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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78)
[물고 물리고, 죽고 죽이고]
황하를 서편으로 끼고 있는 여양산맥은 섬서성과 산서성을 구분 짓는 경계다. 그 여양산맥 남부에 있는 용문산은 최근 유명세를 타는 곳이었다. 용문산의 산세가 수려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황하를 등지고 세워진 통천연맹이 용문산을 무림 명소로 만든 원천이었다.
보통 거대세력이 세워지면 그 세력 주변에는 도시가 형성되고 장사치들이 들끓기 시작한다. 용문산 너머 하곡 또한 마찬가지였다.
통천연맹과 한 시진 거리에 있는 하곡은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호황을 누렸다. 통천연맹에서 나온 무인들과, 통천연맹으로 가고자 하는 무인들로 연일 넘쳐났던 탓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면서 하곡은 황량한 도시로 변하고 말았다.
텅 빈 통천연맹이 그 이유였다.
그랬던 하곡에 무인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검은 옷을 걸친 자들부터 시작하여 궁장을 걸친 미녀들까지, 한두 명씩 모여들던 무인들은 어느덧 하곡을 빼곡히 채웠다.
처음 반가운 얼굴로 그들을 맞았던 하곡 상인들은 잔득 겁먹은 얼굴로 가게 문을 닫고 집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손님도 아니었고, 통천연맹 무인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사령계.
운남을 떠난 사령계 무인들이 드디어 통천연맹에 도착한 것이었다.
“이번 출정은 운이 좋군.”
멀리 수백 채의 고루거각을 쳐다보며 뇌우는 혼잣말을 했다. 그가 운이 좋다고 말하는 이유는 사천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무극계가 과거 통천연맹 사천지부를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칠 준비를 하고 사령계를 나섰다. 실은 대부분의 병력을 동원한 이유가 무극계 무인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천 땅에 들어서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극계 무인 전부가 장강으로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더하여 무극계 지존인 순우혁로는 아들인 순우창천은 물론이고 부모마저 광풍성 무인들에게 잃었다고 하였다.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절반 정도는 장강으로 갈 것을 예상하고 편성한 부하들의 수가 삼천이었다. 그런데 싸움 한번 하지 않고 섬서성 통천연맹까지 오게 된 것이다.
“남아 있는 적은 이천이라 했던가?”
뇌우는 나숙선에게 물었다. 통천연맹 또한 대부분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 통천연맹의 머리라 할 수 있는 제갈승후가 이천여 병력을 데리고 있다고 하였다.
그들을 섬멸하고 장강으로 갈 참이었다.
“그렇습니다, 마존. 그런데 굳이 여길 공격할 필요가 있습니까?”
나숙선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장강 상황이었다. 차라리 지금 병력을 장강으로 투입하여 그곳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편이 더 나을 듯했다.
장강에서 승리한다면 제강승후를 비롯한 이천여 명의 무인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곧바로 항복해올 터이다.
“나 문주!”
“말씀하십시오, 마존.”
“내가 이곳으로 온 이유는 이전투구의 현장에 끼고 싶지 않아서요. 지금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건데 장강에서는 승자가 나오지 않을 공산이 크오.”
“양패구상할 거란 말입니까?”
“그렇소. 그곳에서 싸우는 자들은 중원을 놓고 싸우는 게 아니오. 원한을 풀기 위해 싸우는 자들이 대부분이지. 물론 그 대상은 광풍성이겠지만.”
뇌우가 이곳으로 온 이유는 양천리 때문이었다. 내공을 잃었던 그가 어떻게 무공을 회복했는지 알 필요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현 상황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무극계 지존인 순우혁로와 통천연맹 맹주 양천리가 백산과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사실이다.
중원정복이란 가치를 내걸고 장강으로 갔지만, 그들 또한 인간이기에 결코 복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뇌우가 장강으로 천천히 가려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중원 정복보다는 복수에 치중한다면 순우혁로나 양천리는 모든 것을 다 걸게 될 터이고, 광풍성은 그들을 막아 내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다.
설령 승자가 되다하더라도 만신창이가 될 것이 분명하다. 남아있는 그들을 정리하면 중원은 절로 수중에 굴러 들어온다.
“더구나 우리가 보낸 불사삼강 천오백 구에 통천연맹의 불사삼요와 불사사살이 더해지면 살아남을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뇌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광풍성, 통천연맹 그리고 무극계. 모두들 승리를 위해 장강으로 갔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패자가 될 것이다. 승자가 없는 전쟁 그곳이 장강인 것이다.
“그만 가지.”
주변을 둘러보며 뇌우는 짧게 말했다.
양천리가 요왕이 되었고, 요왕이 강시의 지존이란 사실을 알 리 없는 뇌우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령계 삼천 병력이 진격을 시작한 그 시각, 통천연맹 진영은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배치는 끝났습니까?”
안으로 들어온 인물을 향해 제갈승후는 낮게 물었다. 천기자(天機子) 제갈현리(諸葛玄理), 제갈승후의 숙부이자 제갈세가의 이인자였다.
“완벽하게 마쳤다. 놈들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진이 발동할 거다. 그런데...... 얼마 동안 막아야 하는 거냐?”
제갈현리는 걱정스런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통천연맹 주변에는 전부 다섯 개의 진이 광범위하게 설치되어 있고, 그 안은 수많은 기관과 암기로 무장한 무인들이 은신해 있다.
하지만 적은 삼천에 달하고, 사령계 지존인 뇌우가 직접 왔다고 하였다. 시간이 문제일 뿐 그들을 막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막아 내는 게 아니라, 사령계 전력 일부를 없애면 됩니다. 천삼백을 투입해서 이천 명을 잡아낸다면 손해나는 장사는 아니질 않습니까?”
“지금 천삼백이라 하였느냐?”
제갈현리는 의아한 얼굴로 제갈승후를 쳐다보았다. 그가 말한 천삼백 명은 제갈세가 무인 칠백을 제외한 나머지를 말한다.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갈세가를 제외한 나머지는 어차피 양천리의 세력입니다. 남겨 둘 필요가 없지요.”
“장강에서 양 맹주가 이길 걸로 보는구나.”
제갈현리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장강 상황은 거의 암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 알 수도 없거니와, 설령 밀정을 심어 두었다 하더라도 이곳까지 소식이 오기에는 너무 멀다.
그런데 제갈승후는 양천리가 승리할 것처럼 말하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다.
“최소한 패하지는 않을 겁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거냐. 사령계 또한 불사삼강을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냐?”
“그래서 패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겁니다. 양천리는 강시의 지존인 요왕입니다.”
제갈승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양천리는 불사삼강에 대해 확실하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갈승후는 불사삼강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했던 양천리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불사삼강을 조종할 자신이 있기에 직접 출병한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한 확신은 낙양에서 골동품 가게를 불살랐던 제군의 행동을 보면서 더욱 명확해졌다.
“그는 천오백 구에 달하는 불사삼강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이천오백 구에 달하는 불사삼괴를 전부 거느리게 됩니다.”
말 그대로 최강 전력이다. 더구나 불사삼강은 사령계 내부에 있다. 그들을 시켜 사령계 무인을 없애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욱 쉬울 것이다. 양천리가 패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근거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도착한 모양입니다.”
대기가 출렁이는 듯하자 제갈승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 번째 관문인 천라망혼진(天羅亡魂陣)이 발동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오늘밤 떠날 수 있도록 중비해 주십시오.”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제갈현리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쿠우우!
대기가 울부짖었다.
통천연맹 앞 평원에 발을 들이자마자 검은 안개가 사방에서 솟구쳐 올랐다.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군.”
점차 어두워지는 전면을 보며 뇌우는 희미한 미소를 물었다.
“나 문주, 오십 년 전에 그들이 어떻게 제갈세가의 진을 뚫었다고 했지?”
“땅굴을 파고 들어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뒤에 서 있던 나숙선이 나서서 대답했다. 오십 년 전 귀마겁 때 하북팽가와 남궁세가 그리고 개방의 연합세력이 제천맹주 제갈수연의 본가인 제갈세가를 공략했을 때 일이다.
그들은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 땅굴을 팠다고 하였다.
“맞아. 땅을 팠다고 했지. 다른 곳에 전했소?”
고개를 끄덕인 뇌우는 다시 물었다.
“이미 전달했습니다. 지둔공을 익힌 무인들도 전면으로 배치했고요.”
지금 사령계는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통천연맹을 공략하고 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지둔공을 익힌 무인들을 선발하여 전면에 배치하였고, 벌써 작업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저들로 되겠습니까?”
좌우를 흘끔 쳐다보며 나숙선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이백 명, 사령계 지존인 뇌우를 따르는 인원수였다. 더구나 이편은 지둔공을 익힌 무인들을 배치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무공이 강하다고 하지만 그 인원으로 진을 통과하려는 뇌우의 의도가 일견 무모하게 보였다. 하지만 뇌우는 태연했다. 오히려 싱긋 미소를 짓더니 좌우를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전진하라!”
“존명!”
우렁찬 고함 소리를 내지른 사령계 무인들은 잔뜩 내공을 끌어 올린 채, 검은 운무가 넘실대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준비를 많이 했군.”
부하들을 뒤따라 안쪽으로 들어선 뇌우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 장밖에 나오지 않는 시계 때문이었다. 검기를 구사하는 정도의 무인에게 있어서 어둠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눈앞의 운무는 안쪽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진했다.
더구나 그 안에서는 무수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조금 전 대기의 울림이라 여겼던 소리들은 전부 진에 의해 생성된 소리가 분명했다. 암기 공격이나 기관이 설치되어 있을 터인데 소음은 치명적인 장애로 작용할 가능성이 컸다.
“암기에 주의해라!”
슉! 핑! 핑핑!
뇌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소음이 들려왔다. 나직한 비명을 지르며 사령계 무인들의 신형이 픽픽 쓰러졌다.
“암밀단(暗密團)과 묵혼대(墨魂隊)는 전면으로 나서라!”
십여 명의 부하들이 쓰러지자 그제야 뇌우는 뒤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가 이백 명이란 부하들만 대동한 채 정문으로 다가선 이유가 바로 어둠 속의 어둠이라 불리는 암밀단과 암흑의 속의 혼이라 불리는 묵혼대 때문이었다. 각각 오백 명으로 구성된 암밀단과 묵혼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마신가의 최정예였다.
스르르!
“헉!”
뒤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나숙선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공간이 이동하듯 천천히 흘러가는 그것들은 조금 전 뇌우가 말했던 암밀단이나 묵혼대가 분명할 터였다. 바로 옆에 있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그들을 확인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이름처럼 그들은 어둠이었다.
“컥!”
“크윽!”
전면 어둠 속으로부터 나직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가 누구를 죽이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그 결과는 두 사람 눈앞에 나타났다.
다섯 구의 시체는 지면에 쓰러져 있고, 땅속 세 곳에서 피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전면에 검은 옷을 걸친 무인 여섯 명이 쓰러져 있었다.
“저들이?”
다른 자들과 달리 검은 옷을 걸친 여섯 명을 쳐다보며 나숙선은 낮게 중얼거렸다.
“맞소. 저들이 암밀단이오. 여덟을 잡고 여섯이 당했군. 암밀단은 독에 당했고.”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암밀단을 쳐다보며 뇌우는 의외라는 듯 눈을 가늘게 모았다. 적이 생각보다 강했던 탓이었다.
암밀단 정도면 큰 희생 없이 진을 통과할 걸로 여겼다. 두 명에 한명 꼴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역시 제갈세가란 말이군.”
말로만 듣던 제갈세가의 위력을 몸소 실감하자, 그동안 무공 쪽 일면만 보고 무인들을 무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오시오.”
잘못을 깨달았으면 바로 시정하는 게 뇌우의 성격이었다. 나숙선을 향해 소리친 뇌우는 전면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가 발견한 것은 암밀단과 통천연맹 무인의 시신이었다. 처음과는 달리 공히 세 명씩 쓰러져 있었다.
누워있는 암밀단 무인들을 쳐다보던 뇌우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진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진이 아니라면 이리도 쉽게 암밀단이 당할 이유가 없었다.
“서필준!”
부하들의 시신을 쳐다보던 뇌우는 전면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부르셨습니까? 가주님!”
어둠처럼 검은 덩어리가 다가와 뇌우 앞에 부복했다. 검은 운무가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자. 깡마른 체격의 그는 암밀단 단주인 무영혼(無影魂) 서필준(徐弼俊)이었다.
“상황은 어떠냐?”
서필준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뇌우는 건성으로 물었다.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서필준의 얼굴엔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상황이 어렵다는 의미이리라.
“쉽지가....... 않습니다.”
뇌우의 짐작대로였다.
서필준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에 있어서는 제갈세가가 최고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하지만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라면서 내심 무시했었다. 그런데 실제 경험한 제갈세가의 진은 욕이 나올 정도로 대단했다.
어둠과 소음 속에 숨은 적도 문제였지만, 오백여 장에 불과했던 벌판이 끝나지 않는다는 게 더 큰 무제였다. 암밀단이나 자신의 무공 실력이면 벌써 통천연맹 정문을 통과했어야 했다.
그런데 여전히 암밀단은 어두 속에 있다.
허공이면 진을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경공을 펼쳐 높이 솟구쳐 올라가 보았다. 그러나 그곳 역시 짙은 어둠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동서남북은 물론이고 허공마저도 진의 영향권에 들어있었던 거였다.
“암밀단과 묵혼대를 뒤로 물려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필준은 전방으로 나서며 고함을 내질렀다.
“존명!”
사방에서 나직한 소리가 들려오고 검은 운무가 바람을 타듯 뒤편으로 밀려났다.
“헉!”
구름처럼 물러나는 암밀단과 묵혼대를 주시하던 나숙선은 놀란 비명을 지르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바로 앞에서 가공할 기운이 밀려들었던 것이다.
뇌우였다.
“과연 지저만상신공(地底萬狀神功)!”
나숙선은 감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과거 검운비를 제압할 때 이미 견식했던 무공이다. 그 당시 검운비는 무공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제압당하고 말았다.
뇌우의 등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귓전으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어둠을 제압하는 것은 빛이다. 빛이 나타나면 어둠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뇌우의 몸이 반투명하게 변했다.
공기마저도 통과시켜 버릴 듯 투명하게 변하던 뇌우의 몸에서 어느 순간 찬연한 빛이 터져 나왔다.
광천무(光天舞)라 불리는 지저만상신공 이 초식은 말 그대로 빛의 해일이었다.
“세상에......!”
나숙선은 입을 쩍 벌렸다. 일출을 보는 듯했다. 어둠을 몰아내는 게 아니라 소멸시키는 무공이었다. 찬연한 빛이 지나가는 곳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어둠도 지면도, 적도.
일수에 전면 삼십여 장이 초토화되는 광경은 두려움밖에 남지 않았다. 망연한 눈으로 뇌우의 등을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에 두 번째 빛이 잡혔다. 다른 무공은 일절 펼치지 않았다.
계속하여 광천무를 펼치며 나아가던 뇌우의 신형이 어느 순간 우뚝 멈췄다. 눈앞에 거대한 철문이 서 있었다. 어둠을 걷어내고 통천연맹 정문에 도착한 것이었다.
“뇌우를 막아설 것은 없다!”
낮게 외치며 전면을 향해 양손을 가볍게 뿌렸다.
스스스!
삼 장 높이에 달하는 철문이 가루로 스러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약한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암밀단과 묵혼대는 적을 추살하라!”
“존명!”
검은 구름이 통천연맹 안으로 스며들었다.
“대단하구나, 뇌우.”
통천전 지붕에서 진을 주시하고 있던 제갈승후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천라망혼진(天羅亡魂陣), 방금 뇌우가 무력으로 뚫고 들어온 진의 이름이다. 천라망혼진을 구축할 때 기준이 되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양천리였다.
그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진을 구축했던 것이다. 그런데 뇌우 또한 천라망혼진을 무력으로 통과해 버렸다.
결국 양천리와 뇌우의 무공 수위는 비슷하다는 결론인 것이다.
결국 장강 전쟁에서의 승패는, 양천리나 뇌우 본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하들의 전력에 결정짓게 되었다.
불사삼괴를 거느린 양천리가 가장 유리하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넌 이곳에서 그 전력이 될 부하 대부분을 잃게 될 것이다, 뇌우.”
제갈승후는 좌우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은 여전히 어둠에 휩싸여 있다. 뇌우가 진입했던 전면을 제외하면 다른 곳에선 천라망혼진은 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곳으로 진입한 적은 아군과 함께 대부분 동귀어진을 하게 될 터이다.
“그리고 통천연맹 안쪽도 결코 쉽지 않은 곳이다. 그곳을 깨트려야 여기까지 올 수 있단 마이네. 물론 그 전에 난 떠나겠지만.”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통천연맹 내부에서 많은 진이 구축되어 있고, 그 속에는 어김없이 무인들이 은신해 있다. 그들 전부를 없앤 다음에야 사령계 무인들은 이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아무도 없는 빈 집에.
“그럼 장강에서 만나세.”
다시 한 번 사령계 무인들을 쳐다보던 제갈승후는 몸을 돌렸다.
제갈세가 무인들의 희생이 많아졌지만 그 또한 장강으로 올 터이고, 그곳에서 중원 무림의주이이 가려질 것이다. 양천리의 승리로.
불사삼괴를 거느린 양천리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구당협에서 고악상과 암문 무인 천오백을 몰살시킨 양천리는 무협을 향해 진군했다.
장강삼협에 와 있는 대부분의 무인들이 밤을 이용하여 이동하는 것에 반해 그는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았다.
지금 양천리를 비롯한 통천연맹 무인들이 도착한 곳은 신녀봉 아래 계곡이었다. 그곳은 이미 전쟁터였다.
서로를 향해 도검을 날리며 치열하게 싸우는 그들은 사령계와 무극계 무인들이었다. 전투를 시작한 지 상당 시간이 경과했는지 계곡 안은 온통 비릿한 혈향으로 가득했다.
챙! 챙챙챙! 챙챙!
“죽여라!
“크아악!”
“아악!”
“쿡!”
계곡 안을 쳐다보던 양천리는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사령계가 유리한 입장에 서 있는 듯했다. 여기저기 쓰러진 자들은 대부분 무극계 무인들로 보였다.
그들이 보유한 불사삼강의 한 종류인 반시 때문이 분명했다.
“제군!”
“하명하십시오.”
“내가 제혼영매대법을 시전하고, 반시들이 따르기 시작하면 바로 공격을 시작해라. 작전은 전과 동일하다. 전부 몰살시켜라!”
“알겠습니다, 요왕!”
“마령십위는 나를 따라라!”
허공을 향해 몸을 날리며 양천리는 소리쳤다.
허공답보의 경공을 펼쳐 날아가는 양천리를 따라 열 명의 무인들이 몸을 날렸다. 그들 또한 양천리와 마찬가지로 허공답보의 경공을 구사하는 고수들이었다.
허공을 가로질러 두 세력이 치열하게 싸우는 전장 중간에 위치한 그들은 양천리를 기준으로 둥글게 원을 그렸다. 이어 그들의 입에서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환문 문도들이여 승리가 눈앞에 있다, 힘을 내라!”
전방을 쳐다보며 임주극은 광포하게 고함을 내질렀다. 얼마나 고함을 내질렀는지 목이 쉬어 버렸다. 적이 들이닥친 것은 어스름한 새벽녘이었다.
감시병만을 내보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순간 쳐들어온 것이다. 적이 누구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중에야 적이 광풍성 무인들을 쫓다가 이곳으로 들어온 무극계 무인들이란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아군을 제외하면 전부가 적이고, 무조건 승리해야 하는 곳이 장강이기 때문이었다.
무극계 무인들 또한 상당한 강자였다. 기습을 당해 처음에는 주춤했지만 오백 구의 반시를 앞세운 환문 무인들의 활약으로 점차 승기가 보였고, 태양이 떠오르면서 적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쳐라!”
“임 문주!”
부하들을 독려하는 임죽극의 귓전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에 피칠을 하고 다가온 이는 상문 문주인 유명귀수(幽冥鬼手) 조익(遭翊)이었다.
“왜 그러시오?”
반시를 조종하고 있어야 할 조익이 다가오자 임주극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저것 때문이오.”
조익은 허공을 가리켰다.
“저건?”
조익을 따라 시선을 돌린 임주극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원을 그리듯 둥글게 포진하고 있는 십여 명의 무인들. 허공에 가부좌를 하고 있는 그들은 지금껏 싸워왔던 자들이 아니었다.
“허억!”
허공을 올려다보던 조익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열한 명의 몸에서 흘러나온 푸르스름한 기운 때문이었다. 익숙한 기운, 불사삼강의 한 종류인 반시를 조종할 때 자신들이 뿜어내는 기운과 동일했다. 아니 그보다 훨씬 강대한 기운임에 분명했다.
“위험하오! 부하들을.......”
다급한 얼굴로 조익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허공에서 내려오는 푸른 기운이 말보다 더 빨랐다.
캬아악!
사방에서 반시들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반시들이 발광을 하는 그 순간, 계곡 입구로부터 무수한 기척이 감지되었다.
“빌어먹을.......! 반시를 조종해 보겠소.”
흠칫 표정을 굳힌 조익은 조금 전 왔던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떻게든 반시들의 동요를 막아야 했다. 간밤의 전투로 남아 있는 반시의 수는 삼백 구에 불과했지만 상문의 최고 전력이었다.
반시가 없으면 상문도 없고, 덩달아 상문 문주이 자신도 없어진다.
사제이자 문주였던 구양중을 쫓아내고 차지한 자리가 아니던가.
캬아악! 캬악!
“헉!”
계곡 입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조익은 나직한 신음을 뱉어냈다. 혈영고루강시의 울부짖음이었다. 조익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구당협으로 갔던 고악상과 연락이 두절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허공에 머물고 있는 자가 원흉인 것이다.
무슨 방법을 동원했는지 몰라도 그가 혈영고루강시를 조종하여 고악상과 아문 무인들을 몰살시켰음에 분명했다.
“이런!”
화들짝 놀란 조익은 재빨리 몸을 굴렸다. 어느 결에 다가왔는지 반시 한 마리가 뒤에서 기습을 해 온 것이었다.
“제길!”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시는 하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주인을 공격하는 치명적인 무기로 돌변했다.
몸을 일으킨 조익은 절벽을 쳐다보았다.
온통 강시로 들끓는 이곳에서 살아남는 길은 싸움이 아니라 도주라는 판단을 내렸다.
주변을 살피던 조익은 절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절벽 아래 뚫린 자그마한 동굴이 그의 목적지였다.
동굴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는 조익의 귓전에 으스스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의 종들아! 너희들의 주인인 요왕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를 멸하라. 그들의 피로 몸을 씻고, 그들의 피로 목을 축여라!”
“설마 요왕이 탄생했단 말인가?”
몸을 날리던 조익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놈은 분명 요왕이라고 하였다. 강시의 지존이라는 요왕의 존재는 한낱 전설이라 여겼다. 그런데 본인의 입으로 요왕이라 말하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빌어먹을! 무조건 숨어 있어야겠군.”
전장에서 빠져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조익은 뒤편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곳은 더 이상 전쟁터가 아니었다. 도살의 현장이었다. 강기를 터득한 자들이 강시들의 목을 잘라내고는 있지만, 강시의 수는 너무 많았다. 강시 몇 구의 목을 잘라낸 다음 그들은 이내 갈가리 찢겨 흩뿌려지고 있다.
딸랑딸랑!
“세상에! 불사삼요까지.”
방울소리를 들은 조익은 겁먹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불사삼요와 더불어 나타난 강시는 불사삼살로 불리는 강시들이었다.
오백 년 전 불사삼강만으로 강호를 유린했던 마교였다. 그런데 불사삼괴라 불리는 괴물들이 전부 나타난 것이다.
계곡 끝에 다다르자 재빨리 흔적을 지운 조익은 동굴 안으로 스며들었다.
“빌어먹을, 인간끼리의 전쟁이 아니라 인간 대 강시의 전쟁이 돼버렸어.”
고개를 내밀어 전장을 쳐다보며 조익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인간과 강시의 전쟁. 계곡 안쪽의 광경을 단적으로 표현하면 그랬다.
어쩔 수 없는 강력한 존재는 서로 적이었던 자들을 하나로 묶었다. 밤새도록 서로 싸웠던 사령계과 무극계 무인들은 힘을 합쳐 강시에 대항하고 있었다. 강시들 또한 상당수가 쓰러지고 있지만 무인들이 쓰러지는 것에 비하면 많다고 할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목이 잘리기 전에는 죽지 않는 강시들이 아닌가.
줄어드는 무인들의 수가 확연히 보였다.
어느 순간, 정적이 찾아 들었다. 밤부터 시작하여 한낮까지 계속되었던 전쟁이 끝난 것이다. 사령계와 무극계의 싸움이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했다.
나중에 들이닥친 통천연맹이 승자가 된 것이다.
“피해는?”
“삼백을 잃고 백을 얻었습니다.”
양천리의 물음에 제군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백 구의 손실인가?”
양천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궤멸 직전에 있는 자들을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백 구를 잃었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정작 없애고자 했던 광풍성 무인들은 코빼기도 보지 못한 채.
“서능협에서는 나타나지 않을 수가 없겠지. 그때까지는 살아남아라, 귀광두!”
진득한 살기를 쏟아내며 양천리는 계곡 입구를 향해 걸었다.
“서능협으로 간다!”
입구에 다다른 양천리는 감정의 찌꺼기를 뱉어 내듯 광포한 고함을 내질렀다.
잠시 후, 전쟁으로 몸살을 앓았던 계곡에 정적이 찾아왔다.
조용한 정적을 깨트린 것은 절벽 아래 동굴 속에서 흘러나온 조익의 목소리였다.
“기절하겠군. 양천리가 요왕이었다니.”
동굴을 나선 조익은 놀란 얼굴로 입구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진파룡 양천리, 신진십룡의 일인이었던 그가 요왕이 되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마금성을 설득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조익은 서능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흑검 마금성, 그가 데리고 있는 묵철마강시 오백 구 때문이었다. 묵철마강시를 최고 전력이라 여기고 있을 터인데, 요왕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벌써부터 난감하기만 했다.
“빌어먹을 전쟁.”
계곡 입구를 향해 걷던 조익은 주변을 둘러보다 몸을 날렸다.
“구 호위!”
“부르셨습니까, 주모.”
양쪽 절벽을 쳐다보며 상녀에 잠겨 있던 구양중은 주하연의 부름에 몸을 돌렸다.
“요왕이 뭔지 알아?”
주하연은 다짜고짜 물었다. 호심무극경 상에 나와 있는 제문을 연구하다가 몇 구절에 언급된 이름이었다.
대부분의 제문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심무극경에 있는 제문은 해독이 불가능했다. 아마 세월이 흘러 잊혀진 글자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만 요왕이란 글자와 더불어 몇 자를 해독해 낼 수 있었는데 강시라는 글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가 구양중을 찾은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어? 작은 주모가 요왕을 어떻게 아십니까?”
대답한 사람은 구양중이 아닌 그의 곁에 있던 광치였다.
“응! 이걸 연구하다가 알아낸 사실인데.......”
주하연은 두 사람의 눈앞으로 호심무극경 뒷면을 보여 주었다.
“잠깐만 줘 보십시오.”
이상한 문양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광치가 덮치듯 호심무극경을 빼앗아갔다.
“세상에 제마경이 실존할 줄이야.”
광치는 홀린 듯 중얼거렸다. 동경 뒷면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은 영환문 문주라면 반드시 익혀야 하는 제문이 분명했다. 까마득한 시절 사부로부터 매를 맞아가며 배운 글이 제문이었다.
그 당시 사부는 제문이 적힌 동경은 이 세상에 하나만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것을 일컬어 제마경이라 하였고, 칠성태극검과 함께 혼이 떠난 강시를 해강시켜 주는 유일한 물건이라 했다.
“대답 안 해 줄 거야?”
호시심도 잠시, 주하연은 빽 소리를 질렀다.
“참! 요왕에 대해 물었죠. 그놈을 가리켜 강시의 지존이라 부릅니다.”
“강시의 지존?”
“네. 쉽게 말하면 강시란 강시는 전부 요왕의 지배를 받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 관우 할아버지도?”
주하연은 구양미후 근처를 떠나지 않는 변황사신을 가리켰다.
“활시(活屍)라고 해도 마찬가질 겁니다.”
광치는 자신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 사부님이 해 주신 말씀이었고, 워낙 뜬구름 잡는 소리라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더구나 요왕과 상극인 물건이, 수천 년 전에 사라진 제마경이라 하였으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제마경은 요왕이 제압한 강시들을 해강시키는 유일한 물건입니다.”
“그거 재밌겠네. 그럼 통천연맹이나 사령계가 보유한 불사삼괴를 이걸로 없앨 수 있다는 말이네?”
말과는 달리 주하연의 시선은 변황사신에게 향해 있었다. 그들을 떠나보내는 게 아쉬울 테지만 언제까지 강시로 살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전쟁이 끝나면 그들도 놓아 줘야 할 것이다.
“우선은 제마경 뒷면에 적신 무공을 익혀야지요.”
“이게 무공이었어?”
“기억을 더듬어 봐야 하겠지만 무공이 맞을 겁니다. 동경으로 강시를 때려잡기는 너무 약하지 않습니까.”
“가르쳐 줘.”
“배워서 뭐하시려고? 불사삼강이라 해 봐야 대장이나 미친 노인네들에게는 한주먹거리도......”
옆구리를 푹 찌르는 손길에 광치는 말을 끊었다. 그리고 주하연의 시선이 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천괄을 비롯한 변황사신이 서 있었다.
“알겠습니다, 작은 주모. 최대한 빠르게 해독하겠습니다.”
변황사신을 해강시켜 주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 챈 광치는 고개를 숙였다. 목을 자르거나 칠성태극검으로 이마를 찌르는 방법은 적이라 판단되는 강시를 해강시킬 때 쓰는 방법이다.
가까웠던 지인(知人)에게 차마 시도할 방법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변황사신은 그녀가 할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던 사람들이다.
호심무극경을 손에 쥔 광치는 자신의 선실로 향했다.
툭! 툭툭!
“비가 오네?”
손바닥을 펼쳐 비를 받으며 주하연은 중얼거렸다. 금세 몰려온 먹구름이 비를 뿌리는 모양이었다. 황톳물로 누런 수면에 수많은 동심원이 생겨나고 있었다.
주하연이 넋 없이 쳐다보는 순간 절벽을 타고 일단의 무리가 내려왔다.
“오네?”
고개를 든 주하연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부하들을 철수시키기 위해 떠났던 소살우 일행이었다.
“조용히 오라고 했거늘.”
소살우 일행 뒤편으로 시선을 주었던 주하연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무수한 점이 그들을 뒤따르고 있었던 탓이었다.
“형수, 저놈들이 날 죽이려고 쫓아옵니다. 빨리 도망칩시다!”
나무와 나무를 건너뛰며 소살우는 고함을 내질렀다. 중원호를 향해 날아오는 사람은 빈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진악, 모사, 석두와 남궁미령, 그리고 파면신개와 팽월 등 각(閣)의 수뇌들이 뒤따르는 중이었다.
“전투 준비하라!”
좌우를 둘러보며 주하연은 고함을 내질렀다.
느닷없이 울려 퍼진 주하연의 목소리에 중원호 무인들의 움직임이 기민해졌다. 비를 피해 한편으로 치워 두었던 활을 챙겨들고 측면을 향해 바쁘게 움직였다.
휙! 휙휙휙!
십여 명의 무인들이 중원호 갑판으로 날아 내렸다.
“누구냐?”
밖으로 뛰쳐나온 백산은 소살우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거 뭐요? 책을 들고 나오면 지금껏 잤다는 사실이 숨겨질 줄 알았소? 제발 나를 봐서라도 공부 좀 열심히 하시오. 어찌 됐든 명색이 애비 아니오.”
소살우는 백산의 손에 들린 책을 가리키며 비아냥거렸다.
“무슨 소리야 임마. 공부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해야 하는 거다. 공부하겠다고 시간 정하고, 장소 정하는 놈은 평생 가도 공부 못한다고 했다. 순전히 공부를 하기 위해 책을 들고 나왔다고.”
주하연의 눈치를 살핀 백산은 짐짓 거만을 떨었다.
사실 소살우의 말처럼 공부하다 나온 게 아니었다.
바로 옆에서 감시하던 주하연이 나가자마자 책을 벤 채 자이 들고 말았다. 그러다 소살우의 외침 소리에 잠을 깼던 것이다.
재빨리 눈곱을 뗀 다음 책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지금껏 공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서는 책이라도 있어야 되겠다 싶었다.
“이 소학에 보면 말이다........”
“귀광두, 네 이놈!”
소살우 앞에서 재차 유식을 뽐내려는 순간 저 멀리서 살기 가득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참! 저 자식들 누군지 물어보지 않았냐?”
소살우는 심드렁하니 대답하며 갑판 위로 풀썩 주저앉았다.
“사막에서 모래 처먹던 놈들이라오.”
“저놈들도 제법 한 가락 하는 모양인데?”
백산은 무극계 무인들을 가리켰다. 이십여 장씩을 죽죽 내려오는 그들의 모습은 고강한 무공을 지녔음을 짐작케 했다. 상당히 가파른 절벽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살수야, 활 가져와라!”
“네, 주공.”
백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몽은 선실로 몸을 날려 맥궁을 들고 나왔다.
“사냥철이다, 준비해라!”
백산은 맥궁에 시위를 걸며 고함을 내질렀다.
“살수야, 전통을 들고 따라와라.”
세 대의 화살을 시위에 건 백산은 갑판을 박차고 전면으로 몸을 날렸다. 일순간 그의 신형은 허공을 뚫고 일행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헐! 성질도 급하긴.”
백산의 의도를 알아차린 소살우는 픽 웃었다. 다가오는 적 근처까지 접근하여 물러서면서 활을 쏠 심산인 것이다.
“팔만 있었으면 나도 거들 수 있는데......”
펄럭이는 빈 소매늘 쳐다보며 소살우는 입맛을 다셨다.
“그럼 나는 가도 되겠네? 맨발, 활 줘!”
백산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모사가 광치에게 손을 내밀었다.
“끄응! 근데 활은 쏠 줄 아십니까. 아실지 모르지만 활은 아무나 쏘는 게.......”
“맨발, 한동안 못 봤더니 많이 컸구나.”
“아닙니다, 형님!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재빨리 부동자세를 취한 광치는 주변을 휩쓸 듯 몸을 날렸다. 그리고 활과 전통을 가져와서는 모사와 석두 그리고 사진악에게 건넸다.
“임마, 형님이 사냥꾼인데 동생들이 활을 배우지 못했을까봐 걱정 하냐? 잘 지켜 봐!”
흰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은 모사는 갑판을 슬쩍 찼다.
그리고, 삼 장 높이에 머물던 그의 신형이 백산을 뒤쫓아 화살처럼 날았다.
“맨발, 나에겐 활을 왜 준 거냐?”
광치가 내민 활을 받아든 석두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런, 니미럴.’
광치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광살검을 팔 대신 사용하고 있어 그의 오른팔이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활을 건네 준 것이었다.
고민된다는 듯 잠시 망설이던 광치는 느닷없이 고함을 내질렀다.
“두 분이 합치면 팔이 두 개로 늘어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져온 겁니다요, 형님.”
“그래? 좋은 의도로 가져온 게 맞는 모양이구나. 그러 우리도 가 볼까?”
활을 든 석두는 소살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재미있겠네, 갑시다.”
허공섭물로 전통을 끌어당긴 소살우는 조금 전 모사처럼 갑판을 차고 솟구쳐 올랐다.
“괴물들!”
시야에서 멀어지는 천붕십일천마 일행을 보며 광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늘 느끼는 거지만 그들은 인간이 아닌 새였다.
허공답보와 능공허도, 수많은 경공의 상식이 그들 앞에서면 무용지물로 변한다. 그들은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미친 바람, 광풍이었다.
비단 그러한 기분은 광치만의 느낌이 아니었다.
신녀봉에서 소살우 일행을 쫓아 아래로 향하던 무극계 무인들 또한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선두에서 몸을 날리던 순우혁로는 놀란 얼굴로 전면을 쳐다보았다.
허공을 밟고 날아오는 자들, 아들과 부모님을 살해한 자들이 분명했다. 지금 몸을 날리고 있는 무극계 무인들은 거의 천여 명에 달한다. 그런 무극계 무인들을 향해, 다가오는 자들은 다섯 명이 전부다.
미친놈들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비릿한 조소를 물고 쳐다보는 그의 귓전에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부터 하후장설 그 개자식의 죄를 물을 것이다! 그놈과 상관없는 자들은 몸을 돌려 사막으로 돌아가라! 그러지 않으면 다른 놈들처럼 전부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다!”
“닥쳐라, 이놈! 네놈들에게 죽어 간 형제가 얼마인지 아느냐. 우린 그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중원으로 왔다. 네놈들의 뼈를 갈아 버리기 전에는 돌아갈 곳이 없단 말이다!”
순우혁로는 더욱 광포하게 고함을 내질렀다.
“그런가! 그럼 전부....... 죽여주겠다.”
낮게 소리친 백산은 맥궁의 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나무 위를 건너뛰며 날아오는 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래는 수백 명의 무인들이 뒤따르고 있다.
아무렇게나 쏘기만 하면 적은 죽어 갈 것이다.
“한 놈도 남김없이 전부 죽여준단 말이다!”
붉은 광채가 일렁이는 화살 세 대가 백산의 손을 떠났다.
“그따위 화살로?”
순우혁로는 나아가던 신형을 멈추지 않았다. 육안으로 좇기 힘들 정도의 빠르기였지만 방향을 알고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순식간에 내공을 일주천시켜 전면을 향해 양손을 강하게 쳐냈다.
스스스!
용황사신무의 위력은 대단했다. 엄청난 기세를 풍기던 화살이었지만 순우혁로의 일수에 가루로 흩어져 버린 것이었다.
“얼마든지 쏘아....... 허억!”
비릿한 조소를 흘리던 순우혁로는 전력을 다해 허공을 박찼다. 화살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가공할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크윽!”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순우혁로는 억눌린 비명을 내질렀다.
“커억!”
“크윽!”
연이어 네 마디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설마 무영시(無影矢)를?”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허벅지를 보며 순우혁로는 낮게 부르짖었다. 붉은 혈기를 쏟아내던 화살은 허초였다. 실제 놈의 공격은 화살 뒤에 날아온 무영시였다.
화살을 막아 내고 마음을 놓는 순간 무영시가 덮친 것이다.
흘끔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뒤따르던 부하 네 명이 지면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강기를 넘어선 부하가 무영시를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이런 실수를 했네. 화살만 쏘려고 했는데........”
백산은 슬쩍 미소를 물었다.
“죽일 놈!”
진득한 실소를 문 순우혁로는 허공을 차며 백산을 향해 날아갔다. 놈은 계속해서 물러나며 활을 쏠 작정일 터였다. 누군가 나서서 막지 않으면 놈들의 배에 도달하기도 전에 고수들은 대부분 당할 게 분명했다.
“너 같은 놈을 가리켜 바보라 부르는 거야. 여긴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뭐해 새끼들아. 이 좋은 기회를 놓칠 거야!”
시위를 먹이기 위해 낑낑대고 있는 석두와 소살우를 보며 백산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조금만 기다려 보쇼. 처음 손발을 맞추는 건데. 그게 쉽게 되겠소.”
두 사람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왼팔이 남아 있는 석두가 화살을 잡고 오른팔이 남아 있는 소살우가 시위를 당기는데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한 몸처럼 붙은 두 사람은 간신히 화살 한 대를 걸어 당겼다.
“하지만 말이오, 걸기만 하면 형님보다 더 강하게 쏠 수 있단 말이오. 타핫!”
짓씹듯 소리를 지른 소살우는 쩌렁쩌렁한 고함을 내지르며 시위를 놓았다. 순간 백산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소살우의 손을 떠난 것은 화살이 아니었다. 수많은 붉은 덩어리들이 유성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미친놈들, 그렇다고 내공을 합치냐?”
어이없다는 듯 백산은 웃고 말았다. 심검의 경지에 올라 반노환동까지 이룬 두 사람이 내공을 하나로 합쳐 버린 거였다.
천붕십일천마 두 사람의 내공을 합친 결과는 엄청났다.
콰콰쾅! 콰앙!
“크아악!”
“아악!”
바위와 나무와 시체가 한꺼번에 솟구쳐 올랐다. 붉은 광채가 떨어진 지점은 벼락을 맞은 듯, 폐허로 변해 버렸다.
“이 무공을 유성우(流星雨)라 부를 거요.”
재차 시위를 먹이며 소살우는 환하게 웃었다.
“하여간 알아서 해 임마. 너는 또 왜?”
고개를 돌린 백산은 바로 겨에 다가와 있는 모사를 발견하곤 소리를 질렀다. 그 또한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다른 게 아니고, 저 잡놈 말이오. 방금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말이오.”
모사는 턱으로 순우혁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잡놈이 왜?”
백산은 다시 물었다.
“우리 둘이 합공해서 끝내 버리자고.”
“그러니까 천하제일인인 이 백산과 천하제일이인 독마 전영이 저 잡놈을 상대로 합공을 하자고?”
“그렇다니까? 저놈은 우리보다 부하가 더 많지 않소. 병력의 수로 보면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이란 것 아뇨.”
“거 좋은 방법이다. 힘이 있는데 아낄 필요가 뭐 있냐. 오랜만에 손이나 한번 맞춰 보자.”
무릎을 친 백산은 허공에 머물고 있는 순우혁로를 향해 환한 미소를 물었다.
“너, 이제 죽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입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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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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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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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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