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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77)
[제혼영매대법(制魂靈魅大法)]
광풍성과 무극계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그 시각.
절벽 위에서도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먼저 움직인 자들은 사령계 무인들이었다. 혈영고루강시 오백 구를 앞세운 고악상은 수림을 헤치고 통천연맹 무인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처음 있던 곳에서 반 시진 가량 이동하자 계곡이 나타났다.
통천연맹 무인들이 은신해 있다는 풍곡(風谷)이란 곳이었다.
풍곡이란 이름 때문인지, 아리면 바람 때문에 풍곡이라 지어졌는지는 몰라도 풍곡에는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상하군.”
풍곡 안쪽 동정을 살피던 고악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엽강의 말을 듣기는 했지만 정마로 계곡 안에서는 인기척이 거의 감지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백여 명이 전부인 듯싶었다.
적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 의아할 지경이었다. 고개를 돌려 제엽강을 쳐다보았다.
“제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통천연맹이 병력을 파견했는지 그것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라고.”
제엽강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몇 번에 걸쳐 이곳을 조사했다. 비록 가까이 다가간 상태에서 관찰하지 못했지만 안쪽에 있는 적은 몇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고, 보고 또한 그렇게 했다.
“문제는........ 분명 뭔가 있다는 겁니다. 음습한 기운이 섞여 있습니다.”
고민스런 얼굴로 고악상은 중얼거렸다. 삭막한 바람 소리만 들려오는 듯했지만, 풍곡 안쪽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섞여 있었다.
확신이라기보다는 무인의 육감이었다.
들어가서는 안 된다며 육감이 소리치고 있었다. 더구나 계곡은 호리병 모양이다. 안쪽으로 들어간 상태에서 입구로부터 적이 들이닥친다면 꼼짝없이 포위당하게 된다. 좌우 절벽도 높아, 올라가는 것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망설이고 있는 고악상을 향해 제엽강이 말을 건넸다.
“강시를 투입하자는 말입니까?
의미를 알아차린 고악상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혈영고루강시를 투입해서 계곡 안을 헤집어 버리는 겁니다. 그런 다음 안으로 들어갈지를 결정합시다.”
“그럽시다.”
고악사은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을 안고 안으로 들어가느니 그 방법이 나을 듯했다.
잠시 후, 혈영고루강시 전면으로 나선 제엽강의 몸에서 푸르스름한 광채가 솟구쳐 나왔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를 따라 전면으로 나섰던 고루문 무인 오십여 명의 눈에서도 제엽강과 같은 광채가 스며 나오고, 그들의 입에서 주문처럼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의 종-들-아. 저 안-에 있-는 인-간-을 죽-여-라! 너-희-들-이 해-야-할 일-이-다.”
일순 혈영고루강시들의 눈이 붉게 변했다.
캬악!
오백여 구의 강시들이 울부짖는 소리는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유부에서 불어나오는 바람소리를 듣는다면 저러하리라.
풍곡 안에서 불어 나오는 바람마저 숨을 죽이는 듯했다.
바로 그 순간, 제엽강의 입에서 묵직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가-라!”
제엽강의 명령이 떨어지자 강시들은 풍곡 안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는가? 불사삼강이여.”
천여 개에 달하는 붉은 눈동자를 쳐다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물고 있는 인물. 그는 바로 통천연맹을 떠나온 양천리였다.
[제군, 준비하라.]
[존명!]
고개를 숙인 제군은 몸을 날려 왼편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한 편에 모여 있는 인물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마령군(魔靈軍)은 제혼영매대법을 펼쳐라!”
마령군, 불사삼요를 제어하는 자들로 마령구가의 정예였다. 대부분 제군과 마찬가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으로 휘감은 그들의 입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삼삼오오 짝을 지은 그들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새어나오 안개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캬아악!
선두에서 진입하던 혈영고루강시로부터 거북한 소성이 터져 나왔다. 우뚝 멈춰선 상태에서 빙글빙글 돌며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는 강시의 모습은 보기에도 섬뜩했다. 마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힘들어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선두에서 시작된 강시들의 비명은, 전염병처럼 뒤로 퍼졌다.
바로 그 순간 푸른 광채에 휩싸인 양천리의 입이 조용히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제혼영매대법의 최후비전인 영매어(靈媒語)였다. 영매어는 강시와 시전자를 영적 감응으로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였다. 요컨대 영매어를 통해 주종 관계를 확립하면, 그보다 강한 매개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강시는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다.
[조용히 하거라. 지금부터 너희들의 주인은 바로 나 요왕이다.]
양천리의 머리로부터 영매어가 시전되자 강시들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성공이군.”
멸열을 기다린 듯 가만히 서 있는 혈영고루강시를 쳐다보며 양천리는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강시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모든 것은 제혼영매대법으로 제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가라!]
양천리는 재차 영매어를 시전했다. 그러자 혈영고루강시들은 한둘씩 몸을 돌려 풍곡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적을 공격하지 않을 겁니까?”
양천리의 행동을 지켜보던 제군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놈들을 안으로 끌어들여야지. 아마 제엽강이란 놈은 조금 전 강시들이 비명을 지를 때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여겼겠지. 그런데 강시들이 그냥 나왔단 말이다. 이무 일도 없는 것처럼. 놈은 부하들을 이끌고 들어올 수밖에 없다. 물론 잠시 고민은 하겠지만 말이다. 너는 불사사요와 불사삼살을 데리고 계곡 입구를 막아라.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일거에 쓸어버린다.”
“알겠습니다, 요왕!”
양천리의 예상대로였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걸어 나온 혈영고루강시를 보며 제엽강은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조금 전 강시들이 요동칠 때, 잠시였지만 영적 연결이 끊어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영적 유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더욱 황당한 노릇은 살아 있는 인간을 없애라는 지시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나왔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고악상 또한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저 안에 강시와 상극인 어떤 게 있나 봅니다.”
“그럼 큰일 아닙니까. 이번 전쟁의 주력이 강시인데........”
고악상은 흠칫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만일 제엽강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령계로서는 엄청난 전력손실이 온다.
천오백 구에 달하는 강시를 전부 출병시킨 상황이고, 사령계의 주력은 강시라 할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전쟁수행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들어가 봐야겠소이다.’
제엽강은 굳은 얼굴로 풍곡 안쪽을 쳐다보았다. 만일 안쪽에 강시와 상극인 무엇인가가 있다면 반드시 없애야 할 터이다. 한참 전쟁의 와중에 그러한 것들이 나타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될 터이고, 사령계는 패하게 될지도 모른다.
여유가 있을 때 확인해야 할 것이다.
“기다리십시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심하시오.”
혈영고루강시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는 제엽강을 향해 고악상은 낮게 말했다.
“걱정 마시오, 혈영고루강시 오백 구가 나를 지키고 있소이다.”
슬쩍 미소를 문 제엽강의 신형이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미소를 물고 들어갔던 제엽강은 한참 동안 아무런 연락을 보내오지 않았다.
“기다린 사람 생각해서라도 소식이나 전해 줄 일이지.”
고악상은 초조한 얼굴로 안쪽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제엽강이 들어간 지 벌써 한 식경은 족히 흐른 듯했다.
“빌어먹을 놈!”
내심 욕설을 배어 내는 순간, 계곡 안쪽에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저건.”
고악상은 황당한 얼굴로 인기척을 흘렸던 뭔가를 쳐다보았다. 바로 제엽강을 따라 들어갔던 혈영고루강시 한 구였다.
“뭐 하는 짓이야?”
한참 동안 이편을 쳐다보던 혈영고루강시가 다시 안쪽으로 걸어가자 고악상은 재차 욕설을 뱉어냈다.
“암문 문도들은 안으로 들어간다.”
결국 견디다 못한 고악상은 부하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고악상의 실수였다.
아니 혈영고루강시의 존재를 통해 제엽강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판단해 버리고 만 것이다. 다만 조금 전 강시와 상극이라 하였던 그 어떤 것을 제거하느라 나오지 못하여 강시를 통해 도움을 청했을 것이라 여기고 말았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계곡은 상당히 깊었다. 물론 주변을 살피느라 경공을 펼치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거의 이 각 이상을 전진하고서야 계곡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혈영고루강시가 도열해 있는 것을 확인한 고악상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큰 소리로 물었다.
“피 냄새?”
고악상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불어 나오는 바람 속에서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다지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피 냄새가 분명했다.
“허억!”
고악상을 비롯한 암문 무인들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마치 누군가 시킨 것처럼 강시들이 물결처럼 좌우로 갈라지는 것이었다.
강시들의 움직임이야 늘 보았던 것이라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고악상을 비롯한 암문 무인들이 놀란 것은 강시들이 비켜난 안쪽 광경이었다.
피를 뚝뚝 흘리며 혈영고루강시에게 잡혀 있는 인물.
그는 분명 조금 전 강시들을 이끌고 들어갔던 제엽강이었다. 강시들의 지존이라 할 수 있는 그가 사지가 찢긴 채 죽어 있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시를 조종하던 고루문도 전원이 제엽강과 같은 처지였다.
“어떻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시의 지존이라 불리는 제엽강이 아닌가. 그런 그가 수족처럼 부리던 혈영고루강시에게 잡혀 찢겨 죽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악상의 의문은 곧 풀렸다.
“내가 그랬다, 고악상.”
어둠 속에서 걸어 나가며 양천리는 낮게 말했다.
“넌....... 양천리?”
고악상은 비명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천붕회에서 귀광두에게 당해 내공을 잃었던 양천리다. 그런데 그가 나타난 것이다.
“날 알아보는군. 그래, 맞다, 고악상, 난 양천리다. 무공을 잃고 폐인이 되었던 그 양천리 말이다.”
“놀랍군, 단전이 파괴당했던 양천리가 무공을 회복하다니. 불사영약이라도 복용한 건가?”
조금 전 제엽강의 죽음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악상은 신색을 회복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상대가 신진십룡의 일인인 양천리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뒤에는 암문 문도 천오백이 대기하고 있다.
현 상황에서 양천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쿡! 그래도 암문 문주라 이 말이군. 뭐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고악상 너를 비롯한 네 부하들은 이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한다. 단 한 명도.......”
“미친 놈. 꿈도 야무지구나. 암문 문도는 저놈들을 죽여라. 상대는 신진십룡의 일인이었던 양천리다!”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고악상은 뒤편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양천리라 강조한 것은 부하들의 사기를 위해서였다.
“와-아!”
상대가 양천리란 사실이 암문 문도들에게 용기를 주었음에 분명했다. 조금 전까지 당황한 얼굴로 서 있는 자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흥!”
낮게 코웃음을 흘린 양천리는 혈영고루강시를 향해 빠르게 영매어를 보냈다.
[나의 종들아 저들을 없애라! 저들의 피로 너희들의 육신을 적셔라. 저들의피로 너희들의 갈증을 풀어라!]
그뿐만이 아니었다. 입구 쪽으로 이동하여 있던 제군도 불사삼요와 불사삼살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순간.
캬아!
오백 구에 달하는 혈영고루강시들이 암문 문도들을 향해 몸을 돌리며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허억!”
양천리를 향해 몸을 날리려던 고악상은 질겁한 얼굴로 물러났다. 문득 조금 전 상황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자신들이 도착함과 동시에 혈영고루강시들이 좌우로 길을 텄다. 더구나 마지막에 서 있던 강시 오십여 구는 고루시마 제엽강을 비롯하여 지금껏 주인으로 모시던 고루문 문도들의 찢긴 몸을 들고 있었다.
주인의 지시가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게 강시가 아니던가.
“그럼 네가 혈영고루강시의 새로운 주인?”
“이제야 알아차린 모양이구나. 불사삼강뿐만 아니라, 불사삼요와 불사삼살이 전부 내 지시를 받는다. 내가 바로 그들을 다스리는 요왕이란 말이다.”
낮게 소리친 양천리는 허공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한 걸음씩 허공을 밟고 올라갔다. 그의 몸에서 푸른색 기운이 흘러나오고, 그 기운들은 안개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허공답보까지?”
경악한 얼굴로 고악상은 양천리를 주시했다. 불사삼괴를 다스리는 요왕이란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계단을 오르듯 허공을 밟고 올라가는 양천리의 경공에 넋이 빠져 버린 탓이다. 그는 신진십룡의 일인인 양천리가 아니라, 엄청난 내공을 보유한 고수였다. 사황을 능가하는 절대고수.
망연한 얼굴로 허공을 쳐다보는 그의 귓전에 양천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종들아,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멸하라. 그들을 죽여야만 안식을 얻을 것이다. 그들을 죽여 뜨거운 피로 목욕을 하거라!”
유부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인 듯, 탁하고 거북살스러운 목소리가 풍곡 안에 울려 퍼졌다.
딸랑! 딸랑!
캬아악!
“흑사령(黑邪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방울 소리가 흘러들자 고악상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소림사에서 들어본 적 있는 흑사령 소리였다. 그때 흑사령을 찬 불사삼요의 흑사인은 개방의 후개를 격살했다.
암문 무인들이 강하다고 하지만 개방의 후개만큼 강한 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암문의 멸문이 눈앞에 그려졌다.
“크아악!”
“아악!”
“으악!”
일방적인 도살이란 말은 지금 암문 문도들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미 불사삼강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그 강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강기가 아니면 몸에 흠집조차 낼 수 없는 불사삼괴가 아니던가.
정상적인 상태로 죽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팔이 뜯기고, 목이 뜯기고, 몸통이 찢긴 채 사방으로 뿌려졌다.
“악마 같은 놈, 멈추지 못할까!”
허공을 노려보며 고악상은 고함을 질렀다.
“무슨 소리냐 고악상. 혈영고루강시를 데려온 놈은 바로 너다. 너 또한 다른 세력을 만나면 암문 문도들처럼 찢어 죽이려고 하지 않았더냐. 그곳에서 잘 지켜 보거라. 암문 문도들이 죽어 가는 광경을 말이다.”
비릿한 조소를 머금고 양천리는 비아냥거렸다.
누가 누굴 욕한단 말인가. 죽어 시체가 되는 자들은 팔이 찢기고 머리가 뜯기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죽어 갈 뿐이다. 그런 그들을 쳐다보며 고통 받는 건 살아남는 자들의 몫인 것이다.
지금 고악상처럼.
“죽여 버리겠다. 네놈들 전부 죽여 버리겠다!”
광포하게 고함을 지르며 고악상은 지면을 찼다. 하지만 그가 올라간 만큼 양천리는 더욱 높이 올라갔다.
“내려와라! 내려오란 말이다!”
바닥으로 내려선 고악상은 재차 고함을 지르며 지면을 찼다. 그러나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양천리 근처도 가지 못하고, 고래고래 고함만 지르다 다시 내려와야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고악상은 끊임없이 바닥을 찼고, 그때마다 양천리는 고악상의 공격권 밖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내려오란 말이다, 이 개자식아. 내려오란 밀이다.”
고악상의 입에서 앓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올 즈음, 사방에서 강시들이 몰려들었다. 어느새 먼동이 트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아무도 남지 않은 풍곡을 쳐다보며 고악상은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향해 십여 구의 혈영고루강시가 먹이를 노리는 야수처럼 달려들었다.
우두둑!
맨 먼저 고악상의 양팔이 뜯겨 나갔다.
“크아악!”
우두둑!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고악상의 두 다리가 뒤로 던져졌다.
그리고.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제군은 피해 상황을 파악한 후 보고하라!”
고악상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오른 순간, 양천리는 제군을 향해 소리쳤다.
“강시 오백 구에 마령군 백 명이 당했습니다.”
잠시 후 강시의 수를 파악한 제군은 양천리 앞으로 다가가며 보고를 했다.
“오백이라....... 그 정도면 됐어. 무협으로 간다.”
“마령군은 강시들을 인솔해 무협으로 이동하라!”
제군은 양천리의 명령을 마군들에게 하달했다. 어스름한 새벽안개를 뚫고, 불사삼괴를 비롯한 통천연맹 무인들이 풍곡을 빠져나갔다.
“오너라 귀광두. 넌 그냥 오기만 하면 된다. 다른 놈들은 내가 전부 없앨 것이다. 마지막에는 네놈도 고악상처럼 만들어 줄 것이다. 스스로 죽지도 못하게 말이다.”
구당협 쪽을 쳐다보며 양천리는 진득한 살소를 물었다.
지옥에 강이 흐른다면 지금과 같을 터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들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던 장강삼협은 이른바 지옥 길이었다.
급류를 따라 흘러가는 것은 대부분 시체들이었고, 황톳물이던 강물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 붉었다.
그 시체들과 함께 한 덩어리가 된 세 척의 배는 천천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무극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중원호 분위기는 그다지 밝지 못했다. 간밤에 죽어간 동료가 이백 명이 넘었던 탓이었다.
전쟁에서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동료의 죽음은 살아남은 이들을 힘겹게 했다.
“들어라!”
무겁게 가라앉은 중원호에 백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망연한 눈으로 강물을 주시하던 무인들이 백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유람하기 위해 장가에 배를 띄운 게 아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 적을 없애기 위해 중원호에 올랐다. 오늘은 동료가 죽었지만 내일은 내가 죽을 수도 있는 게 전쟁이다. 슬픔을 이겨야 한다. 먼저 죽어간 동료들의 몫까지 살아남을 생각을 해야 한다. 이제는 잊고 내일을 생각해야 한다. 그게 우리들이 지금 할 일이다. 철웅!”
혈뇌각 무인들을 향해 엄하게 소리친 백산은 철웅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무기를 점검하고, 기관을 확인해라. 무협이다.”
“알겠습니다.”
철웅은 몸을 돌려 혈뇌문 문도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추모의 시간은 지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라. 각자의 무기를 점검하고, 기관이 정상 작동하는지 확인하라. 서둘러라! 할 일이 없는 녀석들은 청소라도 해라. 갑판이 이게 뭐냐”
혈뇌각 무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에 쌓아 두었던 화살을 정리하는 자들, 사천당가에서 지급해준 암기 통을 점검하는 자들, 모두들 무엇인가에 집중하려 애를 썼다.
백산은 그런 부하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선실로 향했다.
“많이 늘었구먼.”
백산이 안으로 들어서자 소살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졌다.
“뭐가?”
백산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말빨 말이오. 옛날에는 몇 마디만 하면 더듬댔잖아.”
“무슨 소리야 임마. 그 백무천인가 하는 놈이 내 말빨 때문에 뒈진 걸 몰라?”
“염장 지르는 걸 말빨이라 하면 안 되지. 남 약 올리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뇨. 하여간 형님은 점점 성주 티가 조금씩 나는 것 같소. 남은 건 대가리에 먹물만 조금 집어넣으면 되는데.......”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잖아 임마. 여기 봐라. 이게 뭔지 아냐, 나처럼 천자문을 뗀 사람이 보는 책이란다. 소학(小學)이라고 들어봤어?”
혹여 누가 들을세라 밖을 흘끔 쳐다보던 백산은 탁자 위에 놓은 두툼한 책을 가리켰다.
“소학!”
천자문을 뗐단 말에 충격을 먹었다는 듯 소살우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백산이 가리킨 탁자 위를 쳐다보았다. 그의 말대로 그곳에는 천자문이 아닌 소학이란 제목이 적힌 책이 놓여 있었다.
“야, 사진악, 저 책....... 천자문 뗀 사람이 보는 것 맞냐?”
“조용히 좀 말하게. 부하들 들을까 겁나는구먼.”
“걱정 마라. 이미 음파를 차단해 두었으니까.”
“그래도 창피한 것은 아는가 보네. 맞아, 소학은 애들이 여덟 살 되면 가르치기 시작하는 책이야. 빠른 애들은 다섯 살만 돼도 배우고.”
사진악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천자문을 모른다고 했을 때 그러려니 했지만 설마 소학이란 말도 한번 들어보지 못했을 줄은 몰랐다.
그런 녀석들이 심검을 익혀냈다는 사실이 여전히 의문이었다. 녀석들을 보고 있노라면 하늘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이없는 건 사진악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백산과 소살우는 소학이란 책을 허탈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살우야!”
한참 동안 소학을 주시하던 백산은 힘없는 목소리로 소살우를 불렀다.
“말하쇼!”
소살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음파를 차단하기 위해 끌어올렸던 내공마저 풀어 버린 채 맥없이 대답했다.
“우리 나이 뒤에 있는 십이란 글자를 뺀 코흘리개가 익히는 글이 소학이래.”
“나도 들었소. 심지어는 다섯 살 먹은 젖먹이도 배운다고 어떤 개자식이 말하지 않았소.”
“일휘는 글 배울 생각 없는 것 같던데 우리도 포기할까?”
“나야 상관없지만 형님은 부마가 될 사람 아뇨. 부마라면 공주 남편이고, 그럼 명절이나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대가리에 먹물 든 것들이 찾아올 텐데, 그것들하고 대화가 되겠소. 형수님만 쪽팔리게 될 것 아뇨.”
“나도 그래, 그래서 포기를 못하고 있는데 어떤 개 잡것이 사기를 팍팍 꺾어 버린다는 것 아니냐.”
“어? 왜 나에게 화살을 돌려. 무식한 건 자네들이라고.”
두 사람 몸에서 흘러나온 살기가 몸에 집중되자 사진악은 손을 흔들며 볼멘소리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중첩된 살기가 몸을 옥죄는 가운데 소리 없는 암경이 전신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심검을 넘어서 경지조차 알 수 없다고 했지만 두 사람의 무공은 가공했다. 사진악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그들이 풀어 낸 암경을 고스란히 맞고 있어야 했다.
“뭐하세요?”
그 참에 주하연과 설련이 선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고, 제수씨 나 좀 살려 주십시오. 저놈들이 미친 모양입니다.”
일순 암경이 풀리자 사진악은 앓는 소리를 하며 주하연에게 매달렸다.
“왜 그러세요?”
주하연은 멍한 얼굴로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글쎄 저놈들이 쌍으로.......”
“뭐하고 자빠졌어 임마. 쉬었으면 그만 가 봐야지. 살우 너도 그만 가봐.”
백산은 사진악의 말을 끊으며 빽 소리를 질렀다.
“소리 좀 지르지 마세요. 사숙님과 도련님은 제가 남아 달라고 했어요.”
“왜?”
“아무래도 통천연맹 일이 미심쩍어서요.”
그녀가 가장 고심했던 부분이었다. 위지천악의 죽음 때문이었다. 남효운은 이미 안경에서 죽었기에 통천연맹에서는 위지천악 혼자만 남는다. 모든 권력을 쥔 그가 백산을 찾아와서 자결을 하다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동안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개방 문도를 동원하여 통천연맹을 조사하자 엄청난 사실이 드러났다.
“배신이에요. 양천리와 제갈승후가 통천연맹을 장악했다네요. 신임맹주는 양천리고요.”
“무슨 말이야. 양천리 그놈은 나에게 단전을 파괴당했다고.”
백산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튀어 나왔다. 천붕회 비무 때 녀석의 단전을 부셔 버린 건 실수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단전을 노려 가격을 했고, 녀석은 무공을 잃었다. 그런데 통천연맹 맹주가 되다니.
“실수한 것 아뇨?”
소살우 역시나 이상하다는 듯 조심스레 물었다.
“아냐. 백보신권에 용왕유권 기운까지 심었단 말이다. 설사 대라신선이 녀석을 치료했다고 해도 무공을 회복하지 못해.”
백산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녀석의 몸을 고칠 가능성이 있었다면 그의 아비인 양호상이 복수를 하겠다며 찾아오지 않았을 터였다.
“대라신선보다 더한 놈이 있나 보지 뭐.”
“허 참! 요상한 일이네. 그놈이 어떻게 무공을 회복했지?”
심드렁한 소살우의 대꾸에 백산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공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맹주가 되었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갈승후가 놈에게 맹주 자리를 내주었다는 말은 양천리가 그보다 강하다는 말이 된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어떻게 무공을 회복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이곳에 왔다는 거예요. 불사삼살과 불사삼요를 대동하고요. 더욱 놀라운 일은 사령계 무인 천오백이 그들에게 당했다는 거예요. 한 명도 남김없이 몰살을 당했다네요.”
“그 강시가 그렇게 강한 거였어?”
불사삼강이라 하였던 혈영고루강시를 직접 경험해 보았고, 불사삼요의 하나인 흑사인이 싸우는 것도 보았다. 물론 개방의 후개인 장중을 격살하였지만 그다지 강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이 사령계 무인 천오백 명을 몰살시키다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오빠 입장에서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일반 무인에게는 아니죠. 강기에 이른 무공이 아니면 흠집조차 내지 못하는 괴물들이 천여 구나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령계가 아니라 어떤 세력도 괴멸당하고 말지요.”
“불사삼살이 뭐요?”
백산과 주하연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살우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강시의 일종이에요. 불해삼진과 더불어 불사삼괴라 불리는 무림의 전설이에요.”
주하연은 불해삼진과 불사삼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니까 밖에 있는 사신이란 녀석들과 비슷한 종자란 말이네?”
주하연의 설명을 듣던 소살우가 밖을 가리켰다.
“저들보다는 한 단계 낮은 강시들이죠.”
주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의 전면적인 수정이 필요한 시기였다. 지금껏 광풍성 무인들이 승리를 이끌어 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천붕십일천마의 강한 무력에 의존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동료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강시와의 싸움에서는 천붕십일천마의 무력은 의미가 없어진다.
설령 강시들을 전부 없앤다 하더라도 광풍성 무인들 또한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말 것이다. 그건 주하연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전날처럼 희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희생을 최소화하고 싶었다.
“병력을 남진관(南津關)으로 철수해야겠어요.”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지금 장강삼협에는 중원 무인 전체가 들어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병력을 동원한 곳이 무극계와 광풍성이고, 사령계와 통천연맹은 절반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다.
사령계나 통천연맹 또한 시간이 지나고 전황이 나빠지면 추가 병력을 파견할 것이다. 장강에서 살아남은 곳이 중원 무림의 패자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곳에 광풍성무인 전부가 숨어 있을 곳이 있을까?”
백산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쟁 중에 많은 인원을 잃었지만 지금까지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광풍성 무인의 수는 오천을 헤아린다.
흩어져 있을 때야 적의 표적이 되지 않겠지만 한꺼번에 모여 있으면 나머지 세 곳이 합공을 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천에 달하는 무인들이 숨어 은신해 있을 장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있어요. 그곳은 사숙님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주하연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사진악을 쳐다보았다.
“제수씨는 못 당하겠군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습니까?”
사진악은 놀란 얼굴로 주하연을 쳐다보았다. 수로채를 통합하다가 알게 된 곳이었다. 오십 년 전에는 그들을 가리켜 천사맹(天邪盟)이라 불렀다. 그 당시에는 강호 삼강의 한 곳으로 불리 정도로 강한 곳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천무맹과 천마맹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강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자신 또한 그들을 녹림수로채 일원으로 굴복시키지 못했다. 다만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협약만 맺은 채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강호를 정복하려면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죠.”
“사진악 또 죽고 싶냐?”
궁금증을 참지 못한 백산이 미약한 살기를 쏟아 내며 윽박질렀다.
“자네들도 아는 곳이야. 천사맹(天邪盟)이라고.”
“맞다, 천사맹. 그런데 걔들이 지금도 있어?”
백산은 낮게 소리를 질렀다. 천사맹은 악연이긴 하지만 인연이 있는 곳이다. 그들을 만난 곳은 동정호였다.
농수채를 비롯한 동정호에서 암약하던 수채 네 곳을 박살냈는데 그들이 바로 천사맹 산하였다. 강호에서 설 곳을 잃은 그들은 장강수로채를 장악하여 세를 확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맹주가 수영이었지 아마? 그런데 그들의 근거지가 남진관이었어?”
“무작정 강호를 쓸어버린 줄 알았더니 아는 사람도 있네?”
오히려 놀란 사람은 사진악이었다. 백산이 천사맹과 인연을 맺고 있는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아직 살아 있을 거네. 우리가 이렇게 정정한데........”
“얼레?”
아득해지는 사진악의 눈을 쳐다보며 백산은 의아한 얼굴로 입을 삐죽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이 홀아비로 늙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쯧! 쯧! 병신 같은 놈. 좋아하면 말이라도 붙여 볼 것이지. 바라만 보고 있었냐?”
“말은 무슨, 서로가 바빠서 얼굴 볼 틈도 없었는데.”
한 인연이가면 새로운 인연이 온다는 말은 맞았다. 냉추렴의 기억이 희미해질 즈음하여 그녀를 만났다. 하지만 추억을 쌓기에는 너무 바빴다. 그녀는 천사맹을 정비하느라 바빴고, 자신은 녹림과 수로채를 정비하느라 눈코 뜰 사이도 없었다.
그렇게 오십 년의 세월이 흘러 버린 것이다.
“하여간 대가리에 먹물 든 것들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좋으면 좋다고 하면 되잖아. 공자 왈, 맹자 왈 할 때는 기름칠한 것처럼 주둥이를 놀리다가 정작 해야 할 말은 못한단 말이야. 생각 있으면 말해. 내가 중신 서 줄 테니까.”
“미친 놈, 나이가 몇인데 그런 소릴 하냐. 그리고 그녀는 진즉 시집갔을지도 모르는데. 아마 갔을 거야. 혼자 살기에는 너무 예뻤으니까.”
사진악은 정색을 했다. 뭔가 하기에는 세월이 너무 흘러 버렸다. 미래보다 과거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고목나무에도 꽃은 핀다더라. 아직도 혼자 살거나 아니면 과부라면 내가 중신 서 볼게. 넌 잠자코 따르기나 해. 그런데....... 너 가능하냐?”
“엉? 무, 무슨 말이?”
느닷없는 말에 사진악은 얼굴을 붉힌 채 더듬거렸다. 소살우 녀석들이 이번 전쟁보다 더 신경을 쓰고 있는 남성을 말하는 것인지 왜 모를까. 하지만 제수씨 두 명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자식, 어리기는. 이래서 남자는 장가를 가야 어른이 된다는 말이 있는 거야. 나이 팔십을 처먹으면 뭐하냐. 장가도 못 간 어린앤걸. 너도 살우랑 같이 운동해 임마. 아침에 기상해서 마보를 한 시진 취하고, 그 다음에는 뜀박질을 해. 되도록 내공은 이용하지 말고.”
“킥!”
이어지는 백산의 말에 설련과 주하연은 고개를 돌리며 낮게 웃었다.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도저히 팔십 먹은 노인네들이라 생각할 수가 없다. 이제 갓 십대를 지난 철부지처럼 느껴진다.
“웃지 마, 녀석들아. 저 녀석들에게는 심각한 일이라고. 하연이 너는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정력제 좀 만들어 봐.”
“알겠습니다, 서방님. 아주 강력한 놈으로 조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동자세를 취하며 주하연은 대답했다. 애써 웃음을 참는 얼굴로.
“그건 됐고, 그럼 남진관에 도착할 때까지는 우린 지금처럼 움직여야겠네?”
“일단 남진관까지는 같이 간 다음, 우린 무공이 강한 자들을 없애고 다녀야 해요. 그러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일거에 쓸어버려야 하고요.”
주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중원호는 장강에 와 있는 각 세력들의 이목이 쏠려 있는 유일한 표적이다. 중원호를 따라 움직이며 그들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무협이나 서능협에 와 있는 광풍성 무인들을 은밀하게 철수시키려면 중원호는 예정대로 내려가야만 한다. 물론 전쟁을 치르며.
“다른 소식은?”
“뇌우가 사령계를 떠나 섬서성으로 길을 잡았대요.”
“잘됐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뇌우 그 자식도 제법 대가리를 굴릴 줄 아는구먼. 그래봐야 우리만 좋은 일 나는.......”
득의만면한 얼굴로 마을 하다가 백산은 입을 닫았다. 빤히 쳐다보는 일행의 시선이 느껴졌던 탓이었다.
일행을 가만히 쳐다보던 백산은 느닷없이 무릎을 쳤다. 통천연맹의 정예는 이곳 장강에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통천연맹은 빈집이라고 했잖아? 저런 돌대가리 새끼. 그 머리로 어떻게 전쟁을 하겠다고.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백산은 뇌우를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일행은 별다른 표정 없이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살우 너도 모르잖아, 새꺄!”
급기야 소살우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고함은 지르고 지랄이쇼?”
소살우는 뜨악한 얼굴로 백산을 쳐다보며 따지듯 말했다. 형수들과 사진악이 가만히 쳐다보기에 자신 또한 덩달아 보조를 맞췄을 뿐이다. 아니, 내심으로는 백산의 말이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누구도 맞장구를 쳐주지 않자, 표정을 더욱 싸늘하게 바꿨다.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뇌우 그놈이 통천연맹을 찾아가는 이유를 말해 봐.”
표정을 수습한 백산은 주하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갈승후 때문이에요.”
주하연은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적의 머리를 먼저 잘라 내겠다는 말인가?”
“맞아요. 통천연맹에는 지금 제갈세가 무인들을 비롯하여 천여 명이 남아 있어요. 뇌우의 목표는 그들인 듯해요.”
“제갈승후 그놈이 목을 잘라 가라고 머리를 디밀지는 않겠지?”
“맞아요. 제갈승후 또한 뇌우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오빠 말대로 우린 짐을 던 거죠.”
“거 봐, 내 말이 맞잖아. 그럼 그놈도 결국엔 이곳으로 오겠네?”
“그럴 거예요. 그자와 양천리가 만나면 우린 힘들어져요. 그래서.”
“알았어.”
백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승후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을 터이고, 그가 올 곳은 이곳밖에 없다. 놈이 양천리와 합류하기 전에 찾아 없애야 할 터였다.
“이것으로 작전 회의는 끝났어요. 두 분은 지금 당장 불도각과 무욕각 무인에게 철수 지시를 내리고 일부만 데리고 이곳으로 오세요.”
“알겠습니다, 형수님!”
“그럼 이따가 저녁때 뵙지요.”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우리도 나가요. 안에만 있었더니 갑갑하네.”
“자꾸 그렇게 움직여도 괜찮은 거야?”
불룩한 배가 못내 걱정스러운 듯 백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산모도 운동을 해야 해요. 움직이지 않고 가만있으면 애가 커져서 낳을 때 힘들다고요. 그리고, 부하들에게 자주 보여줘야 한다고요.”
“뭔 말인지.......”
선실을 나서는 주하연을 뒤따르며 백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신한 산모도 있으니까 너희들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런 말이죠. 잘 하라는 백 마디 말보다, 저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더 효과적이니까요.”
백산의 뒤를 따르던 설련이 주하연 대신 대답했다.
“그게 먹혀?”
“당연히 먹히죠. 성주가 선두에 서서 적을 물리치는 장면만 보아도 사기가 올라가잖아요. 하물며 임신한 성주 부인이 선두에 있으면 부하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광분하겠지.”
“하연인 그걸 노리고 있어요.”
“무섭네.”
“무서운 게 아니고 그만큼 절실한 거예요. 실패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죠. 그러니까 백랑도 잘하세요.”
“알았습니다, 마님. 그런데, 내가 사준 동경이 왜 하연에게 있지? 혹시 달라고 그랬어?”
주하연의 손에 들린 동경을 가리키며 백산은 속삭이듯 물었다. 과거 공현에서 설련에게 사 주었던 선물이 분명했다. 혹시 하연이 질투해서 줘 버린 게 아닌가 싶어 묻는 말이었다.
“그러게 동생에게도 선물 좀 사 주지요. 받기만 했다면서요?”
설련은 짓궂게 웃었다.
“그동안 같이 있었으면서 뭘 물어. 시간이 없었다는 거 잘 알잖아.”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라고요. 무상신법을 펼치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람이.”
“알았어. 앞으로는 그렇게 해 볼게. 그런데 정말 준 거야?”
“아니에요. 뒷면에 적힌 글이 제문이라나 하면서 연구한다고 가져간 거예요.”
“그래? 난 또........”
“빼앗겼을까 봐 걱정돼요?”
“아냐, 그냥 물어본 거야. 그렇게 경우 없지 않다는 건 내가 잘 아는걸.”
“하연이 줘도 상관없어요. 전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니까요.”
“나도 충분히 행복해. 어쩔 때 보면 꿈인가 싶은 정도로. 혹시 이러다 깨 버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기도 하고.”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적을 없애는 데 몰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피를 보면, 비명을 지르는 그들을 보면 현실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꿈이 아니에요. 우린 행복하게 살 거예요.”
설련은 백산의 손을 꼭 쥐었다. 스스로도 그처럼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어쩌면 이 전쟁이 끝나도 계속 그런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꿈이라 해도 좋다. 그와 같이 있는 지그 이 순간이 더없이 행복하기에.
“다 잘될 거예요.”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즐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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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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