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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75)
[자결은 자살바위에서 하는 거야]
조상을 모시는 데에 있어서는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상관없이 언제나 정성을 다한다. 아니 못 가진 자들보다는 오히려 가진 자들이 더 지극 정성을 다해 조상을 모신다.
특히 돌아가신 조상을 기리는 제사는 가장 경건하고 정중하게 치러지며 날짜를 절대 어기지 않는다. 오늘날 자신의 위치가 조상의 음덕에서 나왔다고 믿고, 그 음덕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북쪽을 향해 정신없이 몸을 날리고 있던 위지천악 또한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북천 위지세가에서 시작하여 북황련을 만들고, 다시 통천연맹을 결성하기까지 성공 가도를 달려온 이유를 조상 덕이라 여겼다.
전쟁의 와중이라 직접 가 보지는 못하지만 수하를 시켜 최대한으로 제사를 모시라고 지시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명령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갔던 부하는 다음날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하는 말이라니.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였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부하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통천연맹을 뛰쳐나온 위지천악은 전 내공을 끌어올려 북으로 길을 잡았다.
강호 무림의 패자가 되기 전까지는 가족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을 작정이었고, 몇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이 공격을 당했다니.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제발.......!”
위지천악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장성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불안감이 커졌다. 저 멀리 보이는 장성을 넘으면 홍유하가 나오고, 그 홍유하 주변 낙성이란 마을이 바로 두 번째 고향으로 정했던 곳이다.
북천위지세가인들 중 무공을 모르는 이백여 가솔들이 낙성에 살고 있다. 부모님 두 분과 아들인 소령의 무덤도 그곳에 묻었다. 그런데 그곳이 공격을 당했다는 것이다.
아니 그들보다 더욱 중요한 사람은 부인이다. 소령을 낳을 때 잘못되어 무공을 상실한 채 중원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무공이 없는 가솔들을 돌보고 있다. 위지천악이 걱정하는 사람은 바로 부인이었다.
“장성이다!”
눈앞으로 다가온 장성을 훌쩍 뛰어넘은 위지천악은 연신 바닥을 차며 몸을 날렸다.
그가 낙성에 도착한 시각은 장성을 넘은 지 한 시진 후였다.
“설마.......”
위지천악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백여 장 앞에 있는 산모퉁이만 돌아가면 마을이 나온다. 그런데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동네면 당연히 들려야 할 개 짖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고, 생기조차 없었다.
“제발.”
해쓱해진 얼굴로 위지천악은 한 걸음 한 걸음 산모퉁이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백여 장 거리는 너무 가까웠다. 어느덧 십 장 밖에 남지 않았다. 위지천악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부하의 말이 점점 확신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행여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전 내공을 귀로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산모퉁이를 돌았다.
“여보!”
전면을 쳐다보던 위지천악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부하의 말은 한 치 틀림도 없었다. 오십여 채 건물이 들어서 있던 낙성에는, 부하의 말처럼 아무 것도 없었다. 본래부터 마을이 없었던 것처럼 휑했다.
“여보!”
벌떡 일어선 위지천악은 낙성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마음이 바빠서였을까. 걸음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달음질로 변했고, 이내 경공술로 변했다. 가공할 속도로 나아가던 위지천악의 신형이 이윽고 마을 입구에 멈춰 섰다.
순간 맥이 탁 풀렸다. 마을은 어둠에 휩싸인 듯 천지가 검었다. 무너진 건물이 검었고, 땅마저 새까맸다.
“독이란 말이냐?”
온 마을을 덮고 있는 냄새의 정체는 독향(毒香)이었다. 땅으로 스며든 독 기운이 조금씩 퍼져 나가며 마을전체를 독지대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게 낙성의 모습이란 말인가, 이게.”
위지천악은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었다. 낙성에는 많은 것들이 남아 있었다. 팔만 남은 시체가 있었고, 몸통만 남은 시체가 있었다. 뼈만 남은 시체들이 있었고, 온전한 시체들도 있었다.
그리고.
“여보!”
마을 중앙까지 들어온 위지천악은 머리 하나를 발견하고는 급기야 오열을 토해냈다. 머리만 남아 있는 시체의 주인은 부인이었다.
“내 잘못이오. 내 잘못이란 말이오. 당신을 이곳에 두는 게 아니었소. 당신을 이곳에 두는 게 아니었소. 당신을.......”
머리를 부둥켜안고 위지천악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약점으로 작용할까 봐 중원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차라리 중원으로 데려가 같이 살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중원으로 데려갔더라면!
그 자리에 주저앉은 위지천악은 부인의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당신 말을 들을 걸 그랬소. 중원을 정복하면 뭐할 거냐는 당신 말을 말이오.”
아들인 소령이 죽었을 때였다. 소령의 시신을 들고 고향을 찾았을 때 그녀는 울부짖었다. 자식을 죽이고 중원을 얻은들 무슨 소용이 있냐며. 다 죽고 혼자만 남아서 중원의 주인이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원망을 퍼부었다.
그때 그렇게 말했었다. 할아버지가 그랬고, 아버지가 그랬기에 당연히 해야 한다고. 중원을 정복하는 것으로 소령의 영혼을 위로하겠노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랬었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니 혼자만 남은 것이다.
부인의 머리를 안은 채 밤을 지새운 위지천악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은 해거름 녘이었다.
“들어오너라!”
마을 입구를 쳐다보며 위지천악은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엿보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북천 위지세가 총관을 맡고 있는 가정인과 나란히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양천리였다.
“완전한 몸이 되어 맹에 들렸는데 맹주님이 뛰쳐나갔다고 하여 걱정이 돼서 따라 왔습니다.”
“쿡! 걱정이라.......”
양천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위지천악은 이내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묻겠다. 낙성을 이 지경으로 만들 만한 독이 조재하리라 생각하느냐?”
“독은 모르겠고, 독공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양천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태연스런 얼굴은 하고 있었지만 그의 심장은 무섭게 뛰었다. 결코 앞에 있는 위지천악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낙성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 자신이란 사실을 그가 알아차린다면 이곳에서 없애버리면 된다. 문제는 그를 따르고 있는 북천위지세가의 병력이다. 위지천악보다는 그들을 잃게 되는 게 더 큰 손실인 것이다.
“앙천마마묵독공을 말하는 것이더냐?”
그런 양천리를 빤히 쳐다보며 위지천악은 재차 물었다.
“그렇습니다, 맹주님.”
“그럼 내 집을 이렇게 만든 자는 천붕십일천마겠구나.”
왜 이리 머리가 맑아지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흥분해야 하건만, 분노해서 길길이 날뛰어야 하건만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고 있다. 다만 누군가를 찢어죽이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가공하군.’
양천리의 발이 지면을 뚫고 들어갔다. 내공을 끌어올리고자 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위지천악의 몸에서 흘러나온 살기에 몸이 저절로 반응하여 나타난 현상이었다.
“독마 전영의 위치를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내심과는 달리 양천리는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대를 이어 중원 정복을 원했던 가문이 북천위지세가고, 자식의 죽음마저도 이용했던 자가 바로 위지천악이다.
위지천악은 결코 북천위지세가를 버리지 못한다는 확신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럼 나는 그놈을 찾아가서 복수를 해야겠구나.”
위지천악 역시 태연한 얼굴로 양천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명령을 내리시면 불사삼요를 데리고 가서 잡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불사삼요라....... 불사삼요는 아껴 두도록 해라. 놈은 어디 있느냐?”
한동안 양천리의 얼굴을 쳐다보던 위지천악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지금 사천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놈 말고 귀광두 말이다.”
“귀광두는 장강삼협 근처에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랬군.”
위지천악은 다시 한 번 낙성을 쳐다보았다. 머리에 새기기라도 하듯 검게 변한 마을을 꼼꼼히 살펴보다가 마을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양천리!”
한참 동안 마을을 주시하던 위지천악은 대뜸 양천리를 불렀다.
“하명하십시오.”
“강호를 정복하려면 두 가지를 명심해라. 절대 가족을 두지 말 것이며, 장차 적이 될 조짐이 보이는 자는 크기 전에 목을 잘라라.”
그 말을 끝으로 위지천악의 신형은 산모퉁이를 돌아 멀어졌다.
“쿡! 그래서 당신을 존경하는지도 모르오. 아니 당신을 존경하오이다. 북천위지세가의 명맥은 반드시 이어주겠소, 맹주.”
위지천악이 사라진 자리를 향해 양천리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자결을 택했다. 제갈승후와 자신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그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아니 사실을 알면 자신만 초라해지기 때문이리라. 그는 복수보다는 명예를 택한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귀광두와의 싸움에서 승패에 관계없이 그는 죽는다는 것이다. 귀광두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자결을 해서라도.
‘이제 남효운만 정리하면 끝나겠군.’
“가정인 들었느냐?”
양천리는 망연한 얼굴로 서있는 가정인을 불렀다.
“네, 련주님.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이십 년 총관 생활을 증명이라도 하듯 가정인은 눈치가 빨랐다. 위지천악이 양천리에게 북천위지세가를 넘겼다는 사실을 대화를 통해 알아차렸다.
“난, 태상가주님이 하고자 했던 일을 반드시 이룰 것이다.”
“신명을 다하겠습니다.”
“좋다. 그만 돌아가자.”
가정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양천리는 마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딸랑딸랑!
양천리의 움직임에 맞춰 멀리서 나직한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흑사령이군.’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이한 울림에 가장인은 내심 중얼거렸다. 불사삼요의 하나인 흑사인(黑邪人)의 흑사령(黑邪鈴)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양천리는 이곳에 흑사인을 대동하고 왔던 것이다.
그 참에 가정인의 귓전으로 양천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라! 장강 전쟁에 대비하려면 바쁘다.”
“알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가정인은 몸을 날려 양천리 뒤를 따랐다.
다음날, 통천연맹에 도착한 양천리 앞에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통천연맹 전체로 볼 때는 침통한 소식이었지만 양천리나 제갈승후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희소식이었다.
남효운의 죽음이 그것이었다.
장강을 따라 남경으로 향했던 남효운이 시체가 되었다고 하였다.
“너무 쉽게 얻은 것 같아 찜찜하구먼.”
하늘로 통하는 곳이라 하여 통천전(通天殿)이란 이름을 얻은 맹주전. 양천리는 안으로 들어서는 제갈승후를 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니외다, 맹주님. 쉽게 얻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시운과 노력이 따라야만 일은 성사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갈승후는 머리를 조아렸다.
“날....... 단독 맹주로 세울 참인가?”
양천리는 화들짝 놀랐다. 맹주님이란 호칭 때문이었다. 제갈승후가 순순히 맹주라 부를 줄은 몰랐다.
지금껏 이인 맹주 체제로 이끌어온 통천연맹이었기에 그 또한 맹주자리를 원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일에 대해 논의하고자 제갈승후를 불렀는데 그가 순순히 굽히고 나온 것이다.
문득 클 조짐이 보이는 자는 크기 전에 목을 자르라고 하였던 위지천악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추슬렀다.
아직은 같이 가야 할 동지인 것이다. 적어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급변하는 양천리를 가만히 쳐다보던 제갈승후는 재차 고개를 숙였다.
“전쟁이 끝나고 무림을 얻게 되면 과거 북황련이 있던 곳을 제게 주시면 기꺼이 받겠습니다, 맹주님.”
“쿡! 거절하지 못하게 하는구먼. 그보다는 이 전쟁에서 승리가 먼저 아닌가, 앉게. 가정인, 차를 내오너라. 아니다 술을 가져와라!”
자리를 권한 양천리는 밖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볼수록 놀랍군.’
제갈승후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태상맹주께서 북천위지세가를 부탁한 모양입니다.”
떠보고자 던진 질문이었다. 지금까지 겪어 본 바로는 위지천악 또한 머리가 나쁜 자가 결코 아니었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양천리와 자신이 주범이란 사실을 알아차렸을 터이고, 잘만 하면 두 사람이 동귀어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했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돌아온 양천리가 가정인에게 하대를 하고 있다. 자신이 모르는 일이 일어났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다네. 반드시 천하제일가문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네. 그리고, 당신은 귀광두를 찾아간다고 하셨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바로 그라며.”
[동귀어진이 가능하겠습니까?]
가정인의 귀를 의식한 제갈승후는 전음으로 물었다. 귀광두와 함께 동귀어진을 해 준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을 듯했다.
[글쎄, 귀광두의 실력을 정확하게 모르니까 알 수 없지.]
양천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장강 전쟁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 그걸 논의해야 할 때네. 북경 돌아가는 상황도 그렇고, 넋 놓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양천리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귀광두 사건의 주역이었던 두 사람이 제거되었으니 어느 정도 책임은 면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완전하게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황실에게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이할 길은 강호를 정복한 상태에서 그들과 협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줄 건 주고 얻을 건 얻어내야 한다.
“사천 지부에 있는 식량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대답 대신 제갈승후는 사천 지부에 대한 일을 물었다. 우선은 그곳을 확실하게 알아야 차후 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식량은 두고 왔네. 무극계 무인들도 먹어야 사령계를 견제해 줄 거 아닌가.”
“잘하셨습니다.”
제갈승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출병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큰 변수는 다름 아닌 사령계다. 만일 출병한 상황에서 사령계가 사천을 넘어 섬서성으로 진격해 온다면 그들을 막을 방도가 없다.
사령계를 막아 줄 세력으로 무극계를 택한 것이다.
“그럼 출병을 해야지요. 하지만 우리 통천연맹 목표는 광풍성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그래서 불사삼살과 불사삼요, 북천지옥대의 남은 병력을 전부 출병시킬 걸세.”
“그런데, 불사삼강은 조종할 수 없습니까?”
예전부터 묻고 싶은 말이었다. 요왕은 불사삼괴의 수장이라 하였으니 사령계에서 보유한 불사삼강도 그의 조종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양천리는 불사삼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게 미지수네. 불사삼요나 불사삼살과는 달리 불사삼강은 변형이 되어 버렸거든.”
“안타깝게 됐군요. 불사삼강에게 제혼영매대법이 먹힌다면 전쟁을 쉽게 끌고 갈 수 있었을 텐데.”
제갈승후는 입맛을 다셨다. 만일 불사삼강에게도 제혼영매대법이 통하여, 양천리나 제군 또는 대법을 익힌 자들이 조정할 수 있다면 적의 심장부에 아군을 심어둔 경우가 된다.
다시없는 기회를 놓치는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었다.
“사령계 또한 불사삼강을 출병시켰을 테니까 이번에 시험을 해 보면 알겠지.”
양천리는 모호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직은 자네가 정비하도록 하게.”
“설마 출병을 하시겠다는 말입니까.”
제갈승후는 놀란 얼굴로 양천리를 쳐다보았다.
“그래야 하지 않겠나. 아마 사령계의 뇌우는 무극계를 거쳐 이곳으로 올 걸세. 자네는 남아서 그를 막아 내며 최대한 시간을 끌게.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맹주님!”
제갈승후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곳에 최소한의 병력을 남길 터이고, 제갈세가의 진과 그 병력으로 사령계의 전력을 줄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장강에 있는 적들은 전부 없앤 다음 운남으로 진격할 걸세. 그때 운남에서 만나도록 하세.”
“출병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맹주님.”
고개를 숙인 제갈승후는 통천전을 나갔다. 그런 제갈승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양천리는 낮게 중얼거렸다.
“불사삼강을 조종할 수 있냐고 물었는가? 가능할 거네. 아니 가능할 수밖에 없네. 왜냐면 불사삼괴(不死三怪)의 지배자인 요왕(妖王)이기 때문이네.”
양천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동료이고 부하가 되었지만 전부를 알려 줄 필요는 없다. 그 비밀이 때로는 목숨을 지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풍도(豊都)에서 나흘을 보낸 백산 일행은 천천히 하행하여 항구도시인 만현(萬縣)에 도착했다. 어느새 중경에서 팔백 리를 내려온 것이다.
“저기 만현 북쪽에 보이는 산이 삼국시대 유비가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천성산(天城山)이고요, 서쪽에는 이백이 독서를 즐겼다는 태백암.......”
주하연은 슬며시 말끝을 흐렸다. 백산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공연히 그 앞에서 지식 자랑을 한 것 같아 괜스레 미안했다.
“유비는 어떤 사람이지?”
“어?”
느닷없는 물음에 주하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알고 싶어요?”
주하연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백산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 하는 게 처음이었던 탓이었다.
“알아서 나쁠 건 없잖아. 많이 알면 좋은 거라며.”
백산은 멋쩍게 웃었다. 무식은 결코 자랑이 아니라는 생각을 부쩍 하는 중이다. 어쩌면 주하연 뱃속에 있는 소령 때문인지도 모른다. 좀 더 배웠더라면,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요, 많이 알아서 손해나는 건 없어요. 오히려 모르면 당하는 게 세상이지요. 우리 저쪽으로 앉아요. 차라도 마시면서 천천히 이야기해요.”
오른편에 서 있던 설련이 빙긋 웃으며 두 사람을 이끌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중원호 갑판에 자리를 잡았다.
유몽이 차를 내오자 설련은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한나라가 멸망하고 중원은 수많은 인물들로 넘쳐났어요. 저마다 나라를 세우고 서로 중원의 주인이 되고자 했지요. 그때를 삼국시대라고 하는데 그 당시 사천에 나라를 세웠던 영웅이 유비였어요.”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유비, 관우, 장비. 이 사람들에 대한 전설은 중원 전역에 널렸잖아.”
백산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관우나 장비에 대한 전설은 너무나도 유명하여 어린 시절에 많이 들었다. 중원 이곳저곳 널린 관제묘가 바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라고 하였다.
“맞아요. 그런데 그 유비가 세웠던 촉(蜀)나라가 바로 사천이었어요. 유비는 우리가 가고 있는 장강을 통해 중원 정복을 시도했고요.”
“그래? 그럼 그 사람 성공한 거야?”
장강삼협, 앞으로 적과 전쟁이 치러질 장소다. 그런데 천오백 년 전에, 이곳에서 중원을 놓고 전쟁을 치른 사람들이 있었다니 흥미롭기 그지없었다.
“아뇨, 실패했어요.”
“왜? 전설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잖아.”
백산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전설로 회자될 정도로 유명한 사람들이면 당연히 성공했으리라 여겼던 탓이다.
“글쎄요. 거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제 생각에는 제갈공명의 나이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아! 병서보검협!”
하류로 눈을 돌리던 백산은 낮게 소리쳤다. 한수 형님의 묘소를 만들어 주었던 병서보검협은 제갈공명과 관련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맞아요, 삼국시대의 유명한 지장이지요. 무리한 북벌을 하다가 결국 오장원에서 죽음을 당하지요. 그의 죽음은 곧 촉의 멸망을 불렀고요.”
“나이가 아니고 욕심이었겠지.”
백산은 단정 짓듯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사천은 최고의 조건을 갖춘 곳이잖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기름진 땅이 지천이고. 더구나 외부에서 사천으로 들어가는 길은 이곳밖에 없다며.”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나이 때문이라고. 죽기 전에 무엇인가 이루어 놓겠다는 그런 생각.”
설련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백산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산의 말처럼 사천에 안주했더라면 촉은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제갈공명은 북벌을 감행했다.
결국 그 북벌로 인하여 촉은 멸망의 길을 걷고 말았다.
“우린 성공할 거야. 사천이 근거지도 아니고, 난 죽으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백산은 누런 황토 빛 강물을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장강, 중원의 젖줄인 이곳에서 천하를 거머쥘 것이다. 그리고 태어나는 소령에게 중원을 물려 줄 것이다.
“참! 언제 내려갈 거냐?”
고개를 돌린 백산은 주하연에게 물었다. 그녀는 만현에서도 쉬이 떠날 눈치를 보이지 않는다. 아마 중원 각지를 떠난 동생들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터이다.
“다음 목적지인 봉절(奉節)까지 이틀에 걸쳐 내려가게 될 거예요. 그때부터 오빠는 수시로 배에 오르내려야 해요. 지금은 푹 쉬어 두세요.”
“그래야겠지? 들어가자.”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백산은 선실로 향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 배에 있는 이들을 돌봐야 하고, 하선하여 적을 도륙해야 한다.
그때까지는 편히 쉴 작정이었다.
선실은 단촐했다. 조그마한 탁자와 세 개의 의자, 그리고 두 개의 침상이 다였다.
넓은 침상에서는 주하연과 설련이 자고, 좁은 침상이 백산의 자리다. 선실 안으로 들어선 백산은 침상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모처럼만에 쉬려고 했던 그의 시도는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만현 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가 잠이 든 지 한 시진 정도 지난 후였다.
“귀광두!”
“얼레? 저거 날 부르는 거 맞지?”
화들짝 잠이 깬 백산은 의아한 얼굴로 창밖을 쳐다보았다. 전쟁을 하기도 전에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더구나 귀광두란 고함 소리는 온통 살기로 가득했다.
“오빠!”
고함 소리에 놀라 일어났던 주하연 역시 백산과 같은 생각이었다. 백산을 부른다는 것은 상대 또한 상당한 고수라는 말이다. 목소리에 저 정도 살기를 실어 보낼 정도의 무인은 각 세력의 수뇌들밖에 없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광두!”
“많이 들어본 목소리 같은데.......”
설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진득한 살기가 섞여 있는 목소리는 분명 아는 사람이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설련은 고개를 홱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몸에서 미약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살기였다.
“위지천악이에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설련은 소리쳤다. 가문을 멸문시킨 자의 아버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놈은 자식을 두둔했다. 그자가 찾아온 것이다.
“이상하군. 그놈이 왜 자실을 하려고 하지?”
설련의 말에 놀란 백산은 주하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놈이 찾아올 이유가 없다. 전쟁의 막바지에서나 볼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놈이었다. 그런데 직접 찾아오다니.
“훗! 멋진 표현이네요.”
자살이란 말에 주하연은 낮게 웃었다. 그녀뿐만 아니었다. 살기를 흘리던 설련마저도 피식 웃었다. 백산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던 탓이다. 자실을 하기 직전 만났던 그날.
“사람 무시하지 마, 임마. 나도 가끔 멋진 말도 한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죽일 거야. 설련이나 구양중은 날 만나 살아났지만 저놈은 안 되겠어. 가자!”
선실 문을 열며 백산은 채근하듯 말했다.
“.......아니에요. 백랑만 다녀오세요. 전 이곳에 있을 게요.”
설련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와서 그의 죽음을 본들 아버지나 가족들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고, 현재에 충실하기로 했다. 지금은 형님으로서 주하연을 돌보는 게 제 몫인 것이다.
“같이 가야 해. 난 너희 둘 두고는 아무 데도 못 가. 준비하고 나와.”
“누가 들으면 의처증 환자라고 하겠어요.”
침상에서 내려오며 주하연은 밖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주하연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과거 때문이란 걸 알지만, 백산이 저런 말을 해줄 때면 기분이 좋다.
누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란 것처럼 좋은 게 또 있을까.
“언니 가요!”
“그래.”
마지못한 듯 설련은 주하연과 나란히 선실을 나섰다.
벌써 노잡이들에게 지시를 내렸는지 중원호는 선착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잠시 후 선착장에 도착한 일행은 배를 내렸다.
철웅과 잠시 실랑이가 있었으나 그는 혈뇌문 문도들과 함께 중원호에 남아 있기로 했다.
“귀광두!”
“자식 급하기는. 자는 사람들 다 깨우겠네.”
또다시 위지천악의 고함 소리가 들려오자 백산은 천성산을 쳐다보며 툴툴거렸다. 고함 소리의 진원지가 천성산이었던 것이다.
“급한 모양이다, 빨리 가자.”
주하연과 설련의 손을 잡은 백산은 위지천악이 있는 천성산을 향해 몸을 날렸다.
외침은 비단 위지천악만 내지르는 게 아니었다.
대설산 동쪽 끝 노정에 있는 통천연맹 사천지부에서도 고함을 내지르는 자가 있었다.
“천붕(天崩), 네 이놈들을!”
순우혁로의 몸에서 진저리치는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아들에 이어 부모님들까지 살해를 당하고 말았다.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아들과 부모님을 동시에 잃은 것이다.
부하로부터 수급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순우혁로는 하늘에 감사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를 각오로 왔던 통천연맹 사천 지부는 빈집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식량 창고에 군량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즐거움은 한순간이었다.
“창천황(槍天皇)과 화천황(火天皇)은 들으시오.”
말없이 부모님의 수급을 쳐다보던 순우혁로의 입이 떨어졌다.
“하명하십시오, 계주!”
백발성성한 노인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청색 도포를 걸친 창천황 담대철(澹臺哲)이고, 대춧빛 장포를 걸친 자는 화천왕이라 불리는 장손천위(長孫天威)였다.
“장강으로 갈 것이요. 준비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잠시 주저하던 담대철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본래 계획이 아니지만 자신 또한 자식을 잃어 보았기에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자식은 물론이고 부모까지 잃은 사람이 아닌가.
“준비하겠습니다.”
하고 담대철은 밖으로 나왔다.
“장강에 대한 자료를 가져와라. 무극계 무인들은 출병준비를 하라.”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린 담대철은 처소로 배정 받은 건물로 향했다.
사령계를 견제하기 위해 식량을 남겨 두었다고 하였던 양천리의 계획이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아직 여름이 오려면 멀었는지 오월이 접어들었으나 바람은 제법 서늘했다. 어쩌면 남쪽을 흐르는 장강 때문인지도 몰랐다.
천성산을 오른 백산이 위지천악을 대한 곳은 널따란 평원이었다.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위지천악 전면 십 장 앞으로 다가간 백산은 차갑게 물었다.
“아느냐? 수천 년간을 숨어산 가문의 비애를 말이다. 우리 북천위지세가가 그랬다. 변변한 무공조차 없었기에 우린 중원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백 년 전에 불사삼괴의 하나인 불사삼살을 얻었다. 그때부터 북천위지세가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위지천악의 공허한 목소리가 낮게 퍼졌다. 춘추전국시대 천가에 속한 가문이었지만 북천위지세가는 무가가 아니었다. 결국 무력을 가진 신가와 천가의 싸움에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운이 좋았는지 가문은 단절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러다 이백 년 전에 얻은 불사삼괴의 하나인 비급을 취했고, 불사삼살을 만드는 방법을 알았다. 그들은 활시라고 불리는 강시였다.
하지만 강시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방법을 찾았다. 북천지옥대, 그들을 통해 불사삼살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장장 백여 년에 걸친 노력으로 오백 구의 불사삼살을 제강했고, 북황련을 세웠다.
아버지를 따라 북황련을 정비하면서 불사삼살에 버금가는 기연을 얻었다. 담한(潭恨)이란 자가 가져온 불연성지에 대한 정보였다.
그는 자신이 익힐 능력이 안 되어 북황련으로 가져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천검무극류를 익히면 한 가지 부탁을 들어 달라고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 받은 지도를 들고 불연성지에 들어 이십 년 연공을 한 끝에 천검무극류를 얻었다.
천검무극류를 얻고 불연성지를 완전하게 파괴시켜 버렸다. 아들인 위지소령에게는 불연성지가 아닌 강호를 물려줄 자신이 생겼던 까닭이었다. 그랬던 꿈이 전부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북황련을 세웠던 게 아니었다. 가족을 위해 그리고 후대를 위해 세운 곳이 북황련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남지 않았다. 중원을 제패했다고 자랑할 부인도 없고, 물려줄 자식도 없다.
“너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게 너 때문이었다고!”
위지천악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놈만 무림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되지 않았을 것이다.
“쿡! 미친놈! 가만있는 날 이용하려고 했던 놈의 입에서 그런 소리를 들을 줄 몰랐구나. 너희들은 항상 그랬다. 구파일방 놈들이 그랬고, 천무맹 놈들이 그랬고, 제천맹 놈들이 그랬다. 그래서 내가 나선 거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
위지천악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백산은 차갑게 소리쳤다. 무슨 마음이 일어 이곳까지 왔는지 알 필요가 없다. 놈이 어떻게 천신가의 무공인 천검무극류를 익혔는지 알 필요가 없다.
어차피 없애려고 했던 놈이기에 이유 불문하고 없애면 되는 것이다.
“흥! 새로운 세상이라 했느냐? 세상을 우습게 보지마라, 귀광두. 세상은 누구 한 사람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차피 너도 나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음모와 모략으로 적을 없앨 터이고,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그런 게 세상이다.”
“그건 나도 잘 알아. 세상을 다스리는 건 쉽지만은 않지.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명나라라는 거대한 단체에는 대항할 생각을 못한다는 거지. 무림을 그렇게 만들 거야.”
“꿈을 꾸고 있구나, 놈.”
“꿈이 아니다, 위지천악. 전부 없애고 새 틀을 짜면 가능하다. 통천연맹을 없애고, 사령계를 없애고, 무극계를 없애면 가능하다. 그걸 가로막는 놈은 전부 없애버릴 거야. 너처럼.”
한 발 앞으로 내딛는 백산의 몸에서 혈기가 노을처럼 번져 나왔다.
“말처럼 할 수 있었다면 나는 벌써 황제가 되어 있을 거다, 놈!”
위지천악의 등에서 튀어나온 검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북천위지세가의 가주지검인 북천검(北天劍)이었다. 검은색 검면을 가진 북천검이 백색 광휘를 뿌리는 광경은 기이했다.
“난, 네놈을 죽이는 데 목숨을 걸었다!”
낮게 소리친 위지천악의 신형이 북천검을 따라 솟구쳐 올랐다. 위지천악의 몸에서 흘러나온 광휘가 사방으로 요동쳤다. 위지천악은 단전의 내공은 물론이고, 생명의 원천인 선천지기까지 끌어올려 버렸다.
쿠우웅!
위지천악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과 주변 대기가 공명하며 기이한 소성이 흘러나왔다.
“공령인가?”
백산은 놀란 눈으로 위지천악을 쳐다보았다. 동생들 외에 공령을 얻은 무인을 처음 보았던 탓이었다.
위지천악은 과거 천신가 가주인 담운천보다 더한 강자였다. 더구나 그는 선천지기까지 뽑아 올린 상태.
‘그냥 도망쳐 버릴까?’
선천지기까지 끌어올린 놈인데 굳이 부딪쳐서 상대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끌면 제풀에 지쳐 죽어갈 놈이 아닌가.
슬쩍 고개를 돌려 설련을 쳐다보았다.
‘쩝! 마누라 땜에 안 되겠네.’
백산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위지천악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복수를 하고 싶은데 참고 있는 표정이 역력하다. 남편으로서 제대로 된 복수를 해 주는 게 도리일 듯싶었다.
“아! 한 가지 말을 안 했다. 네가 죽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내 부인의 가문을 멸문시켰다는 거야. 너도 잘 알 거야. 설가보라고 하는 곳이야. 그런데 가만 생각하니까 네놈은 설가보에 마라엽도가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아닌가?”
계단을 밟고 올라가듯 허공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백산은 물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놈. 이 자리에서 넌 나와 같이 지옥으로 가면 그걸로 되는 거야. 남아 있는 사람에 대해선 신경 쓸 필요 없단 말이다.”
낮게 소리친 위지천악은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가랏! 천검무극류!”
이어 천둥 같은 고함 소리가 천성산 산기슭을 강타했다.
휘리링!
반투명하게 변한 북천검은 휘파람 소리 같은 낮은 소성을 흘렸다. 수십 개의 잔상을 남기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북천검의 모습은 일견 황홀하기까지 했다.
불연성지의 온화한 기운이 검에 서려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온화한 기운 속에 내재되어 있는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십 장 높이에서 북천검이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면에 밭고랑 같은 기다란 고랑이 생겼다.
북천검의 강함은 백산의 모습을 보아도 금세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은 온통 붉은 혈기로 휩싸인 채였다. 백산은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였다.
“타핫!”
새빨간 불덩어리 속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터지고, 불덩어리는 긴 꼬리를 남기며 북천검을 향해 날았다.
그 붉은 기운 속에서 불쑥 발이 튀어나왔다.
채앙!
파편처럼 불꽃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백산의 발을 떠난 천비가 북천검을 쳐낸 것이다. 하지만 위지천악이 펼친 무공은 이기어검술. 반발력으로 멀어졌던 북천검은 재차 백색 광휘를 뿌리며 백산을 향해 날았다.
“차앗!”
백산의 입에서 두 번째 고함이 터졌다. 손과 발이 동시에 튀어나와 허공을 갈랐다. 손발에서 튀어나온 붉은 광채가 북천검으로 향했다.
콰과쾅!
불은 혈기와 백색 기운이 부딪치는 소리는 천둥처럼 요란했다. 북천검과 광혈지옥비가 부딪쳤으나 충격은 무기의 주인들이 받았다. 강렬한 폭음과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은 십여 장 밖으로 물러났다.
“차앗! 천검(天劍)-!”
허공을 박차고 나아가며 위지천악은 양손을 번쩍 쳐들었다.
순간 하늘로 솟구쳐 올라간 북천검은 제 모습과 같은 형태의 투명한 검을 수백 자루 복제해 냈다. 투명한 검이 하늘을 채우자 그제야 위지천악의 백산을 향했다.
공포한 고함 소리와 함께.
“-천무류(天無流)!”
천검천무류(天劍天無流), 심검임에 분명했지만 일반 무인들이 펼치는 심검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검을 통해 펼치는 심검이었다. 심검의 기운이 검 형태로 집중되어 더욱 가한 힘으로 변한 것이다.
“타핫! 광풍노산!”
백산의 대응 또한 신속했다. 날카로운 고함 소리와 함께 그의 사지에서 광혈지옥비가 튀어나와 허공을 수놓았다.
순식간에 둥근 방패가 생겨났고, 그 방패는 비처럼 쏟아지는 심검의 기운을 향해 밀려갔다. 광풍노산에 포함된 기운 역시 심검의 기운이었다. 강기와 심검을 하나로 합쳐 만든 붉은 방패는 하늘을 떠받치듯 솟구쳐 올랐다.
쿠웅! 찌-익!
첫 번째 부딪침은 대기를 찢어발겼다.
쿠웅! 쿠웅!
두 번째 부딪침은 십 장 아래 벌판의 지형을 바꿨다. 나무를 비롯하여 바위 대부분이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콰콰콰쾅!
세 번째 부딪침은 태풍이었다. 땅거죽이 뒤집히고, 천성산 전체가 지진을 만난 듯 떨었다.
“크윽!”
충격은 주변에만 미치는 게 아니었다. 공격을 가했던 위지천악 역시 나직한 신음을 내지르며 이십여 장을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결코 백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 번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상신법을 펼쳐라, 무상신법을.......’
최면을 걸듯 위지천악은 중얼거렸다. 공간을 장악하여 육안으로 좇지 못한다는 무상신법. 하지만 그 또한 완전한 무공은 아니다.
무상신법으로 움직이는 공간에 심검을 풀어놓는다면, 본래의 수십 배의 위력을 가지게 된다. 심검을 향해 달려드는 놈의 신형이 그만큼 빠르기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타핫!”
땅울림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산의 입에서 날카로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반발력으로 물러나는 대신 무상신법을 펼쳤다.
‘걸렸다, 놈!’
바람을 타듯 뒤로 물러나며 위지천악은 이를 악물었다. 모든 정신을 내공에 쏟아 넣어 심검을 펼침과 동시에, 생의 마지막 함성을 내질렀다.
“천검신무류(天劍神武流)!”
“헉!”
일순 전면 모든 공간이 투명한 검으로 들어차자 백산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심검은 금강불괴지신이라 하여 몸으로 받아 낼 수 없다. 설령 자신이라 하여도 마찬가지다.
“바람은 힘을 부른다!”
백산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터지고 광혈지옥비 전부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바로 그 순간 엄청난 광경이 일어났다.
허공으로 솟구친 광혈지옥비를 따라 백산의 신형이 빨리듯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나타난 곳은 위지천악 뒤였다.
“무슨 무공인가?”
몸을 뚫고 튀어나온 열두 자루의 비도를 쳐다보며 위지천악은 멍하니 물었다.
육안으로 확인하지 못할 빠르기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그 말은 엄청나게 빠르다는 의미를 그저 과장되게 표현한 말이다.
그런데 조금 전 놈의 신형은 정말 눈으로 보지 못했다.
광혈지옥비가 허공으로 치솟는 순간 꺼지듯 사라져 버린 거였다.
“무상신법과 심검의 합작이야. 다시 말하면 내 몸 자체를 심검으로 만들어 버린 거지. 왜 의지보다 빠른 건 없잖아.”
순간적인 깨달음이었다. 심검의 기운을 쏘아 보낼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심검이 된다는 발상. 무상신법이 공간을 장악하는 경공이라면 방금 펼쳤던 무공은 공간을 뚫고 가는 무공이다.
그야말로 빛이 되는 무공이라 할 수 있다.
“한 단계 더 발전했군.”
위지천악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양천리나 제갈승후에게 죽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란 생각뿐이었다.
“저승에서 기다리겠다.”
그 말을 끝으로 우지천악의 신형이 머리부터 시작하여 천천히 가루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저승에 가면 너는 저승에서 또 죽는다는 걸 알아야 해. 이승이 됐든 저승이 됐든 네놈들이 갈 곳은 없어.”
중얼거리듯 말한 백산은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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