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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데이즈드 & 컨퓨즈드>를 위해 써내려간 유아인의 기록들.
첫번째 (2012.10월호)
김포공항에 내려 곧장 다다른 강변북로의 지독한 교통 체증 속에서 삼각기둥형의 아이리버 mp3 플레이어가 델리스
파이스의 '챠우챠우'를 반복 재생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지독한 정체였지만 시뻘겋게 늘어선 후미등의 행렬마저 그 때는 아찔한 도발로 나를 흥분시켰다.
아마도 강변북로는 막 상경한 촌놈에게 서울의 신기루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 때는 어디가 북쪽이고 어디가 남쪽인지도 몰랐는데. 수박의 가운데를 쩍하고 갈라놓은 것처럼 시원하게 내지르는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빛나던 도시는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은 환상이었다. 나는 그 광활한 아스팔트 길
을 통과해 서울이란 곳에서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그것은 대구의 어느 조산소에서 엄마를 비집고 나오며 출발한 그것과는 전혀 다른 삶의 시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를 분간하게 됐고 그 후로 지금까지 정확히 10년을 여기, 서울에 살았다. 나는 강변북로에
대해 쓰는 것을 좋아했다. 갓난아이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마주치는 섬광같이 압도적이었던 이미지와, 단순한 적응과 성장
속에서 변화하는 시각과, 문득문득 찾아온 향수에 대해 썼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며 인간이 겪는 적응이나 변화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데이즈드 &컨퓨즈드>에서의 내 첫 글은 필연적으로 그 글 중 하나로 시작한다.
2008.04.18 04시03분
이런 새벽엔 집 밖으로 5분만 달려도 촘촘히 노란 조명이 앉은 강변북로에 오를 수 있을 겁니다.
5년쯤 된 건지, 거기를 처음 달리며 벅차던 가슴은 이젠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굳이 잠수교로 내려가 강냄새를 맡아야
겨우 더듬을 수 있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은 그렇게 무뎌진 가슴에서 끝을 향해 여전한 속도로 멀리, 누렇게 뜬 시야
밖으로 멀어져갑니다. 어깨에 뽕깨나 들어간 비둘기색 재킷의 어색함이 오래 지나지 않았는데, 언제인지 목젖까지 졸라맨
타이가 퍽이나 잘 어울려 몸서리치고, 묵묵히도 커서가 깜박이는 이 창을 닦고 닦아 새벽처럼 차오르는 텍스트로 세상을
돌아봅니다.
여기 밖으로 무엇이 지나가는지, 나는 또 어디쯤인지. 바구니 달린 엄마의 노란 자전거를 타던 그 때처럼, 어느 길인지
헤매며 무릎은 고사하고 온 몸을 멍으로 검붉게 물들이던 시골뜨기는 이제 여기가 내 땅인 양 잘도 찾아 아스팔트에 올랐고,
세월에 찌든 형들의 '짠' 소리는 달게도 물들어 이게 내가 사는 세상이고, 분노는 수그러들어 안주나 하기엔 딱이지요.
이런 노래와 키보드 옆에서 땀 흘리는 맥주 말입니다.
내가 스스로 온 적 없는데, 시간마다 쌓여가는 숫자에 치이고 가히 인파라 할 사람들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습니다.
죽어도 내 발로 걷겠다고, 나를 좀 놓아달라고 치를 떨며 왔는데 나는 이렇게 여기 뿐입니다. 외롭네요. 이건 외로운
일이에요. 그리고 오늘 밤,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 서울 어디에서 맥주 한잔에 몸을 흔들어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느낀다면 나는 외롭지 않겠습니다. 그것만이 내가 여전히 강변북로를 달리며 설레야 할 이 도시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시간은 아무리 막아보아도 희미한 창에 쌓여만 가고, 날개를 접은 선배들의 채찍질은 엉덩이에 불이 꺼질세라 멈추지
않을테니, 누구 하나는 그 속도로 가로질러 얘기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만은 이 도시에서 소년으로 남아 있어도 나쁘지 않겠다고.
<시를 멈추지 않아도 좋겠다고.>
계획된 예산을 크게 초과한 임차료에도 불구하고 1년전,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은 전적으로 안방
에서의 전망 때문이었다. 남산이 훤히 보이는 창가에 책상을 두면 글이 막힘 없이 잘 써질 것만 같아서다. 과거에 글쓰기에
중독되었던 나는 간간히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고 친구들과 술판을 찾아 몰려다니는 일 외엔 거의 모든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글 쓰는 일에 몰두했고, 그 몇 년간의 시간 속에서 탐구와 수습과 확장은 반복됐다.
그 주체가 자아이건 세상이건 관계이건, 누구나 무엇으로든 그러한 일에 집중하는 시기가 있지 않은가. 나는 글로 성장을
그리던 청년이었다. 본업으로 한창 바빴던 스물 다섯 살을 전후로 갑자기 글의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시덥잖은 단어를
나열하고 몇 번의 수정을 보고도 끝맺음을 하지 못한 채 휴지통으로 직행하는 일은 잦았지만,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하얀 창의 깜박이는 커서만 멍하니 바라보다 윈도우를 닫아버리는 일이 빈번해지더니 언제부턴가는 아예 글을 쓰겠다는
의지 자체가 사라져버린 듯했다. 여기로 이사와서 계획대로 창가에 번듯한 책상을 배치하고 27인치 모니터를 밝히며 나는
단 한번도, 그 어떤 종류의 글도 쓴 적이 없다.
전망 좋은 방에 앉으면 글이 술술 나오리라했던 예상은 배부른 머저리의 착각이었다. 나는 글을 쓰는 행위를 구토나 배설
같은 것으로 비유하곤 하는데, 추잡하게 말하자면 꽃등심을 잔뜩 먹고 변비에 걸린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된 것이다. 무언가
꽉 차 있어 답답하지만 도무지 위 아래 어디로도 배출할 수 없는 상태.
이제는 닫혀버린 미니홈피란 채널을 통해 대중들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글쓰기를 하던 내가 배우로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지자 '유아인'이란 애가 글을 즐겨 쓴다는 것을 아는 출판사들로부터 출간 제의가 적잖이 있었다. 연예인을 대상으로
하는 진부하고 뻔뻔스러운 기획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등단하지 못한 글쟁이에게 책이란 너무나도 간절한 목표가 아닌가.
그럼에도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아니 쓸 수 없었다.
<누가 나로 하여금 시를 멈추게 했을까>
무사히 이 칼럼을 시작하게 된다면, 정히는 글이란 것을 다시 쓰게 된다면 반드시 거기에서부터 하고 싶었다. "누가 나로
하여금 시를 멈추게 했을까." 어느 20대 연예인의 글이 허세와 지적 허위로 치부되고 그 연예인이 갖은 편의와 달콤함에
중독된 채로 징그러운 겁쟁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라면 전혀 달갑지 않은 마감 독촉을 받으며 억지로라도 다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분명한 발악으로 2008년의 청춘이 거창하게 그리던 이 도시의 마지막 희망을 휘갈기리라.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수도 없이 거울을 들여다 보고, 만취한 채 음악을 듣고, 춤을 추고, 사랑을 나누고, 끔찍한 아침을
맞이한 치열한 일상 속에서,엿 같은 잣대로 지긋지긋하게 평가받으며 당신이 느끼는 것을 내가 느낄 수 있다면, 내가 느
끼는 것을 당신이 느낄 수 있다면, 그 광범위한 공감 안에서 나는 계속 글을 쓸 것이다. 일단은 여기, 약속된 시간만큼 이
곳에서 만나자.
WRITER 유아인(배우)
2. <데이즈드 & 컨퓨즈드>를 위해 써내려간 유아인의 기록들.
세번째 인디라는 껍질(2012.12월호)
' 인디 영화계의 꽃'으로 불린 한 여배우가 있다.
영화계 인사들과 인디 영화 팬들에게 놀라운 호응을 이끌어 낸 하나의 단편 영화로 신인의 여배우는 자기가 피어난 줄도
모르게 꽃이 되었다.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 후 몇편의 영화로 커리어를 쌓으며 성장하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안 그녀를 향하는 팬덤 또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필모그래피는 배우의 퍼즐이다.퍼즐조각들을 구체화 된 이미지로 형성시키지 못한 신인의 배우에게는 한두 개의 조각이
전체의 이미지가 된다.
끝을 예측할 수 없는 그 다음의 모든 퍼즐은 기대와 배신 그리고 배우 본인의 끝없는 단련을 통해 확장하며 어떤 궤도에
올라가서야 커다란 연결고리를 가진 구체화 된 이미지로 형성된다.한두 조각쯤 계륵으로 붙어 있어도 공고히 지켜지는
이미지.
그녀의 첫 번째 조각은 처음이란 찰나 속에서 인디 영화계의 꽃이란 선명한 이미지로 피어났다.하우스에서 길러지지 않고
황량한 들녘에 핀 희대미문의 꽃에 나비들이 날아든다.얼마 후 그녀는 대형 방송사의 주말 특별 기획 드라마에 메인 캐릭터
로 캐스팅된다.
곧이어 일부 팬의 만류와 항의가 터져나왔다. 어째서 영화를 계속하지 않고 드라마에 출연하냐는 것이었다.흔히 있는 제작
보고회 따위의 행사에서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경직되던 그녀의 얼굴 근육이 몇 년을 거치며 조금씩 이완되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그녀가 변했다고도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튜브 톱 드레스를 입고 부산국제영화제의 레드 카펫을 밟으며 미소
짓는 그녀에게 때가 묻었다고 했다.
무엇으로부터 변했고, 무엇에 때가 묻었으며, 무엇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걸까.주목받던 신인 여배우는 자신을 향하는 팬덤
속의 특정 인물에 의해 배우의 본질이 아니라 그녀를 옭아맨 '인디'란 수식이 파생하는 가장 편협한 이미지로 소비되었다.
해를 거듭한 성장 속에서 그녀는 변절자가 되었다.
스포트라이트 앞에서 인형같이 웃어 보이는 대신 어리숙하게 구는 신선함을 유지하고 드라마 출연은 금기시되며 가슴골
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레드 카펫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일부 집단의 인디에 대한 혹은 거기서 핀 꽃에 대한 판타지를 그녀
는 충족시키지 못했다.그녀는 개의치 않고 그 단어를 비집고 나와 자기 자신이란 꽃으로 만개하고 있다.
그녀는 대형 배급망과 자본을 확보한 영화에 출연하고 케이블 tv 드라마에 등장하며 홍상수 감독의 영화 안에서 연기한다.
그녀는 어디에서 연기하느냐보다 어떻게 연기하느냐를 중요시하는 연기자다. 그 여배우의 이름은 '정유미'다.인디를 언급
하며 흔히, 가장 크게 범하는 오류는 인디를 특정 장르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cgv와 씨네큐브를 나누고, sbs 인기가요와 ebs 스페이스 공감을 나누는 지점은 장르의 특성에 있지 않다. 인디란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하는 비주류 성향의 일부 장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자본에 침식되지 않은 상태로 순수한 창작이 일어
나는 특정한 양식을 얘기하고 그 주체가 되는 창작자들을 이른다.
또 하나의 오용과 부작용은 인사이드의 문을 열지 못한 창작자들의 절패감과 일부의 대중이 가지는 기존 대중문화에
대한 염증의 골이 인디란 단어를 등에 업고 깊어진다는 것, 희소한 문화를 생산하고 향유하는 우월감으로 왜곡된 반골
정신이 아웃사이드의 장벽을 높이며, 그 반대쪽에 주류와 상업 문화를 세워놓고 그것들을 불순한 것으로 매도하며 배타
적인 시선을 갖게 된다.
너나 할 것 없이 권세와 부귀를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불순한 것으로 여기는 자본주의 내부의 위선이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창작자의 진정성이 담긴 빛나는 작품들이 대중의 외면 속에서 꺼져가는 불씨가 되는 것보다는, 이왕이면 더욱 다양한
루트를 통해 소개되고 더 많은 평가의 기회를 얻으며 그림자를 밝히는 불씨가 되는 쪽이 좋지 않은가.
표현의 의도가 자본에 의해 변질되지 않고, 작품성이 자본에 의해 훼손되지 않으며 역으로 자본을 냉정하게, 이용할 줄
알고, 자본을 통해 더 많은 대중과 만나는 과정과 그 일을 해내고야 마는 존경받아 마땅한 창작자들이 시장 논리에 의해
변질된 영웅으로 치부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즐기고 감동하며 문화 욕구를 충족할 수 있어야 한다.대 중에게는 영화보다 음악을 접하는
것이 더 간편한 일이고, 영화계보다 대중 음악계에서 인디를 둘러썬 긍정적 변화들이 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매스미디어의 인디 뮤지션들에 대한 관심은 보다 다양한 틀을 거리에 대한 대중의 요구와 함께 최근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늘어났고, 그를 통해 기존의 인디 안에서 내공을 기르며 마니아 층에 갇혀 있던 뮤지션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cd산업은 무너졌을지 몰라도 한국의 대중 음악계는 k-pop으로 대변되는 아이돌 음악의 홍수 속에서 보다 풍성하고
다양한 컨텐츠로 채워지고 있다.소녀시대가 미끈한 다리를 내놓고 오빠를 외치는 것은 대단한 철학을 가진 예술이
아닐지 모르나 충분한 엔터테인먼트이고, 틀림 없이 대중문화의 한 갈래다.
그리고 어딘가에 인디가 있다. 장 기하는 자의와 무관하게 인디계의 서태지란 타이틀을 달고 sbs의 간판 토크쇼
'힐링캠프'에 나와 내리 한 시간을 떠들며 공중파 tv 채널에 얼굴을 비친다. 과거의 명성에 비하면 궁색하기 없는 mbc
예능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서 4인조 밴드 국카스텐은 자신들만의 색깔로 단단한 음악 세계를 펼쳐 유명 출연진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며 시청자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보다 더 이전에 10센치는 mbc '무한도전'을 통해 수많은 대중에게 자신들의 음악과 존재감을 알리며 핫하게 떠올랐고
기타를 치고 노래하고 유명 여배우와 함께 tv 광고에까지 얼굴을 내비치며 폭발적 인기의 맹위를 떨쳤다. 그들은 모두
'인디 밴드'의 카테고리로 분류되고 인지되는 뮤지션들이다.
우리는 그들이 아이돌 가수들과 어깨를 겨루며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의 순위 차트 상위권에 랭크되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일찍이 자우림이나 YB같은 뮤지션들이 존재했고, 이 외에도 다수의 그룹사운드와 언더그라운
드로 통하던 힙합과 같은 장르의 뮤지션 또한 지금은 대중의 각광 속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다.
그들은 홍대 앞에서 놀다가 압록강을 건너 여의도로 간 것인가? 그들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변절자들인가? 매스미
디어는 대부분이 사기업의 손아귀에서 쥐락펴락 된다. 공영을 가장하고 있지만 가장 상업적인 매체라 할 수 있는 tv 예능
프로그램에 '인디'한 아티스트들이 나와 노래하고, 소위 기획사의 자본을 통해 음반을 발매하고 이윤을 추구하며 대기업
의 광고에 출연해 통장 잔고에 0을 몇 개 늘린다 해도 그들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음악가의 본질은 음악에 있고, 배우의 본질은 연기와 작품이며, 작품은 곧 작가와 감독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본
의 논리에 매몰되어 본질을 잃지 않는 한 충분히 창조적인 채로 어디에라도 존재할 수 있다.
미디어의 순기능을 적절히 이용하고 본질을 잃지 않는 영민한 아티스트의 출현은 지극히 반길만한 일이다. 인디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대중은 보다 유연해졌다. 만일 우리의 기대가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마라톤을 완주하는 판자촌의 영웅을
향하는 것이라면, 거기에 인디는 없다.
장기하가 얘기한다. 자신은 인디에서 출발했지만 인디를 지향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김기덕 감독이 케이블 tv 토크쇼에
나와 얘기한다. 서운했다고, 이제는 더 많이 사랑받고 싶다고.
그들은 어떠한 시기에 틀림없이 인디의 상태 또는 그러한 양식으로 존재했지만 그것을 향해 가는 아티스트는 아니다.
판자촌에서 시작된 창작은 거기에서 끝나야만 순수한 것인가. 좋은 것들, 좋은 사람들. 이왕이면 여럿이 나누자. 인디를
바라보는 대중의 편협하지 않은 시선, 그 단어에 심취하지 않은 순수한 표현의 욕구를 가진 창작자들의 정확한 자기 인식,
그리고 자본과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인디는 한류를 타고 뱉어나가는 한국 대중문화의 견고한 기저가 되어줄 것이다.
그 껍질 밖으로 변태하여 수 많은 아티스트들이 이 땅에서 피어나고 있다.
WRITER 유아인(배우)
음악가의 본질은 음악에 있고, 배우의 본질은 연기와 작품이며, 작품은 곧 작가와 감독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본의 논리에 매몰되어 본질을 잃지 않는 한 충분히 창조적인 채로 어디에라도 존재 할 수 있다.
판자촌에서 시작된 창작은 거기에서 끝나야만 순수한 것인가? 좋은 것들, 좋은 사람들, 이왕이면 여럿이 나누자.
유아인, Dazed &Confused Korea 12월호 중
첫댓글 모아서 보고싶었는데 고마워! 저장해놓고 봐야지
글 진짜 좋아 ㅠㅠㅠㅠ
멋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과거의 나는 이러고 살았군
인디영화계의 꽃이래서 정유미떠올랐는데 교양때 정유미 나온 인디영화 봤는데.. 진짜 예뻤엉..ㅠ
유아인 넘좋아 ㅜㅜㅜㅜ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정말로 ?,,,,
아ㅠㅠ유아인 에세이 내주면 좋겠다ㅠㅠ
아직도 에세이가 나왔으면 좋겟서 ?,,,
@김 용 선 ㅎㅎ 아니....과거의 나 미쳐ㅛ나바..
글 진짜 쫀쫀하게 잘 씀 ...
유아인 책내라 책 ㅠ ㅠㅠ
아직도 그 의견 유효하니 ?...
@김 용 선 노오오오오오어오오오오옵!
엥호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