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풍무(176)
[구당협(瞿塘峽), 그 혈전의 시작]
무림인들의 전쟁이라지만 장강의 싸움은 중원 전역으로 영향을 미쳤다. 양민을 비롯한 대부분 장사치들은 촉각을 곤두세운 채 장강에서의 전쟁을 주시했다. 객잔이나 주루 손님들에게서 오가는 이야기 대부분은 무림인들의 전쟁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러한 사정은 낙양이라 하여 다를 바 없었다.
혈마총 사건부터 시작하여 크고 작은 일련의 일을 겪었던 낙양은 한산했다. 이른 새벽 희뿌연 안개를 뚫고 검은 장포를 걸친 인물이 낙양 성문을 통과하여 성내로 들어섰다.
“이곳에 숨어 있을 줄이야.”
검은 천으로 머리까지 감싼 인물, 그는 섬서 통천연맹에 있어야 할 제군이었다. 눈앞의 낡은 건물을 흘끔 쳐다보며 제군은 중얼거렸다.
낙성장(落星莊)이란 현판이 걸린 이곳은 낙양대로의 명물 중 하나인 골동품 가게였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던 제군은 훌쩍 몸을 날려 담을 넘었다. 낙성장은 물건을 진열하는 상가 건물과 사람이 거주하는 안채, 두 채로 되어 있었다.
내공을 끌어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치던 제군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안채로 보이는 건물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람의 숨소리였다. 그가 분명할 터였다.
“나요!”
정원을 가로질러 가며 제군은 흘리듯 말했다. 그러나 안쪽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여전히 고른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벌써 잊으신 거요. 나, 제군이 왔소!”
제군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안쪽에서 들려오던 숨소리가 우뚝 멈췄던 거였다.
벌컥!
내실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너라!”
“들어가오.”
제군은 잔뜩 내공을 끌어올려 기습에 대비했다. 한 대 마령구가(魔靈龜家)의 가주였던 구자순(龜子純)은 결코 등한시 할 수 없는 강자였다. 하지만 방 안으로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초연한 눈동자의 노인이 이편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공현에서 백산과 설련에게 호심무극경이라는 동경을 팔았던 노인이었다.
“포기하신...... 이런! 무공을 잃었군.”
제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구자순의 몸에서는 내공을 익힌 흔적이 없었다. 무공을 상실했다는 의미였다.
“제마경(制魔鏡)을 가지러 왔느냐!”
제군을 빤히 쳐다보며 구자순은 물었다. 사촌 동생이자 가주 자리를 노리고 배신을 감행했던 녀석. 화를 내고, 이를 갈아야 하건만 묘하게도 녀석의 얼굴을 대하지 어떤 느낌도 없다.
마치 길가다 만난 타인처럼 느껴진다. 세월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마령구가의 가주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는 녀석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후자일지도 모르다고 구자순은 생각했다.
“잘 아시는구려.”
제군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구자순을 쳐다보았다. 제마경(制魔鏡). 원 명칭은 호심무극경이라 부른다. 수천 년 전부터 마령구가의 가보로 내려왔으나 그 쓰임새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오십 년 전에서야 비로소 제마경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
마혼혈시를 제강하는 방법이 적힌 죽편에 호심무극경에 대한 비밀이 적혀 있었던 거였다.
“제마경의 비밀을 풀어낸 모양이구나. 말해 줄 수 있느냐?”
“먼저 제마경을 내놓으면 말해 주겠소.”
“미안하게 됐구나, 제마경은 이미 다른 주인을 찾아 떠났다.”
“무슨 소리요”
제군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말한 대로다, 천붕회가 열리던 때 공현에서 팔아 버렸다. 한 냥인가 받았던 것 같구나.”
와락!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제군은 구자순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구자순이 도망칠 때 유일하게 들고 간 물건이 바로 제마경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한 냥에 팔아버리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좋게 말할 때 제마경을 주시오. 무공도 잃었으니 형님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 아니오.”
“나도 백번 그러고 싶구나. 네가 조금만 더 빨리 찾아왔더라면 너에게 줬을 텐데....... 그런데 제마경의 비밀을 말해 주지 않을 테냐?”
“빌어먹을!”
구자순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제군은 쥐고 있던 멱살을 사정없이 뿌리쳤다. 전혀 흔들림 없는 그의 눈빛으로 보건대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누군지 기억하고 있소?”
“글쎄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 누구에게 주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어린 여자아이 같기도 했고, 젊은 처자인 것 같기도 한데........”
“죽고 싶은 모양이군.”
제군의 몸에서 살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말해 주고 싶어도 누군지 모르니 방법이 없지.”
“생각이 날거요. 이렇게 하면.”
제군은 다시 손을 뻗었다.
턱!
잔주름 자글거리는 구자순의 목이 손에 잡히자 제군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묘한 쾌감, 평생 넘을 수 없는 벽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리도 쉽게 목을 잡아챌 수 있다니. 하늘처럼 높아 보였던 구자순의 목은 마른 갈대 같다. 살짝만 힘을 주어도 부러질 것처럼 약했다.
저도 모르게 제군은 손에 힘을 주었다.
“크윽!”
구자순의 비명 소리는 더한 쾌감을 선사했다. 백태를 보이며 돌아가는 구자순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끝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치솟았다. 불끈 솟구친 팔목의 힘줄을 쳐다보다가 내공마저 끌어올리고 말았다.
“종가라고? 힘도 없으면서 종가는 무슨 종가야. 잘 들어 구자순. 난 종가에서 태어나지도 못했지만 너희들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날 인정해 주기만 했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이미 숨을 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제군은 계속하여 구자순의 목을 틀어쥐었다. 자꾸만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무공 한 자락을 배우기 위해 종갓집을 기웃거려야 했던 시절. 하지만 누구도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마령구가를 무너뜨리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때였다.
“내 잘못이 아냐, 날 몰라 준 네 탓이라고. 전부가 네 탓이란 말이야. 응.......? 이런!”
구자순의 머리가 맥없이 흔들리자 제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빌어먹을!”
잇새로 낮은 욕설이 흘렀다. 구자순은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한참 동안 구자순의 시신을 쳐다보던 제군은 자리에서 일어낫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걸 당신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소. 이 세상에서 제문(祭文)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과 나뿐이니까. 이제는 나 혼자만 남았소.”
제군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잠시 후, 낙양 명물로 자리했던 낙성장에 불길이 올랐다.
그리고 제군 또한 올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떠나갔다. 하지만 지천명(知天命)을 지났고, 세상을 겪을 만큼 겪은 제군도 모르는 게 있었다. 세상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사실을.
“언니! 그건 뭐야?”
멀리 강 아래로 드러난 백제성을 주시하던 주하연은 설련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며 물었다.
머리단장을 하는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이 동경임을 왜 모를까만, 뒤편에 새겨진 문자 때문이었다. 호심무극경이라 적힌 그 글은 분명 갑골문자(甲骨文字)였다.
“응? 이거, 백랑이 사 준 건데........ 너무 낡아서 잘 보이지도 않아.”
호심무극경의 전면을 팔소매로 쓱쓱 문지르며 설련은 조그맣게 웃었다. 그러다 공연히 선물 받았다는 말을 꺼낸 것 가아 재빨리 말을 바꿨다.
하지만 이미 늦은 일, 선물이란 말에 주하연의 인상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언니한텐 칼도 주고, 동경도 사 줬다 이 말이네. 내겐 아무것도 안 사 주고?”
주하연은 갑판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곧이라도 엉덩이를 털고 일어날 기세였다.
“그, 그게 백랑을 만났을 때 자결하려고 했잖아. 그때 동경을 잃어버렸거든. 그래서 산 건데 백랑이 계산만 해 준 거야.”
설련은 안절부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주하연의 말마따나 백산에게 선물을 세 가지나 받았다. 그에게 여분의 생을 받았고, 검과 동경을 받았다. 주하연의 입장에서 보면 질투를 할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고, 그만 놀려야지. 언니 또 심란해 하겠네. 오빠가 언니 선물 사 줬다고 질투하는 거 아니니까 마음 풀어요. 난 목숨을 선물 받았는데....... 잠시만 줘 봐요.”
기분이 나쁘지 않다면 그것 거짓말일 테다. 하지만 형님으로 모시기로 한 이상 인정해야만 한다.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든 사람은 바로 자신이 아니던가.
“동경은 왜?”
설련은 의아한 얼굴로 동경을 내밀었다.
“여기 있는 글자 때문에 그래요. 호심무극경, 뭔가 있어 보이지 않아요, 얼레?”
동경의 뒷면을 살피던 주하연의 눈이 점점 커졌다.
“왜 그래?”
설련은 다그치듯 물었다. 지금껏 호심무극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별반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연은 무엇인가를 발견한 얼굴이다.
“제문(祭文)이란 건데요, 이 글은 갑골문자와 비슷한 시기에 쓰였던 글이거든요.”
“그런데?”
설련은 조바심이 쳐져 주하연 곁으로 바짝 다가가 앉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쩍쩍 갈라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글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제문이라니.
“그런데 여기 적힌 제문은 호심무극경이란 글보다 나중에 새겨졌어요. 여기 이걸 보세요, 경(鏡)자 위로 선이 그어졌잖아요.”
주하연읜 설련의 눈앞으로 동경을 들이밀었다.
“잘못 써서 그렇게 된 게 아닐까?”
호심무극경의 경(鏡)자의 받침을 가로지르는 선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럴 리가 없어요. 이 동경은 정교하게 만들어졌잖아요. 장인이 만들었을 텐데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지요.”
“그런데 제문을 알아?”
그럴 듯한 주하연의 말에 설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전에 본 적이 있는데 기억나려나 모르겠네. 잘됐네요. 소일거리가 생겨서.”
흥미로운 얼굴로 주하연은 탁자로 다가가서는 동경에 있는 글들을 새기기 시작했다.
“적이 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신중한 얼굴로 탁자 위에 제문을 새기는 주하연을 보며 설련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번 장강 작전 역시 주하연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한가하게 제문이나 해독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난 도련님들을 믿어요. 우린 백제산에 숨어있는 적만 없애면 돼요.”
“백제산에도 적이 숨어 있어? 그럼 더더욱 준비를 해야 하잖아.”
설련은 창밖 너머 멀리 보이는 백제산을 쳐다보았다. 주하연의 마대로라면 전쟁터는 구당협이 아닌, 바로 이곳이었다.
“살우 도련님과 진악 사숙님이 저곳 어딘가에 와 있어요. 나머지 세 곳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밤이 되려면 아직 멀었잖아요.”
주하연의 말 대로였다. 사천 북쪽 송번을 떠난 소살우와 사진악 일행은 이미 구당협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올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여긴 정말 대단한 곳이야.”
“놀러도 다닌 모양이네?”
감회 어린 얼굴로 장강을 쳐다보는 소살우를 향해 사진악은 의미 없이 물었다.
“한수 형님 무덤을 만들어 주려 왔다가, 죽어 가는 백산 형님에게 이곳을 보여 주고 싶었지. 내가 봐도 이곳은 너무 멋진 곳이었거든. 그리고 백산 형님이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말을 우리에게 했던 곳이고.”
이곳에 오면 유독 감회가 깊은 이유가 그 때문이다. 뇌룡현을 떠난 일행이 세상을 유람하며 남궁세가를 거쳐 하북팽가까지 들른 다음 이곳으로 왔다. 하북팽가에 들렀을 때만 해도 백산은 스스로 걸었다.
그러나 그곳을 나서자마자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광혈지옥비를 버린 백산은 점차 기운을 잃어 더 이상 걷지를 못했던 것이다. 다섯 명이 돌아가며 그를 안고 이곳으로 왔다. 병서보검협에서 한수 형님의 무덤을 만들어 준 후, 그는 그만 놓아달라고 했다.
“그만 꿈에서 깨고 싶다고 하더구나. 형수님들의 기억이 선명할 때 죽고 싶다며. 그때 처음 알았다, 형님은 몸만 망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라 기억까지 희미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갑자기 오기가 생기더라. 세상에 대한 오기가 아니라 저 하늘에 대한 오기 말이다.”
소살우는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날 백산을 안은 채 맹세를 했다. 기필코 살려내고 말겠다고.
“그럼 독령곡에 은거한 게 백산 그 친구 때문이었나?”
“두 가지 다였어. 세상에 미련이 없었던 탓도 있고.”
소살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태어날 아들을 소령이라 이름을 짓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그랬더라면 백산은 소령의 몸에 빙의를 하지 않았을 터이고, 지금 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여든 넘게 살았지만 여전히 세상은 알 수 없는 곳이다.
“자자! 그만하고 작전이나 세워 보자고.”
사진악은 감상에 젖어 있는 소살우의 어깨를 툭 쳤다.
“아직도 할 말이 있는 거냐?”
소살우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구당협, 무협, 서능협, 장강삼협으로 이름난 곳이지만 녹림수로채 무인들에게는 제집 안방과 같은 곳이었다. 구당협에서 적을 유인하여 소삼협으로 몰아넣은 다음, 그곳에서 섬멸하기로 하였다.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인 것이다.
산봉우리 꼭대기에 서 있는 이유 또한 적에게 자신들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닌가.
“작전이 변경되었네.”
“얼레? 그게 무슨 소리냐?”
소살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작전 변경에 대한 지시를 받지 못했던 탓이다.
“조금 전 급하게 연락이 왔네. 백제성으로 오라고 하더군.”
“백제성?”
“저기 보이는 저곳 말이네.”
사진악은 강을 뚫고 반도처럼 비어져 나온 야트막한 산을 가리켰다.
“그럼 저곳으로 돌아가야 하나?”
소살우는 백제성 입구를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아닐세, 잔도(棧道)를 이용할 거네.”
“잔도?”
“저기 보이는 골 있잖나.”
사진악은 왼편 절벽을 따라, 줄을 그어 놓은 듯한 기다란 표식을 가리켰다.
“저게....... 길이냐?”
“맞아, 절벽을 파서 만들어 놓은 길이지. 고대에 만들어졌는데 지금은 쓰이지 않아. 저 잔도가 만들어질 때는 섬서성까지 이어졌다고 하더구먼.”
잔도는 두 가지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절벽을 파서 만든 잔도가 하나고, 소삼협에 있는 잔도는 절벽에 반 장 간격으로 구멍을 뚫어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대나무나 널빤지 종류를 덮어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얼마나 넓은데.”
신기한 듯 소살우는 잔도를 쳐다보았다.
저런 길이 섬서성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마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네. 우린 저곳을 이용해서 절벽 아래로 내려갈 거네. 그런 다음 강변을 통해 움직이다가 강을 도하해 백제산으로 상륙할 걸세.”
“헤엄을 쳐서 건너면 너무 늦지 않을까.”
눈가늠으로 강폭을 재보던 소살우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니, 우린 다리를 건너갈 거네.”
“무슨 수로?”
지금 상황에서 다리라니, 사진악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아맞혀 보게. 우리가 몸에 물을 안 적시고 백제산으로 상륙하는 방법이 뭔지.”
“죽고 싶냐?”
소살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사진악의 입에서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자네가 심심할까 봐 숙제를 내 주는 거야. 그만 가지. 밤이 될 때가지는 쉬어야 하니까.”
“다리라........”
진영으로 돌아가는 사진악의 뒤를 따르며 소살우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리란 말은 의문이었다. 나무다리, 돌다리, 징검다리, 구름다리, 떠오르는 다리는 많았으나 지금 상황에 어울리는 건 하나도 없었다.
“개자식!”
이내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결국 말을 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신형이 수림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보여 주기 위해 산봉우리 위로 올라왔다는 두 사람의 의도는 적중했다. 절벽 건너편 나무 그늘 아래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그는 사령계를 떠나온 잠마제 고악상과 고루시마 제엽강이었다.
“여떻게 하실 거요?”
제엽강은 고악상을 돌아보며 물었다.
“우린 저들을 비롯한 귀광두를 노리지 않을 거요. 무극계와 통천연맹을 먼저 없애야 하오이다.”
“무극계는 귀광두를 노리고 백제성으로 갔으니까 우리는 통천연맹 무인들만 잡으면 되는 것 아니오.”
“우선은 그렇소이다.”
고악상은 슬쩍 미소를 물었다. 무극계가 백제성으로 가는 바람에 전쟁의 양상이 단순하게 변했다. 사령계와 통천연맹 그리고 광풍성과 무극계의 대결로 변해버린 것이다.
두 전쟁의 승자가 중원을 놓고 마지막 전쟁을 벌여야 할 터이다.
마치 비무대에서 벌어지는 비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들은 어떻게 하고 있소?”
제엽강은 왼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십 리 정도 떨어진 구당협 중간 부분이 통천연맹의 근거지였다.
“별다른 움직임은 없소이다. 통천연맹에서는 병력을 그다지 많이 투입하지 않은 듯하오.”
고악상의 시선을 좇으며 제엽강이 대답했다. 통천연맹 무인들을 감시하며 가졌던 가장 큰 의문이 병력이었다.
사령계 전 병력의 절반을 투입한 자신들과는 달리 통천연맹 진영에서는 인기척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숨어 있는 자들을 감안하더라도 드러난 무인들의 수가 너무 적어 전쟁을 치르러 나온 자들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드러난 병력은 오백 명밖에 안 되니까 말이오. 그만 자리를 옮깁시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고악상은 몸을 돌렸다. 장강삼협에 얼마나 많은 무인들이 와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당사자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럽시다.”
밤, 고악상과 제엽강이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소살우와 사진악에 이어 어둠을 기다리는 자들. 그리고 중원호에 몸을 싣고 있는 백산 일행 또한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며 전쟁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할까.”
누런 황톳물을 쳐다보며 백산은 생각에 잠겼다. 서산 너머로 해가 기운지 얼마 되지도 않아 어둠이 덮쳐 오고 있었다.
구당협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백제성 주변에 이천여 무극계 무인들이 들어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한두 시진 후면 그들과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비단 그들뿐이라면 지금처럼 고민을 하지 않을 것이다.
통천연맹과 사령계 무인들 또한 구당협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그들에게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지금껏 고민하는 이유였다.
“뭐 하세요?”
그 참에 주하연이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불룩 솟은 배가 부담스러운 듯 뒤뚱거리는 모양새가 웃음이 나올 법도 하지만 백산은 웃지를 못했다. 허리에 찬 검과 손에 들린 활 때문이었다. 그녀는 맞지도 않는 무복을 걸치고, 완전군장을 하고 나온 것이다.
“선실에서 지휘만 하는 게 낫지.......”
“아니에요, 오빠.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많은 광풍성 무인들이 죽게 될 거예요. 부하들이 죽어 가는데, 성주 부인이란 사람이 숨어 있을 수는 없지요. 부하들보다 선두에서 싸워야 해요. 그래야 광풍성이 바로 섭니다.”
주하연은 백산의 말을 잘랐다. 그의 걱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안쪽에서 쉴 수는 없다. 부하들에게 신뢰를 얻어 내는 길은 그들과 같이 호흡하고, 함께 싸우는 것뿐이다.
“끄응! 알아서 해라.”
백산은 포기하듯 신음을 흘렸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마땅히 설득할 말이 없었다. 나의 자식들이 죽어 가는 상황에서 제 자식만 살리겠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참,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걱정스런 얼굴로 쳐다보는 백산의 팔짱을 끼며 주하연은 엷게 웃었다.
“강호 무림 세력이 이곳에 전부 들어와 있잖아. 어떻게 전쟁을 시작할까 하고 말이야.”
“우린 한 놈만 패면 돼요. 저기 들어와 있는 무극계 무인들만.”
주하연은 어둠에 잠겨 가는 백제성을 가리켰다.
“왜?”
“우리는 물론이고 다른 세력들 또한 일이 복잡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거든요. 우리나 그들이나 장강 전쟁에서 두 곳만 남기를 바라는 거죠.”
“그럴까?”
“그래요, 그러니까 우린 무극계만 신나게 패면 되는 거예요. 서능협까지 이동하면서. 그곳까지만 가면 우린 승리를 거머쥐게 돼요.”
“쿡! 네 말을 듣고 있으면 벌써 전쟁이 끝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주하연이 자신 있게 말하자 백산은 낮게 웃었다. 군주라는 신분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사고방식은 언제나 긍정적이다, 아니 낙천적이란 말이 더 어울릴 듯하다.
그녀의 그런 면이 때로는 부럽기까지 했다.
“당연하지요, 오빠랑 도련님들이 있는데 질 수가 없잖아요. 광풍성의 역사는 오늘밤부터 시작돼요. 절 믿으세요.”
주하연은 가지고 있던 활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확고하게 말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짧게 소리쳤다.
“몽 할아버지, 배를 전부 이쪽으로 대라고 하세요.”
잠시 후, 좌우에 있던 두 척의 배가 중원호 측면으로 다가오고, 철웅과 광치가 건너왔다.
“두 분은 방어 대형을 구축하세요. 그리고 수공을 배운 부하들을 주변으로 배치하시고요.”
“알겠습니다, 주모!”
두 사람이 다시 왔던 배로 건너가지 혈뇌문 문도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허! 저것도 네 머리에서 나온 거냐?”
백산은 놀란 얼굴로 주하연을 쳐다보았다. 방어 대형이라 하기에 병사들의 배치를 말하는 것이려니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혈뇌문 문도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중원호 좌우측에 있는 난간을 뽑아내고, 다른 배의 난간을 꺾어 평평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중원호를 비롯한 세 척의 배는 연무장처럼 넓은 하나의 공간으로 변했다.
그런 다음 남은 두 척의 배 측면에 끼워 올리자 반장 높이에 달하는 방책이 만들어지며 외부와는 단절된 공간이 되었다.
“여장을 열어라!”
광치와 철웅의 고함을 울려 퍼지자, 난간 주변에 있던 혈뇌문 문도들은 두 난간 연결 부위의 조그마한 고리를 젖혔다.
그러자 외부가 보이는 사각형 구멍이 나타났다. 다가오는 적을 관찰하고 활을 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움직이는 성이구먼.”
혈뇌문 문도들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백산은 싱긋 미소를 물었다. 지금처럼 해 놓으면 안쪽에서는 최고의 기동력을 발휘할 듯했다.
“맞아요, 이곳은 또 다른 광풍성이에요. 이 상태를 유지하면서 서능협까지 갈 거예요. 일단 선실 위로 올라가요.”
“가자!”
주하연이 먼저 몸을 날리자 백산은 설련과 함께 그녀의 뒤를 따랐다.
“수전단(水戰團)은 물속으로 들어가라!”
선실지붕으로 올라간 주하연은 재차 고함을 내질렀다.
“존명!”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고개를 숙이고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전고를 울려라!”
둥! 둥둥! 둥둥둥!
전고가 구당협 계곡을 타고 울려 퍼졌다.
그것은 장강 혈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오빠는 나랑 할 일이 있어요.”
“무슨 일?”
“위하에서 만들었던 얼음 있잖아요. 그거 열 개 정도가 필요해요.”
“그걸 어디다 쓸 건데.”
전면을 쳐다보며 백산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때처럼 적선이 있는 상황도 아니고, 배라곤 자신들의 배 세 척이 전부다.
얼음이 왜 필요한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리!”
짧게 대답한 주하연은 백산의 손을 잡았다.
“언니는 이곳에서 놈들을 살펴 주세요.”
하고 주하연은 백산의 손을 끌고 수면으로 몸을 날렸다.
“알았어.”
설련은 멀리 백제산은 주시했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는 백제산에서는 어떤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았다.
“무극계라고 했더냐. 너희들은 그냥 사막에서 살았어야 했다. 중원으로 나오지 말아야 했단 말이다.”
화살을 불끈 틀어쥐며 설련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전쟁준비는 중원호에서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하연이 쳐다보는 백제성 강변에도 전투 준비를 마친 무극계 무인들이 수풀에 몸을 숨긴 채 중원호를 주시하고 있었다.
“준비하라! 배가 이곳으로 통과하는 순간 통나무를 띄운다.”
전면을 주시하던 담대철은 주변을 향해 낮게 소리를 질렀다. 무극계 무인들이 중원호를 공략하기 위해 준비한 것은 통나무였다.
구당협에서 시작하는 장강삼협의 물살이 거칠어 자칫 잘못하다가는 절벽에 부딪쳐 침몰당하기 일쑤다. 해서 이곳에서는 노를 저을 수가 없다. 오히려 절벽에 줄을 묶어 배의 속도를 늦추면서 내려가야 하는 곳이 바로 구당협인 것이다.
담대철이 통나무를 준비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수백 개에 달하는 통나무를 띄워 그것들을 징검다리 삼아 적선을 공격할 것이다. 물론 중간에 통나무 위치를 잘못 잡아 물에 빠진 부하들도 있을 터이지만, 사막에서만 살아 물에 익숙지 못한 무극계 무인들에게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일단 적선에 승선하기만 한다면 그때부터는 무극계 무인들이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이다.
“통나무를 던져라!”
중원하고 지나쳐 가자 담대철은 크게 소리쳤다.
두세 명씩 짝을 이룬 무극계 무인들은 반 장 길이에 달하는 통나무를 일제히 강을 향해 던졌다.
수백 개의 통나무가 일제히 하늘을 날아 물속으로 떨어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징검다리를 건너듯 통나무를 밟고 몸을 날리는 무인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먼저 몸을 날렸던 자들은 들고 있던 통나무를 재차 던졌다.
순식간에 중원호 뒤쪽 강물에는 수백 개의 통나무로 가득했다.
그리고.
담대철의 입에서 광포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무극계 무인들은 적을 섬멸하라!”
“와-아! 소 가주의 원수를 갚아라! 태상가주님의 원수를 갚자!”
통나무를 던진 무극계 무인들이 벌 떼처럼 몸을 날렸다.
“궁수는 선미로 이동하라!”
선실 지붕에서 뒤편을 쳐다보던 설련은 우렁차게 고함을 내질렀다. 드디어 시작이다. 벌써 백여 명 이상이 통나무를 이용해 몸을 날리고 있다. 개중에는 통나무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물을 밟고 오는 자들도 보였다. 아미 이곳에 있는 무극계 무인들 중 가장 강한 자들일 터였다.
“세 분은 저들을 맡아 주세요.”
광치와 유몽 그리고 철웅을 향해 설련은 지체 없이 고함을 내질렀다.
“알았습니다, 주모!”
세 사람은 재빨리 몸을 날려 강으로 뛰어들었다.
“백랑!”
수면으로 불쑥 고개를 내미는 백산과 주하연을 발견한 설련은 반가운 얼굴로 두 사람을 불렀다.
“여어, 걱정 붙들어 매라고. 다 끝났으니까.”
백산은 설련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백산이 서 있는 곳은 물 위가 아니었다. 백산이 서 있는 곳은 과거 위하에서도 보였던 거대한 얼음 위였다.
그때보다 더 크게 만든 듯 얼음 덩어리는 길이만 해도 십장에 달했고, 폭 또한 삼장이나 되었다. 그런 얼음덩어리가 주변에 즐비했다.
“연결 작업이 전부 끝났습니다, 주공.”
물속에서 불쑥 고개를 내민 사양선이 백산을 향해 소리쳤다. 그를 비롯한 잠영오살은 물속에서 얼음 덩어리를 연결하는 작업을 했다.
얼음 덩어리를 연결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하단에 꺾쇠를 박아 넣고 오장 길이에 달하는 밧줄로 서로를 묶었다. 지금부터 얼음은 그냥 두어도 물결을 따라 아래로 흘러갈 것이다.
“그래, 수고했다. 너희들은 여기 대기하고 있다가 살우 일행이 오면 얼음 다리를 올려 줘라.”
“존명!”
“하연이 넌 배로 돌아가고.”
눈만 빠끔 내놓은 사양선을 쳐다보던 백산의 시선이 주하연에게로 향했다.
“같이 가요.”
주하연은 백산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쏴라!”
바로 그 순간, 중원호에서 설련의 외침이 밤하늘을 타고 울렸다.
수백 대의 화살이 어둠을 뚫고 무극계 무인들을 향해 날았다. 한껏 내공을 머금은 화살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크아악!”
“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리며 여기저기서 물에 빠지는 자들이 속출했다. 통나무를 발판으로 삼아 날아오던 무극계 무인들이 주춤한 순간 설련의 입에서 두 번째 고함이 터졌다.
중원호에서 화살이 쏘아지는 그 순간 백제산 강변에서도 수백 대의 화살이 밤하늘을 꿰뚫었다. 중원호에서 쏘아진 화살과 다른 점이라면 그것들은 전부 불을 머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진화(鎭火)를 담당하는 조는 갑판에 물을 쏟아라!”
불화살을 쳐다보던 설련은 아래를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갑판에 철갑을 덮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선수 측면에 자리를 잡고 있던 수십 개의 물통이 일제히 쓰러지자 각 배의 갑판은 물로 흥건했다.
그 위로 무극계 측에서 쏜 불화살들이 무차별하게 떨어져 내렸다.
물을 쏟아 부은 진화조는 재빨리 측면으로 다가가 난간을 젖히고 물을 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쳐다보던 설련은 다시 소리쳤다.
“쏴라! 부 각주는 이곳을 맡아라!”
“존명!”
복명을 외치는 고함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선실 지붕을 박찬 설련이 백산과 주하연 곁으로 몸을 날렸다. 가쁜 숨을 몰아쉰 설련은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가요!”
“따라오세요.”
설련은 조금 전 광치 일행이 갔던 곳으로 몸을 날렸다.
“이 여자들이!”
덩달아 주하연마저 설련을 따라 몸을 날려버리자 백산은 어이없다는 듯 픽 웃고 말았다. 부하들에게 선봉에서 싸우겠다고 하였던 약속을 그녀들이 먼저 지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전부 죽여주마!”
백제산으로부터 끊임없이 밀려오는 무극계 무인들을 쳐다보며 백산은 차갑게 말했다. 진득한 살기를 쏟아 내던 백산의 신형이 설련과 주하연을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백산이 빠르게 전장으로 뛰어드는 그 순간, 왼편 절벽에서도 무서운 속도로 몸을 날리는 자들이 있었다. 잔도를 따라 움직이는 사진악 일행이었다.
“서둘러라!”
선두에서 몸을 날리며 사진악은 뒤편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던 사진악이 가장 먼저 강변으로 내려섰고, 나아가는 그의 신형은 더욱 빨라졌다.
“서둘러라! 혈뇌각 무인들이 공격을 받고 있다.”
뒤따르던 거령이 뒤편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사진악을 따랐다. 끊임없이 아래로 뛰어내리던 광풍성 무인들의 행렬은 마지막 소살우가 내려섬으로써 끝이 났다.
“가장 늦게 가는 놈은 나한테 죽는다. 서둘러라!”
광포하게 고함을 지르며 소살우는 부하들을 앞질러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아예 지면으로 내려서지도 않았다. 허공답보의 경공술을 펼치며 곧장 중원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다리를 올려라!”
선두에서 나아가던 사진악이 전면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바로 그 순간, 놀라운 광경이 일행 눈앞에 나타났다. 새하얀 빛을 발하는 얼음 덩어리들이 불쑥 솟구쳐 오르며 기다란 다리가 생겨나는 것이었다.
“무욕각 무인들은 다리를 건너 백제산으로 간다!”
“불도각 무인들은 이곳에서 적을 친다!”
사진악과 소살우 입에서 동시에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불쑥 솟구친 얼음 덩어리로 만들어진 다리 위로 무욕각 무인들이 무서운 속도로 건너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된 구당협 입구는 온갖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가 난무했다. 무욕각 무인들을 뒤따르던 불도각 무인들이 무극계 무인들 틈바구니 속으로 끼어들자 전쟁은 피아 구분 없는 혼전으로 변했다.
“혈뇌각 무인들은 적을 주살하라! 다리를 집중적으로 노려라”
화살이 무용지물로 변하자 부각주인 진대연은 몸을 날리며 고함을 질렀다. 물속으로 뛰어든 혈뇌각 무인들은 얼음 덩어리를 건너 전장으로 다가갔다.
“우리 혈뇌각 무인들이 맡은 곳은 물이다!”
진대연은 전면으로 빠르게 나아가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냐면 말이다, 바로 이렇게 한다.”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는 순간 무극계 무인 한 명이 통나무를 향해 날아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진대연은 통나무를 향해 왼손을 사정없이 쳐냈다. 일순 통나무가 쭉 밀려갔다.
“헉!”
내려서던 무극계 무인의 입에서 헛바람이 흘러나오고, 그런 그를 향해 진대연은 검을 밀어 올렸다.
“커억!”
“과도한 힘을 쓸 필요도 없다. 지금처럼만 하면 너희들은 쉽게 죽일 수 있으니까.”
다른 적을 찾아 움직이며 진대연은 진득한 살기를 쏟아 냈다. 어둠 속이지만 아군을 구분하는 일은 쉽다. 혈뇌문 무인들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두른 상태였고, 불도각 무인들은 무당도인들과 소림승려가 전부다. 그들을 구분해 내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이다.
백여 명에 불과했지만 혈뇌문 문도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통나무위로 내려서는 적을 없애는 것은 물론이고, 물에 빠진 자들까지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
전황은 급격하게 광풍성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한 현상은 백제산이라 하여 다를 바가 없었다. 얼음 덩어리를 타고 도하한 무욕각 무인들은 백제산에서 내려서자마자 무극계 무인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강자를 내보낸 무극계 무인들은 수적으로 우세하다지만 무욕각 무인들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욕각의 공격을 견디다 못한 무극계 무인들은 급기야 백제성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대가 우두머린가?”
화황척을 뽑아든 사진악은 담대철을 향해 다가갔다.
“어떻게 내려왔나.”
담대철은 암울한 얼굴로 물었다. 저들이 나타날 때부터 패한 싸움이었다. 구당협 양편 절벽은 이백오십 장이 넘는다. 저들이 나타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백제산과 이어진 봉절로 생각했고, 그곳만 감시를 했다. 그런데 저들은 절벽을 타고 내려온 것이다.
전혀 길이 없을 거라 여겼던 곳을.
“사막에서만 살아서 이곳을 잘 모르는 모양이군. 여긴 잔도(棧道)라는 절벽길이 있다. 사천에서 나올 때나 사천으로 들어갈 때 사용되던 곳이다. 수백 년 전에 폐쇄된 곳이라 전설로만 남아 있을 뿐이지.”
“그랬었군. 깨끗하게 졌어.”
고개를 끄덕인 담대철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느새 남아 있는 부하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도망치다 지르는 비명 소리만 끊임없이 들려 올 뿐이다. 산에서 강에서.
“무공을 폐하고, 사막으로 돌아간다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 결정해라.”
“쿡! 이 지경이 돼서 사막으로 돌아가면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담대철은 희미하게 웃었다. 진 싸움이었다. 앞에 있는 자보다 물에서 부하들을 도륙하는 귀광두의 신위는 정녕 가공했다.
무극계 지존인 순우혁로보다 더한 강자가 바로 그였다. 강기를 터득하여 물위를 평지처럼 걷는 부하들이 대부분 죽고 두 명밖에 남지 않았다. 불은 광채를 머금은 도(刀)가 지나가자 둘의 목도 허공으로 떠올랐다.
“일초에 모든 것을 걸어 보지.”
창을 들어 공격 자세를 취한 담대철은 낮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는 무인 특유의 투기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미 졌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설령 앞에 있는 자를 없앤다 하더라도 귀광두나 외팔이 도객을 이겨낼 자신이 없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패했다고 하지만 창천황이라 불린 담대철의 신위는 가공했다. 바람을 머금은 듯 장포가 팽팽하게 부풀고 담대철의 신형은 부상하듯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대는 이미 졌다. 투기조차 일으키지 못하면서 싸우려고 하는가.”
담대철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사진악은 몸을 돌렸다.
저 상태로는 일초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주화입마에 들고 만다.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
“픗! 하하하! 크! 하하하!”
느닷없이 담대철은 하늘을 쳐다보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며 웃던 담대철의 전신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주화입마의 조짐이었다.
“커억!”
결국 사잔악의 예상대로 담대철은 칠공으로 피를 쏟아 내더니 지면으로 추락했다.
“목을 자르고 묻어줘라!”
앞서가던 사진악은 뒤편을 향해 낮게 말했다. 어느새 일을 마친 거령이 다가와 있었다.
“알겠습니다, 사부.”
짧게 대답한 거령이 사풍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담대철의 목을 잘라낸 거령은 바로 옆 지면에 장풍을 쏘아 커다란 구덩이를 팠다.
“절대 중원을 넘보지 마시오. 중원은 우리 광풍성 거란 말이오.”
거령은 담대철의 시신을 밀어 넣고 구덩이를 메웠다.
“이제 한 고개를 넘었나?”
이미 전쟁은 끝나 있었다. 물에서 통나무 위에서, 또는 얼음 위에서 적과 싸우던 광풍성 무인들이 한둘 중원호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같이 갑시다, 사부!”
물 위로 걸어가는 사부를 부르며 거령은 몸을 날렸다.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
즐독입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독 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 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즐독.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0^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