 남매, 또 하나의 자식을 잉태하고 있던 27세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두 달만 참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며 떠난 29세 청년이었던 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떠났다는 한독당 조직부 청년당원 5명 역시 영영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은 金九 선생님뿐이다. 하지만 그분마저 없는 이 세상 천지에서는 더 이상 물어볼 데가 없다. 우리 가족은 아무런 해명도 받지 못한 채 아버지를 역사 속에 묻어 버린 것이다.
민족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식민지 역사는 우리 가족, 또 나 같은 어린아이의 인생마저 거친 폭풍 속으로 밀어넣어버린 것이었다. 단지 그 짧은 내용이 담긴 엽서에서 추측할 뿐이다. 「…나는 당신의 온전한 사람이 되려 하고…」 독립이다, 통일운동이다 하면서 멀리 떠나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남긴 이 한마디는 죽음을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아닌가 싶다. 우리 집안 어른들은 이미 오래 전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두 번 정도 아버지 같은 분이 소련 어디에 살아 계신다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는 여전히 묻혀 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동요들을 잘 가르쳐 주었다. 아직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동요들은 모두 그 시절 어머니에게 배운 것이다. 「따오기」, 「뜸북새」, 「혁명가의 노래」를 부르며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어머니. 이제 당신의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말한 아버지가 만약 고인이 되었다면 천당에서나마 두 분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홈페이지)>●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첫댓글 한심한 김희선씨! 역사가 당신을 심판할 것 입니다.친일청산 자격도 없는 신분으로 뭘 하겠다는 건지...친공청산부터 해야겠네여...
고생하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