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국운을 번성하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불교는 국가의 행정 조직에도 한몫을 차지하게 되어, 승관 제도가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고려 태조는 왕이 스승인 국사 제도를 설치하고 승려를 국정에 참여시켰다. 또한 중국의 과거제도를 모방하여, 선종은「선문염송」10권을 암송해야 하고, 교종은 「화엄경」 및 「십지론」1권을 암송하지 못하면 합격하지 못했다.
계급도 정해져 있었는데, 선종은 대선, 대덕, 대사, 중대사, 삼대사사. 선사, 대선사가 있었고, 교종은 대선, 대덕, 대사, 중대사, 삼중대사, 수좌, 승통 등이었다.
또 사원은 불력과 법력으로 나라를 수호하는 장소로 되었으며, 만약 국왕에게 세 왕자가 있다면 한 사람은 승려로 만들었을 정도였다. 귀족이나 양반사회에서도 세 자녀가 있으면 그 중의 한 사람은 반드시 승려로 만들었다.
국가에 위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법력으로 국가를 지키기 위한 승병이 되어 전쟁에 참가하였다.
이조의 서산 대사나 사명대사가 출현하게 되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국난을 만났을 때에는 밤낮으로 부처님께 기원하여 법력으로 적국이 항복하기를 원했는데 기원만으로 목적이 달성될 수 없을 때는 최후의 방법으로 대장경을 조인하였다. 고려 현종 때 거란이 침입하여 사원과 불상을 모두 파괴했는데, 적국을 격퇴시키는 기원을 주입해서 만들어진 것이 대장경판이었다.
송나라에서 인쇄한 대장경을 기본으로 하여, 현종 2년부터 10년 동안 5천 48권에 달하는 대장경을 완성시켜서 개성에 있는 절에 보관하였다. 과연 대장경이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현종 10년에 거란은 망하고 다시 국난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 후의 몽고군은 거란군 에게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막강하였다. 몽고군은 부인사에 보관된 대장경을 불사르고 한반도 북부를 유린했는데. 이러한 몽고군의 공격을 받은 고종은 겨우 난을 피해서 강화도로 내려갔다.
여기서, 고종은 현종 때 쳐들어 온 거란도 대장경판을 만들었기 때문에 물리칠 수 있었던 사실을 알고, 이번에도 대장경판을 만들어 그 공덕으로 적을 격퇴시켜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도모하려고 결심하고 또 다시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서고 대장경을 만들었다.
두 번째 대장경은 전자보다도 1천 4백 81권을 더 만들어 총 6천 5백 29권의 대장경을 완성시켰다.
한 자를 만들 때마다 한번씩 절을 하는 어려운 일을 거듭하면서, 적국이 항복할 것을 기원하며 조조한 것이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문화재로 인정되어 현재 해인사 장격각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